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2014.11.05 13:59

 

 

 

 

 

저는 2013년 2학기 풀브라이트 방문학자(Visiting Fulbright Scholar)로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 역사학과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현지를 틈틈이 답사하고 체험한 기록들을 정리하여, 최근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푸른사상)라는 제목의 문화 답사기를 펴냈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토네이도의 본고장으로만 알려졌을 뿐인 오클라호마를 보물찾기라는 테마를 통해 새롭게 읽어내고자 했지요. 책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물 1: 스틸워터와 OSU, 그 안식과 탐구의 낙원

평온과 정밀(靜謐)의 오클라호마에 안착

역사학과를 찾아

학과 비서들과의 만남

카우보이 풍의 노신사, 학과장 로간 교수와의 만남

브렛 학장과의 만남

평원 속 지성의 오아시스, OSU에서

역사학과 학생들을 위한 특강을 마치고: 한국의 이미지를 새것으로!

카우보이들, 풋볼의 진수를 보여주다!

미국 대학의 졸업식과 감동: 왜 우리는 이렇게 하지 못하는가?

안식과 힐링의 낙원 스틸워터에서

 

보물 2: 인디언, 인디언 역사, 인디언 문화

오클라호마와 인디언 부족들

대초원에서 만난 오세이지 인디언들

체로키 후예의 집을 찾아 패러다임 전환의 증거를 찾다

오클라호마 동쪽에서 체로키 인디언들을 만나다!

체로키어오시요(Osiyo)’와 우리말‘ (어서) 오세요!’의 정서적 거리

스틸워터의 이웃동네에서 만난 판카 인디언들

길 가다 우연히 만난 아이오와 인디언 족

지혜로운 치카샤 족, 인디언 사회의 자존심

촉토 족의 뿌리와 투쟁, 그리고 예술

촉토 족의 탁월한 교육열, 풍부한 역사 자취

놀라운 세미놀 인디언들의 역사와 문화의식

카이오와, 아파치, 코만치, 그리고 대평원의 서사시

카이오와 족의 삶과 예술

무서운 코만치에서 상식의 미국인으로!

크릭 족의 꿈과 현실을 찾아

오클라호마 밖의 인디언: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족

암굴 속에 서린 생존 의지‘,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와 푸에블로 족의 말 없는

외침

부드러운 어도비, 완강한타오 푸에블로인디언들

 

보물 3: 미국의 길, 66번 도로(Route 66)의 낭만

미국에서 길을 찾으며: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작은 일탈을 꿈꾸는 66번 도로, 그 낭만과 허구

엘크 시티와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

클린턴 시티와 ‘66번 도로 박물관

엘 르노 시티와 캐나디언 카운티 뮤지엄

66번 도로에 살아 있는 역사의 공간, 유콘 시티

누구 혹시 이 소녀를 아시나요?: 유콘에서 만난 우리들의 누이

한국전 참전용사의 아들 리차드 카치니와 유콘 참전용사 박물관

오클라호마의 숨은 별: 거쓰리 시티/ 66번 길의 경이로운 옛 건축물: 아카디아 라운드

 

 

 

 

 

 

보물 4: 박물관과 미국 역사

서부 개척시대 미국의 소리: 국립 카우보이와 서부유산 박물관

예술로서의 역사, 역사로서의 예술: 털사의 길크리스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인간의 악마성을 깨우쳐 준 공간: 오클라호마 시 메모리얼 뮤지엄
오클라호마 밖의 박물관: 예술과 역사의 도시 산타페와 박물관들

 

보물 5: 열정과 도전의 대학인들

미국의 중남부에서 아시아 역사를 가르치는 젊은 학자: 용타오 두 교수

학자와 목자의 삶: 한인 교수 장영배 박사

빛나는 한국학생 브라이언

한반도에 관심이 큰 소련 역사 전문가 림멜 교수

탁월한 젊은 영어 교육자 제이슨 컬프

역사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온 프레너 교수

 

보물 6: 아름다운 자연, 안식의 낙원

부머 호수에서 찾은 마음의 고요

리틀 사하라에서 되찾은 고향의 꿈

대초원에서 멋진울음 터를 발견하고

낙원 속의 산책로: OSU 크로스 컨트리 코스의 안식과 힐링

 

 

 

 

 

***

일반적으로 미국은 역사가 짧고, 넓은 땅에 비해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역사 문화유적의 답사라는 여행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공간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백인들의 이주 후 200여년, 인디언으로부터 따지면 그보다 훨씬 더 긴 역사가 이어져 온 땅이고, 그에 따르는 문화유산들이 적지 않은 곳입니다. 더구나 경쟁력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위를 점하고 있는 미국의 대학들이나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문화를 생각하면, 미국은 유럽과 또 다른 차원의 매력을 지닌 지역입니다. 무엇보다 39개에 달하는 인디언 부족의 보호구역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오클라호마는 대초원(Tall Grass Prairie)과 대평원(The Great Plains)등 풍부한 목초지와 함께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원유 등으로 오랜 동안 풍요를 구가해온 지역이기도 합니다. 풀브라이트(Fulbright) 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곳의 대표적인 교육기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에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만. 이곳에 오자마자 연구 과제 외에 이 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의미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가 관심을 가졌던 대상은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였습니다. 저는 사람, 자연, 도시, 제도, 역사, 문화 등 감고 있던 마음의 눈을 뜨게 한 모든 것들이 보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간 모르고 지내온 것들이 그의 편견을 바로잡아 주었기에 보배로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디언들과의 만남은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인종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백인들에 의해 고통을 받아온 인디언이야말로 역사의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보물이었던 것입니다. 서부영화나 백인들에 의해 저술된 책들을 통해 제 마음에 뿌리 내린 왜곡된 인디언의 이미지가 비로소 바로잡혀지게 된 점을 가장 곰지게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배자들이 펼쳐 온 자기 합리화의 억설(臆說)에 의해 일그러진 인디언들의 실체를 삶의 현장에서 바로잡음으로써 내면에 고착된 편견을 해소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 입장에서 인디언에 대한 발견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을 통해 미국 대학들의 경쟁력이 바로 미국의 경쟁력임을 깨닫게 된 점입니다. 대학의 역사와 현실을 통해 학생들이 마음껏 공부하고 체력을 단련하며 단합정신을 함양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운영되는 미국 대학의 장점을 읽어낸 것은 제 글 내용의 핵심적인 축입니다.

