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9. 2. 2. 02:32
 

자연의 방법으로 냉․난방이 이루어지던 왕의 목욕실을 지나자 워싱톤 어빙의 집필실이 나왔고, 벽면에는 어빙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어빙이 이곳에 왔을 땐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한다. 이슬람에 의해 건설된 그라나다가 기독교의 지배로 들어가면서 미처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빙의 글 <<알함브라 이야기>>가 알함브라 복원의 당위성을 일깨워주었고, 그로부터 반복되는 복원 작업을 통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한다. 말하자면 어빙은 시간의 구비 속에 함몰될 뻔한 알함브라를 구한 셈이다. 이 방을 보면서 귀국하는 대로 <<알함브라 이야기>>(정지인 옮김, 생각의 나무, 2007)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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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왕궁의 내부 장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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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로스 5세 궁전에 보관, 전시중인 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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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층이 다른 양식으로 건축된 카를로스 5세 궁전>

왕궁의 남쪽 부분에서 미완성의 건물인 카를로스 5세 궁전을 만났다. 르네상스 양식의 정사각형 2층 건물로서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의 건축양식을 보여주었다. 현재는 국제 음악회나 무용제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건물이었다.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같은 가수들이 야외음악회의 장소로 사용한다니 멋진 일이었다. 1층에는 이슬람 미술관, 2층에는 알함브라 공예품을 전시하는 주립 미술관으로 쓰인다고 하는데, 우리가 방문한 날은 공교롭게도 휴관일이었다. 관광객들은 울림효과가 큰 1층 공간의 한 가운데로 나아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노랫소리를 흉내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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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2. 2. 02:22

 나자리 왕궁은 이슬람 문화의 정수였다. 메수아르의 방(Sala del Mexuar)을 출발하여 헤네랄리페에서 우리의 관람은 끝이 났다. 메수아르의 방은 술탄이 집무도 하고 예배도 보던 방으로 사면의 벽이나 천정이 아라비아 문양의 타일로 덮여 있었다. 이슬람 문화에서 시작되어 중국의 도자기 문화와 만나 더욱 고급화 된 것이 타일이다. 이 방에서 아라야네스 중정(Patio de los Arrayanes)으로 나가니 양 옆으로 향내 그윽한 아라야네스가 심어진 직사각형(남북 35m, 동서 7m)의 연못이 나오는데, 작은 원형의 분수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의 조경에는 단 한 명의 노예도 동원되지 않았을 만큼 민폐를 끼치지 않은 역사(役事)였다는 점이 이채로웠다. 타지마할 등 동서의 건축술이 만나 이루어진 것이 이 왕궁이었던 만큼 노예들의 노역(勞役)이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이곳 연못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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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함브라의 아름다운 타일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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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아라야네스 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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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타일 문양>
 
7개의 아름다운 아치 앞에는 정사각형의 공간인 대사의 방이 있었다. 술탄이 외국사절들을 알현하던 장소로서 그림 타일의 벽면, 상감 공예의 천장, 바닥 등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덮인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가니 사자의 중정(Patio de los Leones)이 나타난다. 이곳은 술탄을 제외한 남성들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던 하렘 구역이었다. 정교한 석회세공과 유대인의 12부족을 상징하는 열두 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원형분수가 눈길을 잡았다. 사자의 궁전을 나서자 파르탈 정원(Jardines del Partal)이 앞길을 막아선다. 연못 주위로 꽃과 나무들이 서 있고, 연못에는 귀부인의 탑이 서 있으며, 두 자매의 방과 그 주변의 아름다운 장식들은 우리의 눈을 사로잡았다. 술탄이 가장 사랑했던 카톨릭의 두 자매를 위한 방으로, 그들의 위한 사랑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으며, 모카라베스 양식으로 건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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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렘 구역의 아름다운 열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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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렘 구역의 아름다운 열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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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싱턴 어빙 집필실의 표지판>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2. 2. 01:58


