글 - 칼럼/단상2018. 7. 6. 12:05

 

 

관련 유튜브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z4CNmiLF-YU&feature=youtu.be

 

 

팔불출(八不出)의 변(辯)-학자로 자란 아들을 보며

 

 

누군가는 말했다. ‘저 잘났다 자랑하는 놈, 마누라 자랑하는 놈, 자식 자랑하는 놈, 선조와 부모 자랑하는 놈, 형제 자랑하는 놈, 후배 자랑하는 놈, 돈 자랑하는 놈, 고향 자랑하는 놈을 팔불출(八不出)이라 부른다고. ‘불출이란 사전적으로 못난이란 뜻이지만, 어감(語感) 상으론 엄청 못난 놈쯤 되는 말이다. 체면 중시 사회에서 수오지심(羞惡之心: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뼛속 깊이 간직하고 이 나이까지 살아 온 나다. 그런데 지금 팔불출 가운데 세 번째 불출이 되어 보고자 한다.

 

근래 한두 가지 일을 경험하면서 내 알량한 자존심의 메커니즘이 더 이상 작동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내 생각에 자존심이란 살아 갈 날들이 살아 온 날들보다 많을 때생겨나기 쉬운, 특이한 심리다. 이제 교수로서 내 인생의 한낮은 기울었고, 내 뒤에 끝도 없이 늘어선 후생(後生)들은 빨리 비켜서라고 재촉한다. 가당치 않은 자존심으로 그들에게 군림하려 한 과거를 버리고, 그들의 장점을 인정하면서 슬그머니 앞자리를 양보하는 것. 그 길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출구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따라서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아들의 장점을 인정하는 것도 즐거움일 뿐 자존심 차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제 내 협소한 울타리를 걷어내려는 것은 꽤 오래 전부터 견지해 온 학자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는 중이고, 어쩌면 그런 도전들의 정당성이 역사적 필연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조경현(Kyunghyun Cho)33살 된 내 큰 아들이다. 이번 방학에 그가 보여준 놀라운 일을 계기로 망설임 없이 이 공간에서 그를 언급하게 되었다. 그는 현재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다. 20022, 인문계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카이스트(KAIST)로 진학하는 그를 보내며 쓴 글(공부하러 집 떠나는 아들을 보며, <<어느 인문학도의 세상 읽기>>, 인터북스, 2009)의 마무리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 소망을 담은 바 있다.

 

자식이 어찌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으랴? 그리고, 알아주기를 바란들 무엇 하랴? 그러나, 세상의 아들들이 이것만은 알아야 할 것이다. 세상의 부모들 대부분은 공부하러 집 떠나는 아들들에게 물질로 호강시켜 줄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험한 세파 속에서도 자신의 두 발로 서서 당당하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 그러나 이왕이면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민족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부모에게 자부심을 안겨 주는 것. 이 시대의 부모로서 그 이상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247~248)

 

