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정치이념으로 뭉친 결사체가 정당이라면, 한국의 정치 결사체들을 ‘정당’이라고 부르기가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다. 그 안에 수많은 소그룹들이 있어서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데, 대부분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모임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다양한 규모의 도당(徒黨)들끼리 치고받는 싸움들을 통해 결사체의 헤게모니를 잡아가는 것이 현재 한국 정당들의 모습이니, 그런 결사체들을 ‘붕당(朋黨)’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리라.
‘새누리(붕)당’에는 크게 친박과 비박이란 소그룹이, ‘더불어민주(붕)당’에는 친노와 비노란 소그룹이 각각 패권 다툼을 벌이는 중이다. 억지스러움에서 난형난제이긴 하나, 새로운 수장 아래 별 잡음 없이 총선이란 전쟁터를 향하고 있는 친노에 비해 친박은 훨씬 더 밉상이다. 국정을 담당하고 있는 여당으로서 온갖 꼼수를 부리며 패권을 잡으려는, 그 유치찬란하고 미련스러운 작태는 구토를 참기 어려울 만큼 혐오스러운 게 사실이다.
‘공관위’인지 ‘공천위’인지 알 수는 없지만, 위원장의 완장을 차고 험상궂은 표정으로 이빨 빠진 ‘개작두’를 둘러멘 이 모 의원을 보노라면, 한 줌 권력이 무언지 참으로 딱하기만 하다. 온갖 영화로운 작위(爵位)를 거친 그 나이의 인물이라면, 단 한 낱의 덕망이라도 표정에 나타나야 정상일 것이다. 툭하면 짜증스런 말투로 주변 사람들과 부딪치기만 하는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뿐이니, 그는 지금껏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남을 평가하고 내치려면 공명정대한 기준과 원칙이 있어야 한다. 평가의 공정성과 점수의 정확성에 평가자의 원만하고 따뜻한 인격이 포함될 때 비로소 ‘공명정대함’의 가치는 구현된다. 꼼수는 꼼수를 낳고, 둔사(遁辭)는 또 다른 둔사를 낳는다. 멀쩡한 사람에게 현미경을 들이대고 흠을 찾으려 하고, 흠투성이의 사람에게 망원경을 대고 눈까지 감으려는 꼼수 앞에 할 말을 잊는다. 최고 권부의 밀명(密命)을 받았다고 모두들 추측하는데, 본인만은 한사코 ‘원칙대로 한다’고 강변한다. 매에 쫓겨 도망가는 까투리가 부리만 땅에 박으면 안전한 줄 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도당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는데, 자신들만은 속내를 들키지 않았다고 희희낙락하는 꼴이다.
멀쩡하다 못해 훌륭하기까지 한 인물들을 공천에서 배제해 놓고, 배제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 ‘최고 권부의 미움을 샀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붕당의 ‘정체성 운운’으로 둘러대려 한다. ‘붕당’에 무슨 정체성이 있을 것이며, 정체성이 있다한들 ‘붕당의 정체성’이 ‘정당의 대의명분’과 어찌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제대로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판관(判官) 노릇을 할 수 있다. 그 때의 자격이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이다. 거기에 더하여 최고 권부가 가당찮은 압력을 가할 때 바른 소리로 깨우치려는 용기와 지혜까지 갖추면 금상첨화다. ‘좋은 사람을 뽑는 것’이 바로 ‘선거(選擧)’다. 지금 여당이라고 자처하는 ‘새누리붕당’이 보여주는 작태는 골목 깡패들의 행태 바로 그것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북한의 김정은이는 핵을 만들어 우리의 심장에 쏘려 하고, 중국과 미국은 패권을 다투는 중이며, 간사한 일본은 식민시대의 영화를 못 잊어 발광하는 중이다. 그 뿐인가. 우리의 아들딸들은 직장을 못 찾아 좌절하며 헤매고 있다. 국민들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서 떨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형국이다.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인간들이 이 시대의 과제가 무엇이며, 무슨 ‘아젠다(agenda)’를 가져야 하는지 등을 알지도 못하면서 권력의 단맛만 추구하고, 최고 권부에 아부나 하려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명하노니,
그대들은 이제 향리로 물러가 부디 자숙하며 수양하기 바라노라.
