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1. 11. 09:07

 

 


아파치 네이션 본부

 


화이트 마운틴 아파치족 문장(紋章)

 

 


야바파이 아파치 네이션 문장

 

 


아파치 시내 입구 아파치 파크 안에 마련된 '아파치 참전용사 공원'

 

 


아파치 시내 입구 아파치 파크 안에 마련된 '아파치 참전용사 공원' 추모비

 

 


추모비의 아래쪽에 '미 육군 일병 실라스 W. 보이들, 한국전에서 1950년 10월 31일
적에게 잡혀 죽었다'고 쓰여 있다.

 

 


포트실 치리카화 웜스프링스 아파치족 사무소
(Fort Sill Chiricahua Warm Springs Apache Tribal Office)

 

 


차창으로 내다 본 아파치 시가지

 

 

 


아파치 역사 박물관[Apache Historical Society Museum]

 

 

카이오와(Kiowa), 아파치(Apache), 코만치(Comanche), 그리고 대평원[Great Plains]의 서사시(3)

 

 

아파치 정신을 찾아 대평원으로!

 

 

 

 

 

아나다르코의 카이오와로부터 아파치와 코만치를 찾아 남쪽으로 떠났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벌판 위엔 누렇게 마른 풀이 지천으로 깔려 있고, 검정색 소들만 주인행세를 하는 듯 늘어서서 게으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말 탄 아파치의 전사들처럼 바람은 사정없이 달려와 나그네의 뺨을 찌르는데, 지평선은 망망하여 지고 뜨는 해의 방향을 분간할 수 없었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길가에는 물어볼 사람도 집도 없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수십 분을 더 달리니 벌판 위에 포트 실 치리카화 웜 스프링스 아파치 족 사무소[Fort Sill Chricahua Warmsprings Apache Tribal Office]’라는 글자들을 벽에 달고 있는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포트실 아파치 족은 연방으로부터 인정받은 오클라호마 내의 미국 원주민 종족이니, 이곳 아파치가 미국 내 전체 아파치 족을 대표하는 셈이다. 그러나 사무소에 들어가니 전체적으로 썰렁했다. 내부는 공사 중이어서 어수선했으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인디언 아가씨는 친절했고 설명 또한 구체적이었다. 그녀가 알려준 대로 20마일쯤 달려가니 아파치 시티가 나왔고, 그 입구에 아파치 시티 팍(Apache City Park)이 있었으며, 그 한쪽에 참전용사들의 공원[Veterans Park]’이 있었다. 아파치 족 출신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한국전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죽은 젊은 군인의 이름도 비석에는 올라 있었다. 어딜 가도 한국전 전몰용사들이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부각되어 있는 곳이 미국이었다. 적어도 미국에서만큼은 625가 잊혀진 전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고, 아파치 인디언들의 본고장에서 그 점을 확인했다는 것이 감동적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생활 형편들이 괜찮은지 다운타운으로 들어가는 연도의 주택들에는 남부지역 도시로서는 드물게도 윤기가 흘렀다.

 

이 지역의 아파치 인디언들은 원래 알래스카 지방이나 캐나다, 미국 서부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아마 오랜 옛날 아시아와 미주가 연결되었을 때 알라스카와 캐나다로 건너온 아시아계 사람들이 그들이었으리라. 그들이 로키 산맥을 따라 캘리포니아 등 미국의 서부 지역으로 내려왔고, 다시 그로부터 동쪽 혹은 남부의 대평원 지역으로 옮겨왔을 것이다. 따라서 아파치는 한 지역에서 결코 오래 정착해본 적이 없고, 원래 정착할 수도 없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노마드(Nomad)’였다. 그처럼 수시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말이 필수적이었다. 그들이 말을 타거나 활용하는 방법을 익힌 첫 부족들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1700년경 캔자스 평원으로 이동한 아파치 부족원의 다수는 그곳에 살면서 농사를 짓고자 했으나, 농사일에 익숙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수박, , 옥수수 등 농작물들을 재배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런 약점 때문에 나중에 코만치 족에게 지배를 당하고 땅도 빼앗겼으며, 뉴멕시코나 애리조나 등지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텍사스와 멕시코 쪽으로도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곳을 지배하던 스페인 사람들과 싸우게 되었다. 1730년대 아파치 인들은 스페인 사람들과 피나는 전쟁을 시작했고, 1743년이나 되어서야 스페인의 지도자가 텍사스 일부 지역을 이들에게 살 수 있도록 양보하면서 땅을 두고 벌어졌던 싸움은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1749년의 한 의식(儀式)에서 아파치 추장은 싸움이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손도끼를 땅에 묻었는데, 그 이후로 오늘날도 손도끼를 땅에 묻다는 말은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상징하게 되었다고 하니, 재미있는 일이다.

