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10. 5. 08:22

 

빛나는 한국학생 Hyunjun Brian Choi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은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창 자식들을 키울 때엔 그 녀석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모자랐는데, 이제 웬만큼 홀로서기들을 했다고 생각되면서 내 눈에 다른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강의실에서도 학생들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내 시야에 들어온다. 요즘 들어 부쩍 남학생들은 아들로, 여학생들은 딸이나 며느리로 바꾸어 생각해보는 경우가 잦아졌다. 운 좋게도 나는 지금까지 학생들을 만나면서 거의 저런 학생을 아들이나 딸로 둔 부모는 참 좋겠구나!’, ‘저런 아이는 며느리 감으로 딱인데!’, ‘참 잘 키웠구나!’ 등의 생각만을 갖게 되었으니, 참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자랑스럽게도 이처럼 내 주변에는 반듯하면서도 이쁘고 착한학생들뿐이다.

 

잠시라도 해외에 나가 산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인 동시에 잘 몰라서 불안한 일일 수도 있다. 미국 내의 연구기관을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으로 결정하고 대부분의 중요한 서류작업들을 끝낸 뒤에야 비로소 우리가 이곳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대학의 학장, 학과장, 외국인 학자 관리처, 주택 관리처, 풀브라이트[미국 본부 및 한미교육위원단], 대사관 등 우리가 접촉한 기관이나 부서들 모두 공적인 업무 상대들일 뿐이었다. 친척이나 친구 등 좀 더 사적이면서도 내밀한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상대는 아무도 없었다.

 

답답한 나머지 사이트를 뒤지다가 이곳 대학의 한인학생회를 발견했고, 궁여지책으로 회장에게 이메일을 보냈으나 답장이 없어서 부득이 부회장에게 이메일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자 득달같이 생동감 넘치는 문체의 영문 답신메일이 날아왔다. 그가 바로 ‘Hyunjun Brian Choi’였다. 어려서 이곳에 왔기 때문에 한글을 쓰는 것보다 영문을 쓰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편하여 영문으로 이메일을 쓰게 되었노라는 해명까지 덧붙여가며 이곳 생활의 이면들을 자세하게 적어 보내온 것이었다. 참으로 예의 바르고 의젓하면서도 주도면밀한 그의 이메일을 받아보곤 호기심이 생겼다. ‘한인 학생회의 부회장이라니, 대학원생 쯤 될 것이라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몇 번 오고 간 그와의 메일 연락 덕에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에 올 수 있었다.

 


Cafe 88에서 


레스토랑 Bad Bread에서 


OSU의 풋볼 경기장 Boone Pickens Stadium에서               
                                                                                                       

와 보니 정착이 쉽지 않았다. 시차 적응이 쉽지 않아 눈꺼풀은 스르르 내려앉는데 시장은 가야하고, 시장을 가려면 차가 있어야 하는데, 차를 사는 절차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이메일을 보내자 또 자세한 이메일을 보내왔다. 그의 이메일을 통해 연결된 분이 바로 기계공학과의 장영배 교수였다. 장 교수의 호의로 우리는 나머지 정착과정을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브라이언을 집으로 불렀다. 아직 차를 구입하기 전이었다. 시장을 가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고 하자 강의가 끝나는 즉시 친구의 차를 빌려 몰고 부랴부랴 와 주었다. 놀랍게도 그는 앳된 학부 3학년생이었다. 첫 인상이 착하고 성실했다. 말을 시켜보니 의젓하고 생각 또한 깊었다. LA에 있는 명문 고등학교를 마친 다음 대학 기간을 단축하려는 계획을 갖고 이 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한 그였다. 벌써 1년 반이란 기간을 단축했단다. 학부를 졸업한 뒤에는 로스쿨에 진학하여 국제변호사[아마 경제 전문 변호사가 목표인 듯하다.]로 활약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이미 한국의 유수한 로펌에서 인턴의 경력도 쌓아놓았다고 했다. 매학기 학점을 초과 이수하면서도 아주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 그였다. 예컨대, 상위 10% 이내의 학생들만 가입할 수 있는 ‘National Society of Collegiate Scholars’, ‘Phi Eta Sigma’, ‘Golden Key International Honor Society’ 등의 멤버로 활약하는 것만 보아도 그의 출중한 능력은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2012년에는 ‘Baugh, Russell, and Florence’ 장학금을 받았고, 2012년 봄 학기, 2013년 봄여름 학기에는 우등생으로 학장의 상을 받았으며, 2012년에는 총장으로부터 우등상장을 받기도 했다.