본의 아니게 뒷골목의 비속어를 쓰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백규서옥 주인 드림 [본문으로]
아베란 친구, 그럴 줄 알았다. 스스로의 언행으로 ‘속 좁은 일본인들’을 대표해온 그 아닌가. 이 시점에서 ‘대인배의 면모’를 보여주었다면, 오히려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오랜 세월 일인들을 보면서 내린 결론이 있다. ‘마른 밴댕이’. 그 평가가 한 순간이라도 바뀔 수 있었다면, 판단력의 옹졸했음과 미숙함에 대한 자기 모멸감을 솔직히 나는 견딜 수 없었으리라. 요즘 들어 북쪽의 김정은이가 야료를 부릴수록 부쩍 그에게 접근하려는 듯한 아베의 행적. 말투처럼 참으로 덕이 느껴지지 않는 그의 행동거지다. 아베를 비롯한 주변의 소인배들을 보며, ‘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의 여유를 가지려 해도 그럴 수 없는 건 왜일까.
엊그제 전직 해군참모총장 부자(父子)가 실형을 선고 받았고, 툭하면 방송에 나와 수레 목으로 열변을 토하던 별 둘짜리 제독도 심판을 받았다. 각종 비리로 줄줄이 엮여 들어간 고위 장교들이 이제 속속 무대에 나와 실형을 받을 것인데, 꼬락서니가 목불인견(目不忍見)일 것이다. 북괴가 설치한 지뢰에 우리의 꽃다운 20대들이 발목이 잘리고 다리가 날아갔는데, 이번에도 군 수뇌부는 마냥 굼뜨고 태평하다. 그 와중에 부하들과 폭탄주를 마신 합참의장도 있었고, 사고 부대의 어떤 중령은 부하 여장교를 어떻게 해볼까 수작을 부리기도 했다. 술 한 모금 며칠 참으면 위장이 졸아붙는가. 해서는 안 될 짓이지만, 하필 성추행의 대상이 부하 여장교란 말인가. 두 명의 전직 해군참모총장이 목돈을 우려낸 그 배. 꽃다운 우리의 젊은이들이 타고 다니며 북괴와 싸움을 벌여야 할 군함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참모총장 등 해군장교들이 뇌물을 받고 그 군함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세월호에 허둥대는 와중에 메르스를 만나 우왕좌왕, 그 메르스 끝나자마자 지뢰사건으로 혼비백산. 지뢰사건에 허둥대는 중에 유병언의 재산은 다시 그 구원파가 가져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지뢰에 발목과 다리가 날아간 젊은 군인의 병실에 대통령이 숨 가쁘게 달려가 안아주는 일이 뭐 그리도 어렵고 대단한 일이란 말인가. 세월호 대책이랍시고 해양경찰을 없애놓으니, 피서철 해수욕장에 안전요원을 배치할 수도 없고, 서해 어장엔 중국 어선들만 새까맣게 몰려들고 있다. 국가안전처는 뭐하는 곳일까. 고급 공무원들만 잔뜩 만들어 놓고, 사건이 터져도 하는 일이 없다. 공무원이란 자들은 그저 규정집이나 들고 설치며 간섭이나 할 뿐. 차라리 규정집이라도 제대로 보면서 ‘FM에 맞추어’ 일처리라도 하면 나을 텐데. 그들에게서 감동을 느끼는 국민이 거의 없는 현실이 비극이다.
대통령부터 참모들까지, 장관부터 일선 공무원들까지, 참모총장부터 하급 장교들까지 제대로 된 모습을 찾기 어렵다. 수시로 나태와 독직(瀆職)의 유혹에 매몰되는 지배계층의 행태를 필자와 같은 장삼이사들이 밤낮없이 걱정하고, 불쌍한 병사들이 몸 바쳐 하루하루 땜질해가는 곳이 바로 우리나라다. 집 안에서 제대로 일들은 하지 않으면서, 틈만 나면 이웃나라 아베를 들먹인다. 누구 말대로 ‘아베가 쪼다’이긴 하지만, 그 ‘쪼다’를 발가벗겨놓은들 우리의 몰골이 나아지는 건 아니다. 오죽하면 그런 ‘쪼다’가 국제사회에서 대놓고 우리를 희롱하고 다니겠는가. ‘새 알 멜빵 걸어 짊어지고 다닐’만큼 약아빠진 아베에게 듬직하고 당당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외에 달리 약이 없는 것을.
대통령의 동생 부부가 철부지 망언으로 나라 망신을 시키는 것도, 덕 없는 이웃나라의 아베가 대놓고 업신여기는 것도 한심한 우리 모습 때문 아니겠는가. 우리가 언제쯤이나 ‘지배구조’의 교체에 성공할 수 있을지. 아니, 우리에게 제대로 된 지배구조의 개념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이런 나라에 얼마나 더 살아야 하는지 답답한 요즈음이다.
