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록 - 일반2010. 5. 23. 15:57

<제53회 국어국문학 전국학술대회>

 

 

○ 일시 및 장소: 2010년 5월 28일(금)∼29일(토),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 학술대회 주제: 세계화 시대의 국어국문학

 

 

■ 등록 및 개회(5월 28일(금) 1:00∼1:30)장소: 인문대 소강당

1:00 등록

1:30∼1:50 개회 및 축사

 

 

■ 기획 ․ 기조 발표(5월 28일(금) 1:50∼5:50)사회: 노철(전남대)

1:50∼2:40기조발표

문학 장의 변동과 문학 관념의 변화발표: 김흥규(고려대)

 

2:50∼5:00기획발표

2:50∼3:20세계화 시대에 국어 정책이 나갈 방향발표: 권재일(국립국어원)

토론: 임지룡(경북대)

3:20∼3:50지역문학과 세계문학의 좌표발표: 윤여탁(서울대)

토론: 김형중(조선대)

4:00∼4:30세계화 시대의 (한)국어교육발표: 이삼형(한양대)

토론: 김정숙(고려대)

4:30∼5:00세계화 시대의 한국어교육학 연구의 동향과 전망발표: 강현화(연세대)

토론: 이미혜(이화여대)

5:10∼5:50종합토론좌장: 송효섭(서강대)

6:00∼6:30총회

7:00∼만찬

 

 

■ 분과별 일반논문 발표(5월 29일(토) 9:40∼1:10)

 

9:10∼9:40등록

 

제1 분과 국어학(장소: 인문대 1호관 108)사회: 이양혜(부산외대)

9:40∼10:20개념적 은유, 혼성공간 그리고 합성어발표: 김진해(경희대)

토론: 윤석민(전북대)

10:20∼11:00《易言諺解》의 어휘 연구 발표: 이병기(한림대)

토론: 양영희(전남대)

11:10∼11:50 명사 연결 구성에서 조사 '의'의 사용양상발표: 이영제(고려대)

토론: 황선엽(성신여대)

11:50∼12:30‘ㅿ’의 음운론적 성격 이해를 위한 고찰 발표: 이준환(성균관대)

토론: 이진호(전남대)

 

 

제2 분과 고전문학 (장소: 인문대 1호관 103)사회: 이형대(고려대)

9:40∼10:20미륵과 석가의 대결 신화소의 세계적 분포와 변이발표: 김헌선(경기대)

토론: 나경수(전남대)

10:20∼11:00한국고전시가의 영어 번역의 양상과 문제점발표: 임주탁(부산대)

토론: 로버트 파우저(서울대)

11:10∼11:50조선후기의 自挽詩발표: 임준철(조선대)

토론: 이승수(경희대)

11:50∼12:30조선 후기 소설에 드러난 중국 인식발표: 임치균(한국학중앙연구원)

토론: 정길수(조선대)

12:30∼1:10계봉우 ‘조선문학사’의 의미와 가치발표: 조규익(숭실대)

토론: 강상순(고려대)

 

 

제3 분과 현대문학(장소: 인문대 1호관 학술회의실)사회: 최병우(강릉원주대)

9:40∼10:20일상인의 영웅화와 영상 전략발표: 강정구(경희대)

토론: 김미정(동아대)

10:20∼11:00여성문학의 세계성 - 박경리와 박완서 연구발표: 김은경(홍익대)

토론: 최현주(순천대)

11:10∼11:50김학철의 전쟁문화심리와 소설세계발표: 리광일(연변대)

토론: 변화영(전북대)

11:50∼12:30현대문학 연구의 세계화 영역발표: 박태일(경남대)

토론: 박윤우(서경대)

12:30∼1:10국외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한국, 그리고 ‘한국적인 것’의 재구성 발표: 한순미(전남대)

토론: 이미림(강릉원주대)

 

 

제4 분과 어문교육(장소: 인문대 1호관 이을호강의실)사회: 서혁(이화여대)

9:40∼10:20세계화 시대 문학교육의 방향발표: 김중신(수원대)

토론: 임경순(한국외대)

10:20∼11:00세계화 시대 화법교육의 방향발표: 임칠성(전남대)

토론: 전은주(부산대)

11:10∼11:50세계화 시대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육의 현황과 전망발표: 김중섭(경희대)

토론: 조항록(상명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9. 29. 15:40
 

다시 만난 계 니꼴라이


다시 찾은 알마틔. 가을답게 날씨가 청명했고, 뜨겁던 여름철 가까이 보이던 하얀 천산도 아득히 멀었다. 바쁜 일정을 대충 소화한 다음 니꼴라이를 만났다. 그는 자신의 투박한 차를 몰고 숙소 앞으로 와주었다. 김병학 시인과 함께 동승하여 40분 넘게 도심 외곽으로 달리니 천산이 손에 만질 듯 가까운 언덕받이, 진녹색 수풀 속에 그의 집은 조용히 숨어 있었다. 그의 형형한 눈빛만큼이나 꾸밈없는 다차가 이채로웠다. 우리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있던 그의 부인 역시 조용한 고려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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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봉우 선생>