 

원래 아파치(Apache)’란 말은 문화적으로 관련 있는 미국 남서부 원주민들의 그룹을 지칭하던 집단 명사였다. 원래 아파치 사람들은 동부 애리조나, 멕시코 북부, 뉴멕시코, 텍사스 서부 및 남서부, 콜로라도 남부 등지에 걸쳐 살았고, 그 지역은 고산 지대, 물이 풍부한 계곡지대, 크고 깊숙한 협곡, 사막, 남부의 대평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파치 족의 하부그룹들은 약간의 정치색을 띤 몇 개의 부류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규모가 큰 일곱 개의 그룹들은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각자의 독특한 문화를 경쟁적으로 발달시켰다. 나바호(Navajo), 서부 아파치(Western Apache), 치리카화(Chiricahua), 메스칼레로(Mescalero), 지카릴라(Jicarilla), 리판(Lipan), 대평원 아파치(Plains Apache) 등이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그룹들이다. 현재 이런 아파치 족들 대부분은 오클라호마와 텍사스에 살고 있고,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의 보호구역들에도 살고 있다. 이들 외에 일부 아파치 인들은 대도시 지역으로 이주하기도 했는데, 큰 규모의 도시지역 공동체로는 오클라호마 시티, 캔자스 시티, 피닉스(Phoenix), 덴버(Denver), 샌디에고(San Diego),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등이 꼽힌다.

서부영화들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처럼, 아파치 족은 역사적으로 매우 강하고 전략적인 민족으로 인정을 받아왔는데, 몇 세기 동안 스페인과 멕시코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 명성이었다. 미국 육군 역시 19세기에 들어와 그들과 몇 번 대결해 보고 나서는 아파치가 강한 전사들이자 기술적인 전략가들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아파치족은 미국과 40여 년 간 쉬지 않고 전쟁을 벌였으며, 심지어 남북전쟁 때 북부군과 남부군이 서로 싸우는 처지에서도 양자 모두 아파치와의 전쟁을 지속했다니, 그들의 용맹성을 이보다 더 분명히 입증해주는 자료는 없을 것이다.

 

 


수레를 타고 가는 아파치 가족

 

 


떠돌이 생활을 하는 아파치족

 

 


아파치족의 전통가옥인 티피(Tipi)

 

 

 


아파치족의 바구니들과 약초들

 

 


치리카후아 아파치족의 주술사이자, 아파치 전쟁 중 멕시코와 미국을 상대로 투쟁했던
아파치족의 걸출한 지도자 제로니모. 1909년 2월 17일 포트실 감옥에서 80세를 일기로 사망했음.

 

 

 


아파치족의 다양한 모습들

 

 

 


아파치족의 각종 전통그릇들

 

 

 


포스트 가드하우스(Post Guardhouse)의 당시 모습.
현재는 박물관(Fort Sill Historic Landmark & Museum)으로 쓰이고 있음.

 

 


포트실 역사 박물관(Fort Sill Historic Landmark & Museum)

 

 


포트실 역사박물관의 유래를 설명하는 글

 

 

 

대부분의 아파치 인들도 다른 부족들처럼 네이션이나 보호구역의 범주 안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것들 가운데 연방정부에 의해 공인된 것만 해도 아홉 개나 된다. ‘오클라호마의 아파치 족[Apache Tribe of Oklahoma]/애리조나 주 포트 맥도웰의 야바파이 네이션[Fort McDowell Yavapai Nation, Arizona]/오클라호마 주 포트 실의 아파치 족[Fort Sill Apache Tribe of Oklahoma]/뉴멕시코 주의 지카릴라 아파치 네이션[Jicarilla Apache Nation, New Mexico]/애리조나 주 산 카를로스 보호구역의 산 카를로스 아파치 족[San Carlos Apache Tribe of the San Carlos Reservation, Arizona]/애리조나 주 톤토 아파치 족[Tonto Apache Tribe of Arizona]/애리조나 주 포트 아파치 보호구역의 화이트 마운틴 아파치 족[White Mountain Apache Tribe of the Fort Apache Reservation, Arizona]/애리조나 주 캠프 버디 인디언 보호구역의 야바파이 아파치 네이션[Yavapai-Apache Nation of the Camp Verde Indian Reservation, Arizona]’ 등으로 다른 부족들에 비해 수가 많은 편이다.

