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7. 4. 28. 17:00
수능성적•석차 공개와 대학 신입생 선발 방법 전환의 시대적 요구


논란의 가능성은 있지만, 수능성적과 석차를 공개하라는 법원의 판결은 이 시점에서 매우 타당하다. 수능성적•석차의 비공개가 대학의 서열화를 막을 수 있다고 보거나 심지어 운전면허시험에 비유하여 수능성적•석차의 공개가 무의미하다는 견해를 밝힌 논자도 있지만, 이번 판결이야말로 대학입시에 대한 열린 논의의 진정한 출발점이라고 본다.

과연 수능성적•석차의 비공개가 대학들의 서열화를 성공적으로 불식시킬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수십년전에 형성된 서열이 지금도 不動인 상태로 힘을 발휘하게 만든 주범이 바로 그것이다. 세칭 일류에 속하지 않는 대학들이 안간힘을 써서 근래 몇 분야에 성공했다해도, 잠시 사람들의 입에만 오르내릴 뿐 막상 대학을 선택할 시점에는 그 사실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사실 개별 대학이나 대학교육의 내실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대학의 서열화를 혐오하는 것이지, ‘참된’ 대학의 서열화는 지향해야 할 대학의 이상이다. 능력과 무관하게, 졸업한 대학에 따라 사회적으로 이익과 손해가 첨예하게 갈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기득권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속성상, 비정상적인 대학 서열화를 깰 수 있는 묘책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수능성적•석차의 비공개는 대학 서열화를 완화시키거나 깨지도 못하면서, 국가의 이름으로 수험생과 국민들을 ‘오류와 요행 추구’의 함정에 빠뜨리는 잘못까지 범하는 꼴이다.

더구나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일부 사설 입시기관들의 신뢰할 수 없는 자료와 수험생들의 자가판단에 의해 교육의 본질만 왜곡시킬 뿐이다.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수험생이나 학부모들로 하여금 ‘도박하는 심정’으로 대학을 선택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실력이 인재 검증의 유일한 수단으로 통할 만큼 우리 사회가 충분히 투명해지고, 국민들의 의식이 안일한 기득권의 그늘로부터 자유로워질 때까지 얼마간 ‘왜곡된’ 대학의 서열화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수능성적•석차의 비공개로 무작정 막는다고 문제가 해결될 만큼 우리 사회의 구조가 그리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문제들이 없지는 않겠으나, 신입생 선발을 대학 자율에 맡기는 방식이 正道이자 王道이다. 지금의 현상을 액면 그대로 표현하자면, ‘수십만의 수험생들을 한 날 한 시에 똑 같은 문항으로 서열화시키는 주범이 국가’인 셈이다.

지금처럼 국가가 대학의 행정을 통제하고 학생 모집까지 규제한다면, 사실상 이 나라에 대학은 없는 셈이다. 대학 나름의 이상과 목표에 걸 맞는 방법으로 학생들을 선발하게 한다면, 정작 정부가 전국의 수험생들을 똑 같은 문항으로 서열화시켜 놓고서 그 결과를 ‘공개합네 안 합네’하는 자기 모순적 논란에 빠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과도한 사교육비 부담과 선발 과정에서의 부조리 추방 등이 대학들의 신입생 자율선발을 막아온 정부의 논리였다. 그러나 국가가 신입생 선발까지 도맡아오는 동안 이런 문제들이 없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증폭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간의 세월은 대학에 자율선발권을 주었을 때 빚어질 수 있는 과도기적 부조리들이 청산될만한 기간이었다. 그렇다면, 대학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국가는 그동안 귀한 시간만 낭비한 꼴이 아닌가. 정부가 미적거릴수록 대학의 신입생 자율선발에 따르는 과도기적 문제나 비용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수능성적•석차의 공개는 대학의 자율권 확보 논의의 첫 단추가 되어야 한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21. 08:44
*이 글은 조선일보(2007. 4. 21.) 시론으로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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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대학교육은 상품이 아닙니다”


