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7. 26. 17:45

싸드(THAAD)와 중국의 커밍아웃

 

 

 

 

근자 싸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우리 사회의 이슈로 떠오르면서 우리 모두 그간 잊고 있던 중국의 정체와 본질을 아프게 깨닫는 중이다. 유사 이래 우리는 단 하루도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무슨 논리로 합리화하려해도, 중국과의 관계는 항상 침략과 굴종/지배와 피지배의 식민주의적 패러다임에 갇힌 채 지속되어 왔다. 그들이 자신들의 족속을 우리의 왕으로 세운 적도, 우리 땅을 봉토(封土)로 활용한 적도 없건만, ‘사대(事大)’라는 중세적 외교의 명분 아래 그들은 식민주의자들 이상의 폭압과 전횡을 부려 온 것이 사실이다.

 

혹자는 그들로부터 한자와 한문을 들여왔고, 유교불교도교 및 제자백가 등 사상이나 사유체계를 도입했으니, ‘가르침과 배움이란 선한 관계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역시 크게 보아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굴종의 역사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전혀 바뀌지 않고, 오히려 진화하는 양상을 발견하게 된다625 때 마오쩌뚱이 김일성을 도와 한반도의 통일을 결정적으로 막은 항미원조(抗美援朝)’의 타산적 명분이야말로 지금까지 이 지역의 정치적이념적 지형을 주도해온 굴종적 역사의 또다른 구도라 할 수 있다.  

 

항미란 무엇인가. 자신들의 눈앞에서 통일 한반도를 재현시킬만한 힘을 지닌 미국에게 대항하겠다는 것이다. ‘원조가 말만으로는 자신들의 괴뢰인 북한을 돕겠다는 것인데, 처음부터 그 말의 이면에는 북한을 살려서 미국에 대항하는 주구(走狗)로 삼겠다는 뜻이 들어 있었고, 그 해석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이미 마오쩌뚱 당시부터 북한의 효용가치는 미국에 대한 견제 카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대규모 원군(援軍)을 출병시켜 망하기 일보직전의 김일성을 구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한반도 전체를 김일성 치하에 놓이도록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좀 더 확실한 대미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 625에 참전한 마오쩌뚱의 원대한(?)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중국은 시종일관 북한의 후원자 혹은 후견인 노릇을 하면서 독점적으로 열매를 따왔다. 그런 그들의 행태는 개혁 개방 이후라고 달라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물건 팔고 돈 벌어오는 새 시장 남한과 거래를 시작했으니, 그들로서는 이제 한반도에 관한한 알 먹고 꿩도 먹는단계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냉전시대에는 냉전시대대로, 탈냉전시대에는 탈냉전시대대로 한반도는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일 뿐이다.

 

