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 8. 28. 20:40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나무들의 바다, 타이가(taiga)를 보았네!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2 

                                                                                              

                                                                                                                조규익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블라디보스톡의 금각만


전망대에서 러시아 모델 아가씨와


역사에서 바라본 철길


열차 침대칸에서 조갑상, 블라디미르 김


차창으로 내다 본 시베리아 산하


열차 객실에서


객실에서의 첫 파티


달리는 차창으로 내다 본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


잠시 열차에서 내려


열차 식당 칸에서의 점심상

 

 

724일 저녁 7. 블라디보스톡 역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실었다. 바리바리 채워 넣은 캐리어가 몸에 겨웠다. 때마침 퍼부어대는 소나기와, 바짝 닥쳐온 열차 출발시각에 온몸은 땀과 비로 흥건해졌다. 시간만 되면 무정하게 떠나버릴 것 같은 러시아 승무원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우리를 겁먹게 했다.

사람들의 아우성 속에 드높은 승차대를 올라서니 날씬한 아가씨 하나 조심조심 지날만한 통로가 몹시 비좁아 놀라웠고, 가까스로 찾아 들어간 4인용 객실의 협소함은 더욱 놀라웠다. 땀과 비에 흠뻑 젖은 옷이 온몸에 달라붙은 것도 모르고 가까스로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니, ‘~!’ 소리를 내며 열차가 움직였다. 출발 뒤 30분이나 지나야 에어컨이 가동된다는 말에 땀은 더 흘렀다.

비새고 바람 통하는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부려졌을 80년 전 고려인들의 고통을 맛보라는 하늘의 뜻이었을까. 때마침 퍼부은 소나기의 의미를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과연 우린 뭘 회상했어야 하는 걸까?

 

비와 땀으로 축축해진 옷가지들을 대충 벗어 침상 밑 작은 공간에 숨기고 나니, 이 속에서 열흘을 견뎌야 할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누거(陋居)이긴 하나 자유자재로 몸을 펼 수 있고, 옷을 벗어 빨래 바구니에 함부로 내던질 수 있으며, 땀 흐를 새 없이 씻어낼 수 있는 공간 속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고행의 공간을 함께 할 블라지미르 김(우즈베키스탄 거주/소설가레닌기치 전 편집국장), 조갑상(소설가/경성대학교 명예교수), 김병학(시인/전남대 연구원)’ 등 저마다 탁월한 스토리와 히스토리를 지닌 방원(房員)들의 얼굴에도 잠시 걱정이 흘렀다. 정말로 출발 후 30분이나 되어서야 에어컨이 가동되었고, 에어컨이 가동되고 십여 분이 지나서야 축축함이 가시기 시작했다.

사전 교육에서 누차 공지된 바와 같이 무엇보다 화장실과 씻을 물, 끼니 등에 관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모든 걸 그러려니!’하고 넘기라는 블라디보스톡 가이드 담양 댁의 말이 잊어서는 안 될 금과옥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방원들이 정들기 시작했고, 오고 가는 보드카와 사마르칸트 꼬냑의 향기 속에 열차 안의 삶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 넓은 땅이다. ‘유럽과 극동두 대륙에 걸치는 광활한 땅덩어리가 부러운 러시아였다. 1860년 북경조약으로 러시아가 차지하게 된 대초원 연해주. 태평양에 연하여 동방의 진주로 불려 온 천혜의 미항 블라디보스톡이 그 주도(州都)였다. 연해주를 벗어나면서 펼쳐지는 타이가(taiga)의 자작나무와 편백의 수해(樹海)가 심안(心眼)에 낀 티끌을 청소해주고, 몇 시간 만에 한 번씩 볼까말까 한 인가(人家)와 작은 마을들이 마음 한 구석에 작은 모닥불을 피워 올렸다. 이토록 드넓은 땅에 인구는 적으니, 무궁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나라가 바로 러시아 아닌가.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 우리가 카자흐스탄 열차로 갈아타야 하는 노보시비르스크까지 50개에 육박하는 수의 역들을 지나야 한다. 그 가운데 규모가 비교적 크거나 일정시간 정차하는 역들은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 우글로바야(Uglovaya), 우스리스크(Ussuriysk), 시비르쩨보(Sibirtsevo), 무치나야(Muchnaya), 스빠스크-다이니(Spassk-Dalny), 루지노(Ruzhino), 다이녜레젠스크(Dalnerechensk), 루쳬고르스크(Luchegorsk), 비낀(Bikin), 베아젬스카야(Vyazemskaya), 하바로프스크(Khabarovsk), 비레비잔(Birobidzhan), 오블루치에(Obluchye), 아르하라(Arkhara), 부레야(Bureya), 자빗따야(Zavitaya), 벨로고르스크(Belogorsk), 스바보드니(Svobodny), 레자나야(Ledyanaya), 슈마노브스까야(Shimanovskaya), 뜨그다(Tigda), 마다가치(Magdagachi), 스카보로지나(Skovorodino), 예로페이 파블로비치(Yerofei Pavlovich), 아마자르(Amazar), 모고차(Mogocha), 쳬르니셰브스키-자바이깔스키(Chernyshevsky-Zabaikalski), 까림스카야(Karaymskaya), 치따(Chita), 힐노크(Khilok), 페트로브스크 자바이칼스키(Petrovsk-Zabaykalsky), 울란우데(Ulan-Ude), 바이칼스크(Baykalsk), 슬루잔까(Slyudyanka), 이르쿠츠크(Irkutsk), 앙가르스크(Angarsk), 지마(Zima), 뚤른(Tulun), 니즈녜우진스크(Nizhneudinsk), 타이셰트(Tayshet), 레쇼티(Reshoti), 일란스카야(Ilanskaya), 깐스크-예니셰이스키(Kansk-Yeniseiski), 크라스노야르스크(Krasnoyarsk), 아친스크(Achinsk), 보고똘(Bogotol), 타이가(Taiga), 유르가(Yurga), 노보시비르스크(Novosibirsk) 등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무엇보다 끼릴 문자로 빽빽하게 적혀 있는 역명들의 생소함이 기를 질리게 했다.

