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2. 8. 03:45

 

 

 

 

 

 


앨버커키를 떠나 산타페로 가는 도중

 

 

 

 


산타페 입구 세리요스 힐스에서 만난 작은 오름들

 

 

 

 


세리요스 힐스에서 바라본 산타페 전경

 

 

 

 


세리요스 힐스를 지나 산타페로 들어가는 길

 

 

 

 


1882년의 산타페 시가지 그림

 

 

 

 

 

 

 

 

 

환상과 낭만, 그리고 역사의 공간 산타페에 빠지다! [산타페-1]

 



 

 

큰 도시 앨버커키에서 산타페에 이르는 하이웨이 ‘I-25’ 역시 황량한 야산들을 끝없이 관통하는 길이었다. 뉴멕시코에 진입한 이래 키 작은 사막식물들과 작고 큰 화산 석들이 검게 그을린 채 다닥다닥 깔려 있는 야산들을 곧게 뚫고 나아가는 한 줄기 길이 대견하여 나 스스로 명명해본 것이 바로 용감한 길이었다. 그 길을 종횡무진 뚫고 돌아다니는 자그마한 자동차와 거기에 실린 내 실존적 자아가 사실은 용감한 존재들이었는데, 엉뚱하게도 나는 왜 그 길에만 자꾸 내 감정을 투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프로이트가 말한 일종의 '심리적 전이(psychological transference)'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례일까. 미국에 온 이후 특히 에 집착하는 나의 내면이 나 스스로도 흥미롭게 생각될 때가 많아졌다. 길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있는 한갓된 공간일 뿐인데, 그 길이 마치 살아서 내 비위를 맞춰주기도 하고 심술을 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건 왜일까. 아마도 나의 내면에 일어나는 감정적 에너지를 쏟아 붓기에 가장 좋은 대상이나 공간이 바로 미국 남부 지역의 길들이었으리라.

 

산타페까지 60.3 마일의 그리 길지 않은 길이었으나, 기억하기 힘들 만큼 많은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집거지가 차창으로 스쳐 지나갔다.* 지아 푸에블로(Zia Pueblo), 산타애나 푸에블로(Santa Ana Pueblo), 산 펠리페 푸에블로(San Felipe Pueblo), 산토 도밍고 푸에블로(Santo Domingo Pueblo) 등 푸에블로 인들은 거주하는 지역마다 구분되는 인종적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푸에블로 인들을 변별할 때는 거주 지역의 이름을 관치(冠置)하는 것이 통례인 듯 했다.

 

고개를 넘으니 멀리 산타페 산맥이 보이고, 그 앞쪽 넓은 분지에 한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을 만큼 넓게 퍼진 도회(都會)가 아름답게 형성되어 있었다. 잠시 언덕을 내려가자 길옆에 비지터 센터가 있고, 안으로 들어가니 젊은 여성 안내원이 호쾌한 웃음으로 맞아 주었다.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세리요스 힐스(Serrillos Hills)의 초입이자, 길 건너 산 속 산토도밍고 푸에블로의 인접지였다. 자료를 받은 다음 밖으로 나오니 앞 쪽에 제주도의 큰 오름을 연상케 하는 화산봉들이 여인네 젖가슴처럼 봉긋 솟아 있고, 산타페 진입을 위해 I-25에서 285로 갈아타는 턴파이크(Turnpike)가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산타페 카운티에 들어선 우리는 곧바로 산타페 시내 외곽의 신시가지를 거쳐 목표지점인 구시가지로 방향을 잡게 되었다. 거대한 가마솥의 한 가운데로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가듯 산타페 산맥 앞에 자리 잡은 산타페 시티는 거대한 분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지터 센터에서 20분이나 달렸을까. 드디어 어도비 건물들 일색인, 조용하고 아름다운 산타페 알트 슈타트(Alt Stadt)쌩얼이 우리의 가슴에 살포시 안겨들었다.

 

 

 


넓게 퍼져 있는 산타페 신시가지의 주택들

 

 

 


산타페의 '프란시스코 대성당'과 구시가지 중심부

 

 

 


주지사 궁(Palace of the Governors) 앞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는 주민들과 물건을 사는 관광객들

 

 

 


산타페 구시가 중심부의 야경

 

 

 

***

 

거룩한 믿음[Holy Faith]’을 뜻하는 스페인어 ‘Santa Fe’. 식민시대의 생생한 산물이 바로 이 도시다. 뉴멕시코 주도인 산타페는 주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자 산타페 카운티의 청사 소재지이며, 무엇보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캐피털 시티다. 2012년 기준으로 69,204명의 인구를 보유한 이곳은 카운티 전역을 포함하는 표준 통계지역[Metropolitan Statistical Area]’의 으뜸 도시이기도 하다.