그로부터 몇 발 더 내디딘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 바로 시진핑의 행보와 2006년부터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대국굴기(大國崛起)’의 결합이다. 최근 중국은 '샤오캉(小康)'에서 '화평(和平)굴기'를 거쳐 비로소 '대국굴기'의 본심을 단계적으로 만방에 드러내 왔다. 그것이 시진핑 체제의 등장과 함께 떠오른 '중국몽(中國夢)'과 직결되는 말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Chinese Dream! 일견 멋진 듯하지만, 주변의 소국들을 아연 긴장시킬 만큼 고약한 것이 바로 그 말이다. 만주벌판도, 한반도도, 일본도, 동남아도 모두 손아귀에 쥐고 호령했던 그 옛날 '천자의 나라' 즉 중화제국을 복원하는 것. 바로 그것이 지금 중국의 전권을 거머쥔 채 실질적으로 황제 행세를 하고 있는 시진핑의 꿈이자 중국 지배계층의 꿈이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의 집권세력도 '한국 따위'는 애당초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 늘 중원의 정치적 향배를 예의주시하며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워온 게 조선이었고 한국 아니던가. 모처럼 실용외교를 추구하던 광해군을 당당하게(?) 제거하고 인조를 옹립한 서인 반정세력이 향한 곳은 망해가는 명나라였다. 서슬 퍼렇게 중원을 먹어가던 누르하치를 애써 외면하며 한사코 망해가던 명나라에 빌붙고자 한 반정세력의 눈에는 오직 작은 한반도 안에서의 보잘 것 없는 권력만이 관심사였을 뿐 민족이나 국가, 백성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백성들이야 그들의 말발굽에 짓밟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의 어이없는 패거리들, 힘을 가진 어느 누가 중원의 지배자가 되어 우리에게 압박을 가해오든 그에게 빌붙어 자신들의 목숨과 권력만 부지하면 그만인 '망종(亡種)'들이었다. 그들과 단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군상이 바로 지금의 이른바 '정치인들'이다. 아무런 식견도 밸도 없으면서 알량한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뒤집어 쓴 채 권력과 돈만 탐한다는 점에서 17세기의 그들과 정확히 부합하는 한심한 '불량배'들이다. 국민들을 편 갈라 싸움질시키는 행태를 보면, 오히려 당시의 그들보다 훨씬 더 사악하고 음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중국은 중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우리를 얕보고 덤비는 것 아닌가.

 

2005년 탈북자들에 대한 부당한 횡포를 항의하기 위해 중국 본토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김문수 전 의원이 무도한 중국 공안들에 의해 폭행을 당한 사건을 기억들 하시는지? 나는 1624년 혹독한 겨울 명나라의 관원들에게 수모를 당하던 주청사행의 정사(正使) 죽천 이덕형(李德泂)의 사건을 김문수 의원의 사건과 비교하며 민족의 자존심이란 제목의 글을 조선일보(2005. 1. 17.)에 기고한 바 있고, 중국 당국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김영환 씨의 사건을 통해 김문수 의원 사건이후 전혀 바뀌지 않은 중국의 태도를 간파하고 중국은 무도(無道)'깡패국가', 세계 평화의 최대 걸림돌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이 블로그(2012. 8. 1.)에 올린 바 있다. 통탄스럽게도, '1624년2005년2012년'을 거쳐 드디어 2016년의 싸드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한국이 제 나라 제 국민을 지키겠다고 싸드를 배치하려는데, 못하도록 위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 중국이다. 그들의 눈에 한국은 자기네 나라의 한 성()에 불과할 뿐, '독립된 국가'가 아닌 것일까. 그간 핵을 개발하겠다고 광분하는 북한을 제재하겠노라고 선언한 것은 그야말로 제스처였고, 어떻게든 북한을 살려서 미국에게 달려드는 사냥개로 만들겠다는 것이 진정한 속내였던 것이다. 뼈다귀 몇 개 던져 놓으면 저희들끼리 물고 뜯는 싸움질로 날들을 지새울 게 뻔한 남한 쯤 굴복시키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라는 판단도 저들 내부적으로는 이미 서 있으리라.

 