 

10~20분씩 잠시 쉬어가는 역들의 앞마당엔 동네 아줌마들의 벼룩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루 두 끼씩이나 각자 해결해야 할 승객들에게 싱싱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아줌마들의 눈빛과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빵과 물고기, 야채와 과일, 꿀과 화분 등 다종 다량의 음식물들이 좌판에 제법 쌓여 있기도 하고 팔에 걸고 다니는 바구니에 그들먹하게 들어 있기도 했다. 아주 가끔씩은 잠시 정차되어 있는 열차 안으로 들어와 물건을 팔기도 하고, 중앙아시아로 넘어가는 길목에서는 환전상도 찾아와 돈을 바꾸라고 채근했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나무숲이 지나고, 약간 험한 산세가 나타나는가 했더니 큰 바다 같은 호수가 눈앞에 닥친다. 바이칼(Baykal)이었다!<계속>


열차에서 내다 본 시베리아 산간의 소도시


시베리아의 산간 마을


시베리아의 작은 마을


달리는 열차에서 내다 본 시베리아의 일몰


작은 역에서 내려 차장과 함께


하바로프스크 역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백규


하바로프스크 역에 내린 일행들


끝없는 길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8. 28. 13:30

달걀의 추억

 

                                            조규익

 

 


폐기되는 달걀들(사진은 연합뉴스)

   

이름도 생소한 살충제들로 닭띠 해인 올해 달걀이 수난이다. 지난해엔 조류독감으로 닭들이 살 처분되어 달걀과 닭고기가 동시에 품귀현상을 보이더니, 올해는 달걀 자체가 문제로 떠올랐다.

작년엔 산채로 비닐봉지에 담겨 구덩이에 매몰되는 닭들을 보며 한동안 밥맛을 잃기도 했다. 그런데 올해엔 달걀이 무더기로 깨어지며 땅에 묻히고 있다. A4용지 한 장 크기의 공간에서 제대로 앉거나 눕지도 못하며 먹고 알 낳는 일만 반복하는 닭들을 보라. 달걀 생산이 시원치 않은 노계(老鷄)나 폐계(廢鷄) 등은 헐값으로 삼계탕집이나 치킨 집으로 팔려나간다니! 생명을 대하는 인간의 잔인함. 그 끝이 어디인지 몰라 몹시 불편한 나날이다.

 

5, 60년대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 대부분은 닭에 대하여 비슷한 경험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우리 집도 제법 많은 닭들을 키웠다. 닭들은 대개 새벽에 일어나 큰 소리로 집안 식구들을 깨워놓곤 밖으로 나가 먹이활동을 했다. 오늘날의 우리는 스마트폰의 알람을 맞추고 잠이 들지만, 당시의 우리는 장닭의 우렁찬 소리에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동구 밖이 훤해지면 일단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는 게 장닭의 소임이다. 그러나 그 소리에 따라 일어나 보면 땅 위는 아직 어둠이 걷히기 전이었다. 그래도 몇 발짝 걷다보면 희끄무레 날이 밝기 시작한다. 그 때서야 뒷산의 참새들도 짹짹거리며 집 근처로 날아드는 것이었다. ‘새벽 형 인간으로 번역되는 얼리버드(early bird)’란 말이 어쩌면 닭의 부지런함에서 나온 말인지도 모르겠다.

