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5. 6. 20:45

 


두 교수 부부와 처음 만나던 날, 저녁식사 자리

 

 


자신의 연구실에서 두 교수

 

 


필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교수

 

 


초대 받아간 두 교수의 집에서

 

 


두 교수의 요리솜씨

 

 


스틸워터의 중국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미국의 중남부에서 아시아 역사를 가르치는 젊은 학자: 용타오 두[Yongtao Du/杜勇濤] 교수

 

 

작년 827. 미국에 도착한 우리를 오클라호마 시티 윌 라저스[Will Rogers] 공항으로 픽업 나온 사람이 용타오 교수였다. 한국인인 우리는 젊은 그를 아시아식으로 두 교수라 불렀지만, 미국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용타오라 불렀다. 그의 중국 이름은 두용도(杜勇濤)’. 그의 출생지인 중국 화중(華中) 지역의 하남성(河南省)은 중원문화의 발상지로서 빛나는 인물들이 배출된 곳이다. 도가(道家)의 시조 노자(老子), 동한(東漢) 시절의 과학자 장형(張衡), 당송팔대가 중에서 첫 손가락으로 꼽히는 문장가 한유(韓愈),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의 저자인 승려 현장(玄獎), 남송의 영웅 악비(岳飛)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당나라의 큰 시인 두보(杜甫)를 빼놓을 수 없으니, 두 교수야말로 바로 그 두보의 후예 아닌가.

 

두 교수와의 인터뷰

 

 

OSU 역사학과의 유일한 동양인 전임교수인 그는 늘 통통통’ 연구실과 강의실을 오가며 분주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는 하남대학교(Henan Univ.)에서 학사학위를, 베이징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일리노이 대학교[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일리노이 대학교와 와쉬번 대학교(Washburn Univ.)에서 강의를 하다가 2009년부터 이곳 OSU의 역사학과로 옮겨 재직하는 중이었다.

 

부의 교훈: 명나라 말기 혜주(惠州)의 상업문화와 지방주의”, “초지방적(超地方的) 혈통과 고향 애착의 로만스”, “경쟁적 공간 질서: 명나라 말기의 상업지리학등 탁월성과 독창성을 보여주는 논문들을 발표했고, ‘하바드 옌칭의 논문 작성을 위한 현장 연구 지원’, ‘탁월한 지리학사(地理學史) 학자에게 수여하는 리스토우 상’, ‘리칭 학술상등 여러 번의 학술상과 연구지원의 수혜를 받고 있는, 촉망받는 신진학자가 바로 그였다. 미국의 여타 지역들과 중국을 오가며 부지런히 논문을 발표하는 그의 모습이 돋보였다. 중국 역사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역사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면서 동양에 관한 미국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 점도 좋아보였다.

 

미국 도착 뒤 시차적응도 되지 않은 나에게 한국사에 대한 물음들을 끊임없이 던졌다. 신라의 왕통, 삼국 간 정치제도의 차이, 왕건의 출신, 문벌귀족, 양반, 본관 등등. 사실 나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즉석에서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쉼 없이 건네는 그였다. 자신의 전공인 중국사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라도 주변국의 역사를 알아야겠더라는 그의 말은 그간 한국인이나 일본인을 만나지 못함으로써 겪을 수밖에 없던 자신의 지적 갈증을 명증하게 드러냈다.

 

우리는 잠깐씩 수시로 만나면서 --의 역사적 접촉과 현실을 논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중국말을 한 마디도 못하고 그 또한 한국말을 한 마디도 못했지만, 고맙게도 영어가 우리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었다. 그러다가 갈증이 도지면 서로가 가끔씩 알고 있는 한시들을 써 보여주며 정서적 공감대를 확인했을 뿐 아니라, 근대 이전 동아시아에 정착되어 있던 중세적 보편주의의 실체와 힘을 확인할 수도 있었으니, 제대로 쓰인 역사에 대하여 무한한 신뢰를 갖고 있던 나로서는 감동적인 체험이었다.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이 북경의 유리창이나 그들의 사저(私邸)에서 필담으로 교유하던 그 시절의 광경을 우리 또한 제3국 미국의 한 구석에서 제법 재현한 셈이니, 참으로 희귀한 일 아닌가.

 

중국인인 그에게 나는 중화주의(中華主義)’의 협소함에서 벗어나라는 주문을 누차 건넸고, 그 역시 마오쩌둥을 좋아하지만, 미래지향적 행동지표로서의 글로벌리즘을 잊지 않고 있다는 말로 화답하곤 했다. 학문의 바다 미국에서 조만간 그는 아시아사의 최고 전문가로 성장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는 분명 민족주의의 편협한 굴레에서 벗어나 완벽하게 균형 잡힌 미래의 지식인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으리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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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2010. 6. 1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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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훈 박사의 『해녀 노 젓는 소리 연구』와 조규백 박사의 『텅 비니 만 가지 경지가 다 담기네-소동파 시선집(상)』이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15/16)로 출간되었습니다.

