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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08 시간강사와 지식사회의 그늘 1
  2. 2008.12.26 우리 지식사회의 천박성
글 - 칼럼/단상2010. 11. 8. 11:17

시간강사와 지식사회의 그늘


강의·연구로 학문분야 두축 이끌어… 이젠 국가·사회가 처우개선 나서야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고 신자유주의가 삶의 원리로 자리 잡을수록 사회의 소외지대가 넓어지고 있는 것은 '비인간화'로 치닫는 우리 사회의 암울한 현실이다. 모든 분야에서 '만능의 열쇠'라도 되는 듯 경쟁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지만, 경쟁에서 도태되는 다수 구성원들을 철저히 외면하는 비정함 또한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다. 더구나 경쟁의 필수 전제조건이라 할 '공정함'의 결여에 대하여 애써 눈 감고 있는 의식의 원시성은 언필칭 '선진국 진입'을 외치는 우리 사회의 '아킬레스 건'일 수밖에 없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에도 최근에야 공론화되기 시작한 대학 시간강사 문제는 소외와 관련된 우리 시대의 약점들이 골고루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적 위기의 뇌관이라 할 수 있다. 매주 정해진 시간만 강의하고 일정액수의 시간당 강의료를 받는, 전임 교수 아닌 지식인들이 바로 시간강사다. 말하자면 그들은 노동 현장의 일용직 근로자들처럼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존재들이다. 일용직 근로자들이 새벽의 노동시장에서 선택되지 않으면 그날 하루 일당을 벌 수 없듯이, 강사들은 학기 초에 대학 혹은 학과로부터 선택되지 않으면 그 학기의 수입은 없다. 하루와 한 학기의 차이가 있을 뿐 일용직 근로자와 강사는 본질적으로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일용직 근로자들의 삶을 국가가 책임질 수 없듯이 학기 단위로 살림을 꾸려나갈 강사들의 삶 또한 국가가 책임질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형식 논리로 친다면야 그런 말도 나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상 자체가 정책의 오류로부터 비롯되었거나, 적절한 방안만 강구하면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라면 국가나 사회가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 대학이나 지식사회 혹은 학자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대략적인 방향은 국가의 학문정책에 포함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 정부가 그런 학문정책을 세우기 위해 선진국 대학들의 제도를 벤치마킹해 왔다면 그런 나라들이 강사들에 대하여 어떤 처우를 하고 있는지 정도는 파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강사를 포함한 국가의 인재들을 세밀히 관리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매우 소망스러운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학문진작'이란 명분으로 쏟아부은 천문학적 재원은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는가, 그런 정책들은 과연 그렇게 다급했으며 합목적적이었는지 등을 돌이켜 본다면, 그런 일들이 '강사들의 현안해결'보다 우선적인 것이었는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학문정책의 중요도나 시급성에서 선후관계를 먼저 고려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상처가 곪아 터져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문제점을 지적하는 지금에서야 겨우 대책을 내놓는 관련부서의 무심함이 답답할 뿐이다. 현실로 닥친 생활고와 암담한 미래 때문에 목숨을 끊는 강사들이 속출하고, 3년이 넘도록 천막 속에서 농성하는 강사를 보고 나서야 이 땅의 교육 당국은 겨우 움직이는 시늉 정도를 보여 주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대책 또한 '격화소양(隔靴搔양)'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으니, 더욱 답답하다.

 

강사는 누구인가. 대학, 대학원을 거치면서 오랜 기간 학문을 연마해온 해당 분야의 누구 못지않은 전문가들이면서, 지금까지 그들은 전문성이나 실력보다는 '시간강사'라는 '품위 없는 용어'로 통칭되기 일쑤였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대부분의 전임교수들이 강사를 거친 사람들이며, 현재의 강사들은 전임교수로 대학에 입성할 가능성이 있는 지식인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현재 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쉽게 외면해 왔는지도 모른다. '선배들이 그래 왔듯이 조금만 고생하면 전임의 대열에 합류할 것 아닌가'라는 속 편한 계산으로 우리 사회는 그들의 요구를 철저히 뒷전으로 미루어 온 것인지도 모른다. 40%에 육박하는 대학 강의를 이들이 맡고 있으며, 모든 학회들에 집행부 혹은 회원으로 참여하여 학회를 굴러가게 하는 엔진 역할을 이들이 맡고 있다. 강의와 연구라는 한국 지식사회의 두 축을 감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기약도 없는 '교수사회에 진입할 날'을 무작정 기다리며 참고 있으라는 말만 건넬 수는 없지 않은가. 모두가 힘을 합쳐 더 늦기 전에 이들부터 구해야 한다.

