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8. 1. 19. 17:13
 

 빽빽이도 늘어섰구나, 무덤들이여!

            -대만 인상기(印象記)·1-


                                                                            조규익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간은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란 말이 있다. 또 ‘군대 안 갔다 온 아무개가 군대 갔다 온 아무개를 이긴다’거나 ‘서울 안 갔다 온 아무개가 서울에서 살다 온 아무개를 이긴다’는 등의 가시 박힌 농담들도 지금껏 우리 사회에는 통용되고 있다. 어느 모임에 나가 보아도 크게 영양가 없는 말로 언성을 높이는 사람이 있기 마련. 그 지식의 근원을 캐 보면 제대로 된 책 대신 인터넷이나 신문 등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요즈음. 여행기들이 범람한다. 제대로 발품을 팔아 얻은 글부터 점만 찍고 돌아오는 패키지 여행에서 얻은 인상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짧은 생각들이 범하는 어리석음일 뿐이지만, 모조리 무익하지만은 않을 터. 그러니 나도 이 자리에서 그런 어리석음이나 한 번 범해 볼까나?


   ***


 지난 연말 3박4일의 일정으로 대만을 다녀왔다. 지척에 두고도 ‘언젠가 마음만 먹으면 다녀올 수 있으리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미루어두고 있던 곳이었다. 대만 행에 며칠간의 여유를 활용하기로 했다.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것은 세계 어딜 가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들 득실거리는 관광지만 찾아 다녀야 하는 것이 여행객의 신세일 터. 어디 한 곳 차분하게 앉아 생각에 잠길 여유가 있으랴. 그저 ‘절에 간 새댁’ 마냥 능란한 가이드의 손에 이끌려 이곳저곳 숨차게 돌아다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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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고궁박물원

 여기서 둘째 날 들른 지우펀(九份)을 먼저 언급하려는 것은 그만큼 그곳에서 받은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가파른 고갯마루를 넘어 도달한 곳이었다. ‘九份’이란 이정표를 보고 나서야 가이드가 말끝마다 ‘구인분, 구인분’ 하는 말의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지우펀은 금광지대였다. 그 옛날 금광에서 일하던 그 마을의 광부 9명이 매몰되어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로부터 9명 광부의 아내들 즉 살아남은 9명의 과부(寡婦)들은 산 넘어 시장에서 늘 ‘9인분’의 식량을 사가지고 고개를 넘어야 했단다. 그래서 이곳이 ‘九份’으로 명명되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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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 동네 모습-앞쪽이 산 자들의 집, 뒤쪽이 무덤들이다

 지우펀의 금광박물관을 거쳐 들른 곳이 바로 도교사원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성명궁이었다. 그곳에선 관우를 주신(主神)으로 모시고 있었다. 황금색 바탕에 온갖 화려한 장식들을 붙여 놓은 전각 안에서 관우신을 옹위하고 있는 많은 신들이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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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성명궁-관우(관성제)를 모셨음

 그러나 정작 우리를 놀래킨 건 성명궁이 아니었다. 성명궁을 나서서 둘러본 사방의 산중턱에 이르기까지 아파트처럼 보이는 주택들이 그득 깔려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본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그것들은 아파트가 아니라, 모두 유택(幽宅) 즉 무덤들이었다. 충격이었다. 그 무덤들은 흡사 시멘트로 잘 지어놓은 양옥집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거대한 아파트촌이 들어설만한 양지바른 산록. 그들은 그곳에 ‘죽은 자들을 위한 집들’을 그득하게 지어놓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경우엔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산 자들의 집과 붙어있기도 했다. 좋게 말하면 ‘산 자와 죽은 자들’이 동거하는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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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무덤들

 조부모, 선조들의 유택 아래쪽에 사는 후손들. 참으로 기이한 구도였다. 일찍이 베트남 메콩강 델타 지역 마을에서 뜰 안에 무덤을 만들고 조석으로 향불을 피우는 그들을 본 적도 있었다. 대개 남방 풍속의 공통점일 수도 있겠으나, 대만의 공동묘지는 좀 색다른 점이 있었다.

 딱딱거리는(?) 가이드에게 사정하여 간신히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무덤 탐색을 생략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대략 두어 시간을 헤매고 다니며 무덤 속의 주인공들과 만난 셈이었다. 무덤들을 대충 둘러보고 났을 때 뱃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구역질 같은 것이 치밀어 올랐다. 양지 바른 산자락을 점령한 채 늘어서 있는 무덤들. 어느 무덤에나 ‘욕망의 기괴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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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무덤들

 형형색색 단장한, 아무도 없는 텅 빈 시멘트 구조물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냉기와 회한이 내 가슴에 사무쳐 왔다. 무덤들의 실체를 확인한 다음 우리는 빗방울 떨어지는 지우펀의 언덕길을 서둘러 내려왔다. 더껑이 진 가난과 오욕의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겁게 살아가는 무덤 속 주인공들의 ‘살아있는’ 후손들과 함께 하고픈 욕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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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화려한 무덤