 

산타페의 완전한 명칭이 ‘La Villa Real de la Santa Fé de San Francisco de Asís’ 아씨시 프란시스코 성인의 로열 타운[The Royal Town of the Holy Faith of St. Francis of Assisi]’임을 알고 나서야 구시가의 높은 곳에 우뚝 서서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는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바실리카 대성당[Cathedral Basilica of St. Francis of Assisi]’의 존재의미가 이해되었다. 대성당 뿐 아니라 시 청사 앞을 비롯한 시내의 곳곳에서 프란체스코 성인의 동상과 사진들을 보았는데, 그가 바로 산타페의 수호성인이었다. 그 점을 이해하고 나서야 왜 대성당이 내려다보이는 앞쪽에 중앙 광장과 주지사 집무실 및 공관을 포함한 공공기관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왜 그로부터 상가들과 각종 편의시설들이 방사상(放射狀)으로 펼쳐져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즉 '프란체스코 성인-대성당-아름다운 산타페'의 상관구조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산타페 광장의 모습

 

 

 

 


산타페 시청 정원과 프란체스코 성인 동상

 

 

 

 


"Hometown Hero" 2011. 7. 12.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레인저 상

 

 

 

 


산타페 시내에서 만난 멋진 화랑 입구

 

 

 

 


또 다른 화랑 입구

 

 

 

 


길 건너편에서 발견한 인디언 기념품 가게

 

 

 


길거리 상가에서 만난 독특한 디자인의 의자

 

 

 

 


길가 주택의 뜰에서 만난 인상적인 디자인의 두상

 

 

 

 

 

뉴멕시코 진입 후 며칠이 지나면서 고도(高度)의 변화에 무덤덤해지긴 했지만, 놀랍게도 뉴멕시코 주 전반의 평균 해발 고도는 1,000m에 가까웠고, 이 가운데 해발 2,134 m인 산타페는 미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주도였다. 가끔씩 귀가 멍멍해지는 느낌을 받은 것도 특히 고도에 민감한 내 신체 구조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다. 산타페의 면적은 96.9인데, 그 가운데 96.7가 땅이고 나머지 0.2는 저수지나 강, 호수 등 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추운 겨울, 따뜻한 여름이 이곳 날씨의 공식이라서인지 햇볕이 내리쪼임에도 구 시가지를 돌아보는 동안 우리는 달달 떨어야 했다. 한겨울인 12월의 평균온도 0.9, 한여름인 7월의 평균온도는 21.2이며,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6~8개월 동안 눈이 내린다고 하며, 6~8월까지는 심한 비가 내린다고 한다.

 

1848년 멕시코와 미국이 전쟁을 끝내고 체결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atado de Guadalupe Hidalgo/Treaty of Guadalupe Hidalgo)’은 뉴멕시코의 역사적정치적 향배를 결정한 분수령이었다. 멕시코에서 독립한 텍사스 공화국이 미국에 합병된 이듬해인 1846년에 일어난 것이 멕시코-미국의 전쟁이다. 전쟁에서 패한 멕시코의 평화협정 요청에 미국이 서명한 조약이 바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인데, 이 조약으로 멕시코는 현재 텍사스 주, 콜로라도 주, 애리조나 주, 뉴멕시코 주, 와이오밍 주의 일부, 캘리포니아 주, 네바다 주, 유타 주 등을 미국에 넘겨야 했다.

 

그 때 미국 땅으로 바뀐 뉴멕시코 땅을 밟으면서 나는 미국과 판이한 멕시코의 향기, 멕시코를 지배한 스페인의 향기가 섞인 묘한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 미국 남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침례교 위주의 개신교 교회들 대신 웅장한 규모의 가톨릭 성당이 구시가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은 대부분 유럽의 도시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또한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전통음식이라는 것도 대부분 멕시코 음식 그 자체이거나 멕시코 풍미를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옛날 인디언들의 식습관이라야 자연 재료의 상태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것들일 것이니, 유럽풍, 멕시코 풍을 만나면서 그 정체성을 맥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 지역의 어딜 가도 인디언 음식이라고 내오는 것들이 대부분 멕시코 음식 일색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족들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애코머(Acoma Pueblo), 코치티(Cochiti Pueblo), 이즐레타(Isleta Pueblo), 히메즈(Jemez Pueblo), 케와(Kewa Pueblo)[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Pueblo)의 이전 이름], 라구나(Laguna Pueblo), 남베(Nambe Pueblo), 오케 오윙에(Ohkay Owingeh Pueblo), 피쿠리우스(Picuris Pueblo), 퍼와이키(Pojoaque Pueblo), 샌디아(Sandia Pueblo), 산 펠리페(San Felipe Pueblo), 산 일데폰소(San Ildefonso Pueblo), 산타애나(Santa Ana Pueblo), 산타 클라라(Santa Clara Pueblo), 타오(Taos Pueblo), 터수키(Tesuque Pueblo Santa Fe), 지아(Zia Pueblo), 주니(Zuni Pueblo) 20 개에 가깝다.

