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9. 15. 23:09

남도에서 만난 무서운 선비, 금남 최부 선생

 

 

 


<<최금남표해록>>


 

 


최부 선생의 표류 및 귀환 노정

 

 

신춘호(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회장) 박사로부터 금남 최부(崔溥, 1454~1504)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의 자취를 찾아 나선다는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파릇파릇하던 시절, <<금남선생 표해록>>을 읽고 언젠가는 그 길을 밟아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 열기는 아직도 식지 않았는데, 흘러간 세월이 벌써 수십 년이다! 끔찍한 표해(漂海)의 노정은 뒤로 미루고, 선생의 고향인 남도에서 그 분의 뜨거운 자취를 느껴보기로 했다.

 

93일 토요일. 추석맞이 벌초 행렬로 고속도로는 만원이었고, 들판의 벼는 누렇게 익는 중이었다. 답사 참가자 12명을 태운 버스가 1차로 선 곳은 광주 광산구의 무양서원(武陽書院). 고려 인종 때의 어의(御醫) 최사전(崔思全)을 주벽으로, 후손인 선생을 비롯하여 최윤덕(崔允德)유희춘(柳希春)나덕헌(羅德憲) 등이 배향되어 있었다. 탐진 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들의 호응을 얻어 1927년 건립, 매년 음력 96일에 제향을 올리는 곳이었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이택당(以澤堂) 좌우로 합의문(合義門)과 합인문(合仁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안쪽에 낙호재(樂乎齋)와 성지재(誠之齋)가 좌우로 서 있었으며, 몇 계단 위에 무양사(武陽祠)가 높직이 앉아 있었다. 90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서원 전체가 단정했다.

 

 


입구에서 올려다 본 무양서원

 

 


무양서원 현판

 

 


무양사

 

 


무양서원 묘정

 

 


측면에서 올려다 본 무양서원

 

 

거기서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이 나주목 관아(금성관). 아직도 발굴과 복원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목사골 나주의 위용과 분위기는 당시의 모습인 듯 고풍스러웠다. 그로부터 멀지 않은 동강면 인동리 성지마을이 바로 선생의 탄생지였으나, 시간 상 돌아올 때 들르기로 했다. 선생을 배향한 강진의 강덕사(康德祠, 강진군 향토문화유산 14/군동면 라천리 1044)에서 탐진 최씨 청년 화수회최윤영 회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1966년 창건된 강덕사에는 고려 인종(1122-1146) 때 왕을 호종하여 이자겸의 난을 좌절시키고 나라를 보존시킨 어의 최사전을 주벽으로, 선생과 함께 최표최극충 선생 등을 배향하고 있었다.

그곳을 떠난 우리는 어둠이 깔린 해남 시내에 입성, 해남관광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나주목 정수루(正綏樓)

 

 


나주목 의열각(義烈閣)

 

 


나주목 망화루(望華樓)(금성관의 가장 바깥에 있는 세 칸 규모의 2층 문루)

 

 


나주목 금성관의 내삼문


 

 


나주목 금성관(주로 사신을 접대하던 곳)

 

 


나주목 금성관의 외삼문과 내삼문 중간쯤 우측 성벽 옆의 각종 송덕비들

 

 


나주목사 행렬행차


 


나주목사 행렬 행차

 

 


나주목 행정 관할도

 

 


조선시대 20목 분포도

 

  


입구에서 보이는 강덕사

 

 


강덕사 대문

 

 


강덕사 묘정비

 

 


강덕서원 뜰

 

 


강덕사 주벽 최사전의 영정과 위패

 

 


강덕사 주벽 최사전의 영정과 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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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사의 아름다운 단청

 

 



강덕사 앞면

 

 

 
강덕사와 탐진 최씨 문중에 대하여 설명하는 후손 최윤영 선생(미래상사 대표)

 

 

관광호텔 밖으로 내다보이는 어둘녘의 해남읍

 

 

