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7.08.28 달걀의 추억
  2. 2016.09.01 삼례 책 마을을 다녀와서 1
  3. 2016.02.03 대학의 반지성적 문화(1)
  4. 2016.01.18 선생을 존경해야 나라가 산다!
  5. 2014.10.09 책 단상
  6. 2011.12.25 송년회 유감
글 - 칼럼/단상2017. 8. 28. 13:30

달걀의 추억

 

                                            조규익

 

 


폐기되는 달걀들(사진은 연합뉴스)

   

이름도 생소한 살충제들로 닭띠 해인 올해 달걀이 수난이다. 지난해엔 조류독감으로 닭들이 살 처분되어 달걀과 닭고기가 동시에 품귀현상을 보이더니, 올해는 달걀 자체가 문제로 떠올랐다.

작년엔 산채로 비닐봉지에 담겨 구덩이에 매몰되는 닭들을 보며 한동안 밥맛을 잃기도 했다. 그런데 올해엔 달걀이 무더기로 깨어지며 땅에 묻히고 있다. A4용지 한 장 크기의 공간에서 제대로 앉거나 눕지도 못하며 먹고 알 낳는 일만 반복하는 닭들을 보라. 달걀 생산이 시원치 않은 노계(老鷄)나 폐계(廢鷄) 등은 헐값으로 삼계탕집이나 치킨 집으로 팔려나간다니! 생명을 대하는 인간의 잔인함. 그 끝이 어디인지 몰라 몹시 불편한 나날이다.

 

5, 60년대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 대부분은 닭에 대하여 비슷한 경험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우리 집도 제법 많은 닭들을 키웠다. 닭들은 대개 새벽에 일어나 큰 소리로 집안 식구들을 깨워놓곤 밖으로 나가 먹이활동을 했다. 오늘날의 우리는 스마트폰의 알람을 맞추고 잠이 들지만, 당시의 우리는 장닭의 우렁찬 소리에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동구 밖이 훤해지면 일단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는 게 장닭의 소임이다. 그러나 그 소리에 따라 일어나 보면 땅 위는 아직 어둠이 걷히기 전이었다. 그래도 몇 발짝 걷다보면 희끄무레 날이 밝기 시작한다. 그 때서야 뒷산의 참새들도 짹짹거리며 집 근처로 날아드는 것이었다. ‘새벽 형 인간으로 번역되는 얼리버드(early bird)’란 말이 어쩌면 닭의 부지런함에서 나온 말인지도 모르겠다.

밖에서 이슬에 젖어 꼼지락대는 벌레도 쪼아 먹고, 배추밭에 잠입하여 싱싱한 야채도 먹고, 익어가는 벼 알도 슬쩍슬쩍 훔쳐 먹는 게 그들의 오전 일과이고, 점심 무렵부터 오후 2~3시까지는 각자가 찜해 놓은 장소에서 알을 낳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나면 으레 바가지를 들고 집 주변 풀밭이나 짚 누리를 헤집고 다니며 달걀들을 수거해야 했다. 하루 수확물이 몇 개 안될 경우는 그냥 쌀독에 묻어두기도 하지만, 꽤 많은 날엔 왕겨를 담아놓은 섬에 차곡차곡 넣어 두었다.

학교에서 쓸 연필이나 도화지를 사기 위해 우리는 달걀 1~2개를 소중하게 들고 등교하기 일쑤였다. 학교 앞 송방’(그 때는 학교 앞 가게를 그렇게 불렀는데, 그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에서 돈 대신 달걀을 내는데, 달걀 시세에 따라 연필이나 도화지의 수량이 달라지곤 했다. 어른들은 매달 1자 들어가는 날(1/11/21/31)6자 들어가는 날(6/16/26)마다 면소재지에 서는 5일장으로 달걀 대여섯 줄(한 줄에 10개씩)을 꾸러미에 담아 장에 갖고 나가셨다. 달걀 값이 물건의 양과 질을 결정하는 건 아이들이나 어른들의 경우가 매 한가지였다.

 

그러니 계란을 먹는 것은 큰 호사였다. 계란은 특별한 경우에만 먹을 수 있는 특식이었다. 간혹 몸살이라도 앓고 나면 어머니는 으레 계란 하나를 깨서 내 밥 속에 숨겨주시곤 했다. 다른 식구들 눈치가 보여 미안하긴 했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느껴서 그랬는지, 금방 몸이 좋아지곤 했다. 닭을 잡거나 달걀을 먹는 건 잘해야 1년에 한두 번. 그만큼 닭과 달걀은 귀했다. 나는 그런 세월을 살았다. 요즘 아이들 젖 떨어지자마자 치킨을 달고 사는데, 참으로 격세지감을 갖게 하는 광경일 수밖에 없다.

