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8. 2. 1. 10:12
호남성통신 5

신화서점(新華書店)과 화장실의 소년

                                 
                                                                                                                      조규익

내 유년기의 콤플렉스들 가운데 하나는 화장실에 관한 것이다. 지금 4, 50대 이상의 장·노년들은 대부분 비슷한 추억들을 갖고 계시리라. 특히 나 같은 ‘촌놈들’은 좋든 싫든 그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당시의 시골 화장실이 얼마나 적나라하고 원시적이었는가. 어릴 적 가장 싫고 괴로웠던 일이 화장실 출입이었다. 그래서 집 근처 공터에 적당히 실례를 하다가 무참하게 두들겨 맞은 경우가 허다하다. 오죽하면 그 어린 나이에도 ‘커서 내 집을 지을 땐 무엇보다 깨끗하고 멋진 화장실부터 지으리라’는 결심을 수없이 했겠는가.
사실, 최근 화장실 바꾸기 운동이 전 사회적으로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역시 화장실 문화에서 큰 소리 칠 형편은 아니었다. 한 6~7년쯤 전이던가. 관광차 우리나라에 온 일본의 한 여성이 공중변소에 들어갔다가 질겁을 한 채 그냥 일본으로 돌아간 사건을 기억하고들 계시는지?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들은 ‘지금이 어느 시댄데 이런 같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느냐’고 핀잔을 하실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분들은 고속도로변 휴게소의 ‘삐까뻔쩍하는’ 화장실, 향내 풍기고 고상한 음악 울려나는 그곳만을 경험하신 분들이리라. 지금도 시골 읍·면 단위의 버스 정류장 공중변소엘 가보시라. 여러분의 입맛이 떨어질까 우려되어 자세한 말씀은 생략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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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공적으로 사적으로 중국여행을 시작한 것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지금이야 사정이 좀 나아져 평균 4성급 정도의 호텔을 이용하게 되었으니 화장실 관련 트러블은 별로 없는 셈이다. 그러나 답사를 다니며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화장실들은 참 문제가 많다. 가까운 지인들 가운데 몇몇 특히 여성들은 화장실 때문에 중국여행의 기회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화장실의 구조, 청결상태 등 중국의 화장실 문화는 분명 문제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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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화장실 문제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오늘 이곳 장사시의 신화서점엘 들렀고, 거기서 목격한 재미있는 광경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신화서점은 중국의 유명한 프랜차이즈 서점이며, 간판 글씨 또한 모택동의 친필로 유명하다. 북경대학의 간판글씨도 모택동의 친필이고 보면, 그는 중국의 지식사회에 그 나름대로 큰 꿈을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신화서점의 본점은 북경에 있고, 북경에만도 30개에 가까운 점포가 있으며, 전국 대부분의 도시들에도 점포가 있다. 우리의 교보문고 쯤에 비견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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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 시내의 신화서점


호남성의 성도(省都)인 장사시에 며칠 묵고 있느니만큼 신화서점을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30년 만에 찾아왔다는 한파로 유리판처럼 얼음이 깔린 거리를 조심조심 즈려 밟으며 신화서점엘 들렀다. 어딜 가나 난방이 되지 않는 호남성. 신화서점도 예외는 아니었다. 썰렁하게 드넓은 점포.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날 만큼 추웠다.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계산대의 점원 아가씨들도 우리들의 물음이 귀찮다는 듯 턱을 들어 가리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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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서점 내부


