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 10. 26. 15:14

 





 

, 홍범도 장군!

-2017년 홍범도 장군 순국 제 74주기 추모식 및 학술회의 참가기-

 

 

맑은 가을날 오후. ‘여천 홍범도 장군 순국 제74주기 추모 및 학술회의에서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 경복궁 고궁박물관 별관 강당을 찾았다. 꽤 많은 인사들이 모여있었다. 알 만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홍범도기념사업회의 이종찬 이사장이야 원래 유명한 분이니 말할 필요도 없지만, 내 논문의 토론자로 나선 최영근 선생(알마틔 고려극장 문예부장), 반병률 교수(외국어대), 김보희 박사, 장세윤 박사(동북아 역사재단 한일관계연구소 소장) 등은 오랜 인연들이다. 특히 희곡 날으는 홍범도2013년에 연출한 리 알레그 선생이 모스크바로부터 와 있었다. 뜻하지 않은 만남에 감회가 깊었다.

 

2부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역사기록 소설 홍범도의 역사성(윤상원 전북대 교수), 희곡 홍범도의 역사 수용 및 인물 형상화 양상(조규익), 「「홍범도를 매개로 하는 체제 옹호의 서사(임형모 군산대 겸임교수) 등이었다.

 

1940년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조선극장의 총연출자 겸 희곡작가 태장춘은 친구였던 시인 조기천의 권유로 희곡 홍범도를 쓰게 되었다. 그는 당시 조선극장의 수위장으로 있던 장군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그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희곡의 소재로 바꾸어 나갔다. 장군은 태장춘의 강력한 권고에 의해 전부터 만들어 온 많은 메모들을 바탕으로 󰡔홍범도 일지󰡕를 만들었고, 태장춘은 그것을 바탕으로 희곡 홍범도를 만든 것이다. 그 일지의 원본이 태장춘 혹은 장군으로부터 사라진 뒤인 1958, 태장춘의 부인 리함덕(고려극장 인민배우)이 베껴 쓴 둥사본 홍범도 일지가 이인섭을 통해 교포 작가 김세일에게 전달되었고, 김세일은 이 기록을 비롯한 많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장편소설 󰡔홍범도󰡕를 써서 레닌기치에 연재했다. 장군은 태장춘을 만날 때마다 결코 자신을 영웅화하지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쓸 것을 강조했다. 자신보다는 자신 주변의 인물들에 초점을 맞출 것도 요구했다. 말하자면 극작가 나름의 창작성을 인정하지 않고, 희곡을 철저히 사실에 입각한 기록물로 만들 것을 요구함으로써 희곡 홍범도는 일종의 서사문학처럼 늘어져 버렸고, 등장인물도 36명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발표 중


발표 후 토론


토론이 끝나고

1942년 완성된 홍범도(초연 당시 제목은 의병들)는 같은 해 최길춘의 연출로 드디어 무대에 올려졌다. 원래 태장춘은 홍범도3부작(‘사냥꾼 출신 홍범도의 투쟁을 그려낸 의병들-1/볼셰비키 혁명의 영향 아래 붉은 빨치산의 지휘자가 되는 것-2/레닌과의 만남 이후 이상적이며 분명한 혁명가 혹은 국제주의자가 되는 것-3’)으로 완성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장군이 1943년 별세하면서 그 계획은 무산되어 버렸다. 홍범도1947년에 이길수의 연출로, 1957년에 채영의 연출로, 1960년에 맹동욱의 연출로 연거푸 무대에 올려졌고, 2013년에는 날으는 홍범도로 개제(改題)되어 무대에 올려졌다. 이때의 연출가가 바로 이번에 직접 참여한 이 올레그 선생이었다. 바로 그 분이 발표 시간 내내 청중석에 앉아 계셨다.

 

전체 4막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희곡 홍범도. 나는 이 작품의 핵심을 홍범도 잡기 서사일본군 잡기 서사의 두 축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각각의 서사를 형성하는 모티프(motif, 話素)들은 상당히 많았는데, 물처럼 흐르는 이야기를 그려내다 보니 그 모티프들의 짜임이 그다지 치밀하지 못한 흠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음 두 서사들과 각각의 모티프들을 살펴보자.