 

오늘도 TV 화면에는 판을 뒤집어 계란을 쏟아내고 짓이기는 광경이 생생하게 방영되고 있다. 깨지는 계란보다 계란을 쏟아내는 사람들의 무표정함이 나를 더 답답하게 한다. 어떻게 해야 닭도 행복하고 사람도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마트의 계란 코너를 흡사 오물 피하듯 에둘러 가는 주부들을 보노라니, 먹거리로 행복해질 날이 언제쯤일지 눈앞이 캄캄하기만 하다.

 


달걀 꾸러미(사진은 Newsis)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9. 1. 16:42

 

삼례 책 마을을 다녀와서

 

 

 

책이 없어 곤궁하던 어린 시절부터 책이 넘쳐나는 지금까지 책과 뗄 수 없는 것이 내 삶이다. 남의 책들을 사 읽고 모으며, 가끔은 책을 펴내는 게 내 일 중의 큰 부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막 학계로 진출하던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3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엔 책이 넘쳐나게 되었다. 지식인들의 수와 지식정보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지식정보의 유통과 저장을 위해 책의 효용가치는 절대적이었다. 책 하나 펴내지 못하면 행세를 하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마구 변하여 모든 지식정보는 디지털의 공간으로 이동함으로써 이제 크고 무거운 책이 거추장스런 시대가 된 것이다. 어린 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하루 24시간을 구부정하게 스마트폰만 들여다 보는 시절이다. 종이 위의 깨알 활자들이 어찌 이들에게 매력적일 수가 있겠는가.

 

누구의 한탄대로, 한국의 대학가에서 서점이 사라졌다. 책이 빠져나간 공간을 옷 가게, 음식점, 술집, 커피 집 등이 파고들었다. 가끔씩 커피 집 창문으로 책을 읽거나 컴퓨터 작업 하는 사람들이 보이긴 하나,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 대다수는 잡담을 나누거나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 대학에서 책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지성의 샘도 말라버린 것이다.

 

대학의 권력도 대부분 힘 있는 이공계가 잡고 있다. 총장도 보직교수들도(그 가운데 도서관장도) 책이 무언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으니, 어린 학생들 탓만 할 수는 없다. 도서관의 장서를 전자책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있으니, 도서관에서 값나가는 인문서적들이 차떼기로 퇴출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다. 이렇게 반학문적, 반지성적 만행들이 수시로 나타나는 현장이 대학이다. 그래서 종이책만이 책임을 믿으며 대학인으로 살아가기가 참으로 면구스럽다. 책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 종이책을 찾는 사람들이 바야흐로 멸종을 눈앞에 둔 천연기념물이 된 것이다.

 

이런 시대에 완주군 삼례읍은 특이하고 고결한 고장이다. 아주 오래된 비료창고를 문화공간으로 변모시키고 각박한 삶에 지성의 문채(文采)를 입힌, 이 고장 사람들의 지혜가 참으로 소중하다. 2016829일은 이 땅에 타오를지도 모를 대한민국 판 르네상스가 바로 이 고장에서 점화된, 역사적인 날이다. 책을 잃어버려 마음도 희망도 잃어버린 대한민국에 갈 길을 제시한 등대로 우뚝 선 날이다.

 

이 날 몇몇 지인들과 책 마을 개관식에 참석했다. 시가지에 들어서자 삼례는 책이다!”라는 현수막이 수줍은 듯 조그맣게 매달려 있었다. 삼례성당 좌측 창고에는 책 박물관, 박물관 건너편에는 목공학교가 가동 중이었다. 이 부분이 책 마을의 중심이었다. 박물관은 아동도서와 교과서, 만화 등 2~3개 주제의 상설전시와 매년 1~2회의 기획전이 열리게 되는 공간이었다. 박물관 건너편의 김상림 목공소도 책 마을의 전통성을 보태주는 좋은 공간이었다. 전통 목공의 도구들을 살펴볼 수 있고, 목수들의 작업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곳. 그곳 역시 멋진 공간이었다. 박물관에서 나와 삼례역 방향으로 걸어가니 북하우스, 한국학 아카이브, 북갤러리 등 세 동의 건물이 눈 앞에 나타났다. 북하우스는 고서점과 헌책방, 북카페로 구성되었고, 한국학 아카이브에는 각종 연구 자료들이 비치되어 있으며, 북갤러리에는 전시실과 강연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북하우스로 들어가니 고서점 호산방이란 이름 아래 한국학 관련 고서, 신문, 잡지, 사진, 음반자료, 중국일본서양 관련 고서 등이 비치되어 있고, ‘책마을 헌책방1층에는 아동도서와 향토문화 관련 도서 등이, 2층에는 인문도서들이 비치되어, 10만권의 빛나는 책들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헌책방의 1층 한쪽에 카페가 마련되어 독서와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기도 했다.