 

 

 

 


산타페 시가지의 야경

 

 

 


호텔 로레토(Loretto)의 환상적인 모습

 

 

 


호텔 라폰다(La Fonda) 외관의 전통미

 

 

 


미국-멕시코 간의 전쟁,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협정문,
그로 인해 변한 양국의 국경 등을 보여주는 자료들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멕시코의 패배를 풍자한 그림[털 뽑힌 독수리]

 

 

 

 


산타페 '순교자들의 십자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27. 06:44

 

 


오클라호마와 텍사스를 거쳐 뉴멕시코로 연결되는 I-40을 비롯한 각종 도로들

 

 


오클라호마의 길가에서 흔히 보이는, 목장과 유전이 어우러진 모습

 

 


오클라호마에서 텍사스로 들어가는 입구

 

 


텍사스의 도로

 

 

뉴멕시코의 남성미, 오클라호마의 여성미

 

 

아름다움이란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변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시기나 장소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

 

걸출한 철학자이자 미학자이며 인기있는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가 그의 저서 <<미의 역사>> 머리말에서 강조한 미학의 원리다. 그렇다. 아름다움이란 그렇게 상대적인 것이다. 에코 뿐 아니라 현대 미학자들 가운데 아름다움의 상대성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아름다움에 관해 겨우 아마추어 수준의 인식을 갖고 있는 백규에게조차 미의 상대성론은 부담감 없는 상식이다.

 

***

 

오클라호마 체류 기간 끝 부분에 뉴멕시코를 다녀오기로 했다. 머나먼 길을 운전하여 텍사스를 거쳐야 갈 수 있는 곳이라서 더 매력적이었다. 오클라호마 인디언들을 대충 만나 보았으니, 그곳에 옛 모습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는 푸에블로(Pueblo) 인디언들을 보고 싶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나마 세 개 주의 인상(印象)을 비교해보고 싶은 것이 내심의 욕구였다. 무엇보다 역마살을 사랑하는 내가 새로운 길을 만나는 일을 마다할 리 없으니, 그야말로 일타삼피(一打三被), 일석삼조(一石三鳥), 혹은 One Serve, Triple Purposes’의 쾌거 아닌가.

 

오클라호마의 중심을 서남쪽으로 뚫고, 텍사스의 팬 핸들(Panhandle)을 가로질러, 앨버커키(Albuquerque)와 산타페(Santa Fe), 반들리어(Bandlier), 타오(Taos) 등 뉴멕시코의 북부 일대를 돌아오는, 총연장 2천 마일에 가까운 장도(壯途)였다. 오클라호마 주는 우리나라[남한] 면적의 두 배인 181,195, 텍사스 주는 7.8배인 696,241, 뉴멕시코 주는 3.5배인 315.194이니, ‘눈물겹도록광활한 땅 아닌가. 비록 그 면적의 작은 부분들만을 거치는 노정이었으나, 그 장대함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2014. 1. 19. 오전 8시 스틸워터 출발. 타고 가던 35번 하이웨이를 오클라호마 시티에서 40번으로 갈아타면서 쾌속의 질주를 계속했다. 르노(El Reno), 엘크(Elk), 세이어(Sayre) 등 오클라호마 구간을 지나자 풍광이 바뀌면서 I-40은 텍사스로 접어들었다. 주 경계를 넘어 텍사스 경내의 전망대 겸 휴게소에 들어서니 사방에 돌투성이의 언덕들과 까마득하게 늘어선 야산들이 보였으나, 그로부터 빠져나와 잠시 달리자 이내 오클라호마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텍사스의 벌판이 펼쳐졌다. 그렇게 텍사스의 팬 핸들 지역을 몇 시간 동안 달리자 66번 도로(Historic Route 66)’ 상의 핵심도시 아마리요(Amarillo)’가 나오고, 그로부터 두어 시간 더 달려 뉴멕시코에 들어섰다.

 

매혹의 땅 뉴 멕시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New Mexico, Land of Enchantment]’라고 도로를 가로질러 세운 경계표지가 인상적이었으나,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확연히 달라진 풍광이었다. 오클라호마에서 텍사스까지 끝없이 펼쳐지던 벌판들, 비옥해 보이진 않았으나 온갖 식물들을 키워내던 땅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척박한 돌투성이의 땅에 깔리듯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사막식물들의 삶터가 무한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텍사스와 뉴멕시코를 변별(辨別)하는 표지야말로 경계표지가 아니라 이런 경관의 변화였다.

