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09.30 15:15

  아, 바이칼!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5   

                                                                            조규익   

 


우리의 바이칼 탐사는 리스트비양카에서 시작되었다.


식당에서 바라본 리스트비양카 마을 모습


점심 후 들른 스키장(전망대 리프트 출발점)


전망대 가는 리프트 출발점


리프트를 타고 미끄러지듯.


일행 뒷모습


아, 저 숲!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쁜 꽃들이! 혹시 구절초인가요?


러시아에만 있다는, '이반차이' 만드는 꽃


체르니셰프스키 전망대에 오르자 드디어 보이기 시작하는 부랴트 족 무속의 증거물


부랴트 족 무속의 증거물


부랴트 족 무속의 뚜렷한 증거물


부랴트 족 무속의 증거물


잠두봉 산악회도 다녀갔군요!

 

 

                                                                                                                        조규익 

    

언제부턴가 바이칼을 만나고 싶었다. 민족의 시원(始源)을 의심하기 시작할 때부터였을까. 호수 물을 쭈욱!’ 소리 나게 들이마심으로써 내 협애(狹隘)한 인식의 천박한 때를 벗겨내고 싶기도 했다. 고려인 강제이주의 발자취를 추체험하는 대장정, 그 한복판에서 바이칼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르쿠츠크에서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을 떠난 게 오전 10시 남짓. 한 시간 넘게 달려 바이칼의 한 계곡 리스트비양카(Listvyanka)에 도착했다. 호숫가를 따라 5km나 이어진, 크지만 작아 보이는 마을, 자연과 어울리는 목조 주택들이 정겨운 곳이었다. 언덕배기에 붙여 지은 식당에서 감자를 주 재료로 만든 러시아 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허나, ‘개똥이 어딘들 없으랴?’ 그곳에서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행패를 부리는 젊은 중국인 여성과 그 가족을 만났다. 러시아의 한복판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음식 값을 내지 않으려 작전을 쓰는 듯한 중국 관광객들을 통해 이제 배 밖으로 삐져나온 중국인들의 간덩이와 몰염치를 그곳에서도 목도했다. ‘러시아에 있긴 하지만 엄청난 바이칼을 친견하고자 온 내겐 시끄럽고 불쾌했으나, 참 볼만한 광경이었다.

 

점심 후 30여분을 달려 국립공원 안의 체르니셰프스키 전망대 행 리프트의 출발지에 도착했다. 겨울에는 스키 객들을 위해, 그 외의 계절에는 바이칼 호 탐승객들을 위해 리프트는 계속 오르내리고 있었다. 앙가라 강이 흘러나오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체르니셰프스키 전망대에 오르자 남북으로 길게 뻗은 바이칼 호수의 진면목이 비록 일부분이지만 드러났다. ‘아름답다는 말은 너무 가벼워 차라리 입을 닫을 수밖에! 굳이 미학으로 따지자면 숭엄미라고나 할까.


전망대에서 호수를 담는 사람들


바다같은 호수가 꿈처럼 펼쳐져 있었다!


김병학 선생이 자신의 감동을 표현했다.


한반도 평화문화제를 지낸다고 했다. 기원의 대상은?


바이칼의 물에 발을 담그는 사람들


호숫가에도 이꽃은 만발해 있었다!


바이칼에서만 산다는 민물고기 오물(omul). 담백한 맛이었다.


구워낸 오물을 안주 삼아 일행과 보드카 한 잔을. 블라디미르 김 선생과 정막래 선생.


호수 물에 흥분한 사람들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와 부랴트 자치공화국의 사이에 위치한, 세계 최고(最高/最古)의 바다 같은 호수. 2,500만 년은 누가 헤아린 역사이며, 최고 수심 1,621m는 누가 헤아린 깊이란 말인가. 주변을 병풍처럼 두른 2,000m 급의 산들은 대체 언제부터 생겨나 호수의 물을 가두고 있단 말인가. 360여개의 강이 흘러 들어오지만, 출구는 앙가라 강 오직 하나 뿐이기 때문일까. 저토록 깨끗한 물은 세계 담수(淡水)1/5에 달하는 양이라고 한다.