 

책은 위대한 천재가 인류에게 남겨준 유산이다. 그것은 대물림하여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손들에게 주는 선물로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된다.” 책에 관한 에디슨의 명언이다. 이제 위대한 천재들이 만든 책들이 이곳으로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물림되어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지겠지. ‘망아지가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듯 조만간 책도 사람도 삼례로 보내라는 새로운 속담이 나올 날이 머지않았다. 삼례는 책의 메카로 변신할 것이며, 대한민국 정신사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현명한 부모라면, 아이들 손을 잡고 삼례 책 마을에 가서 잠시라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볼 일이다. 책의 의미와 책의 일생을 보고 보여주면서 말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2. 3. 16:06

 

 

지금 한국의 대학들에 만연되고 있는 '반지성적 문화'가 어디 한 두 가지랴?

어느 학교라고 콕 집어 말하고 싶지 않고,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모두 거기서 거기. ‘도낀 개낀’ ‘난형난제’, ‘도토리 키 재기의 대학사회 아니더냐! 한 치 앞서 간들 무어 그리 나을 게 있고, 한 치 뒤쳐졌다고 무어 그리 못할 게 있을까?

 

한 달 전쯤인가서울의 어느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생 하나가 찾아와 자못 흥분된 어조로 내게 말했다.

 

하루는 도서관에 들어가는데, 큰 덤프트럭 두 대가 도서관의 책을 그득하게 때려 싣고학교 밖으로 나가더군요. 궁금해서 직원에게 물어본즉 덤덤한 어조로 보존서고에 있는 도서들을 폐기처분하는 중이라고 하데요.”

 

그래. 제정신을 갖고서야 지금 이 시대 대한민국의 어느 대학에선들 학자로살아갈 수 있겠느냐? ‘집안이 좁으니 세간들 가운데 때가 묻은 것들을 골라 쓰레기장에 버리듯, 버리는 거겠지!’라고 대답하는 내 마음이 심히 불편했다.

 

#그 대학 교수로 있는 친구의 말. 며칠 전 논문을 쓰다가 급한 책이 있어 학교 도서관을 검색하니 보존서고에 소장되어 있더란다. 그러나 지금 정리 중이라 볼 수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 '정리'라는 것이 '폐기물 처리'를 말했고, 미루어 짐작컨대 그 책들은 폐기도서 트럭에 실려 나간 게 분명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제자를 통해 이웃 학교의 도서관에서 다섯 권이나 되는 그 책(영인 자료 본)을 빌려다가 아예 복사제본까지 해버렸단다. 대학생들은 잘 보지 않아 자리만 차지하는 책이니, 도서관 직원들도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만약 그런 (귀한) 책을 폐지로 취급하여버렸다면, 속된 말로 '참 망할 ××들'이라고 그 친구는 크게 흥분했다.

 

#꽤 오래 전이다. 이름뿐이었지만, 도서관의 무슨 위원이라 하여 1년에 한 번 정도 있는 회의에 나간 적이 있었다. 누군가 이제 IT 시대이니, 페이퍼 북은 줄이거나 없애고 e-book 체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다고, 서양의 명문대학들은 미련해서 도서관에 페이퍼 북 채우는 노력을 기울이는 줄 아냐고 역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하기야 엔지니어들이 대학의 수장이나 도서관의 책임자로 군림하는 시대이니, 그들에게 도서관의 의미를 묻는 것은 우물에 가서 숭늉 찾는 격일 것이다.

 

#내 연구실에는 출판사 사장들이나 영업사원들이 수시로 들른다아직은 제법 책을 사주기 때문일 것이다. 끙끙 무거운 책 짐을 들고 방문한 그들에게 주로 인문학 도서들을 폐기처분하는’ 우리나라 대학 도서관의 만행^^을 말해줄 수가 없다. ‘앞으로 경기가 풀리면 출판시장도 좋아지지 않겠느냐?’는 입에 발린 위로의 말이나 뱉어낼 뿐, 축 쳐진 그들의 어깨를 받쳐 줄 희망적 언질을 건넬 방도가 없다. 내가 아무리 강심장이라 한들 힘들게 만든 책들이 소설책들처럼 잘 읽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기처분된다는 말을 그들에게 어찌 해줄 수 있으랴.

