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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29 워낭소리, 본향의 소리
  2. 2009.01.01 새해 인사
  3. 2008.05.05 소에 관한 단상
글 - 칼럼/단상2009. 3. 29. 07:42
워낭소리, 본향의 소리


고정관념을 뛰어 넘은 영화 <워낭소리>가 우리사회 중장년층의 누선(淚腺)을 자극하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전통정서에 쉽사리 호응할 것 같지 않은 2, 30대 청년들의 마음까지 움직이고 있다. 중장년층이야 어린 시절 향촌에서 워낭소리를 듣고 자란 세대라서 그럴 수 있다지만, 의외로 청년들이 이 영화에서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다소간 의외라 할 수 있다.

날마다 새벽같이 워낭소리에 잠을 깨던 꼬마들이 50대 장년으로 성장한 지금, 어린 시절의 추억이 화면으로 재생되어 나타난 것이다. 시절은 마구 변하여 산업화와 정보화를 지나 고도 지식정보화의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우리의 정신적 촉수는 아직 산업화 이전의 농경사회에 머물러 있음을 영화는 역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누렁소와의 추억을 공통으로 갖고 있는 우리는 왜 영화 속의 장면들을 보며 눈물을 떨구는가. 화면을 점령하고 있는 ‘느림, 늙음, 낙후’가 빚어 만드는 그 시절 삶의 진실이 ‘아직도 그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산업의 패턴이 변화하는 와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우리가 먼빛으로나마 다시 제 길로 접어들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무익한 ‘원점 회귀’로 평가절하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의 원점 회귀는 잃어버린 본향의 회복일 뿐 낙후한 상태로의 후퇴는 아니다. 물질적 개념 아닌 정신적 공간이 바로 본향이다.

현실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나그네 혹은 이방인으로 보는 것이 특정 종교의 전유물은 아니다. 누렁소와 말없이 교감하며, 소 때문에 농약을 뿌리지 않고 기계영농마저 거부하는 노인이야말로 생명을 중시하던 우리의 전통적 인간상이거나 그동안 잊고 지내던 우리의 원래 모습이다. 사실 본향 속에서만 그런 인간상은 존재할 수 있고, 체현될 수 있다.

매일 바꾸어야 할 만큼 우리들의 삶이 가벼운 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한 주변의 하찮은 물건 하나도 그냥 버릴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생명은 바로 존재의 이유다. 비록 한 마리의 소일지라도 생명이 있는 한 인간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은 그것이 존재해야 할 소중한 이유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첨단의 디지털 기술로 번쩍이는 오디오, 비디오 기기가 넘쳐나지만 두 노인은 아직도 아날로그 시대의 고물 라디오에 기대고 산다. 비록 낡았으나, 아직도 흘러간 그 시절의 노래들을 잘도 들려주는 그 자체가 그 라디오의 존재 이유다. 라디오처럼 늙은 노부부의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은 시절이 아무리 변해도 우리의 삶이 바뀌지 않음을 보여주는 기호다. 시절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을 추구해 가는 삶의 진실은 주름이라는 기호의 심층구조다.

따라서 이 영화를 관통하는 정신은 ‘변하지 않음’ 혹은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는 지속 그 자체다. 우리는 살면서 수시로 단절을 경험한다. 어제와 오늘, 작년과 올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등 늘 단절을 통해 변하는 것이 세상인 것처럼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네 삶의 이면은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다.

영화는 변화에 대한 거부나 비판을 바탕에 깐 채 ‘불변, 느림, 지속’의 철학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가 수시로 경험하는 변화나 발전은 허상일 뿐이고, 그 이면에 지속되고 있는 농경사회의 정서가 우리의 본향임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우리의 마음에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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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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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09. 1. 1. 09:11
새해 인사