 

경계표지를 지나자마자 만난 글렌리오 뉴멕시코 관광 비지터 센터[Glenrio Visitor Center NMDOT]’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은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늘 그렇게 해왔다는 듯, 우리의 인사에 응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지도를 펼치면서 묻지도 않는 관광명소들을 일사천리로 설명했다. 관광 비수기이긴 했으나, 우리가 보고자 한 포인트들은 가까스로 겨울철 폐장을 하루 이틀 앞두고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곳이 바로 시간 변경대인 듯 직원은 우리 시계의 시침을 한 시간 뒤인 3시로 되돌리라고 했다.

 

미국에는 동부 시간[Eastern Time], 중부 시간[Central Time], 산악 시간[Mountain Time], 태평양 시간[Pacific Time] 등 네 개의 시간대가 존재하는데, 우리가 출발한 오클라호마는 텍사스와 함께 중부 시간대에 속해 있었고 뉴 멕시코는 산악 시간대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 먼 곳을 가는 길에 한 시간 벌었구나! 쾌재를 불렀으나, 태양은 이미 저 멀리 지평선 바로 위에 걸려 있었다. 한 시간을 벌긴 했으나, 앨버커키까지 세 시간이 넘어 걸린다는 비지터 센터의 직원 말에 오후 4시쯤 도착하여 느긋하게 숙소를 정하리라 생각한 우리의 계획이 멋지게 빗나갔음을 알게 되었고, 가끔씩 속도제한[Speed Limit] 상한선 75마일을 넘기며 달려 나갔다.

 

 

비지터 센터를 나온 우리는 목적지인 앨버커키(Albuquerque)까지 3~4백 마일을 더 달려야 했다. 엔디(Endee), 바드(Bard), 투쿰카리(Tucumcari) 등 연도의 대소 도시들을 지나고 앨버커키에 도착하기까지 주변에 펼쳐지는 풍광을 표현할 말이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황량함이란 말 은 사전에 나오겠지만, 그 말도 결국 우리 인식의 한계만 드러낼 뿐이었다. 약간씩 오르내리는 구릉들을 제외하고 산은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지평선에 아련히 보이는 것이 바로 버날리요(Bernalillo) 카운티와 샌도발(Sandoval) 카운티에 걸친 샌디아 산맥[Sandia Mountains]일 것인데, 그마저 저녁 어스름과 아련히 피어오르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 앨버커키에 들어서기 위해 넘을 때에야 그 산맥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곳을 포함하여 뉴멕시코 전역의 평균 높이가 해발 1710m이고, 가장 낮은 지역도 852.6m에 달하니 뉴멕시코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내내 1천 미터가 훨씬 넘는 산길을 타고 있는 셈이었다. 이 넓은 땅을 덮고 있는 것은 거무튀튀한 돌들, 그 사이에 모습을 내민 블랙 그래머(Black Grama), 아리스티다 퍼푸리아(Aristida Purpurea), 크레오소트 부쉬(Creosote Bush) 등 사막식물들 뿐이었다. 사람이나 짐승이 깃들만한 교목은 한 그루도 보이지 않고, 기껏 쥐나 프레이리독 같은 작은 짐승들이나 몸을 숨길만한 식물들이 듬성듬성 성장을 멈춘 채 사막의 맨살을 가려주고 있었다.

 

 


텍사스에서 뉴멕시코로 들어가는 입구

 


끝없이 펼쳐진 뉴멕시코의 평원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Rio Grande 강과 George Bridge 주변에 펼쳐진 사막지대

 

 


샌디아 산맥Sandia Mountains)과 앨버커키(Albuquerque) 사이의 사막지대

 

 


샌디아 산맥의 보호를 받고 있는 앨버커키 시가지

 

 


앨버커키 인근 스카이시티 가는 길에 만난 황량한 평원

 

 


스카이시티 가는 길에 만난 어도비 건축양식의 천주교 성당

 

 


성당 옆쪽에 마련된 성모상

 

 


애코마(Acoma) 푸에블로(Pueblo) 스카이시티에서 내려다 본 관광안내소

 

 


뉴멕시코를 달리며 찍은 황량한 모습

 

 


뉴멕시코의 황량한 벌판

 

 


뉴멕시코의 끝없는 지평선 너머로 아련한 여운을 남기면서 해가 지고 있다.