***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를 선언한 미국이 일본, 한국과 손을 잡으면서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된 것은 시진핑의 이른바 '중국몽'이다. 바야흐로 자신들의 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는 한국. 이미 품에 안겨있는 북한과 남한을 동시에 집어 삼키면, 일본쯤이야 큰 문제 아니라는 계산이 서 있었으리라. 이처럼 중국몽의 실현을 통해 세계의 중심 즉 '중화대국(中華大國)'으로 굴기해야겠는데, 일이 하나로 뭉치면 그 꿈은 자칫 '백일몽(白日夢)'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어려운 현실과 마주친 것이다. 제재를 이행하는 척 적당히 세계의 눈을 속이며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개발하여 미국에 맞서게 하려는 중국으로서는 그런 꼼수까지 간파되고 말았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 당황함과 분노를 누구에게 옮길까. <<논어(論語)>>옹야편(雍也篇)'불천노(不遷怒: 이쪽에게 성낼 것을 저쪽에게 옮기지 말라)'는 남한을 향해 수백기의 미사일을 배치해 놓았다는 산동성 노나라 출신의 공자께서 하신 말씀이다. 땅덩어리만 크다고 대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먹만 세다고 리더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유교의 핵심은 도()와 덕()이다. 무도(無道)하고 부덕(不)한 개인은 깡패나 강도일 수밖에 없고, 그런 나라는 깡패국가나 강도국가일 수밖에 없다. 중국이 중국몽을 실현하려면 우선 깡패국가의 굴레를 벗고 주변 국가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존경 받을 만한 도와 덕도 없으면서 아무리 미사일을 많이 만들고 항공모함이나 전투기를 많이 만든들, 종당에는 고철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는 진리. 지금 당장 시진핑 주석과 중국의 지도층은 그 간단한 진리를 역사로부터 배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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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2. 7. 28. 15:00

 

                      

<민스크의 벨라루스 오페라 극장>

 

‘저녁이 있는 삶’

                                                                                                                                                          백규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여름만 되면 어김없이 ‘각다귀 떼 날아다니듯’ 지금 수많은 말들이 난무하는 것도 그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다. 영혼이 지워진, 공허한 말들이 귓전을 때리고 사라지는 가운데, 얼마 전부터 우연히 내 마음에 여운을 남기는 한 마디가 있다.

   ‘저녁이 있는 삶’!