 

***

 

내게 미국 대학들의 가장 감명 깊은 공간은 도서관이었다. 교수도 학생도 실제적인 학구 활동은 그곳에서들 펼치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대학자 노교수를 만난 것도 숲처럼 빽빽한 서가들 사이에서였다. 적어도 내가 찾는 사람들은 늘 연구실 아니면 도서관에 있었다. 그런 도서관들에서 멀쩡한 도서들을 폐기하는 꼴을 보지 못했다. 공간이 충분한 점도 그 이유의 하나는 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수백 년 그들을 지탱해온 지성적 문화 풍토를 누구도 거역하려 들지 않기 때문으로 보였다. 물론 그들에게도 공간의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그래서 상당수의 대학 도서관들에서는 기프트 센터(gift center)’를 마련하고 서고에서 퇴출되는 책들을 공짜에 가까운 가격으로학생들이나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대학 도서관 뿐 아니라 지역의 공공도서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정기적으로 폐기 도서들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다시피하고 있었다. 책을 한 보따리씩 들고 나오며 함박웃음 짓는 그들이 부러웠다. 한없이 부러웠다. , 선진국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학문적 변화주기로 볼 때 인문학과 이공학이 다른 것은 분명하다. 실용적 도구학과 정신적 학문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대학의 본질에 대하여 다시 논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이미 이 땅에서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대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형이하적 도구학 전공자들이 패권을 휘두르고, 나라 전체로도 지도적인 학자들이 모조리 사라진 형국이니, 지금의 대학들은 대학이 아니다. 대통령이 대학을 알 리 없고, 교육부 장관은 정권의 입맛에 맞춰 우왕좌왕하다가 정치판으로 복귀하면 그만이며, 교육 관료들은 잠시잠시 그런 장관의 손짓에 맞춰 춤추는 것으로 소임을 다한다고 생각하는 나라, ‘해외 유학 동안 열등생으로 지내다가 복귀하여 지배자 행세하는’(김종영, <<지배받는 지배자-미국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돌베개, 2015, 참조.) ‘지적 사기꾼들’(어떤 인사의 말 인용)이 학문 권력을 독점하는 나라, 정치권과 학계를 부지런히 오가며 곡학아세(曲學阿世)해도 대단한 학자로 대접받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다. 하기야 스마트폰 하나만 가지면, 페이퍼 북 없이도 논문 한 편을 써내는 날이 조만간 올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인사가 내 주변에 있으니, 다시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으랴!ㅠㅠ

 

 


세인트루이스 소재 워싱턴대학교(Washington University, Saint Louis)의 John M. Olin Library

 

 


세인트루이스 소재 워싱턴대학교(Washington University, Saint Louis)의 John M. Olin Library 서가

 

 


세인트루이스 소재 워싱턴대학교(Washington University, Saint Louis)의 John M. Olin Library 서가

 

 


미국 스틸워터(Stillwater) 시립도서관

 

 


스틸워터 시립도서관에서 폐기도서들을 싼 값으로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모습

 

 


오클라호마주립대학(OSU)의 '에드몬 로우 라이브러리(Edmon Low Library)'

 

 


오클라호마주립대학(OSU) '에드몬 로우 라이브러리(Edmon Low Library)'의 서가

 

 


오클라호마주 거쓰리시티(Guthrie City)의 카네기 도서관
(오클라호마 주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음)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1. 18. 02:33

선생을 존경해야 나라가 산다!

 

 

 

그는 멀리 가는 내 차에 처음으로 동승했다.

묵직한 체구에서 울려나오는 저음으로

긴 교단 생활의 아픈 마음을 내게 덜어 건넸다.

무엇보다 교육계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정년을 3년 앞둔 그였다.

학생들이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 않아

마지막 3년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지금의 학생들, 무서운 게 없다고 했다.

 

 

언젠가 학생의 도가 지나쳐 뺨을 친 교사가 있었다 한다.

그런데, 학생 녀석도 달려들어 교사의 뺨을 쳤고,

결국 난투극이 벌어졌다 한다.

충격을 받은 그 교사, 결국 명퇴로 통한의 교단생활을 마무리하고 말았단다.

 

 

학생들이 잘못을 저질러 매 한 대 맞으면,

당연한 일이지!’가 지난 시절 한국인들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쇼팽이 피아노 치듯 잘도 놀리는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을 눌러

잽싸게 부모에 경찰에 신고하는 게 그들이란다.