묘원(墓苑)이나 유택으로 표현될 만한 그곳의 무덤들은 자세히 보니 여러 층이었다. 호화로운 것은 치장도 그러려니와 규모 또한 웬만큼 잘 사는 집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길 가 언덕 아래 쪽 구멍에 조막손만한 검은 오지그릇 하나로 남아있는, 초라한 무덤도 많았다. 살아생전 고대광실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자나 노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나 죽은 다음에 심심산중 한 덩어리 봉분으로 남는다면, 그 얼마나 공평한 일인가.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묘제야말로 얼마나 철학적이고 인간적인가. 물론 호화분묘는 제외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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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초라한 무덤


   ***


 온갖 석물(石物)로 치장한 채 산 자들이 머물러야 할 양지바른 곳을 점령한 대만의 무덤들은 그 자체가 폭력이었다. 물론 조상을 잘 모시려는 자손들의 정성을 어찌 폄하할 수 있으랴. 그러나 내 한 몸 죽여서라도 자식들 살리고자 하는 것이 세상의 부모 마음일진대, ‘산 자들’이 차지해야 할 양지바른 곳에 자신들의 거대한 유택을 마련해준 자손들을 어찌 가상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우펀의 무덤 군(群)을 만나면서 대만에 대한 기대의 반 이상을 접기로 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1. 3. 17:44
학기 말 성적 평가를 마치고


                                                                                                                    조규익
지난 여름의 일. 국가 기관이 발주하는 대형 프로젝트의 2차 심사(평가)를 받기 위해 풍광 좋은 어느 지방엘 다녀왔다. 목에 힘이 들어간 평가위원들이 평가 받기 위해 ‘잔뜩 숙이고 들어온’ 우리를 맞았다. 그들의 물음들 마디마디 짜증이 배어 있었지만, 우리는 그들이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점에 짜증이 났었다. 그러나 결코 내색할 수는 없었다. 칼자루를 쥔 그들이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라서였다.

결과는 우려했던 대로 ‘꽝’이었지만, 그들이 나중에 보내온 1쪽짜리 심사평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몇 가지 지적들 가운데 단 한 가지만 그런대로 수긍할 수 있었을 뿐, 나머지는 연구 제안서의 기본 내용이나 프로젝트의 취지마저 오독(誤讀)한 결과로 나온 것들이었다.

우리 팀의 어떤 친구는 “프로젝트 신청을 아예 못한 대학이나 냈다가 떨어진 대학의 교수들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을 것이니, 말하자면 이 분야의 열등생들이 우등생의 보고서를 평가한 셈 아니냐?” 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우리끼리만 분통을 터뜨릴 뿐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은 우리에겐 앞으로도 ‘먹고 살아야 할 날들’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 국가기관을 자극해서는 앞으로 ‘국물도 없을 것’ 아닌가.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남들이 가하는 ‘평가’의 세례 속에 살아왔고, 나 또한 그 평가의 주체가 되어 남들을 괴롭혀 온 게 사실이다. ‘삶 자체가 평가’라 할 만큼 모든 것이 평가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내 모습은 그런 평가들을 거쳐 온 결과라고 할 수 있고, 지금도 끊임없는 평가 속에서 살고 있으니, 앞으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남아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학교나 사회에만 평가가 있는 게 아니다. 가정도 무서운 평가의 현장이다. 어제까지 모범 남편으로 칭송되다가 어느 한 순간 마나님의 눈으로부터 벗어나면 ‘몹쓸 인간’으로 추락된다. 어제까지 존경받는 아버지로 칭송되다가 무슨 문제로 자식들과 언쟁이라도 벌이게 되면 그 순간 여지없이 낙제생으로 급전직하하기 마련이다. 직장에서 지금까지 잘 나가다가 뜻 하지 않게 명퇴라도 당할라치면,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처치 곤란의 애물단지로 전락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이처럼 크게는 대통령 선거에서 작게는 학급의 일일 쪽지시험까지 시험과 평가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일희일비하며 인생을 불태워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평가자는 언제나 잔인하고 피평가자는 대부분 억울하다. 그러나 한 번 평가자라고 영원한 평가자일 수 없고 한 번 피평가자라고 영원한 피평가자는 아닐 것이니, 서로 간에 잔혹한(?) 새디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모두의 운명인 셈이다.