 알고 보니 통합민주당 대통령 경선 후보 손학규 선생의 캐치프레이즈였다. 그가 드물게도 정치인들 가운데 내가 호감을 갖고 있던 인사라서 그랬을까. 그 말을 듣는 처음부터 무턱대고 콧방귀를 뀌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릎을 친 것도 아니었다. ‘한국의 정치권’. 바닥이 바닥인지라 처음엔 그저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갈수록 그 말이 내 마음에 일으킨 파문은 파도로 커져갔다. 그러다가 결국 가수 이태원이 세상 사람들에게 넌지시 타이르듯 불러주던 <솔개>의 삶을 동경해온 내게 ‘저녁이 있는 삶’이란 이 말은 참선 수행장(修行場)에서 고승이 질러대던 일종의 ‘할(喝)’*로 바뀌고 만 것이다.
최근 그의 말은 책으로 출판되었다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책을 사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의 현학적 허세가 만들어내는 ‘언어의 감옥’에 갇힐 것 아닌가. KS로 호칭되는 국내 최고의 중⋅고⋅대학을 거쳐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가끔 대중 스피치에서 그 점을 드러내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는 듯한 그의 모습에서 그가 책에 풀어 놓았을 현학의 덫을 예상할 수 있었다. 아수라장 대선 판에서 모처럼 쓸모 있는 말 한 마디를 건졌는데, ‘현학의 수사(修辭)’로 망칠 일이 있겠는가.  
   ***
 몇 년 전 러시아 생뜨 뻬쩨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백조의 호수>를 관람한 적이 있었다. 입장료가 비싼 극장이었는데,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반반이었다. 저녁 무렵 정장차림으로 좌석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인상적이었고, 장면 장면 ‘브라바!’를 외치는 그들이 신기했다. 물론 그들 모두가 잘 사는 사람들은 아니었으리라.  
 얼마 전 다녀 온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 저녁시간에 그 유명한 오페라하우스를 찾았다. 컴컴한 시 외곽지역에 환하게 불을 밝힌 원통형의 그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더 놀란 것은 혹시 빈자리가 날까 기대하며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민들의 모습이었다. 무대 위의 공연에 몰두하던 어떤 할머니는 뒷좌석에서 소곤대던 여학생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입에 대며 눈을 부라리기도 했다. 참으로 품위 있어 부러운 그들의 ‘저녁 시간’이었다.
 대조적으로 미국의 도시들은 ‘알 수 없는’ 저녁시간들을 보내는 것 같았다. 6시쯤 되자 도시들의 다운타운은 약속이나 한 듯 텅 비어 버리는 것이었다. 텁텁한 고요와 노숙자들의 활보만이 그 공간들을 채우고 있었다. 그들의 저녁은 어디에 있는 걸까, 지금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
 몇 번 늦은 밤에서 새벽까지 종로와 명동 거리를 걸어본 적이 있다. 그곳에 생생한 ‘한국의 저녁’이 있었다. 불야성을 이룬 술집들, 해장국집들, 음침한 간판의 룸살롱들, 모텔들... 비틀거리는 취객들,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 한 복판까지 나와 손을 흔드는 사람들, 빵빵거리는 승용차와 택시들이 뒤엉긴 채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어떻게든 낮 시간을 보냈을 그들이 무슨 힘으로 이렇게 ‘찬란한 저녁[혹은 밤] 시간’을 보내는지 같은 한국인인 나도 알 수 없는 광경이었다.
   ***
 아이들을 다 키워놓은 최근에서야 저녁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비뚤어진 아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한결같이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다정한 저녁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언론매체들의 보도를 접하고 나서였다.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연구실에서 불을 밝혀야 하는 것’이 교수직이라고 생각해오던 내게 일종의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아, 나는 출처불명의 그런 말 한 마디에 매여 지금까지 내 가족으로부터 ‘저녁시간’을 빼앗았구나! 나는 ‘나 혼자만의 저녁’을 위해 ‘우리 모두의 저녁’을 희생시켰구나!
 때늦은 후회였다. 아이들은 이미 다 커서 나름대로의 세계를 가꾸고 있고, 아내는 그런 나를 체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닭장을 벗어난 병아리들을 모이로 유인하여 불러들이듯, 새삼 그들을 우리 안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 올 수도 없는 현실. 미물로서 어찌 해볼 수 없는 게 위대한 시간의 작위(作爲)인데, 나는 지금 시간의 준엄한 일갈(一喝) 앞에 무슨 같잖은 저항이라도 해볼 심산이란 말인가. 어쩌면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커다란 구멍이 하나씩 뚫려 있을지 모른다는 깨달음이 후회와 함께 밀려들었다. 그 구멍을 지금 와서 어떻게 메운단 말인가. 내 알량한 저서와 논문 한두 편이 역사와 사회를 바꾸는 것도 아니고, 민족의 장래를 비춰주는 것도 아닌데, 좁좁한 연구실에 갇혀 젊은 날의 찬란한 저녁시간들을 불태우고 말았으니, 이 미련한 처사를 어떻게 변명할 수 있단 말인가.  
   ***
 손학규 선생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든 그렇지 않든, 아니 대통령으로 선출되든 그렇지 않든 ‘저녁이 있는 삶’은 지금껏 대한민국 국민들이 잊고 있던 소중한 삶의 지표로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 표어를 국민들의 마음에 각인시키는 정치를 펴야 할 것이다. 이 표어를 대선의 국면에서 벗어났다고 쓰레기통에 쳐 박아서는 안 된다. 대통령 후보들은 이 표어를 소중히 갖고 있다가 당선되는 순간 새 정부의 국정지표 맨 위쪽에 놓아야 할 것이다. <2012. 7. 28.>  


*불교 선종(禪宗)에서 고승이 참선하는 학승들이나 사람들을 지도하면서 질타하는 일종의 고함소리.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이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발하는 것. 즉 말⋅글⋅행동 대신 드러내는, 깨달은 자의 소리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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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학술문2010. 10. 13. 07:59


한국의 종교와 그 소설적 형상화에 대한 분석 『현대소설과 종교적 상상력』출간!!!