 

2,000m 이상의 연봉들로 둘러싸인, 면적 31,722, 길이 620km, 24~79km, 해안선 2,100km 최고 수심 1,642m의 바이칼. 바이칼에서의 우리 민족의 원류를 상상하는 것은 이곳에서 둥지를 틀었다는 인구 40여 만에 달하는 부랴트 족의 샤머니즘과 우리의 그것이 적잖이 겹친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누가 매어놓았는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엔 형형색색의 끄나풀들이 칭칭 둘러 매여 있었다.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무당굿의 흔적들이다. 뿐만 아니라 주몽의 탄생지가 이 근처였다는 설들을 귓전으로 들으며, 우리 민족의 발원처가 여기 아니겠느냐는 의문은 확신에 가까운 믿음으로 바뀌어갔다.

 

유람선이 호수 복판으로 다가갈수록 시원의 생명이 풍기는 비린내가 나의 내면으로 차올랐다. 주변의 참한 봉우리들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이곳에서만 산다는 물고기 오물(omul)'은 두껍게 이랑지는 코발트블루를 차고 올라왔다. 조용한 호수의 표면에 팽팽한 긴장이 느껴지는 것도 그 속에 생명들이 깃들어 숨 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상념에 젖어 말을 잊어버리고, 호수를 둘러 싼 병풍산들은 흡사 물 한 방울이라도 흘러 나가지 못하게 막으려는 듯 촘촘히도 어깨들을 겯고 있었다. 바람은 살랑살랑 수면을 훑으며 땀에 쩐 여행객들을 위로하고, 저 건너 산 위로 석양은 엷어지고 있었다. 눈 깜짝 사이에 낯선 다음 행선지로 나그네들을 몰아대는 바이칼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하늘, 구름, 호수


일행들과 함께


물에 비친 산 언덕


물에 비친 산, 그리고 멀리 떨어진 인가들


산, 그리고 물


호수에서 앙가라강이 갈라져 나가는 곳, 그 언저리를 안개가 살짝 둘렀네요! 


고기잡이 배일까요?


호수에서 뒷산을 배경으로...


그 배가 또 오는군요.


호수를 나와 저녁 먹으러 가는 길, 숲에서 티피를 만났다.


사냥꾼들의 티피


여러 채의 티피들이 자작나무 숲에...


돈 받고 말을 태워주는 곳도 있었다.


식당 앞의 즉석 노점상. 주로 차 종류, 열매 종류들이 많았다.


아버지와 함께 노점상으로 나선 이쁜 딸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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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7.08.28 20:40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나무들의 바다, 타이가(taiga)를 보았네!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2 

                                                                                              

                                                                                                                조규익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블라디보스톡의 금각만


전망대에서 러시아 모델 아가씨와


역사에서 바라본 철길


열차 침대칸에서 조갑상, 블라디미르 김


차창으로 내다 본 시베리아 산하


열차 객실에서


객실에서의 첫 파티


달리는 차창으로 내다 본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


잠시 열차에서 내려


열차 식당 칸에서의 점심상

 

 

724일 저녁 7. 블라디보스톡 역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실었다. 바리바리 채워 넣은 캐리어가 몸에 겨웠다. 때마침 퍼부어대는 소나기와, 바짝 닥쳐온 열차 출발시각에 온몸은 땀과 비로 흥건해졌다. 시간만 되면 무정하게 떠나버릴 것 같은 러시아 승무원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우리를 겁먹게 했다.

사람들의 아우성 속에 드높은 승차대를 올라서니 날씬한 아가씨 하나 조심조심 지날만한 통로가 몹시 비좁아 놀라웠고, 가까스로 찾아 들어간 4인용 객실의 협소함은 더욱 놀라웠다. 땀과 비에 흠뻑 젖은 옷이 온몸에 달라붙은 것도 모르고 가까스로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니, ‘~!’ 소리를 내며 열차가 움직였다. 출발 뒤 30분이나 지나야 에어컨이 가동된다는 말에 땀은 더 흘렀다.