20년 넘게 교수생활을 해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 내겐 연구도, 강의도 아니다. 바로 학생들에 대한 ‘평가’다. 대학에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있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성적을 매겨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학사시스템’에 올리게 된다. 교수에 따라 성적을 매기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내 경우 대개 ‘중간고사 40%+기말고사 40%+과제 10%+출석 10%’의 기준을 적용한다.
평가 척도를 좀 더 다양하게 하고 싶지만, 생각만큼 관리가 쉽지 않다. 학기 초에는 ‘잘 가르치고 엄정하게 평가하겠다’는 초심으로 날이 시퍼렇다. 그러나 날이 가면서 학생들의 면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출석 잘 하고 성실하나 학과공부에는 그다지 두각을 보여주지 못하는 그룹(1), 가끔 결석·지각은 하지만 반짝이는 모습을 보이는 그룹(2), 성실하면서 공부도 잘 하는 그룹(3), 극소수의 이도저도 아닌 그룹(4)으로 나뉜다. 요즈음에는 졸업반 학생들도 아래 학년들의 강의에 많이 들어 와 후배들과 경쟁을 하는데, 대개 교수에게 졸업반으로서의 절박감을 각인시킴으로써 후배들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하려는 의도도 없지 않은 듯하다.^^
학점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대부분 성실하려고 노력하기 마련이어서 4에 속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편이다. 따라서 1, 2가 대부분이고, 3은 소수다. 그런데 문제는 1, 2에 속하는 친구들도 자신들이 틀림없는 3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열심히들 하기도 하지만 이제 마지막 벼랑에 서 있음을 시위하는 4학년들까지 고려에 넣다보면 채점의 곤혹스러움이 여간 아니다. 생각 같아선 모두에게 A를 주고 싶다. 그러나 눈치가 빤한 학교당국이 그걸 모를까. 아예 상대평가로 바꾸어 몇 %이상은 A나 B를 줄 수도 없다. 제한된 %를 초과하면 아예 성적 입력을 할 수 없도록 막아 놓은 것이다.
우리 대학시절만 해도 ‘교수시여, 제발 펑크만 내지 말아 주소서!’ 기도하고 다녔는데, 요즘 학생들은 B를 주면 무척 서운해 하고 C를 주면 아예 원수처럼 대한다.^^ 교수들에게 엄정한 상대평가를 강요하는 학교 당국도 C학점 받은 학생들이 졸업 전에 ‘재수강’을 하여 A나 B를 받을 수 있도록 탈출구를 열어 주고 있으니, 참으로 ‘모순된 현실’이다. ‘학점 인플레’에 대한 대응에서 학교 당국과 교수들 간의 엇박자가 이렇게 심할 수 없다.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성적처리가 끝나면 몇몇 학생들로부터 ‘눈물의 하소연’이 답지한다. 단 1점 때문에 장학금이 날아갔다느니, 다음 학기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삭감 당하게 되었다느니, 기업체에 인턴으로 선발되었는데 정식 채용될 기회가 사라졌다느니, 대학원에 진학하려는데 교수님의 학점 때문에 어렵게 되었다느니, 한 번도 지각·결석 없이 그토록 열심히 했는데 설마 이런 학점을 받을지 몰랐다느니 등등  과거 몇년 간 내게 전달된 사연들을 요약하면, 단순하지만 절절하다. 이럴 땐 어딘가로 숨고 싶다. 누군가를 평가한다는 게 이리도 가슴 아픈 일인지 매 학기 경험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 차라리 내가 피평가자의 입장에 설지언정, 다시는 남을 평가하는 자리에 앉고 싶지 않은 심정이기도 하다.

***

오늘도 주인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번호가 핸드폰에 찍혀있다. 학점 때문에 억울한 어느 학생의 전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이여! 억울해하지 말라. 낮은 학점은 오히려 그대를 한 단계 성숙시킬 수 있는 ‘쓴 약’이 될 수도 있다. 먼 훗날 그 학점 덕분에 좀 더 성숙한 인간으로 남을 평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니. 대학의 학점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의미가 있는 법이다. 모두가 1등일 수는 없다. 그리고 대학의 학점 1등이 인생의 1등인 것도 아니다. ‘내가 1등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과 분발이 우리의 미래를 좀 더 발전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진리 아닌 진리를 깨달아줄 지어다, 사랑하는 학생들이여!
   

                                                   2008. 1. 3.  


연구실에서
고민 많은 백규 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1. 1. 00:43
여러분!

바로 10분 전에 정해년의 신년인사를 드린 것 같은데,
다시 무자년의 신년인사를 올리는 자리에 섰습니다.
어쩌면 내년 기축년을 맞이하는 순간엔 ‘바로 5분 전에 무자년의 신년인사를 올린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의 흐름이 빨라진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실감하는 요즈음입니다. 흐르는 세월에 떠밀려가며 아프게 허무를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부분 그러시겠지만, 저로서는 특히 지난 한 해 동안 기쁨과 좌절을 골고루 경험했습니다. 계획대로 연구논문들도 저서들도 냈고, 훌륭한 후배교수를 선발했으며, 연구소 일도 제법 한다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벼르던 ‘일본지역 조선통신사 노정답사’의 꿈을 이룰 수 있었고, 미답의 지역이던 대만에도 다녀왔습니다.

지난 가을엔 봉직하는 대학에서 20년 근속 표창을 받았습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대학에서 20년까지 근속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찌어찌 세월이 흐르다 보니 20년이 훌렁 지나가 버렸군요. 학교에서 표창까지 하는 걸 보니 20년 근속이 그리 나쁜 건 아니라는 깨달음을 비로소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무를 키우는 심정으로 이제부터라도 남은 기간 학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제 연구실 건물 옆 공터에 멋진 반송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제가 정년을 맞을 무렵이면 아마 제법 근사한 그늘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리고 재직 20년 만에 연구실을 새 건물로 옮겼습니다. 조만식 기념관이라고, 사실은 제가 발의하여 이름을 지은 새 건물입니다. 새 연구실은 남향인데, 볕이 어찌나 좋은지 별도의 난방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무엇보다도 창가의 난초들이 행복해하는 것 같고, 제 연구의 능률 또한 오르는 것 같아 새삼 새 연구실로 이사한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좋은 일만 있었겠습니까?

