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9.12.07 송년은 고향친구들과... 2
  2. 2019.03.02 친구 신연식을 보내며 3
  3. 2013.02.24 장학사 유감
카테고리 없음2019. 12. 7. 22:43

어딘가에 내 모습도 있을 것 같은데...

                                                                                                                                                                                                                             백규

 

    1968년도에 초등학교[그 때는 ‘국민학교’]를 졸업했으니, 끔찍하도록 긴 세월 '반세기'가 지났다. 국가적으로는 무장공비들이 떼거지로 내려와 준동했고, 내 고향의 경우 서해바다를 통해 들어온 간첩들이 사람을 죽이고 도망가던 시절이었다. 이런 경험들로 막바지 베이비부머 세대에 속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공산주의 혐오증’이 확실히 자리 잡게 되었다. 북괴[그 때는 북한을 이렇게 불렀다]가 살포한 ‘삐라들’을 다발로 주워 학교에 제출하는 것도 등하교 길에 우리가 수행하던 일과들 중 하나였다. 매우 흉흉하던 시절이었다.

 

    그 춥고 암울한 나날들을 보내다가 열네살에 고향을 떠나 48년째 타향살이를 하는 중이다. 그간 먹고 사는 최소한의 문제는 해결했으나, 여전히 ‘행복한 국민’은 아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토착 좌익들이 정치인이나 사회운동가의 탈을 쓰고 백주 대낮에 활보하고 있으니’, 불안하긴 반세기 전보다 오히려 더하다. 그간 매일 사는 것이 ‘살얼음판’이었고, 불판 위의 콩 튀듯 늘 바빴다. 흡사 ‘오늘 이것을 못 끝내면 내일이 없다’는 듯, 바쁜 학구의 세월을 살아왔지만, 지금 생각하면 회한만 가득할 뿐 잡히는 게 없다.

 

    그러다가 서너 해 전부터 초등학교 동무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나처럼 코를 찔찔 흘리며 핏기 없는 얼굴에 오들오들 떨며 용케도 유년기의 여울을 건넌 그들이었다. 중간에라도 만났더라면,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그들의 ‘청・장년 시절’을 볼 수 있었을 테지만, 다 늙어 만난 우리 모두의 얼굴에서는 이미 기름기가 빠진 지 오래였다. 그들은 내 거울이니, 나 또한 그들의 거울이리라.

    그래도 좋기만 하다. 지금의 모습에서 옛날 그들의 모습을 찾아내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더욱 좋은 것은 우리 모두 그다지 ‘옛날의 어두운 추억들’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옛날의 추위와 배고픔은 옷이 부실했고 먹거리가 충분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누군들 풍족하게 지냈으랴만, 내 고향은 상대적으로 더했다. 내겐 그런 체험들이 ‘유년기의 상흔’으로 남아 있고, 아마 내 친구들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서로 그런 상처들을 들추어 내지 않고 보듬어 주려는 ‘고운 심성들’을 지니고 있다.

 

***

 

    한 달 전부터 송년회 연락이 전해져 왔다. 인천이라? 가야지! 반복해서 SNS에 뜨는 집행부의 공지와 유혹의 문구들이 내 메마른 가슴을 따스하게 했다. 그러나 날짜가 닥치면서 정말로 부득이한 사정이 생겼다. 전날 밤 잠을 설치며 고민하다가 이른 아침 ‘몸 대신 마음만’ 가기로 했다. SNS에 불참의 댓글을 다는 내 손이 한없이 느려지기만 했다.

    친구들이 보낸 유혹의 글들 가운데 ‘우리의 만남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있을 수 있을까?’라는 협박조의 호소가 유난히 내 마음에 와 닿았다. 나이가 이쯤 되고 보면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식들 가운데 ‘부음’이 많은데, 그 친구는 그걸 떠올렸으리라. 그렇다. 40대까지만 해도 죽음은 나와 거리가 먼 일인 줄로만 알았다. 50대에 들어서자 주변에서 날아오는 부음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50대를 졸업하면서는 부쩍 잦아졌다. 그러는 사이 나도 고향친구들의 얼굴이 몹시 보고싶어졌다. 내 얼굴이 비치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면서 깔깔 웃다보면 마음속의 찌꺼기가 모두 씻겨 내려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품을 떠나고 하나씩 둘씩 가진 것들을 내려놓기 시작하는 나이 대가 바로 ‘6학년’이다. 6학년에 들어서면 재산도 명성도 학벌도 몸만 무겁게 할 뿐,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대자연을 찾아 그간 몸과 마음에 낀 녹을 벗겨내고 1년에 한 번씩이라도 어릴 적 고향의 친구들을 만나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그들의 얼굴에 비치는 내 모습을 확인하는 것. 그보다 더 귀하고 즐거운 일이 어디에 있으랴. 올해 친구들과의 해후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니, 지루한 1년을 또 다시 어떻게 기다린단 말인가.