밖에서 이슬에 젖어 꼼지락대는 벌레도 쪼아 먹고, 배추밭에 잠입하여 싱싱한 야채도 먹고, 익어가는 벼 알도 슬쩍슬쩍 훔쳐 먹는 게 그들의 오전 일과이고, 점심 무렵부터 오후 2~3시까지는 각자가 찜해 놓은 장소에서 알을 낳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나면 으레 바가지를 들고 집 주변 풀밭이나 짚 누리를 헤집고 다니며 달걀들을 수거해야 했다. 하루 수확물이 몇 개 안될 경우는 그냥 쌀독에 묻어두기도 하지만, 꽤 많은 날엔 왕겨를 담아놓은 섬에 차곡차곡 넣어 두었다.

학교에서 쓸 연필이나 도화지를 사기 위해 우리는 달걀 1~2개를 소중하게 들고 등교하기 일쑤였다. 학교 앞 송방’(그 때는 학교 앞 가게를 그렇게 불렀는데, 그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에서 돈 대신 달걀을 내는데, 달걀 시세에 따라 연필이나 도화지의 수량이 달라지곤 했다. 어른들은 매달 1자 들어가는 날(1/11/21/31)6자 들어가는 날(6/16/26)마다 면소재지에 서는 5일장으로 달걀 대여섯 줄(한 줄에 10개씩)을 꾸러미에 담아 장에 갖고 나가셨다. 달걀 값이 물건의 양과 질을 결정하는 건 아이들이나 어른들의 경우가 매 한가지였다.

 

그러니 계란을 먹는 것은 큰 호사였다. 계란은 특별한 경우에만 먹을 수 있는 특식이었다. 간혹 몸살이라도 앓고 나면 어머니는 으레 계란 하나를 깨서 내 밥 속에 숨겨주시곤 했다. 다른 식구들 눈치가 보여 미안하긴 했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느껴서 그랬는지, 금방 몸이 좋아지곤 했다. 닭을 잡거나 달걀을 먹는 건 잘해야 1년에 한두 번. 그만큼 닭과 달걀은 귀했다. 나는 그런 세월을 살았다. 요즘 아이들 젖 떨어지자마자 치킨을 달고 사는데, 참으로 격세지감을 갖게 하는 광경일 수밖에 없다.

 

오늘도 TV 화면에는 판을 뒤집어 계란을 쏟아내고 짓이기는 광경이 생생하게 방영되고 있다. 깨지는 계란보다 계란을 쏟아내는 사람들의 무표정함이 나를 더 답답하게 한다. 어떻게 해야 닭도 행복하고 사람도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마트의 계란 코너를 흡사 오물 피하듯 에둘러 가는 주부들을 보노라니, 먹거리로 행복해질 날이 언제쯤일지 눈앞이 캄캄하기만 하다.

 


달걀 꾸러미(사진은 Newsis)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8. 10. 16:33

  연해주에 찍힌 고려인들의 발자국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1

 

                                                                                         조규익                               

 


라즈돌노에 역사(정면)


라즈돌노에 역사(측면)


라즈돌노에 역사 내부(매표구)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 1년간 거주했던 집


표지판


고려인문화센터에서의 진혼문화제


고려인문화센터에서의 진혼문화제


아리랑가무단 단장 발레리아(오른쪽), 발렌찐


오딧세이 참가 명찰

 

 

고려인들 아니 고려인들의 문학을 학문적 대상으로 만난 지 10. 중국의 개방과 동시에 조선족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고, 미국에 체류하는 기회에 재미한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으며, 정말 우연한 기회에 구소련의 고려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다. 세상사 대부분은 필연을 내포한 우연의 소산이라고 하는데, 내가 고려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난 것도 어떤 필연적인 힘의 시킴이라 할 수 있을까.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이전까지를 주로 더듬는고전문학도로 살아오면서 잘못된 역사의 파생물이나 식민주의의 희생자들로만 생각하던 재외동포들을 만나면서 내 시야는 급격하게 넓어지기 시작했다. 왜 제 나라 땅에서 살지 못하고 뿌리 뽑힌 잡초 신세로 황량한 세상을 떠돌아 다녀야 했는지, 비록 황무지라 해도 뿌리 내리기가 어찌 그리도 어려웠으며, 이제 할아버지의 나라가 제법 먹고 살만하게 되었음에도 왜 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는 끝날 줄 모르는지 등등. 그간 품고 있던 여러 문제들을 풀어볼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19379월부터 12월까지 자행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고려인강제이주80주년기념사업회와 국제한민족재단이 마련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회상열차에 동승하게 된 것이다. 고려인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현지 고려인들 몇 분도 합류하게 되었다.

