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2. 13. 03:58

 

 


터키 괴레메 지역의 오픈 에어 뮤지엄(Open Air Museum)

 

 

 

 


터키 괴레메 로즈밸리(Rose Valley)의 한 암벽 동굴집을 찾아
현장에서 만난 베컴, 허이준, 허이훈 형제 등과 차를 마시며[2005년 12월]

 

 

 

 


터키 괴레메의 로즈밸리 지역

 

 

 

 


터키 괴레메 인근 언더그라운드 시티(Underground City)의 거실에서 만난 맷돌 아래 짝

 

 

 

 


터키의 셀르메 지역에서 만난 암벽 동굴들

 

 

 

 


터키 우흘라라 계곡의 암벽동굴 집에서 만난 프레스코화

 

 

 

 

 

 

 

암굴 속에 서린 생존 의지,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Bandelier National Monument]’의 말 없는 외침

 

 

 

 

9년 전 유럽 여행 중 터키 카파도키아의 괴레메 지역에서 만난 암굴 주거지는 지금까지도 큰 충격으로 남아 있다. 화산활동으로 생긴 다양한 모양의 암석과 암봉들에 침식작용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 안에 거주한 흔적들이 그 때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특히 카이마클르의 지하도시와 으흘라라 계곡, 셀르메 계곡 등 네브셰히르 코스에는 바로 어제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듯 온기까지 느껴졌다. 페르시아와 아랍인들의 침입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6세기부터 10세기까지 8층 깊이[높이가 아닌]로 뚫린 카이마클르의 언더그라운드 시티(Underground City)에는 각 층을 연결하는 가파르고 좁은 통로가 설치되어 있었고, 각 세대마다 거실과 침실은 물론 와인을 제조하고 저장하던 시설, 공동 주방 및 식당, 교회 등은 물론 까페도 있었다. 으흘라라와 로즈 계곡 등 지상에 서 있는 암굴 주택들의 벽과 천정에는 기독교 관련 프레스코화들이 그득했다.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 놀라움을 미국에서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산타페의 박물관들을 주마간산 격으로 스킴하고 멋지게 꾸민 이탈리아 식당에서 시장기를 달랜 후 우리는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Bandelier National Monument]’를 향해 쾌속으로 달렸다. 욕심도 과하지! 그곳을 본 다음 우리는 부랴부랴 멀고 먼 귀로에 올라 뉴멕시코를 벗어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산타페에서 반델리어 가는 길은 지금까지의 어떤 길보다도 만만치 않았다. 84[285] 하이웨이를 타고 산타페로부터 한 시간 가까이 사막지대를 달리다가 퍼와이키(Pojoaque) 턴파이크에서 502번으로 갈아탄 다음 더욱 높아진 산록 도로를 통해 몇 십 분을 더 달렸다. 제법 큰 도시의 모습을 갖춘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부터는 가파른 산길이었다. 길은 그런대로 넓었고 노면 상태 또한 괜찮았으나, 왼쪽은 천 길 낭떠러지! 잔뜩 구름 낀 하늘엔 커다란 독수리가 선회하고 있었다.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의 음산한 분위기가 계곡 아래쪽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그 옛날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등짐을 진 어른들과 올망졸망 어린 것들이 길도 없는 이 등성이들을 넘었겠구나! 넘다가 실족하여 저 아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린 삶들도 좀 많았으랴!’ 생각하니, 삶에 대한 집착과 허무 사이의 드넓은 간극에 갑자기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구불구불 산길을 넘어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비지터 센터에 도착했다. 추운 겨울, 비수기라서인지 우리를 포함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긴 코스와 짧은 코스가 있었지만, 시간 때문에 우리는 짧은 코스를 택했다. 사실 짧다 해도 충분히 둘러보려면 1시간 반 정도나 걸리는 코스였다. 비지터 센터를 떠나 본격 트레일에 접어드니 거대한 넓이로 땅 밑을 파낸 두 종류의 유허(遺墟)가 나타났다. 이른바 빅 키바(Big Kiva)’ 즉 푸에블로 인들의 지하 예배장이 아래쪽에 있었고, 그 위쪽에는 음식 저장고로 쓰이던 400개의 방을 가진 2층 구조물 즉 츄웨니[Tyuonyi]가 있었다. 그 주변에는 가옥으로 추정되는 지상 건축물들의 터가 많이 남아 있고, 거기서 올려다보니 주택 혹은 주택의 일부로 사용되던 벌집 모양의 암봉이 거대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었다그곳이 바로 푸에블로 인들의 암벽 주거지[Cliff Dwellings]’였다.

 

이 구역의 암벽 주거지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짧은 코스에 있는 것들이고 또 하나는 그 위쪽의 긴 주택[Long House]’들이었다. 우리는 짧은 코스의 것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미 터키에서 정교하게 꾸며진 암굴(巖屈)들을 자세히 본 바 있는 내 입장에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으나, 미국에도 이런 유형의 집들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화산암[volcanic tuff]에 뚫린 동굴들은 그 자체가 좋은 집이나 안락한 방의 역할을 한 공간들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안에 들어가니 대부분의 벽들은 불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까맣게 그을려 있어 누군가 이 안에서 불을 피우고 살았음이 분명했다. 암벽을 둘러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작은 구멍들이 나 있었는데, 이것은 통나무들을 그 구멍에 끼운 다음 암벽에 의지하여 지어낸 푸에블로 전통가옥들의 흔적이었다. 구멍의 숫자로 보아 전성기 때는 매우 많은 세대의 집들이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 가는 교통망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의 위치

 

 

 


반델리어 지역 표지판

 

 

 


반델리어 지역 푸에블로 인들의 합동 예배장 유허

 

 

 


동굴집들이 있던 거대한 암벽

 

 

 


동굴집들이 있던 거대한 암벽

 

 

 


동굴집들이 있던 거대한 암벽

 

 

 


동굴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설치한 사다리

 

 

 


암벽 동굴집들과 벽에 잇대어 집을 지었던 흔적으로 남아 있는 작은 구멍들,
그리고 암벽화[pictograph]

 

 

 


암벽동굴집들과 그 주변에 덧붙여 지은 집의 유허

 

 

 


암벽 동굴집 아래쪽에 있던 주택가의 유허

 

 

 


암벽 동굴집 아래쪽에 있던 주택가와 각종 시설들의 유허

 

 

 


암벽 동굴집 아래쪽에 있던 주택가와 각종 시설들의 유허

 

 

 


암벽 동굴집 내부[벽이 온통 그을려 있음]

 

 

 


암벽 동굴집에서 내다 본 바깥 풍경

 

 

 

 

그렇다면 그들은 이 깊고 척박한 산중에서 무얼 먹고 살았을까. 대략 12세기 중반에서 16세기 중반에 걸쳐 이곳에서 살았던 () 푸에블로[Ancestral Pueblo]’ 인들은 메사(mesa)의 위쪽에 있던 들판에 농작물들을 재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옥수수, , 호박 등은 그들의 주식이었으며, 자생식물들과 우리가 현장에서 발견한 사슴, 토끼, 다람쥐 등의 고기도 영양분을 보충하기에 요긴했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의 집 주변에서 기르던 칠면조로부터는 깃털과 고기를 얻었을 것이며, 개를 이용한 사냥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였다.

 

반델리어에 인간이 깃들기 시작한 세월은 10,000년이 넘는다. 메사와 계곡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야생 조수(鳥獸)들을 따라 다니던 수렵채취 부족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서기 1,150년에야 선 푸에블로인들은 반영구적인 주거지를 짓기 시작했고, 1550년에는 이곳을 떠나 리오 그란데(Rio Grande) 강가로 주거를 옮겼다. 코치티(Cochiti), 산 펠리페(San Felipe), 산 일데폰소(San Ildefonso), 산타 클라라(Santa Clara),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등이 그들의 새로운 주거지역이었다.

 

그 후로 4백여 년 간 이 땅에는 사람들이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심한 가뭄까지 닥쳐오게 되었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들의 구비전승[口碑傳承, oral tradition]에 의하면, 리오 그란데 강을 따라 남쪽과 동쪽에 위치한 코치티 푸에블로와 산 일데폰소 푸에블로가 프리올레 캐년에 집을 짓고 살던 이들의 가장 가깝거나 직접적인 후손들로 보인다고 한다.