 다음 날 호텔에서 이른 아침을 먹은 다음 서둘러 나간 곳이 이번 여행의 꽃인 알함브라 궁. 멀리 보이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엔 비구름이 걸려 있고, 나그네의 외투 깃으로 빗방울이 파고들었다. 과연 알함브라는 이슬람 문화의 정수였다. 가이드는 산책하는 기분으로 알함브라를 느껴보라 했지만, 알함브라에 엉겨있는 역사의 고비들이 너무 복잡하여 나그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이 미국 공사관의 자격으로 마드리드에 재직하던 중 알함브라 궁에 머물면서 무어(Moor)인들의 전설을 기록한 <<알함브라 이야기(Tales of the Alhambra)>>에 넘쳐나는 낭만적 상상으로도 이미 지쳐있는 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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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함브라궁의 출입구에 모여선 관광객들. 이 날 비가 내리고 있었다>
 
13세기 전반, 옛날부터 존재하던 알카사바를 확장하면서 궁궐의 건축이 시작되었고, 1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알함브라는 현재의 모습을 드러냈다. 왕궁, 카를로스 5세 궁전, 알카사바, 헤네랄리페(General Life)으로 구성된 알함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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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카사바에서 내려다 본 창고 터, 무기고 터, 군사들의 숙소 터>

 우리는 전망대를 빼곤 흔적만 남은 알카사바에 맨 먼저 올랐다. 벽채의 반 이상이 날아가고, 아래쪽 흔적만 남은 공간들이 바둑판처럼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라나다 왕국의 무하마드 1세가 9세기에 이미 존재하던 성채를 정비․확장한 곳이다. 군인들의 막사, 식량창고, 목욕탕 등이 흔적만 남아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저 멀리로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보이고 가까이는 민간 가옥들의 내부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벨라탑(Torre de Vela)의 전망고 그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시에라 네바다의 정상에 덮인 흰 눈처럼 왕궁 근처 민가들의 벽채도 모두 새햐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헤네랄리페~알바이신 지구, 사크로몬테 언덕, 그라나다 중심부 등이 이곳에선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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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의 탑에서 내려다 본 그라나다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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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의 탑에서 내려다 본 그라나다 민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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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2. 2. 01:35


 2009년 1월 24일 저녁에 도착한 그라나다. 지중해로부터 4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이 도시는 어둠 속에서도 화려했다. 도착하자마자 호텔 식당에서 대충 저녁을 때운 우리는 플라멩코 공연장으로 직행했다. 알바이신 지역의 따블라오 공연장. 허름하고 좁좁한 공연장이 정겹긴 했으나 삐걱대는 의자가 불편했다. 그러나 바로 눈앞에 설치된 한 두 평쯤의 나무 무대, 그곳을 적시는 무희들의 열정과 땀방울은 우리를 환희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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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객들을 무아지경으로 인도하는 플라멩코 무희의 정열>
 
남성 가수 두 사람은 가늘면서도 찢어질 듯 높은 목소리로 플라멩코의 서사를 노래했고, 기타리스트 두 사람은 애절한 톤으로 쉬지 않고 현들을 뜯어댔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네 사람의 무희들. 셋은 함께 나와 번갈아가며 플라멩코를 추었고, 앳되면서도 가냘픈 동남아계 아가씨가 혼자 나와 밸리댄스를 추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추는 플라멩코와 밸리댄스를 보면서 몸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육감의 본능이 스멀스멀 살아나오는 것은 나만의 경험이 아니었으리라. 아름다운 플라멩코 무희들이 얼굴의 근육을 일그러뜨리면서 정열의 활화산을 터뜨리는 모습에 우리 모두는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춤사위에 피로가 풀리기도 하고, 또 다른 피로는 쌓여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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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밸리댄스의 춤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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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1. 27. 05:14
 

돈키호테와 작별한 우리는 끝없는 평원을 달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넘었다. 산맥의 정상엔 희끗희끗 눈이 덮여 있었다. 분지형의 비옥한 땅, 그라나다. 로마제국과 이슬람 왕조의 마지막 수도였던 곳이다. 시내는 화려하고 복잡했으며, 호텔에는 관광객들이 득실거렸다. 점점 지중해에 가까워지기 때문인가, 날씨도 온화했다. 여기서 밤늦게 플라멩코를 보기로 했다. 알바이신 지역의 따블라오 플라멩코 공연장을 찾았다. 200에 가까운 객석이 가득 찬 가운데 두 명의 악사와 두 명의 가수, 그리고 세 명의 무희가 등장했다. 손바닥 만한 무대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춤을 엮어나가는 세 여인은 말 그대로 정열의 화신이었다. 가까이서 그녀들의 땀방울을 맞아가며 추임새 ‘오레~’를 연발하는 관객들 역시 그녀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열광했다. 두 시간 동안 쉼 없이 관객들을 오르가슴의 세계로 이끌어간 무희들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단순히 춤의 기교로만 설명될 것은 아니다. 무대가 파하고 흩어져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자연과 인생, 역사와 전통이 함께 어우러진 예술의 정수가 바로 플라멩코임을 깨닫게 되었다. 스페인에 발을 들여 놓은 뒤 나는 처음으로 스페인 문화의 알맹이 하나를 입에 물 수 있었다.