 

 

이성훈 박사(숭실대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한국문예연구소 정보팀장)가 『해녀 노 젓는 소리 연구』를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15호)로 펴냈다. 해녀는 제주도에만 있는 존재로, 해녀들이 물질을 마치고 물 밖으로 올라와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인 이른바 ‘숨비소리’를 휘파람 소리인데, 해녀들이 물질작업장까지 노를 저어서 오갈 때 불렀던 노동요 <해녀노젓는소리>를 유희요 <뱃노래>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가 하면 해녀들의 겉모습만 보고 그들의 삶을 추정하거나 섣부른 예단을 하는 경우도 이따금씩 본다.

 

그간 <해녀노젓는소리>는 제주도에서 채록한 자료를 중심으로 음악학적, 민속학적, 문학적 측면에서 연구가 더러 있었지만 개별 학문의 입장에서 이루어졌을 뿐 통합적 관점에서의 연구는 거의 없었다. 또한 <해녀노젓는소리>는 제주도뿐만 아니라 본토 해안지역에서도 전승되고 있는 만큼 본토에서 채록한 자료도 연구 자료로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 결과 <해녀노젓는소리>의 총체적 실상을 규명하지 못했다.

이 책은 목차에서 보듯이 <해녀노젓는소리>의 총제적 실상을 규명하기 위해서 집필되었다. <해녀노젓는소리>의 형성 과정과 전승 양상, 가창 방식과 율격, 사설의 분류와 교섭, 가창자의 생애와 의식 등을 현장론적 측면과 작가론적 측면에서 밝히는 것이 바로 이 책을 집필한 목적이다. 이를 위해 제주도와 본토에 정착한 해녀들로부터 채록한 해녀의 생애력과 <해녀노젓는소리> 사설을 주요 자료로 삼았고, 옛 문헌의 기록은 참고 자료로 이용하였다. 특히 본토에서 전승되는 <해녀노젓는소리>와 해녀의 생애력을 수집한 자료는 이 책의 필자가 2000년 9월부터 2007년까지 강원도 속초시․삼척시, 경상북도 경주시․포항시, 울산광역시, 부산광역시, 경상남도 사천시․통영시․거제시․남해군 일대를 두루 답사하여 조사한 결과물이다.

 

머리말

Ⅰ. 서 론

1. 연구 목적

2. 선행 연구의 검토

3. 연구 방법

 

Ⅱ. 형성 과정과 전승

1. 형성과 본토 전파

2. 가창 기연의 소멸

3. 사설 변이와 전승양상

 

Ⅲ. 사설의 분류와 교섭

1. 사설의 분류와 유형

2. 사설의 교섭양상

3. 구연상황과 현장성

 

Ⅳ. 가창 방식과 율격

1. 가창 동기

2. 가창 방식

3. 율격 구조

 

Ⅴ. 사설의 수집과 정리

1. 수집 및 정리의 통시적 양상

2. 제1기:단편적인 자료 수집 및 소개

3. 제2기:본격적인 자료 수집 및 정리

4. 제3기:체계적인 자료 수집 및 정리

5. 사설의 오기와 어석의 오류

6. 편저와 웹사이트 자료의 오류

 

Ⅵ. 가창자의 생애와 의식

1. 가창자의 생애

2. 가창자의 특성

3. 가창자의 의식

 

Ⅶ. 결론

 

참고문헌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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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백 박사(한국외대 강사/한국문예연구소 연구원)가 『텅 비니 만 가지 경지가 다 담기네=소동파 시선집(상)』이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16호)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소동파의 전기(前期) 시(詩) 161수를 번역한 것으로, 각 시기의 체제와 내용, 풍격에 있어 대표성을 띤 작품들을 포괄하고 있다.

 

一. 중국

 

. 청(淸)나라 심덕잠(沈德潛)은 “소동파의 가슴에는 커다란 용광로가 있어 금, 은, 납, 주석 등이 모두 그 안에서 용해된다. 그 붓이 초광(超曠)하여 천마(天馬)가 굴레를 벗어나고 하늘을 나르는 신선이 노니는 듯 종잡을 수 없이 변화무쌍하다.”라고 평했다.