인디언이나 대학의 힘에 대한 발견과 함께 오클라호마나 스틸워터의 깨끗한 자연으로부터 얻게 된 힐링의 감동은 이 책 내용의 또 다른 축입니다. 부머 호수, 리틀 사하라, 산책로로 쓰이고 있는 크로스 컨트리 코스 등 잘 보존된 자연이 인간의 내면적 평정이나 행복을 위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체험적으로 진술하고자 했습니다. 제 글의 에필로그 가운데 마무리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풀브라이트 학자로서의 가볍지 않은 사명을 짊어지고 오긴 했지만, 연구 외

에 이곳에서 발견한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달뜨게 했다. 오클라호마 사람들과의

만남, 인디언의 역사나 문화와의 만남, (특히 Route 66)과의 만남, 아름답고

깨끗한 환경과의 만남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했던 스틸워터는 문만 닫으

면 절간처럼 조용해지는 공간이었다. 맑은 공기 속에 한 발만 나서면 온갖 새

와 나무들이 그들먹한 낙원이었다. 그래서 기대 이상의 힐링을 체험하며 마음

속의 온갖 찌꺼기들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물론 이곳이라고 어찌 사람들 사

이의 갈등과, 그로부터 일어나는 불행들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유목민들이

아름다운 꽃향기와 산토끼의 해맑은 눈빛, 그 지순(至純)한 추억으로 광풍 몰

아 치던 수많은 밤들의 괴로움을 지우듯,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걸러내는 능력

이야말로 지혜로운 인간의 전유물 아닌가. 사실 짧지 않은 6개월 동안 걸러내

야 할 단 하나의씁쓸함도 만나지 못한 나였다.

                                                          ***

스틸워터에서 화려한 행복보다는 작고 따스하며 담백한 즐거움 속에 거의

완벽한 힐링의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이제 맛있고 영양가 풍부한 풀들이

많이 자라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옛 고향으로 노마드의 소떼를 몰고 재입사(

入社)하기로 한다.”

 

그곳에 가보지 않은 사람도 책을 펼치기만 하면 오클라호마와 스틸워터의 감동과 아름다움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지리라 생각합니다. 강호제현의 질정(叱正)을 고대합니다.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 푸른사상, 2014.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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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01.06 02:45

 

 


촉토 내셔널 히스토리 뮤지엄에서 63번과 270번 하이웨이를 번갈아 타며 두 시간 이상을 달려 세미놀 족의 본거지인 위워카에 도착했다.

 

 


세미놀 네이션 뮤지엄(Seminole Nation Museum)

 

 


오클라호마 주에 강제이주된 39개 인디언 종족의 고향들[세미놀 족의 고향은 플로리다였음]

 

 


세미놀 네이션 뮤지엄 문 앞에서 만난 세미놀 족 전사의 두상

 

 

 

 

놀라운 세미놀(Seminole) 인디언들(1)

 

 

 

 

세미놀 족을 만난 것은 참으로 우연이고 행운이었다. 브라이언 군의 졸업 축하 파티에 참석했을 때, 그의 미국인 친구 한 사람에게 고향을 물었더니 세미뇰이라 했다. ‘이란 발음에 혹시 스패니쉬 계통인가 하고 물었더니, ‘인디언 부족 이름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그날 밤으로 그것이 인디언 부족 이름이자 그 부족의 네이션이 있는 도시의 카운티 이름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스펠 ‘Seminole’세미뇰로 들은 것은 내 귀의 착각이었던 듯, 다른 미국인들에게 다시 물으니 모두 세미놀이라고 했다. 세미놀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치카샤와 촉토를 거쳐 드디어 그 실체를 육안으로 보게 되었다. 세미놀이 그동안 돌아 본 체로키치카샤촉토 등과, 앞으로 돌아 볼 크리크(Creek)와 함께 개화된 다섯 종족[Five Civilized Tribes]’을 이룬다고 하니, 적잖은 호기심이 발동된 것도 사실이었다.

 

'촉토 내셔널 히스토리컬 뮤지엄(Choctaw National Historical Museum)'을 나선 우리는 키아미치 산간을 꿰뚫는 63, 270번 하이웨이를 번갈아 타고 점심을 훌쩍 넘긴 무렵에서야 세미놀 카운티의 위워카(Wewoka) 시티에 도착했다. 뭔가 잔뜩 쏟아질 것만 같은 우중충한 날씨에 퇴락한 시가지의 모습이 겹치니 분위기가 음산했다. 다운타운엔 빈 상가들이 즐비했고, 페인트가 벗겨져 초라해 보이는 집들도 부지기수였다. 다른 지역의 상당수 중소도시들에서 이미 목격한 것처럼 이 도시도 기름기가 빠져 있었다. 아마도 원유의 고갈로 지역경기가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기가 좋은 대도시로 사람들이 빠져나가 텅 빈 집들은 사람의 온기를 쏘이지 못한 채 삭아들고 있었다. 살아있는 레스토랑 한 군데를 간신히 찾아내 시장기를 지우고, ‘세미놀 네이션 뮤지엄(Seminole Nation Museum)’에 갔다. 아담하고 아름다운 건물. 세미놀 사람들의 미학이 느껴지는 건축이었다.