 

***

 

2017723일 아침 7. 인천공항 출국장에는 푸른 색 유니폼을 입은 80여명의 각계각층 희망 대장정대원들이 상기된 얼굴로 모여 있었다. 대한항공 KE981편으로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경. 7월 하순의 뜨거운 태양이 러시아 동진의 상징적 공간인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톡을 달구고 있었다.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을 지닌, 태평양 쪽 유일의 부동항(不凍港) 블라디보스톡은 식민시대 고려인들의 집거지 신한촌을 품고 있었다. 악랄한 식민통치를 피해 몰려든 공간. 그 분들이 이곳에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운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자신들의 고국, 자신들의 고향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비교적 안전한 이곳에서 일제와 싸울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 여장을 풀기 전 우리는 먼저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심이자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공간 우수리스크로 달렸다. 항일운동의 별 최재형 선생의 유택이 남아 있고, 고려인문화센터가 살아 움직이는 곳이 우수리스크였다. 가는 길에 강제이주 첫 출발역인 라즈돌노에(Razdol’noe)역을 잠시 보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톡역과 함께 수만의 고려인들이 짐짝처럼 열차에 실린 곳. 지금은 역사(驛舍)만 덩그러니 남은 그곳엔 겁에 질린 고려인들의 한숨과 비명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빙 둘러 수이푼(綏芬河, Suifun)강의 지류가 흐르고, 그 앞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철로가 놓여 있었으며, 그 철로를 짓누르며 엄청난 길이의 열차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驛舍)는 텅 비어 있었고, 매표소도 굳게 닫혀 그 날의 일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다. 18694, 처음으로 이주민 10가구가 정착하면서 이룩한 육성촌(六城村). 이제 살만하게 되었다고 안도하던 이들이 날 벼락같은 명령서 한 장에 마을 앞의 역사로 끌려나온 것이다 1937년9월 하순에 시작되어 12월까지 계속된 고려인 강제이주.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의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떠올리게 하는 정치적 폭행이자 인류사의 기록적인 만행이었다. '고려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하여 간첩행위를 벌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그러한 만행의 명분이었지만, 이면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스탈린의 공포감과 함께 자신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외모의 고려인에 대한 복합심리가 작용한 정치적 편견의 소산이었다. 탈식민 시대에 지향해야 할 노선을 식민시대의 유적으로부터 확인하고자 한 것이 함께 대장정에 나선 지식인들의 일치된 인식이었다. 역사 근처에 김정일의 생가가 있다거나, 1928년 7월 소련으로 망명한 포석 조명희(趙明熙, 1894~1938)가 교사로 활동하던 학교가 남아 있다는 등의 말도 들려 왔지만, 이번엔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무명의 고려인들만 생각하기로 했다.

 

 라즈돌노에 역으로부터 한참을 달려 우수리스크에 도착했고, 항일투사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4월까지 거주하던 주택에 들렀다. 몇 년 전 왔을 때와 달리, 리모델링 공사 중인 건물 자체는 물론 앞 뒤 진입로와 하수도 등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일제에 의해 원통하게 죽음을 당한 최재형 선생의 혼이 편안하게 머물 만큼 제대로 집을 다듬고 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장대 같은 러시아 인부들의 손놀림이 미덥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재형 선생의 뜻이 살아날 수 있을지 의문이어서 걱정스러웠다. 공사 중인 집안으로 들어서자 특이한 페치카를 비롯 넓지 않은 방들이 당시의 삶을 증언하듯 우리를 맞았다. 성공한 사업가로서 이 지역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선생의 유택은 거사 지역 하얼빈으로 떠나기 전 안중근 의사가 머물던 공간이기도 했다. 내년쯤이면 우선 선생의 유품과 자료들을 품은 의미있는 공간으로 재탄생될 것으로 보였다. 우리나라 정부에서 신경을 쓴 흔적은 외벽에 부착된 팻말("최재형의 집")이 유일했다. 과연 이 집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지 않고 독립운동가의 혼을 보존하고 후세들에게 우리의 민족혼을 깨우치는 표본으로 오롯이 남을 것인가. 

  

서둘러 그곳을 떠난 우리가 도착한 곳은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최재형 선생의 유택을 떠나 문화센터에 도착하기까지 버스로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큰 공연장과 유물 전시실 등이 새로 생겨 전체적으로 짜임새와 규모를 갖춘 것은 몇 년 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그곳에 '고려인을 위한 진혼'의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진혼제는 여러 예술장르들로 짜인 의식이었다. 김 발레리아 부부가 이끄는 아리랑가무단이 무대예술을 통해 러시아에 뿌리 내린 민족미학을 보여주었다. 꽃 같은 소녀들의 노래와 춤,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의 흘러간 노래들이 우리 시대 민족문화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었다. 고려인들이 이 사회에서 식민시대 타자(他者)의 입장을 아직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재현된 과거의 예술은 조만간 그런 굴레를 극복하게 하는 신비의 명약일 수도 있으리라. 고려인 남녀 노인들의 합창과 젊은 아리랑 가무단의 춤과 노래는 풍성한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네 전통 춤사위가 북국의 빠른 율동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끈질기게 유지되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아리랑 가무단의 발레리아 단장과 그 남편 발렌찐, 그리고 그들의 예쁜 딸이자 리드싱어인 악사나가 여전한 모습으로 고려인 공동체의 문화를 지탱해나가는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 독립운동에 나선 의병들의 활동 공간이었고, 후에 임시정부로 변신한 대한국민회의 건물이 살아 있으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대표로 파견되었던 독립운동가 이상설의 유허(遺墟)가 있는 곳, 우수리스크. 전통예술 같은 소프트 문화를 통해 민족 정체성의 유지가 가능할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해준 공간이었다. 