나를 낳아 주신 분은 부모지만,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주신 분은 선생님이라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부모가 돈을 내서 먹여 살리는 존재가 선생인 세상이다.

내 덕에 살아가는 존재가 선생이라는 것이다.

툭하면 학부모가 찾아와 교사들의 멱살을 잡거나 뺨을 치고

뻔질나게 경찰차가 교문을 드나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돈 없고 빽 없는 놈은 국립사범대학에나 가야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가난에 찌들어 있던 나는 미련 없이 그곳으로 갔다.

들어가서 책으로나마 페스탈로치의 철학도 배웠고,

그의 철학과 삶을 통해 내 선택을 정당화 시키고자 노력도 했다.

 

 

고백하건대, 학교 시절 맘에 드는 선생님들은 거의 없었다.

괜찮은가 싶다가도 여지없이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선생님이니 존경하는 게 맞다고 늘 나 자신을 눌렀다.

그 시대엔 누구나 그랬다.

선생도 역시 사람이라는 것,

그래도 교직이 다른 직종보다는 수시로 잘못을 자책하게 하는 분야라는 것,

그래서 교사는 결정적 흠결이 상대적으로 적을 가능성이 농후한 존재들이라는 것.

이렇게 나는 나를 포함하여 선생들이 갖고 있는 존재론적 진실을 깨닫기까지

50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정치인들과 정치인들 뺨치게 정치적인 교육감들이 표를 의식해서였을까.

이른바 학생인권조례라는 걸 만들어 학교를 해방구로 전락시켰다고들 한다.

집에서도 밥상머리 교육이 사라진지 오래다.

자식이 잘못 했을 때 꾸중하는 부모도 별로 없다.

사회에서 누군가 내 자식을 꾸짖을 때

그 어른을 탓할 뿐 자식을 꾸짖는 부모는 거의 없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아이들이 많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베이비부머.

625 직후부터 1960년대 초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사회의 의식을 지금의 그것으로 전환시킨 장본인들,

부모에게 효도하고 선생님을 존경해왔으면서 정작 자식들에게는

그걸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장본인들이다.

이들의 자식들이 자식들을 낳아 학교에 보내게까지 되었으니, 학교의 꼴은 불문가지다.

선생이 특정학생에게 언성만 높여도 부모로부터 득달같이 전화가 걸려오고,

심하면 찾아와 멱살잡이와 폭력이 이어지는 시절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무서운 것도, 존경할 대상도 없다.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무서움과 존경을 가르치지 않는다.

요즘 부모들은 입만 열면 아이들 기 죽이지 말라!’고 고함을 지른다,

그러나 제멋대로 굴게 만드는 힘는 아니다.

기에는 정기(正氣/精氣)와 사기(邪氣)가 있다.

불의에 굴하지 않는 기개’, ‘바른 자세로 매진하는 기개가 정기(正氣/精氣),

사람을 속이고 공동체를 교란시키며

제멋대로 구는, 삿된 기운이 사기(邪氣).

요즘 부모들이 아이들의 기를 세우려 한다지만,

그 상당수의 경우는 삿된 기운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의 아이들은 또래들로부터 왕따 되는 것만 무서울 뿐,

도대체 무서운 게 없다.

잘못을 저질러도 부모가 나서서 감싸주고 경찰이 나서서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군대에 십 수만 명의 관심사병이 상존(常存)하는 것 역시

이런 교육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논리가 그럴 듯한 것도 그 때문이다.

결국 빗나간 자식사랑이 교육을 망치고, 군대를 망치고,

사회를 망치고, 나라까지 망치고 있는 것이다.

 

***

 

아이들에게 존경할만한 대상’, ‘무서운 대상을 만들어줘야 한다.

선생님으로부터 꾸중 받고 전화를 걸어왔을 때 득달같이 학교로 찾아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의 멱살을 잡지 말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조아리며 가정교육 부실에 대해 사죄한 다음,

전화 걸어온 자식을 매섭게 꾸짖을 순 없을까.

제대로 된 교육은 그 지점부터 시작될 것이고,

이 사회와 국가는 그 지점부터 바로 잡힐 가능성이 보일 것이다.

이제 베이비부머들과 그 자식들은 한참 빗나간 자식들을 밥상머리로 끌어들여

무서운 대상존경할 대상을 알게 해야 한다.

그 길만이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다.