 

연방정부에 의해 인정된, 미국 전역의 세미놀 족 집거지는 세 군데로 알려져 있다. 오클라호마 주의 세미놀 네이션, 플로리다의 세미놀 트라이브, 플로리다의 미코수키(Miccosukee) 트라이브가 그것들이다. 물론 세미놀 족의 원 고향은 플로리다이며, 2차 세미놀 전쟁 이후 8백명의 흑인 세미놀 인들을 따라 플로리다에서 인디언 거주구역으로 강제 이주되어 온 3천명 세미놀 인들의 후예들이 호클라호마 주에 살고 있다. 따라서 오클라호마의 세미놀 네이션은 세 군데 집거지들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우리가 찾아온 이곳 위워카 시티가 바로 오클라호마 세미놀 네이션의 본부가 있는 곳인데, 현재 등록 인원 18,800명 가운데 대략 13,500여명이 오클라호마 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세미놀 카운티에는 대략 5,3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1936년 인디언 재건법이 공표되면서 세미놀 족은 그들의 정부를 되살려 내기 시작했으며, 부족의 사법 관할지역 또한 그들의 다양한 자산들이 포함되어 있는 세미놀 카운티를 카버하게 되었다고 한다. 플로리다에 남아있던 수백 명의 세미놀 인들도 3차 세미놀 전쟁을 겪으면서도 미국 정부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드디어 평화를 찾게 되었으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후예들이 연방정부로부터 인정을 받는 두 개의 세미놀 트라이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들 조직된 세미놀 인들과 조직되지 않은 부족원들이 함께 1823년 미국 정부가 강제로 뺏어간 24백만 에이커의 땅에 대하여 1976년 기준으로 16백만 달러 가치의 정착지를 받아냄으로써 분쟁은 완결된 셈이다. 따라서 현재 세미놀 족이 오클라호마 한 군데와 플로리다 두 군데 등 세 지역으로 나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미놀 큐레이터의 설명에 따르면, 세미놀 인들의 말은 무스코기 어[Muskogean Language]에 속하는데, 전통적으로 서로 통하지 않는 두 말, 즉 미카수키(Mikasuki)와 크리크(Creek)어를 동시에 사용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크리크가 정치사회적 측면의 지배언어였으므로, 미카수기 어를 쓰는 사람들도 크리크 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다. 조사 결과 2000년대 초까지 부족원의 25% 정도가 크리크와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나머지는 영어만 쓰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현재 오클라호마에 있는 네이션의 대부분 세미놀 인들은 영어를 제1언어로 쓰고 있으나, 부족 차원에서 전통적인 크리크 어를 살려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한다.

 

다른 인디언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도 사회구조로서 가장 기본적인 가족 바로 위에 클랜(Clan)이란 단위가 있었다. 아주 오랜 옛날에 어떤 동물이나 초자연적 정령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고난을 견뎌 낸 것은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혈통으로 연결되는 사람들이 특정 동물의 정령들과 연관을 맺게 된 것이다. 치카샤 네이션에서도 촉토 네이션에서도 누구나 특정 클랜에 속해 있고, 너구리악어 등 어떤 동물이 자기 클랜의 상징동물인지 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점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불문(不文)의 제도 아래, 세미놀의 성인들은 자기네 부모가 속한 클랜들 밖에서 결혼상대를 찾아야 할 의무를 갖고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동성동본 혼인금지와 같은 차원의 제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근친혼을 금함으로써 종족을 건강하고 우수하게 유지하려는 지혜의 발로라고 할 수 있었다.

 

***

 

문을 열고 뮤지엄에 들어가니 실제 모습대로 전시된 세미놀 족의 전통 생활양식이 눈을 끌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주방과 거실이 함께 붙어 있었는데, 설명을 위해 그 옆에 붙여놓은 클레이(Clay MacCauley)의 말이 흥미로웠다.

 

세미놀의 가정에 들어가면 누구나 사람들이 모이는 중심에 모닥불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곳은 요리가 준비되는 장소이고, 가족과 그들의 친구들이 사교를 나누는 장소이며,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이야기되는 장소다.”

 

지금까지 만나본 모든 인디언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세미놀 족도 가족 간의 유대나 사랑을 중시한다는 점과 모계사회라 할 정도로 여성의 발언권이나 힘이 절대적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모닥불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수프와 그 주위에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 다 된 음식을 각자에게 덜어주는 주부 등 익히 보는 가족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이 뮤지엄의 첫 공간에 제시되어 있었다. 아마도 세미놀 인들은 끈끈한 가족공동체의 전통을 외부 손님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그 뿐 아니었다. 전통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활사 자료들과 예술품 들이 적절하게 분류, 전시되고 있었다.

 


 

각 부족의 구역이 할당된 시기와 점유지의 성격

 


조정이 끝난 1907년까지 각 부족의 점유지 현황

 

 


세미놀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초기 네이션 깃발

 

 


오클라호마 주 내 39개 인디언 부족의 분포 지역 리스트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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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3.12.28 10:40

 

 

 

지혜로운 치카샤 족, 인디언 사회의 자존심

 

 

 

 

 

 

엄청난 공동체였다. 규모도 규모려니와 곳곳에 잠재된 역사와 문화의 실체, 그리고 진하게 감지되는 그들의 민족적 의지가 놀라웠다. 그동안 인디언들에 대해 갖고 있던 내 편견이나 무지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오클라호마 주 서북쪽과 동쪽을 여행하면서 체로키와 오세이지 인디언들의 실체를 이미 확인한 바 있지만, 이곳 중남부에서 만나는 치카샤 인디언들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오클라호마 주 전체 153개의 카운티 중 13[그래드(Grad)/맥클레인(McClain)/가빈(Garvin)/폰타탁(Pontotoc)/스티븐스(Stephens)/카터(Carter)/머레이(Murray)/쟌스톤(Johnston)/제퍼슨(Jefferson)/러브(Love)/마샬(Marshall)/브라이언(Bryan)/코울(Coal)]로 구성되어 총인구 318,658명, 면적 2,3456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의 치카샤 네이션이었다.

 

 


치카샤 네이션의 현재 영역[표시 부분은 카운티 이름들]

 


테네시 주에 있던 치카샤 영역

 


오클라호마 주에서 치카샤가 차지하는 부분들과 카운티 이름들

 


치카샤 네이션 영역도

 

177번 하이웨이를 타고 내려가던 중 아이오와 인디언 네이션을 만났고, 그로부터 대략 두 시간 쯤 뒤 치카샤 인디언 네이션이 있는 폰타탁 카운티의 에이다(Ada) 시티에 도착했다. 원래는 스틸워터에서 직접 설퍼(Sulphur)로 달려가려 했으나, 네이션 본부 건물이 있는 에이다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이곳에는 현재 네이션 본부 건물들만 남아 있고, 그들의 실제 역사나 문화는 컬츄럴 센터가 있는 설퍼와 지난 날 이들의 수도였던 티쇼밍고(Tishomingo)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에이다(Ada) 시티에 있는 치카사 네이션 건물의 일부

 


번성한 에이다 시티의 다운타운[현재 도로공사중]

 