조규익(숭실대 인문대 학장/국문과 교수)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08. 12. 26. 15:34

우리 지식사회의 천박성
 
                                                  조규익(숭실대 교수)

                                                                                            

최근 고려대 경영대의 이미지광고로 이른바 ‘도토리 키 재기 담론’이 촉발되었고, 광고에서 상대로 지목된 서울대나 아예 거론도 되지 않은 연세대의 당사자들이 소극적으로나마 반응하면서 우리 지식사회의 천박성은 표면화 되고 있다.
 왜 이 시기에 이런 문제가 거론되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의식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을까.
 생물이 존재하는 곳에서 경쟁은 생존의 필수적인 방식이고, 경쟁이 배제된 집단이나 경쟁에서 밀려난 집단은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사회의 어느 분야보다 심한 경쟁의 복판에 놓여있는 것이 대학사회다.
 인간이나 동물은 생존에 충분한 자원이 확보된 공간에서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충분한 자원이 확보된 경우에는 경쟁보다 공존의 원리가 더 크게 작용한다. 그러나 자원이 고갈되어 같은 것을 추구하는 무리들이 공존할 수 없을 경우 경쟁이 심화되고, 결국 힘이 약한 존재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인구 증가의 둔화로 취학아동들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대학 진학인구 또한 급감하고 있는 것이 최근의 추세다. 대학 진학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은 그 집단 속의 우수자원도 같은 비례로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고, 지금까지 우수자원들을 독점 혹은 균점해오던 세칭 일류대학들은 ‘피나는’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경쟁이 심화될 경우 페어플레이보다는 좀 더 자극적인 방법이 동원되기 마련이다.
 문제는 기성의 사회 통념을 넘어서는 데서 그 자극성이 기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번의 고려대 경영대 광고는 ‘점잖음’을 바탕으로 하던 기존 지식사회의 통념을 깼다고 할 수 있는데, ‘자원고갈’의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되어있는 생존방식의 새로운 단초쯤으로 보아야 한다. 먹이가 줄어들면서 이빨을 드러내고 싸움을 벌이는 사바나의 동물세계나 경기후퇴로 시장이 줄어들면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시장의 영역과는 달라야 하는 것이 지식사회다.
 지식의 생산과 응용에 종사하는 지식노동자가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이 지식사회라면, 거기에 속한 구성원들은 지식의 세련성에 상응하는 도덕성과 질서의식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고등교육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지식인들이고, 인성의 도야는 고등교육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주장한 바와 같이, 지배계급에 의해 주어진 자본으로서의 지식을 민중문화의 고양에 사용할 것, 지식인 고유의 목적인 보편성이나 사상의 자유와 진리 등으로 인간의 미래를 전망할 것, 모든 권력에 대항하여 대중이 추구하는 역사적 목표의 수호자가 될 것 등은 이 시대 지식인들의 책무다.
 좋은 지식의 교육을 통해 인간사회에 기여할만한 인재를 키워내는 일이야말로 지식사회를 대표하는 대학들의 사명이다. 지식의 보편성 및 사상적 자유와 진리는 지식인 최고의 무기이고, 그것만이 인간의 긍정적인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을 압살하는, 잘못된 권력에 대항하여 인간사회를 수호할 수 있는 것도 지식의 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느냐에 대한 평가는 제3자가 하는 것이고, 그 평가에 따라 인재들이 모여드는 집단이 제대로 된 대학이다.
 ‘고만고만한’ 집단들 속에서 ‘너보다 내가 잘 났다’는 광고문구 하나로 인재들의 눈과 귀를 호릴 작정이었다면, 그 주체들은 이미 지식사회의 일원이길 포기해야 한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