비새고 바람 통하는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부려졌을 80년 전 고려인들의 고통을 맛보라는 하늘의 뜻이었을까. 때마침 퍼부은 소나기의 의미를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과연 우린 뭘 회상했어야 하는 걸까?

 

비와 땀으로 축축해진 옷가지들을 대충 벗어 침상 밑 작은 공간에 숨기고 나니, 이 속에서 열흘을 견뎌야 할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누거(陋居)이긴 하나 자유자재로 몸을 펼 수 있고, 옷을 벗어 빨래 바구니에 함부로 내던질 수 있으며, 땀 흐를 새 없이 씻어낼 수 있는 공간 속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고행의 공간을 함께 할 블라지미르 김(우즈베키스탄 거주/소설가레닌기치 전 편집국장), 조갑상(소설가/경성대학교 명예교수), 김병학(시인/전남대 연구원)’ 등 저마다 탁월한 스토리와 히스토리를 지닌 방원(房員)들의 얼굴에도 잠시 걱정이 흘렀다. 정말로 출발 후 30분이나 되어서야 에어컨이 가동되었고, 에어컨이 가동되고 십여 분이 지나서야 축축함이 가시기 시작했다.

사전 교육에서 누차 공지된 바와 같이 무엇보다 화장실과 씻을 물, 끼니 등에 관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모든 걸 그러려니!’하고 넘기라는 블라디보스톡 가이드 담양 댁의 말이 잊어서는 안 될 금과옥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방원들이 정들기 시작했고, 오고 가는 보드카와 사마르칸트 꼬냑의 향기 속에 열차 안의 삶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 넓은 땅이다. ‘유럽과 극동두 대륙에 걸치는 광활한 땅덩어리가 부러운 러시아였다. 1860년 북경조약으로 러시아가 차지하게 된 대초원 연해주. 태평양에 연하여 동방의 진주로 불려 온 천혜의 미항 블라디보스톡이 그 주도(州都)였다. 연해주를 벗어나면서 펼쳐지는 타이가(taiga)의 자작나무와 편백의 수해(樹海)가 심안(心眼)에 낀 티끌을 청소해주고, 몇 시간 만에 한 번씩 볼까말까 한 인가(人家)와 작은 마을들이 마음 한 구석에 작은 모닥불을 피워 올렸다. 이토록 드넓은 땅에 인구는 적으니, 무궁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나라가 바로 러시아 아닌가.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 우리가 카자흐스탄 열차로 갈아타야 하는 노보시비르스크까지 50개에 육박하는 수의 역들을 지나야 한다. 그 가운데 규모가 비교적 크거나 일정시간 정차하는 역들은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 우글로바야(Uglovaya), 우스리스크(Ussuriysk), 시비르쩨보(Sibirtsevo), 무치나야(Muchnaya), 스빠스크-다이니(Spassk-Dalny), 루지노(Ruzhino), 다이녜레젠스크(Dalnerechensk), 루쳬고르스크(Luchegorsk), 비낀(Bikin), 베아젬스카야(Vyazemskaya), 하바로프스크(Khabarovsk), 비레비잔(Birobidzhan), 오블루치에(Obluchye), 아르하라(Arkhara), 부레야(Bureya), 자빗따야(Zavitaya), 벨로고르스크(Belogorsk), 스바보드니(Svobodny), 레자나야(Ledyanaya), 슈마노브스까야(Shimanovskaya), 뜨그다(Tigda), 마다가치(Magdagachi), 스카보로지나(Skovorodino), 예로페이 파블로비치(Yerofei Pavlovich), 아마자르(Amazar), 모고차(Mogocha), 쳬르니셰브스키-자바이깔스키(Chernyshevsky-Zabaikalski), 까림스카야(Karaymskaya), 치따(Chita), 힐노크(Khilok), 페트로브스크 자바이칼스키(Petrovsk-Zabaykalsky), 울란우데(Ulan-Ude), 바이칼스크(Baykalsk), 슬루잔까(Slyudyanka), 이르쿠츠크(Irkutsk), 앙가르스크(Angarsk), 지마(Zima), 뚤른(Tulun), 니즈녜우진스크(Nizhneudinsk), 타이셰트(Tayshet), 레쇼티(Reshoti), 일란스카야(Ilanskaya), 깐스크-예니셰이스키(Kansk-Yeniseiski), 크라스노야르스크(Krasnoyarsk), 아친스크(Achinsk), 보고똘(Bogotol), 타이가(Taiga), 유르가(Yurga), 노보시비르스크(Novosibirsk) 등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무엇보다 끼릴 문자로 빽빽하게 적혀 있는 역명들의 생소함이 기를 질리게 했다.