 

 


페스탈로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0. 9. 19:51

책 단상

 

 

 

초년병 시절. 책을 한 권 내면 세상의 한 모퉁이라도 정복한 듯 설렘으로 붕 뜬 채 며칠을 지내곤 했다. ‘사람들이 아마 요건 모르고 있었을 거야!’ 초등학교 소풍 날 보물찾기 시간, 후미진 곳에서 하얀 쪽지를 찾아낸 뒤 콩닥거리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던 아이가 그러했으리라. 책도, 책을 내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 내로라하는 학계의 거물들이 존재감을 드러내시던 유일한 지표가 저서였다. 잘 나가는 일간지들의 신간안내에는 무게 있는 학술서들이 가끔 소개되었고, 나는 그 기사를 오려갖고 다니다가 서울 가는 기회에 그것들을 사서 소중하게 모셔오곤 했다. 요즘과 달리 방방곡곡의 제제다사들이 총집합하는 학회에 갈 때는 혹시 이 거물들을 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최소한 그 분들이 출판한 책 제목과 목차라도 몇 번씩 훑어보고 가는 것이 내 습관이었다.

 

 

저자의 급에 따라 달랐겠으나, 책을 내면 초판 1,000권이 기본이었고, 초짜인 내게는 인세조로 100부가 들어오는 것이 다였다. 평소 손꼽아 두었던 학계의 어른들과 동학들에게 정성스레 헌사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드리는 것도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누구 말대로 출신이 한미하여’^^ 대면할 기회는 없었지만, 책과 논문 혹은 입소문을 통하여 익히 알고 있는 그 분들에게 내 목소리를 보낸다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었다. 이 분들로부터 무슨 반응이 오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없었고, 다만 비웃음이나 사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뿐이었다. 몇 차례 그런 일 들이 반복되는 중에도 가뭄에 콩 나듯몇 분들로부터 반응이 있었는데, 잊히지 않는 몇몇 분들이 있다. 소재영, 김대행, 이규호, 성호주, 박노준, 이상보, 조재훈 선생님 등이 그런 분들이었다. 어떤 분은 전화로, 어떤 분은 편지 혹은 엽서로 감사의 마음을 보내주셨는데, 의례의 수준을 넘는 곡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돌아가신 성호주 선생님은 내게 큰 가르침을 주신 분이었다. 책을 보내드리고 나서 한 주쯤 되었을까. 소포가 하나 배달되어 왔다. 뜯어보니 속옷과 양말 한 세트, 그리고 정성스런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의 내용도 물건도 감동이었다. 그로부터 책을 받으면 최소한 답장만이라도 정성스럽게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매우 혼잡한 어떤 인사의 서재

 

 

그 뒤로 세상은 마구 변했다. 누구 말대로 아무나 책을 내는시절이 되었다. 학술서의 원고를 들이밀면 출판사에서도 외면을 한다. 거짓말이나 허접한 거라도 좋으니,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원고를 가져 오란다. 돈이 될 만한 원고를 말하는 것이리라. 마음만 먹으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학술서를 낼만한 모모 인사들도 이젠 가벼운 대중서를 통한 매명(賣名)의 덫에 걸린 것 같아 안타까운 요즈음이다. 재미있는 책도 안 읽는 세상이니 고리타분한 학술서를 읽을 턱이 없다. 학술서는 초판 500부 혹은 300부가 고작이다. 그나마 정부에서 우수학술도서제도를 통해 돈을 주니 찍어내는 것이겠지만, 우수학술도서라는 것도 로또일 수밖에 없다. 선정되는 우수학술도서 저자들의 분포를 보며 심사위원들을 점쳐보기도 하는데, 나중에 공개되는 것을 보면 대개 맞는다. 누군가는 그것도 권력이라고, ‘짬짜미가 있다는 말도 하지만, 대체 한 두 번 책을 만지작거린 뒤 수천수백 권의 책 더미 속에서 어떻게 우수학술도서를 골라낸단 말인가.