에이다 시티 치카샤 네이션 앞뜰에 있는 전사[Warrior]상

 

에이다로부터 30분쯤 걸려 설퍼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치카샤 문화센터[Chickasaw Cultural Center]를 찾았고, 거기서 치카샤 족의 지식인 여성 큐레이터 들로리스(Deloris Jefferson)를 만났다. 마침 관람객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녀와 독대하여 치카샤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설명을 비교적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고, 설퍼에서 하룻밤을 묵고 난 다음 날에 들른 티쇼밍고(Tishomingo)치카샤 의회 박물관[Chickasaw Capitol Museum]’에서도 역시 지성적인 풍모의 여성 큐레이터 플로라 핑크(Flora Fink)로부터 다양한 콜렉션들에 얽힌 정치적인류학적 설명을 들었다. 두 여성 모두 경제적으로 부강하고 문화적으로 생동감 넘치며 활기에 찬 주민들로 이루어진 것이 치카샤 네이션임을 강조하기에 바빴다. 치카샤 문화센터와 의회박물관 모두 치카샤가 이 땅에서 한 때 살다가 사라진 민족이 아니라, 지금도 왕성하게 확장되는 현재와 미래의 민족임을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치카샤의 여성 지식인들을 대표한다고 생각되는 두 사람으로부터 들은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설퍼(Sulphur)시티 치카샤 컬츄럴 센터 전시관의 세련된 모습

 


건축미가 돋보이는 치카샤 컬츄럴 센터

 


치카샤 컬츄럴 센터의 세련된 모습

 


치카샤 컬츄럴 센터의 전시물[독수리 깃털로 만든 추장의 옷]

 


치카샤 컬츄럴 센터에서 만난 큐레이터 Deloris Jefferson

 


치카샤 컬츄럴 센터 전시관의 생활사 자료들[치카샤의 자부심이 드러나 있음]

 


치카샤 컬츄럴 센터 뒷편에 마련된 주거지 모형 위에서 멜라니

 


치카샤 컬츄럴 센터 안뜰에 세운 가족상

 


티쇼밍고 시티의 치카샤 네이션 의사당 건물

 


치카샤 의사당 건물 앞에 세워진 전사 티쇼밍고 상

 

분명치는 않으나 치카샤 족은 원래 촉토(Choctaw) 족과 함께 오늘날의 멕시코에서 시작되어 북미 쪽으로 이주했다 한다. 그들은 미시시피 강 근처에 살고 있었으며, 일부는 남부 캐롤라이나 주의 사바나(Savannah) 타운에도 살고 있었다.

치카샤 족이 미시시피, 앨라배마, 테네시, 켄터키 등지의 사냥터들을 비롯한 큰 땅을 점유하고 있던 때는 다른 부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시절이었다. 그들은 16세기 중반 스페인 사람 에르난도(Hernando de Soto)가 이끄는 탐험대와의 만남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들은 결국 과도한 요구를 하던 탐험대를 공격하여 패주시킴으로써 치카샤가 남동부 인디언 부족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존재라는 평판을 만들어 낸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남북전쟁 이후 백인 이주자들이 서부로 이동하면서 치카샤 족의 땅이 서부 팽창을 위한 주요 타깃으로 부상되었고, 루이지애나 매입지에 있던 미시시피 강 서쪽 땅을 미국정부가 차지하면서 치카샤 족과 다른 동부 부족들을 서부로 이주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은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1832년 이주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치카샤 족은 미국 정부에 굴복했고, 그 조약은 1834년에 다시 협상될 수밖에 없었다새 인디언 구역 안의 미시시피 서쪽에 살만한 땅이 찾아질 때까지 정부의 이주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 조약 속의 주요 조항들 가운데 하나 때문이었다. 

 

 


1890년대의 치카샤 영역도

 

적절한 땅을 찾을 수 없었던 현실의 대안으로 선택된 것이 촉토 족과의 동거였다. 다시 말하여 치카샤 족은 새로운 인디언 구역 내 촉토 땅의 한 부분을 빌려 이주할 것을 강요당한 것이었다. 1937년의 조약이 바로 그것인데, 자신들의 정체성[identity]을 잃고 촉토 족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이 사실 그들에겐 가장 큰 문제였다. 촉토 족 의회에 대표를 파견하긴 했지만, 그로 인해 자신들이 촉토 네이션의 소수자가 되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불평등과 불합리를 해소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투쟁을 기울인 결과 드디어 1837년 촉토 족으로부터 완전한 자신들의 땅을 매입하기로 조약을 맺는 데 성공했고, 1855년의 새로운 조약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네이션을 다시 한 번 갖게 되었다. 이런 시대가 1907년까지 지속되었으나, 인디언 구역이 오클라호마 구역과 통합되면서 이 지역은 오클라호마 주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렇게 치카샤 네이션이 종말을 고함에 따라 모든 치카샤 인들은 결국 미국인으로 통합될 수밖에 없었다.

 

 


치카샤 의회 박물관 간판




치카샤 의회 박물관 입구

 

1907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치카샤의 혈통이나 연고를 계승한 비공식적 기구들 몇 개만 있었을 뿐, 치카샤 네이션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1856년의 치카샤 헌법에서 치카샤 인들은 부족의 추장이나 족장을 갖던 수준으로부터 선출된 거버너(Governor)’를 갖는 수준으로의 문명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정부에 대한 치카샤 인들의 권리나 땅 문제에 대한 협상 등 거버너가 수행해야 할 많은 일들을 미국의 대통령이 맡아서 처리하게 되었으므로, 이 시기가 치카샤 네이션에게는 사실상 죽은 기간(Limbo Period)’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인디언 운동가들이 거국적인 활동을 벌임으로써 인디언들의 권리가 새삼 사람들의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고, 그 덕에 치카샤 족도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1983년 치카샤 네이션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헌법이 채택됨으로써 이 운동은 절정에 올랐으며, 결국 네이션은 오늘날의 모습으로 확대발전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치카샤 족이 강제이주를 당하면서 먼저 이주한 촉토 족과 5년 간 힘든 협상을 계속했다. 그 결과로 1836년 땅을 사들이기로 합의한 뒤, 우선 53만 달러에 촉토의 서쪽 땅 대부분을 매입하여 1837년 상당수의 치카샤 인들을 이주시켰다는 점, 미시시피 강을 건너는 눈물의 여정[Trails of Tears]에서 500명 이상이 이질이나 천연두로 죽어나간 고통을 감내하면서 결국 현재의 땅에 안착하여 보금자리를 꾸린 점 등은 치카샤 족을 범상하게 보아 넘길 수 없게 하는 역사적 사건들이다전체적으로 우수한 자질을 갖춘 데다가 티쇼밍고(Tishomingo)나 잔스턴(Douglas H. Johnston) 같은 걸출한 지도자들 덕에 그들은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미합중국의 일원으로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사 티쇼밍고(Tishomingo)의 모습 