이것이 16년 전 집을 떠나던 그에게 아버지의 입장에서 표명한 소망이었고, 그 점은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카이스트를 나온 그는 핀란드의 알토대학(Aalto University: 201011일에 설립된 핀란드의 대학교. 2010년부터 정부 주도 하에 핀란드의 산업경제문화를 선도하는 기존의 세 대학-헬싱키 기술 대학교헬싱키 경제대학교헬싱키 미술 디자인 대학교-을 합병하여 출범했음)에서 석박사학위를 받고, 몬트리올 대학교에서 박사 후 과정을 거친 뒤, 2016년 뉴욕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처음에 그가 영국이나 스웨덴 등의 전통 명문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으면서도 핀란드의 대학교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지만, 결국 묻지 않았다. 그의 고집을 알고 있었고, 그를 믿어야 한다는 나의 자기억제(self-control) 소신' 때문이기도 했다. 그 후 우연한 기회에 핀란드의 그 대학에서 유능한 교수의 지도로 인공지능분야를 공부한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인공지능이란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고, 그 때만 해도 내겐 뜬구름 잡는 듯한그 분야나 공부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카이스트에서는 물론 핀란드로 간 뒤에도 그는 부모에게 돈 한 푼 요구하지 않았다. 매우 궁금했지만, 그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핀란드는 학비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당시만 해도 우수한 핀란드 교육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파견되던 우리나라 시찰단들을 위해 그가 틈틈이 영어 통역 알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었다박사과정에 진학한 뒤에는 큰 규모의 핀란드 정부 장학금을 받았는데, 학비와 생활비는 물론 해외 컨퍼런스 참여에 따르는 모든 비용을 해결할 만큼 풍족한 것이었다. 그 장학금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비로소 나는 핀란드라는 나라를 존경하게 되었다. 외국인을 무료로 교육시켜주고 장학금까지 지급하면서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는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가능성 있는 젊은 인재라면 국적을 불문하고 국가가 나서서 양성해야 한다는 책임감이야말로 국가 이기주의가 그악하달 정도로 팽배한 지금의 상황에서 매우 숭고한 일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인구 550만의 작지만 강한 나라 핀란드를 존경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런 과정에서도 나는 그가 컴퓨터 계통을 전공한다는 사실 외에 구체적인 것을 알고 있지 못했다. 문외한이기도 하려니와 내 전공에 묻혀 살아 온 나로서는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야 어렴풋이 그가 당시에 갖고 있던 학문적 비전(vision)을 짐작하게 되었다. 석사논문(Improved Learning Algorithms for Restricted Boltzmann Machines/2011)과 박사논문(Foundations and Advances in Deep Learning/2014)에 그가 꿰뚫어 본 미래가 분명 담겨 있지 않은가! Dr. Juha Karhunen, Dr. Tapani Raiko, Dr. Alexander Ilin 등 유수 학자들의 지도 아래 그는 이미 8년 전부터 10년 이내에 핫이슈로 부상될 딥 러닝(deep learning)의 중요성을 알고 차곡차곡 준비해 왔음을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학위를 받고 핀란드를 떠난 그는 캐나다의 몬트리올 대학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자기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 요슈아 벤지오(Dr. Yoshua Bengio) 교수를 찾아간 것이다. 그곳으로 간 지 1년쯤 지났을까. 채용 공고에 응모한 미국과 영국, 스위스, 스코틀랜드 등의 유수 대학들에서 교수직 제의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저울질한 것은 미국의 뉴욕대학교와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였는데, 내가 보기에도 두 곳의 장단점은 분명했다. 오래도록 대학물을 먹은 나로서는 전통적인 명성과 함께 정년보장 직으로 채용되는 옥스퍼드가 나아 보였으나, 결국 그는 뉴욕대학을 선택했다. 그 대학에 딥 러닝 분야의 석학 얀 르쿤(Dr. Yann LeCun) 교수가 있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세계의 중심인 뉴욕, 경쟁과 자기혁신의 용광로인 미국 대학사회에서 맘껏 연구 활동을 펼치고자 한 그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잘은 모르지만, 캐나다로 건너 간 뒤부터 그의 학문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랩(lab)에 몰려드는 세계의 수재들을 지도하며 다양한 테마의 연구에 몰두하고, 한 주에 한 번씩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을 이끌어주며, 연간 십여 차례씩 국내외 컨퍼런스와 연구교류 여행을 해야 하는 간단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의 주된 관심사는 컴퓨터의 딥 러닝을 이용한 자연어 처리(natural language processing with deep learning)’인 듯하다. 그가 고안한 것으로 알고 있는 NMT(Neural Machine Translation/신경망 기계번역)는 이미 인공지능 컴퓨터 언어학습 분야의 핫 이슈가 되어 있고, 현재 그는 서로 다른 언어들 사이에서 통번역을 자유자재로 처리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메커니즘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

 

1년에 단 한 번, 체류기간은 단 1주일. 그는 여름 방학 초에만 부모가 있는 서울로 온다. 그 짧은 체류기간도 이곳저곳에서 요청한 강연 스케줄로 빡빡하다올해 강연들 중 핵심은 네이버(NAVER)의 커넥트(Connect) 재단에서 있었다. 등록자 200명을 위해 하루 네 시간 씩 이틀 동안 여덟 시간을 강의하고 온 그는 늘 그러하듯 담담했다. 강연료는 얼마나 받았느냐고 농담조로 묻자 천만 원이오. 그런데 모두 기부했어요.”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강연료 액수에 우선 놀랐고, 기부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는 그의 무심함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래도 태연한 척 어디에 기부했니?”라고 물으니, “여성 과학자들을 위해 소셜 벤처 걸스로봇(Girlsrobot)에 기부했어요.” 한다. “잘 했다고 대답은 하면서도 궁금증은 커졌다. 그의 전공 지식이 대체 무엇이관대 8시간 강의에 천만 원씩이나 받는 것이며, 그 돈을 한꺼번에 기부하는 배포나 철학은 또 뭐란 말인가. 궁금했으나,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아버지이지만, 가난한 나라의 국문학 교수가 그 내용을 자꾸만 캐묻는 것도 후학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었다. 이삼일 후 그가 떠나고 나서 우연히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동아일보의 놀라운 기사 한 건을 접하게 되었다.

 

donga.com

 

과학인 키워달라” 30대 과학자 통 큰 기부

 

조경현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

국내 강연료 1000만원 전액 쾌척

30세에 신경망 기계번역논문으로 딥러닝 분야 세계적 연구자 반열에

 

 

딥러닝 분야에서 학계의 주목을 받는 젊은 한국인 과학자가 국내 대중을 대상으로 연 강연의 강연료 전액을 여성 과학 기술인을 지원하는 국내 소셜 벤처에 기부해 화제다. 주인공은 조경현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33·사진). 그는 공동연구를 위해 방한한 이달 11, 12일 커넥트재단 초청으로 경기 성남시 네이버 본사 강당에서 딥 러닝을 이용한 자연어 처리강연을 했다. 8시간 동안 2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대형 강연이었다.

 

해외 석학을 초청한 자리인 만큼 강연료가 1000만 원에 이르렀지만, 조 교수는 예비 여성 과학기술인과 대학원생을 지원하는 데 써 달라며 전액을 소셜벤처인 걸스로봇에 쾌척했다.