 

 

이제 책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책을 놓아둘 자리가 없는 아파트는 현대판 노마드의 텐트일 뿐이다. 어느 곳에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는 소문에 서둘러 텐트를 걷는 노마드처럼, 춤추는 아파트 시세에 따라 수시로 짐을 싸는 존재들이 오늘날의 우리다. 그런 와중에 책만한 천덕꾸러기도 없다. 무겁지, 돈도 안 되지, 놓을 자리도 없지... 이삿짐 센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책짐이다. 그래서 이사철 아파트의 쓰레기장에는 책들이 수북수북 쌓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배운 도둑질이라고, 책을 내지 않을 수 없다. 책을 내면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사볼 이유는 없으니, 내 돈을 들여서라도 사서 보내주어야 한다. 요즘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저 물어본다. “내가 이러이러한 책을 냈는데, 한 부 주어도 되겠나?”라고. 인사치레겠지만, 그럴 경우 대부분 주세요!”라고 하지만, 속내는 믿을 수 없다. 아마도 50~60%는 쓰레기장으로 가거나,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이리라 생각하면서도 배냇짓처럼헌사를 써서 건네곤 한다. 문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요즘엔 우편으로 책을 부치는 일이 힘도 들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더 힘 빠지는 경우는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다. 나보다 연상으로부터 반응 없음은 늙어 귀찮으니 그렇겠지하고 이해할 수 있으나, 동년배나 연하의 동업자들에게 반응이 없는 일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그럴 지도 모른다. ‘누가 그깟 책 보내라 했나?’ 그렇다. 그들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책을 보내놓고 서운해 하는 내가 바보인지 모른다. 어쩜 가뜩이나 연구실도 좁고 집도 좁은데 책까지 보내왔으니, 투덜거리며 뜯지도 않은 채 던져 놓고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더 심한 추정을 해보자면, 발송인을 확인도 아니 한 채 아예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내온 책이 어떻든 상대방이 고심참담 끝에 만들어, 정성스런 헌사와 함께 우편으로 보내온 선물이다. 학자가 자신의 저술을 보내는 행위는 적어도 당신은 내 공부를 이해하고 조언해줄만한 분으로 생각하기에 이 책을 보낸다는 영광스런 믿음을 전제로 한다. 한 손으로 밥을 떠 넣으며, 다른 한 손으론 SNS를 희롱하는 시절이다. 설사 방금 전 그 책을 쓰레기통에 쳐 박았다 해도, “선배, 좋은 책 잘 받았어요. 언제 그렇게 좋은 책을 내셨어요? 참 놀랍네요. 잘 읽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잠시 엄지 손가락 몇 번 움직여 무성의한 문구 하나 스마트폰으로 날리는 게 그리도 어려울까. 하기야 책을 받은 뒤 전화 통화를 해도, 직접 대면하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요즘 세태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제부터라도 어쭙잖은 책 내려 하지 말고, 잘 있는 산의 나무들이나 건사할 일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12. 25. 00:49

송년회 유감



11월부터 각종 송년회의 공지(公知)가 시작되더니, 12월에 들어서니 여름철 소나기 양철지붕 두드리듯 잦아졌다. 이메일로, 스마트폰 문자로, 카카오톡으로, 전화로... 문명의 이기가 늘어나면서 송년회 연락의 횟수가 늘어나고 신속해진 모습이 귀찮을 정도로 다양해졌다. 늙어가는 처지에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순 없다는 위기감 때문이었을까. 송년회 가운데 두 군데를 고르기로 했다. 하나는 고등학교 동기들과의 만남, 또 하나는 고향 친구들과의 만남이었다.

아, 우리 모두는 50대의 힘겨운 능선을 넘고 있었다! 그런 우리들의 가벼운 호주머니를 배려한 집행부의 따뜻한 마음과 달리 날씨는 추웠고, 모임의 장소 또한 매우 썰렁했다. 장소가 썰렁하니 음식도 서걱거리고, 돌아가는 술잔 또한 힘이 없었다. 게다가 안주로 삼아야 할 대화 또한 건강과 주변사람들의 상사(喪事), 자녀들의 혼사, 전원주택, 명퇴 등 씁쓸한 메뉴들 뿐이었다. 고혈압, 당뇨, 암, 오십견, 뇌졸중 등등 대개 죽음의 문턱에서 발견됨직한 병명들이 난무했고, 명퇴 후 창업했다가 퇴직금을 말아먹은 이야기도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대학의 교수로 잘 나가다 불시에 당한 뇌출혈로 거동이 불편한 어떤 친구의 모습은 시간의 위력에 저항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을 확인시켜 주었다. 위로하고 걱정해주는 마음들로 냉기는 덜어졌으나, 의욕도 정열도 퇴색한 우리들의 모습은 서로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었다. 어제까지 질세라 ‘원샷!’을 외치며 부딪치던 술잔들의 광채는 모두 어디로 간 것이며, 술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노래방을 예약하던 패기들은 모두 어디로 숨은 것일까. 썰렁한 자리가 파하기도 전에 슬금슬금 집구석으로 찾아 돌아가는 모습들이 딱하기만 했다.