지금 우리가 찾아다니는 오클라호마의 아파치는 대평원의 아파치로서 아나다르코(Anadarko) 근처에 본거지를 두고 있으며, 위에 제시한 바와 같이 연방정부에 의해 오클라호마 아파치로 인정된 그룹이었다.

 

그런 아파치족의 역사와 문화를 현지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아파치 시내에서 만난 아파치 히스토리컬 서사이어티 뮤지엄(Apache Historical Society Museum)’은 예상대로 많은 생활문화사 자료들을 갖추고 있었다. 가정생활, 산업, 학교, 운송, 의료기구, 의상, 가구, 서적, 사진, 초창기 은행 시설, 회화, 아파치 시민들의 개인 기념물 등 모든 분야의 콜렉션들을 풍부하게 보유한 점에서 아파치족의 역사와 문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1901~19022층으로 세워진 이 석조 건물에는 애당초 아파치 주립은행 사무실과 다른 업종들이 입주해 있었다. 그러나 이 건물은 1976년부터 박물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후 40년 가까이 모은 다양한 생활사 자료들을 통해 아파치족이 근대에 이룬 문명화의 자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박물관을 떠나 10분 정도 달린 끝에 도착한 곳이 바로 포트 실 군사 보호 구역[Fort Sill Military Reservation]’ 안에 있는 포트 실 국립 역사 랜드마크 박물관[Fort Sill National Historic Landmark & Museum]’이었다. 이곳이 현재 사용되고 있는 미 육군의 군사기지인 만큼 출입문을 통과할 때부터 현역 군인의 검문을 받아야 했다. 드넓은 부지 한 군데에 오래 된 2층 벽돌집이 있고, 그곳이 바로 이 지역의 랜드마크이자 박물관이었다. 안에 들어가니 지키는 사람도 없이 자동으로 음성 설명이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주로 죄를 지은 아파치 인디언들을 구금하고 처형하던 형무소가 원래 이 건물의 용도였고, 박물관으로 변신한 지금 당시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아파치 인디언들이 겪어온 고난과 질곡의 세월을 보여주고 있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구금되고 형을 받았겠지만, 백인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저지른 죄와 받은 형벌이 과연 얼마나 공정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

 

아파치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다른 어느 부족들의 땅보다 넓고 다양한 지역에서 각 그룹마다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었다. 미국 정부에 가장 길고 끈질기게 저항했던 용맹한 전사들이 바로 아파치족이었다. 그러면서도 대평원의 주인이자 맹장으로서 주변 부족들을 상대로 투쟁과 화해의 전술을 다양하게 구사해 온 탁월한 전략가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만들고 보존해온 생활사의 다양한 자료들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타고난 성품 탓인지 모르지만, 이들 영역의 어느 박물관을 가도 촬영을 허락하지 않았다.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도 다른 부족에 비해 자신들의 박물관 소장품에 대한 소개나 설명은 거의 없었다. 그 점은 그들의 폐쇄성에 대한 근거로 들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자부심과 자신감의 발로일 수도 있었다. 서부영화에 용맹한 부족으로 약방의 감초 격으로 등장해 온 아파치족. 이들의 거친 정신은 바야흐로 미국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는 서부문화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약간은 거칠지만, 개척자로서의 미국정신에 자극을 줌으로써 미국의 국제적 리더십의 형성에 한 몫 거들었다고 한다면, 과언일까.<다음에 계속>

 

 

 


가드하우스의 인디언 경찰 수장인 코만치족 출신의 아르코(Arko).
군인 자켓을 입고 있는 1884년 모습.