 


초대 거버너 Douglas H. Johnston과 그의 집무실

모든 인디언 네이션들이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우리가 찾은 치카샤 네이션은 가족과 민족 공동체, 역사 유산 등이 보존되고 확산되어온, 문화적 발효의 공간이었다. 국가가 부족의 독점적 운영권을 보장한 카지노들이 상당수의 인디언 부족들에서는 부족원들을 나태하고 해이하게 만드는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이들은 그런 수입을 무의미하게 탕진하는 대신 2세 교육이나 산업에 대한 재투자를 통해 미래의 재원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예컨대 자신들의 2세들이 돈 한 푼 내지 않고 대학을 다닐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투자의 좋은 사례임을 티쇼밍고 치카샤 뱅크 뮤지엄의 큐레이터는 적극 강조했다.

 

 


The Bank of the Chickasaw Nation 건물[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음]

 


뮤지엄 안의 각종 옛 서적 및 장부들

 


뮤지엄 안의 캐쉬어 창구

 


뮤지엄에 소장된 당시 은행의 금고

 


뮤지엄의 큐레이터와 함께

 

티쇼밍고에서 30분 거리의 Chickasaw White House에서 읽어낸 그들의 정신도 그와 부합하는 것이었다. 1895년 오클라호마 밀번(Milburn)에 세워진 이 집은 1898년부터 1971[이 해에 이 건물은 국가 등록 사적지로 지정되었음]까지 치카샤의 거버너 잔스턴(Douglas H. Johnston)과 그 후예들이 살던 저택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자신들의 거버너가 살던 집을 ‘White House’로 불렀을까. 백인 중심으로 꾸려가던 미합중국에 결코 꿇리지 않겠는다는 치카샤 나름의 민족적 자존심이 그런 이름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미국을 이끌고 나가는 백인들이 워싱턴에 ‘White House’를 갖고 있듯이 자신들도 이곳 오클라호마의 밀번에 자신들만의 ‘White House’를 갖고 있노라는 자존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우리가 만난 치카샤 인들 모두 그런 자존심을 갖고 있었다.

 

 


Chickasaw White House

 


화이트 하우스의 거실

 


화이트 하우스의 식당


화이트 하우스 주인의 서재

 


화이트 하우스 안내원과 함께 한 멜라니

 

***

우리는 밀번으로부터 한 시간 가량 달려 촉토 땅의 듀랭(Durant)이란 도시에 들어갔다. 우리의 관심은 이곳에 있는 삼강 계곡 박물관[Three Valley Museum]’과 와쉬타 포트(Washita Fort)였다. ‘어쩌면 이곳에서 치카샤와 촉토의 겹치는 문화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안고, 도심의 작은 호텔에서 잠을 청했다.

 

 

*치카샤 명칭 표기[Chickasaw/Chickasha]' 및 그 발음에 관한 문제

치카샤 컬츄럴 센터 큐레이터 들로리스(Deloris Jefferson)의 설명에 따르면, 치카샤 인들은 자신들의 명칭을 'Chickasha'로 적고 '치카샤'로 발음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공적인 문서들 대부분에는 'Chickasaw'로 적혀 있으며, '치카사' 혹은 '치카소'로 발음한다. 그러나 치카샤 인들은 미국식 보다는 자기들의 방식을 더 선호한다고 했다. 나는 'Chickasaw'라는 미국의 공식 표기를 존중하되, 치카샤 인들의 생각도 존중하여 실제 발음은 '치카샤'로 하고자 한다. 

 

**치카샤 실[Seal, 문장(紋章)]에 대한 설명 

원 안에 있는 치카샤 전사의 모습은 치카샤 인디언들이 예로부터 위대한 용기를 지닌 사람들임을 상징하고, 그가 들고 있는 두 개의 화살은 치카샤 부족사회의 두 분파를 의미한다. 그 전사는 동쪽에 있는 고향을 버리고 서쪽의 촉토 사람들의 땅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추장 티쇼밍고다. 티쇼밍고는 치카샤 인들이 추앙하는 민족적 영웅이다. 티쇼밍고는 그의 부족원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트레일 도중인 1838년에 죽었다. 치카샤 인들은 그들만의 네이션을 만들기 위해 1856년 촉토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네이션을 만들어 그 수도를 티쇼밍고 시티로 명명했으며, 문장(紋章)으로 그의 용기를 선양했다. 1867816, 새 치카샤 네이션의 헌법에 따라 만들어진 이 문장은 치카샤 네이션이 호클라호마 주에 편입, 해산될 때까지 모든 공식 서류들에 빠짐없이 첨부되어 왔다.

 

 


치카샤 네이션 문장[紋章, seal]

 


Chickasaw Council Museum에서 컬렉션들을 일일이 설명해 준 큐레이터 Flora Fink

 

 


다운타운의 치카샤 음식점에서 Flora Fink와 함께 한 점심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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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3.12.15 11:15

 

 

 

왜 우리는 이렇게 하지 못하는가?

 

 

 

어렵던 시절, 궁색한 현실에 비해 가당찮게 큰 욕구를 가졌었기 때문일까. 졸업식에 관한 내 추억은 온통 잿빛 일색이다. 1978년도 내 대학 졸업식은 참으로 우중충했고, 1981년도 석사학위 수여식과 1986년도 박사학위 수여식은 번잡하고 무성의하여 도무지 아무 감흥도 느낄 수 없었던, 그야말로 서운한행사들이었다그 후 대학인들의 타성이 고착되면서 졸업식에 관한한 행사를 위한 행사를 반복해왔고, 오늘날에 이르러 대학 졸업식은 지리멸렬그 자체로 전락해 버렸다.