 

홍범도 잡기 서사

 

*1

-배신모티프: 우진원흥재덕월향 등이 배신과 음모를 통해 홍범도 잡기에 나섬. 우진은 야마도의 끄나풀인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홍범도의 가장 믿음직한 수하로 행세하면서 홍범도를 궁지에 몰아넣고 일진회 회원인 원흥과 재덕 역시 야마도의 하수인으로 홍범도의 체포에 나섬.

-기만모티프: ‘월향이 일본군 장교를 죽인 자라는 광고를 냄으로써 의병들을 안심시키고 홍범도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기만계(欺瞞計)를 적절히 활용했다고 할 수 있음.

 

*21

-날조모티프: 홍범도 처의 편지를 날조하여 홍범도 귀순 시키기.

*22

-염탐모티프: 재덕원흥중대부관 등이 밀고꾼 조니를 통해 마을의 의병 참여자들을 염탐.

-사냥모티프: 원흥이 의병들을 지칭하는 백두산 포수를 들먹이며 묘한 수단으로 홍범도를 잡겠다고 함.

 

*31

-함정모티프: 우진이 거짓으로 의병들과 홍범도를 궁지에 빠뜨림.

일본군 잡기 서사

 

*21

-복수모티프: 야마도가 첩자로 파견한 월향이 동생인 홍범도 부대의 의병 일남으로부터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 어머니의 진실을 듣고 홍범도 부대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함.

 

*22

-사냥모티프: 연옥이가 자신의 아버지가 백두산 포수로서 못된 짐승을 잡는다고 언급함으로써 일본군 잡기 서사의 핵심으로 사냥 모티프 제시.

 

*31

-복수모티프: 월향이 홍범도의 설득에는 실패했으나, 우진의 정체를 홍범도에게 경고함으로써 어머니를 죽인 원수 일본군과 배신자 우진에게 타격을 입힘.

-기만모티프: 변장한 홍범도가 일본군을 총공격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변장한 채 치강의 집에 들어감으로써 작전에 성공함.

 

*4

-복수모티프: 일본군을 토벌하고 배신자 우진원흥재덕을 잡아 처형함.

-사냥모티프: 일본군의 감옥에 갇혀 있던 의병 용준을 구해내면서 훌륭한 포수가 되려면 악한 짐승에게 물려 보아야 한다는 비유의 말을 던짐. 즉 일본군을 잡으려다 오히려 그들에게 잡혀 고초를 겪은 사실이 이 비유의 핵심임.

 

이런 점들로부터 희곡 홍범도의 특징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추출할 수 있었다.

 

1. 살아있는 주인공과 작가의 대화를 통해 주인공의 체험을 작품화 시켰다는 점에서 작품 자체가 실화극 내지 역사극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

2. 주인공 홍범도는 민중들 사이에 전설적 영웅으로 자리 잡은 존재였으나, 주인공의 영웅성을 과장하지 말고 주변 인물들의 활약상을 부각시켜 달라는 홍범도의 주문 때문에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최소화시키고, 작품의 사실성을 극대화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

3. ‘홍범도 잡기일본군 잡기라는 상반되는 서사들을 작품의 두 축으로 내세우고, 각각의 범주에 배신기만날조염탐사냥함정복수등의 모티프를 설정함으로써 민족에 대한 사랑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주제를 구현할 수 있었다는 것.

4. 실존하던 주인공의 강한 주문에 따라 철저한 사실성의 구현을 지향했으면서도, ‘전설적 영웅이자 호랑이 잡던 백두산 포수라는 홍범도의 이미지를 이야기 전개의 미학적 요소로 드러나지 않게 군데군데 끼워 넣음으로써 관객이나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

***

 

이제 옛날의 홍범도를 역사의 뒤안에 묻고, 새로운 세대의 작가가 새로운 시대의 홍범도를 만들어 무대에 올림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애국심을 고취시킬 단계가 되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2017. 10. 25.)