한참 동안 책을 고르고 계산을 한 다음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이렇게 으리으리한 신화서점에 설마 번듯한 화장실 하나 없을까. ‘측소(厠所 ; 중국에서는 화장실을 대개 이렇게 부른다)를 물으니 ‘쩌어기!’하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서점의 한 쪽 코너였다. 그 쪽으로 다가갈수록 바닥에는 검정색 땟물 자국들이 널려 있고, 그 위에 ‘중딩’쯤 되는 한 녀석은 털썩 주저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과연 대변을 보는 ‘푸세식’ 변기가 세 칸쯤 만들어져 있고, 그 앞으로 바짝 소변기들이 서너 개 붙어 있었다. 과연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대변 보는 칸에는 문짝도 없는 듯 했고, 엉거주츰 일어서면 옆 칸이 내려다 보일 정도로 칸막이는 낮았다. 추위에 덜덜 떨면서 간신히 물건을 꺼내들고 소변을 보는데, 갑자기 ‘끙끙’하는 신음소리가 내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니 웬 ‘고딩’쯤 되는 녀석이 쭈그리고 앉아 그야말로 신나게 변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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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시내 동흥남로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매장에서 들고 온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닌가. 나 역시 소싯적 한동안 화장실 변기에 앉아 신문이나 잡지를 본 적은 있으나, 훤히 열려있는 서점의 화장실에 앉아 대변을 보면서, 더구나 ‘끙끙’ 사실적인 소리까지 내면서 책을 읽어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앞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일을 보는 그가 더욱 고약했다. 그가 너무 당당하고 자연스러워 마음 한편으로는 ‘혹시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참으로 신기하여 목에 걸고 있는 카메라를 슬쩍 작동시켜볼까 하다가 봉변을 당할까 저어되어 가까스로 참았다.

***

일을 보는 동안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남들을 의식하지 않는 그들의 화장실 문화가 고약하긴 했지만,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책을 읽고 있는 그 친구가 범상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설사 그 책이 하잘 것 없는 오락물이었다 해도 별 상관이 없다. 세상에 재미있는 일들이 널린 이 시대에 덜덜 떨릴 정도로 춥고 열악한 시설의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책을 읽는’ 중국의 내일을 나는 발견한 것이었다.
갑자기 중국이 무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녀석 혼자만 그럴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 광경은 중국을 이끌어가게 될 ‘창조적 소수들’의 모습을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 나는 ‘신화서점의 화장실과 그곳에서 변을 보며 독서하는 소년’을 통해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 지식사회의 일면을 훔쳐 본 것이나 아닐까.  
참으로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 서점 나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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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대학 근처 식당 및 상점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1. 09:43
호남성통신 3

상덕(常德)과 원강(沅江), 그리고 모택동


                     

김형!

지금 우리는 장사(長沙)를 떠나 상덕(常德)으로 향하고 있소. 이곳 사람들의 과장 섞인 말로는 20년 만에 처음 당하는 한파로 곳곳이 얼어붙은 상장(常長) 고속공로를 통해서 말이오. 가는 길에 점심을 해결할 겸 고속도로가 뚫리기를 기다리기 위해 상덕시의 원강공원으로 접어들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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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강의 풍경

 
 그런데, 강안(江岸)의 널찍한 공원에 주차한 우리는 뜻하지 않은 진경(珍景)을 만나게 되었소. 외지 관광객들 대부분은 한가로이 흘러가는 강물과 그 물 위에 떠가는 배만 있는 줄 알고는 5분 만에 혀를 차며 떠난다는 곳이오. 차에 내려 이리저리 거닐다 보니 강안을 접하여 무한히 뻗어있는 벽(壁)을 발견할 수 있었소. 아, 그곳엔 무수히 많은 시들이 새겨져 있는, 이른바 시비(詩碑) 아닌 시벽(詩壁)이 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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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강공원 시벽의 표지석


  아주 가끔씩 그저 괜찮은 시인의 시작품 하나 만을 겨우 돌에 새겨 비를 세우고 스스로 대견해하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무수히 뻗어 있는 시벽을 대한 채 말을 잊었소. 중국인들의 규모와 배포를 엿볼 수 있는 일이었소.
과연 ‘세계 최장의 시벽’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사실을 표지판으로 만들어 이곳의 초입에 세울 만큼, 그건 장관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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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북에 올른 세계 최장의 시벽