 

비지터 센터에는 박물관과 함께 이들의 생활사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관이 있었다. 거기서 확인하게 된 흥미로운 사실들 중의 하나는 이들이 구비전승을 통해 조상들과 연결했고, 그에 의존하여 삶의 지혜를 얻거나 적응해 나왔다는 점이다. 푸에블로의 구비전승은 자신들의 믿음, 이야기, 노래, , 생활 속의 기술 등 모든 것을 포괄한, ‘옛날과 현재의 대화E.H. 카아의 말대로 역사였다. 따라서 구비전승은 선대 푸에블로의 생존에 기본적인 텍스트였고, 오늘날에도 푸에블로로 하여금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 하는 필수적인 지식의 창고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푸에블로의 이야기들에는 그들의 활동이 묘사되어 있기도 하고 교훈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여, 대대로 그것을 가르쳐 왔음은 물론 그 안에 들어 있는 생생한 정보들을 공유하기도 했다. 대부분 구비로 전승되어 왔지만, 개중에는 그림, 암각화, 혹은 춤으로 묘사되기도 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들의 주거지 주변에서 목격한 암각화도 그 사례들 가운데 하나였다.

 

1,700년대 중반 스페인 정부가 불하해준 땅을 소유한 스페인 정착자들은 프리욜레 캐년(Frijoles Canyon)에 자신들의 주거지를 만들었고, 1880년 코치티 푸에블로의 호세 몬토야(Jose Montoya)는 고고학자 반델리어[Adolph F. A. Bandelier, 1840. 8. 6.~1914. 3. 18.]를 프리욜레 캐년으로 데리고 가 조상들이 살던 고향땅을 보여주었다. 그 때부터 반델리어는 이 지역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델리어는 스위스 베른 출신의 미국 고고학자인데그의 이름을 따서 이 유적지의 명칭으로 삼았을 정도로 그는 이 지역에 관한 전문가였다. 그는 젊은 시절 미국으로 이주하여 노동을 하며 힘들게 살았다. 당시 대단한 인류학자 모건(Lewis Henry Morgan)의 지도 아래 그는 미국 남서부, 멕시코, 남아메리카 등지의 미국 원주민들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멕시코의 소노라(Sonora),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지에서 연구를 시작하여, 이 지역 연구를 선도하는 권위자가 되었고, 쿠싱(F. H. Cushing) 및 그의 후계자들과 함께 선사 문화 분야의 선도적인 학자가 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을 딴 곳이 바로 이 구역이었다.

 

1916반델리어 국립 유적지법령이 만들어지고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 서명했으며, 1925년에는 에벌린 프라이(Evelyn Frey)와 그의 남편 죠지(George)가 이곳에 도착하여 1907년 애벗 판사(Judge Abbot)가 건립해온 ‘10 엘더스 랜취(the Ranch of the 10 Elders)’를 이어받게 되었고, 1934년과 1941년 사이에 민간 자원 보존단[Civilian Conservation Corps]’의 노동자들이 프리욜레 캐년에 만들어진 캠프에서 작업을 하는 등 최근까지의 노력으로 지금의 유적지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암벽 주거지를 거쳐 내려오는 길은 지난여름 이 일대를 휩쓸었던 것으로 보이는 홍수의 현장이었고, 근년에 일어나 아름드리 소나무들을 태워버린 무서운 자연 화재의 현장이기도 했다. 무수한 나이테들을 몸에 새기고 벌렁 누워있거나 아직 청청하게 버티는 소나무들은 그 옛날 이곳에서 살아간 푸에블로 인들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이 계곡에서 먹고 자고 사랑하며 생존의 나날을 버텨내던 푸에블로 인들은 벌써 오래 전에 이 계곡을 떠났다. 그러나 리오 그란데 강줄기를 따라 새로운 터전들을 일군 그들은 변함없이 옛날이야기들 속에 숨어 있는 조상들의 지혜를 이어가며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는 프리욜레 계곡의 거센 냇물 소리를 기억하며...

 

 

 


당시 이곳 주민들이 잡아먹고 살았을 다람쥐

 

 

 


당시 이곳 주민들이 잡아먹고 살았을 사슴들[Mule Deer]

 

 

 


당시 이곳 주민들이 따 먹고 살았던 잣나무 열매[piňon nuts].
지방과 단백질의 공급원이었음.

 

 

 


당시 이곳 주민들에게 비타민과 무기질을 공급했을 선인장 열매들

 

 

 


당시 이곳 주민들이 동굴집 주변에 남긴 암각화[pictograph]

 

 

 


스페인 이주자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암시하는 암벽 위의 십자가

 

 

 


열매를 갈아 식량을 확보하던 당시 여인들의 삶[비지터 센터 박물관 그림]

 

 

 


당시 이곳 주민들이 사용하던 바구니와 갈돌, 그리고 화살촉[비지터 센터 박물관]

 

 

 


당시 이곳 주민들이 사용하던 도자기와 각종 생활 도구들[비지터 센터 박물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11. 13:59

 

 

 

 


올디스트 하우스(Oldest House)

 

 

 

 

 


올디스트 하우스의 내부

 

 

 

 

 

 


올디스트 하우스 내부의 예배실

 

 

 

 

 


올디스트 하우스의 건축에 쓰인 어도비 벽돌

 

 

 

 

 


시가지의 앤틱 가게 앞에 세워진 롱혼 캐틀(long horn cattle) 부자 상

 

 

 

 

 


시가지의 한 예술품 가게 앞에 놓인 '공부하는 아이' 상

 

 

 

 

 


옛 66번 도로에 대한 방향 표지판

 

 

 

 

 

예술과 역사의 도시 산타페와 박물관들[산타페-완]

 

 

 

 

우리는 산타페의 구 시가지로 들어왔고, 한동안 구 시가지를 뱅뱅 돌았으며, 구 시가지의 한켠에서 숙박도 했다. 구 시가지는 산타페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상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관광 비수기라서인지 광장은 홈리스들의 차지였고, 멀쩡하게 생긴 성인 남자들도 당당하게 한 푼을 구걸하면서 지나쳤다. 그러나 앞서 말한 상당수의 성당이나 교회들은 물론 박물관들도, 시 청사도, 숙박업소도, 선물가게도, 화랑도, 레스토랑도 대부분 어도비 양식의 대단한 보물급들이었다. 볼그레하고 따스한 어도비 건축물들이 우리의 마음까지 따스하게 만드는 곳이 산타페임을 걷는 동안 우리는 느껴 알 수 있었다.

 

앞의 글에서 빠뜨리긴 했지만, 올디스트 하우스(Oldest House)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명소였고, 아침에 찾아간 앤틱 선물가게 또한 안팎이 예술로 뒤덮인 아름다움의 덩어리였다. 올디스트 하우스는 말 그대로 이 지역 뿐 아니라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집으로 추정되는 건물이었다. 1598년 후안 데 오네이트(Juan de Onate)의 인도 아래 첫 스페인 정착자들과 함께 멕시코로부터 틀락스깔란(Tlaxcalans) 인디언들이 도착하여 산타페 강 위쪽의 고원에 정착했다. 그들의 집 가운데 하나로 보이는 것이 바로 이 건물이다. 건물 속에 박힌 나무들의 나이테로 미루어 이 집은 약 165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집의 구조로 보아서는 훨씬 더 오래 전인 12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집은 버려진 고대 푸에블로인들의 정착지 폐허 위에 지어진 것이 분명한 것 같았다. 비좁고 불편해 보이긴 했으나 당시의 방식대로 조촐하게 살림을 꾸리며 행복을 일궈나간 가족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머리를 숙이고 다녀야 할 만큼 낮았으나, 작은 거실과 예배실, 식당, 창고, 농기구, 그리고 밝은 빛을 들이기 위한 창 등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갖출 건 다 갖추고 있었다. 올디스트 하우스는 말하자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새로운 개념의 박물관인 셈이었다.

 

올디스트 하우스를 나와 뉴멕시코 미술박물관[New Mexico Museum of Art]’ 가는 길엔 골동품이나 장식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더러 있어 눈으로나마 산타페 시민들의 잔잔한 생활미학을 느껴볼 수 있었다. 산타페가 뉴멕시코에서 66번 도로의 핵심적 경유지임과 이곳이 미국 교통의 요지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표지도 만나는 등 길에 설치된 대부분의 표지들이 예술작품이었고, 역사의 알림판이기도 했다.