 

조 교수는 평소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이공계 분야 여성의 활약과 진출이 아직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뉴욕대 학부에 개설한 머신러닝 입문과목은 정원이 70명이지만 이 중 여학생 수는 한 손에 꼽을 만큼 적다. 한국은 미국보다 상황이 더 열악할 것이라는 생각에 기부를 결심했다. 그는 미국에서는 아프리카의 과학, 공학 발전을 위해 교수들이 연중 몇 주씩 현지를 찾아가 강의를 하는 등 지역별, 인종별 격차를 줄이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미국 동료 과학자들의 이런 자세에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현재 구글 번역과 네이버 파파고 등이 채용 중인 신경망 기계 번역기술의 이론적 토대가 된 기념비적인 논문을 2014년 공동 저술해 학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정렬 및 번역 동시 학습에 의한 신경망 기계번역이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20일 현재까지 3674회 인용된 딥 러닝 분야의 베스트셀러로 꼽힌다.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80621/90681370/1#csidxc09a80b7f83fa0ea2f4c765d86099f0

 

 

 

, 그랬구나! 세상은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데, 나만 그의 성장을 모른 채 늘 어린 아이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1997년 첫 연구년을 받아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할 때, 초등학교 6학년인 그와 4학년인 둘째 아이에게 초급 영어 회화를 가르치며 초조해 하던 나를 떠올렸다. 이 어린 것들을 데리고 낯설고 물 선 미국 땅에서 무사히 1년을 지내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내게 주어진 천금 같은 기회를 살려 이 철부지들을 낯선 미국 땅과 문화에 잘 적응시킬 수 있겠는가. 가족들을 끌고 물을 건너는 가장에겐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미국에 건너가자마자 영어도 미국 생활 자체도 그들에게 대뜸 추월당한 나였다.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들을 앞서 갔지만, 바로 어제까지 그들은 내게 코흘리개 아이들일 뿐이었다. 올해 초 그는 미국의 블룸버그 통신이 선정한 ‘201850개 분야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에 들었다. 사실 놀라워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뭘 갖고 그러지?’라고 심드렁하게 생각한 나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새 그는 이미 남들이 인정하는 세계적인 학자가 되어 있었다. 논문의 인용지수나 강연파일들의 태그 건수가 내 상식을 초월하고, 미국 안에서는 물론 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도 그를 찾는 곳들이 많아 일일이 응대할 수 없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특히 인공지능이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 오늘날 그는 순풍을 탄 독수리처럼 하늘로 솟고 있다. 그러면서도 늘 겸손한 자세로 구부정하게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가 대견하다. 좀 잘 나간다고 까불다가 추락하는 세상 천재들의 말로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밤낮으로 노력하는 그를 보며 안심을 한다.

 

인천공항 출국장. 그를 탑승구로 들여보내고 나는 아내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지금 보니 저 녀석은 대양을 헤엄치는 고래이고, 나는 고향 마을 실개천의 붕어나 미꾸라지일세. 고래가 실개천으로 돌아올 이유도 없고, 붕어나 미꾸라지가 대양으로 나갈 이유도 없겠지. 나는 개천 속 붕어와 미꾸라지의 삶을 녀석에게 보여주며 항상 교만하지 않고 초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할 셈이네!”

 

제주도의 호텔 로비에서

제주도 목장에서 오른쪽부터  조경현, 백규, 임미숙, 김미언, 조원정, 조영빈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4. 11. 17:31

 


<땀뻬레 시가지>


<땀뻬레 시가지>


<땀뻬레 상설시장>


<땀뻬레 상설시장의 육류가게>


<땀뻬레 상설시장의 빵가게>


<핀레이슨 산업단지>


<핀레이슨 산업단지 주차장 표시 및 구역도>


<핀레이슨이 지은 교회>


<핀레이슨 산업단지 내 신발가게>


<땀뻬레 핀레이슨 저택>


<하메 성 입구>


<하메 성에서 조경현과 백규>


<하메 성 안의 우물> 


<하메성 안의 채플>



<하메성 안에서, 임미숙과 조경현> 


<하메 성에서 만난 악사> 



<다시 헬싱키로>


<핀란드의 국민적 영웅 칼 구스타프 만네르하임 장군 상>


<핀란드의 루터교회>

 

 

산업화, 외세와의 투쟁, 그리고 미래의 꿈

 

 

뽀리(Pori)의 아름다운 추억을 마음 가득 충전한 뒤 다시 향한 곳은 헬싱키. 이번 일정의 막바지에 가까워진 것이다. 바쁜 일정에서 10여일을 덜어 다른 나라의 핵심 지역들을 순력(巡歷)하는 건, 우리 나름의 ‘장정(長征)’일 수 있었다. 아랫 날씨는 쌀랑했으나, 위에서는 태양이 빛났다. 로바니에미 인근과 달리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에 차들이 제법 많았다. 아직도 몸서리쳐지는 추위 속에서 허우적대는 북쪽과 달리 이곳 길가의 자작나무들에는 녹색이 돌기 시작했다. 국토를 따스하게 감싸고 있는 나무들이 봄볕의 세례 아래 몸을 풀기 시작한 것이다.