이종찬 이사장과


행사 후 저녁 자리에서 이종찬 이사장, 반병률 교수 등과


식사 후 차를 마시며 환담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09. 4. 16.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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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한국문예연구소 국제학술회의
           

구소련 지역 한국어 공연예술의 현황 및 확산 방안


일시 : 2009년 4월 30일(목), 09:00~18:00
장소 : 숭실대학교 한경직기념관 김덕윤예배실
주최 :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사단법인 온지학회
후원 : 문화관광부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Institute of Korean Literature and Arts
156-743 /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 511
http://ikla.kr 전화 02-820-0846/0326




모시는 말씀

보이지 않고 밟을 수 없는
고국의 산천과 하늘,
망향의 한으로 점철된
이산(離散)과 유랑(流浪)의 세월.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까지
동토의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강물 되어 흘러온 아픔의 눈물.

그 세월과 눈물로 빚어 만든
고려인들의 예술을
담론하는 자리에
여러분을 모십니다.

2009. 4. 10.

한국문예연구소 소장 조규익



순 서

09:30~10:00  등 록                                  

제1부                       사회  문숙희(한국문예연구소 연구교수)

10:00~10:05  소장인사             조규익(한국문예연구소 소장)  
10:05~10:15  축   사              김대근(숭실대학교 총장)    


제2부                       사회 허명숙(한국문예연구소 교육팀장)

발표 1. 1920~30년대 한국 연극의 전개양상
(10:30~11:10)  발 표 장원재(경기 영어마을 사무총장)
                토 론 백로라(숭실대 교수)
발표 2. 고려극장 공연예술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11:10~11:50)  발 표 이 류보위(카자흐스탄 고려극장 대표)
                토 론 이복규(서경대 교수)

점심식사(12:00~13:00)

발표 3. 고려극장 공연예술의 목록과 그 의미
(13:00~13:40) 발 표 최영근(카자흐스탄 고려극장 문예부장)
                토 론 심정순(숭실대 교수)
발표 4. 고려극장의 형성과 발전
(13:40~14:20)  발 표 김보희(한양대 강사)
               토 론 엄경희(숭실대 교수)
발표 5. 구소련 소인 예술단의 현황과 과제
(14:20~15:00)  발 표 김 발레리아(러시아 아리랑 가무단 단장)
                토 론 반병률(외국어대 교수)
발표 6.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한글노래와 디아스포라의 정체
(15:00~15:40) 발 표 조규익(숭실대 교수)      
               토 론 박정신(숭실대 교수)

휴  식(15:40~16:10)

종합토론(16:10~17:10) 좌장  이명재(중앙대 명예교수)

만찬(17:10~)    
Posted by kicho
자료 - 전공자료2008. 4. 30. 12:57
 

러시아 기행 2


             스러진 고려인들의 꿈이여, 열사들의 넋이여!



2008년 4월 4일, 4월 참변 당일이다. 추모식은 오후 4시에 열린다. 아침 일찍 우리는 최재형 선생들이 처형되어 묻힌 곳을 찾아 제사를 올리기로 했다. 제정 러시아 시대 감방이 있던 곳. 지금도 교도소로 사용되고 있는 으스스한 곳이었다. 그 맥그라소바 거리에서 북쪽으로 10분 쯤 30m 정도 올라간 야산 둔덕 ‘왕바산 재’. 그 언저리가 바로 네 분(최재형崔在亨, 김이직金理直, 엄주필嚴柱弼, 황경섭黃景燮)의 고려인들이 참살되어 묻혀있는 곳이다. 일본군이 이들의 시신을 묻고 흔적을 없앴기 때문에 그 정확한 장소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전날 마련한 간소한 제수를 땅바닥에 진설하고 제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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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사들의 영전에 헌작하는 반병률교수와 곽원석 박사>
 
최재형 선생의 영정과 다른 세 분의 이름을 모신 다음 순서에 맞게 추모의 정을 표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제문을 낭독했다.


2008년 4월 4일.

1920년 4월 참변을 당한 지 88년째인 오늘, 참변을 당하신 최재형․김이직․엄주필․황경섭 선생님을 비롯한 수많은 고려인 선열들의 영령 앞에 삼가 머리 숙여 고하나이다.