 

 

해발 1,619.1 m의 고지대에 위치한 앨버커키에 도착하자 붕 뜬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그만큼 기압이 낮은 때문일 것이다. 1박을 한 다음날 찾은 곳은 스카이 시티(Sky City). 예의 그 광활한 평원 한 복판에 잔구 형태의 돌덩어리들과 엄청난 규모의 돌산이 서 있고, 그 위에 만들어진 애코마 푸에블로(Acoma Pueblo) 인디언들의 공동체가 바로 그곳이었다.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돌 주거지. ‘그로테스크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그곳에서 상상되는 그들의 삶 역시 우리의 상식을 배반하는 모습이었다.

 

그 다음 날 만난 아름다운 산타 페(Santa Fe) 역시 2,134 m 의 고도(高度)를 자랑하는 도시였다. 앨버커키보다 기압이 더 낮은 때문일까, 자동차에 넣어 갖고 온 과자 봉지가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산타페 산맥에 안겨 넓은 평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대도시. 이곳 역시 뉴멕시코의 주 건축양식인 어도비(Adobe) 일색의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앨버커키도, 스카이시티도, 산타페도, 타오(Taos), 그 도시들 사이사이에서 만나는 주택들도 대부분 어도비 양식이었다. 어도비란 모래, 진흙, , 막대기, , 동물의 배설물 등 섬유질이나 유기질 재료 등을 섞어서 벽돌을 만들고 햇볕에 말리는 공법으로 짓는 건축양식이다. 볼그레한 땅 색깔과 어울리게 지은 어도비 건축물들이야말로 자연에 맞추어 살려는 이 지역 주민들의 미학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직선과 기하학에만 익숙해 있던 내게 곡선과 흙빛의 따사로움을 갖춘 이 건축양식이 첨엔 좀 생소했지만, 눈에 익을수록 미학이란 결국 자연과의 위대한 조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평범한 이치의 깨달음으로 연결되었고, 결국엔 정겨움을 느끼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비록 일부분이나마 뉴멕시코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고 나서야 그곳에 차원 높은 아름다움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럴 듯한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돌투성이의 사막이 아름다울 수는 없다. 수만 년 웅웅거리며 쓸어오는 바람결 외에 움직임 하나 없는 이 벌판을 전통 미학의 기준으론 추하다고 보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이 벌판을 달리면서 감동과 함께 울고 싶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을까. 나는 이미 오클라호마 북부의 오세이지(Osage) 인디언 구역에서 대초원[Tall Grass Prairie]을 만나 연암 박지원의 호곡장(好哭場)’을 떠올린 바 있다. 광대한 요동 들판을 걸어가던 박지원은 그곳을 가히 울어볼 만한 곳이라 말하고, 인간 7(七情)의 발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기도 했다.

 

대초원 앞에 선 나도 연암선생이 느꼈던 그 심정을 이곳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기쁨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미움이 극에 달해도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니, 답답하고 울적한 감정을 확 풀어 버리는 것으로 소리 쳐 우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이 없다.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 뇌성벽력에 비할 수 있는 것이니, 북받쳐 나오는 감정이 이치에 맞아 터지는 것이 웃음과 다를 게 뭐겠는가.”라는 연암 선생의 논리야말로 뉴멕시코의 대평원 앞에 선 내 감정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감정적 여과를 거치고 나서야, 뉴멕시코 대자연의 추함은 결국 아름다움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극도의 추함이 아름다움과 합치될 수도 있다는 미학의 상대성이야말로 뉴멕시코의 황량한 사막으로부터 터득하게 되는 진리 아닌가.

 

***

 

잠시 오클라호마에 체류하면서 평원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고, 텍사스를 보고 나서 그 아름다움의 선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뉴멕시코의 사막 벌판을 만나면서 새로운 미학을 덤으로 깨닫게 되었다. 오클라호마의 평원에는 나무가 많고, 돌보다는 기름 진 흙이 많다. 기름 진 흙으로 나무를 키워내는 것이야말로 여성성(女性性)’의 본질 아닌가. 오클라호마의 대지를 달리다 보면 식물을 키우고 인간을 길러내는 지모신(地母神)’의 속삭임을 듣게 된다.

 

이와 달리 돌투성이의 사막, 뉴멕시코의 대지에서는 쩌렁쩌렁 울리는 거친 남성의 포효를 들었다. 뉴멕시코를 달리면서 눈물 나는 감동으로 긴장하다가 오클라호마에 들어오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따뜻해지는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숭고와 비장의 남성 미학적 공간에서 부드럽고 우아한 모성 미학의 공간으로 입사[入社, initiation]했기 때문이리라. 다른 시간대 즉 Mountain Time에서 Central Time으로 넘어가면서 미학적 차이까지 경험하게 된 내 가슴에 희열이 넘치는 순간이다.