한 해가 끝나가는 시점의 ‘태안 기름유출 사고’로 저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타향살이 수십 년을 지탱해준 유일한 의지처가 ‘깨끗하고 아름다운 고향’이었는데, 정말 어처구니없이 당하고 말았습니다. 기름범벅이 된 고향의 해변, 모든 것이 죽어버린 해안의 갯벌을 망연자실 바라보며 하마터면 의욕의 끈마저 놓쳐버릴 뻔 했습니다. 고향 어른들의 절규를 들으며 인간의 무력감을 비로소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자, 이제 대망의 2008년이 밝았습니다. 올해도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논문도 책도 ‘눈 건강’이 허락되는 한 써야겠고, 후배들과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지난 해 결과가 좋지 않았던 프로젝트는 기필코 따내렵니다. 학생들과의 대화에도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생각입니다. 해외의 미답지역들을 몇 군데 돌아보는 일, 일본 지역 조선통신사 노정의 나머지 부분을 답사하는 일도 과제입니다. 한국전통문예연구소 주관의 ‘연행록 관계 국제학술대회’ 또한 반드시 실현시켜야지요. 거의 매일 1시간씩 투자해온 달리기에 30분쯤 더 투자할 생각입니다. 올해부터는 누구 말대로 ‘아까운 인생 하루 24시간을 48시간으로’ 늘여 써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고향바다의 건강 상태도 체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자연으로부터 받기만 하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이제부턴 우리가 상처받은 자연을 보듬고 치료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태안의 기름유출 사건은 우리에게 크나큰 반성의 기회가 되었다고 봅니다.

여러분께서도 새해의 계획들을 이미 세우셨겠지요. 무엇보다도 건강이 중요합니다. 개인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가정과 사회, 국가가 건강해진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지요. 건강관리가 모든 계획의 첫머리에 와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저와 함께 매일 달려보십시다.

무자년 새해 아침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만복이 깃드시길 두 손 모아 빌어드리며 세배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새해 아침에

  백규 드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12. 24. 09:02
무지갯빛 기름띠 두른 바닷물이 바락바락 밀려드는 신두리 갯벌.
오늘도 그곳엔 검게 착색된 돌들을 닦고 훔쳐내는 손길들이 분주합니다. 이마에 솟는 땀방울마냥 표면에 기름방울 송글송글 달고 있는 돌들이 안타깝습니다. 흡사 식은땀 흘리며 병상에 누운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라 할까요? 지금껏 고향 바닷가의 돌들을 이렇게 조심조심 어루만지며 그들의 몸을 소중하게 닦아본 경험이 없습니다. 지금껏 바닷물은, 바닷가 모래사장과 돌들은, 드넓은 갯벌은, 그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소품으로만 여겨왔습니다. 몹쓸 것들을 함부로 버려도 금세 정화시켜 우리에게 뛰어난 아름다움과 맛으로 되돌려 주는 ‘무한 희생의 어머니’로만 여겨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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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태안의 바다(최경자 촬영)


함부로 집어 던지고, 깨고, 침 뱉고, 툭하면 찾아와 욕설을 퍼부어도 그 바닷가의 돌들은 말 없는 고요함으로 우리를 맞아준 ‘묵언(黙言)의 성자’였음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자식놈들 얼굴 닦아주는 일도 귀찮아하던 제가 바닷가의 돌들을 정성스레 닦아 주면서 터져 오르는 회한의 오열을 삼키고 또 삼킨 것도 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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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에 절은, 자원봉사자의 고무장갑


울컥 치밀어 오르게 하는 기름 냄새와 끊임없이 들려오는 물소리. 그것들을 빼면 그곳엔 살아있는 게 없었습니다.

             ***

낮이면 늘 그곳엔 새까맣게 몰려나와 해바라기를 즐기던 능정이, 쇠발이, 황발이, 송장망둥이 등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저 멀리서 다가서는 시늉만 해도 그들은 잽싸게 저들의 구멍으로 몸을 숨기곤 했지요. 그러나 기름 벼락을 맞은 이후 그곳엔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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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업보(최경자 촬영)

 아마 모두들 제 집 속에서 죽어있을 겁니다. 제 어린 시절의 삶터이자 놀이터였던 그 바닷가는 그렇게 숨을 놓아버리는 중입니다. 어린 시절 저는 그 바닷가 모랫벌에서 달랑게와 경주를 하며 몸과 마음을 키워왔습니다. 그런데 그들 역시 깡그리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

저를 아시는 분은 ‘저 촌놈이 또 고향타령을 시작했구나!’ 하시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오일펜스를 쳐도, 아무리 흡착포를 갖다 붙여도 물길이 이어져 있는 한, 네 바다와 내 바다의 경계는 없습니다. 기름 덩어리는 거침없는 해류를 타고 남으로 북으로 동으로 서로 마구 번져가, 결국은 우리 모두의 마음까지 황폐화 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터에 ‘독약’을 쏟아 붓고도, 달랑 흡착포 한 장 들고 걸레질이나 하라고 하는 우리의 ‘대책 없는 원시성’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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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인간(최경자 촬영)

 