 

 


가드하우스 지하 감방의 복도

 

 

 


가드하우스 밖에 있는 나무에 걸고 교수형을 집행하던 목줄

 

 

 


당시 나뭇가지에 목줄을 걸어 교수형을 집행하던 광경

 

 

 


죄수들에게 벌을 주던 징벌방의 모습

 

 

 


아파치족 소녀들

 

 

 


야바파이 아파치족 여성 합창단

 

 

 


1880년경 죄를 지은 Boomer들을 잡은 군인들과 인디언 경찰들

 

 

 


아파치족 데블 댄서(Devil Dancer)들

 

 

 


치리카화 아파치족 주술사[Chiricahua medicine man]

 

 

 


아파치족의 구슬장식 공예품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10. 16. 13:24

    
       일본에서 만난 한국학

-제 62회 조선학회(朝鮮學會) 학술발표회에 다녀와서-

                                                                                                                     조규익

지난 여름방학 중의 어느 날, 천리대학(天理大學)[일본 나라현 천리시]의 오카야마[岡山善一郞] 교수를 통해 조선학회로부터 ‘초빙발표’의 제의를 받았다. 일찍부터 조선학회의 명성을 들어왔고,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터라 망설임 없이 응했고, 발표논문 또한 기한보다 앞서 마무리해 보낼 수 있었다. 발표 청탁부터 원고 수납, 일정 통보, 의전(儀典) 등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치밀함은 과연 혀를 내두를 만 했다.

9월 30일 오후 3시 오사카 간사이[關西] 공항 도착. 출영 나온 두 명의 천리대 학생들과 함께 리무진 버스를 타고 천리시로 이동하는 내내 날씨는 흐려 있었다. 일본식 전통가옥들과 현대식 빌딩들이 조화를 이룬 오사카 외곽의 모습이 차분했다.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천리시. 천리교(天理敎)를 핵으로 이룩된 종교도시이기 때문일까, 일본의 중소규모 지방도시가 대부분 그러해서일까, 조용한 분위기가 약간은 이색적이었다. 간이 정류소에서 내린 우리는 다시 택시로 10여분을 이동하여 천리관광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깨끗하고 소박한 다다미방에는 녹차 응접세트가 놓인 다탁(茶卓)이 앉아있고, 작은 테라스에는 앙증스런 탁자 및 의자와 함께 양치질이 가능한 세면대가 달려 있었으며, 창밖으로는 파스텔톤의 일본 전통가옥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한 사람 정도 용납할 만한 화장실과 별도의 욕실이 참하고 청결한 자태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침실과 욕실 및 현관 사이에 마련된 작지만 넉넉한 공간에는 옷장도 있었다. 이런 점들 때문일까. 일본에서 숙박할 때마다 그들의 고집스런 주거(住居) 철학을 깨닫게 된다. 깔끔한 다다미방과 작은 공간의 앙증스런 활용.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침대보다 ‘일본적이어서’ 괜찮다는 느낌이다. 굳이 일본인의 집을 방문하지 않아도 그들의 주거방식을 일부나마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녹차로 갈증을 달래고 로비의 응접실로 내려가니 천리대학의 마츠오[松尾 勇] 교수가 우리를 반겼다. 참으로 우리말이 능숙한 젠틀맨이다. 그와 잠시 환담한 뒤 천리대학의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과 20여명의 학자들[일본 전역에서 모인 조선학회 임원들]이 모여 있는 식당으로 안내되어 저녁식사를 겸한 환영행사를 가졌다. 참석자 개개인 앞에 놓인 커다란 도시락 형태의 식판에 맥주를 곁들인 ‘조촐하면서도 깔끔한’ 식사였다. 늘 지글지글 끓는 전골이나 고기구이 혹은 생선[회/매운탕]에 익숙한 나로서는 참으로 이색적인 경험이었고, 마지막 날 밤 이자까야(いざかや)에서의 간친회(懇親會)를 빼곤 일본 체류 내내 ‘도시락 스타일’의 식사가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이튿날. 일찍 호텔을 나서 천리교에 봉직하는 젊은 직원 요코야마씨의 안내로 신전을 방문했다. 시가지에 넓게 자리 잡은 거대한 전통 일본식 건물이었다. 건물의 규모나 모습이 천리교의 중심임을 보여주는 ‘종교적 숭엄’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었다. 건물의 안쪽으로 넓은 광장이 있고, 큰 길에서 신전으로 들어오는 입구 쪽에 청동색의 큰 도리이(とりい[鳥居]) 가 서 있었으며, 길 건너에 박물관[천리참고관(天理參考館)]과 천리대학이 있었다. 신전에는 많은 교인들이 나와 무릎을 꿇고 주문을 외우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되어 있는 신전의 내부는 운동장처럼 넓었다. 목조 건물인 신전은 어느 곳이나 반들반들 빛을 내고 있었다. 복도를 통해 걷고 있는데,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일군(一群)의 교인들이 손에 큰 벙어리장갑 같은 것을 끼고 바닥을 닦으며 무릎걸음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입으로 주문을 외우며 바닥을 닦아나가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의식으로 ‘근행(勤行?)’이라는 , 요코야마 씨의 설명이었다. 종교의 의식이야 원래 합리(合理)를 초월하는 것이지만, 이런 근행이야말로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주문을 외우며 ‘마음의 때를 닦아내듯’ 신전의 내부를 닦는 일. 따로 품을 들여 청소할 필요도 없고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으니, 그 아니 합리적인가.