 

 

***

 

우수리스크로부터 2시간 가까이 걸려 블라디보스톡의 현대호텔에 도착했다. 갓 수인사를 끝낸 룸메이트 손진홍 선생과 함께 김병학 선생의 호출에 이끌려 두 분의 블라디미르 김 선생들을 만났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블라디미르 선생은 이미 10년 가까이 교분을 유지해오고 있으며, 광주의 고려인마을에서 오신 또 다른 블라디미르 선생은 초면이었으나, 모두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표본으로 삼을만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열차 여행 내내 한국인 참가자들에게 고려인들의 삶과 역사를 들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우즈벡 블라디미르 선생의 톤 높은 입담에는 자신의 부모가 겪은 강제이주의 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된 흥분이 가득 배어 있었다. 이렇게 대장정의 첫날 밤, 원동의 중심 블라디보스톡에서 우리는 보드카 한 잔으로 결의를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724,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르기 전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자취를 찾는 일이 급했다. 최초의 재외동포 집거지이자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신한촌은 우거진 나무숲과 잡초, 풍상에 낡아가는 러시아인들의 나지막한 아파트들로 휩싸여 물리적 자취가 묘연했다. 1920년 신한촌 사건과 4월 참변으로 대량학살을 당한 고려인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었지만, 우뚝 솟은 세 개의 돌기둥과 작은 돌들로 구성된 기념비만이 그곳의 역사성을 간신히 보여주고 있었다. 누군가는 큰 돌기둥들이 하늘바람 혹은 남한북한해외동포를 상징한다 하나, 해석은 자유이리라. 무엇보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리지 않은 비석이 특이하고 의미심장했다. 졸지에 수만리 타국으로 쫓겨난 고려인들의 심정을 문장으로 쓴들 제대로 쓸 수 있을 것이며, 그림으로 그린들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차라리 흰 돌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나으리라. 그것만이 그 시절 고려인들을 제대로 대접하는 일이 될 수 있으리라.

관리들의 착취로 농민반란이 빈발하고,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이 유리걸식하며 떠돌던 조선 왕조 말기, 한반도의 지근 블라디보스톡에 한인들이 들어오면서 신한촌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인들의 이주가 시작된 1863년부터였다. 그로부터 삶을 이어가던 고려인들이 전대미문의 시련에 말려든 것이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이었다. 강제이주에 따라 이곳의 신한촌도 고려인들의 자취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소련이 붕괴되고 난 19998,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이 기념비는 건립되었다.

 

기념비로부터 샛길을 따라 내려가니, 러시아인들의 아파트가 나타났고, 그로부터 바다 쪽으로 이어진 경사면에서는 옛 주택들이 막 철거되고 있었다. 때마침 고려인 거주 지역의 마지막 증거인 철제 도로 표지판이 젊은 인부의 손에 의해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서울 거리라는 선명한 글자들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다. 모르는 척 기다리다가, 쓰레기로 버리거든 주어올 것을. 갈 길이 바쁜 우리가 그것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주인에게 요청하니,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것으로 미루어 값나가는 물건으로 생각한 것이었을까. 젊디젊은 주인 녀석의 약삭빠른 계산속이 얄미웠다. 나동그라진 표지판과 함께 그 공간에서 이루어졌을 우리 민족의 역사는 이제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그 일로 인해 강제이주 고려인들의 고통을 추체험하겠노라 나선 우리의 노정 또한 알량한 역사지식이나 선입견을 모두 버린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계속>


신한촌 기념비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대원들


서울의 거리 철거 광경


'서울스카야(서울의 거리)' 표지판


신한촌 주변의 러시아인들의 아파트


블라디보스톡 혁명의 광장


고려인마을 기념물


블라디보스톡 전망대, 끼릴문자를 만든 선교사 상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금각만


현대호텔 근처의 러시아정교회 성당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7. 22. 13:24

은사님과 번개를!

 

 

<맨 앞줄 왼쪽에서 세번 째 분이 이신평 선생님>

 

 

은사님(이신평 선생님)을 근 반세기만에 만나 뵈었다. 벌써 팔순. 그러나 몸은 꼿꼿하셨고, 눈은 밝으셨으며, 말씀은 더 다듬어지신 모습이셨다. 늙어가는 제자들을 앞에 두신 은사님은 만감이 교차하셨을까. 연신 잔을 기울이셨다.

