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5. 3. 3. 17:01

 


떠나기 전날 찾아온 게리와 함께 숭실교정에서

 

 

 


어느 여름날 찾아온 두 사람.
왼쪽부터 게리, 백규, 세바스티안(시조를 전공하는 독일인) 

 

 

 

게리(Gary Younger)를 보내며

 

 

 

작년 9월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차세대 한국학자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6개월을 보낸 게리(Gary Younger)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간 한국말을 열심히 배운다고 했는데, 30여년 모어(母語)인 영어만 쓰다가 처음으로 한국어를 접해서인가. 귀국 인사차 연구실로 찾아온 그의 한국어 실력을 테스트하다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참 외국어를 익히는 것이 이렇게도 어렵구나!’란 깨달음과 함께, 나이 들 만큼 든 지금도 영어 책을 놓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그에게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 없다.

 

***

 

201391일부터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 역사과에서 나는 한 학기 예정의 풀브라이트 방문학자(Fulbright Visiting Scholar)’ 생활을 시작했다. 맨 처음 공항으로 픽업 나왔던 중국인 두 교수(Du, Yongtao), 학과의 비서인 수잔(Susan Oliver)과 다이아나(Diana Fury) 등이 일상적으로 만나던 사람들이었고, 연구실로부터 가까운 우편함이나 복사실 혹은 간식이 준비되어 있던 휴게실에서 만나는 교수들이 주로 접하는 대학인들의 대부분이었다. 사실 두 교수도 강의실-연구실-복사실등을 통통거리며 굴러다니듯 바쁘게 지내는 바람에 대면할 틈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쯤이나 되었을까. 두 교수가 메일과 전화로 강사 중 누군가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보내 왔다. ‘한 공간에 살면서 그냥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 되지, 중간에 누구를 넣는 건 뭐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면서도 ‘Any time okay!’라는 답신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도 한 주일이나 되어서야 그는 조심스럽게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전형적인 코카서스 인종의 미국인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예의 바르다고 할 수도, 낯을 가린다고 할 수도 있는 그의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있다가 사직한 뒤, 이곳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미 외교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젊은이였다.

 

그 때부터 우리는 간간이 만났다. 주로 내 연구실에서, 가끔은 학교 안팎의 식당들에서. 대화의 주제는 그와 내가 번갈아 정했다. 나는 한국의 정치 외교적 이슈들에 관해 주로 Korea Herald에 실리는 칼럼들을 소개했고, 그는 NYTWP 등에 실리는 미국의 정치 외교 관련 기사들을 준비해왔다. 내가 말하는 한국의 사정, 그가 말하는 미국의 사정은 수산시장의 새벽 경매에 나온 물고기들처럼 늘 싱싱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항상 종횡무진이었다. 그는 내게 최고의 미국 선생님, 나는 그에게 최고의 한국 선생님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가끔 호기를 부리며 여기서 나를 몇 달 동안 만나고 직접 한국으로 가서 공부하게 되면, 머지않아 당신은 미국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되리라!”고 큰소리치며 그에게 용기를 불어 넣었다. 사실 그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고, 그런 이유로, ‘돈 한 푼 안들이고’, 아니 오히려 약간의 돈이라도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한국에 체류하며 한국을 배우고 싶어 했다. 내 분야이든 정치 외교 분야이든 외국인의 한국 연수에 관한 정보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하던 나로서 약간 켕기기는 했지만,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대책도 없이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러나 내 미국 체류 예정기간이 점점 줄어들면서 그도 내 눈치를 보는 듯 했고, 나 역시 뱉어놓은 말들때문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등에 연락을 넣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답이 왔다. 게리에게 맞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차세대 한국학자 프로그램으로, 외국의 젊은 학자 혹은 학자 지망생이 돈을 받으며 공부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목 말라오던 차에 발견한 오아시스가 바로 이런 것인가. 다음날 게리를 만나 상세한 정보를 넘겨준 다음, 두 주의 여유를 줄 테니 양식에 맞추어 작성한 프로포절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득달같이 프로포절을 작성하기 시작하여 지도교수의 확인을 거친 다음 약속날짜 이전에 건네주는 게 아닌가. ‘한국전쟁 이후 한-미 외교 현안들의 이념적 기조라는 제목의 글. 아마 그가 박사논문으로 쓰려고 준비하던 내용의 일부인 듯, 논리가 매우 치밀하고 온당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기대지평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라 판단했는데, 과연 그는 선정되어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그는 처음 넉 달 동안 연구원 내에서 한국어를 열심히 수강했고, 나머지 두 달 동안은 국립중앙도서관을 오가며 자료수집에 몰두했다. 간혹 내게 찾아와 삼겹살에 소주를 즐기며 자신의 한국생활을 말하곤 했다. 작별의 인사를 하러 온 날. 그의 턱과 볼을 에워싼 멋진 수염을 보게 되었다. 객지에서 매일 수염 깎는 일이 귀찮아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 자신의 변화를 가시화 시키고자 하는 뜻이 들어 있었으리라.