 

    친구들, 1년 동안 부디 건강히들 지내시게!!!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9. 3. 2. 01:14

친구 신연식을 보내며

 

 

                                                                                                                                 조규익

 

                                                                           

 

 

 

 

 

 

 

친구 신연식이 떠났다. 15년 해직으로 고통 받고, 10년을 병마와 싸우던 그는 결국 병마의 끈질긴 공격으로 이승에의 집착을 내려놓고 말았다. 그리고 영원한 안식의 길을 떠났다. 그의 얼굴은 편안했고, 막바지에 그가 남겼다는 글은 평소 그의 말처럼 담담했다.

장례식장에 내걸려 추도객들을 맞이하던 그의 영정은 오늘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끝내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무언의 말로 자신의 속내를 전하고, 다시 긴 침묵에 잠긴 것이다.

 

그와 나는 시골 친구다. 살던 마을도 '국민학교'도 달랐으나, 각자 졸업 후 당시 중학과정을 가르치던 계도농축기술학교에서 만났다. , ‘똘망하고공부 잘하던 그였다. 형과 두 누이들 밑에서 자란 막둥이여서 그랬을까. 시골 아이 답지 않게 준수한 용모에 입성도 깨끗하였다. 졸업 후 그는 서울의 명문고에 들어가 졸업 후 연세대로 진학했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유능한 국어교사가 되었다. 몇 년 동안 교사로 봉직하던 그는 교육현장의 부조리에 항거하기 시작했다. 후일 전교조로 확대정착된 참교육 운동은 그를 중심으로 몇몇 열혈 교사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뜻을 굽히지 않던 그는 그 일로 결국 해직의 독배를 마셨다. 그로부터 15년은 형극(荊棘)의 세월이었다. 생각해보라. 생활인의 입장에서 직장으로부터 쫓겨나 15년을 버티며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는 가족들의 눈망울을 외면하기가 어찌 쉬웠겠는가. 무엇보다 참교육이 사라지고 있는 교육현장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그의 정신적 고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는 해직의 고통을 극복해야 했고, 교육현장의 부조리들과 싸워야 했다. 그래서 그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의 향년은 63. 공자 말대로 30이 입지(立志)의 나이라면, 그 후 불혹(不惑)-지천명(知天命)-이순(耳順)’은 송두리째 투쟁과 고난으로 일관한 시간대였다. 교육현장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사회의 이데올로기 대결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사회갈등에 대해서도 열변을 토하기 일쑤였다. '동지'들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그 쪽 일꾼들과 민족의 미래를 논의하고 돌아온 일은 훈장처럼 빛나는 그의 이력이었다.

 

그 강고한 투쟁들이 병을 불러 왔으리라. 교단 복직 후 몇 차례의 수술과 투병을 거치면서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얻은 것은 물론이다. 정년을 맞은 뒤에도 끈질긴 투병생활을 지속해왔으나, 극성스런 병마는 그의 온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고, 결국 그는 또렷한 정신 속에 이승을 떠난 것이다.

 

 자그마한 단지 하나에 담긴 그의 유골이 양지 바른 선산의 납골묘에 안치됨으로써, 그와 우리는 유명(幽明)으로 길을 달리 하게 되었다. 그가 잠든 납골묘 밑으로는 어린 시절 드나들던 신작로가 있었고, 그 앞으로 물이 담긴 서너 마지기의 논이 있었다. 논을 보호하고 서 있는 산 너머에는 신두리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그 발치를 핥아보려 끊임없이 들고나는 파도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

 

내 친구 연식아, 이제 투쟁의 검(劍)을 내려놓아라. 그리고 백사장의 맹꽁이들과 달랑게들, 파도의 하얀 포말들을 벗 삼아, 그간 잊고 지내던 동심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니? 물 드는 시각이면 한 바구니 그득 굴뻑들을 담아 오시던 어머니를 동구 밖에서 맞아 손잡고 돌아오는 삶을 새로이 시작해 보는 게 어떻겠니?