 

10~20분씩 잠시 쉬어가는 역들의 앞마당엔 동네 아줌마들의 벼룩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루 두 끼씩이나 각자 해결해야 할 승객들에게 싱싱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아줌마들의 눈빛과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빵과 물고기, 야채와 과일, 꿀과 화분 등 다종 다량의 음식물들이 좌판에 제법 쌓여 있기도 하고 팔에 걸고 다니는 바구니에 그들먹하게 들어 있기도 했다. 아주 가끔씩은 잠시 정차되어 있는 열차 안으로 들어와 물건을 팔기도 하고, 중앙아시아로 넘어가는 길목에서는 환전상도 찾아와 돈을 바꾸라고 채근했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나무숲이 지나고, 약간 험한 산세가 나타나는가 했더니 큰 바다 같은 호수가 눈앞에 닥친다. 바이칼(Baykal)이었다!<계속>


열차에서 내다 본 시베리아 산간의 소도시


시베리아의 산간 마을


시베리아의 작은 마을


달리는 열차에서 내다 본 시베리아의 일몰


작은 역에서 내려 차장과 함께


하바로프스크 역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백규


하바로프스크 역에 내린 일행들


끝없는 길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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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7.08.10 16:33

  연해주에 찍힌 고려인들의 발자국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1

 

                                                                                         조규익                               

 


라즈돌노에 역사(정면)


라즈돌노에 역사(측면)


라즈돌노에 역사 내부(매표구)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 1년간 거주했던 집


표지판


고려인문화센터에서의 진혼문화제


고려인문화센터에서의 진혼문화제


아리랑가무단 단장 발레리아(오른쪽), 발렌찐


오딧세이 참가 명찰

 

 

고려인들 아니 고려인들의 문학을 학문적 대상으로 만난 지 10. 중국의 개방과 동시에 조선족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고, 미국에 체류하는 기회에 재미한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으며, 정말 우연한 기회에 구소련의 고려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다. 세상사 대부분은 필연을 내포한 우연의 소산이라고 하는데, 내가 고려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난 것도 어떤 필연적인 힘의 시킴이라 할 수 있을까.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이전까지를 주로 더듬는고전문학도로 살아오면서 잘못된 역사의 파생물이나 식민주의의 희생자들로만 생각하던 재외동포들을 만나면서 내 시야는 급격하게 넓어지기 시작했다. 왜 제 나라 땅에서 살지 못하고 뿌리 뽑힌 잡초 신세로 황량한 세상을 떠돌아 다녀야 했는지, 비록 황무지라 해도 뿌리 내리기가 어찌 그리도 어려웠으며, 이제 할아버지의 나라가 제법 먹고 살만하게 되었음에도 왜 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는 끝날 줄 모르는지 등등. 그간 품고 있던 여러 문제들을 풀어볼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19379월부터 12월까지 자행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고려인강제이주80주년기념사업회와 국제한민족재단이 마련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회상열차에 동승하게 된 것이다. 고려인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현지 고려인들 몇 분도 합류하게 되었다.