새해가 밝았습니다. 먼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행복과 평화가 깃드시길 빕니다. 우리는 지난 해 나라 안팎으로 많은 문제들을 겪었습니다. 희망 대신 불안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발전의 역사’였다고 보는 것이 제 관점입니다. 작게 보면 퇴보 같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진보나 발전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은 좀 더 큰 걸음을 내딛기 위한 시련, 혹은 신의 섭리(攝理) 쯤으로 해석하는 게 어떨까요? 우리의 자만과 과욕을 다스려 좀 더 겸허해지라는 절대자의 깊으신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크게 나쁘지는 않겠지요. 따라서 우리가 힘만 합친다면 그런 어려움들은 곧 극복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지난 해 저는 나름대로 동분서주, 바쁘게 지냈습니다. 강의와 연구는 교수의 일상이니 그렇다 치고, 한국문예연구소를 어떻게 하면 정상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을까 부심하며 지낸 한 해였습니다. 연구소 이름으로 두 건의 국제학술대회를 가졌고, 3건의 국내 학술대회를 열었으며, 두 권의 학술지와 4건의 학술총서를 펴냈습니다. 그리고 학술총서 1, 2, 3이 나란히 문화관광부와 대한민국 학술원으로부터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한국학술진흥재단, 동북아역사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고창오씨종친회, 한국어문회 등으로부터 2억에 가까운 수주액(受注額)을 확보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심양항공대학과 저희 연구소가 ‘중한문화연구소와 한국어교육원’을 설립하기로 합의하고 양해각서와 협정서를 교환한 것은 대외 활동의 중요한 개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0편의 논문과 평론을 발표했고, 정영문 박사, 신춘호 선생 등과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13권을 펴냈습니다. 학술목적으로 러시아, 중국, 일본 등을 다녀오면서 그간 넓히지 못한 안목의 협소함을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저의 1년은 ‘깨달음과 얻음’으로 집약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과 얻음은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밑거름으로 쓰일 때만 의미를 가질 수 있으리라 봅니다. 올 한 해 제 개인적인 연구 활동의 기조를 계속 유지하면서, 대내외적으로 연구소의 위상을 안정시키기 위해 진력할 생각입니다. 2건의 국제학술대회와 2~3건의 국내학술대회, 4~5차례의 집담, 2차례의 학술지 발간, 4~5건의 학술총서 발간, 2~3억의 수주액 등은 새해에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치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소의 신념이란 무엇일까요?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갈 길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 우직하게 가다보면 언젠가는 도달하게 된다는 믿음만이 캄캄한 밤길을 가는 우리의 유일한 등대가 아닐까요?
내 어린 시절 시골에서 함께 했던 암소 누렁이와의 추억을 1년 내내 화두(話頭)로 틀고 앉아 끝이 보이지 않는 먼 길을 떠나고자 합니다. 백규서옥을 찾아주시는 여러분도 고개 넘어 들판 건너 장에 가는 마음으로 저와 함께 먼 길을 떠나보십시다. 장에서 가서 볼 일이야 각자 다르겠지만, 가는 길에 길동무가 될 수는 있겠지요.
부디 올 한 해 건강하시고, 댁내 두루 행복하시길 빕니다.

    2008년 새해 첫날  

      백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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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8. 5. 5. 19:22
 

소에 관한 단상


                                                                           조규익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자유화에 대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광우병이 빈발했고, 미국산 소에 광우병의 인자가 들어있을 가능성이 크다니 미상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급기야 어느 방송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구인들에 비해 광우병 발병 가능성이 두 배 가량 높은 유전인자를 갖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까지 했다. 불난 집에 기름 부은 꼴이다. 한쪽에서는 문제없다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큰일 났다 하는데, 우리 같은 서민들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알 도리가 없다.
 그 뿐 아니다. 광우병에 온통 신경을 쓰다 보니 우리나라 축산 농가들의 어려움은 뒷전이 되어 버렸다. 미국 쇠고기 들어오는데 광우병 논란만 해소되면 축산 농가들 줄 도산하는 건 큰 문제 아니라는 뜻일까. 국민 전체가 참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끙끙대는 형국이다.
               
 미국 쇠고기에 관련된 ‘학술용어들의 복잡성’ 또한 도통 알기 어렵고, 마땅히 따져 물을 곳마저 없다. 검역주권이니 프리온 단백질이니 MM형이니, 나같이 무식한 사람들은 매우 곤혹스럽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귀동냥을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은근히 걱정되는 일 하나가 있다. 한 10년 전쯤인가. 1년 남짓 미국에 체류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값싼 LA갈비를 배불리 먹은 우린데, 들어보니 광우병의 잠복 기간이 10년이란다. 그간 우리 몸속에서 숨죽이며 잠복해 있던 광우병의 바이러스(?)란 놈들이 발광할 시점인데, 그렇다면 이것 참 야단 아닌가.^-^ 배고픈 동족들 몰래 미국 땅에서 허리띠 풀어놓고 갈비 뜯은 죗값을 비로소 받는 게 아닌가 하여 은근히 켕기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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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독일 여행 중 알펜 가도의 한 농가 목장에서 만난 독일 소들>
 ***