 

그렇게 느릿느릿 걸어 뉴멕시코 미술박물관에는 개관 시간인 10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박물관은 외관처럼 내부 또한 아름다웠다. 원래 창작미술 박물관으로 불리던 뉴멕시코 미술박물관은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으로서, 산타페에 있는 네 개의 국영 박물관들가운데 하나이자 뉴멕시코 주 문화부에 의해 관리되는 여덟 개의 박물관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아이삭 랩(Issac Rap)이 설계하여 1917년 건립된, 어도비 양식의 이 박물관은 원주민과 스페인의 설계양식이 종합된 가장 유명한 건축물들 가운데 하나로 인정되고 있었다. 이 박물관은 다량의 미술품들을 영구 소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통미술과 현대미술작품들, 지역 예술품과 전국 혹은 세계 여러 나라의 미술작품들을 교체 전시하고 있기도 했다.

 

마침 르네상스부터 고야(Goya)에 이르는 시기의 스페인 미술품들이 특별 전시되고 있었다[Renaissance to Goya: prints and drawings from Spain]. 대부분 소품들이었지만, 20131214일부터 201439일까지 3개월 간 열리는 이 특별전이야말로 산타페의 예술적 향취를 더해주는 특별 이벤트였다. 아직도 스페인 문화나 멕시코 문화의 잔영이 지역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 이 도시에 들렀다가 우연히 고야 같은 대가의 미술품들을 무더기로 친견하게 된 것이 우리에게는 사실 분에 넘치는 호사였다. 직접 스페인에 가지 않고서야 그토록 많은 고야의 작품들을 어디에서 볼 수 있겠는가.

 

 

 

 

 


뉴멕시코 미술 박물관 전경

 

 

 

 


뉴멕시코 미술박물관의 '르네상스에서 고야까지' 특별전 현수막

 

 

 

 

 


뉴멕시코 미술박물관 소장, R.C.Gorman 작 'Seated Navajo Woman', 1978[Cast bronze]

 

 

 


 


뉴멕시코 미술박물관 소장, Don Robert Hazlitt 작 'Mom at Dawn', 1988
[Mixed media on Canvas on board]

 

 

 

 

 


뉴멕시코 미술박물관 소장, Min Kim Park 작 'Lynn 2009-From the Series Zummarella'
[Pigment print]

 

 

 

 

 


뉴멕시코 미술박물관 소장, Will Shuster(1893-1969) 작 'Winnowing Wheat', 1934[Fresco]

 

 

 

 

 

 

이 박물관은 엄청난 컬렉션들을 갖고 있었다. 지난 100년 동안 활동해온 타오(Taos) 및 산타페 지역 미술 창작 집단의 작품으로부터 이 지역 혹은 세계 최첨단의 현대예술 작품들까지 두루 소장하고 있었다. 박물관에 갖추어진 2만여 점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들은 싱코 삔또레스(Los Cinco Pintores)’ 즉 다섯 명의 화가들[The Five Painters]이 남긴 작품들, 타오 미술창작 집단[The Taos Society of Artists]의 작품들, 구스타브 바우만(Gustave Baumann)의 콜렉션, 루시 리파드(Lucy Lippard)의 컬렉션, 오키프(Georgia O’Keeffe)의 미술품 콜렉션 등을 포함한 창작 미술품들과, 여성 사진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제인 리스 바우만(Jane Reese Baumann)의 콜렉션을 포함한 주요 미국인 작가들의 사진작품, 비디오 장치를 포함한 뉴미디어 등을 꼽을 수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1921년에 결성된 로스 싱코 삔또레스(Los Cinco Pintores)’. 윌 슈스터(Will Shuster), 프레몬트 엘리스(Fremont Ellis), 월터 므룩(Walter Mruk), 죠지프 바코스(Jozef Bakos), 윌라드 내쉬(Willard Nash) 등 다섯 명의 화가가 그 멤버들인데, 그 해 12월 뉴멕시코 미술박물관은 그들의 작품을 함께 묶어 첫 전시회를 열었다. 다섯 사람은 모두 30세 이하의 젊은 예술가들로서 산타페의 신예들이었다. 이들은 그로부터 싱코 삔또레스로 불리면서 이 지역의 창작미술을 대표해왔고, 그 산파역을 한 것이 바로 이 박물관이었다. 산타페 시내를 배회하다 보면 멋지게 꾸민 화랑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되는데, 이 박물관과 함께 이 지역 창작미술 활성화의 주역들이었다. 산타페가 예술품 거래의 양으로 미국 전역에서 3위 안에 드는 도시임을 감안하면, 그런 배경은 충분히 이해할만 했다.

 

뉴멕시코 미술 박물관을 나온 우리는 건너편에 있는 뉴멕시코 역사박물관[New Mexico History Museum]’을 찾았다. 우리가 뉴멕시코 미술 박물관을 거쳐 왔다고 하자, 입구의 직원은 입장료를 할인해주며 하나의 입장권으로 이 박물관과 주지사궁[Palace of the Governors]을 모두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주지사 궁은 산타페 광장의 팰리스 애비뉴에 위치하고 있었다. ’산타페 역사구[Santa Fe Historic District]’안에 있는 주지사 궁은 수 세기 동안 뉴멕시코 주 정부의 중심 건물로서 미국의 가장 오래 된 공공건물이었다.

 

페드로 데 페랄타(Pedro de Pralta)’는 미국 남서부의 대부분을 지배하던 스페인 영토에 새로 임명된 주지사인데, 그가 바로 1610년에 이 건물의 건축을 시작한 것이다. 그 뒤 뉴멕시코의 지배자가 여러 번 바뀌는 과정에서 이 궁의 소유권도 함께 넘어갔다. 1680년 푸에블로 반란 이후, 또한 1693년에서 1694년까지 스페인이 이곳을 재정복함으로써 내내 스페인 소유로 있었고, 1821년 멕시코가 독립함으로써 멕시코 소유가 되었다가, 마지막으로 1848년 미국의 소유로 넘어간 것이다. 처음에 이 궁은 한 때 오늘날의 텍사스, 애리조나, 유타, 콜로라도, 네바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를 포함한 스페인의 뉴멕시코[Nuevo Mexico] 식민지정부가 들어 있던 건물이다. 멕시코 독립전쟁 이후 뉴멕시코의 산타페 지역은 주지사 궁에서 관리되었으며, 이 궁은 뉴멕시코가 미국 땅으로 합병되면서 뉴멕시코의 첫 지역 의회 의사당으로 바뀌었다.

뉴멕시코 주 의회가 뉴멕시코 박물관을 세운 1909년에서 2009년까지 주지사 궁은 주 역사 박물관 역할을 하게 되었다. 2009년 주지사 궁 옆에 문을 연 뉴멕시코 역사박물관은 뉴멕시코 주 문화부가 관리하는 아홉 개의 뮤지엄들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역사박물관을 보고 자연스럽게 주지사 궁으로 이동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역사박물관에는 뉴멕시코 중심의 생활사 및 자연사 자료들이, 주지사 궁에는 역대 주지사들과 관련한 지배 주체의 변천 자료 등 정치사 관련 유물들과 각종 성화 및 성구 등 가톨릭 관련 유물들이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다만 아직 충분한 콜렉션들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은 전자와 달리 후자에는 양적으로 충분하고 질적으로도 뛰어난 자료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어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 만날 수 없는 이 지역만의 특성을 분명히 인지할 수 있었다.

 

산타페에는 이 두 박물관 외에도 죠지아 오키프 박물관[The Georgia O’Keeffe Museum], 아메리카 인디언 박물관 연구소[The Institute of American Indian Museum], 인디언 예술 문화 박물관[The Museum of Indian Arts and Cultures], 국제 민속 예술 박물관[The Museum of International Folk Arts]’ 등 뛰어난 박물관들이 있었다. 물론 컨셉이나 소장품들의 성격상 겹치는 것들도 적지 않겠지만, 사실은 다 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러나 갈 길이 바쁜 나그네에게 이들 모두를 둘러보는 것은 벅찬 일이었다. 어디 국 맛을 알기 위해 한 솥의 국을 모두 마셔야 하는가?’ 우리는 미련을 떨쳐 버리기 위해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산타페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번 주인이 바뀐, 무상한 역사의 도시이자 치밀한 계획도시이며 아름다운 어도비 건축물의 도시 산타페는 간단치 않은 역사와 두꺼운 예술의 적층(積層)을 토대로 한 현대판 이상향이었다. 어느 언론매체의 조사 결과처럼, 가장 인기 있는 예술의 도시이자 은퇴 후에 숨어 살기 좋은 전원도시가 바로 이곳이라고 하지 않는가.

