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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7.08 정치인들도 교육에 동참하라!
  2. 2007.04.11 못 말리는 한국인의 낙서벽(落書癖)
글 - 칼럼/단상2007. 7. 8. 14:04
정치인들도 교육에 동참하라!

이른바 ‘잠룡(潛龍)’들이 뛰어나와 하나밖에 없는 승천(昇天)의 티켓을 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지금. 온갖 술수가 난무하여 혼란스러운 ‘2007년 6월의 공간’을 뜻 있는 사람들은 난세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모두가 ‘정치’를 탓한다. 정치만 있고, 양식(良識)에 바탕을 둔 도덕이나 인간미가 상실되었다 한다. 제대로 된 정치나 정치인을 만나본 적이 없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정(人情)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한비자(韓非子)는 말했다. 인정이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마음, 또는 생각’이 인지상정이다. 물고 뜯으며 싸우는 것은 ‘나만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는 고집스런 편견을 대전제로 한다. 그래서 제 허물은 덮어두고 남의 흠집만 캐내어 세상에 광고하기 바쁘다. 남의 흠은 작은 것이라도 크게 부풀리고 자신의 것은 감추면서 남을 깎아내리려 한다. 이 대열에 후보들은 물론 전·현직 대통령, 국회의원 등 이른바 정치인들이 뒤질세라 끼어들고 있다.

정치적 권위가 형성되는 핵심은 정책 결정자 또는 기관이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정치집단이 정통성을 확보하려면 사회의 일반적 윤리를 바탕으로 정치집단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옳다는 관념이 국민들 사이에 보편화 되어야 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베버의 설명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윤리를 외면하고 술수로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일에만 몰두하는 우리의 현실은 비극이요 재앙이다.

지더라도 멋지게 지는 모습, 비록 적이라도 장점을 칭찬해주는 금도(襟度)가 실종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내뱉는 오물 같은 증오의 언사들이야말로 그들의 적만 듣고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음이 분명하다.

이쯤 우리의 걱정을 털어놓아보자. 우리의 교육이 걱정이다. 어른들보다 훨씬 영악하게 세상을 배워가는 것이 이 땅의 2세들이다. 그들은 발달된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의 힘으로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언행을 거의 실시간으로 접한다. 강단의 선생들이 내뱉는 고답적인 말보다 전투적이고 상스러운 정치인들의 말을 훨씬 빨리 받아들인다.

지금의 선생들은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을 갖고 있다. 선생의 가르침보다 매스 미디어의 총아들이 보여주는 언행이 훨씬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있는 사실 없는 사실 까발리고 부풀려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려는 정치인들에게도 자식들은 있을 것이다.

한 점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검증의 당위성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라도 검증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자는 그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 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남을 검증하려면 철저한 자기검증이 우선되어야 한다. 정치인들이 자기검증만 제대로 한다면 굳이 남을 검증할 필요 없고, 그에 따라 ‘네거티브 전략’이란 저급한 용어가 등장할 필요도 없다. 네거티브 전략은 우리 사회의 신뢰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그 결과는 교육의 황폐화로 이어진다.

아이들은 그저 폐쇄된 학교 울타리 안에서 교과서만 읽는 로봇들이 아니다. 어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복사하듯’ 배운다. 무슨 거창한 교육정책을 세워주길 기대할 만큼 정치인들의 자질을 믿는 우리도 아니다. 다만 평균적인 윤리의식이나 양식 위에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되, 자신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 자식들의 교과서로 수용된다는 사실만이라도 명심해달라는 것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1. 09:00

못 말리는 한국인의 낙서벽(落書癖)
                 
                                                       
                                                                                                                        조규익

유럽여행 중 들른 하이델베르크. 그곳 대학가에서 낙서와 관련하여 기가 막히는 장면을 만났다. 그곳 학생감옥의 벽은 수감되어 있던 학생들의 낙서와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가 예술이었고, 멋진 관광거리였으며, 소중히 관리되고 있는 그곳의 재산이기도 했다. 휘갈겨 쓴 낙서들과 제멋대로의 그림들에는 학생들의 패기와 울분, 낭만과 치기(稚氣)가 듬뿍 배어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되었다. 몹시 부끄러운 체험이었다. 낙서예술의 원판에서 한글 낙서들을 다수 발견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일본글자도 중국글자도 영어도 없었다. 오직 한글만이 당당하게 위용(偉容)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뿐인가. 한 층 위로 올라가자 벽엔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Please do not write on the wall
▪Bitte nicht auf die wände schreiben
▪감시카메라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낚서를 하면 처벌됩니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우리가 열심히 돈을 벌어 세계 굴지(屈指)의 경제 대국이 되더니 드디어 우리의 글자까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도다. 저것 보라! 저들이 드디어 우리 한글의 우수성까지 깨닫게 되었구나. 비록 ‘낙서’를 ‘낚서’로 잘못 쓰긴 했으나, 그게 무슨 상관이랴.