 

독자 여러분 가운데 최근의 대학 졸업식에 가본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졸업생들은 식이 시작되어도 식장에 들어가지 않는다. 흡사 사진 찍는 일이 졸업식의 전부인양 카메라를 껴안은 채 식장 바깥에서만 어슬렁거린다. 모처럼 자식의 학교를 찾은 학부모들도 식장 안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들어가 봐야 재미 없고 지루하기만 할 것이며, 무엇보다 당사자인 자식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기를 쓰고 들어가 앉아 있을 부모는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바깥은 인파로 북적대는데, 그 넓은 식장 안의 좌석들에는 석박사학위 받는 몇 사람과 수상자 몇 명만 듬성듬성 앉아있을 뿐이다.

 

왜 그럴까. 간단히 말하면, 졸업식을 주관하는 대학 측의 철학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졸업식은 학교당국과 교수들이 그 행사의 핵심인 졸업생을 위해 가족을 초청하여 갖는 학교 최대의 행사인데, 졸업생들이 철저히 소외 되고 있는 것이 한국 대학 졸업식의 현주소다. 

 

근래 어느 대학의 졸업식에 참석해 보았다. 그 넓은 단상에는 내빈들과 동문회 인사 등 외부 초청 인사들이 그득하고, 그 한 가운데 지역구 국회의원이 총장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총장의 연설이라는 게 왜 그리 장황하고 요령부득인지 참으로 한심했다. 하기야 우리나라 주요 일간신문들은 스피치 라이터가 써주는 큰 대학 총장들의 축사 전문을 경쟁적으로 싣던 때도 있었으니,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있을 수 없었다. 각 대학 스피치 라이터들의 글 솜씨나 한 번 맛보라는 이야기였을까. 내빈축사는 왜 그리 많으며, 내용 또한 중언부언(重言復言) 지루하단 말인가. 그 많은 졸업장과 상장들은 왜 하필 졸업식장에서 일일이 수여해야 하는가. ‘이하 동문(以下 同文)’을 일일이 외쳐대면서도 서너 시간을 끌어가니, 그나마 상장이라도 받지 못하는 대부분의 졸업생들이 앉아 있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런 고문을 당하고 나면 자신의 졸업이 어찌 영광스러울 것이며, 어찌 모교에 대한 사랑인들 생길 것인가.

 

***

 

그간 가까이 지내던 브라이언 군이 이 대학에서 2년을 단축하여 조기 졸업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 그 졸업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전기에 속하는 본 졸업식은 이미 5월에 있었고, 이번은 후기에 속하는 이른바 '코스모스 졸업'이었다. 규모가 작아 대충대충 진행되리라는 우려가 있었을 뿐 아니라, 대학 졸업식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도 오래 된 터여서 별 감흥은 없었지만, 정리로 보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졸업생들의 가족과 친지들은 물 밀 듯이 밀려들었으나, 모두 정시에 입장을 끝내고 경사 진 3면의 관객석에 안전하게 좌정했다. 식장인 실내 농구장의 바닥에는 졸업생들이 앉을 의자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고, 정면의 단상에도 그리 많지 않은 좌석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예정된 시각에 총장이 단상으로 나오더니 놀랍게도 그 스스로 식을 주재하기 시작했다. 총장의 말에 따라 이 대학 파이프 밴드가 행진곡을 연주한 뒤, 브라스 밴드의 연주에 맞추어 졸업생들이 두 줄로 들어와 마련된 의자에 착석하기 시작했다. 졸업생들의 착석이 끝나자 스코틀랜드 전통복장을 한 파이프 밴드의 연주와 선도로 단상에 앉을 인물들이 질서정연하게 입장했다. 그 다음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미국 국가[The Star Spangled Banner]우렁찬 목소리로 제창했다. 이어 오클라호마 주의 노래인 'Oklahoma'를 부른 다음 본격적인 졸업식이 진행되었다.

 


OSU 농구 경기장에 꾸민 졸업식장

 


졸업식장 전경(좌, 우, 뒷면 등 3면에 가족과 친지들이 앉아 있다)

 


가족과 친지들이 일어선 가운데 졸업생들이 줄지어 입장하고 있다.

 

총장은 우선 특별한 몇몇 손님들을 소개했고, 그 가운데 세 사람[주 교육위원회 의장, 교수협의회 의장, 오클라호마 주 하원의장]이 각각 1~2분 정도의 아주 간단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졸업축하 인사를 했으며, 이어 학위증 수여가 있었다졸업생들은 호명되는 대로 단상에 올라 총장, 학장, 학과장 등과 악수하고 사진 찍기 위한 포즈를 취한 다음 자기 자리로 내려가는데, 좌석 부근엔 해당 학과 교수들이 함께 모여 기다리다가 자리로 돌아오는 졸업생들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졸업생들이 호명되어 단상으로 올라갈 때마다 관객석의 가족이나 친지들은 괴성에 가까울 정도의 함성을 질러대는 장면들이었다. 졸업식의 즐거움을 그들은 그렇게 표현했고, 당사자들 또한 단상으로 나가면서 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졸업생 모두를 단상으로 불러 올려 격려함으로써 그들에게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려는 배려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입장한 졸업생들과 객석의 가족 및 친지들이 일어서서
단상에 앉을 인사들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단상에 앉을 인사들이 입장하고 있다.

 


졸업생들에게 학위증을 수여하고 있다. 졸업생 좌석의 교차로에서
교수들이 축하인사를 건네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졸업장 수여가 끝나자 졸업생들도 단상의 인사들도 관객석의 가족이나 친지들도 함께 모교의 노래[OSU Alma Mater]’를 부르는데, 내 주변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얼마나 큰지 깜짝 놀랄 정도였다. '모교의 노래'가 끝나고 단상의 인사들이 줄 지어 퇴장한 뒤 졸업생들도 들어올 때의 역순으로 퇴장함으로써 졸업식은 끝이 났다.