 

 

 

 

 


뉴멕시코 역사박물관 소장품

 

 

 

 

 


뉴멕시코 역사박물관 소장품[뉴멕시코주 문장]

 

 

 

 

 


주 지사 궁[the Palace of the Governors] 앞에서 좌판을 벌인 주민들

 

 

 

 

 


주지사 궁 소장품들

 

 

 

 

 


주지사 궁 소장품들

 

 

 

 

 


주지사 궁 소장품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9. 23:51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바실리카 대성당[Cathedral Basilica of St. Francis of Assisi]

 

 

 


산타페 광장에서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길

 

 

 

 

 


대성당 내부

 

 

 

 

 


대성당 안에서 만난 예수 수난상

 

 

 

 

 


대성당 앞뜰에서 만난 '물 위에서 춤 추는 프란체스코 성인'[Monika B. Kaden의 작품]

 

 

 

 

 


대성당 앞뜰에 서 있는 '가데리 데각위타[Kateri Tekakwitha, 1656-1680] 상'
미국 최초의 인디언 여성 성인으로 추존되었음. 

 

 

 

 

 

산타페의 가톨리시즘은 세속화된 미국을 정화시키는가? [산타페-2]

 

 

 

산타페의 구시가지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바실리카 대성당[Cathedral Basilica of St. Francis of Assisi]’이었다. 사실 뉴멕시코의 어느 도시에서도 프란체스코 성인을 모신 성당들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성당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된 도시들도 적지 않았다. ‘산타페 로만 가톨릭 대 주교구[The Roman Catholic Archdiocese of Santa Fe]’의 모태 교회가 바로 이 성당인데, 이 성당의 뜰엔 눈길을 끄는 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여성 성인으로 추존된 인디언 출신의 가데리 데각위타(Kateri Tekakwitha, 1656~1680). 순결의 덕목과 육신의 고행을 실천함으로써 짧은 생애에 많은 기적을 이룬 그녀였다. 결국 1980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諡福)되고, 2012년에는 교황 베네딕트 16세에 의해 시성(諡聖)된 스물넷의 아름다운 그녀가 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곳에 서 있었다.

 

프란체스코 대성당을 나온 후 지금은 홈리스들에 의해 점령된 산타페 광장으로부터 대성당 앞을 지나 잠시 걷자 스프링 모양의 계단으로 유명한 로레토 채플(Loretto Chapel)이 나왔다. 채플 입구에서 안내를 하던 린즐리(Richard M. Lindsley)씨는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한국어 안내문 한 장을 꺼내 주면서 북한의 참상에 대해서 진심으로 많은 걱정을 해주었다. 그 날짜 신문에 보도된 북한의 실상에 관해 궁금한 게 많았던지 이것저것 질문을 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겠노라고 약속도 했다. 고마운 사람이었다.

 

1852년 가을 로레토 수녀회가 수많은 고난을 겪으며 켄터키로부터 산타페에 도착하여 이 성당의 전신인 로레토 학원을 건립한 역사가 한글판 소개문에는 실려 있었다. 특히 강조된 내용은 원형계단의 건축학적 특징이었다. 수녀들이 도착한 몇 년 뒤 로레토 학원이 완성되었고, 그 후 몇 년 뒤에 고딕 양식의 예배당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예배당 안의 마루와 성가대석을 연결하는 통로를 낼 수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 일이 성사되기를 염원하며 수녀들은 9일간의 기도를 드렸는데, 기도의 마지막 날 한 백발노인이 당나귀에 연장을 싣고 도착했다. 수녀원장을 만나 그 일을 해결해주겠노라고 말한 그는 톱 하나와 T, 망치하나만을 갖고 즉시 작업에 착수하여 단시일에 이 원형 계단을 완성했다. 중심 지주도 없이 33개의 디딤판만으로 360도 원형의 계단을 완성하는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 성 요셉에게 기도를 드린 수녀들은 이 불가사의한 일이 그 기도의 응답임을 믿었으며, 상당수는 그 늙은 목수를 성 요셉으로 믿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그것은 수녀들이 보여준 지극한 신앙의 증거물이었다. 내 느낌에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의 발타키노와 같은 컨셉으로 보이는 이 원형계단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로레토 성당[Loretto Chapel, Built in 1873]

 

 

 


로레토 성당 입구의 안내 표지와 전설에 등장하는 늙은 목수

 

 

 


채플 안에 있는 '기적의 계단'

 

 

 


로레타 채플 내부

 

 

 

 

그 다음으로 간 곳이 바로 최초의 어도비 건축 양식의 성당인 산 미구엘 미션[San Miguel Mission]’이었다. 스페인 식민시대 멕시코의 성당이었던 산 미구엘 미션1610~162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교회로 꼽힌다고 한다. 이 성당은 1680년의 푸에블로 반란때 손상을 입었으나, 스페인 사람들이 이 지역을 재점령한 1710년에 재건축되어 스페인 병사들을 위한 예배당으로 사용된 곳이다. 그 후 수없이 보수가 이루어지고 재건축이 반복되면서 많이 가려지긴 했겠으나, 원래의 어도비 양식은 크게 손상되지 않은 채 노출되어 있었다. 내부 또한 아름다웠는데, 특히 제단 뒤쪽 나무로 만들어진 장식 벽[reredos]의 아름다움은 탁월했다. 더구나 그 장식들 속에 자리 한 미카엘 성인 상의 제작연대는 적어도 1709년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합중국의 국가 역사 유적으로 지정된 이 성당은 산타페를 영적으로 충만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산 미구엘 성당[San Miguel Mission]

 

 

 


미구엘 성당 내부

 

 

 


미구엘 성당 제대 뒤의 장식벽[Reredos]. 아래쪽 중앙이 미카엘 성인 상

 

 

 


산 미구엘 성당의 종

 

 

 

 

그 다음에 방문한 곳이 바로 이 지역 종교적 성향의 핵심인 과달루페 성소[Santuario Guadalupe]’로서, 산타페 다운타운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꼽히는 곳이었다. 주 제단 뒤쪽의 벽장식은 모두 멕시코시티에서 가져온 것들이며, 내부 장식 모두는 멕시코 바로크 풍의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1531년 멕시코 아즈텍 종족 출신의 후안 데 디에고(Juan de Diego)에게 현신하여 성당을 지을 것을 명령한, 갈색 피부를 가진 원주민 형상의 성모가 바로 과달루페 성모.

 

이 사건을 계기로 테페야크 언덕을 비롯한 각지에 성당들이 건립되면서 멕시코는 급격히 가톨릭 국가로 변모했다. 성모 현신의 이야기는 토착신앙에 물들어 가톨릭의 전파가 어렵던 당시 가톨릭 교단의 노력을 보여주는 일종의 종교 설화로 보이는데, 그 덕에 지금은 미국의 땅이 된 산타페에서 그 성모와 성당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1775~1795년 프란체스코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과달루페 성소3피트 정도의 두꺼운 벽을 가진 어도비 건축물이었고, 그 중심에 1783년 멕시코 거장 호세 데 알지바[Jose de Alzibar]의 과달루페 성모상이 있었다. 멕시코 전통 양식으로 조각채색된 예술품의 정수로서 리어다스(reredos)’라 불리는 제단 뒤쪽의 장식 벽, 19세기 진품 성구(聖具) 보관소, 각종 미술사적 자료들, 대주교 쟝 뱁티스트 레이미(Jean Baptiste Lamy)에게 봉헌된 도서 및 자료관, 성지에서 가지고 온 식물들을 심어놓은 정원 등, 이 성당을 이루는 핵심 부분들은 여전히 화려하면서도 경건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과달루페 성소[Santuario Guadalupe] 성모 상 

 

 

 

과달루페 성소의 내부 

 

 

 