일제의 침탈과 만행으로 인해 나라와 고향을 잃어버린 채 이국땅에 떠돌이로 들어와 가까스로 뿌리를 내리고 살다가 다시 그들의 총칼 아래 무참히 스러져 간 민족 지도자들의 기구하신 운명을 생각하오며, 새삼 추모의 정을 금할 수 없나이다.


님들의 희생 덕택에 고국에서 혹은 이 땅에서 편안히 살아가고 있는 후손들은 님들이 뿌리신 피의 뜻을 잊지 않고 다시금 우뚝 일어서고자 노력하고 있나이다.


아, 오늘 만리 먼 고국에서 님들의 영전을 찾아 온 저희들 반병률․김보희․곽원석․조규익․엄경희 등과 이 땅에 살고 있는 발렌찐·발레리아 등은 보잘 것 없는 음식이나마 정성껏 님들 앞에 올리옵나니,

영령들이시여, 부디 이곳에 강림하시어 흠향하오소서!


          2008년 4월 4일


조규익·반병률·곽원석·김보희·엄경희 절하고 올림



우리의 제사는 간결·소박하나 엄숙했다. 땅바닥은 차갑고, 겨울 외투를 채 벗지 못한 북국의 공기는 싸늘했다. 그러나 혼령들이 감응하는 듯 왕바산 언덕의 두터운 땅거죽은 홀연 훈훈해져 왔다. 언덕 아래쪽 교도소에선 짙은 연기가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

오후 4시 정각에 추모비로 나갔다. 러시아 군인들과 경찰들이 두런거리며 식장을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많은 고려인들과 러시아인들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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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 말미에 헌화하는 러시아 어린이들>
 
예쁜 초등학생들도 질서정연하게 어른들을 돕고 있었다. 우수리스크 부시장을 비롯한 러시아 관리들, 블라디보스톡 한국영사관의 김무영 총영사와 이우용 교육원장, 김니꼴라이 우수리스크시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장, 한국에서 온 반병률 교수와 내가 중앙에 도열하자 러시아 군악대의 주악을 신호로 식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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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에 도열한 러시아 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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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에서 조총을 쏘아 올리는 러시아 군인들>

사회는 당당하게 생긴 우수리스크 시정부의 여성 관리였고, 통역은 고려신문 편집장 엘레나였다. 추도사와 헌화가 진행되는 긴 시간, 잡담 한 마디 들려오지 않았다. 러시아인이나 고려인, 한국인들은 ‘숙연함’의 연대라도 이루어진 것일까. 숙연함은 러시아 무용단의 추모 무용에 이어 조총(弔銃)의 발사로 클라이막스에 올랐고, 사회자가 종료선언을 하자 사람들은 연기처럼 흩어져 갔다.  강렬한 햇살이 차가운 바람을 덥히는 오후였다. 언제부턴가 내 마음에 각인되어온 러시아인들은 ‘음습하고 냉랭한 이념의 노예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추모비 앞에 모여든 그들은 선량한 이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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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에 참여한 러시아인들과 고려인들>

 어쩌면 내가 던진 추모사가 그들에 대한 화해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4월 참변에 희생되신 러시아와 고려인 유가족 여러분!