 

***

 

그 흔한 꽃다발도 없었다. 식장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졸업생도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시간이 되자 악대의 선도를 받아 질서정연하게 들어왔고, 정확하게 준비된 의자를 모두 채워 앉았다어쩌면 이렇게 개인주의의 천국인 미국에서 마치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질서정연하게 행사를 진행할 수 있단 말인가. 식 초반에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와 주가(州歌) 함께 소리 높여 부르며 단합정신[team spirit]을 확인하는 듯 했다어느 순서 하나 필요 이상으로 늘어지는 게 없었다. 모두가 졸업생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영예와 모교에 대한 자부심을 갖도록 치밀하게 조직된 극본을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모든 참석자들이 기립하여 국가와 주가 등을 제창하고 있다.

 


가족 및 친지들의 모습

 

사실 대학 졸업식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나였다. 그러나 식이 시작되면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일순 나를 긴장시켰다. 식순이 하나하나 진행되면서 서서히 감동이 일기 시작했다. 장황하거나 지루하지 않아 초점을 살리면서도 모두를 배려하는 세리머니는 예술 자체였다. 스피치에 참여한 모든 인사들도 하나같이 사전에 입을 맞춘 듯짤막한 멘트 속에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교훈을 담으려 노력한 것 같았다.  

 

이 대학과 아무런 관련 없는 나도 식이 끝나면서 내심으로 작지 않은 변화를 느꼈다. 그건 또 다른 버전의 감동이었다. 개인주의를 넘어선 단합정신. 여기서 미국의 무서운 힘이 나온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미국에도 대학의 서열이 엄존한다. 그러나 그들은 무턱 댄 자기 비하자기 우월에 빠지지 않는다. 그 서열이란 모든 요소들을 반영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자기 대학의 장점을 찾아 열심히 노력하는 데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이들의 최대 장점이다. 추운 날 담요를 싸들고 경기장에 나가 모교 응원에 참여하는 이 대학의 졸업생들. 그들이 바로 초강대국 미국을 유지해가는 사람들이다. 허구 한 날 좁쌀들끼리 비교하며 경쟁심만 부추기고, 모든 사람들을 자기 비하에 빠지게 하는 우리나라 대학들의 행태는 이쯤에서 청산해야 한다. 헛된 자존심을 버리고, 배울 건 배워야 한다.

 


브라이언(왼쪽에서 세번째)과 친구들

 


브라이언 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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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성원

    벌써 수 십년 동안 한 해에 두 번 씩은 보았을테니 무질서 할 듯한 자유분방 속의 질서를 보게 된 놀라움 이해가 가고 부럽기만 할 따름이지. 요즘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예행연습 무지 많이 했었는데... 그러한 행위들의 지속적인 퇴적물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지금이라도 바꾸어야 하는데... 바꿀 수 있겠지? 아떻게 해야 할까?
    "개인의 존엄성을 중시한 개인주의와 행동을 필요로 하는 목표가 아닌(변질된) 욕심을 중시하는 이기주의?의 차이에서 초래된 결과물이 아닐까 " 라고 추측해 본다.
    20세기 말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나에게는 스스로 지키려고 노력하는 운전 습관이 한 가지 생기게 되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행자 우선"
    5년전 호주의 멜번에서 유럽에서 보았던 "보핸자 우선"의 원칙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젊은 훈전자들이었다.

    2013.12.16 23:12 [ ADDR : EDIT/ DEL : REPLY ]
  2. 백규

    성원, 참 좋은 말이네. 자네도 현지에서 그런 걸 느꼈구먼. 나는 미국사람들이 턱없이 자유롭고 무질서한 줄로만 알았거든. 천만에! 규정이나 법을 철저히 지키는 이들의 태도를 보면 참 존경스러워. 그 뿐인줄 아나? 어딜 가나 국기가 게양되어 있어. 심지어 교회나 성당에도 성조기가 펄럭이고 있어. 얼마 전 우리나라 장학사라는 작자가 어떤 행사장에서 "귀찮으니 국민의례를 생략하자!"고 했다던가? 교육의 최일선에 서 있다는 자가 그런 정도니 우리가 얼마나 속속들이 썩었는지 알 수 있지 않겠나? 사실 미국인들이 개인주의에 철저하지만, 애국심으로 뭉칠 때 보면 너무 무서울 정도야. 그들이 졸업식장에서 너나 할 것 없이 목청껏 그들의 애국가를 부르는 걸 듣다 보니 우리의 처지가 한심해지더군. 우리의 공공 행사에서 애국가 제창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 모두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부르는지, 마는지...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고 말하겠지만, 최소한의 형식도 갖추지 못하면서 무슨 내용을 논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 반성해야지.

    2013.12.17 23:27 [ ADDR : EDIT/ DEL : REPLY ]
  3. 나그네

    그런데 후기졸업이라 하지만, OSU의 졸업생이 이 정도밖에 안되는가요? 한국 대학의 졸업생도 이 정도 규모라면 이렇게 할 수 있으련만, 이토록 깔끔하게 하려면 수가 너무 많지 않을까요?

    2013.12.22 04:23 [ ADDR : EDIT/ DEL : REPLY ]
  4. 백규

    이 학교의 경우 후기졸업이라 해도 졸업생 수는 꽤 되지요. 그래서 졸업식을 세 번에 나누어 하네요. 이번의 경우를 보면, 12월 13일(금요일) 저녁에 대학원 졸업식을, 14일(토요일) 오전에는 'College of Human Sciences/College of Engineering, Architecture and Technology/Spears School of Business' 의 졸업식을, 오후에는 'College of Education/College of Agricultural Sciences and Natural Resources/College of Arts and Sciences' 등의 졸업식을 각각 갖더군요. 그러니 장소나 시간 등이 여유로울 수 있지요. 학부와 대학원 졸업을 한꺼번에 치루느라 졸업생, 학부모 등 수천 명이 북적대는 우리네 졸업식과는 상황이 다른 것 같습니다.

    2013.12.22 09:14 [ ADDR : EDIT/ DEL : REPLY ]

글 - 칼럼/단상2013.10.05 08:22

 

빛나는 한국학생 Hyunjun Brian Choi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은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창 자식들을 키울 때엔 그 녀석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모자랐는데, 이제 웬만큼 홀로서기들을 했다고 생각되면서 내 눈에 다른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강의실에서도 학생들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내 시야에 들어온다. 요즘 들어 부쩍 남학생들은 아들로, 여학생들은 딸이나 며느리로 바꾸어 생각해보는 경우가 잦아졌다. 운 좋게도 나는 지금까지 학생들을 만나면서 거의 저런 학생을 아들이나 딸로 둔 부모는 참 좋겠구나!’, ‘저런 아이는 며느리 감으로 딱인데!’, ‘참 잘 키웠구나!’ 등의 생각만을 갖게 되었으니, 참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자랑스럽게도 이처럼 내 주변에는 반듯하면서도 이쁘고 착한학생들뿐이다.