요코야마 씨의 설명에 의하면 천리교는 1838년 10월 26일 교조 나카야마 미키에게 내린 ‘어버이 천리왕님’의 계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버이 신(神)’은 인간들이 서로 도우며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고 함께 즐기려는 마음에서 인간을 창조했으며, 그런 이유로 ‘즐거운 삶’이야말로 인간생활의 목표라는 것이다. 신전 중앙에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지점인 ‘터전[지바]’이 있는데, 이곳에서 세상의 구제를 위한 근행이 올려 진다고 했다. 그들은 그곳을 온 세상 사람들의 ‘으뜸 고향’이라 여기고 있었다.

신전을 포함하고 있는 천리교 본부는 정기적으로 각종 행사나 모임을 갖는 한편 ‘즐거운 삶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강습회 또한 수시로 열린다고 했다. 앞서 말한 ‘터전’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일대를 ‘본고장’이라 하며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각종 교육시설들이 완비되어 있었으며, 종합병원을 비롯한 사회복지시설, 도서관이나 박물관 등의 문화시설들도 갖추어져 있었다. 시내를 돌아보면 ‘○○詰所’나 ‘○○母屋’ 등의 간판이 붙은 건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들이 바로 신자들의 숙소라 했다. 누구든 원하면 싼값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란다.

신전을 관람한 후 들른 참고관 즉 박물관은 엄청난 보물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박물관의 정확한 명칭은 ‘세계 생활문화와 고고미술 박물관’이었다. 아이누, 한반도, 중국ㆍ대만, 발리, 보르네오, 인도, 아시아 전역의 강과 하천변, 멕시코와 과테말라, 파푸아 뉴기니, 일본인들의 아메리카 이민과 천리교 전도, 일본의 서민생활 등의 생활문화와 한국ㆍ중국을 비롯한 세계의 고고미술품들. 주마간산 식으로 훑어보기에도 벅찬 내용이었고, 참으로 부러운 컬렉션이었다. 수십만 점의 소장품 가운데 3천 여 점 만 전시되고 있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 했다. 마침 우리나라의 석조유물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상당수는 국내 박물관에서 볼 수 없었던 진귀(珍貴)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과연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

10월 1일 오후 1시에 시작된 학회는 다음 날 오후 5시에야 마무리되었다. 하루 반에 걸쳐 28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나를 비롯 한국에서 초청된 3명의 발표자와 일본에서 유학하거나 교수로 있는 한국인 등 12명을 빼고는 모두 일본의 학자들이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발표논문의 수가 아니었다. 그들의 진지한 태도와 토론의 열기가 조선학회에 대하여 그간 지녀오던 호기심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큰 깨달음으로 발효(醱酵)된 점이 나 자신에겐 큰 수확이었다. 사실 ‘일본인들이 한국학을 하면 얼마나 하랴?’라는 것이 평소의 ‘오만했던’ 내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 땅에서 그 땅의 사람들이 그 땅의 말로’ 한국학을 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한국말로 하는 한국학’과 다른 또 하나의 한국학이 일본에서 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는 또 하나의 자각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솔직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이 말하는 조선학이란 바로 ‘한국어문학과 역사’였다. 1일 저녁의 간친회 자리에서 일본의 학자들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지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조선학회에 참여하여 다까하시 도오루나 오구라 신뻬이 같은 1세대 한국학 연구자들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조선학회의 바탕이 된 그 분들의 후예들을 만나보며 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다.”는 요지의 발언이었다. 그들의 ‘우리말과 문학, 역사에 대한 연구’가 식민지 경영의 일환으로 이 땅에서 행해진 것이며 분야에 따라 왜곡의 정치적 의도 또한 드러내긴 했으나, 그것들이 우리를 자극하여 우리 학자들로 하여금 어문학이나 역사의 연구에 매진토록 한 것도 사실이다. 이미 메이지 유신 때부터 서구로부터 근대학문의 방법을 익힌 그들. 최소한 반세기 이상 우리를 앞서 간 그들이었다. 우리의 일부 학자들을 발분망식(發憤忘食)하게 만든 그들의 공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억설(臆說)일까.