 

. 청나라 조익(趙翼)은 소동파의 시에 대해, “평심(平心)으로 소동파의 시를 읽어보니, 그는 재사(才思)가 넘쳐흘러 부딪치는 곳마다 생기가 일어나고, 흉중에 서권(書卷)이 가득하여 그때그때 두루 응용할 수 있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二. 고려 ․ 조선시대

 

. 서거정(徐居正)은 “고려 문인은 오로지 동파를 숭상하여, 과거 급제자의 방이 나붙을 때마다, 사람들이 ‘33인의 동파가 나왔구나’라고 하였다.”(『東人詩話』, 卷上) 이에 대해 이규보(李奎報)는 “고려시대 문인들이 과거급제 전에는 과거시험 준비 때문에 풍월을 일삼을 겨를이 없다가, 과거 합격 후에야 부담 없이 시 지시기를 배우는데 그 가운데 소동파의 시를 더욱 좋아하게 된다.”고 하였다.

서거정은 이어서, “고려 고종, 원종 연간에, 송나라 사신이 시를 요구하자, 학사(學士) 권적(權適 )이 시를 지어 주었다. 그 시에,

‘소동파의 문장은 해외까지 알려졌건만

송나라 천자는 그의 글을 불태웠네.

문장은 불에 태워 재로 만들 수 있겠지만

천고의 꽃다운 이름은 불태울 수 없다네.’

라 하니, 송나라 사신이 탄복하였다.”(『東人詩話』, 卷上)

 

. 고려 고종 23년, 몽고 침입의 와중에서 전주에서 동파문집을 중각(重刻)했던 사실에서도 당시의 소동파 열기를 짐작하게 해 준다.

 

. 이인로는 『파한집(破閑集』卷上에서, “소동파와 황산곡에 이르러서는 고사를 사용하는 것이 더욱 정밀하게 되어 뛰어난 기운이 멋대로 나오니, 구를 다듬는 묘함이 두보와 나란히 할 만하다.”라고 했다.

 

. 이규보는 동파의 시(詩)「泛潁」의 시구에서,

“갑자기 물결이 비늘처럼 일어

나의 수염과 눈썹을 산란하게 하네.

동파가 백 사람으로 분산되었다가

순식간에 다시 제자리에 있구나.”

라 한데, 느낌이 일어,

 

“시내 위에 어정거리며 맑은 물결 희롱하니

그림자 춤추고 몸 흔들려 괴상도 하구나.

갑자기 소동파가 영수(潁水)에서 놀던 일 생각나네

수염과 눈썹 흩어져 백 명의 동파가 되었다네.”

(「溪上偶作」시)

라고 읊었다.

 

. 이제현(李齊賢)은 소동파의 초상화에 대해,

“대궐에 출입하는 것 영광이 아니거니

장기(瘴氣)어린 해변인들 무엇이 두려우랴.

야인의 차림새에 누런 빛 갓을 쓰고

천고를 굽어보며 긴 휘파람 불고 있네.”

(「蘇東坡眞贊」)

라 했다.

. 이색(李穡)은 “큰 소나무 그늘 속에서 동파의 시를 읽었더니, 머문 물 같은 고담(古談)은 마치 황하를 터뜨린 듯 하였네.”(「過三角山>시)

이색은 또,

“심한 더위와 가을바람은 본래 때가 있는데,

평소에 즐겨 동파노인의 시를 읽었네.

누구의 마음이 물과 같이 맑기에,

옥을 녹이고 쇠를 녹아내리는 더운 여름을 다 알지 못하는가.”(「卽事」시)

라 했다.

 

이색은 또,

“내가 마시는 술은 한 그릇도 안되지만

반쯤 취하면 맛이 더욱 좋네.

동파노인은 뜻이 커서

만장(萬丈)이나 되는 불꽃처럼 세차네.”

(「廉東亭席上醉歌」시)

라 했다.

 

. 조선시대에 많은 문인이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를 애호하여 각지에서 “적벽선유(赤壁船遊)의 기풍을 재현하기도 했고, 조선후기 시인들이 ‘소동파를 숭배하는 모임(拜坡會)’를 만들어 소동파의 생일을 기념하는 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 조선시대 문인이 소동파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동파의 인품이나 문장의 수준이 큰 흡인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 조선시대의 문예숭상 사조와 조선이 송나라를 입국(立國)의 주된 모델로 삼은 점, 그리고 문학적으로 당송팔가문을 중시한 점 때문이다.

일부 순유(純儒)들은 학파나 사상의 차이로 비판적, 선택적으로 수용하기도 하였다.