‘대학교육은 상품이 아닙니다!’ ‘등록금 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어느 대학을 가 봐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수막의 문구다. 대학 교육이 결코 ‘시장에서 이익을 전제로 교환되는 유형·무형의 재화’가 아니라는 교육 소비자들의 절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대학만큼 철저한 시장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곳도 없다. 그 원조(元祖)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 있다지만 그들을 따라가는 국내 대학들의 행태가 심히 걱정스러울 정도다.최근 교육계에 불어닥친 신자유주의는 대학의 공익적 성격을 상당 부분 훼손시키고 있다. 이윤 창출에 초점을 맞추는 ‘기업 마인드’로 대학을 운영한다든가 필사적으로 기업에서 기부금을 받아내려고 하는 풍조가 일반화되고 있다. 지금 대학은 기업의 지배,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돈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더구나 부익부 빈익빈으로 대학을 양극화시키고 있는 국가의 지원금이나 기업의 기부금은 대학의 부정적 현실을 오히려 심화시킨다. 비용의 상승을 등록금에 즉각 반영할 수밖에 없는 대부분 대학들의 고민도 바로 여기에 있다.일부 합리주의자들은 ‘등록금이 인상되는 만큼 서비스의 질 향상을 요구하라’는 말로 투쟁에 나선 학생들을 꾸짖는다. 그러나 그런 합리주의자들에게 ‘어떻게, 어떤 규모로 서비스의 질을 높일 수 있으며, 우리 대학들에 그런 일을 수행할 만한 철학은 갖추어져 있는지’를 물으면 침묵하기 일쑤다. 사실 우리의 교육 당국이나 대학 경영진에 시대의 흐름이나 현실을 읽어 달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주문일 수 있다. 미래의 대학 교육이 시행착오의 외길을 걸어온 현재와 다를 바 없을 거라고 비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비관은 나라의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대학들, 입학생들은 줄어드는데 자꾸만 늘어나는 해외 유학생들, 교육의 질에 대한 국민들의 팽창하는 욕구,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재원, 학교 규모를 줄인다거나 통·폐합 등에 과감히 착수하지 못하는 학교 이기주의, 교육을 통제하려는 중앙 정부의 욕구 등 현실적인 문제들과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이것들 모두 우리의 대학을 압박하는 부정적 요인들이다. 이 와중에서 대학이 ‘살아남기 위해’ 배워 온 것이 마케팅 기법이다. 몇몇 뛰어난 교수들을 고액 연봉을 내세워 영입하거나 소수의 우수 학생들이나 출세한 동문들을 활용해 학교 이름을 드날려 보려는 이른바 ‘스타 마케팅’이 점점 기세를 올리고 있다. 양질의 교육으로 우수한 졸업생을 배출하기보다는 점수가 뛰어난 학생들을 데려다가 고만고만한 재목으로 만든다는 비난을 들어도 대학인들은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일부 스타들이 만들어낼 환상이 이런 비난을 중화시켜 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 부정적인 점에서 우리나라 대학들은 일류나 이류를 막론하고 ‘표준화’가 되어 있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부류는 ‘묵묵히 진실된’ 연구를 하는 교수들과 대다수의 성실한 학생들이다. 이들이 내는 등록금의 상당 부분이 이른바 ‘스타 마케팅’에 쓰이는 데도 의도에 비해 결과가 시원치 않다면 누가 그 책임을 질 것인가. 이제 문제는 본질에 대한 성찰이다. 케케묵은 말 같지만 하루 빨리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루아침의 ‘반짝 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교육은 아니다. 대학 교육이 20년 만에 때려 부수고 재건축을 해대는 아파트만도 못하다면 이제 우리는 대학의 간판을 내려야 할 것이다.

[조규익 숭실대 국문과 교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0. 15:34
 대학은 국가와 사회의 지도자를 육성하는 곳이다. 지도자란 공동체의 이상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앞서서 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경륜과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 그런 존재가 되려면 많은 세월이 필요하겠지만, 그 출발점은 대학 교육에 두어야 한다.
 
사실 지금은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말하자면 대학 교육의 대중화가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대학교육이 대중화 되었다지만, 여전히 대학에 사회 지도자 육성의 책임과 사명을 떠맡기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책임을 떠맡겼으면 그에 걸맞은 자율을 보장해야함에도 지금까지 역대 정권은 대학을 통제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정권이 돈이나 각종 제도적 장치들을 통해 대학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온 점에서 대학정신의 퇴보는 당연한 업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창립 1세기를 넘는 대학들도 여럿 있으나, 본격적인 대학사의 시작은 반세기 정도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대학을 제대로 발전시켰다면 기간으로 보아 지금쯤 제 구실을 하는 상당수의 대학이 등장할 때가 되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대학들이 늘 파행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그동안 정권으로부터 지나친 간섭과 통제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학 경영의 독자적인 철학을 가질 여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저 정부가 시키는 대로 정권의 입맛에 맞는 교육만 시켜오다 보니 대학들은 홀로서기를 할 필요도, 할 이유도 없었다.
 
심하게 말하면 정권의 위탁을 받아 타율적인 교육을 해온 게 그간의 현실이었다. 정권의 지시를 외면할 경우 받아야 할 유형무형의 압력과 재정적 손실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대학이란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 상당기간 없을 것이다. 입시 면접 문항의 내용까지 세밀히 따지는 등 학생 선발부터 졸업까지 현미경을 들이대고 감시하는 상황에서 대학의 자율성을 운위할 수는 없다.
 
철학 없는 신자유주의의 맹신이 대학교육의 황폐화를 가속시키는 현실이나 그 연장선에서 획일적인 잣대로 전국의 학과들을 서열화하겠다는 발상 등을 보라. 이제 대학은 스스로의 진로조차 잡기 어려워진 단계에 접어들었다. 사실 대학은 일종의 ‘성역’이어야 한다. 무한의 책임이 전제된 자유가 자율이다. 자율이 신장되는 과정에서 약간의 파행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성숙의 과정에서 겪어야 할 성장통일 뿐이다. 대학은 자율 속에 커야 한다. <숭실대신문 921호, 4. 17.>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