우리는 그 경고문 앞에서 한동안 망연자실(茫然自失)해 있었다. 그 경고문 속엔 그렇게 많이들 다녀간다는 일본인들의 글자도, 직전에 이곳을 휩쓸 듯이 떼거지로 빠져나간 중국인들의 글자도 없었다. 하이델베르크이니 독일어 경고문이야 당연하고, 세계 공용어인 영어 경고문이 붙은 것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독일어와 영어를 빼곤 한국어만 남는다. 그렇다면 한글이나 한국어가 이곳 독일에서 제 2의 세계 공용어로 격상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유독 한국인들만 툭하면 그곳에 낙서를 해대는 모양이었다. 그곳의 당국자들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한국어 경고문을 써 붙인 것이었다. 우리들의 못 말리는 낙서벽(落書癖). 제대로 된 기록들은 남기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어딜 가나 그릴 데 못 그릴 데 가리지 않고 괴발개발 낙서들을 휘갈겨댄다. 당당하게 제 이름 석자를 걸고 말이다. 그래 그곳에 왔다 간 것이 그리도 자랑스럽더냐? 제 이름 곁에 애인 이름까지 써놓곤 큼지막하게 하트를 그려놓은 녀석까지 있었다. 성당이나 교회의 벽에도, 성벽에도 우리의 한글은 멋진 자태로 국위(?)를 선양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낙서를 좋아하는 민족인가. 심지어 가만히 있는 산 위의 바윗돌까지 쫓아다니며 낙서를 하는 민족 아닌가. 금강산 관광이 본격화 되면서 직접 가서 보거나 텔레비전의 화면으로 똑똑히 확인하는 사실이 있다. 우리 민족의 낙서벽은 북쪽 사람들이라고 예외가 아님을 말이다. 경치 좋은 산 위의 거대한 바위에 무슨 놈의 낙서들은 그리도 많이 휘갈겨 대는지, 통탄스러울 정도다.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 만세!’ 매일 방송이나 신문들을 통해서 밥 먹듯, 아니 숨 쉬듯 뱉어내는 문구들 아닌가. 구역질나도록 유치찬란(幼稚燦爛)한 어구들을 고결(高潔)한 자연 속에 대문짝만한 글자로 파놓을 건 무언가. 금강산의 그 아름다운 바위에 새긴 낙서들. 그것 역시 못 말리는 ‘낙서벽의 소산’ 아니고 무엇이랴.


글자나 글은 꼭 써야 할 곳에 써야 한다. 써서는 안 될 곳에 쓰면, 아무리 고결하고 심오한 문구라 해도 그건 낙서에 불과하다. 우리의 조상들은 함부로 낙서를 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학생들과 학술답사를 다니다 보면 명승지의 바위에 새겨진 시구들을 간혹 보게 된다. 그러나 그건 그 경치에 합당한 문구,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문구들이다. 쓰는 사람 자신의 헛된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매한 후손들이 이 경치를 보고 떠올려 주었으면 하는 생각, 그것을 기록하려 한 것이다. ‘경애하는 민족의 태양’ 운운하는 유치찬란한 수준의 낙서가 아니란 말이다.


우리의 대통령들을 생각한다. 지금까지 이 사람들은 임기가 끝날 무렵이면 자기가 만들었거나 자기에 관한 기록들을 모조리 파기해 왔다. 뒤가 구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좋든 싫든 대통령의 통치기록은 한 나라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니 소중하게 남겨두어야 한다. 정작 그런 것들은 파기하면서 각처에 개발 새발 남겨둔 친필 휘호들은 자랑스레 남겨두려 한다. 그럴 경우 그것들 역시 낙서의 수준으로 격하될 수밖에 없다.


사실은 나도 기록을 좋아한다. 어딜 가도 항상 ‘기록하는 일’ 때문에 몸과 마음이 고달프다. 허무함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이나 여행의 감동은 하루 이틀 만에 슬금슬금 기억의 창고로부터 빠져 달아나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기억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엔 삶의 피곤함이나 여행 중의 괴로움, 혹은 험한 기억들만 괴물처럼 남는다. 나는 그게 싫어서 꼬박꼬박 적어두곤 한다.

도망치는 일상의 기억이나 여행의 추억들을 붙잡아매는 방법들 중의 하나가 기록이다. 사진도 있지만, 기록이 없는 사진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잠시의 여행이라면 그림만 보고도 기억해낼 수 있겠지만, 길고 복잡한 여행에서 단편적인 정지화면(停止畵面)만으로 추억을 되살릴 순 없다. 그래서 나는 한사코 기록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사코 기록하려는 일 또한 부질없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척도를 갖고 있다. 모든 행위들 역시 그로부터 나온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닐 터. 그렇다면 내가 휘갈겨 대는 책이나 논문, 단상들 모두가 한갓 낙서벽의 소산이 아니겠는가. 인생이 나그네길이라면, 그 여행 중에 지니고 다니며 유념해야할 하나의 화두(話頭)가 있다. 쓰고 싶을 때마다 반드시 떠올려야 할 경구(警句)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쓰는 글들은 과연 낙서인가 아닌가?’  

2007. 2. 25.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