94.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선 답사단은 해남향교를 찾아 전교인 임기주 선생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정위인 문선왕의 위패를 친견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공식적으로는 고려 충렬왕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나, 바다를 건너 온 공자의 위패를 모신 시기를 기준으로 우리나라 최초라 하는 강화도의 교동향교보다 이곳이 먼저라는 것이 그 분의 흥미로운 주장이었다. 해남향교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일 뿐 최초가 중요한 것은 아니리라. 이 향교도 해남정씨와 결혼한 뒤 해남에 정착하여 관서재(官書齋)를 열고 후학을 기른 선생의 활동영역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선생을 비롯하여 외손자 유희춘(柳希春), 윤효정(尹孝貞)임우리(林遇利) 유계린(柳桂隣) 등을 해남유학의 핵심으로 꼽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해남군 지도

 

 


해남향교

 

 


해남향교 대성전

 

 


해남향교 주벽인 공자의 위패를 모신 자리

 

 


해남향교 공자(대성지성 문선왕)의 위패

 

 


해남향교에 모신 기국술성공 자사의 위패

 

 


해남향교의 각종 제기들

 

 


해남향교 진설도

 

 


해남향교 명륜당

 

 


해남향교 장서각

 

 

 

향교를 뒤로 하고 달려간 곳은 해촌서원(海村書院). 거울 같은 금강골 저수지를 내려다보는, 서원의 단아한 자태가 돋보였다. 선생과 함께 임억령(林億齡), 유희춘, 윤구(尹衢), 윤선도(尹善道), 박백응(朴伯凝) 등 이 지역의 6현이 배향되어 있었다. 효종 3(1632) 임억령 선생이 처음으로 배향되었고 1922년 박백응 선생이 마지막으로 배향되었으니, 여섯 분이 배향되기까지 무려 290년이 걸린 것이다. 여기서도 금남 선생이 으뜸으로 모셔지고 있음은 그 분의 강학비(講學碑)가 우뚝 솟아 있는 점으로 알 수 있었다.

 

 


해촌서원

 

 


해촌서원

 

 


해촌서원과 금강골 저수지

 

 

 


해촌서원의 최부선생 강학비

 

 


해촌서원의 최부 선생 강학비

 

 

해촌서원을 뒤로 하고 달려간 곳이 송나라가 해로를 통해 고려 땅에 처음으로 닿았다는 관두량(關頭梁). 중국과의 국제적 무역항이자 제주도와의 교역항이었다. 송나라의 사신들도, 상인들도 모두 이곳을 통해 들어왔으니, 당시 이곳의 번화함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선생이 제주목사 허희(許熙)와 함께 성종 18(1487) 1111일 관두량에 도착해 다음날 제주로 가는 배를 탄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질펀하게 넓은 바다가 고요하니, 당시에는 국제 무역항으로 손색이 없었으리라. 지금은 방조제로 막혀 그 옛날 배가 닿고 떠나던 포구는 마을과 논으로 바뀌었고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내륙의 수면 위로는 하얀 전어들이 뛰고 있었다. 관동리 주민회관에서 만난 마을 어른들 몇 분이 구전해오는 마을의 역사를 조심스레 들려 줄 뿐 이곳에 남아있을 선생의 행적을 알아낼 재간은 아예 없었다.

 

 

 


관두량 포구와 이를 설명하는 신춘호 박사

 

 


포구의 한켠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

 

 


관두량 방조제 안쪽의 내륙 수로

 

 


관동리에서 만난 어르신들과 함께

 

 

관두량을 떠나 백포리의 윤두서 고택과 녹우당(고산 윤선도 고택)을 들러 무안 지역으로 이동, 금남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이른바 늘어지 마을의 양지바른 산록이었다. 선생 부부는 부모 묘소 아래에 자리잡고 앉아 굽이도는 영산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침 초가을의 햇살이 내려 쪼이는 명당의 음택이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선생께 하직인사를 올린 뒤 한참을 달려 나주군 동강면 인동리 성지촌에 있다는 선생의 생가 터에 도착했다. 조심조심 마을길을 달려 막다른 곳에 도착, 촌가의 담장 옆을 통해 올라가니 생가 터임을 알려주는 비석 하나만 달랑 서 있을 뿐, 관리되고 있다는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나주의 한촌에서 태어나 온갖 풍상을 겪다가 인근 무안에 묻힌 선생. 그 분의 일생은 당시 중세 조선의 정치적 격랑을 거슬러 가다가 불행하게 삶을 마친, 사림파 문인의 전형을 보여주지 않는가. 선생의 무덤과 생가 터는 차로 달려 30여분 거리였다. 그 거리는 삶과 죽음의 거리, 아니 시종일관 생사가 교차하던 선생의 일생이었다. 과연 선생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녹우당의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