 

***

 

규모로 보아 핀란드 제2의 도시 땀뻬레(Tampere)에 들렀다. 네시 호수와 퓌헤 호수를 잇는 작은 물길이 지나는 항구도시. 방직공장, 피혁공장, 제재소, 각종 기계공장, 아이티 업체 등 내용은 공업 중심의 현대 도시였으나, 모든 공장들은 자연환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화석연료 대신 풍부한 수력을 이용하기 때문일까. 대기오염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 곳이었다. 18만에 육박하는 인구도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사는 관계로 도심에서 약간의 인파를 목격할 수 있을 뿐 전반적으로 한산한 느낌을 받는 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였다.

 

맨 처음 찾은 곳은 이 도시의 상설시장. 각종 먹거리 중심의 살아 있는 생활문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빵과 생선, 각종 패션용품 등 모든 것들이 공존하며 그들의 풍요로운 현재를 증거하는, 생생한 공간이었다. 우리가 어딜 가나 들르는 ‘과거 혹은 죽은 자들의 박물관’ 아닌 보통 사람들이 등장하여 보여주는 ‘지금 혹은 산 자들의 박물관’이었다. 그 다음으로 찾은 곳이 도심의 큰 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섬유재벌 핀레이슨(Finlayson)의 산업단지. 그는 가고 없었지만, 그가 살아가던 저택도 신을 만나던 교회도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고, 그의 꿈을 구현하는 각종 업무 공간들이 이 시대 산업화의 인력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곳이었다. 그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매장에서는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핀레이슨 디자인의 각종 생활용품들이 팔리고 있었다. ‘디자인 천국’으로 자처하는 핀란드 인들의 자부심, 그 근원을 알려주는 곳이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핀레이슨 산업단지였고, 그곳을 품고 있는 공간이 땀뻬레였다.

 

***

 

땀뻬레로부터 40여분을 달린 뒤, 굳건한 핀란드 국방의지의 상징적 표상 ‘하메 성(Häme Castle)’을 만났다. 지배세력인 스웨덴에 의해 13세기 후반쯤 지어진 중세의 성으로, 최근까지 보수(補修)를 거듭해 온 역사적 공간이었다. 차에서 내려 보니 육지와 연결된 호수 안의 섬이었다. 중세 전반만 해도 이곳에는 여러 개의 섬들이 있었고, 스웨덴 지배 이전 즉 가톨릭이 들어오기 이전에는 이 지역의 핀족 원주민들에 의해 공동묘지나 시장터 등으로 사용되던 곳이라 한다. 지금은 껍데기만 남아 있지만, 단단한 암석과 벽돌들을 여러 겹으로 쌓아 만든 성벽은 나그네로 하여금 다채로운 ‘역사적 상상력’을 발동하게 했다.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투자했을 많은 노력들이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여울을 뛰어넘게 했다. 그들이 추위와 배고픔, 외적의 약탈에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을 성 밖의 백성들을 얼마나 생각했을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두터운 성벽 안에서 자신들의 영화가 언제까지나 유지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을 그들의 우매함이 서글퍼지는 순간이었다. 화려한 카펫에 각종 명화들로 장식된 빛나는 내부, 따뜻한 벽난로와 고량진미의 행복 속에 펼쳐지는 화려한 무도회, 성 밖 전투에서 한 팔을 잃고 돌아온 기사에게 건넸을 형식적인 위로의 말 한 마디, 추수 때 들어온 세곡의 부족을 질책하던 노여운 음성 등등. 그 공간엔 역사의 환영(幻影)들이 끝없이 명멸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피지배의 질곡에서 고통 받다가 가까스로 독립하여 민족적 자존심을 세워가고 있는 핀란드 인들의 영욕(榮辱)이 나그네의 눈앞에서 파노라마로 재현되고 있었다. 바로 그 역사의 질곡을 확인하기 위해 여섯 시간 시차의 땅에서 9시간 비행의 고통을 참아가며 이곳에 왔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인가.

 

***

 

다시 돌아온 헬싱키. 겨울에 내려 쌓인 눈은 녹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바람결이 찬 걸로 미루어 이 눈이 따스하고 달디 단 봄물로 흐르기까지 아마 두어 달은 족히 걸리리라. 헬싱키 현대 미술관 KIASMA 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칼 구스타프 만네르하임 장군 곁을 지나며 핀란드 인들의 정신적 지표를 상상한다. 핀란드 내전과 겨울전쟁 등에서 소련과의 전쟁을 이끌어 많은 전과를 올린 만네르하임 장군. 결국 약소국이었던 핀란드의 패배로 끝나긴 했지만, 만네르하임이 보여준 불굴의 군인정신이야말로 오늘날의 핀란드를 이룬 초석이었을 것이다. 만네르하임 장군 곁에서 하룻밤을 묵고 내일은 에스또니아(Estonia)의 딸린(Tallin)을 향해 발트해를 건넌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4. 10. 15:23

 