3. 조선시대 문인들은 동파와 유사하게 사화(士禍), 당쟁, 전쟁 등을 겪어, 그러한 처지의 유사성으로 인해 동파의 위인과 문학에 공명할 수 있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1. 23. 14:57

호남성통신 1

마왕퇴의 무덤 속에 잠자고 있는 여인이여!
         

                                                                                                                     조규익

2008년 1월 21일. 내리는 눈발 속에 인천공항 활주로는 허둥대는 비행기들로 북적거렸다. 눈발에 얼어붙은 비행기의 날개를 녹이기 위해선가, 금쪽 같은 두 시간을 공항 대합실에서 하릴없이 기다렸다. 혹시 호남성 박물관 관람의 일정이 날아가는 건 아닌가 하여 속이 바작바작 타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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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는 진눈깨비 속의 호남성 박물관



중국 호남성 장사시 호남사범대학에서 열린다는 고소설학회의 국제학술회. 그 행렬에 뒤늦게 합류한 까닭이 내겐 있었다. 사실 이곳엔 보고 싶은 게 많았다. 심히 억울했던 굴원이 몸을 던진 멱라수, 두보가 올라가 <등악양루(登岳陽樓)>를 지었다는 악양의 악양루, 천하의 시인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은 동정호(洞庭湖)와 무릉도원으로 일컬어지는 상덕,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곳엘 가보지 않는다면 100세가 되어도 늙었다고 할 수 없다’는 장가계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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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성 박물관 유물 진열실 입구

그러나 무엇보다 내 마음을 끈 것은 호남성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마왕퇴의 유물들이었다. 그 유물들과 함께 발굴되었다는 여인 한 사람도 내 호기심을 심히 자극했다.
2100년 이상의 세월에도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그녀, 대후부인 신추(辛追)는 1호 묘의 내관(內棺)에서 발굴되었다. 어쩌면 그 주변에서 발굴된 각종 생활용품을 통해 당시의 생활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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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 한묘에서 출토된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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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 한묘에서 출토된 술동이. 주석 도금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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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 한묘에서 출토된 구름무늬의 채색칠 둥근병



이곳 시각으로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장사 공항의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밖엔 차가운 겨울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한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없다는 이곳이지만, 올해는 벌써 여러 날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단다. 진짜로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였다.

기내식으로 점심을 때운 채 우리는 고픈 배를 안고 호남성 박물관으로 달렸다. 다급하게 관람시간 연장을 요청해놓은 터였다. 간신히 찾아들어간 우리는 드디어 마왕퇴의 유물들과 만났다.
마왕퇴는 지역명, 그곳의 한묘는 서한시대 대후 가족의 묘지다. 마왕퇴의 한묘는 장사시 중심에서 4km 떨어진 곳으로 현재 호남성 박물관 관내다. 1972년에서 74년 사이에 류양하 옆의 마왕퇴에서 1호분, 2호분, 3호분 등 3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장방형의 전형적 서한시대 분묘형식이다. 마왕퇴의 여인은 바로 그 1호분에서 나왔다.




2천 여 년 전의 생활이 어쩌면 그토록 생생하게 내 눈 앞에 다가선단 말인가.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친구들 사이에 놓여 있었을 아름다운 술동이도, 진수성찬을 담아냈을 반상들도, 적의 가슴에 날려 보냈을 증오의 화살들도, 밤 새워 고뇌하며 써내려갔을 죽간과 목간들도, 여인네의 가발도, 배를 비롯한 각종 과일들도 모두 생생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그 한 가운데 그 여인이 있었고, 그녀의 관을 보관했던 거대한 목곽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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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 한묘에서 출토된 대후부인 신추의 생생한 모습. 죽은 지 2100년이 넘었음

아직도 피부는 탄력을 잃지 않고 있었으며, 그녀의 머리털 또한 숯처럼 새까맣고 건강했다. 1m 54cm의 신장, 34.3kg의 체중. 위장 속에서 다수의 머스크 멜론 씨앗들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멜론 하나를 먹은 잠시 후 죽은 것으로 보이는데, 사인(死因)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추정된다고 한다. 

상상들 해보시라. 올해가 2008년이니 그녀는 기원전 100년 전의 인물 아닌가. 누군가의 아름답고 젊은 부인이었거나 ‘이쁜’ 딸이었을 그녀. 가족들은 억울한 그녀의 죽음 앞에서 부활에의 소망을 가졌으리라. 그러나 그로부터 2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는 아직 부활하지 못한 채 유리관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마왕퇴와 만난 날은 허겁지겁 저물고, 잠시 숨을 고른 후 해가 뜨면 우리는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삶의 현장을 다시 만나러 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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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된 대후부인 신추의 생전 모습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