 

***

 

2017723일 아침 7. 인천공항 출국장에는 푸른 색 유니폼을 입은 80여명의 각계각층 희망 대장정대원들이 상기된 얼굴로 모여 있었다. 대한항공 KE981편으로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경. 7월 하순의 뜨거운 태양이 러시아 동진의 상징적 공간인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톡을 달구고 있었다.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을 지닌, 태평양 쪽 유일의 부동항(不凍港) 블라디보스톡은 식민시대 고려인들의 집거지 신한촌을 품고 있었다. 악랄한 식민통치를 피해 몰려든 공간. 그 분들이 이곳에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운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자신들의 고국, 자신들의 고향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비교적 안전한 이곳에서 일제와 싸울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 여장을 풀기 전 우리는 먼저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심이자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공간 우수리스크로 달렸다. 항일운동의 별 최재형 선생의 유택이 남아 있고, 고려인문화센터가 살아 움직이는 곳이 우수리스크였다. 가는 길에 강제이주 첫 출발역인 라즈돌노에(Razdol’noe)역을 잠시 보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톡역과 함께 수만의 고려인들이 짐짝처럼 열차에 실린 곳. 지금은 역사(驛舍)만 덩그러니 남은 그곳엔 겁에 질린 고려인들의 한숨과 비명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빙 둘러 수이푼(綏芬河, Suifun)강의 지류가 흐르고, 그 앞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철로가 놓여 있었으며, 그 철로를 짓누르며 엄청난 길이의 열차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驛舍)는 텅 비어 있었고, 매표소도 굳게 닫혀 그 날의 일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다. 18694, 처음으로 이주민 10가구가 정착하면서 이룩한 육성촌(六城村). 이제 살만하게 되었다고 안도하던 이들이 날 벼락같은 명령서 한 장에 마을 앞의 역사로 끌려나온 것이다 1937년9월 하순에 시작되어 12월까지 계속된 고려인 강제이주.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의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떠올리게 하는 정치적 폭행이자 인류사의 기록적인 만행이었다. '고려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하여 간첩행위를 벌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그러한 만행의 명분이었지만, 이면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스탈린의 공포감과 함께 자신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외모의 고려인에 대한 복합심리가 작용한 정치적 편견의 소산이었다. 탈식민 시대에 지향해야 할 노선을 식민시대의 유적으로부터 확인하고자 한 것이 함께 대장정에 나선 지식인들의 일치된 인식이었다. 역사 근처에 김정일의 생가가 있다거나, 1928년 7월 소련으로 망명한 포석 조명희(趙明熙, 1894~1938)가 교사로 활동하던 학교가 남아 있다는 등의 말도 들려 왔지만, 이번엔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무명의 고려인들만 생각하기로 했다.

 

 라즈돌노에 역으로부터 한참을 달려 우수리스크에 도착했고, 항일투사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4월까지 거주하던 주택에 들렀다. 몇 년 전 왔을 때와 달리, 리모델링 공사 중인 건물 자체는 물론 앞 뒤 진입로와 하수도 등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일제에 의해 원통하게 죽음을 당한 최재형 선생의 혼이 편안하게 머물 만큼 제대로 집을 다듬고 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장대 같은 러시아 인부들의 손놀림이 미덥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재형 선생의 뜻이 살아날 수 있을지 의문이어서 걱정스러웠다. 공사 중인 집안으로 들어서자 특이한 페치카를 비롯 넓지 않은 방들이 당시의 삶을 증언하듯 우리를 맞았다. 성공한 사업가로서 이 지역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선생의 유택은 거사 지역 하얼빈으로 떠나기 전 안중근 의사가 머물던 공간이기도 했다. 내년쯤이면 우선 선생의 유품과 자료들을 품은 의미있는 공간으로 재탄생될 것으로 보였다. 우리나라 정부에서 신경을 쓴 흔적은 외벽에 부착된 팻말("최재형의 집")이 유일했다. 과연 이 집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지 않고 독립운동가의 혼을 보존하고 후세들에게 우리의 민족혼을 깨우치는 표본으로 오롯이 남을 것인가. 