<뚜르꾸 대성당> 


<뚜르꾸 대성당의 천정과 파이프 오르간> 


<뚜르꾸 대성당의 제단> 


<뚜르꾸 대성당 박물관의 피에타상> 


<뚜르꾸 성> 


<올드 라우마(Old Rauma)의 인포메이션 센터가 들어 있는 고건물>

 
<라우마의 박물관>


<라우마 박물관의 자수 도구와 작품> 


<라우마 박물관의 요람> 


<라우마의 마렐라(Marela)> 


<마렐라의 서재> 


<마렐라에 전시된 옛날 교과서>


<라우마의 성 십자가 교회>


<라우마 성 십자가 교회 성전> 


<얼어붙은 Yyteri 해변에서 임미숙, 조경현 모자> 


<레포사아리(Reposaari)-조선소의 흔적> 


<레포사아리(Reposaari)의 루터 교회> 

 

 

교회와 고성(古城), 옛 도시에 살아 숨 쉬는 핀란드 정신을 찾아

 

 

 

 

라우마(Rauma)를 거쳐 뽀리(Pori)까지 가는 날. 그간 끝없이 펼쳐지는 수해(樹海)와 잘 보존된 자연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핀란드 인들의 행복을 훔쳐 보기 위한 일정의 연속에 지루해진 것일까. 방향을 약간 틀어 역사와 정신의 자취를 느끼기로 했다. 호텔에서 이른 조반을 마친 우리는 카우 광장의 동쪽 강변에 서 있는 뚜르꾸 대성당을 찾았다. ‘핀란드 루터 교회의 어머니’격인 뚜르꾸 대성당. 14세기에 착공하여 16세기에 완공되었다니, 200년 대역사(大役事)의 산물이 아닌가? 그로부터 5세기. 세월의 강을 묵묵히 건너가고 있는 성당은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며 녹청으로 아로 새겨진 시간의 허물을 뒤집어 쓴 채 고고하게 서 있었다. 정문 앞에 세워진 초대 비숍 미카엘 아그리콜라(Mikael Agricola) 상 주변을 쓸고 있던 성당 관리자로부터 자부심 묻어나는 설명을 들으며 성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성전 안 곳곳에 다양한 채플들[Tigerstedt-Wallenstierna Chapel/Mayor's Chapel/Chapel of All Souls/Gezelius Chapel/Tavast Chapel/Kijk Chapel]이 마련되어 있었고, 연륜과 달리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스테인드 글라스, 하얗게 빛나는 파이프 오르간 또한 강한 인상을 주었다. 분명 핀란드 정신과 역사는 이곳 뚜르꾸 대성당에 압축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이 아우라 강 하구의 뚜르꾸 고성. 600여년 핀란드를 통치하던 스웨덴이 세운 성채로,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외관을 갖고 있었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소박하면서도 견고한 인상을 갖추고 있어 몇 년 전 둘러본 슬로바키아의 오라바 성과 흡사한 모습의 요새였다. 그리고 그것은 핀란드 인들의 아픈 과거가 새겨진 역사의 물증이기도 했다.

 

***

 

뚜르꾸를 떠나 30분쯤 달렸을까. 옛 도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갖춘 라우마[Vanha Rauma/Old Rauma]가 눈앞에 닥친다. 199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통째로 등재된 ‘올드 라우마’. 라우마의 알트슈타트(Alt Stadt)는 걸어서 한 시간 안에 섭렵할 수 있을 만큼 작았지만, 상가와 주거를 겸한 600여 채의 목조주택에 8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중세 도시였다. 양파 모양 첨탑의 박물관, 성십자가 교회(Church of the Holy Cross), 19세기 생활사를 보여주는 마렐라(Marela) 등이 우리가 꼽은 이 도시의 핵심들이었다. 걸을 때마다 마룻바닥의 삐걱대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긴 했으나, 박물관 안에는 옛 주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정겨운 물건들이 그득했다. 이 박물관이 제공하는 감동의 포인트는 수백 가닥의 미세한 실을 바늘에 꿰어 짜 나가는 레이스 예술이었다. 여인들의 섬세한 손가락이 날듯이 오가며 한 땀 한 땀 짜 나아가는 환영(幻影)이 유리 케이스에 얼른거렸다.

 

다음으로 찾은 곳이 마렐라. 마렐린[Abraham Marelin]이 18세기 후반에 살았던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그들이 남긴 생활사의 자료들을 전시한 곳이었다. 옷, 책, 책상, 타자기, 장신구, 교과서, 요람, 침구, 그릇 등등 지난 시대 이곳 주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거기서 몇 골목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니 성십자가교회가 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뜰에는 아씨시의 프란체스코 성인이 비둘기를 안은 채 교회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터 교회로 바뀌었지만, 원래 15세기에 프란체스코 수도원으로 세워졌던 곳이다. . ‘성삼위 교회(Church of the Holy Trinity)’가 1640년의 화재로 파괴된 뒤 루터 교회로 되었으며, 작년에 500주년 기념식을 가졌을 만큼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였다. 정갈하면서도 고요한 성전에 들어가 앉았을 때 비로소 지금껏 지속되는 올드 라우마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간의 격랑에 휩싸여 사라지는 것이 역사는 아니며, 삶의 모습이 바뀐다하여 사라지는 게 정신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올드 라우마는 성십자가 교회의 고적한 성전, 그 울림을 통해 나그네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