             ***

기름 절은 자갈밭을 걸레질하며 비로소 깨닫습니다. ‘자연은 선택이 아닌 삶의 필수조건’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너무나도 자명한 진리를, 아니 상식을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저만의 깨달음은 아닐 겁니다. 그런 깨달음을 얻었기에 이미 다녀간 자원 봉사자들이 또 찾아오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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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힘이다(최경자 촬영)


물론 한 뼘씩 걸레질을 해본들 우리가 바다에 가한 폭력의 상흔을 다 씻어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기름이 절어있는 바다엔 절망만 그득한 듯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소중한 자식들의 낯을 닦아주듯 바다와 자연을 소중히 다루는 마음만 갖게 된다면, 머지않아 바다는 다시 숨을 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자연과 환경이 우선이라는 인식만 갖게 된다면, 앞으론 많이 달라질 수 있겠지요.
오늘 걸레질을 하던 중 바위틈에서 살곰살곰 움직이는 아가 능정이를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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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능정이

분명 그건 희망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체구는 몹시 연약했지만, 조만간 그는 숨 쉴 만한 갯벌의 공간을 찾아낼 것입니다. 저는 실낱같은 희망일지라도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믿기로 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죽어가는 태안의 바다가 여러분의 아낌없는 응원과 기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2007. 12. 23.

백규 드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12. 12. 17:23
이탈리아 제2신
    
                          깊고 화려한 역사,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무질서
                              -나폴리의 환상과 현실


1월 3일 월요일. 오락가락하는 빗줄기를 헤아리며 폼페이를 떠났다. 하얀 눈을 이고 있는 베수비우스산은 여전히 말이 없고, 음산했던 폼페이는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스르르 묻혀져 갔다. 폼페이 시내에 있는 베수비우스 박물관은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폐허 속에서 건져낸 삶의 편린들을 보고 싶었는데. 그들은 나폴리의 고고학박물관으로 가보라고 했다.
한 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나폴리. 도시를 따라 펼쳐진 해변의 한 부분으로 들어온 듯, 차창으로 바닷 내음이 울컥 밀려들었다. 궂은비는 사정없이 내려 가난한 나그네들을 안절부절 못하게 했다. 좁은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 신경질적인 경적소리와 위협하는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난무했다. 도로 주변에 그득그득 쌓인 쓰레기는 비에 젖은 채 널브러져 있고, 가득 메운 차량들은 움푹움푹 파인 도로의 흙탕물을 사정없이 튀기며 질주했다.
주변에 호텔은 즐비했다. 그러나 어딜 가도 턱없이 비싸거나, 신뢰하기 어려운 ‘이탈리아식 흥정’을 벌여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주차장. 주차장을 갖고 있는 호텔이 거의 없었다. 늘 차량의 안위(安危)를 먼저 고려해온 우리였다. 타고 다니는 게 아니라 모시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차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 차가 없었다면 그 먼 길을 어떻게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그보단 없어질 경우 그 골치 아픈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으랴. 시종일관 호텔 선택의 첫 조건이 ‘차의 안전을 보장할만한’ 주차장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오후 세 시 가까운 시각에서야 그 유명하다는 ‘나폴리 핏자’로 점심을 때웠다. 계속되는 호텔 탐색전. 어둑어둑해지는 4시쯤 구시가의 중심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람과 차의 엄청난 물결이 휩쓸고 다녔다. 일방통행 구간이 많아 한 번 길을 잘못 들면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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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핏자와 파스타


3, 4차선 도로에도 보행자 신호등이 없었다. 차들의 눈치를 보며 길을 건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잽싸게 앞질러 달리는 차량들. 길 건너는 사람들을 보며 속력을 늦추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짜증스런 경적 소리. 도로 좌우로 꽉 들어찬 우중충한 건물들. 너무 좁아 있으나마나한 인도. 그나마 도처에 펼쳐진 공사판. 차와 사람들이 엉겨 붙은 차도. 그 틈을 비집고 질주하는 오토바이들. 숨쉬기조차 어려운 매연. 비에 젖어 달라붙은 휴지조각들... 더러움과 무질서의 전시장이었다.
그 도로들을 오르락내리락 하길 여러 차례. 오후 6시가 넘어 깜깜해진 시각에야 항만에 인접한 호텔 하나를 잡을 수 있었다. ‘나폴리를 그냥 포기하고 떠나버릴까’ 망설이던 끝이었다. 호텔은 허름했으나, 창문을 여니 전망이 기가 막혔다. 바로 앞에 부두가 있고, 그 너머로 지중해의 파란 물이 그득했다. 부두엔 환하게 불을 밝힌 페리선 여러 척이 정박해 있고, 선착장 곳곳에 서 있는 지구 모양의 조명등은 우리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주었다. 주차장과 배들 사이로 분주히 오고가는 사람들. 비로소 이곳이 항구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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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발코니에서 내려다 본 나폴리 항