그간 현대소설을 꾸준히 탐색해 온 국문학자 방민화 박사가 의미 있는 저서 『현대소설과 종교적 상상력』을 출간했다. 무교,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 등 우리나라 종교들의 본질을 더듬어보고, 그것들이 작가 김동리의 소설에 어떤 양상으로 형상화되어 있는지를 분석한 결과다.
 이 책은 제1부 ‘불교와 구경(究竟)[신라인의 신앙에 나타난 원효의 정토사상-<원왕생가>/불교 수행법으로 본 운명 타개 방식-<불화>⋅<정원>⋅<완미설>/새를 중심으로 한 보살화현(菩薩化現) 설화의 대비-<저승새>/불이사상(不二思想)과 보살적 인간의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 발현-<최치원>/감통(感通)의 세계와 욕망적 담론에 나탄나 희생제의-<호원사기>/자기무화(自己無化)의 극치와 존재론적 자각-<등신불>], 제2부 ’유가(儒家)와 도가(道家)‘[환멸의 세계에서 발견한 ’선(仙전)‘의 징후-<먼산바라기>/신라인의 사랑의 미학과 선비정신-<강수 선생>/유가사상의 관점에서 본 태공망(太公望)의 삶-<용>], 제3부 ’무교(巫敎)와 화랑(花郞)‘[기우제의 가무, 그 승화된 사랑의 결정(結晶)-<수로부인>/화랑과 미륵신앙의 상관성 연구-<미륵랑>], 제4부 ’기독교와 작가의 종교의식‘[인간주의와 민족주의의 결합과 그 결실-『사반의 십자가』/성서적 모티브와 작가의 종교의식-<마리아의 회태>⋅<목공 요셉>⋅<부활>]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은이는 “김동리 작품 뒤에 자리 잡은 관념”에 대한 자신의 지적인 관심이 이 책을 지은 동기라고 밝혔다. 근원에 대한 작가의 모색과 그 소설적 형상화를 확인하고 싶은 독자들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보아, 일독을 권한다.

방민화 지음, 학고방, 2010, 값 18000원/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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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학술문2008. 3. 7. 20:03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 없는데, 너 홀로 내 앞에 있구나!”
    -연행록의 교과서, 그 치밀한 해석적 시각 ;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

54세의 ‘타각’, 연행 길에 오르다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가 정적들과 머리 터지도록 싸우거나, 전야에 숨어 학문에 매진하거나. 17세기 조선의 지식인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둘 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음에도 포기한 채 후자를 택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쟁쟁한 노론 가문의 뛰어난 시인이자 화가이었던 노가재 김창업이 벼슬길을 버리고 세상일을 멀리한 것은 아버지 김수항이 당쟁의 와중에서 정적들에게 몰려 죽음을 당한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강하게 잡아끈 것은 학문이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욕이 벼슬길로부터의 유혹을 막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가 숙원이던 연행 길에 나선 것도, 방대하면서도 치밀한『연행일기』를 남긴 것도 그런 점을 입증한다. 그는 원래부터 중국의 산천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다가 1712년 그의 형인 창집이 ‘사은 겸 삼절연공’ 사행의 정사로 떠나게 되었고, 결국 노가재는 ‘타각’의 자격으로 연행 길에 나설 수 있었다. 54세의 적지 않은 나이였다. 타각이란 사신 일행의 모든 물건을 감수(監守)하는 직책이었다. 그 자리가 하찮다고 할 수는 없으나, 명망 있는 노론 사대부가의 노가재가 맡을만한 직책은 아니었다. ‘조롱과 비난이 일시에 일어났고 친구들은 흔히 만류했다’는 노가재의 술회도 아마 그 때문에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노가재에게 연행 길은 ‘새로운 것’을 찾는 길이었고, 자기 가문이 오래도록 빠져 지내던 이념의 허와 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중국에 갈 수만 있으면 되었지 직책이 무슨 상관이랴!’는 것이 노가재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146일 간 북경을 다녀오면서 방대한『연행일기』와 137수의 기행 시 모음인 『연행훈지록』을 남긴 것도 중국 기행에 대한 절절한 욕구의 소산이었으리라. 19세기 중엽 동지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연경을 다녀와 『연원직지』를 남긴 김경선도 연행록을 남긴 선배들 가운데 노가재와 함께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등을 꼽았다. 노가재의 연행록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고, 후대 연행사들에게 교과서의 위치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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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재의 증조부는 서인 청서파의 영수이자 척화파의 거두인 청음 김상헌이고, 부친인 김수항은 노론의 영수였다. 가계로만 본다면 노가재는 청에 대한 복수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어야 마땅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지니고 있던 화이관이나 소중화 의식이 한으로 맺힐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냉철하리만큼 객관적인 태도로 중원의 문물을 대하고 관찰한 그였다.