미국에 있는 동안 꽤 많은 미국의 지식인들을 만났다. 주로 교수나 강사, 박물관의 큐레이터들,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 등인데, 그 가운데는 오가는 도중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금까지 비교적 자주 만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미국 지식인들이 타인들 특히 외국인들을 낯설어 하며 자신들만의 울타리에 갇혀 지내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자신의 전공을 통해 얻은 통찰력으로 남을 이해하기도 하고, 남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를 통해 전공에서 만난 문제들을 풀기도 한다.
12월 중순의 어느 날 점심시간. 브레이크 룸에서 커피를 데우고 있는데, 평소 눈인사 정도를 나누던 여 교수 한 분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 며칠 전 PBS에서 방영된 ‘비밀의 국가 북한[Secret State of North Korea]’란 다큐멘터리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 순간 나는 참으로 많이 부끄러워졌다. 방영된다는 소식을 뉴스로 듣긴 했으나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동족의 끔찍한 참상들이 미국인들의 눈앞에 발가벗겨진 채 드러난 모양이구나! 집에 돌아가자마자 포털사이트에서 그 방송을 확인했고, 며칠 후에는 다운로드해서 직접 보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거나 짐작하고 있는 사실들의 반복에 불과했지만, 미국인들에겐 충격으로 다가왔을 내용이었다. 특히 군사조직에 가까울 정도의 병영국가 체제, 대한민국과 미국을 주된 표적으로 무력을 앞세운 협박, 몽땅 쇼 윈도우의 컨셉으로 꾸며진 평양, 비참하고 끔찍한 정치범 수용소들, 살아남을 힘마저 상실한 아이들과 일반국민들의 참상 등. 내게 북한의 현실을 일깨워 준 림멜 교수에게 달리 할 말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녀를 만나 South Korean들의 입장을 말하지 않으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 드디어 림멜 교수의 연구실에서 장시간 만나 한반도의 현실을 설명하고, 그녀의 관심사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대화들 가운데 한 부분을 이곳에 올리기로 했다.
연구실에서 필자와 대담 중인 림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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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바와 같이 림멜 교수는 ‘자신의 전공을 통해 얻은 통찰력으로 남을 이해하게 된’ 대표적 미국 지식인이다. 명문 예일 대학 역사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그녀는 이듬 해 ‘국제 교육 교류 위원회[Council on International Educational Exchange]’의 수혜자로 선발되어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레닌그라드 주립대학[Leningrad State University]에서 ‘러시아어 프로그램’을 이수했으며,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키로프(Kirov) 살해와 소비에트 사회: 1934-35년 레닌그라드에서의 선전과 여론[The Kirov Murder and Soviet Society: Propaganda and Popular Opinion in Leningrad, 1934-35]’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였다.
1995-96년에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강사로 재직했고, 1998년 가을학기부터 이곳 OSU에 자리를 잡고 주로 러시아•중앙아시아•근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과목들을 강의해 왔으며, 20여 종에 가까운 수상 및 그랜트(Grant) 수혜 경력을 갖고 있는 탁월한 교수임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 가운데는 풀브라이트(1991-92), 앨리스 폴 어워드(Alice Paul Award/1991), 국제 교류 연구 기금(International Research and Exchanges Board Grant/1991-92) 등을 비롯,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혜를 받은 학자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녀의 주된 관심사는 스탈린 시대 소련 역사에서 ‘통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폭력’이었고, 전쟁을 비롯한 집단 폭력이나 지하경제와 같은 국제적 기층민중의 현실 등에도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북한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현실에 관심을 갖는 걸까. 북한 얘기를 꺼내자 그녀는 김정은을 입에 올리며 스탈린보다 훨씬 잔인한 그의 성격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야기 도중 책장 위에 올려놓았던 스탈린의 ‘배불뚝이 동상’을 꺼내더니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체형(體形)이 스탈린과 똑같지 않으냐고 내게 물었다. 국민들을 배고프고 괴롭게 하면서 자신의 배를 불린 ‘전형적인 독재자의 모습’을 스탈린에게서 찾을 수 있고, 한반도의 김씨 3대는 바로 그 아류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스탈린 시대를 중심으로 러시아 역사를 긴 세월 연구해 온 그녀로서 ‘국민 착취 및 학대의 전형적인 독재자’로 스탈린을 꼽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체형과 인간성의 유사성까지 들면서 김씨 3대를 스탈린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인물들로 규정하고 있는 점은 흥미로웠다. 그나마 스탈린은 자기 당대에 끝이 났지만, 김씨 왕조는 대물림을 하고 있으므로 훨씬 지독한 인물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탈린이나 김씨 3대 등 ‘배불뚝이 독재자들’을 ‘주민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악마적 지도자’의 시각적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음을 그녀의 설명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스탈린의 독재가 결국 소련 해체의 단서로 작용한 것처럼 그보다 더 잔인한 모습으로 한반도 북쪽에 군림하고 있는 김씨 3대 특히 김정은의 폭력성이 조만간 체제의 전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그녀의 관점이었다.