  

서둘러 그곳을 떠난 우리가 도착한 곳은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최재형 선생의 유택을 떠나 문화센터에 도착하기까지 버스로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큰 공연장과 유물 전시실 등이 새로 생겨 전체적으로 짜임새와 규모를 갖춘 것은 몇 년 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그곳에 '고려인을 위한 진혼'의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진혼제는 여러 예술장르들로 짜인 의식이었다. 김 발레리아 부부가 이끄는 아리랑가무단이 무대예술을 통해 러시아에 뿌리 내린 민족미학을 보여주었다. 꽃 같은 소녀들의 노래와 춤,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의 흘러간 노래들이 우리 시대 민족문화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었다. 고려인들이 이 사회에서 식민시대 타자(他者)의 입장을 아직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재현된 과거의 예술은 조만간 그런 굴레를 극복하게 하는 신비의 명약일 수도 있으리라. 고려인 남녀 노인들의 합창과 젊은 아리랑 가무단의 춤과 노래는 풍성한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네 전통 춤사위가 북국의 빠른 율동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끈질기게 유지되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아리랑 가무단의 발레리아 단장과 그 남편 발렌찐, 그리고 그들의 예쁜 딸이자 리드싱어인 악사나가 여전한 모습으로 고려인 공동체의 문화를 지탱해나가는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 독립운동에 나선 의병들의 활동 공간이었고, 후에 임시정부로 변신한 대한국민회의 건물이 살아 있으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대표로 파견되었던 독립운동가 이상설의 유허(遺墟)가 있는 곳, 우수리스크. 전통예술 같은 소프트 문화를 통해 민족 정체성의 유지가 가능할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해준 공간이었다. 

 

 

***

 

우수리스크로부터 2시간 가까이 걸려 블라디보스톡의 현대호텔에 도착했다. 갓 수인사를 끝낸 룸메이트 손진홍 선생과 함께 김병학 선생의 호출에 이끌려 두 분의 블라디미르 김 선생들을 만났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블라디미르 선생은 이미 10년 가까이 교분을 유지해오고 있으며, 광주의 고려인마을에서 오신 또 다른 블라디미르 선생은 초면이었으나, 모두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표본으로 삼을만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열차 여행 내내 한국인 참가자들에게 고려인들의 삶과 역사를 들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우즈벡 블라디미르 선생의 톤 높은 입담에는 자신의 부모가 겪은 강제이주의 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된 흥분이 가득 배어 있었다. 이렇게 대장정의 첫날 밤, 원동의 중심 블라디보스톡에서 우리는 보드카 한 잔으로 결의를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724,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르기 전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자취를 찾는 일이 급했다. 최초의 재외동포 집거지이자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신한촌은 우거진 나무숲과 잡초, 풍상에 낡아가는 러시아인들의 나지막한 아파트들로 휩싸여 물리적 자취가 묘연했다. 1920년 신한촌 사건과 4월 참변으로 대량학살을 당한 고려인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었지만, 우뚝 솟은 세 개의 돌기둥과 작은 돌들로 구성된 기념비만이 그곳의 역사성을 간신히 보여주고 있었다. 누군가는 큰 돌기둥들이 하늘바람 혹은 남한북한해외동포를 상징한다 하나, 해석은 자유이리라. 무엇보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리지 않은 비석이 특이하고 의미심장했다. 졸지에 수만리 타국으로 쫓겨난 고려인들의 심정을 문장으로 쓴들 제대로 쓸 수 있을 것이며, 그림으로 그린들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차라리 흰 돌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나으리라. 그것만이 그 시절 고려인들을 제대로 대접하는 일이 될 수 있으리라.

관리들의 착취로 농민반란이 빈발하고,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이 유리걸식하며 떠돌던 조선 왕조 말기, 한반도의 지근 블라디보스톡에 한인들이 들어오면서 신한촌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인들의 이주가 시작된 1863년부터였다. 그로부터 삶을 이어가던 고려인들이 전대미문의 시련에 말려든 것이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이었다. 강제이주에 따라 이곳의 신한촌도 고려인들의 자취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소련이 붕괴되고 난 19998,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이 기념비는 건립되었다.