1920년 4월 참변 88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 순간 저는 혁명과 반혁명, 침략과 굴욕의 역사적 격랑이 소용돌이치던 당시 이 땅에서 자행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무자비한 살육을 떠올립니다. 1920년 4월 4일 밤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만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일본군은 연해주 지역 러시아 혁명군과 정부, 관공서와 함께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 등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방화·가택수색·검거·학살을 저질렀습니다. 하늘과 땅이 노하고, 살아있는 모든 생령(生靈)들이 전율(戰慄)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미 역사에 밝혀져 있듯이, 이 땅에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 볼셰비키 정권이 수립되었고, 일본은 미국·영국·프랑스 등과 함께 이곳으로 출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볼셰비키 정권과 러시아 국민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친 열강의 군대들이 철수하게 되자 국제적으로 고립된 일본군은 4월 참변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 스파스크, 이만(달리네레첸스크), 포시에트 등지의 주요 도시에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연해주 지역의 러시아 혁명 지도자들과 고려인 지도자들은 대거 검거되거나 학살되었습니다. 특히 우리의 분노를 자아내는 일은 그들이 정식 재판의 절차도 없이 살해되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우수리스크에서는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선생을 비롯한 한인 지도자들이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학살되었으며, 그 분들의 시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 땅에서 러시아 국민들과 고려인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으로부터 혹독하게 시련을 당한 공통의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런 시련을 우리가 미래로 힘차게 뛰어나갈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불쾌하고 불행한 과거의 일에 얽매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당한 두 민족의 지도자들을 추모하는 지금 우리는 과거 항일투쟁 과정에서 연대와 협력을 지속해온 역사적 교훈을 새삼 떠올리게 됩니다. 러시아와 대한민국은 미래 지향적 파트너로,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정치·경제·외교·문화계 인사들 간의 활발한 접촉과 교류를 통하여 러시아와 대한민국은 친선과 우의를 한층 단단히 다질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1920년 4월 참변에 희생되신 양국 지도자들의 명복을 빌어드리며, 유가족과 후손 여러분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가 더욱더 노력할 것을 다짐하면서 이상 추모의 말씀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2008. 4. 4.


              대한민국 서울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소장 조규익은 절하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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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이 끝난 다음 추모비 앞에 선 한국인들>

***

5시 반. 추모식을 마친 우리는 고려인들과 러시아인들을 만찬장에서 만났다. 주석단에 자리 잡은 우리를 흘끔거리며 호기심을 보인 고려인들은 마이크를 잡으면 하나같이 유창한 러시아 말로 장강대하의 언설들을 쏟아냈다. 이미 그들은 고려 말을 깡그리 잊어버린 상태였다. 우리들의 귀에는 생소했으나 그들은 사회주의 러시아의 노래들을 쉼 없이 불러대는 것이었다. 러시아 군대에서 공을 많이 세운 듯 가슴에 훈장들을 주렁주렁 달고 나온 노인도 있었다. 어쩌다 한 번 몇몇 고려인 아줌마들은 우리를 의식한 듯 서툰 발음으로나마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러 주었고, 북한의 대중가요 <반갑습네다>를 이어서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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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열창하는 고려인 할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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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갑습네다를 열창하는 고려인 할머니들>

모습은 우리네 이웃집의 자상한 아줌마들이고 아저씨들인데, 말소리를 들으면 천리만리 떨어져 사는 러시아인들이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러시아 땅에 발을 붙이고 긴 세월 살아온 우리 동족들의 변한 모습이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흘러내린 모진 세월이 안쓰럽기도 하고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감정의 가교(架橋)’가 새롭게 놓여야 하는데, 지금은 시퍼런 강물만이 그득하게 우리들의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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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 후 만찬장의 모습>

우리가 그 골을 메울 수 있을까? 우리와 그들 사이에 ‘정감의 다리’를 다시 놓을 수 있을까?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고려인들은 러시아인의 탈을 쓴 채 그들의 집으로 흩어져 가고, 우리는 이방인의 탈을 쓴 채 사회주의의 불친절을 훈장처럼 달고 있는 호텔로 돌아왔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4. 20. 20:25
 

러시아 기행1


회색빛 알쫌공항과 자작나무의 기품



                                                                                                                       조규익

2008년 4월 3일, 인천공항 42번 게이트. 역사적인(?) 러시아 기행에 나서며 차분함과 설렘이 교차했다. 마피아의 천국, 악마처럼 생각되던 맑스․레닌주의의 원조, 매서운 시베리아의 눈보라,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툰드라의 혹한... 그간 멀게만 느껴지던 러시아였다. ‘그런 곳에 언제 가볼 것이며 꼭 가볼 필요까지야 있으랴?’라는 게 평소 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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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쫌 공항에서 내리고 있는 승객들>

