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10. 6. 21. 11:20

제 노릇 잘 하기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공자(孔子)에게 정치를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며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고 말했다. 논어-안연편의 내용이다. ‘~다워야 한다’는 것은 각자에게 맡겨진 노릇을 잘해야 한다는 뜻이다. 수백 쪽이 넘는 정치학 교과서들보다 이 한 마디가 훨씬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현실 정치의 난맥상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총체적인 혼란에 빠져 있다. 천안함 사건 이후 국가 안보에 중대한 문제가 있음이 밝혀졌고, 지방선거가 끝나자 여야 혹은 보수와 진보세력은 국민의 뜻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하며 마주 달리는 기차들처럼 충돌을 거듭하고 있다. 수뢰(收賂)와 권력남용 등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의 독직(瀆職) 사건이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탈세나 주가조작 등 기업인들의 탈선도 수시로 드러나고 있다. 추상같은 법의 권위로 범죄를 다스려야 할 검찰이 민간인들로부터 돈과 접대를 받아온 부끄러운 관행도 일부이긴 하지만 드러나고 있다. 학교장과 행정직을 돈과 연줄로 사고 팔아온 비리나 빗나간 이념교육으로 어린 학생들을 오도하는 일부 교사들의 행위는 갈 데까지 가버린 교육계의 한심한 현실이다. 그 뿐인가. 아동 성폭행 사건들의 범인 대열에 이제는 나이 든 어른들까지 끼어들고야 말았다.

 

우리는 천안함 사건을 통해 기강이 무너진 군의 현실을 보게 되었다. 감사원의 조사가 군의 특성을 무시한 채 진행되었다고 아무리 항변을 해도 엄연한 군기(軍紀)의 붕괴를 합리화할 수는 없다. 안보의 현장에서 사건은 언제나 생길 수 있다. 사건이 발생한 것도 큰일이지만 사건의 수습과정이 지리멸렬했던 것에 대하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군인으로서 ‘제 노릇’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방선거 결과를 가지고 국정을 이끌고 있는 여당은 참패를 인정하면서도 이렇다 할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으며, 승리에 도취된 야당은 무리한 요구로 여당을 압박하고 있다. 각자가 추구하는 이념에 따라 국론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으며, 심지어 어떤 시민단체는 천안함 사건을 논의하는 유엔 안보리에 정부를 헐뜯는 편지를 보내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정치인들이나 시민단체가 ‘제 노릇’을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학교장과 행정직을 돈이나 연줄로 사고파는 행위,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에게 편향된 이념교육을 시키는 일 등에서 우리 교육의 붕괴를 점치게 되는 것도 교육자들이 ‘제 노릇’을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어른들이 아이들을 성욕 해소의 대상으로 보는 일이야말로 인간으로서의 기본을 포기한 일이다. 자신의 자녀들에게만 부모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 어른들 모두에게 부여된 임무이자 어른 노릇의 참뜻이다. 사회를 짐승들이 들끓는 정글로 바꾼 것은 어른들이 ‘제 노릇’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치는 간단하다. 모두가 ‘제 노릇’을 하면 된다. 자기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면, ‘제 노릇’이 나올 수 없다. 공익과 공리(公理), 도덕적 판단을 우선하여 법이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고 권리를 행사하면 충실한 ‘제 노릇’이 된다. 일의 수행 과정에서 꼼수를 부린다면 그건 결코 ‘제 노릇’이 아니다. 꼼수는 자신을 망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선진국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것도 지도층의 꼼수 때문이다. 지도층의 꼼수는 국민들을 오도한다. 국민들까지 꼼수의 유혹에 넘어가면 사회는 대책 없는 혼란에 빠진다.

 

앞서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던 제나라의 경공은 “임금이 임금 노릇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못하고 아비가 아비 노릇 못하고 자식이 자식 노릇 못하면 비록 곡식이 있으나 어찌 먹겠는가?” 라고 덧붙였다. 지도층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사회를 총체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은 채 태연히 밥을 먹을 수는 없다. 아비 노릇, 자식 노릇을 못하는 것은 사실 ‘제 노릇’을 못하는 임금과 신하가 있기 때문이다. 지도층만 ‘제 노릇’을 잘 해도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따라간다. 지금 우리나라 현실이 구한말의 혼란기를 닮았다는 평을 하는 논자들도 있다. 돌고 도는 게 역사라지만 지도층이 ‘제 노릇’을 못하는 것만큼은 닮아서 될 일이 아니다. 꼼수를 버리고 모두가 ‘제 노릇’을 성실히 수행하는 대장정(大長征)에 참여할 때다.

 

조규익(숭실대 교수/인문대 학장)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