화이의 차별적 세계관을 바꾸어가다

노가재는 십삼산의 찰원에서 장기모(張奇謨)라는 호인(胡人) 어린이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너희들은 달자(㺚子)와 친교를 맺느냐?”
“이적의 사람이 어찌 우리들 중국과 어울려 친교를 맺겠습니까?”
“우리 고려 역시 동이(東夷)인데, 네가 우리들을 볼 때 역시 달자와 한 가지로 보느냐?”
“귀국은 상등인이요 달자는 하류인인데, 어찌 해서 한가지이겠습니까?”
“달자들도 머리를 깎으며 너희들도 머리를 깎는데, 무엇으로써 중국과 이적을 가리느냐?”
“우리들은 머리를 깎지만 예가 있고, 달자는 머리도 깎고 예도 없습니다.”
나는, “말이 이치에 맞는다. 네 나이 아직 어린데도 능히 이적과 중국의 구분을 하니, 귀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구나! 고려는 비록 동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의관문물이 모두 중국을 모방하기 때문에 ‘소중화’라는 칭호가 있다. 지금의 이 문답이 누설되면 좋지 않으니 비밀로 해야 된다.”고 했다.

노가재는 내심 청국 사람들을 지목하여 ‘달자’라고 한 것인데, 아이는 그것을 몽고로 오인하여 답변한 것이었다. 이렇게 처음에 노가재는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우월감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그러나 『연행일기』의 후반으로 갈수록 청국을 이적으로 보던 관점은 약간씩 변해 간다. 자기 존재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그런 변화는 생겨날 수 있었다. 연경에서 중국 사람들을 보며 그들과 대비되는 자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객관화 시키게 된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몸집이 장대하며 모양이 우뚝한 자들이 많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을 둘러보니 본래 스스로 작은데다 또 먼 길의 풍진에 시달린 뒤라 세 사신을 빼고는 모두가 다 꾀죄죄하고 착용한 의관도 또한 흔히 여기에 와서 돈을 주고서 빈 것이기 때문에, 도포는 길이가 맞지 않고 사모가 눈까지 내려와 보기에 사람 같지 않으니, 더욱 한탄할 일이다.

이 말은 당시 모습에 대한 사실적 묘사이겠으나, 사실 노가재의 의식 변화를 전제해야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점은 황궁 묘사에서도 확인된다. 태화전 앞 12향로에 침향을 태우던 관례를 없앤 데 대하여 “황제가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인 것 같다” 거나 황궁에 대하여 “장려하고 정제함이 정말 황제의 거처다웠다” 는 등의 언급들이 그런 사례들이다.
청나라 지식인들과 교유함으로써 노가재의 의식변화는 빨라졌다. 예컨대 젊은 학자 이원영(李元英)과의 교제는 상당 기간 지속되는데, 그런 관계를 통해 양국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문화의식의 동질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각종 물화의 풍부함이나 찬란함, 건축·의복·음식·기명 등과 각종 제도의 훌륭함, 도서편찬 같은 문화 사업들의 놀라움 등 그들의 실상을 접하면서 노가재는 자신의 인식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만남을 통해 깨달음을 얻다