그러다가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한 연해주가 선조들이 피를 흘려가며 항일투쟁을 벌인,  ‘성지(聖地)’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최근이었다. 1920년 4월 4일의 참변은 우리 역사의 상처였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한반도의 영역 안에서 일어난 일들만 열심히들 토론하고 써내는 중이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우스리스크에서, 사할린에서, 빨치산스크에서, 하바로프스크에서 추위와 냉대를 무릅쓰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죽어간 우리의 이름 없는 선조들을 애써 외면해온 것은 아닐까. 4월 참변의 추모제와 국제학술대회의 한 축을 우리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가 담당키로 한 일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

찬바람은 가슴을 파고들지만, 벚꽃들이 망울을 터뜨리려 하고 있으니, 계절은 봄의 문턱을 넘어선 셈이었다. 해맑게 갠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러시아 투폴레프 비행기의 움직임은 무표정한 승무원들과 러시아인들의 표정과 달리 산뜻하고 날렵했다. 두 시간 가까이 날아간 ‘인천-블라디보스톡’ 구간. 기내식이라고 주어지는 음식은 오늘날 러시아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두 시간 남짓의 만남 동안 단 한 조각의 웃음조차 보여주지 않던 승무원들의 표정처럼 차갑고 딱딱한 빵엔 이빨자국조차 낼 수 없었다. 그야말로 무성의의 표본이랄까.

 하늘에서 시곗바늘을 두 시간 앞당긴 뒤 도착한 알쫌은 비에 젖어 있었다.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인형처럼 굳은 제복 차림의 여군. 그녀의 눈매는 매우 날카로웠다. 저만치 초라하게 서 있는 북한의 고려항공을 ‘도둑촬영’하고자 몇 번이나 망설였으나 그녀들은 바늘 끝만큼의 기회조차 허용치 않았다. 그녀들의 차가운 아름다움을 ‘도촬’하려던 곽원석 선생도 몇 번이나 시도하다가 그만두었다. 짐을 찾고 세관을 통과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들 앞에 우리는 손님 아닌 죄인들이었다. 흡사 잡아온 죄인들을 심문하듯 날카롭고 의심에 찬 물음들을 툭툭 던지는 그들이 고약했다. 알량한 우리의 호주머니를 털려는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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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쫌 공항에서 현지 안내인 발렌찐-발레리아의 차에 짐을 싣고 있는 곽원석박사>

 가까스로 알쫌 공항을 나선 우리들은 발렌틴 선생의 차에 올라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석탄 타는 냄새가 아지랑이처럼 깔려 있고, 하늘은 우중충했다. 주변은 황량하고 집들은 대

체로 윤기를 잃은 채 이른 봄의 차가운 바람에 떨고 있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단 하나. 황량함을 다소 지워주는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독일을 거쳐 넘어간 체코의 산들에서도, 크로아티아의 산록에서도 우리는 하얗게 서 있는 자작나무의 숨결을 체험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이 자작나무의 물결도 동유럽의 그 지역에서 시작되었고, 동토의 땅 시베리아를 거쳐 이곳 동방까지 밀려 왔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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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막혀버린 울퉁불퉁한 외길. 블라디보스톡까지는 1시간 40분이 소요되는데, 4시로 예정된 총영사와의 약속시간을 기약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들른 곳이 길 가의 러시아 식당 ‘밀레니엄’이었다. 한 방엔 수십 개의 식탁들이 놓여 있었고, 음악에 맞추어 무도를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공간도 있었다. 러시아와 중국 음식을 섞어놓은 듯한 서너 가지 요리로 시장기를 지운 다음 블라디보스톡 행을 포기하고, 길을 돌아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그 길 또한 자작나무의 수해를 뚫고 나 있었다. 산록 곳곳엔 러시아인들의 별장인 ‘다차’*들이 모여 각박함 속에서 여유를 구가하던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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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쫌에서 우수리스크 가는 길에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식당 밀레니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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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우수리스크. 인구 7, 80만의 블라디보스톡보다는 작지만 우리 고려인들이 오래 전부터 둥지를 틀고 있는, 고향 같은 곳이다. 마침 햇살이 비쳐 들었다. 거리는 한산했으나, 정겹고 따스했다. 제정 러시아 시대 최고급 호텔이었고, 지금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우수리스크 호텔. 시설은 열악했으나 마룻바닥을 걸으니 울리는 구두소리가 정겨웠다.