 

하교 종이 땡땡땡 울리면, 우리는 선생님을 따라 갈머리, 민어도로 낚시하러 나가곤 했다. 낚시와 바둑을 좋아하셨던 선생님. 우리를 늘 친구처럼 대해주신 20대 후반의 청춘이셨다. 고기는 잘 잡히지 않아 어깨에 멘 다람치는 늘 텅 비어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풍요롭던 어린 시절이었다. 선생님 곁을 떠난 것은 우리의 10대 초중반이었다. 중학교 진학도 쉽지 않았고 돈벌이도 마땅치 않았던 베이비 부머들의 현실을, 입만 열면 헬조선을 외치는 포스트 베이비 부머들은 알 턱이 없으리라. 그 추운 겨울날 새끼 망둥이들 어미 곁 떠나듯뿔뿔이 흩어진 우리는 모진 세파를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 가진 것 없이, 기댈 언덕도 없이, 물결에 밀리고 발길에 차이면서 오늘까지 견뎌 온 것 아닌가. 말 그대로 어찌어찌 살다보니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나마 입 벌리고 달려드는 아귀나 범치, 가물치 없는 이 웅덩이에까지 성체가 된 망둥이들이 모여든 것이다.

 

친구들은 거울이다. 늙어가는 얼굴들을 서로 바라보며 제 모습을 깨달으니, 거울이다. 거기에 새끼 망둥이 시절의 선생님까지 모셔다 놓았으니, 큰 거울 작은 거울들이 서로 반사하여 번개의 공간이 번쩍이는 거울 방으로 바뀐 건 당연한 일 아닌가. 큰 거울인 선생님의 모습에서 조만간 도래할 우리의 미래를 훔쳐보고, 작은 거울인 친구들의 얼굴에서 과거와 현재로의 시간여행을 위해 타고 갈 타임머신을 발견한다. 그래, 멋진 타임머신이었다. 우리가 언제 참하게 앉아 대가들의 역사책을 읽을 기회가, 여유가 있었던가. 적어도 6, 70년대부터는 우리 자체가 역사책이다. 그 이전의 역사책은 우리 부모였고, 부모 이전의 역사책은 우리의 조부모였으며, 그 이전의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우리는 역사를 DNA로 물려받았을 뿐, 허접한 책 나부랭이는 별 의미가 없었다. 진짜 역사는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마음의 역사. 반세기도 안 되어 두서너 번의 산업혁명, 정치혁명을 경험한 우리다. 그래서 한국의 베이비부머들은 화석화된 현대사의 교과서들이다. 가벼운 입과 머리로 역사를 농()하고, 근대를 논()하는 얼치기 사학도들을 만날 때마다 허무감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가벼운 논리를 끌어다 정치를 하겠노라 편을 갈라 싸우는 이 땅의 정치 모리배들이 불쌍하고 가소로울 뿐이다.

 

막잔을 비우고 헤어지지만, 우리의 시간은 기약할 수 없다. 오늘의 우리가 내일의 우리는 아니고, 지금의 이 시간과 내일의 저 시간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번쩍번쩍 튀어 달아나는 광음(光陰)의 질주 속에서 나의 정체성(正體性)’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담에 한 번 만나자라는 말보다 그래 바로 지금 만나자가 더 진실하고 정직한 말이다. 그래서 인생의 허무를 깨달은 사람들은 오늘도 저잣거리의 주막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그렇게 날은 어두워졌고, 선생님은 열차를 놓치실 세라 종종걸음으로 달리셨으며, 헤어지기 아쉬운 병철이와 영도는 ‘9월의 번개를 두 번 세 번 확인 또 확인했다.^^

<2017. 7. 21.>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6. 30. 01:12

'표절이 관행'이었다고요?

     -김상곤 선생님께- 

 

 