 

잠시라도 해외에 나가 산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인 동시에 잘 몰라서 불안한 일일 수도 있다. 미국 내의 연구기관을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으로 결정하고 대부분의 중요한 서류작업들을 끝낸 뒤에야 비로소 우리가 이곳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대학의 학장, 학과장, 외국인 학자 관리처, 주택 관리처, 풀브라이트[미국 본부 및 한미교육위원단], 대사관 등 우리가 접촉한 기관이나 부서들 모두 공적인 업무 상대들일 뿐이었다. 친척이나 친구 등 좀 더 사적이면서도 내밀한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상대는 아무도 없었다.

 

답답한 나머지 사이트를 뒤지다가 이곳 대학의 한인학생회를 발견했고, 궁여지책으로 회장에게 이메일을 보냈으나 답장이 없어서 부득이 부회장에게 이메일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자 득달같이 생동감 넘치는 문체의 영문 답신메일이 날아왔다. 그가 바로 ‘Hyunjun Brian Choi’였다. 어려서 이곳에 왔기 때문에 한글을 쓰는 것보다 영문을 쓰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편하여 영문으로 이메일을 쓰게 되었노라는 해명까지 덧붙여가며 이곳 생활의 이면들을 자세하게 적어 보내온 것이었다. 참으로 예의 바르고 의젓하면서도 주도면밀한 그의 이메일을 받아보곤 호기심이 생겼다. ‘한인 학생회의 부회장이라니, 대학원생 쯤 될 것이라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몇 번 오고 간 그와의 메일 연락 덕에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에 올 수 있었다.

 


Cafe 88에서 


레스토랑 Bad Bread에서 


OSU의 풋볼 경기장 Boone Pickens Stadium에서               
                                                                                                       

와 보니 정착이 쉽지 않았다. 시차 적응이 쉽지 않아 눈꺼풀은 스르르 내려앉는데 시장은 가야하고, 시장을 가려면 차가 있어야 하는데, 차를 사는 절차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이메일을 보내자 또 자세한 이메일을 보내왔다. 그의 이메일을 통해 연결된 분이 바로 기계공학과의 장영배 교수였다. 장 교수의 호의로 우리는 나머지 정착과정을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브라이언을 집으로 불렀다. 아직 차를 구입하기 전이었다. 시장을 가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고 하자 강의가 끝나는 즉시 친구의 차를 빌려 몰고 부랴부랴 와 주었다. 놀랍게도 그는 앳된 학부 3학년생이었다. 첫 인상이 착하고 성실했다. 말을 시켜보니 의젓하고 생각 또한 깊었다. LA에 있는 명문 고등학교를 마친 다음 대학 기간을 단축하려는 계획을 갖고 이 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한 그였다. 벌써 1년 반이란 기간을 단축했단다. 학부를 졸업한 뒤에는 로스쿨에 진학하여 국제변호사[아마 경제 전문 변호사가 목표인 듯하다.]로 활약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이미 한국의 유수한 로펌에서 인턴의 경력도 쌓아놓았다고 했다. 매학기 학점을 초과 이수하면서도 아주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 그였다. 예컨대, 상위 10% 이내의 학생들만 가입할 수 있는 ‘National Society of Collegiate Scholars’, ‘Phi Eta Sigma’, ‘Golden Key International Honor Society’ 등의 멤버로 활약하는 것만 보아도 그의 출중한 능력은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2012년에는 ‘Baugh, Russell, and Florence’ 장학금을 받았고, 2012년 봄 학기, 2013년 봄여름 학기에는 우등생으로 학장의 상을 받았으며, 2012년에는 총장으로부터 우등상장을 받기도 했다.


Boone Pickens Stadium 건물 1층에서 

         

브라이언이 속한 College of Honors 건물 

 

나는 해외에서 빛나는 우리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나라의 밝은 미래를 보게 된다. 물론 국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일도 중요하고 어렵다. 그러나 낯설고 물 선 해외에서 그들과 경쟁하여 앞서나가는 일은 더욱 어렵다. 어머니의 젖과 함께 물려받은 모어[mother tongue] 사용자들을 능가하는 실력을 발휘하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영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아이들과 경쟁하여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할 것인즉, 그 나이 또래에 누구나 맞이하는 질풍과 노도’, 내부의 욕망과 외부로부터 밀려드는 유혹들을 억누르거나 물리치고 시시각각 침투하는 외로움과 맞서가며 자신을 제어한다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브라이언이 풍겨내는 담담한 내면을 통해 나는 범상치 않을 그의 부모를 떠올리게 되었고, 그의 빛나는 미래를 점치게 되었다. 브라이트(bright) 브라이언 만세!!!

 


백규 연구실에서 브라이언과 함께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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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덕회

    저런 학생들을 보면 우리의 미래가 걱정스럽지는 않은데, 이곳, 특히 일반계 고등학교의 학생들을 보노라면 솔직히 겁이 난다네, 우리 교육이 어쩌다 이렇게 망가졌는지, 어떻게 바로 잡아가야 할런지. 그저 한숨만 나온다네. 그런 속에서 지내다 보니 교육에 대한 열정도 없어지고, 학생들에 대한 애정도 식어가고 있지. 그 곳에서 중고등학교의 교육을 좀 배워 오게나, 어떻게 브라이언 같은 학생들이 나올 수 있는지, 물론 모든 학생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

    2013.10.05 21:58 [ ADDR : EDIT/ DEL : REPLY ]
  2. 덕회,
    여기서 만나니 반갑군. 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 교육이 망가졌다지만, 따지고 보면 대학도 내면적으로는 많이 망가졌다고 할 수 있지. 이곳의 교육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그 점에 대해 사람들과 많이 이야기 해보겠네. 그나저나 능력 출중하신 고참 선생님이 그렇게 약한 말씀을 하시면 어떡하나? 후배들 한 번 군기좀 잡아보게나.

    2013.10.06 12:3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