 우리를 이곳까지 픽업해준 발렌틴 선생의 안내로 그의 부인 발레리아 선생, 그들의 딸 악사나, 고려신문 편집장 엘레나를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드루즈바(우정)’란 이름의 건물로서 자치회 회장인 김니꼴라이 선생의 소유였다. 이들과 우리 5인(반병률  교수, 김보희 박사, 곽원석 박사, 엄경희 교수, 나)과 이들의 협의 아래 추모행사와 학술행사의 모든 순서는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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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수리스크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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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 건물 안의 고려신문사에서. 왼쪽은 편집장 엘레나, 오른쪽은 유망한 대중연예인 지망생 악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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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참변 추모비에서. 왼쪽부터 조규익, 엄경희, 김보희, 반병률, 곽원석>

석양 무렵 꼬마로바 1번지 근처에 세워진 4월 참변 추모비를 찾아, 추모식의 규모와 순서를 확정한 다음, ‘일출’ 식당에서 학술행사의 러시아측 파트너인 우수리스크 사범대학 린샤 교수를 만났다. 우수리스크 호텔의 침대에 피로가 솜처럼 젖은 몸을 누인 것은 밤늦은 시각. 아직도 피워보지 못한 고려인들의 꿈이 안타까운 순간순간이었다. 아, 우수리스크의 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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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엄경희 교수와 린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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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러시아 정교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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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소련 시대부터 도시인들에게 교외의 땅을 불하해 주어 집을 짓고 야채 등을 자경(自耕)하여 자급자족하게 했었는데, 그럴 목적으로 지은 일종의 별장이 바로 다차다.

Posted by kicho
연행록 - 자료2008. 3. 24. 11:13
연합뉴스  관련기사 클릭해서 보기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소장 조규익 교수)가 ‘구소련 연해주 4월 참변 추모제 및 국제 학술발표회’를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갖습니다.


1. 행사의 의의 : 1920년 4월 4일~5일에 걸쳐 연해주에 진출한 일본군에 의해 이 지역에 거주하던 한인들, 특히 주요 한인 지도자들이 대거 검거되어 재판 절차도 없이 학살되었다. 4월 참변 추모행사는 한국과 러시아 양국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추모행사로서 양국의 국가 간에 추진되는 역사적 연대의 경험을 되살리기 위한 행사이다.

2. 추모제 내용

  1) 한·러 합동 추모제 :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우수리스크 시정부 문화국, 우수리스크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 공동주최

     (1)일시 : 2008. 4. 4. 오후 4시

     (2)장소 : 우수리스크 ‘영원의 불꽃’ 광장

  2) 추모 학술대회 :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우수리스크 국립사범대학 공동 주최

     (1)주제 : 구소련 시대 문예활동에 나타난 시대정신과 민족의식

     (2)일시 : 2008. 4. 5.

     (3)장소 : 우수리스크 국립사범대학교

     (4)발표자 및 논제

       ①구소련 러시아인들의 삶과 의식--오.베.린샤(우수리스크 사범대 교수)

       ②구소련 고려인들의 항일투쟁--반병률(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

       ③구소련 고려인 노래의 한국전통민요 수용 양상--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④구소련 고려인의 서사적 형상화-박계주의 경우--곽원석(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연구기획팀장)

       ⑤구소련 러시아인들과 고려인들의 문화적 교류양상--엔.아.부쩨닌(우수리스크 사범

                                                          대 교수)

       ⑥구소련 고려인 노래의 서정미학--엄경희(숭실대 국문과 교수)

       ⑦구소련 한인 노래의 음악미학--김보희(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국제팀장)

   3)고려인 노래에 대한 강연 및 공연 :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나홋트까 고려인민족문화

     자치회, 빨치산스크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 아리랑 가무단 공동 주최

      (1)일시 : 2008. 4. 6.

      (2)장소 : 나홋트까 고려인 민족자치회회관, 빨치산스크 민족자치회회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