 

올드 라우마로부터 4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이 바로 지금 이곳 뽀리(Pori)다. 라우마와 마찬가지로 평원을 그득 채운 목조주택들이 햇살에 산뜻한 모습을 드러낸 곳. 호텔이 여의치 않아 펜션으로 개조한 뽀리 주민의 집 한 채를 빌려 하루를 묵게 된 것이다. 정갈하게 꾸민 침실과 주방, 화장실 등에 선진국 핀란드 인들의 안목은 묻어나고, 말없는 주인장의 미소에서 핀란드 인들의 정이 피어난다. 오후 늦게 찾은 핀란드의 최장[6km] 모래해안 Yyteri. 트레킹이나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즐기는 핀란드 인들만 간혹 오갈 뿐 꽁꽁 얼어붙은 바닷가의 텅 빈 모래사장엔 얼음만 가득하고, 모래사장을 출발 자작나무 숲을 지나 도착한 레포사아리(Reposaari)의 해변에는 옛 조선소의 영광을 증언하는 스크류 하나만이 훈장처럼 내 걸려 찬 기운에 떨고 있었다.

 

그렇다. 역사와 정신은 함께 가는 것이다. 우리가 짚어나가는 곳곳에 그 둘은 손에 잡힐 듯 배어 있었다. 그것들을 바탕으로 핀란드의 정신이나 역사의 속살을 느껴보려는 우리가 만용을 부리는 것일까. 대강 지나며 곁눈질로 바라보는 우리의 여행을 ‘장님이 코끼리 더듬듯 한다’는 이유로 웃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국 맛을 알기 위해 한 솥의 국을 모두 마실 필요가 있겠는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4. 9. 13:38

 

 


<올해 6월에 개장하는 로바니에미의 산타 파크> 


<산타마을 매장에서> 


<산타마을에서> 


<산타마을에서> 


<산타 파크에서>


<산타마을에서> 


<각국의 시민들이 산타에게 보낸 편지들, Etela-Korea, South Korea> 


<지도에 표시된 북극권> 


<산타마을의 위도> 


<로바니에미에서 헬싱키 가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핀란드 산하>  


<뚜르꾸 시가지> 


<뚜르꾸의 아우라 강> 


<뚜르꾸 시립도서관> 


<뚜르꾸 시립도서관> 


<뚜르꾸 시립도서관> 


<뚜르꾸 시립도서관>


<뚜르꾸 러시아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정문에 놓인 종> 
<뚜르꾸 Art Museum> 


<뚜르꾸 Art Museum>에서 


<뚜르꾸 Art Museum에 내걸린 작품> 


<뚜르꾸 Art Museum으로부터 시내를 관통하는 도로> 


<Art Museum hill에 위치한 레닌 흉상-레닌 망명시절의 집터>


                                                                             <4월 8일 1박을 한 래디슨 호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든 산타마을, 영욕의 역사 현장 뚜르꾸(Turku)

 

 

사흘간의 로바니에미 체류를 마무리하기 위해 산타마을에 들렀다. 산타클로스! 꿈과 기대로 아이들을 설레게 하여 어렵던 시절을 무사히 넘기게 했던 환상 속의 존재였다. 산타를 대망(待望)하던 아이들이 자라나 지금 세계 곳곳의 중추로 자리 잡고 있으며, 또 그들의 아이들이 산타를 기다리며 자라고 있다. 누구는 만개(滿開)한 상업정신의 대표 장소로 산타마을을 꼽지만, 마냥 비판만 할 일은 아니다. 찬 공기 넘나드는 전나무와 소나무, 자작나무들이 주변을 둘러 있고, 단 몇 달을 뺀 나머지 기간엔 늘 눈과 얼음에 덮여 있는 이곳. 그나마 산타 할아버지의 인자한 얼굴을 형상하는 것 외에 무슨 희망이 있었을까. 그 환상을 세계 아이들과 공유하며 그들과 함께 성장기의 고뇌들을 넘어 미래에의 꿈과 희망을 갖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상업화된다 한들 무슨 상관있단 말인가. 가게 진열대들을 그득 채우고 있는 산타 관련의 온갖 캐릭터 상품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할만한 각종 동물 형상들과 의상들, 산타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 각국에서 보내온 크리스마스 카드들[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보내온 카드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미리 써서 보낼 수 있다는 우체국 서비스가 재미있었다. 이곳을 여행하는 사람이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보낼 카드를 미리 써서 부치면 산타클로스 우체국 마크를 찍어 크리스마스 즈음에 전달해준다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발상들에 잠시 세상의 번뇌를 잊어보는 순간이었다.

 

북위 66도 32분 35초. 북극의 추위에 다져진 때문일까. 라플란드 지역의 핀란드인들은 다소 무뚝뚝한 표정 속에 성실하고 다감한 내면을 감추고 있었다. 형상을 가진 모든 것들은 얼어붙어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따스한 난로가 하나씩 갖추어져 있음을 여행 중 여러 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추위 속에서 빛나던 그 난로 하나를 마음으로 얻은 우리는 찾아온 길을 되짚어 헬싱키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구도(舊都) 뚜루꾸로 가기 위해서였다.