그는 천산의 영안사(永安寺)에서 불승 숭혜(崇慧)를 만났다. 그와의 만남은 불교와의 만남이었고,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는 평등의식과의 만남이었다. 헤어질 때 “사람에게 안팎은 있지만 불성은 한가집니다.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라고 던진 숭혜의 말은 노가재로 하여금 그간 굳게 지녀오던 차별의 편견을 깨고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해주었다. 그것은 용천사의 중 운생(雲生)에게 보낸 편지글 속의 “온전히 도력(道力)에 힘입어 영경(靈境)을 두루 밟았으니 구제받음의 기쁨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는 술회에서도 나타난다. 수행하던 젊은 승려 낭연(朗然)에게 준 시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 없는데/너 홀로 내 앞에 있구나/함께 용천사에서 잤으니/응당 전생의 인연 있음 알겠네”도 그런 깨달음의 기쁨을 드러낸다. 그런 깨달음의 실체야말로 인간의 본질과 참된 도리 그 자체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연행을 통해서 노가재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과 문물을 만났다. 달자들은 물론 시정인(市井人)들, 벼슬아치, 학자, 예술인 등 다양했다. 옥전현에 묵을 때는 선비 하나가 춘화도를 팔기 위해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 대목엔 춘화도에 미련과 흥미를 보이는 서장관의 모습도 나타나고, “유학을 공부하는 성문(聖門)의 제자로서 어떻게 춘화도를 품고 와서 남에게 보이시오?”라고 핀잔하는 노가재의 기개도 나타난다. 산해관을 지나면서는 반군 이자성에게 성문을 열어준 오삼계의 사실(史實)에 대한 노가재 자신의 사평(史評)을 개진했는데, 논리가 당당하고 정연하다. 오삼계가 어차피 깨질 산해관을 포기하고 황제의 원수를 갚았으니, ‘임시변통의 의리’는 지켰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명나라의 왕실을 세우지 못하여 천하 사람들의 소망을 저버렸고, 스스로 왕을 참칭하다가 끝내 패망했으니, 그는 이름을 망치고 절의도 잃었다고 비판했다. 이구동성으로 오삼계의 모든 행적을 비판하는 역사서들에 대한 노가재의 반론은 조선 선비의 균형 잡힌 혜안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걸출하다.
연경에 다녀오기까지 걸린 기간은 146일, 총 거리는 6천 28리인데, 연경에서 출입하거나 길에서 돌아다닌 것이 6백 75리이며, 시문(詩文) 402편을 얻었다고 노가재 스스로 『연행일기』의 말미에서 밝혔다. 그는 왜 그곳에 가려 했으며, 책의 말미에 돌아다닌 거리와 얻은 시문을 특별히 들어 놓았을까. 중국에 가기 전 노가재는 중국에 관한 서책들을 많이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오랑캐의 차지가 되긴 했지만, 중국은 세계 그 자체 혹은 세계를 만나는 창이었다. 어쩌면 그는 오랑캐도 사람임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나 아닐까. 증조부가 청나라에 적극 대항하던 김상헌이었고, 부친 역시 청국을 이적시하던 노론의 영수였다. 노가재는 분명 그런 가문의 이념으로부터 벗어나 세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게 지식인의 본령이니, 노가재는 그 본령에 충실하고자 했을 따름이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노가재 스스로 변화의 기미를 준비하던 17세기 조선 지식사회의 대표로 자리매김 될 만한 단서가 바로 이 책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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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학술문2007. 4. 10. 18:11
하나. 인간과 삶, 그리고 죽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음만큼 무섭고 신비한 현상도 없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따스한 햇볕 아래 오순도순 즐기다가 한 순간 숨이 끊어져 깜깜하고 차가운 땅 속에 묻히는 이웃들의 모습을 보며 인간은 죽음의 불가항력에 당황한다. 불치의 병으로 신음하다 결국 추하게 탈진한 상태로 고통 속에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죽음의 무자비함에 몸을 떤다. 인간이 종교에 귀의하는 것도 살아있는 동안 가차 없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본능 때문이다. 종교를 성립시키는 것은 절대적인 힘을 지닌 신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죽음의 공포는 얼마간 해소될 수 있다. 그 신의 위력을 빌어 이야기되는 종교적 담론의 핵심은 죽음 혹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한 것이다. 사실 인간이 죽음에 대하여 공포를 느끼는 것은 죽는 순간의 통증보다 죽음 이후의 시공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살과 뼈가 원소로 해체되어 스며들거나 흩어지면 그 뿐인가. 