과달루페 성소의 스테인드 글라스 

 

 

 

과달루페 성소 그림[Tom Mallon 작, Oil on Canvas 42"×22"]

 

 

 

산타페의 정신적 바탕은 이 도시의 수호성인 프란체스코의 행적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이지만, ‘이곳의 문화와 전통에 융합된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유럽의 그것과 구별되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원주민 출신의 성인 가데리 데각위타나 과달루페 성모를 만난 후안 데 디에고 등 이 지역에 가톨릭을 정착시킨 결정적 존재들이 있었고, 로레토 성당산 미구엘 성당과달루페 성당 등 핵심적 성소들이 어도비 건축양식을 채용함으로써 지역 전통 친화적인 면모를 보여 주고자 한 점은 무엇보다 산타페만의 독보적인 모습이었다. 요소요소에 숨어서 빛을 발하는 가톨릭 교회들의 존재는 미국의 강한 세속성을 정화시켜 주고 있다는 점에서 산타페만의 매력일 수 있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8. 03:45

 

 

 

 

 

 


앨버커키를 떠나 산타페로 가는 도중

 

 

 

 


산타페 입구 세리요스 힐스에서 만난 작은 오름들

 

 

 

 


세리요스 힐스에서 바라본 산타페 전경

 

 

 

 


세리요스 힐스를 지나 산타페로 들어가는 길

 

 

 

 


1882년의 산타페 시가지 그림

 

 

 

 

 

 

 

 

 

환상과 낭만, 그리고 역사의 공간 산타페에 빠지다! [산타페-1]

 



 

 

큰 도시 앨버커키에서 산타페에 이르는 하이웨이 ‘I-25’ 역시 황량한 야산들을 끝없이 관통하는 길이었다. 뉴멕시코에 진입한 이래 키 작은 사막식물들과 작고 큰 화산 석들이 검게 그을린 채 다닥다닥 깔려 있는 야산들을 곧게 뚫고 나아가는 한 줄기 길이 대견하여 나 스스로 명명해본 것이 바로 용감한 길이었다. 그 길을 종횡무진 뚫고 돌아다니는 자그마한 자동차와 거기에 실린 내 실존적 자아가 사실은 용감한 존재들이었는데, 엉뚱하게도 나는 왜 그 길에만 자꾸 내 감정을 투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프로이트가 말한 일종의 '심리적 전이(psychological transference)'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례일까. 미국에 온 이후 특히 에 집착하는 나의 내면이 나 스스로도 흥미롭게 생각될 때가 많아졌다. 길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있는 한갓된 공간일 뿐인데, 그 길이 마치 살아서 내 비위를 맞춰주기도 하고 심술을 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건 왜일까. 아마도 나의 내면에 일어나는 감정적 에너지를 쏟아 붓기에 가장 좋은 대상이나 공간이 바로 미국 남부 지역의 길들이었으리라.

 

산타페까지 60.3 마일의 그리 길지 않은 길이었으나, 기억하기 힘들 만큼 많은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집거지가 차창으로 스쳐 지나갔다.* 지아 푸에블로(Zia Pueblo), 산타애나 푸에블로(Santa Ana Pueblo), 산 펠리페 푸에블로(San Felipe Pueblo), 산토 도밍고 푸에블로(Santo Domingo Pueblo) 등 푸에블로 인들은 거주하는 지역마다 구분되는 인종적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푸에블로 인들을 변별할 때는 거주 지역의 이름을 관치(冠置)하는 것이 통례인 듯 했다.

 

고개를 넘으니 멀리 산타페 산맥이 보이고, 그 앞쪽 넓은 분지에 한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을 만큼 넓게 퍼진 도회(都會)가 아름답게 형성되어 있었다. 잠시 언덕을 내려가자 길옆에 비지터 센터가 있고, 안으로 들어가니 젊은 여성 안내원이 호쾌한 웃음으로 맞아 주었다.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세리요스 힐스(Serrillos Hills)의 초입이자, 길 건너 산 속 산토도밍고 푸에블로의 인접지였다. 자료를 받은 다음 밖으로 나오니 앞 쪽에 제주도의 큰 오름을 연상케 하는 화산봉들이 여인네 젖가슴처럼 봉긋 솟아 있고, 산타페 진입을 위해 I-25에서 285로 갈아타는 턴파이크(Turnpike)가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산타페 카운티에 들어선 우리는 곧바로 산타페 시내 외곽의 신시가지를 거쳐 목표지점인 구시가지로 방향을 잡게 되었다. 거대한 가마솥의 한 가운데로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가듯 산타페 산맥 앞에 자리 잡은 산타페 시티는 거대한 분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지터 센터에서 20분이나 달렸을까. 드디어 어도비 건물들 일색인, 조용하고 아름다운 산타페 알트 슈타트(Alt Stadt)쌩얼이 우리의 가슴에 살포시 안겨들었다.

 

 

 


넓게 퍼져 있는 산타페 신시가지의 주택들

 

 

 


산타페의 '프란시스코 대성당'과 구시가지 중심부

 

 

 


주지사 궁(Palace of the Governors) 앞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는 주민들과 물건을 사는 관광객들

 

 

 


산타페 구시가 중심부의 야경

 

 

 

***

 

거룩한 믿음[Holy Faith]’을 뜻하는 스페인어 ‘Santa Fe’. 식민시대의 생생한 산물이 바로 이 도시다. 뉴멕시코 주도인 산타페는 주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자 산타페 카운티의 청사 소재지이며, 무엇보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캐피털 시티다. 2012년 기준으로 69,204명의 인구를 보유한 이곳은 카운티 전역을 포함하는 표준 통계지역[Metropolitan Statistical Area]’의 으뜸 도시이기도 하다.

 

산타페의 완전한 명칭이 ‘La Villa Real de la Santa Fé de San Francisco de Asís’ 아씨시 프란시스코 성인의 로열 타운[The Royal Town of the Holy Faith of St. Francis of Assisi]’임을 알고 나서야 구시가의 높은 곳에 우뚝 서서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는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바실리카 대성당[Cathedral Basilica of St. Francis of Assisi]’의 존재의미가 이해되었다. 대성당 뿐 아니라 시 청사 앞을 비롯한 시내의 곳곳에서 프란체스코 성인의 동상과 사진들을 보았는데, 그가 바로 산타페의 수호성인이었다. 그 점을 이해하고 나서야 왜 대성당이 내려다보이는 앞쪽에 중앙 광장과 주지사 집무실 및 공관을 포함한 공공기관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왜 그로부터 상가들과 각종 편의시설들이 방사상(放射狀)으로 펼쳐져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즉 '프란체스코 성인-대성당-아름다운 산타페'의 상관구조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산타페 광장의 모습

 

 

 

 


산타페 시청 정원과 프란체스코 성인 동상

 

 

 

 


"Hometown Hero" 2011. 7. 12.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레인저 상

 

 

 

 


산타페 시내에서 만난 멋진 화랑 입구

 

 

 

 


또 다른 화랑 입구

 

 

 

 


길 건너편에서 발견한 인디언 기념품 가게

 

 

 


길거리 상가에서 만난 독특한 디자인의 의자

 

 

 

 


길가 주택의 뜰에서 만난 인상적인 디자인의 두상

 

 

 

 

 

뉴멕시코 진입 후 며칠이 지나면서 고도(高度)의 변화에 무덤덤해지긴 했지만, 놀랍게도 뉴멕시코 주 전반의 평균 해발 고도는 1,000m에 가까웠고, 이 가운데 해발 2,134 m인 산타페는 미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주도였다. 가끔씩 귀가 멍멍해지는 느낌을 받은 것도 특히 고도에 민감한 내 신체 구조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다. 산타페의 면적은 96.9인데, 그 가운데 96.7가 땅이고 나머지 0.2는 저수지나 강, 호수 등 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추운 겨울, 따뜻한 여름이 이곳 날씨의 공식이라서인지 햇볕이 내리쪼임에도 구 시가지를 돌아보는 동안 우리는 달달 떨어야 했다. 한겨울인 12월의 평균온도 0.9, 한여름인 7월의 평균온도는 21.2이며,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6~8개월 동안 눈이 내린다고 하며, 6~8월까지는 심한 비가 내린다고 한다.