 

 


녹우당 현판

 

 


고산 윤선도 선생 사당

 

 


금남 선생 묘소가 있는 '늘어지 마을' 표석

 

 


금남 선생 부자묘 입구

 



금남 선생 사적비

 

 


금남 선생 묘소

 

 


금남 선생 묘소에서

 

 


늘어지 마을의 아주머니들

 

 


금남 선생 생가터 비석

 

 


금남 선생 생가터 앞에 열린 감

 

 

***

 

금남 선생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다. 초창기 조선조의 사림파는 유교의 원리주의자들이었다. 결국 훈구파를 누르고 노론을 형성하여 망할 때까지 조선조를 끌고 나간 사림파. 서슬 퍼런 선비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다져나간 인물들이었다. 제주에서 부친의 부음을 받고 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바다에 표류하는 동안 단 한 번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던 선생. 북경에 호송되어 황제에게 사은하게 되었을 때도 친상을 당한 자식으로서의 예가 아님을 내세우며 옷 갈아입기를 거부하다가, 결국은 강요에 의해 잠시 길복(吉服)으로 갈아입은 선생이었다.

 

선생은 귀환 후에도 왕명으로 8일 만에 표해록을 작성하는 저력을 보였다. 그런 다음 즉시 내려가 상주로서의 임무를 다하면서 왕명으로 중국에서 목격한 수차(水車)를 제작하기도 했다. 1년 후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선생은 4년 동안이나 복을 입게 된 것이다. 탈상 후 선생을 아끼던 성종이 벼슬을 내리려 하자 사간원과 사헌부의 신료들이 들고 일어났다. 부친상을 당한 자식의 예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 표류한 뒤 중국에서 많은 시문을 지은 것, 비록 왕명에 의한 일이긴 하지만 즉시 빈소로 달려가지 않고 여러 날 서울에 머물면서 표류기를 쓰거나 사람들을 만나면서 애통함이 없었다는 등의 이유로 벼슬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왕에게 대들었으니... 당시의 젊은 신료들 또한 선생과 같은 류의 무서운 원리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성종이 일찍 하세하고 연산군이 등장하면서 일어난 무오사화의 와중에 점필재의 문하라는 이유로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었고, 6년 뒤 갑자사화의 불길을 피하지 못한 채 끔찍한 참형을 받고 효수까지 당했다. 51세의 창창한 나이로, 파란 많은 삶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남도의 이곳저곳에 남아 빛을 발하고 있는 선생의 자취는 인간의 본질과 삶의 가치를 깨닫게 만드는 교과서였다. 조만간 제주-중국-조선으로 이어지는 선생의 행적을 다시 밟아볼 필요성을 절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때가 마냥 기다려지는 지금이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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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학술문2008. 3. 7. 20:03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 없는데, 너 홀로 내 앞에 있구나!”
    -연행록의 교과서, 그 치밀한 해석적 시각 ;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