나는 일본 학자들의 학술발표를 들으며 영국이나 미국 등 서구의 학자들을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그들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영어영문학회’ 등 그들의 언어와 문학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학술대회를 참관할 것이다. 한국인들이 한국어로 영문학을 연구하고 발표하는 내용을 보고 들으며 무슨 느낌을 가질까. ‘놀고 있네!’라고 할까?, 아니면 ‘어, 이 사람들 봐라. 제법인데?’라고 할까?, 아니면 ‘아, 놀랍구나!’라고 할까? 나는 딱딱 끊어지는 어투로 이어나가는 일본인들의 발표를 들으며 세 번 째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아, 그곳에서 그곳 사람들이 그곳의 말로 새로운 한국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학자이니 당신들이 하는 한국학의 정확성을 검증해보아야겠소!’라는 오만한 객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별개의 패러다임이 그곳에 살아서 통용되고 있었다. ‘한국이 한국어문학의 종주국이고 세계의 중심이며 으뜸’이라는 생각은 어쩜 오만한 편견일 수 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문학연구의 핵심은 작품의 해석 작업이다. 무슨 언어로 해석하든 그 언어 사용자들이 공감할만한 논리적 정합성(整合性)만 갖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애당초 정답이 없는 문제를 놓고 변방에 대한 중심부의 권위를 어떻게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나는 그동안 한국학을 한다는 외국인들에 대하여 가당찮은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스스로 탈식민(脫植民)을 주장하면서 식민의 논리에 갇혀버린 셈이니, 이보다 더 우스운 꼴이 어디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국의 학회, 특히 우리의 어문학을 대표하는 국어국문학회를 떠올려 보았다. 나는 최근 2년간 연속 그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2년 전 경희대에서 발표할 땐 드넓은 발표장에 10명의 청중[그나마 경희대 교수들이 동원한 학생들로 보였다!]이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허공에 누군가의 얼굴을 그려놓고 발표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발표가 끝나고 어느 누구 하나 문제를 제기하거나 묻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발표를 끝내고 연단을 내려오며 ‘다시는 학회에 오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지만, 또 다시 때가 되자 습관적으로 역시나 그런 텅 빈 회의장에 가고 말았다. ‘혹시나’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공부를 시작하던 80년대의 국어국문학회 학술발표장엔 회원들이 바글바글 끓어 넘쳤다. 열기가 대단했다. 김동욱, 장덕순, 김석하, 황패강, 이기문 선생 등 원로들이 맨 앞자리에 좌정하여 분위기를 주도했다. 날카로운 지적과 질책이 이어지고, 발표자들은 적절한 대응으로 의기양양해 하거나 몸 둘 바를 모르기도 했다. 학문이 세대 간에 전승되어 내리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인터넷 덕분인가, 아니면 인터넷의 독성 때문인가. 이제 학술발표회장에서 후학들을 질책하는 원로들이 사라지고, 아예 학술발표회장에 발품 팔아가며 갈 필요조차 없다는 듯 후학들도 사라졌다. 발표회가 끝나자마자 즉각 인터넷으로 내용이 배포될 텐데, 무엇하러 시간 죽여 가며 차비 죽여 가며 발표회장을 찾을 것인가. 말인즉슨 그럴 듯하지만, 학문이 전승되는 세대 간의 통로가 막히고 생명이 끊어진 곳에 유령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문화의 사막화 현상’은 어찌 할 것인가.