연구실에서 필자와 대담 중인 림멜 교수
연구실에서 필자에게 설명 중인 림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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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입양된 한국의 고아들을 언급함으로써 나를 부끄럽게 했지만, 이내 한국인 친구들이나 한국과의 친분을 강조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친밀감을 갖게 한 그녀.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삼성•현대•기아•엘지•대한항공 등 미국을 비롯한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한국의 기업들을 죽 나열하고 그들의 장점까지 거론했으며,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삼성 폰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뿐인가. 한국의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을 독재자로,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을 민주주의 정착기의 대통령으로, 그 사이에 있는 노태우 대통령을 과도기로 각각 규정하는 등 한국 대통령들의 이름과 공적을 꿰고 있었으며, 반기문 총장, 김용 세계은행 총재 등 세계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명사들의 이름을 줄줄 외움으로써 한국인인 나를 적잖이 놀라게 했다.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산업화의 결정적 초석을 놓은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고 있으며, 그 여파로 박근혜 대통령도 정계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다고 내가 설명하자 그 말을 수긍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물어왔다. 세대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믿음직하다는 평가를 받아 비교적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말하자, 동북아시아의 큰 나라들이나 미국도 내지 못한 여성 대통령을 선출했다는 점과 함께 여성의 리더십이 나라를 흥하게 하는 선례를 한국이 만들 것이라는 고무적 관측까지 내놓는 것이었다. 북한이 매우 폭력적으로 나오는 것도 국제사회에서 보여주는 한국의 다양한 활약이나 선전(善戰)에 불쾌감을 느끼는 데 큰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그 나름의 분석을 보여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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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로서 자신이 전공한 학문을 바탕으로 현존하는 체제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걸출했던 역사철학자 E. H. 카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 즉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가 역사라고 했다. 그 대화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온당한 해석 행위이고, 그런 해석을 통해 역사의 객관성은 확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스탈린 시대에 생겨난 역사적 사건들의 해석을 통해 단순히 그 시대의 규명에나 그치고 만다면, 그것을 진정한 역사가의 안목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 학자를 만나자마자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김씨 3대 혹은 북한의 미래까지 내다보는 통찰을 림멜 교수는 내게 보여준 것이리라. 여지없이 엄정한 시각을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들의 해석에서 얻어내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역사학자들을 만나는 일이 내겐 큰 즐거움이고, 그 즐거움을 림멜 교수와의 만남에서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컴퓨터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는 림멜 교수
림멜 교수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삼성 폰
2013. 12. 14. PBS에서 방영한 '비밀의 국가 북한' 타이틀 화면[방송화면 캡쳐]
‘아기장수’의 전설이 전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겨드랑이에 날개나 비늘을 달고 태어난 영웅, 힘이 센 아기장수의 비극적 종말에 관한 이야기다. 아이가 나중에 역적으로 몰려 멸문(滅門)될 것을 우려한 부모가 그를 맷돌로 눌러 죽이자 건너편 산 밑에서 용마가 구슬피 울며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우리나라의 이곳저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중세 권력의 횡포로 뜻을 펴 보지 못한 채 무수히 죽어간 영웅들. 이 땅에서 어렵사리 삶을 이어가던 중세의 민초들은 영웅을 대망하면서도 지배계층의 논리에 가담하여 ‘어린 영웅 죽이기’에 나서는 모순을 자행한 것이다.