 

1848년 멕시코와 미국이 전쟁을 끝내고 체결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atado de Guadalupe Hidalgo/Treaty of Guadalupe Hidalgo)’은 뉴멕시코의 역사적정치적 향배를 결정한 분수령이었다. 멕시코에서 독립한 텍사스 공화국이 미국에 합병된 이듬해인 1846년에 일어난 것이 멕시코-미국의 전쟁이다. 전쟁에서 패한 멕시코의 평화협정 요청에 미국이 서명한 조약이 바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인데, 이 조약으로 멕시코는 현재 텍사스 주, 콜로라도 주, 애리조나 주, 뉴멕시코 주, 와이오밍 주의 일부, 캘리포니아 주, 네바다 주, 유타 주 등을 미국에 넘겨야 했다.

 

그 때 미국 땅으로 바뀐 뉴멕시코 땅을 밟으면서 나는 미국과 판이한 멕시코의 향기, 멕시코를 지배한 스페인의 향기가 섞인 묘한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 미국 남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침례교 위주의 개신교 교회들 대신 웅장한 규모의 가톨릭 성당이 구시가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은 대부분 유럽의 도시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또한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전통음식이라는 것도 대부분 멕시코 음식 그 자체이거나 멕시코 풍미를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옛날 인디언들의 식습관이라야 자연 재료의 상태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것들일 것이니, 유럽풍, 멕시코 풍을 만나면서 그 정체성을 맥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 지역의 어딜 가도 인디언 음식이라고 내오는 것들이 대부분 멕시코 음식 일색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족들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애코머(Acoma Pueblo), 코치티(Cochiti Pueblo), 이즐레타(Isleta Pueblo), 히메즈(Jemez Pueblo), 케와(Kewa Pueblo)[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Pueblo)의 이전 이름], 라구나(Laguna Pueblo), 남베(Nambe Pueblo), 오케 오윙에(Ohkay Owingeh Pueblo), 피쿠리우스(Picuris Pueblo), 퍼와이키(Pojoaque Pueblo), 샌디아(Sandia Pueblo), 산 펠리페(San Felipe Pueblo), 산 일데폰소(San Ildefonso Pueblo), 산타애나(Santa Ana Pueblo), 산타 클라라(Santa Clara Pueblo), 타오(Taos Pueblo), 터수키(Tesuque Pueblo Santa Fe), 지아(Zia Pueblo), 주니(Zuni Pueblo) 20 개에 가깝다.

 

 

 

 


산타페 시가지의 야경

 

 

 


호텔 로레토(Loretto)의 환상적인 모습

 

 

 


호텔 라폰다(La Fonda) 외관의 전통미

 

 

 


미국-멕시코 간의 전쟁,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협정문,
그로 인해 변한 양국의 국경 등을 보여주는 자료들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멕시코의 패배를 풍자한 그림[털 뽑힌 독수리]

 

 

 

 


산타페 '순교자들의 십자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29. 15:15

 

 

 


애코머 푸에블로 등 앨버커키 인근 도시들이 표시된 지도

 

 


스카이 시티 이정표

 

 


스카이 시티 가는 길

 

 


스카이 시티 입구의 돌기둥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

 

 


스카이 시티 문장(紋章)

 

 


컬츄럴 센터에서 스카이 시티로 출발하는 셔틀 버스들

 

 

 


밑에서 올려다 본 메사의 주택들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 인디언

 

 

내 나이 또래의 한국인으로서 푸에블로(Pueblo)’란 이름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참 오만했던 북한이 간첩들을 활발하게 남파하여 우리나라를 흔들다가 급기야 청와대 폭파와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김신조 등 무장공비들을 내려 보낸 것이 1968117. 그 바로 일주일 후인 1968123일엔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 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되었다. 필자 나이 당시 11. 간첩들이 내 고향 동네의 훌륭한 청장년 두 명을 밤에 죽이고 내뺀 사건으로 몸서리치고 있던 차, 김신조와 푸에블로 호 사건은 북괴에 대한 불신과 증오의 대못을 내 마음에 박고 말았다. 푸에블로란 명칭의 원조를 미국에 와서 만난 것이다.

 

그간 틈 날 때마다 인디언들을 찾아 다녔으나, 시간부족역부족을 느낄 뿐이었다. 미국 전역에 564, 오클라호마에만 39개 종족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데, 나 혼자 어느 세월에 그들을 다 만난단 말인가. ‘문명화된 5개 종족[The 5 Civilized Tribes/체로키(Cherokee), 치카샤(Chickasaw), 촉토(Choctaw), 세미놀(Seminole), 크리크(Creek)]’을 포함 10개 정도의 인디언 종족들을 만나면서 힘과 의지의 소진(消盡)을 절감하게 되었고, 바깥으로 눈을 돌리던 중 뉴멕시코에 푸에블로 인디언이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사실 오클라호마에서 만나는 인디언들은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을 의심할 정도로 미국화[Americanization]되었다는 것이 그간 내린 내 판단이다. 내 느낌으로 이 점은 이른바 문명화되었다는 5개 종족 뿐 아니라 여타 종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영어를 사용하고 미국인들의 생활양식으로 살며 미국 정치체제 속의 일원으로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실현을 추구하는 인디언들에게서 그들만의 종족적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인디언들을 만난다면서 박물관이나 찾아다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좌절을 느낀 것은 그런 깨달음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물론 박물관은 한 종족이나 민족, 국가의 과거현재미래가 통합되어 숨 쉬고 있는 생명의 공간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긴 하다. 그러나 분명 주변에 인디언들이 살아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왜 나는 한사코 화석화된 것처럼보이는 박물관만 찾아다니는가. 그런 회의가 엄습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미국화 된 인디언들은 외모만 인디언의 모습을 띠고 있을 뿐, 문명사회나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이 누구보다 강하다. 그건 미국사회의 여타 마이너리티들인 유색인들이 그런 욕망을 갖고 노력하는 것과 똑 같다. 재미 한인들에게 미국화 되지 말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견지(堅持)하라는 정신 나간 주문을 할 수 없는 것은 인디언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인디언 문화와 역사의 탐사에 나선 내 행로가 암초를 만난 것은 분명하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필요가 절실할 때 홀연 나타난 것이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인디언들이었다.

 

그들을 만나러 앨버커키로 가는 하이웨이의 주변은 키 낮은 식물들과 크고 작은 돌들이 깔린 사막지대였다. 그리고 몇 마일씩 간격을 두고 다양한 이름의 푸에블로 인들이 살고 있는 구역이 우리의 시야를 거쳐 지나갔다.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종류가 이렇게도 많단 말인가. 뉴멕시코에 오기 전만 해도 푸에블로는 단일민족인 줄 알았던 내 무지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장이었다. 오밤중이나 되어서야 앨버커키에 도착, 호텔에 1박을 하면서 다음 날 가기로 한 스카이 시티의 기록들을 점검했다. 그 동안은 매혹적인 이름에 정신이 팔려 그곳이 애코머 푸에블로(Acoma pueblo)’ 인디언들만의 거주구역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그곳에 가면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하나만 갖고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차를 타고 오면서 많은 푸에블로 인디언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스카이 시티에 살고 있다는 애코머 푸에블로도 그들 중 하나일 뿐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 지역에서는 스카이 시티의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나는 것에 초점을 두기로 한 것이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앨버커키에서 서쪽으로 60 마일쯤 떨어진 곳의 스카이 시티, 애코미터(Acomita), 맥카티스(McCartys) 등 세 마을에 살고 있었다. 원래 푸에블로가 점유해온 땅은 500만 에이커에 달하는데, 실제로 현재는 그 면적의 단 10%만 소유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스카이 시티가 바로 올드 애코머(Old Acoma)’의 원래 거주지다. 미국정부의 2010년 통계에 따르면, 5000명 정도의 애코머 인들이 종족적 정체성을 갖춘 사람들로 확인되며, 그들이 이 지역을 800년 이상 계속 점유해온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푸에블로애코머란 말들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앨버커키에 와서 들은 바에 의하면, ‘푸에블로마을[village]’이나 작은 도시[town]’를 가리키는 스페인 말이며, 미국 서남부의 사람들 혹은 그곳의 독특한 건축을 가리키는 뜻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애코머란 말도 스페인어에서 나왔는데, ‘항상 있었던 장소[the place that always was]’ 혹은 화이트 락의 주민들[People of the White Rock]’을 뜻한다고 한다. 뉴멕시코 샌 후안 카운티(San Juan County)의 나바호(Navajo) 인디언 정착지가 바로 화이트 락 캐년(White Rock Canyon)인데, 그렇다면 원래 그곳에 살던 애코마 푸에블로 인들이 나바호 인들을 피해 이곳으로 온 것인지 현재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애코머 푸에블로 사람들은 건축물이나 농사짓는 양식, 혹은 도자기 등에 나타나는 예술성으로 미루어 아나사지(Anasazi), 모골론(Mogollon), 기타 다른 고대 부족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종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메사(mesa)에서 내려다 본 경관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메사의 주택가 골목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모습