물론 장르별로 분화된 학회들이 즐비하고, 그곳에서 열띤 토론들이 이루어진다고 항변할 수 있고, 또 얼마간 그것은 사실이다. 나 자신도 일본에 하나 뿐인 조선학회와 한국의 여러 학회들을 단순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이 지긋한 일본의 학자들이 어눌한 한국말로 한국학 관계 논문들을 진지하게 발표한 뒤 젊은 학자들이 따라붙어 묻고, 반대로 젊은 학자들이 일본어로 진지하게 발표한 뒤 고명한 교수들이 세세히 질문하고 충고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함보다는 두려움을 느꼈다면 내 느낌이 지나친 것인가.

***

허름하지만 낭만이 배어있는 이자까야. 그곳에서 어울린 일본의 조선학자들은 어쨌든 친한파(親韓派)들이었다. 그들 스스로 한국에서의 추억과 한국 음식을 떠올리며, 힘주어 한국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일본에서 한국의 주가가 올라가고는 있으나, 어쨌든 마이너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세월을 합리화하는 심리적 기제(機制)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학을 대하는 그들의 진지하고 치밀한 태도야말로 무슨 대상을 연구하든 학자로서 지녀야 할 본령(本領)이라는 점에서 존중될 필요가 있다.

일본의 학자들과 현지에서 함께 한 3박4일이 내겐 깨달음의 기회였다.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만 죽이다가는 특출하던 일제시대 일본의 한국학자들이 그랬듯 그 후예들도 질적 양적인 면에서 조만간 우리를 추월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갖고 돌아왔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운 요즈음이다.



 <천리관광호텔의 모습>
 

 <호텔 테라스의 앙증스런 배치, 그리고 창밖 풍경>

 <호텔 방.외출했다 돌아오니 이불이 곱게 깔려 있었다!>

 <저녁식사 후 오카야마 교수,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 백규>

 <도착하여 저녁식사 후 들른 이자까야 논따로>

 <이자까야 논따로에 걸려 있는 오래 된 시계. 명치시대의 것으로 현재도 살아 있음>

 <천리교 신전>

 <천리교 신전에 걸린 상징문양>

 <도리이를 통해서 바라본 천리교 신전>

 <천리 참고관[박물관]>

 <호텔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주택가>

 <천리대학 건물>

 <천리대학 강의동 앞에서>

 <천리대학 구내식당에서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

 <천리대학 구내식당에서 마츠오 교수>

 <천리참고관[박물관]>

 <발표회가 열린 후루사토 회관>

 <간친회장>

 <간친회장에서 오카야마 교수, 오카야마 카이미, 백규>

 <간친회장에서 후지모토 유키오 교수 등 일본학자들>

 <첫날 발표를 끝내고 이자까야에서 일본의 학자들과>

 <이자까야에서 오카야마 교수와>

  <첫날 발표 후 들른 이자까야의 메뉴들>
 

 <학회 접수처>

 <발표회장>

 <이광수 관련 논문을 발표하는 하다노 교수>

 <첫날 발표 후 기념촬영을 준비하는 모습>

 <천리대학 강의동>

 <발표하는 동경대학원의 이현준 선생>

 <천리시청의 특이한 모양>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들>

  <뒷풀이 자리에서 천리대학의 교수들과>

  <뒷풀이자리에서 천리대학의 모리야마, 김선미 교수등>

 <뒷풀이 자리에서 마츠오 교수와 백규>

  <호텔의 아침식사>

 <천리관광호텔 근처의 고서점>

 <천리관광호텔 근처의 고서점에서, 백규>

  <이자까야의 벽에 붙은 가부끼 배우의 모습>

<학회 뒷풀이가 있었던 이자까야의 벽에 붙은 기린맥주 포스터와 술 메뉴들>
 

    <학회 뒷풀이가 있었던 이자까야의 벽에 달아맨 인형>

 <이자까야 내부의 벽에 붙은 각종 주류 및 음식 메뉴들>

<천리 시내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건물>

 <천리시 도처에서 볼 수 있는 母屋>

<천리시 도처에서 목격되는 신자 숙소인 쯔메쇼>

<오사카 외곽에서 간사이 공항으로 건너가는 다리>
 

<간사이 공항에서 인천으로 떠날 ANA 기가 이륙 준비를 하고 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