누가 나폴리를 미항(美港)이라 했을까. 우리는 비로소 아름다운 배들이 정박한 항구를 내려다보며 서운했던 마음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발만 시내로 들여놓으면 나폴리는 ‘지저분과 무질서’의 전시장이었다. 나폴리를 미항이라고 예찬한 누군가의 ‘턱없는 과장’, 우리는 그 실체를 확인해야 할 의무(?)까지 지게 된 셈이었다.
 1월 4일 아침, 창 밖으로부터 맑은 햇살이 비쳐왔다. 호텔방에서 내려다보는 에머럴드 빛깔의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페리들의 하얀색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시내로부턴 여전히 차량들의 소음이 퍼붓듯 몰려오고, 도로엔 날 선 병 조각들과 날리는 휴지조각들이 여전했다. 어젯밤의 그 모습에 햇살만 사알짝 내려앉았을 뿐.
햇살은 비에 젖은 쓰레기를 말리고, 마른 쓰레기는 다시 먼지를 피워 올릴 태세였다. 차량들과 사람들은 어제처럼 한데 엉겨 도로를 가득 메울 것이고, 그 위에 또 휴지를 버리고 담배꽁초들을 뱉어낼 것이다. 그렇게 ‘미항’이란 ‘미명(美名)’이 붙여진 나폴리를 우리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탐색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깜빠냐Campania주의 주도 나폴리. 그러나 나폴리는 기원전 6세기부터 외세를 포함한 지배세력의 잦은 교체를 겪어왔다. 그리이스(기원전 6-5세기)를 시작으로 노르만족(12세기), 앙주Anjou·아라곤Aragon 가문(13세기), 스페인(16세기), 프랑스 부르봉 왕가(18세기) 등 다양한 세력들이 나폴리를 지배했다.
도시의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들. 그래서 단순히 항만도시라는 이름으로 나폴리의 역사적 의미를 덮어버릴 수는 없다. 복잡다단한 거리만큼이나 의미 있는 역사유물 혹은 유적들이 다양했다. 나폴리의 역사 유적 혹은 관광 포인트는 구역에 따라 대충 10 개 정도로 나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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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서점가 골목


플레비스치토Plebiscito 광장과 왕궁, 성 프란체스코 교회, 성 페르디난도 교회, 제발로스Zevallos 궁전, 성 브리지다Brigida 교회, 누오보 성Castel Nuovo, 성 지아코모 데글리 스파뇰리San Giacomo Degli Spagnoli 교회, 성 마리아Santa Maria di Portosalvo 교회, 성 피에트로 순교자San Pietro Martire 교회, 피에트라르사Pietrarsa 철도박물관 등을 첫 구역으로, 단테Dante 광장, 삼위일체 교회, 성령교회, 성 니콜라스 교회, 그라비나Gravina 궁전, 기우소Giusso 궁전, 파파코다Pappacoda 성당 등을 둘째 구역으로, 성 테레사 교회, 성 뽀티또Potito 교회, 벨리니Bellini 극장, 성 지오반니 바티스타 델레 모나체 교회, 국립 고고학박물관, 성 겐나로 카타콤, 카포디몬테 박물관, 천문대 등을 셋째 구역으로, 프라마리노 궁전, 대주교 궁전, 아포스톨리 교회, 성 죠반니 교회, 포르타 카푸아나 광장 등을 넷째 구역으로, 벨리니 광장, 성 피에트로 아 마이엘라 교회, 폰타노 성당, 로마 수도관, 성 로렌쪼 마기오레 교회, 카푸아노 성 등을 다섯째 구역으로, 성 세베르토 성당, 파로라미타 궁전, 몬테 디 피에타, 성 죠르지오 마기오레 교회, 코모 궁전 등을 여섯째 구역으로, 몬텔레오네의 피그나텔리 광장, 성 치아라 단지, 성 도메니코 마기오레 교회, 코리글라노 광장 등을 일곱째 구역으로, 벨베데레 저택, 루치아 저택, 성 카를로 교회, 타르시아 궁전 등을 여덟째 구역으로, 예술과 산업 박물관, 성 크로체 교회, 델로보 성, 세싸 궁전, 시나고그, 루터란 교회, 비르길의 무덤, 앵글리컨 교회 등을 아홉째 구역으로, 델라 보르사 궁전, 성 펠리체 저택, 페이르체 저택, 보비노 궁전, 갈리 궁전, 스페라 저택 등을 열째 구역으로 각각 나눌 수 있으리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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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 누오보에서 내려다 본 나폴리 항


<계속>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12. 9. 18:02
이탈리아 제1신 :            삶은 축복인가 고통인가
                                   -폼페이의 비극을 보며


폼페이! <폼페이 최후의 날>이란 소설과 영화로 이미 우리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준 도시. 그러나 현장에서 보는 폼페이는 허구화된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정겹고도 슬픈 현실의 공간이었다.
정겨움과 슬픔. 일견 모순적인 두 감정의 근원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의 모습들과 큰 차이 없는 데서 오는 것이 전자이고, 흔적만 남아 있을 뿐 그 속에 생명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 후자이리라. 그 날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던 베수비우스 산정엔 하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용하게, 흡사 경고라도 하려는 듯 침묵 속에 무언가를 피워 올리는 그 자태가 음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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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 변한 폼페이 극장