부디 고통 없는 그곳에서 편안하고 행복한 '또 하나의 영원한 삶'을 누리기 바라며, 네가 없는 허전함을 통곡으로 메워본다!ㅠㅠ

 

2019년 3월 1일

 

 

                 친구 백규, 삼가 통곡하며 씀

 

 

 

*그가 며칠 전 친구들에게 썼다는 고별의 인사말 가운데 한 부분을 여기에 옮겨 놓습니다.

 

이승을 떠날 날이 임박했다는 몸의 신호를 받으며, 여러분께 작별인사 겸 몇 마디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병마가 온몸을 갉아먹어 혹 기회를 놓치면 작별의 인사조차 남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제 몸의 질병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암으로 더 이상 치료 방법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또 한 가지는 폐기종으로 이 또한 현대의학으로는 회복 불가능한 질환이지요. 3주 전부터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 이제 떠날 날이 임박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어요.

제 몸이 갈수록 살아있는 사람들의 짐이 되어 가는 걸 지켜보면서,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음이 슬퍼지는군요. 매 순간이 고통이었습니다. 의학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데, 끝을 향해 가는 몸을 지켜봐야 하는 것은 더욱 참을 수 없는 고통이군요. 갈수록 가빠지는 호흡과 기침, 움직일 수 없는 현실 또한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나도 할 수 없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삶을 연장해가는 현실은 참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넋두리가 길었군요. 여러분과 함께 한 그동안의 세월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시간대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교단에 있는 동안 매년 첫 시간 수업은 인연이었습니다. 살면서 부딪치는 인과 연이 내 삶 모두를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 벗님들과의 인연은 내 생애의 행운 그 자체였습니다. 다시 한 번 크게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까지 저를 세워 주신 벗님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욱 애써 주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부디 행복하십시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2. 24. 11:18

                        *1968년도에 찍은 필자의 방갈국민학교 졸업기념 사진

 

 

장학사 유감


                                                                                                                                                          백규

#60년대 중반.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궁벽한 시골의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한 학기에 한 두 번씩 조용한 학교가 뒤집어질 때가 있었다. 바로 장학사가 ‘뜨는’ 때였다. 그 옛날 암행어사는 예고도 없이 뜨는 ‘무서운’ 존재였지만, 당시 장학사는 ‘예고하고 뜨는’ 암행어사였다. 차라리 예고 없이 뜨면 마음이라도 편하련만, 미리 예고를 하고 뜨는 바람에 흡사 ‘날짜 받아 놓은 사형수’처럼, ‘뜨거운 여름 날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처럼, 모두들 불안하고 어수선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교장, 교감 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선생님들이 장학사 왕림 일주일 전부터 우왕좌왕하며 코흘리개 아이들을 닦달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창틀은 닦을수록 칠 부스러기들만 묻어 나왔고, 더덕더덕 때 낀 4면의 벽과 군데군데 못이 빠지고 뒤틀려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교실 바닥의 널빤지들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늘 습기와 지독한 냄새에 쩐 재래식 화장실, 그곳을 무시로 드나드는 강아지만한 시궁쥐들은 참으로 처치 곤란이었다. 무심한 시간은 흘러 장학사님이 왕림하시는 날. 늙으신 교장 선생님과 모든 선생님들, 버짐 핀 얼굴에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두 줄기 콧물을 훔쳐내는 한편, 덕지덕지 때 낀 손들을 숨기느라 늘 뒷짐을 져야했던 우리들은 길게 도열하여 ‘암행어사보다 무서운 장학사님’을 영접하곤 했다. ‘어사 출도’의 결과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장학사가 돌아가고 난 교정은 또 다음번의 ‘어사 출도’가 있기 전까지 고요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70년대 후반의 어느 해 3월. 사범대학을 갓 졸업한 나는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 병아리 교사로 부임했다. 유신 정권이 막바지로 접어 든 시기였다. 부임 후 두어 달이나 지났을까. 장학사가 온다고 학교 전체가 난리가 난 듯 했다. 그 모습이 초등학교 학동시절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청소는 물론이고 각 분장업무 별 공문 정리, 수업지도안 보완 등 어수선한 두어 주를 보낸 뒤 장학사를 맞았다. 그는 젊어 보였다. 꼭 다문 입술이 단정했고, 말도 깍두기처럼 각이 져 있었다. 교감 이하 전 교사가 교무실을 가득 메웠고, 장학사는 맨 앞 반 층 높은 자리에 제왕처럼 앉아 전체 교사들을 내려다보는 자세로 앉았다. ‘고압적’이라는 말의 뜻을 눈앞에서 깨닫는 순간이었다. 두려움과 긴장으로 팽팽해진 교감과 교사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 시각쯤 교장은 교장실에 앉아 좌불안석이었을 것이다. 물 끼얹은 듯 좌중은 고요했다. 장학사 손에는 교사들의 명단이 들려 있었다. 갑자기 장학사가 “○○○선생!”하고 불렀다. “네!”하고 일어나 부동자세로 선 그 교사에게 장학사는 “이 학교의 학교운영방침과 교훈을 말씀하고 설명해 보시오!”라고 물었다. 그 교사는 교훈은 그런대로 말했으나 학교운영방침은 생소했는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도 가슴이 덜컥했다. 교사라면 학교운영방침 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 순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낮고 음침하면서도 깍두기 같은 질타가 장학사의 입에서 튀어나왔고, 그 교사는 사색이 되어 있었다. 장학사는 다른 교사 두 명을 호명하여 ‘수업지도안’을 갖고 나오라 했다. 대충 한 두 페이지를 넘겨보던 그는 장황하게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영명하신’ 장학사였다. 교사들이 힘들여 작성했을 지도안을 그 짧은 순간에 어찌 그리도 ‘당당하게’ 짚어낼 수 있단 말인가. 자연히 장학사의 말 가운데 칭찬보다는 질타, 훈계가 압도적이었다. 흡사 그는 학교의 약점을 잡아 교사들을 겁주려고 찾아 온, 일종의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초등학교 시절 형성된 장학사의 이미지가 교사가 된 후에도 그대로일 줄은 모르고 있던 나였다. 참으로 무서운 것이 장학사란 직책의 고압적인 분위기였다.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이유로 교단을 떠났지만, ‘장학사-교장-교감-부장’ 등 교육계의 고압적 관료시스템이 주는 불만과 좌절도 크게 작용했음을 요즘 들어 더 깨닫게 된다.