우리의 닫힌 가슴을 열고, 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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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1. 27. 05:10
 

똘레도를 출발하여 그라나다로 향하는 길. 드넓은 스페인의 평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가도 가도 산하나 보이지 않는 평원이었다. 들판은 정연하게 늘어선 올리브 나무들. 뿌리와 꼭지만 남아 새 계절의 발아(發芽)를 꿈꾸는 포도나무들, 장미의 농원, 그리고 푸른 보리밭이 전부였다. 과연 스페인은 농업의 대국, 풍요가 땅 전체에서 넘쳐 났다. 면적 505,955평방킬로미터, 남한 면적의 약 5배에 달하면서도 인구는 4,350만명에 불과했다. 1인당 연평균 소득 3만 5, 6천불에 이르는 부국의 기틀이 이처럼 평평하고 기름진 땅에서 이루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구역이 바로 라만차 지방. 돈키호테의 고향이었다. ‘건조한 땅’을 이르는 아라비아어 ‘라만차’. 작은 나라 대한민국 백규의 눈에는 부럽기 짝이 없었으나, 보기에 따라서는  황량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곳곳에 심은 올리브 나무들은 이곳의 황량함을 덜어주고 있었다. 이곳을 배경으로 돈키호테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시대와 사회에 무언가를 말하고자 한 세르반테스(1547~1616)의 의중이 라만차를 달리는 내내 내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켰다. 그가 태어나 활약하던 시기는 이미 중세가 끝난 시점이었으나, 아직도 구체제가 남아 세력을 발휘하던 때가 아니었을까. 세르반테스로서는 새로운 질서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요구와 시대정신을 외면할 수 없었으리라. 돈키호테라는 정신 나간 인물을 등장시켜 구체제의 시대착오적 허구를 통렬히 웃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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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게소 벽에 붙어 있는 동키호테>

 버스를 타고 지나다가 풍차마을을 만났다. 캄포 데 크립타나(Campo de Criptana)! 복잡한 마을 이름이었으나 언덕 위엔 10개 정도의 풍차들이 서 있었다. 언덕에 올랐다. 거대한 풍차였으나, 이미 맥박은 정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언덕에 불어대는 바람은 사정이 없었다. 바람은 모자를 날리고 입을 얼려, 말을 이룰 수 없었다. 아, 이 바람. 이런 바람이라면 그 옛날엔 웅웅거리며 이 거대한 풍차를 돌릴 수 있었겠다! 어둑발이 내린 평원 저쪽을 걸어오던 돈키호테에게 언덕 위에서 소리 내며 돌아가는 풍차는 아주 도전적인 존재로 등장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장창을 비껴들고 풍차에 달려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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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의 등쌀을 견디지 못하고, 풍차 아래쪽의 작은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에 언 몸을 녹이며 라만차의 아랫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들이 정겨웠다. 저 동네 어느 골목에선가 로시난테에 몸을 맡긴 돈키호테가 산초 판사를 대동하고 뛰어나올 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시내에는 요소마다 돈키호테의 상이 서 있었다. 소설 <<돈키호테>>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었다.

 캄포 데 크립타나로부터 차를 달려 30분 만에 도착한 곳이 푸에르토 라피세(Puerto Lapice). 이곳에서 ‘벤타 델 키호테’를 만났다. ‘돈키호테의 정자’로 번역되는 이름의 허름한 주막 겸 레스토랑이었다. 돈키호테가 대관식을 가진 곳이 바로 이 집이라는 것. 우물도 있고, 장창을 곧추 잡은 돈키호테도 서 있었다. 가게에는 돈키호테의 캐릭터 상품들이 그득했다. 돈키호테를 뜯어먹고(?) 사는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를 갖고 있는 스페인과 스페인 사람들이 새삼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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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