 

***

 

예상했던 대로 뚜르꾸는 참하고 한적한 도시였다. 대(大) 화재로 모두 부서진 뒤, 1800년대에 새로 지었다는 도심의 건물들은 나름대로 고풍(古風)을 간직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러시아의 쌩뜨 뻬쩨르부르그나 동유럽 도시들에서 가졌던 느낌이 되살아났으나, 그 이유를 딱히 짚어낼 수는 없었다. 호텔[Radisson] 뒤편의 아우라 강 (Auranjoki) 도 꽁꽁 얼어 레스토랑이나 까페로 쓰이는 큰 배들이 제자리에 묶여 있지만, 넘실대는 여름날의 푸른 물 위에 불야성을 이룰 모습들을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강 건너에 높은 언덕 중턱에 박물관이, 그 너머엔 뚜르꾸 대학이 있었으며, 자그마한 옛 성도 있었다. 아우라 강을 따라 발트 해로 연결되는 뚜르꾸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한 지배자 스웨덴 인들과, 스웨덴을 멀리 하려 헬싱키로 통치의 중심을 옮겨버린 또 다른 지배자 러시아인들의 갈등이 눈에 보이듯 도시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최신식 건물에 따스하고 안락한 분위기였다. 독서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무엇보다 몇 권의 책을 안고 들어와 반납한 뒤 새로 대출해가는 점잖은 신사들의 모습이 이채로웠다. 아마 퇴근 후 들른 것이리라. 우리나라에서 퇴근 후 몰려드는 직장인들 때문에 예산을 들여 도서관을 증축할 수밖에 없다는 소식이 각 지방자치단체들로부터 들려오는 날은 그 언제일까. 우리의 진정한 르네상스는 그런 날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점을 이곳 뚜르꾸의 시립 도서관에서 깨달았다.

 

***

 

도서관을 나와 ‘손바닥 만한’ 뚜르꾸 시가지를 체험하는 도중 언덕 위에 우뚝 선 ‘Art Museum'을 만났다. 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는 없었으나, 건물의 모습은 물론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위치가 범상치 않았다. 뮤지엄이 서 있는 언덕 아래로 시원하게 뚫린 대로(大路)가 그대로 도시를 관통하여 아우라 강을 자르며 맞은편 언덕으로 이어지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란 건 그 뮤지엄 바로 밑에 레닌의 흉상이 서 있는 일이었다. 아, 그곳이 바로 10월 혁명 이전 몇 차례의 거사에 실패하여 짜르에게 쫓긴 레닌이 망명생활을 하던 곳 이었다! 이상한 열기가 몸에 전해진다 싶었는데, 혁명가의 열정이 아직도 살아남아 벌떡거리는 박동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혁명의 와중에 유일하게 적군이 백군에게 패한 곳이 핀란드였는데, 레닌이 바로 그곳에 망명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어, 귀국하면 그 역사를 다시 들춰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핀란드와 가까운 곳에 레닌그라드[현재 쌩뜨 뻬쩨르부르그]가 있고, 도시 전체에서 미미하나마 러시아나 동유럽의 기풍을 감지한 내 첫 느낌이 그 사실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섣부른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내일 이곳에서 가장 크다는 교회와 박물관을 찾아 이 느낌의 합리성을 따져 보기로 한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4. 6. 14:10

 


<헬싱키-반타 공항 모습> 


<헬싱키-반타 공항 내부>

 
<헬싱키에서 로바니에미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핀란드 산하>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헬싱키 근교> 


<헬싱키에서 로바니에미로 가는 도중에 내려다 본 핀란드 산하> 


<로바니에미 공항 바깥에서 만난 이정표> 


<로바니에미 공항 바깥 언덕에 세워진 순록 상> 


<로바니에미 공항의 앙증스런 간판-순록의 뿔로 만들었음> 


<로바니에미 첫날 저녁식사를 한 식당 BULL> 


<로바니에미 오우나스 강과 께미강이 합류하여 이루어진 호수같은 강에서-미숙, 경현> 


<오우나스-께미 주변의 자작나무 숲 뒤로 석양은 불타고...> 


<오우나스-께미에서, 외로운 스키어>

 


<로바니에미에서 목격한 눈의 모습>

 

 

아직도 눈에 덮인 북극권의 낙원

 

 

참으로 먼 곳이다.