4⋅11 총선이 다가오면서 백주 대낮에 ‘어린 영웅 죽이기’가 어른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딱한 광경을 목도한다. 스물일곱의 손수조 후보. 그가 후보로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 혼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양심도 패기도 다 썩고 허우대만 남은 어른들이 활개치던 정치판에 이제 새 바람이 불겠구나. 패해도 좋으니 신나게 한 번 싸워 보거라. 불순한 암수로 민심을 호리는 정치인들을 그대의 풋풋함으로 제압해 보거라. 그러나 그에 대한 기대와 함께 증폭되는 불안감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사바나에 내던져진 한 마리 양같은 그가 안쓰러웠다. 스물일곱의 북한 김정은이 정권을 잡은 일에 대해서는 입도 달싹 못하던 인사들이 그녀의 말 한마디에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물어뜯는 일을 목격하며 내 불안은 드디어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잘은 모르지만, 그녀는 처음에 ‘3000만원으로 선거를 치르겠다’는 당찬 말을 했다가 도저히 안 되자, 그 약속을 포기하겠다고 한 모양이다. 또 한 건은 그 돈 3000만원의 출처. 그는 원래 이 돈이 전세방을 뺀 것이라 했는데, 나중에 보니 전세방은 아직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할 일 없는 누군가 확인하곤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원래 전세방을 빼서 쓰려고 했는데, 요즘 전세방이 잘 안나가 할 수 없이 어머니에게 꾸었노라고 해명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손수조는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이 일기 시작했다.
언론에 보도된 것들만 대충 추리면 다음과 같다. 조모 서울대 교수는 트위터에 "'형사 책임'은 아니더라도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사안"이라 몰아댔고, "서울 남영동에 18평 원룸으로 전세 3000만원짜리가 있다고? 증여세 공제한도액이 3000만원인 바 탈세 목적으로 이중계약서가 작성된 것이 아닌지 확인해보아야 한다"는 법률적 멘트까지 날렸다. 공모 소설가는 선거법 위반으로 고소해야 할 일이라 했고, 진모 교수 역시 ‘면책특권’을 들먹거리며 그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 뿐인가. 어떤 당의 대변인이란 사람도 이런저런 말로 손 후보와 그 당을 비아냥거렸다.
대단한 사건이다. 한 마디씩 내뱉은 인사들의 경륜으로 보나 나이로 보아 그들의 작은 딸 쯤 될 스물일곱 살짜리 손 후보의 말 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며 그가 북한의 김정은보다 어쩌면 훌륭한 ‘아기장수’의 영웅성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갖게 되었다. 왜 그들은 ‘와!’ 하고 달려들어 그의 작은 몸을 ‘맷돌로 눌러’ 죽이거나 물어뜯어 죽이려는 것일까. 그를 죽이지 않으면 그들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아니면 ‘젊은이가 참하게 직장생활이나 해야 하는데...’라고 자못 다정한 멘트를 날린 모 정당 유모 대표의 말처럼 걱정스런 부모의 심정 때문일까?
참, ‘뭣 같은 정치판’이라지만, 대명천지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아직도 ‘아기장수’ 하나 용납하지 못할 만큼 옹졸한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도 이젠 ‘아기장수’ 하나쯤 키워 우리 미래의 한 부분을 맡겨볼만한 때도 된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보다. 그러니 손 후보는 그들의 어투대로 ‘절대 쫄지 말고’ 당당하게 나아가야 한다. 말 많은 자는 말로 망하게 마련. 가급적 말수를 줄여 공격의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 약한 모습 보이면 달려드는 게 하이에나들이다.
산전수전 다 겪었을 그 어른들이 어린 후보의 말꼬리나 잡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며 매우 부끄러워지는 어제 오늘이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나는 스물일곱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중위 계급에 전임강사로 있던 사관학교에서 전역, 곧바로 대학으로 옮겨 간 것이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당시 학과 교수들 가운데 최 연장자는 48세의 수필가 신상철 선생이었다. 그 분은 첫 대면의 자리에서부터 불안한 눈빛과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 48세가 27세를 바라보는 노파심이었을 거라 지금은 이해하지만, 당시에는 살짝 불쾌했다. 30 전후의 학생들이 적지 않았고, 심지어 40이 넘은 학생들도 여럿 되던 당시였다. 학생지도가 교수 업무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던 당시 대학의 시니어 교수로서 새파란 내 모습을 보며 얼마나 한심했을까. 그래도 당시 나는 내가 ‘어리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세상 이치를 다 꿰고 있다는 듯, 마음속에서는 '썩은 냄새로 가득 찬' 사회와 선배들에 대한 불만이 늘 부글거렸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는 정치와 시국에 대하여 목청을 높이기 일쑤였으며, 사관생도들이나 학생들을 만나서는 도사처럼 인생을 논하곤 했으니, 어른들이 보기에 내 모습이 가관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차고 한심하여 저절로 낯이 붉어질 따름이다. 