 

 


스카이 시티의 주택들

 

 


전통 어도비 양식의 주택들

 

 


메사에서 내려다 본 황야

 

 


스카이 시티의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과 앞 뜰의 공동묘지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의 내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마을 앞 좌판에 팔려고 늘어놓은 도자기들

 

 

아침 일찍 앨버커키의 숙소에서 나온 우리는 복잡한 산길 60마일을 달려 넓게 펼쳐진 분지 속의 스카이 시티에 산다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을 찾았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Sky City Cultural Center)’에 당도하여 긴 시간을 기다리고 난 11시 반에야 가이드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살아온 메사(mesa) 꼭대기가 평평하고 주위가 벼랑인 돌 잔구는 높이가 365피트[111.3m]나 되는데, 길은 잘 나 있었지만, 관광객들이 개인적으로 그곳에 접근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셔틀버스로 이동하여 가이드의 안내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셔틀버스를 타고 센터로부터 돌덩어리들 사이를 10분 정도 달려 올라가니 오랜 옛날부터 있어 온 듯 메사 위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전통 주거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모든 집들이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것은 물론이고, 대체로 33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 양식의 건물들이었는데, 모두 남향이었다. 이 건물들을 보며 이른바 어도비 양식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서까래, 풀 짚, 회반죽 등으로 덮은 지붕을 대들보가 가로질러 밖으로 삐죽삐죽 나오게 한 다음 어도비 벽돌로 벽면을 마무리하는 공법이었다. 1층 집의 지붕은 2층 집의 바닥이 되고, 2층 집의 지붕은 3층 집의 바닥이 되니, 실로 멋진 상호의존적 건축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집들의 사이사이에 조성된 광장에서 각종 전통 행사들이 열렸으리라. 

 

2층이나 3층집을 오르내릴 땐 반드시 나무 사다리를 사용했다. 만약 위에서 사다리를 치워버리면 그 집에 올라갈 수 없으니, 그것은 일종의 외적에 대한 자위(自衛) 수단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기 전에는 평지에서 메사를 오르내리던 통로라 해야 기껏 돌 표면을 파서 만든 가파른 계단뿐이었을 것이니, 그곳만 막으면 외적들이 메사 위의 주택가로 올라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집들 앞에는 그들의 전통 빵을 굽는 흙 화덕이 만들어져 있고, 개중에는 최근에 빵을 구은 듯 그을음이 밖으로까지 번져 나온 경우도 보였다. 서남쪽 벼랑 위엔 엄청난 크기와 규모의 어도비 건축물 성 이스테반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이 있고, 그 앞마당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사진은 성당의 겉면만 찍을 수 있었고, 그나마 공동묘지 근처에서는 카메라를 조작조차 못하게 막는 것으로 보아, 성당 내부나 공동묘지가 그들에겐 성역(聖域)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종교나 신앙에 관한 궁금증은 전형적인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인 가이드의 설명으로 대부분 해소되었다. 그는 애코머 인들의 전통 신앙은 인간의 삶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강조한다는 것, 태양은 창조주 신을 대리하는데, 공동체를 둘러 싼 산들과 그 위에 떠 있는 태양 그리고 그 아래의 땅이 균형을 이루어 애코머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 전통 종교 의례는 충분한 강우를 비는 데 중심이 있었으므로 날씨에 많이 좌우된다는 것, 그런 제의에서 카치나(kachina) 댄서들이 춤을 춘다는 것, 푸에블로 거주지에는 종교 의례를 행하는 방 즉 카이바(kiva)들이 있다는 것, 각 푸에블로의 지도자는 공동체 종교의 지도자이거나 추장의 지위를 갖고 있는데, 추장은 태양을 관찰하여 종교의례의 스케줄을 짜는 지침으로 사용한다는 것, 많은 애코머 인들이 가톨릭 신도들이며 그들의 행사에 가톨릭 정신과 전통 종교가 혼합된 모습이 보인다는 것, 아직도 많은 제의들이 살아 있는데, 9월에는 그들의 수호신인 스테판 성인(Saint Stephen)을 기리는 축제가 있다는 것, 그날에는 메사가 대중들에게 개방되어 2천명 이상의 순례객들이 축제에 참여한다는 것등을 열심히 설명했다.

 

성당에 이르기 전 중앙 광장에는 세 개의 흰 색 통나무들을 엮고 위쪽에 가로막대를 댄 사다리 모양의 제구(祭具)’ 두 개가 가옥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는데, 가이드에게 용도를 물으니 일종의 기우제의(祈雨祭儀)’에 쓰이는 물건들이라고 했다. 즉 세 개의 통나무는 빗줄기, 위쪽에 댄 가로막대는 비구름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늘 물이 모자라 고통을 받던 그들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제구였다. 말하자면 가톨릭과 전통 제의가 공존하던 신앙의 형태를 현장에서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가족 형태는 어떨까. 모계사회인 애코머 인들에게는 대략 20개의 클랜(Clan)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19개의 클랜들이 살아 있으며, 각각의 클랜에 따른 상징동물들이 있었다. 클랜의 상속에 대하여 물으니 서로 다른 클랜 출신의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경우 모계사회인 만큼 아이의 클랜은 어머니의 것을 따른다고 했다. 이들의 결혼은 모노가미(monogamy) 즉 일부일처제로서 이혼은 매우 드물며, 사람이 죽은 경우 4일 낮밤을 새운 뒤 매장한다고 했다.

가이드를 따라 이동하는 곳곳에 애코머 여인들이 좌판을 벌이고 앉아 있었다. 주로 그들이 직접 구은 도자기와 비드(bead) 및 수예 등 전통 수공예품들이었다. 아이들도 자신들이 만든 아기자기한 도자기들을 갖고 나와 파는 것을 보며, 공예기법이 부모로부터 자녀들에게 전수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요는 하지 않았으나, 이들 좌판에 연결되도록 가이드의 이동경로는 교묘하게 짜여 있었다. 카지노 등의 독점 사업으로 쉽게 돈을 버는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술을 바탕으로 자립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가 매우 바람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애코머 인들에게서 미국화(Americanization)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물론 현재 메사의 전통가옥에 사는 주민들은 극히 일부분이고 도시로 나가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가이드가 보여준 것처럼 그들 역시 미국인인 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들의 정체성만큼은 어떻게든 붙잡고 있으려는 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멕시코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미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지역은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였다. 그들의 지배를 받아 가톨릭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전통 신앙을 버리지 않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었다. 인근 부족들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메사의 고지대에 거주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어도비라는 건축양식을 통해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생활미학을 구현하고 뉴멕시코의 지역 미학으로 승화시킨 점은 무엇보다 먼저 강조되어야 할 그들의 공로였다. 그들은 아름다운 도자기와 각종 수공예품들을 직접 생산하여 지금도 외부인들에게 팔고 있었다. 또한 아직도 5천에 가까운 애코머 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이 지역 혹은 그 인근에 살고 있으며, 외부와의 통로를 열어놓은 채 자신들의 미래를 가꾸고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비록 이 사회 마이너리티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삶의 의지와 미래지향적 성향을 확인하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기우제의에 사용하던 도구[세 개의 기둥은 빗줄기를 가로막대는 구름을 상징함]

 

 


이 도시의 전형적인 어도비 양식 주택

 

 


메사에서 내려다 본 아래쪽 경관

 

 


메사의 주택가 좌판에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진열하고 있다.