아니면 육체에서 이탈된 영혼이 또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가.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는 판이해진다.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는 인간이 죽음을 맞는 마지막 단계로 ‘사후 생명에 대한 희망’을 들었다. 사후 세계에 대한 희망을 가진 사람만이 죽음을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생각하여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독배를 마시고 죽어가던 소크라테스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나는 이제 떠날 때가 되었네. 나는 죽기 위해서, 그리고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 누가 더 좋은 일을 만나게 될 것인가, 신밖에는 아무도 모른다네.’ 라고 말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긴 했지만, 소크라테스 자신도 사후 세계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사후 세계를 믿는 것이 정신위생상 좋다는, 정신분석학자 융의 생각은 종교적 담론의 틀 안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려는 현대인의 본능적 욕구를 적절히 지적한 경우다. 키엘케골은 절망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사후 세계의 존재를 믿고 그에 대한 희망을 갖는 일이야말로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니, 죽음의 두려움을 뛰어넘기 위해 만들어낸 종교의 관념체계는 빛나는 인간 지혜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이 피할 수 없는 죽음.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우주적 그물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며, 조만간 직면해야 할 죽음으로부터 생겨하는 우울함이나 비애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오랜 세월 인간이 만들어온 문화적 집적(集積)의 대표 항은 ‘삶과 죽음’이다. 시간의 물결에 떼밀려가는 생명체들. 그래서 생명체에게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외연으로는 상반되는 개념들이지만, 이면적으로는 동의어인 것도 그 때문이다.
예로부터 우리는 죽음에 대한 무수한 담론들을 만들어 왔다. 죽음의 미덕을 찬양하는 경지가 바로 그런 담론들의 극단이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효과적으로 벗어나기 위한, 이른바 자기방어(自己防禦)의 기제(機制)라 할 수 있다. 거추장스런 육신을 벗어버리고 홀가분한 상태로 신들의 세계에 들어가 새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은 현세적 삶이 괴로운 민초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이승에서의 삶을 더 연장하고자 하는 것이 모든 이의 본능적 욕구였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은 죽음을 거부하는 그들의 본능을 표현한 말이다. 그런 욕구의 한 편에 죽음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심지어 찬양하는 표현까지 생겨나는 것이다.
죽음은 문학이나 예술적 표현물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제재들 중의 하나였다. <제망매가>는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 가운데 꽤나 이른 시기의 노래다. 작자가 비교적 소상히 설명되어 있고, 표현기법이 세련되어 있으며, 그 사상적 배경 또한 분명하다. 그 뿐 아니라 노래를 둘러싼 정황이 신비화 되어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우리의 흥미를 끈다. 말하자면 가장 흔한 주제를 노래함으로써 보고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되, 그 정황이나 배경은 가장 신비스러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게 하는 점에 이 노래의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누이동생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소재를 노래했으면서도 죽음 자체가 자아내는 미학이나 분위기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다는 점이 특이하다.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서 이루어지는 서정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불심(佛心)으로 윤색되거나 가공되었으며, 어떻게 지속되어 왔을까.

둘. <제망매가>에 내재된 두 얼굴의 사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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