 

기념비로부터 샛길을 따라 내려가니, 러시아인들의 아파트가 나타났고, 그로부터 바다 쪽으로 이어진 경사면에서는 옛 주택들이 막 철거되고 있었다. 때마침 고려인 거주 지역의 마지막 증거인 철제 도로 표지판이 젊은 인부의 손에 의해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서울 거리라는 선명한 글자들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다. 모르는 척 기다리다가, 쓰레기로 버리거든 주어올 것을. 갈 길이 바쁜 우리가 그것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주인에게 요청하니,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것으로 미루어 값나가는 물건으로 생각한 것이었을까. 젊디젊은 주인 녀석의 약삭빠른 계산속이 얄미웠다. 나동그라진 표지판과 함께 그 공간에서 이루어졌을 우리 민족의 역사는 이제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그 일로 인해 강제이주 고려인들의 고통을 추체험하겠노라 나선 우리의 노정 또한 알량한 역사지식이나 선입견을 모두 버린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계속>


신한촌 기념비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대원들


서울의 거리 철거 광경


'서울스카야(서울의 거리)' 표지판


신한촌 주변의 러시아인들의 아파트


블라디보스톡 혁명의 광장


고려인마을 기념물


블라디보스톡 전망대, 끼릴문자를 만든 선교사 상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금각만


현대호텔 근처의 러시아정교회 성당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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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10.19 12:12

폭염(暴炎)이 불타오르던 칠월의 타쉬켄트.
40도를 넘어가는 수은주에 우즈벡 사람들의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그러나 머언 천산산맥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상큼하고도 달달했습니다. 시내를 가득 메운 씩씩한 나무들만이 그 바람과 더위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타쉬켄트 대학에서 고려인들을 만났는데, 그 가운데 한 분이 블라디미르 김, 즉 김용택 선생이었습니다. 아담한 체구에 선량한 인상의 고려인 신사 김 선생께서는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정착사(定着史)를 실감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눈물 나게 하는 대목도,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대목도 있었습니다만, 그 분 말씀의 핵심은  ‘끈질긴 민족혼’이었습니다. 그리고 초대 받아 간 김 선생 댁에서 이 원고를 받았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썼고, 최선하 선생이 유려하게 번역까지 한 이 원고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제 마음은 참담해졌습니다. 대충 일별해 보니 고려인들이 구소련 치하에서 겪은 고난의 세월이 갈피마다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순간 저는 큰 감동과 함께 ‘이 원고가 드디어 임자를 만났구나!’라고 쾌재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출판하여 우리의 피붙이들이 타국을 떠돌며 겪어 온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김 선생을 만난 며칠 뒤 찾아간 김병화 꼴호즈에서 저는 김 선생 말씀의 진실을 얼마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400여 호, 500여 명의 고려인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는 그 마을엔 내가 어릴 적 고향 마을에서 보던 미루나무들이 하늘에 닿을 듯 서 있었습니다. 고려 말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그 가운데 일부는 고려 말과 러시아 혹은 우즈벡 말이 반반씩 섞인 말들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분들의 간절한 말씀을 들으며 대한민국에서 잘 살고 있는 우리가 ‘정말로 잘 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할아버지의 나라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마음을 더 조이고 땀 흘릴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

 이 책에는 20여 편의 체험 수기(手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표면 상 독립적인 이야기들이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내용은 ‘디아스포라적 삶의 고통’과 ‘억척스런 극복의 역사’입니다. 김 선생 개인사에 그치지 않고 김 선생 개인을 통해 본 고려인들의 생활사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그 뿐인가요? 남북 분단의 민족 현실에 대한 아픈 지적과 함께 이념이나 체제경쟁에서 이겼다고 자만하는 우리에게 ‘무서운 일침(一鍼)’을 가한 점 또한 간과할 수 없습니다.