이번 고향친구들의 모임엔 암 투병을 시작한 친구도 합석했다. 우리의 나이와 암이라는 병명이 갖는 함의(含意)를 모임 내내 안주 삼아 되씹는 모습들이 우울했다. 그 자리엔 암과 싸워 거의 이겨가는 도중의 두 친구도 있었다. 자신들이 선배라며 암 투병 중인 그 친구를 위로하는 그들의 명랑한 목소리도 우울한 분위기에 묻혀버리고, ‘잘 싸워 이기라!’는 등 토닥임이 기껏 우리가 건넬 수 있는 최대의 호의임을 확인하고 돌아서야 했다.
 
***

몇 해 전인가. 대선배 한 분으로부터 송년회의 분위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 해가 갈수록 참석자들이 줄어드는 게 가장 슬프다는 것이 그 분 말씀이었다. 툭하면 친구들의 부음을 듣기 일쑤이고, 얼마간 소식이 뜸하다 싶으면 병원에 누워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송년회에 가기 싫어졌노라는 푸념이었다. 그 때만 해도 그 말씀이 그다지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세상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할 날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착각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이즈음 송년회에 참석하면서 그 분의 그 푸념이 결코 남의 것이 아니라는 슬픈 현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 옛날 당나라 여주(汝州) 사람 유희이(劉希夷)도 <백발을 슬퍼하는 노인을 대신하여[代悲白頭翁]>란 긴 시에서 ‘年年歲歲花相似[해마다 피는 꽃은 비슷하건만]/歲歲年年人不同[해마다 사람 얼굴 같지 않구나]’이라는 탄식을 늘어 놓았으리라. 사실 유희이의 <대비백두옹>만큼 ‘늘그막 송년회’의 쓸쓸함을 잘 표현한 시는 없을 터. 길지만 전문을 들어 내 슬픔을 대변케 하고자 한다.

洛陽城東桃李花 낙양성 동쪽 복사꽃 오얏꽃

飛來飛去落誰家 어지럽게 날아 누구 집에 떨어지나

洛陽女兒惜顔色 낙양의 아가씨, 얼굴빛이 아까워

行逢落花長歎息 길 가다 낙화 보며 길게 한숨짓는군

今年花落顔色改 올해도 꽃이 지면 얼굴빛 변하리니

明年花開復誰在 내년 꽃 필 때에 뉘 다시 있으리

已見松柏摧爲薪 소나무 잣나무가 베어져 장작 됨을 이미 보았고

更聞桑田變成海 뽕밭 변해 바다 됨을 다시 들었다네

古人無復洛城東 옛 사람은 성 동쪽에 다시 없는데

今人還對落花風 이젯 사람 꽃바람 속 다시 서 있네

年年歲歲花相似 해마다 피는 꽃은 비슷하건만

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사람 얼굴 같지 않구나

寄言全盛紅顔子 들어보게, 한창 나이 젊은이들아!

應憐半死白頭翁 얼마 못 살 늙은이 가엾어 하라

此翁白頭眞可憐 이 노인의 흰머리 가련하지만

伊昔紅顔美少年 그도 지난날엔 홍안 미소년

公子王孫芳樹下 공자왕손 더불어 꽃나무 아래 놀고

淸歌妙舞落花前 맑은 노래 멋진 춤 꽃바람 속에 즐겼다네

光祿池臺開錦繡 호화로운 자리에서 잔치도 벌였고

將軍樓閣盡神仙 화려한 누각에서 신선처럼 즐겼네

一朝臥病無相識 하루아침 병 들으니 알아주는 사람 없고

三春行樂在誰邊 봄날의 행락은 누구에게 가버렸나

宛轉娥眉能幾時 고운 눈썹 아가씨는 언제까지 고우리?

須臾鶴髮亂如絲 머지않아 흰머리 실처럼 흩어지리니

但看古來歌舞地 예전부터 노래 춤이 끊임없던 곳이건만

惟有黃昏鳥雀悲 이젠 황혼 속에 새들만 슬피 우네


돌아가신 선배 교수 한 분은 내게 “이왕 나이 먹고 건강을 잃은 처지이지만, 남은 기간 ‘어그레시브하게 살다 가겠소!’”라고 말씀하셨다. 그 분이 마지막을 진짜로 어그레시브하게 사셨는지 알 수는 없으되, 그 분의 말씀을 듣고 나서 얼마 안 되어 그 분의 부음을 들은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허무했다. 그렇게 시간은 덧없는 것. 그래서 요즘은 송년회에 나가기가 ‘죽도록’ 싫은지도 모른다.

<2011. 12. 24.>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