 

 


애코마 푸에블로 인디언 스카이시티의 광장에서
(기우 제의에 쓰이는 사다리-세 개의 기둥은 빗줄기를, 상부의 가로막대는 구름을 각각 상징한다 함.
비가 부족한 이곳의 상황을 보여주는 물건임) 

 


스카이시티에 있는 성당[16세기에 스페인 사람들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음)

 

 


앨버커키의 푸에블로 문화센터(Indian Pueblo Cultural Center)에서
공연을 마친 푸에블로 남성 무용수와 함께

 

 


앨버커키를 떠나 산타페에 들어가는 중. 멀리 보이는 것이 산타페 산맥이며
그 앞에 널리 퍼진 것이 산타페 시가지임.

 

 


산타페 시내의 산 미구엘(San Miguel) 성당. 미국 최초의 어도비 양식 성당임.

 

 


어도비 양식의 호텔 산타 페 


 


타오(Taos) 시내 어도비 양식의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

 


타오 시내의 '랜처 장로교회[Rancho's Presbyterian Church)

 


타오 시 외곽에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전통 가옥

 


푸에블로 인디언의 전통가옥. 앞에 있는 둥근 것이 빵을 굽는 화덕임.


타오(Taos)로부터 로건(Logan) 가는 길에 지나온 Angel Fire Mountain 속의 농장 입구

 


타오(Taos)에서 로건(Logan) 가는 길에 지나온 Angel Fire Mountain 속에서 만난 사슴떼.
환상 속의 한 장면 같지요?

 


뉴멕시코의 카운티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2. 08:40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학자 발전 세미나[2013 Fulbright Visiting Scholar Enrichment Seminar]에 다녀와서

 

 

 

3일차-체로키 후예의 집을 찾아 패러다임 전환의 증거를 찾다

 

 

 

프로그램의 내용이나 성격으로 보아 사실상 마지막 날인 오늘. 여러 전문가들의 발표와 토론을 통해 어제 대초원[Tall Grass Prairie]과 오세이지 족 보호구역을 둘러보며 갖게 된 감흥을 구체적으로 내면화 시키는 날이다. 무엇보다 기대되는 일정이 바로 호스트 패밀리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그들의 집을 방문하는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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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에 버스를 타고 길크리스 박물관 강당으로 이동하여 털사대학교 영화학과 제프[Jeff Van Hanken] 교수의 강연을 들었다. “‘과거의 그 때에 있던 일들이 아니다!-미국 서부 이미지들의 신뢰성과 정의에 관한 환상들[That ain’t how it was! Illusions of Authenticity and Justice in Images in the American West]”이라는, 약간은 난해하면서도 도발적인 제목의 강연이었다. 말하자면 영화에 들어 있는 서부의 이미지들이 인디언이나 서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여타 미국인들이나 세계인들에게 잘못된 인식의 기초로 작용했다는 것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었다. 그가 제시하는 화면들을 보며 그간 접한 서부영화들이 인디언이나 미국의 서부에 대한 내 편견의 형성에 적잖이 기여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깨달음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만난 모든 것들과 결부되면서 새로운 인식으로 이어짐을 흐릿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제프 교수가 보여주던 기록영화의 화면


제프 교수가 보여주던 화면


인디언 출신 헐리웃 배우 Hattie McDaniel


서부영화의 한 장면


서부영화의 한 장면

 

제프 교수의 강연이 끝나고 같은 자리에서 감동적인 이벤트를 겸한 또 하나의 행사가 이어졌다. 오클라호마 대학교에서 원주민 연락관[Tribal Liaison]을 맡고 있는 마크씨[Mr. Mark Wilson]가 무대에서 다양한 종족의 이름을 부르자 초등학교 학생들이 큰 깃발을 하나씩 들고 무대 위로 오르는 것이었다. 그 학생들은 털사 지역 공립학교 인디언 교육프로그램의 참가자들이고, 그들이 들고 있던 깃발들은 오클라호마 주에 본부를 갖고 있는 39개 원주민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오클라호마 인디언 종족들은 1830년의 인디언 강제 이주법’[Indian Removal Act]에 근거, 미합중국 군대에 의해 강제로 혹은 자발적이거나 토지소유권을 받아 이 지역에 재배치되었다고 한다. 인디언 교육 프로그램은 털사지역 공립학교들에 출석하는 인디언의 후예들[대략 4600]에게 교육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과거 미국 인디언이 갖고 있던 풍부한 유산과 문화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깃발을 들고 입장한 초등학생들


초등학생들은 퇴장하고 남아 있는 학교의 깃발들

 