지금으로부터 1926년 전인 A.D. 79년 8월 24일 이른 오후. 한창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던  시각. 대부분의 폼페이 사람들이 늘 그래왔듯 일상에 분주하던 바로 그 때, 엄청난 포효와 함께 베수비우스산은 폭발했다. 검은 화산재는 용암과 함께 분화구를 솟구쳐 나와 도시를 덮쳤고. 단숨에 모든 것을 가두어 버린 죽음과 파괴의 견고한 울타리로 변했다. 영광과 긍지의 폼페이는 일순 지표에서 6-7m 아래로 매장되고 말았다.
기원전 8세기 경, 티레니안 해변을 따라가며 정착하기 시작한 일단의 오스칸(Oscan) 사람들. 과거 언젠가 베수비우스산의 융기로 만들어진 높은 지역에 마을의 중심을 만들었다. 그것이 폼페이의 두드러진 전략적 위치였다. 그 때문에 속속 이 지역의 주역들은 바뀌게 된다. 에트루스족(Etruscans), 그리이스족(Greeks), 샘족(Samnites) 등. 결국 폼페이는 로마의 지배에 들어가고, 기원전 80년엔 로마의 식민지가 된다. ‘콜로니아 베네리아 코르넬리아 폼페이(Colonia Veneria Cornelia Pompeii)'란 이름도 갖게 되었고.
화산재에 덮인 지 1천 7백년 후 사르노(Sarno) 계곡에서 터널을 건설하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가 명문(銘文) 석판을 우연히 발견함으로써 파묻힌 도시를 발견하게 된다.
1748년 실질적인 첫 탐사가 챨스 부르봉(Charles Bourbon)의 지휘로 이루어졌고, 그로부터 1세기 가량 뒤인 1860년 쥬제뻬 피오렐리(Giuseppe Fiorelli)에 의해 ‘신화 속의 폼페이’는 기적적으로 우리들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80% 정도만 빛을 보았고, 나머지 20%는 아직도 암흑 속에 갇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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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하게 죽은 일가족의 모습


3km의 긴 성벽에 여덟 개의 문을 가진 폼페이. 서쪽에는 신전들과 공공건물들이 있는 포럼(Forum)이, 앞쪽에는 대극장과 일반 주택들이, 성문 밖에는 네크로폴리스(Necropolis)가 각각 자리 잡고 있었다. 원래 바다로부터 500m 정도 떨어져 있던 폼페이. 그러나 화산 폭발 후 항만이 메워져 그 거리는 2km로 늘어났다. 물론 항만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도 알 수 없지만. 폼페이에서 가장 오랜 건물들은 기원전 6세기의 것들. 그 후 도시는 점진적으로 확장되었다. 2세기 후 로마의 지배에 대항하여 폼페이, 스타비아(Stabia),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 등의 도시가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의 장군 실라(Silla)가 이들을 재 정벌했다. 원주민들은 새 이주자들에게 공간을 내주고 떠나야 했다. 폼페이 유적들의 건설 시기가 대부분 기원전 80년경인 것도 그 때문이다.
로마에 의해 정비된 폼페이에 적용된 것은 합리적인 도시 시스템. 특히 둥글고 넓은 돌로 포장된 도로와 물 공급 시스템이 인상적이었다. 도로포장엔 베수비우스 산의 암반으로부터 가져온 둥글 넙적한 돌들을 사용했고, 사르노 강과 샘에서 물을 받아 도시 전역에 파이프로 공급해주었다. 주 송수관은 포장도로 밑에 묻혀 있었으며, 그 송수관들을 통해 부유한 주민들의 집과 공중목욕탕, 가난한 서민들이 사용하던 공공 파운틴으로 물이 공급되었다.
폼페이의 인구는 8000에서 1만명. 약 6할이 자유민, 4할이 노예들이었다. 노예들은 대부분 동방 출신들로서 교육수준도 높았다. 그 가운데는 주인보다 훨씬 교육수준이 높은 노예들도 있었다. 잘 사는 집은 2, 3명의 노예를 거느릴 수 있었고, 그보다 나은 집에서는 더 많은 수의 노예를 거느릴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들 노예들 가운데는 박사도 교사도 있었다는 사실. 어떤 노예가 원한다면 주인의 은전(恩典)을 입거나 많은 금액의 돈을 지불함으로써 자유민이 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오락가락하는 빗속에서 미로와 같은 폐허를 누비고 다녔다. 사통팔달된 도로를 경계로 나누어진 구획들에는 주택들과 공공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각각의 주택들도 사회적 지위나 신분의 차이 때문인 듯 규모나 구조에서 약간씩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호화로운 흔적들이 역력했다. 특히 화덕이 설치된 부뚜막은 그림 같은 무늬가 화려한 대리석을 매끄럽게 갈아 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뿐 아니라 몇몇 집이나 건물들엔 아직도 생생한 그림들이 벽화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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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판 '비너스의 탄생'