 글 전체를 연결해서 읽다보면, 조분조분 건네는 ‘일인칭 화자’의 말을 통해 한 편의 자전적(自傳的) 소설(小說)을 짚어 나가는 착각에 빠져들게 합니다. 아들 ‘빠벨’에게 자신의 험하면서도 소중한 경험을 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은 구소련 고려인들이 100년 가까이 겪어온 고통을 조국 특히 대한민국의 동족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나 아닐까요? 우리가 언필칭 ‘해외 동포들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외치지만, 그들의 지나 온 세월과 그들의 마음을 모른다면 모두가 구두선(口頭禪)일 따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한국인이라면 모두 읽어야 할 ‘해외동포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학계의 인사들이나 해외동포 관련 정책에 관여하는 인사들은 안두(案頭)에 두고 밥 먹듯 펼쳐 보아야 할 책입니다.

 오늘, 이 책을 대한민국 앞에 내어놓습니다. 김 선생이 대신 쏟아놓은 고려인들의 이야기에 부디 귀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가을, 이 책을 통해 해외동포들과의 의미 있는 만남 이루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2010. 가을

숭실대학교 인문대학 학장/한국문예연구소 소장 조 규 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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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학술문2010.10.13 08:05


『우즈벡의 고려인이 들려주는 디아스포라 이야기  멀리 떠나온 사람들』출간!!!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작가 블라디미르 김의 자전적(自傳的) 수기(手記)인 『멀리 떠나온 사람들』을 펴냈다. 이 책에는 이 책에는 20여 편의 체험 수기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들은 표면 상 독립적인 이야기들이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내용은 ‘디아스포라적 삶의 고통’과 ‘억척스런 극복의 역사’다. 작가의 개인사에 그치지 않고 작가의 개인사를 통해 본 고려인들의 생활사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북 분단의 민족 현실에 대한 아픈 지적과 함께 이념이나 체제경쟁에서 이겼다고 자만하는 우리에게 ‘무서운 일침(一鍼)’을 가한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글 전체를 연결해서 읽다보면, 조분조분 건네는 ‘일인칭 화자’의 말을 통해 한 편의 자전적 소설(小說)을 짚어 나가는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아들 ‘빠벨’에게 자신의 험하면서도 소중한 경험을 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은 구소련 고려인들이 100년 가까이 겪어온 고통을 조국 특히 대한민국의 동족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언필칭 ‘해외 동포들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외치지만, 그들의 지나 온 세월과 그들의 마음을 모른다면 모두가 구두선(口頭禪)일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한국인이라면 모두 읽어야 할 ‘해외동포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학계의 인사들이나 해외동포 관련 정책에 관여하는 인사들은 안두(案頭)에 두고 밥 먹듯 펼쳐 보아야 할 책이다. 우리 모두 작가가 대신 쏟아놓은 고려인들의 이야기에 부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가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해외동포들과의 의미 있는 만남 이룰 수 있으리라 믿는다.

 *블라디미르 김의 약력
        1946년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쉬켄트 근교 촌락인 ‘꾸일로크’에서 출생출생한 해에 부모와 함께 북한으로 가서 12세 까지 살았다. 당시 소련한인을 위해 평양에 개교한 학교에 들어가 러시아어로 공부했다. 한국전쟁 동안에는 중국에서 살았고,  15세 때에 타쉬켄트로 돌아와 석공, 미장공, 판석공 등 건설노동자로 일했다. 그동안 야간학교를 마치고 종합기술학교 산업 및 민간 건축공학과에 들어가 공부했는데, 1년 후 학업을 뒤로하고 군에 입대했다. 그곳에서 지역 군사 신문에 기사를 쓰기도 했다. 제대 후 타쉬켄트 국립대학 언론학부에서 공부했고, 이후 학생 및 청년 신문사에서 일해 책임비서까지 승진했다. 1979년 한국어로 발행되는 ‘레닌기치’ 신문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이후 타쉬켄트 통신사의 소장이 되었다. 타쉬켄트 국립대학에서 언론학을 강의했으며, 사범대학에서는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한인으로는 처음으로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공로언론인’의 칭호를 받았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는 한국문화원 설립에 적극 참여하였다.


      블라디미르 김 지음, 최선하 옮김,  인터북스, 2010, 값 20,000원/숭실대학교 한국문
      예연구소 문예총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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