39명의 초등학생들이 무대 안쪽에 촘촘히 도열하자, 인디언 복장을 한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앞으로 나오더니 앰프를 통해 울려나오는 배경음악에 맞추어 가냘픈 목소리로 미국의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다보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아이가 차라리 쨍쨍하게 높은 목소리로 불렀더라면 괜찮았을 것을. 흡사 식민지배로 정체성을 빼앗겨버린 소수민족의 가냘픈 아이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지배자의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이란! 글쎄. “비록 우리들이 이주해온 백인들에게 땅도 빼앗기고 민족의 정체성도 빼앗겼지만, 지금은 우리 모두 충실한 미국인이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무력한 가냘픔으로 자신들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을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 내 마음에 전해져 오는 내 나름의 공감때문에 감동적이긴 했지만, 그 정확한 의미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대표로 미국 국가를 부르던 인디언 어린이

 

점심 후 미국 서부의 실제 역사라는 패널 토의에서는 다양한 연사들의 의미 있는 발표들이 이어졌다. 털사 대학교 역사학과 크리슨 박사[Dr. Kristen Oertel]의 사회로, 스테이튼 아일란드 대학[College of Staten Island] 지리학 교수인 드보라 박사[Dr. Deborah Popper]서부 지역 환경사: 바람 속에 쓸려간 옛 약속들[Western Environment History: Old Promises in the Wind]”, 아칸사 대학교[University of Arkansas] 역사학과 교수인 엘리엇 박사[Dr. Elliot West]휘청거리는 인디언들과 실제 인디언들[Reel Indians and Real Indians]”, 노쓰웨스턴 오클라호마 주립대학[Northwestern Oklahoma State University]의 역사학과 교수인 로저 박사[Dr. Roger Hardaway]서부지역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각각 발표했고, 박물관 전시물들을 관람한 뒤 각계의 저명한 패널들이 열띤 토론을 벌임으로써 주최 측이 애당초 내건 서부지역의 미래[The Future of the West]”라는 세미나의 마감 타이틀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패널리스트들 가운데 특별히 주목 받은 인물은 변호사, 인디언 부족 판사, 학자 등으로서 종교적 자유, 죄수들의 권리, 수자원 권, 조약의 권리 등을 포함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30여년을 노력해온 포니족(Pawnee) 출신의 명사 월터 씨[Mr. Walter R. Echo-Hawk]였다. 인디언들이 받는 법의 보호와 한계에 대한 그의 설명을 통해 이 지역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그는 명쾌하게 설명했다.   

 


드보라 박사의 강연 제목


점심이 차려진 길크리스 박물관의 비스타 홀(Vista Hall)


식사를 마치고 발표를 듣는 각국의 학자들


패널리스트들의 클로징 토론을 듣고 있는 학자들


학자들로부터 인기와 관심을 받은 포니(Pawnee)족 출신의 Walter Echo-Hawk씨


토론 후 학자들과 함께 한 월터씨

 

마감 패널 토의가 끝난 뒤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로비에서 삼삼오오 저녁식사를 초대한 호스트와 만나 호스트의 차로 각자의 가정이나 레스토랑으로 흩어져 갔다. 대개 한 사람의 호스트에 2~4명이 배정되었는데, 나를 초청한 호스트는 바로 첫날 나를 픽업해준 자원 봉사자 클라크[Clark Frayser]씨였다. 첫날 그의 차를 타고 호텔로 오면서 그의 한국 방문 경험과 한국에 대한 호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사실 미국인으로서는 지나치다 싶게 소탈한 점이 처음엔 의문이었다.

 


패널 토론장에서의 클라크 씨[Mr. Clark Frayser]

 

다른 호스트들과 달리 나 혼자만을 초청한 이유를 묻자 한국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다고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10년 전 한국에 초청 받아 갔을 때 서울에서의 즐거웠던 체험, 현대자동차와 포항제철 등에서의 놀라웠던 체험, 비무장 지대 땅굴에서의 긴박했던 체험 등등 한국에 대한 추억이 그의 입에서 술술 흘러 나왔다. 또 다른 미국인들과 그의 분위기가 다른 이유를 묻자,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혈통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백인 할아버지와 체로키 인디언 할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자신의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50%의 체로키 족 피를 갖게 되었고, 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 자신이 태어났으므로 자신은 40%의 체로키 족 피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다른 순수 유럽계 백인들에 비해 분위기가 다를 것이라고 했다.