 

 


컬츄럴 센터의 식당

 

 


식당에서 주문한 푸에블로 전통음식[멕시코 풍 음식이었음]

 

 


애코머 스카이 시티 가는 길 표지판

 

 


애코머 스카이 시티 건너편 언덕에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14. 12:05

 

 

 


코만치의 수도 로턴을 중심으로 이어진 각 도시들

 

 


1848년의 미국 지도

 

 


코만치 네이션의 깃발

 

 


코만치 민족대학[Comanche Nation College]의 상징 

 

 


티피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코만치 가족 3대

 

 


대평원의 티피

 

 


티피를 재현해 놓은 모습

 

 


옛날 코만치족 티피의 모습

 

 


멀리서 들려오는 신호음을 듣고 있는 인디언 전사들

 

 


불 붙인 풀을 화살에 붙여 쏘아 버팔로들을 언덕 위로 몰고 있는 인디언들

 

 


가재도구를 끌고 말을 탄 채 이동하는 인디언 가족

 

 

카이오와(Kiowa), 아파치(Apache), 코만치(Comanche), 그리고 대평원[Great Plains]의 서사시(4)

 

 

무서운 코만치에서 상식의 미국인으로!(1)

 

 

포트실을 떠나 5분쯤 달렸을까. 코만치의 수도 로턴(Lawton)에 진입했다. 서부영화에서 접한 코만치 전사들의 무시무시함이 기억에 남아서였을까, 운전대를 잡고서도 무의식적으로 시내 좌우를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어느 골목으로부터 말을 타고 예의 그 화살을 겨누며 쫓아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가지는 잘 정비되어 있었고, 깨끗하며 조용했다. 여느 도시들 못지않게 주택들엔 윤기가 흘렀다. 펄펄 살아 날뛰던 코만치의 정기는 이미 죽었는지, 아니면 어느 구석에 잠복해 있는지, 고요하기만 했다.

 

그들이 처음으로 외부인들에게 발견되었을 때, 그들은 수렵과 채취를 업으로 삼고 기마술 같은 특유의 말 문화[horse culture]’를 보유한 부족이었다. 그들의 인구는 18세기 후반이 되자 이미 45,000 명 이상으로 늘어 있었다. 그들은 이곳 남부 대평원을 지배하던 부족으로서 가끔 다른 부족과의 전쟁에서 포로들을 잡아다가 스페인 사람들이나 멕시코 정착민들에게 노예로 팔아먹기도 하던 무서운사람들이었다. 그 뿐 아니다. 수천 명의 스페인 사람들, 멕시코 사람들, 심지어 미국 정착민들까지도 포로로 잡아다가 국경지역에 묶어 두고 백인인 그들과의 강제결혼을 통해 혼혈의 후손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그들이 바로 그 유명한 메스티조(Mestizo) 혼혈인들이다. 코만치가 그 메스티조의 확장과 전개에 큰 공헌을 한 셈이고, 그것은 결국 인종의 개량이라는 긍정적 결과를 낳게 된 셈이었다. 이처럼 40년 이상 미국과의 전쟁을 계속하면서 그들을 질겁하게 만든 아파치보다도 오히려 무서운 것이 코만치였다.

 

현재 코만치 네이션에 등록된 인구는 15,000여 명이고, 그 중 7,700여 명이 로턴포트실과 그 주변지역 등 오클라호마 주 남서부 지역에, 나머지는 전국에 각각 흩어져 살고 있다 한다. 그러나 매년 6월 중순, 오클라호마 주 월터스(Walters) 시티에서 열리는 홈커밍 파우와우(Homecoming Powwow)’ 행사에는 대부분의 코만치 인들이 모인다고 한다. ‘파우와우는 병의 회복이나 사냥의 성공 등을 비는 집단의식이다.

 

코만치 네이션의 본부는 로턴에 있는데, 카도(Caddo)코만치(Comanche)카튼(Cotton)그래디(Grady)제퍼슨(Jefferson)카이오와(Kiowa)스티븐스(Stephens)틸만(Tillman) 카운티 등이 그들의 사법권이 미치는 지역이다. 8분의 1 즉 대략 13% 정도의 코만치 피를 갖고 있으면 부족원의 자격이 있다고 하니, 증조부모 가운데 한 사람만 코만치 인이면 네이션에 등록할 수 있는 것이다. 코만치족은 대평원의 인디언 부족으로서 그들이 차지한 영역은 뉴멕시코 동부, 콜로라도 남동부, 캔자스 남서부, 오클라호마 서부, 텍사스 북서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국 정부가 인정한 코만치 네이션의 본부는 현재 로턴에 있다.

코만치가 뚜렷한 부족으로 떠오른 것은 1,700년 직전 즉 그들이 쇼쇼니(Shoshone) 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을 때였다. 당시 쇼쇼니 부족은 와이오밍 주 플랫 강(Platte River) 상류를 따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코만치족은 말[]을 얻음으로써 큰 변화의 계기를 맞이했다. 1680년 푸에블로(Pueblo) 족이 반란을 일으킨 후 푸에블로 인디언들로부터 말을 얻게 되었고, 쇼쇼니로부터 분리해 나온 이후 말을 이용함으로써 더 좋은 사냥터를 찾을 수 있는 기동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역사상 교통수단의 발달이 혁명이라 할 정도로 산업을 발전시킨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코만치 문화의 등장과 말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사실 그들이 쇼쇼니와 결별하고 남쪽으로 이동한 목적도 새로운 바이슨 떼를 찾아내기 위한 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스페인 식민지의 정착자들로부터 새로운 말들을 구하기 위한 데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상당수의 서부영화들에 묘사된 것처럼 코만치 인디언들의 마술(馬術)은 신기(神技)에 가깝다는 평들이 있어왔다. 다시 말하면 코만치족은 말을 그들의 문화에 도입했을 뿐 아니라 다른 부족들에게 소개한 대평원의 첫 부족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남부 대평원으로 이동하면서 아칸사 강으로부터 텍사스 중부로까지 영역을 넓혔고, 1,700년에는 뉴멕시코와 텍사스 주 상단 즉 오늘날의 오클라호마 주 팬핸들(Panhandle)에까지 이를 정도였다. 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결국 1777년 싸움의 상대였던 리판 아파치(Lipan Apache)는 리오 그란데(Rio Grande) 강까지, 메스칼레로 아파치(Mescalero Apache)는 코아휠라(Coahuila)까지 각각 퇴각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코만치는 들소인 바이슨의 증식을 통해 식량이나 옷을 확보하게 되었고, 쇼쇼니 이주자들이 유입되었으며, 라이벌 그룹들로부터 포로로 잡아온 여인들과 아이들을 자신의 주민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인구가 급격하게 불어났다. 그러나 코만치는 단일민족으로 응집하지 못하고, 십여 개의 자치그룹으로 분할되었는데, 그들은 그것들을 밴드(band)’라 불렀다. 이 밴드들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좀처럼 서로 싸우지 않았다.

 

그들은 19세기 중반쯤 프랑스와 미국의 무역업자나 정착자들에게 말을 공급했고, 나중에는 캘리포니아 골드러쉬에 참여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로드를 따라 자기네 영역을 통과하는 이주자들에게도 말을 공급하게 되었으니, 코만치족이야말로 말을 이용하여 전쟁에도 이기고 부도 이룬 셈이었다. 그 뿐 아니다. 그 때까지 야만적인 성향을 버리지 못하고, 말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공급이 달리자 다른 부족들과 정착자들의 말을 훔치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서운 말 도둑이란 악명을 얻게 되었고, 나중에는 가축까지 훔치게 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이나 미국인 정착자들에게서 가축을 자꾸 훔치다가 전쟁이 터지는 수도 있었다.<다음에 계속>

 

 

 


버팔로를 몰아 함께 사냥하는 인디언들

 


풀을 뜯고 있는 대평원의 버팔로

 

 


혼자서 말을 타고 버팔로를 사냥하고 있는 인디언

 

 


가축떼를 몰고 이동시키는 일의 어려움

 

 


가축떼를 몰고 이동하던 통로들

 

 


밀 씨앗을 보관하던 옹기

 

 


밀의 무게를 재던 저울

 

 


대평원 인디언들의 말 문화

 

 


1930년대 캐나다의 평원과 미국의 곡창지대에 큰 피해를 준 먼지 폭풍. 1930년대 내내 심각한
가뭄과 바람에 의해 심한 고통을 겪었음.

 


Dust Bowl의 다른 모습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