내가 보낸 치기(稚氣) 만만한 젊음을 다 늙어 철 든 지금 생각할 때마다 괜스레 겸연쩍어지곤 하는 것도 당연하다. 당시의 신상철 선생보다 더 나이 든 지금, 30대 초⋅중반의 신임교수들을 보며 부러운 생각이 들면서도 세상 이치를 모두 꿰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해 하는 그들의 언행에 슬그머니 미소가 머금어지곤 한다. 어쩌면 그 옛날의 내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리라. 당시 이미 결혼한 몸이었으니, 교수로도 남편으로도 아빠로도 상당 기간 내 트레이드마크는 ‘젊음’이었다. 허나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철없던 시절이었다. 허둥허둥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기상은 하늘을 찌를 듯 했으나, 발을 붙인 현실에 대해서는 ‘무대책’의 ‘어린애’에 불과했다. 대학이나 사회에 대하여 약간의 깨달음이 생긴 지금에서야 불끈거리는 '패기’만으로 흘려보낸 세월이 아깝고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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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 김정일이 죽고, 그의 아들 김정은이 ‘즉위’했다고 난리를 피우는 중이다. 그럴 만도 하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 내 경험으로 비추어 본다면, ‘천둥벌거숭이의 나이’가 바로 스물일곱이기 때문이다. ‘천둥벌거숭이’란 말은 참으로 희한하다. 국어사전을 펴 보면 ‘두려운 줄 모르고 철없이 덤벙거리거나 함부로 날뛰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하는데, 말뜻치고 이보다 더 정확하고 재미있을 수는 없다. 글쎄, 한 고을의 이장을 하려 해도 많은 관록과 나이가 필요할 텐데. 아무리 찌그러져 가는 북한사회라 해도 겉모습은 분명 ‘나라’인데, 괜찮을까. 요즘은 그의 나이를 생각하며, 새삼 내 ‘스물일곱 시절’을 반추해보곤 한다. 김일성, 김정일을 거쳐 오면서 그 기세 높던 ‘북조선 사람들’의 기를 송두리째 죽여 놓았으니, 누구라서 찍소리 한 마디라도 내뱉겠는가만.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이니 어찌 능구렁이, 살모사, 고슴도치 들은 없을 것이며,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인들 어찌 없으리. 과연 ‘그 어린 것’이 그 험한 계곡과 능선들을 잘 걸어갈 수 있을까. 내가 그 때 그래 왔듯이 천둥벌거숭이처럼 날 뛰다가, 게도 구럭도 모두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도 팔자’라고, 내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북쪽에서 새로 즉위한 ‘어린 왕’을 걱정하는 내 꼴이 가관은 가관이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게 되면 그 뒤치다꺼리를 고스란히 우리가 해야 할지도 모르니, 그게 심히 걱정되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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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 스물일곱 시절엔 너그럽게 훈수해주던 선배들이 있었고, ‘절에 간 새댁’처럼 그들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기만 하면 만사가 편했다. 가끔씩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치고 올라오는 자존심이 문제가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공동체가 와해될 일은 없었다. 그런데, 북쪽의 ‘스물일곱’이 팩 돌아서 어느 순간 ‘핵단추’라도 누른다면?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나야 고작 중위 계급장을 달았다가 200여명 남짓의 학생들을 상대하던 보잘 것 없는 교수였지만, 그 친구는 무시무시한 ‘대장’ 계급에 북조선 인민들의 생살여탈권까지 거머쥐게 되었으니, 분명 그와 내가 같은 급의 천둥벌거숭이는 아니렷다? 그러니 우리 모두 휘발유통 안고 장작불 앞에 앉은 꼴이 아니고 무엇이랴!
사실 김정일은 다가오는 죽음을 감지하면서 얼마나 마음이 다급했을까. 그곳이 아무리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공간이라지만, 스물일곱이 갖는 의미를 모를 정도는 아니지 않는가. 아버지의 입장에 서면, 가업을 물려 줄 자식이 오십 줄에 들어서 있은들 마음이 놓일 일은 아니리라. 하물며 삼십도 못 된 자식에게 기울어가는 가산을 맡기고 떠나는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그래서 더욱 우리 민족의 현재와 미래 상황이 가련하고 딱하다는 것. 그것이 바로 과거 ‘스물일곱의 아프면서도 영광스런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내 판단이다. 그동안 바짝 조였던 정신을 좀 느슨하게 풀어놓은 채 유유자적하고 싶었는데, 다 늙은 지금 새삼 정신무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문득 슬퍼짐을 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