 우리 국민 전체가 광우병의 볼모가 될 판에 무슨 한가한 타령이냐고 핀잔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그래도 소 이야기를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다. 내 부모는 농사꾼이셨고, 나는 흙 속에서 자랐다. 그 시절 우리 가족에게 소는 반려(伴侶)로 대접받던, ‘동물 아닌 동물’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시어 소죽을 끓이시던 아버지의 기침소리와, 사방으로 번져가던 구수한 소죽 냄새에 우린 덜 깬 잠을 털고 일어나야 했다. 배부름에 만족스러운 누렁이의 고삐를 거머쥔 채, 나는 온몸에 차가운 이슬을 받으며 아침마다 백사장으로 달리곤 했다. 남들보다 먼저 무성한 풀밭의 성찬을 누렁이에게 맛보이기 위해서였다.
 길게 쇠 바(소고삐에 이어 묶은 밧줄)를 늘이고 쇠말뚝으로 고정한 다음 부리나케 달려 이십 리나 떨어진 학교로 달려가는 것이 오전 중의 내 일과였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와 책보를 집어던진 다음 백사장의 누렁이에게 달려간다. 하루 종일 시달렸을 누렁이의 갈증과 허기를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언덕 너머로 달랑거리며 내 작은 체구가 나타나면, 누렁이는 ‘음메~’소리를 길게 뿜으며 반가움을 표하곤 했다. 쇠말뚝을 뽑자마자 쇠 바를 서릴 사이도 없이 나와 누렁이는 언덕 너머 둠벙으로 내달렸다. 누렁이는 ‘쭈욱 쭉’ 소리를 내며 촘촘히 자라난 부들 풀 사이로 고개를 박은 채 한 배 가득 물을 마셨다. 물을 마시고 난 큰 체구의 누렁이가 초등학교 3학년 꼬마를 지긋이 바라보던, 그 촉촉한 눈망울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땐 몰랐지만, 아마도 고마움의 표시였으리라.
  서해바다를 물들이던 황혼을 등지고 누렁이와 내가 다정한 친구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소죽 끓는 집으로 돌아오면, 내 일과는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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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소와 송아지>
***

그렇게 그 시절 소는 우리의 가족이었다. 그는 봄철이면 논갈이와 써레질을 해야 했고, 틈틈이 밭도 갈아야 했다. 그 뿐인가. 한 해에 한 번씩 발정기가 되면 아버지는 누렁이를 이웃 동네의 수소에게 데리고 가셨다. 농사일이 끝나는 겨울이면 누렁이는 어김없이 ‘이쁜’ 송아지 한 마리씩을 우리에게 안겨주곤 했다. 누렁이가 보여주던, 일에 대한 철저함과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어린 내 눈에도 경이로웠다. 세상만사를 달관한 고행의 수도자처럼 누렁이는 땡볕에도 싫은 내색 한 번 보이지 않고 묵묵히 쟁기를 끌었다. 그의 희생 덕에 우리는 한 섬지기가 넘는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어려웠지만 그럭저럭 삶을 이어나올 수 있었다.

***

그 옛날 우리네 부모들은 소를 상전으로 모셨다. 소와 함께 살아가는 한, 하루 이상의 출타는 불가능했다. 소에게 아침, 저녁으로 따뜻한 먹이를 만들어 먹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누렁이는 가고 없다. 그의 빈자리는 경운기와 트랙터의 굉음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시원한 목장에서 맛난 풀을 뜯으며 노역(勞役)의 신산함을 잊어버린 새로운 누렁이들. 그러나 그들의 눈망울엔 새로운 불안감이 가득하다. 주인을 위해 죽도록 일하고, 마지막엔 한 점 살코기로 변해 주인의 몸으로 스며들던 우리네 누렁이들. 그러나 그들도 이젠 사람들의 잔인한 탐욕과 무절제를 어떻게든 경고할 수밖에 없으리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수도자처럼 그저 묵묵한 태도와 덤덤한 표정으로...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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