54세의 ‘타각’, 연행 길에 오르다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가 정적들과 머리 터지도록 싸우거나, 전야에 숨어 학문에 매진하거나. 17세기 조선의 지식인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둘 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음에도 포기한 채 후자를 택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쟁쟁한 노론 가문의 뛰어난 시인이자 화가이었던 노가재 김창업이 벼슬길을 버리고 세상일을 멀리한 것은 아버지 김수항이 당쟁의 와중에서 정적들에게 몰려 죽음을 당한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강하게 잡아끈 것은 학문이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욕이 벼슬길로부터의 유혹을 막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가 숙원이던 연행 길에 나선 것도, 방대하면서도 치밀한『연행일기』를 남긴 것도 그런 점을 입증한다. 그는 원래부터 중국의 산천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다가 1712년 그의 형인 창집이 ‘사은 겸 삼절연공’ 사행의 정사로 떠나게 되었고, 결국 노가재는 ‘타각’의 자격으로 연행 길에 나설 수 있었다. 54세의 적지 않은 나이였다. 타각이란 사신 일행의 모든 물건을 감수(監守)하는 직책이었다. 그 자리가 하찮다고 할 수는 없으나, 명망 있는 노론 사대부가의 노가재가 맡을만한 직책은 아니었다. ‘조롱과 비난이 일시에 일어났고 친구들은 흔히 만류했다’는 노가재의 술회도 아마 그 때문에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노가재에게 연행 길은 ‘새로운 것’을 찾는 길이었고, 자기 가문이 오래도록 빠져 지내던 이념의 허와 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중국에 갈 수만 있으면 되었지 직책이 무슨 상관이랴!’는 것이 노가재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146일 간 북경을 다녀오면서 방대한『연행일기』와 137수의 기행 시 모음인 『연행훈지록』을 남긴 것도 중국 기행에 대한 절절한 욕구의 소산이었으리라. 19세기 중엽 동지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연경을 다녀와 『연원직지』를 남긴 김경선도 연행록을 남긴 선배들 가운데 노가재와 함께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등을 꼽았다. 노가재의 연행록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고, 후대 연행사들에게 교과서의 위치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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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재의 증조부는 서인 청서파의 영수이자 척화파의 거두인 청음 김상헌이고, 부친인 김수항은 노론의 영수였다. 가계로만 본다면 노가재는 청에 대한 복수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어야 마땅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지니고 있던 화이관이나 소중화 의식이 한으로 맺힐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냉철하리만큼 객관적인 태도로 중원의 문물을 대하고 관찰한 그였다.

화이의 차별적 세계관을 바꾸어가다

노가재는 십삼산의 찰원에서 장기모(張奇謨)라는 호인(胡人) 어린이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너희들은 달자(㺚子)와 친교를 맺느냐?”
“이적의 사람이 어찌 우리들 중국과 어울려 친교를 맺겠습니까?”
“우리 고려 역시 동이(東夷)인데, 네가 우리들을 볼 때 역시 달자와 한 가지로 보느냐?”
“귀국은 상등인이요 달자는 하류인인데, 어찌 해서 한가지이겠습니까?”
“달자들도 머리를 깎으며 너희들도 머리를 깎는데, 무엇으로써 중국과 이적을 가리느냐?”
“우리들은 머리를 깎지만 예가 있고, 달자는 머리도 깎고 예도 없습니다.”
나는, “말이 이치에 맞는다. 네 나이 아직 어린데도 능히 이적과 중국의 구분을 하니, 귀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구나! 고려는 비록 동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의관문물이 모두 중국을 모방하기 때문에 ‘소중화’라는 칭호가 있다. 지금의 이 문답이 누설되면 좋지 않으니 비밀로 해야 된다.”고 했다.

노가재는 내심 청국 사람들을 지목하여 ‘달자’라고 한 것인데, 아이는 그것을 몽고로 오인하여 답변한 것이었다. 이렇게 처음에 노가재는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우월감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그러나 『연행일기』의 후반으로 갈수록 청국을 이적으로 보던 관점은 약간씩 변해 간다. 자기 존재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그런 변화는 생겨날 수 있었다. 연경에서 중국 사람들을 보며 그들과 대비되는 자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객관화 시키게 된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몸집이 장대하며 모양이 우뚝한 자들이 많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을 둘러보니 본래 스스로 작은데다 또 먼 길의 풍진에 시달린 뒤라 세 사신을 빼고는 모두가 다 꾀죄죄하고 착용한 의관도 또한 흔히 여기에 와서 돈을 주고서 빈 것이기 때문에, 도포는 길이가 맞지 않고 사모가 눈까지 내려와 보기에 사람 같지 않으니, 더욱 한탄할 일이다.