 
이 시벽의 공식명칭은 ‘중국상덕시장(中國常德詩墻)'.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946명에 달하는 중국 유명 시인들의 시사(詩詞)들이 정(正), 초(草), 예(隸), 전(篆) 등 여러가지 서체로 각자(刻字)되어 있었소.
그와 함께 명화(名畵) 43폭도 새겨져 있는데, 그 가운데는 상덕의 역사와 풍운을 반영한 <<백대창상(百代滄桑)>>도, 고금의 명현(名賢)들이 상덕을 읊은 <<명현제영(名賢題咏)>>도 들어 있었소. 총 길이 3000m, 총 1267수의 작품들! 놀랍지 않소?
  더구나 이 거사가 그 흔한 시인협회 등 문인들의 단체에서 주관하여 이루어진 게 아니고, 상덕시위원회와 시정부가 앞장서서 한 일이라니, 이들의 문화의식이 그저 부럽기만 했소.
우리나라 문인단체 같으면 이 정도의 일을 기획하기도 어렵겠거니와, 현재와 같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혹은 공무원들의 그리 높지 않은 의식수준으로 보아 수용될 수 있는 일 또한 아니겠지요. 그것이 바로 문화적인 면에서 우리가 중국을 따라갈 수 없는 점이라고 생각하오.
‘전봇대 하나 뽑는데 10년이 걸렸다’는, 요즈음 인구에 회자되는 사건 하나만 보아도, 청계천의 양쪽 벽에 유명 시인들의 시판(詩板)을 붙이자고 할 경우 우리네 공무원들이 과연 수긍하겠소?

***

시간에 쫓겨 시벽을 대충 훑어본 다음, 시장기를 해결하기 위해 공원 밖의 식당엘 들렀소.  ‘동정모기반점(洞庭毛記飯店)’이란 난해한(?) 이름의 식당이었소. 번역하면 ‘동정호반의 모택동을 기념하는 식당’ 쯤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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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강공원 밖의 동정모기반점(洞庭毛記飯店)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알아보았소. 모택동이 원래 호남성 출신이지요? 이곳에서 가까운 소산(韶山)이란 곳에 그의 생가가 있다는 것이오. 이곳 호남성에서 모택동은 거의 신에 가까운 존재로 숭배되고 있었소. 전통 왕조를 무너뜨리고 현재의 중국을 있게 한 그였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들은 바에 의하면, 대장정에 나섰던 모택동이 고향 땅을 찾았다고 합디다. 어떤 촌가에 들렀을 때 가난하여 대접할 게 없던 그 집 주인은 시장에서 사온 물고기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조리하여 내놓았다고 하오.
물고기 머리에 뭐 그리 먹을 게 있었겠소? 머리뼈에 붙은 양념을 맛있게 빨아먹은 모택동. 그 후로부터 물고기 머리 요리와 삶은 돼지고기 요리를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나요?
그 고기 이름이 무엇인지는 기억할 수 없으나, 대충 원강 가이고 보면 잉어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돼지고기는 동정호 일대에서 근원된 것으로 보이는 ‘동파육’이 아니었을 지요? 그러나 자세한 건 나도 모르오.
어쨌든 그 식당으로 들어가자 과연 식당 모든 곳에 모택동의 대형 사진들이 걸려 있고, 반상에는 여러 요리들 가운데 물고기 요리가 올라왔소. 모양은 물론 그 맛 또한 발군이었소. 뼈까지 빨아 먹고 나자 샤오제가 국수를 말아주는데, 국수 맛도 일품이었소.
그 요리의 내력과 레서피를 그녀에게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으나, 우선은 소통이 불가능했고 또 바쁘게 이동하는 일행의 일정에 방해될 것 같아 자제할 수밖에 없었소.    
모택동에 대한 중국인들 특히 호남인들의 지극한 애정은 어딜 가나 한결 같았소. 그의 독특한 서체 또한 명승지 어딜 가도 볼 수 있었소. 거 왜 있지 않소? ‘북경대학(北京大學)’ 현판 글씨체 말이오. '호남대학(湖南大學)‘도 그의 글씨체였소. ’왕희지 체‘ 아닌 ’모택동 체‘라고나  할까요?

***

원강공원에서 시향(詩香)과 어향(魚香)으로 배를 불린 우리는, 무릉원과 천문산 그리고 천자산을 품고 있는 장가계로 한 발 다가서기 위해 상덕시로 향하려 하오. 그곳에서 다시 봅시다.  

백규 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