마주 앉기만 하면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니꼴라이. 그의 할아버지가 바로 계몽 중심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북우(北愚) 계봉우(桂奉瑀) 선생이다. 북우 선생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맏아드님은 35세에 사망했고, 둘째 아드님은 2남2녀를 두었는데, 그 중 막내가 니꼴라이다. 니꼴라이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숙부인 계학림(桂學林) 선생이었다. 니꼴라이는 어린 시절부터 숙부로부터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셨다”는 말씀을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크즐오르다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그는 알마틔 체육대학에서 스포츠 지도자 과정을 이수했다. 1985년 모스크바의 체육대학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91년 스포츠 교육에 관한 중요한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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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실에서 니꼴라이>

 그 후 대학 체육학과의 교수로 재직하던 중 민족의 존재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깨달음을 얻고 계몽운동에 몰두하게 되었다. 말을 잃어버리면 문화도 역사도 정신도 모두 잃어버린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고려인들이 고려 말을 회복하는 순간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민족의 정체성을 상실한다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지위가 높아도 ‘떠돌이’를 면할 수 없고, 이민족으로부터 멸시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고려인들의 혼을 일깨우기 위한 ‘신문’의 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가지(無價紙)로 배포하여 고려인들로 하여금 민족 정체성 회복의 열망을 갖도록 하겠다는 것이 그의 포부였다.

 그는 자신만만했다. 지금 고려인 사회가 수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나, 타고난 근면성과 명민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한 번 자각의 불꽃만 댕겨 준다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를 것이라는 믿음을 그는 갖고 있었다. 그러나 찬바람이 드나드는 허름한 다차의 거실에서 노트북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그의 어깨가 무거워 보이는 것은 그의 열망에 비해 고려인 사회의 현실이 너무 열악하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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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꼴라이 부부와 함께> 


 집 앞의 과수밭에서 갓 따온 사과를 씹으며 우리의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고, 회색빛 고려인 사회의 미래는 일순 희망의 분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2009. 9. 28.>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9. 2. 03:07


동아일보 기사보기

고려인 ‘계 니콜라이’의 21세기 민족운동


알마티에서 만난 50대의 계(桂) 니콜라이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에게 뚜렷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로서 한일강제합방 뒤 북간도로 망명하여 이동휘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 계봉우(桂奉瑀·1880∼1959)의 손자다. 현재 독립유공자 후손회 회장인 그가 보기에 중앙아시아의 한민족 공동체는 이미 와해됐다고 할 만큼 이 지역 고려인에게 민족정신의 상실은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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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농장에 서 있는 니꼴라이 선생>

한민족의 표지(標識)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이 말과 글이다. 말과 글을 잃은 세대 사이에 역사나 문화가 이어질 리 없다. 말과 역사를 잃은 경우, 본질적인 의미에서 민족공동체의 일원일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말과 글이 민족 정체성 회복의 관건이라는 계 니콜라이의 관점은 해외동포의 교육이나 계몽에 관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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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장을 배경으로 서 있는 백규와 니꼴라이 선생>

많은 고려인처럼 ‘편하게 잘 먹고 잘살아 오다가’ 나이 50이 넘어서야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우쳤다는 그는 지배자 일본에 붙어 편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바쳐 투쟁한 독립투사의 삶을 보면서 자신의 관점을 바꿨다고 했다. 요즈음도 한국어교육원에 나가 우리말을 익히고 있을 만큼 말과 글에 거는 그의 기대는 크다. 무엇보다 자금 마련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박봉의 대학교수 직을 접고 농장을 경영하며 고려인에게 우리말과 역사를 보급하는 일에 나선 그의 삶은 계몽 중심의 독립운동을 주도해 온 조부의 행적과 흡사하다.

고려인은 사실 오랫동안 가족과 소비에트 국가만을 위해 일했다. 모국어 학교의 폐쇄를 강요당하면서도 변변히 저항 한번 못했다. 모국어 극장이나 신문이 지리멸렬해지는데도 손 한번 써보지 못하는 것이 고려인이다. 모국어가 탄압받고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한 상황에서 그 언어로 쓰인 모국의 역사를 전승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활동 모두가 ‘민족을 위한 일’이라면 언어의 상실과 함께 사실상 민족운동은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점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고려인 단체의 현실인식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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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인들의 미래에 대하여 담론하고 있는 세 사람. 좌로부터 김병학 시인, 백규, 니꼴라이 선생>

그는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를 개척하지 못하고 외부의 도전에 너무 쉽게 자신을 접어온 원인으로 ‘노예근성’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잘 먹고 잘살아 온’ 그간의 삶은 철저한 순응의 역사였다. 구소련의 동화정책에 맞서지는 못했다 해도 최소한 민족의 정신을 지키려는 가정 단위의 개별적 노력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았느냐는 그의 주장을 순진한 생각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역경 속에서도 민족공동체의 미래를 내다보며 현실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선각자의 고난을 그는 매 순간 떠올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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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책에 서명하고 있는 니꼴라이 선생>

이런 일에 착수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새로운 한글 신문을 제작하겠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다. 우리 민족의 언어 문화 관습 정보 등 모든 것을 묶어 무가지(無價紙)로 배포하겠다고 한다. 그는 5, 6년간만 고려인 가정에서 우리의 말이나 역사에 관한 담론이 오갈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민족에 대한 인식이나 관점도 살아날 수 있다고 본다. 잘 먹고 잘사는 차원을 벗어나 가치 있는 삶을 모색할 때임을 강조하는 그가 있으므로 고려인 사회엔 아직도 희망이 있다.

조규익 숭실대 국문과 교수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