 

이혼 후 만나 함께 살고 있는 걸프렌드(girl friend)’가 저녁에 일을 하므로 집에서 식사대접을 할 수는 없으니, 일단 레스토랑에서 식사한 다음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집에서 꼭 보여줄 게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게 클래식한 분위기의 레스토랑, 대중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레스토랑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했다. 후자를 선택하자 지체 없이 출발하여 30여분 뒤 도착한 곳이 산타페(Santafe)’라는 레스토랑이었다. 호스트이든 게스트이든 대개 클래식한 분위기만을 경험해온 나로서는 산타페의 이색적인 분위기에 놀라게 되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땅콩을 껍질째 볶아 한가득 넣어놓은 통이 놓여 있었고, 사람들은 그릇에 그득그득 담아갖고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예약된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자리에서 땅콩을 까먹으며 함부로 껍질들을 바닥에 버리곤 했다. 다른 식당들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던 술들이 진열장에 가득했고, 손님들 대부분이 음식과 술을 함께 마시고 있었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기준의 미국 레스토랑은 아니었고, 클라크씨는 그 점을 내게 보여주려 하는 것 같았다.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의 내부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의 천정 장식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의 내부


산타페에서 돌아와 자신의 집 앞에 서 있는 클라크씨
 

 

다른 곳보다 비교적 맛있었던 스테이크와 몇 잔의 맥주를 마신 뒤, 우리는 거기서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여 내가 미리 마련해간 하회탈 선물을 내밀자, 뛸 듯이 기뻐하며 놀라는 것이었다. 선물을 가져왔으리라는 예상을 전혀 하지 못했다가 불쑥 선물을 내미니 우선 놀란 것 같았고, 그 선물이 [mask]’이라는 점에 또 놀란 듯 했다. 주최 측으로부터 이메일로 미리 받아본 프로그램에 가정 초대 만찬[Home Hospitality Dinners]’이란 내용이 있음을 알고, 혹시 몰라서 미국에 올 때 준비한 선물들 가운데 하회탈을 갖고 온 것이었다.                                         

                                                                                      



클라크 집의 안쪽 출입문 유리에 새겨진 체로키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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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등 클라크 씨 집의 내부


거실


거실에서 백규


클라크 씨의 딸

 

내가 큼지막한 하회탈을 건네자 깜짝 놀라며 다짜고짜 자신의 서재로 나를 끌고 갔다. 그런데 한쪽 벽면이 각종 탈들로 가득한 게 아닌가. 말하자면 그는 탈 애호가였던 것이다. 체로키 탈, 중국 무희 탈, 일본 가부키 탈 등 다양한 탈들이 걸려 있는 사이에 아이들 조막만한 하회 각시탈도 걸려 있었다. 그곳에 대감탈만 빠져 있었는데, 바로 내가 그걸 갖고 온 것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절묘한 선물이었다. 말 그대로 뛸 듯이기뻐하는 그의 모습이란!

 


                                   내가 건넨 선물을 들고 서 있는 클라크 씨 

 

그의 안내로 집안을 두루두루 구경했는데, 온통 체로키 유물 일색이었다. 체로키 인디언들의 정신이 집안에서 묻어나온다고 할 정도로 좁은 집안에 그득한 그림, 공예품, 사냥도구 등 유별난 컬렉션이었다. 자신의 가계도[family tree]를 보여주며 체로키와의 인연을 설명하기도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공개적으로 체로키 혈통에 대한 프라이드를 갖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 물음만은 아껴두기로 했다. 그는 이 지역에 자신을 포함, 체로키 등 인디언 혼혈 미국인들이 적지 않다고 강조하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쩜 그는 우리가 지난 3일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온 인디언 문화의 표본으로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일부이긴 하지만, 주류의 미국인들이 감추며 살아왔을 혼혈의 사실을 흔들며 자랑하는 것은 다민족다문화의 공존과 융합의 시대를 맞이하여 의식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가 아닐까.

 


                                 체로키 화가의 그림


                                 체로키 화가의 그림


                      체로키 공예가의 목각(모기의 모습을 나무로 깎아 만든 작품)
 

 


                    자신의 거실에서 체로키 사냥법의 시범을 보이고 있는 클라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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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셋째 날. 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이 강당에서 설파한 미래의 서부는 배제나 차별 아닌 공존과 포용, 융합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었을 것이고, 클라크 씨는 그 사례로서의 자신을 내게 보여 주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시끌벅적한 산타페에서 체로키 식(?)을 가미한 식사를 대접했고,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일부분이나마 체로키 생활양식을 보여준 것이나 아닐까. 이런 분위기가 과연 공고한 레이시슴(racism)의 벽을 얼마나 허물 수 있을지, 역사의 진행이 항상 순조로운 방향만을 타게 되는 것인지 등등. 약간 불안하긴 하지만, 일단 작은 희망이나마 갖기로 한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