새 정부의 교육부 장관 후보자로서 어제 하루 종일 국회의원들에게 시달리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는지요? 사실 어제 하루 뿐 아니라 교육부 장관 하마평이 나오면서부터 선생님의 표절문제가 도마에 올랐으니, 벌써 한 달 가까이 진한 고문을 당하신 셈이네요. 최근에 모든 언론 매체들이 선생님의 표절 소식과 분석 기사들로 도배되다시피 하는 모습을 보며, 저는 선생님께서 언제쯤 후보직을 내려놓으실까 예의주시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결국 청문회에까지 오게 되었으니, 우선 그 두둑하신 배포와 자신감에 경의를 표합니다. 귀가 얇고 기가 약하여 어쩌다 들려오는 친구들의 사소한 뒷 담화마저 못 배겨내는 저로서는 그런 배포가 부럽기도 하고 경이롭기만 합니다. 비록 언론사 기자들의 필설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어제 접한 선생님의 말씀들 가운데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말씀드리기 전에 제가 선생님의 논문들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음은 물론 이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저는 선생님께서 사회운동가이거나 정치인일 뿐 교수나 학자라는 사실을 제대로 몰랐었음을 고백하며, 그 점에 대하여 사과드립니다. 워낙 전공분야가 저와 다르기도 하지만관련 단체들에서 심각한 표절 사실들을 모조리 파헤쳐 '증거들이 차고 넘치는' 마당에 제가 굳이 찾아 읽을 필요가 없었을 뿐 아니라 읽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이은재 청문위원은 선생님의 27년 간 교수의 연구실적을 요구했더니 석·박사 논문을 포함 달랑 5가지가 왔는데, 자신들이 찾은 논문만 49건이었다는 요지의 지적을 내놓았고, 이종배 청문위원은 선생님께서 1982년에 발표한 석사논문을 분석해보니 일본 문헌에서 119, 한국 문헌에서 16곳 등 총 135곳을 출처 표시나 인용 표시 없이 갖다 썼는데, 논문의 어떤 부분은 일본의 문헌을 그대로 번역한 수준이었다는 충격적인 지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은재 청문위원의 말 속에는 논문의 다수가 떳떳치 못하여 일부만 제출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 들어있고, 이종배 청문위원의 말 속에는 학위논문 모두가 표절에 의해 쓰였음을 강조하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청문위원들의 거듭된 지적과 비판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35년 전 석사학위논문을 쓸 당시에는 포괄적인 인용이나 출처 표시가 일반적이었다거나 선행 문단이나 후행 문단에 출처 표시를 다 했다. 포괄적인 인용 방식이 그때 방식이었다는 등의 해명을 하셨습니다. 아울러 당시의 기준과 관행으로 보면 전혀 잘못된 부분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씀까지 덧붙이셨습니다. 저도 그 비슷한 시절에 석사학위논문을 썼습니다만, 과연 남의 글을 ‘(포괄적인 인용이나 출처 표시라는 미명 아래)정확한 각주 표시 없이 뭉텅 뭉텅 베끼는 것이 관행이었을까요 표절과 '포괄적 인용'이 같은 뜻의 말이라는 사실을 저는 선생님의 해명을 듣고야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당시에도 심사위원들이 신경 쓰던 문제들 중의 하나가 표절이었으며, 표절하다가 들켜 망신당하던 사례들이 한 둘이 아니었음을 선생님만 모르고 계셨는지요? 무엇보다 논문작성법의 맨 첫 장에 나오는 내용이 논문은 독창적이어야 하고 남의 글을 참고할 때는 정확한 인용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상식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진정 모르셨단 말씀인가요? 석사논문 쓰시면서 논문작성법 한 번 읽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표절하면 안된다'는 것이 논문작성법을 읽어야 알 수 있는 난해한 이론인가요? 당시에 요즘의 '연구윤리규정같은 건 없었다 해도, ‘남의 글을 훔치면 안 된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 아니었나요? 어찌 남의 글을 훔치면 벌을 받는다라는 명문 규정 없는 것이 남의 글을 훔쳐도 됨을 의미한다고 보시는지요? '남의 돈을 훔치는 것'보다 '남의 글을 훔치는 것'이 훨씬 고약한 범죄라는 것은 글줄이나 써본 사람이라면 절감하는 사실 아닌가요? 고심참담 날밤을 새워가며 글을 써본 사람만이 글의 소중함을 알 수 있는데, 그래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쉽게 남의 글을 절취(竊取)하는 것이지요. 표절은 비양심적 행위이고, 드러난 표절사실을 애써 숨기려 하거나 부정하는 인사들이야말로 '양심에 털난 사람들'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겁니다.    

 

이런 이유로 남의 글을 훔치는 것이 관행이었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선생님과 한솥밥을 먹어 온 교수들이나 이 땅의 학자들에게 가한 끔찍한 폭력입니다. 그들의 얼굴에 '똥을 퍼부은 격'이지요. 남의 글을 훔치는 도둑질이 누구나 저지르는 관행이었다고요? 무슨 근거로 모든 교수들을 범법자로 몰아가시는 겁니까? 물론 그런 교수들도 더러 있었겠지만, 관행이라 할 만큼 그리 많지는 않았다는 것이 제 관점입니다. 대다수 선량한 교수나 학자들이 선생님의 억설과 강변으로 입은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시렵니까? 교수나 학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을 어떻게 달래실 생각이십니까? 이번의 장관 후보 선정 과정이나 청문회에서 불거진 불미스러운 소식들은 해외에도 광범하게 퍼져 나갔을 텐데, 그 과정에서 땅에 떨어진 국격은 어떻게 회복할 생각이신가요?

 

선생님은 일생 봉직하셨던 학교의 후배교수들이나 같은 시절 대학에 몸담았던 이 땅의 학자들을 표절 관행의 동참자들로 낙인찍으신 셈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미 대학에서 정년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래서 그런 말씀을 하셨나요? ‘다시는 찾지 않을 우물에 침을 좀 뱉으면 어떠랴!’라는 심정은 아니셨나요?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표절문제가 불거졌을 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야 합니다. 

참 부끄럽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학자로서 교수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 대다수의 동료 후배 교수들, 믿고 따라 준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내 스스로 참회하며 교육부 장관 후보직을 사퇴한다.” 