 새벽 5시에 기상, 인천공항 행 리무진에 오른 시각이 6시 45분. 공항에서 아침식사 해결 후 핀에어에 탑승한 시각이 10시였고, 이륙한 시각은 10시 30분이 넘어서였다. 베이징 상공, 모스크바 상공, 쌩뜨 뻬쩨르부르그 상공 등을 거쳐 발트해 상공에 들어선 것이 이곳 시각 오후 3시 가까이. 3시 5분경 헬싱키-반타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한국과의 시차는 6시간. 짐을 찾은 후 로바니에미 행 비행기 출발 시각인 4시 20분 전에 탑승구 22A에 도착하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두어 해 전 북유럽 여행팀에 합류하여 잠시 거쳐 갔을 뿐인 이곳. 이번에 큰맘 먹고 그 속살을 보고 싶었다. 스웨덴에 650년간, 러시아에 200년간 통틀어 850년을 남의 지배 아래 살아왔으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켰을 뿐 아니라 지배자들의 문화를 발전의 거름으로 삼아온 나라. 2차 대전에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줄을 잘못 선’ 죄로 철저히 파괴되었고, 전후 소련에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기한보다 훨씬 앞당겨 갚아 버리고, 그 후 몇 년 만에 올림픽을 유치하기까지 한 나라. 면적은 남북한의 1.5배쯤 되지만 인구는 500여만 밖에 되지 않는 북유럽의 강소국. 아이슬란드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북극에 가까워 국토의 30%가 북극권에 들어가 있는 나라. 이 나라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 점이 궁금했다.

 

***

 

헬싱키에서 로바니에미로 날아가는 1시간 30분 동안, 아직도 하얀 눈에 덮여 잠들어 있는 핀란드의 자연을 음미했다. 구릉 하나 보이지 않는 평원에 다닥다닥 둥근 공간들이 하얗게 널려 있는 건 핀란드 전역에 수만 개나 있다던 바로 그 ‘눈 이불을 덮고’ 얼어버린 호수들이었다. 그 뿐이랴. 온 평원엔 백설을 뒤집어쓴 전나무와 삼나무 숲이 들어차 있고, 누가 그었는가? 그 사이사이로 핏줄처럼 도로들이 교차하며 끝없이 뻗어 있었다. 호수와 숲의 나라. 그런데 아직 한겨울의 단잠에 빠져 있었다. 이 겨울잠을 누가 있어 깨울 것인가? 나그네의 마음속 떠오른 부질없는 걱정과 의문이었다. 도회의 냄새는 로바니에미 인근에 도착할 무렵에서야 맡을 수 있었다. 사뿐히 공항에 내리니, 참으로 한적하고 ‘이쁜’ 시골 공항이었다. 공항 건물 앞 언덕 위엔 순록의 모형들이 달릴 듯 서 있고, 순록의 뿔을 이어 붙여 만든 공항 간판은 건물 뒤쪽에 숨듯이 달려 있었다. 렌터카를 몰고 나온 경현의 안내로 시티호텔에 여장을 푼 뒤 본격 탐사가 시작되었다. 호텔 옆 BULL에서 시장기를 지운 우리는 밤인데도 대낮같이 환한 시가지를 거쳐 꽁꽁 얼어붙은 오우나스강(Ounasjoki)과 께미강(Kemijoki)이 합쳐져 호수를 이룬 곳에 들어갔다. 텅 빈 얼음판엔 하얀 눈만 한 길 싸여 있고, 간혹 스키어들만 외롭게 그 공간을 왕래했다. 자작나무 숲 사이로 그제서야 넘어가는 석양이 불타듯 스며들었고, 아주 조금씩 우리의 품속을 파고드는 어둑발과 함께 숙소에 들어왔다. 시차를 극복하지 못하여 몸은 천근이었으나, 마음은 새털처럼 가벼운 로바니에미의 첫 밤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7. 8. 13:43


내게 북유럽은 늘 낯설고 먼 곳이었다. 깔끔하게 디자인된 도시들과 조화를 이룬 전통, 비싸게 유지되는 맑은 공기와 자연, 복지를 떠받치는 경제, 늘 모자라는 햇볕 등등. 참으로 존경스러우면서도 섣불리 다가가기 어려운 면모들을 고루 갖춘 곳. 스칸디나비아 반도 [Scandinavian Peninsula]를 간다.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발트해를 건너는 9시간여의 비행 끝에 헬싱키 공항에 잠시 머물렀고, 다시 1시간여의 비행 끝에 도착한 코펜하겐. 유럽 북서쪽 끝의 발트 해를 낀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북쪽의 러시아와 핀란드를 기점으로 남쪽의 덴마크까지 인상적인 모양으로 누워 있는 지역이다. 스칸디나비아 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에 노르웨이, 동쪽에 스웨덴이 있는 곳. 우리가 도착한 미항(美港) 코펜하겐은 반도 최남단의 거점이다. 현대와 전통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시가지 곳곳, 질펀하게 흐르는 도시의 운하들에선 안데르센의 숨결이 느껴진다. 생수 한 병에 17크로네[1크로네는 대략 우리 돈으로 200원]나 하는 살인적인(?) 물가가 조용한 시가지의 이면에 꿈틀대는 현실로 다가왔지만, 안데르센의 동화적 세계를 품고 있는 그들이기에 그런 엄혹한 현실 또한 극복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지.

내일부터 그 숨결을 느껴볼 것이다. 수난과 영광의 역사를 직조(織造)해나온 그들 역사의 저력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문학과 예술, 그리고 산업의 조화를 통해 삶의 질을 관리해 나온 그들의 지혜는 과연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지. 풍족한 삶을 바탕으로 한 자기절제의 정신적 근원은 무엇인지 등을 스칸디나비아의 곳곳에 남아있는 물질적 증거들로부터 찾아볼 것이다. <2011. 7. 7.>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