원형 경기장, 극장, 공공건물, 신전, 일반 주택 등을 비교적 자세히 돌아본 우리들의 뇌리에 사라지지 않는 것 세 가지가 있었다. 서쪽 메인 포럼의 아폴로와 다이애나 신전, 공중목욕탕, 그리고 그림들.
메인포럼은 폼페이의 아크로폴리스에 해당하는 장소였다. 이곳엔 아폴로와 다이애나 신전이 있었다. 그곳 정면에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활을 쏘는 아폴로. 근육질의 몸매가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얼굴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들도 태양과 달을 숭배하여 가장 높은 곳에  둘의 신전을 세워 놓았던 것인가.
다음은 공중목욕탕. 기원전 수세기의 도시인들이 공중목욕탕을 사용한 흔적을 보는 일은 경이로웠다. 서울이나 지방에서 가끔씩 사우나엘 가보지만, 그 때마다 형편없는 시설과 서비스에 불만을 느껴오던 차였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천 3, 4백 년 전의 이들이 멋진 목욕탕에서 향유하던 삶의 질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는 건물 벽이나 바닥, 혹은 천장에 남아있는 상당수의 그림들도 만났다. 화려한 채색이, 멋진 선이 아직도 살아 생생했다. 그 뜨거웠을 화산재도 그들의 예술을 망가뜨리진 못했으니, 놀랍도다.
그림들의 오브제는 신화 속의 인물들이 대부분이고, 가끔 화조(花鳥)나 사자 등 동물들도 있었다. 두루미와 원앙이 연꽃을 희롱하는 그림은 흡사 동양화를 보는 듯 했고, 모자이크 화의 섬세함은 참으로 놀라웠다. 뛰어난 형상력과 색채감, 지금의 그림들 못지않거나 오히려 능가한다고 보면 좀 지나친가.
그런데 어찌 이것밖에 없는 것인가. 그곳 담당자에게 물었다. ‘여기서 출토된 것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라고. 그러자 그는 나폴리의 고고학박물관에 가보라는 것이었다. 폼페이 그림의 진수는 모두 그곳에 가 있다는 대답이었다. 내일 나폴리에 가면 우선적으로 고고학박물관을 찾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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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의 탄생' 근처에서 발견한 그림('옥타비안의 최후'로 기억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음)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를 놀랍고 슬프게 한 것은 출토품들을 임시로 저장해놓은, 이른바 ‘뮤지엄’이었다. 그곳엔 대량의 그릇들(주로 포도주나 올리브기름을 담기 위해)이 있었고, 간간이 미이라처럼 굳어진 시신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말 그대로의 미이라가 아니었다. 화산재에 묻힌 시신들은 썩어 없어졌고, 굳어진 화산암 속에는 시신들이 사라진 공간이(사람들이 죽을 때의 모습으로) 생겨난 것이다. 훗날 발굴할 때 그 틈에 석고를 부어넣어 응고시켜 만들어낸 것들이 바로 그 시신들이었다.  
무릎 사이에 고개를 모으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엎드려 몸부림치는 모습, 옆으로 누워 새우처럼 꼬부린 모습 등.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그 순간만은 모호했다. 그들은 살아 있는 것인가, 아니면 죽은 것인가. 그들은 죽음의 재가 덮이는 순간 과연 살기 위해 몸부림친 것일까. 알 수 없었지만, 가슴에 밀려드는 슬픔만은 어쩔 수 없었다. 나약한 인간의 무력함에서 오는 슬픔이었다.
 한낮이었으면 낮잠을 즐기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일터에서 땀을 흘리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길 하나 건너 이웃집에 마실 나간 아낙도 있었을 것이고, 동네 파운틴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등물을 하던 떠꺼머리총각들도 있었을 것이다. 한 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그들은 화산재에 묻혔다. 일가족이 얼어붙은 듯 죽어있는 모습. 어른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저 젖먹이는 어째서 이런 천재(天災)의 희생이 되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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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수비우스 산(이 산이 그토록 무서운 불을 뿜었답니다)


서유럽에서 우리는 매끈한 현재진행의 역사만 보았다. 과거가 고스란히 현재로 이어지는 역사, 잘 나가는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우리는 정지된 시간과 공간을 보았다. 건물은 부서져 폐허로 남아 있었다. 대리석 기둥은 연필심처럼 부러져 나뒹굴고, 단단한 초석도 조각조각 난 채 쳐 박혀 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그건 처참한 패배이자 소멸이고, 좌절이었다. 소생의 가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역사에 대한 투철한 안목을 지니지 못한 우리에겐 일단 ‘허무’였다. 그리고 그 출발은 욕망이었다. 인간 욕망의 보편적인 귀결은 허무임을 그들은 깨어진 돌조각으로 웅변하고 있는 듯 했다.
우리는 잠시 혼란한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의 생각을 수정할 수 있었다. 과연 지금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며, 지금 죽은 듯이 보이는 그 역사가 과연 완전 소멸된 것일까.
아닐 것이다. 지금도 9·11테러, 이라크 전쟁 등 인간 문명에 관한 패러다임을 바꿀만한 사건들은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들은 물질의 폐허가 아닌 인간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또한 ‘쯔나미’처럼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초토화시키는 자연재해 또한 빈발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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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 변한 구시가지와 현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신시가지의 대비되는 모습


폼페이에서 인류문명이 봉착할 수도 있는 위기의 가능성을 발견한 우리. 약간은 초조한 마음으로 인근의 나폴리로 향했다. 그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폼페이 유물들을 통해 폼페이의 문명사적 의미를 좀더 살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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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