선생님의 사고방식이나 도덕성이 1980년대의 관행 아래서는 일부 양해되었을지 모르지만, 2017년의 대학에서는 용납될 수도 없고 용납 되어서도 안 되겠지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1980년대의 시대정신을 나름대로 치열하게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정신은 그 시대의 그것과 같지 않습니다. 지금 추상같은 학자정신으로 무장한 연부역강(年富力强)의 인재들이 그들먹하다는 사실을 정말로 모르시는 겁니까? 그런 모습으로 교육부 장관의 리더십이 발휘될 수 있겠는지요? 전국의 교원들이나 학생들, 아니 국민들에게 장관으로서의 영(令)이 서겠는지요? 선생님께서 대한민국 지도부의 일원이 되기 어려울 만큼 이념적으로도 의심을 받고 있다는 점까지 이 자리에서 거론할 여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너그럽게 양보한다 해도 학문적 엄정성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계시는 선생님이 교육부의 수장이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어떤 기회라도 잡아서 표절이 관행이었다는 말씀만은 수정하심으로써 본의 아니게 학계의 후배들이 뒤집어 쓴 똥물만큼은 닦아 주시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가뜩이나 힘드실 텐데, 두서없는 말로 혼란스럽게 해드려 미안합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6. 29. 12:02

도깨비와의 씨름

 

 

첩첩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마을은 내 어린 시절 세계의 전부였다. 가끔 꽉 막힌 공간에서 활짝 열린 먼 곳을 꿈꾸기도 했지만, 열린 공간이란 게 무엇인지 도통 가늠할 수가 없었다. 보고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몸은 대처에 나와 있으나 마음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있음을 느낀다. 세상사 별 것 아니라는 깨달음일까. 아무리 날뛰어도 결국은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허무감일까. 다시 그 좁은 공간으로 숨고 싶은 것은 복잡한 세상의 원리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는 깨달음 때문이리라

 종종걸음으로 학교에 모여든 우리들의 관심사는 뻔했다. 누가 팔뚝만한 망둥어를 잡았고, 누구네 소가 송아지를 낳았으며, 누구네 누나가 이웃마을로 시집간다는 등등 사실보도를 빼고 나면 귀신 이야기, 도깨비 이야기가 남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귀신보다 도깨비가 훨씬 좋았다. 귀신 이야기를 들으며 몸서리를 쳤지만, 도깨비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고 유쾌했다. 

 우리는 툭하면 씨름을 즐겼다. 시골이라 힘이 최고라는 믿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도깨비 이야기와 무관치 않았다. 당시 우리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도깨비 이야기는 씨름과 관련된 것이 압도적이었다. 요지는 이렇다. 윗마을의 어떤 아저씨가 밤중에 재빽이(당시 우리들은 등성마루를 그렇게 일컬었다)를 넘다가 도깨비를 만났다. 그런데 그 도깨비가 다짜고짜 씨름을 걸어왔다. 만약 이 씨름에서 도깨비를 이기지 못하면 죽음이란 걸 그 아저씨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도깨비의 허리춤을 잡았다. 건곤일척의 씨름판이 나무 울창한 재빽이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 아저씨도 힘이라면 누구 못지않았고, 씨름판에서 양은냄비 몇 세트는 이미 상으로 받은 경력의 소유자였다. 말하자면 마을의 씨름 챔피언과 원조 씨름 챔피언인 도깨비의 심판 없는일전이 심야에 벌어졌으니, 가관이었으리라. 

 몇 시간을 끙끙대며 씨름을 진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랫마을에서 새벽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도깨비는 스르르 손을 풀더니 냉큼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저씨가 비 오듯 흐르는 땀을 훔치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 앞에 수십 년 된 몽당 빗자루 하나가 널브러져 있는 게 아닌가. “, 내가 밤새 씨름한 것이 바로 이 몽당 빗자루였단 말인가?” 아저씨는 허탈해졌고, 집에 돌아온 후 집안을 탈탈 뒤져 몽당 빗자루들을 모조리 불살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우리는 몽당 빗자루를 싫어했다. 언제 도깨비로 변해 씨름을 걸어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 

 그렇다. 지난 1년 가까이 온 국민이 달려들어 싸움을 벌이며 여기까지 왔다. 그 과정에서 하나를 내 쫓고, 하나를 들여놓았다. 그런데 참! 허탈한 것은 우리 모두 죽을힘을 다해 싸웠건만, 우리 앞에 서 있는 건 두 개의 몽당 빗자루뿐이라는 사실이다. 인간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는 법. 결국 각자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슬프게도 누가 나를 위해 유토피아를 만들어 주는 게 아님을 깨닫기까지 5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간 넓은 세상에 나왔다고 우쭐대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다가 문득 깨달으니, 그 옛날 고향 재빼기의 한 뼘 공터였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