이 말은 당시 모습에 대한 사실적 묘사이겠으나, 사실 노가재의 의식 변화를 전제해야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점은 황궁 묘사에서도 확인된다. 태화전 앞 12향로에 침향을 태우던 관례를 없앤 데 대하여 “황제가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인 것 같다” 거나 황궁에 대하여 “장려하고 정제함이 정말 황제의 거처다웠다” 는 등의 언급들이 그런 사례들이다.
청나라 지식인들과 교유함으로써 노가재의 의식변화는 빨라졌다. 예컨대 젊은 학자 이원영(李元英)과의 교제는 상당 기간 지속되는데, 그런 관계를 통해 양국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문화의식의 동질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각종 물화의 풍부함이나 찬란함, 건축·의복·음식·기명 등과 각종 제도의 훌륭함, 도서편찬 같은 문화 사업들의 놀라움 등 그들의 실상을 접하면서 노가재는 자신의 인식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만남을 통해 깨달음을 얻다

그는 천산의 영안사(永安寺)에서 불승 숭혜(崇慧)를 만났다. 그와의 만남은 불교와의 만남이었고,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는 평등의식과의 만남이었다. 헤어질 때 “사람에게 안팎은 있지만 불성은 한가집니다.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라고 던진 숭혜의 말은 노가재로 하여금 그간 굳게 지녀오던 차별의 편견을 깨고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해주었다. 그것은 용천사의 중 운생(雲生)에게 보낸 편지글 속의 “온전히 도력(道力)에 힘입어 영경(靈境)을 두루 밟았으니 구제받음의 기쁨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는 술회에서도 나타난다. 수행하던 젊은 승려 낭연(朗然)에게 준 시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 없는데/너 홀로 내 앞에 있구나/함께 용천사에서 잤으니/응당 전생의 인연 있음 알겠네”도 그런 깨달음의 기쁨을 드러낸다. 그런 깨달음의 실체야말로 인간의 본질과 참된 도리 그 자체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연행을 통해서 노가재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과 문물을 만났다. 달자들은 물론 시정인(市井人)들, 벼슬아치, 학자, 예술인 등 다양했다. 옥전현에 묵을 때는 선비 하나가 춘화도를 팔기 위해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 대목엔 춘화도에 미련과 흥미를 보이는 서장관의 모습도 나타나고, “유학을 공부하는 성문(聖門)의 제자로서 어떻게 춘화도를 품고 와서 남에게 보이시오?”라고 핀잔하는 노가재의 기개도 나타난다. 산해관을 지나면서는 반군 이자성에게 성문을 열어준 오삼계의 사실(史實)에 대한 노가재 자신의 사평(史評)을 개진했는데, 논리가 당당하고 정연하다. 오삼계가 어차피 깨질 산해관을 포기하고 황제의 원수를 갚았으니, ‘임시변통의 의리’는 지켰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명나라의 왕실을 세우지 못하여 천하 사람들의 소망을 저버렸고, 스스로 왕을 참칭하다가 끝내 패망했으니, 그는 이름을 망치고 절의도 잃었다고 비판했다. 이구동성으로 오삼계의 모든 행적을 비판하는 역사서들에 대한 노가재의 반론은 조선 선비의 균형 잡힌 혜안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걸출하다.
연경에 다녀오기까지 걸린 기간은 146일, 총 거리는 6천 28리인데, 연경에서 출입하거나 길에서 돌아다닌 것이 6백 75리이며, 시문(詩文) 402편을 얻었다고 노가재 스스로 『연행일기』의 말미에서 밝혔다. 그는 왜 그곳에 가려 했으며, 책의 말미에 돌아다닌 거리와 얻은 시문을 특별히 들어 놓았을까. 중국에 가기 전 노가재는 중국에 관한 서책들을 많이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오랑캐의 차지가 되긴 했지만, 중국은 세계 그 자체 혹은 세계를 만나는 창이었다. 어쩌면 그는 오랑캐도 사람임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나 아닐까. 증조부가 청나라에 적극 대항하던 김상헌이었고, 부친 역시 청국을 이적시하던 노론의 영수였다. 노가재는 분명 그런 가문의 이념으로부터 벗어나 세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게 지식인의 본령이니, 노가재는 그 본령에 충실하고자 했을 따름이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노가재 스스로 변화의 기미를 준비하던 17세기 조선 지식사회의 대표로 자리매김 될 만한 단서가 바로 이 책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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