#그 후 장학사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게 된 것은 순박하고 성실한 내 친구들이 장학사, 장학관 등으로 진출하는 것을 보면서였다. “아, 저런 친구들이 장학사의 계급장을 달고 일선학교에 나가 병아리 같은 학동들과 순진한 선생님들 앞에서 목에 힘을 주었던 것이로구나!”라는 깨달음이 오면서 장학사에 대한 두려움을 비로소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군사정권 시절부터 장학사나 장학관은 국가 권력의 대행자쯤으로 자처하며 교직사회를 지배해 온 게 아닐까.

#최근 충남 교육청의 ‘장학사 임용시험 비리’가 불거지면서 그간 나를 지배해왔던 장학사들의 정체 상당 부분이 드러나고 말았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런 비리가 충남 교육계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한다. 교육계도 사람 사는 세상의 한 부분일 뿐이다. 교사도 월급 받아 가정을 꾸리는 생활인이고, 남들보다 잘 살고 싶고 높은 자리에 앉고 싶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일 뿐이다. 욕망의 도가니에서 아귀다툼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교사들에게만 욕망을 버릴 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교사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과 반목도 다른 공동체 못지않다는 사실을 교직에 몸담고 있는 친구들에게 듣는다. 물색 모르는 사람들은 ‘교사들 사이에 무슨 갈등과 반목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묻게 된다. 다른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교직사회도 본질적으로 ‘계급’에 의해 지탱되는 질서를 갖고 있다. 지위의 고하에 의해 형성되는 계급은 ‘재화(財貨) 획득의 차등’을 결정한다. 교사 또한 물질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으로 통용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이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들 동료 교사보다 높아지려는 시도를 하지 않겠는가. 그런 과정에서 타고난 재주와 후천적인 노력보다 쉬운 것이 ‘부정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이고, 결국 위아래 할 것 없이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아름답던 학창시절의 추억과 미래세대의 꿈이 오롯이 보존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교육계의 비리가 ‘여기서 끝!’이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불거진 상처는 예리한 칼로 정확하게 도려내야 할 것이다. 고름이나 암종(癌腫)의 한 부분이라도 남는다면, 조만간 그게 커져 또 다시 더 큰 칼을 대야 할 비극이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학사 선발 비리’를 보면서 참으로 뒤숭숭해지고 슬퍼지는 요즈음이다. <2013. 2. 23.>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