Boone Pickens Stadium 건물 1층에서 

         

브라이언이 속한 College of Honors 건물 

 

나는 해외에서 빛나는 우리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나라의 밝은 미래를 보게 된다. 물론 국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일도 중요하고 어렵다. 그러나 낯설고 물 선 해외에서 그들과 경쟁하여 앞서나가는 일은 더욱 어렵다. 어머니의 젖과 함께 물려받은 모어[mother tongue] 사용자들을 능가하는 실력을 발휘하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영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아이들과 경쟁하여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할 것인즉, 그 나이 또래에 누구나 맞이하는 질풍과 노도’, 내부의 욕망과 외부로부터 밀려드는 유혹들을 억누르거나 물리치고 시시각각 침투하는 외로움과 맞서가며 자신을 제어한다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브라이언이 풍겨내는 담담한 내면을 통해 나는 범상치 않을 그의 부모를 떠올리게 되었고, 그의 빛나는 미래를 점치게 되었다. 브라이트(bright) 브라이언 만세!!!

 


백규 연구실에서 브라이언과 함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5. 21:52



조선일보 원문보기 클릭



 ‘인문한국’이나 로스쿨이나...

                                        
                                                                 조규익

작년 하반기에 출범한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사업과 지금도 논란중인 법학전문대학원(이하 로스쿨) 선정 과정은 지식사회의 철학 부재와 민족의 미래에 대한 국가적 아젠다 실종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다.

 전자의 경우 탈락의 이유나 명분을 상당수의 대학들이나 학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아카데미의 권위를 상징하는 총장과 교수들까지 교육부에 몰려가 시위를 벌일 만큼 후자의 경우 또한 결과 자체가 석연치 못하다.

 두 사업이 갖는 표면적 의미는 단순하다. 인문학 진흥을 위해 ‘가능성이 보이는’ 몇 개의 대학들을 선정하여 국가의 재정을 듬뿍 풀겠다는 것이 전자이고, ‘가능성이 보이는’ 몇 개 대학들을 선정하여 국가 권부의 한 축인 법조계 인맥의 공급처로 삼겠다는 것이 후자이다. 

 이제 로스쿨은 단순히 ‘법학 교육’만의 문제는 아니다. 교육수요자들이 이것을 학교전체에 대한 평가의 잣대로 원용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대학인들은 로스쿨의 유무가 대학 생존을 결정하는 날이 조만간 도래할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인문한국이든 로스쿨이든 주관 부서에서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았다고 하는 그 ‘가능성’이 미래지향적 의미를 크게 지녔다고 볼 수 없으며, 그런 기준에 대하여 우리의 지식사회가 제대로 공감하거나 수긍하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다.

 인문학을 새롭게 진흥시킨다거나 새로운 패러다임의 법학 교육을 시키자고 하는 마당에 그에 입각한 아젠다나 철학 혹은 참신한 아이디어 등을 따지지 않고, 예컨대 과거의 업적이나 인프라에 무게중심을 두거나 기존의 사법시험 합격자 수를 중요한 기준으로 적용시키는 등의 일이 지식사회의 미래지향적 구도에 그다지 합목적성을 지닌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점 때문에 선정결과의 발표를 서너 차례 연기했을 만큼 인문한국 사업은 시작부터 갈팡질팡했으며, 로스쿨 역시 ‘정치적인 고려’ 등 본질적인 철학 부재의 함정에 빠져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양자 모두 권력의 향배와 무관하지 않은 대학의 현실을 그 결정적인 요인으로 거론하는 인사들도 많다.

 국가나 대학의 조직은 매니지먼트의 측면에서 공통되며, 그 자연스런 결과로 평가에 관한 기준이 물적 인프라의 규모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자칫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과거부터 누적되어오는 물적 인프라의 기준에 밀려 평가의 후순위로 밀리기 쉽다는 점은 큰 문제다. 큰 대학들은 늘 국가적 혜택을 받는 반면, 작은 대학들의 경우 제대로 도약의 계기를 얻을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잘 하는 쪽을 밀어주는 것은 잘 나가는 집단의 지혜일 수 있다. 그러나 ‘잘 하고 못함’을 가르는 기준이 미래 지향적 의지를 담아내지 못할 경우, 그것은 ‘힘 있는 세력’의 떳떳하지 못한 자기 합리화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철학 없는 기준에 바탕을 둔 ‘승자독식(勝者獨食)’이야말로 ‘만년 우등/만년 열등’의 구조를 고착시키게 되고, 그것이 국가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할 것은 당연하다.

 잘못된 학문정책을 바로잡으려 노력하는 대신 구태의연한 기준에 따라 공동체의 미래가 걸린 일을 단 한 번의 망설임 없이 감행하면서도 ‘할일을 했다’고 자부하는 우리나라 지식사회. 현실에 대한 진단과 반성이 결여된 지식사회의 행태가 우리 시대 최고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