 

많은 말들을 남긴 채, 또 멋진 수염을 통한 모종의 암시를 남긴 채, 그는 떠났다. 난생 처음 겪는다는 해외 체류이자 한국 체류 6개월. 그는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까. 내가 큰소리 친 것처럼, 머지않은 장래에 그는 미국 내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될 수 있을까.

 

 

 


    추석 지난 뒤 문현 선생의 작품 발표회에서. 왼쪽부터 세바스티안, 게리, 문현 박사, 백규, 
송지원 박사(국립국악원 연구실장), 케이트 교수(영국 런던대 음악과) 등과
숭실대 국문과 학생들(이수빈, 박문성, 리아, 최연, 권리나) 

 

 


2014년 추석날의 멋진 모임.
선무치료학의 대가 이선옥 박사 자택 뒷산의 '노래와 담소 모임'에 합류한 게리와 세바스티안.
왼쪽에서 두번째 인사가 이선옥 박사, 그 다음이 범패의 대가 범진 스님, 백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5. 6. 20:45

 


두 교수 부부와 처음 만나던 날, 저녁식사 자리

 

 


자신의 연구실에서 두 교수

 

 


필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교수

 

 


초대 받아간 두 교수의 집에서

 

 


두 교수의 요리솜씨

 

 


스틸워터의 중국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미국의 중남부에서 아시아 역사를 가르치는 젊은 학자: 용타오 두[Yongtao Du/杜勇濤] 교수

 

 

작년 827. 미국에 도착한 우리를 오클라호마 시티 윌 라저스[Will Rogers] 공항으로 픽업 나온 사람이 용타오 교수였다. 한국인인 우리는 젊은 그를 아시아식으로 두 교수라 불렀지만, 미국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용타오라 불렀다. 그의 중국 이름은 두용도(杜勇濤)’. 그의 출생지인 중국 화중(華中) 지역의 하남성(河南省)은 중원문화의 발상지로서 빛나는 인물들이 배출된 곳이다. 도가(道家)의 시조 노자(老子), 동한(東漢) 시절의 과학자 장형(張衡), 당송팔대가 중에서 첫 손가락으로 꼽히는 문장가 한유(韓愈),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의 저자인 승려 현장(玄獎), 남송의 영웅 악비(岳飛)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당나라의 큰 시인 두보(杜甫)를 빼놓을 수 없으니, 두 교수야말로 바로 그 두보의 후예 아닌가.

 

두 교수와의 인터뷰

 

 

OSU 역사학과의 유일한 동양인 전임교수인 그는 늘 통통통’ 연구실과 강의실을 오가며 분주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는 하남대학교(Henan Univ.)에서 학사학위를, 베이징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일리노이 대학교[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일리노이 대학교와 와쉬번 대학교(Washburn Univ.)에서 강의를 하다가 2009년부터 이곳 OSU의 역사학과로 옮겨 재직하는 중이었다.

 

부의 교훈: 명나라 말기 혜주(惠州)의 상업문화와 지방주의”, “초지방적(超地方的) 혈통과 고향 애착의 로만스”, “경쟁적 공간 질서: 명나라 말기의 상업지리학등 탁월성과 독창성을 보여주는 논문들을 발표했고, ‘하바드 옌칭의 논문 작성을 위한 현장 연구 지원’, ‘탁월한 지리학사(地理學史) 학자에게 수여하는 리스토우 상’, ‘리칭 학술상등 여러 번의 학술상과 연구지원의 수혜를 받고 있는, 촉망받는 신진학자가 바로 그였다. 미국의 여타 지역들과 중국을 오가며 부지런히 논문을 발표하는 그의 모습이 돋보였다. 중국 역사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역사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면서 동양에 관한 미국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 점도 좋아보였다.

 

미국 도착 뒤 시차적응도 되지 않은 나에게 한국사에 대한 물음들을 끊임없이 던졌다. 신라의 왕통, 삼국 간 정치제도의 차이, 왕건의 출신, 문벌귀족, 양반, 본관 등등. 사실 나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즉석에서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쉼 없이 건네는 그였다. 자신의 전공인 중국사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라도 주변국의 역사를 알아야겠더라는 그의 말은 그간 한국인이나 일본인을 만나지 못함으로써 겪을 수밖에 없던 자신의 지적 갈증을 명증하게 드러냈다.

 

우리는 잠깐씩 수시로 만나면서 --의 역사적 접촉과 현실을 논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중국말을 한 마디도 못하고 그 또한 한국말을 한 마디도 못했지만, 고맙게도 영어가 우리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었다. 그러다가 갈증이 도지면 서로가 가끔씩 알고 있는 한시들을 써 보여주며 정서적 공감대를 확인했을 뿐 아니라, 근대 이전 동아시아에 정착되어 있던 중세적 보편주의의 실체와 힘을 확인할 수도 있었으니, 제대로 쓰인 역사에 대하여 무한한 신뢰를 갖고 있던 나로서는 감동적인 체험이었다.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이 북경의 유리창이나 그들의 사저(私邸)에서 필담으로 교유하던 그 시절의 광경을 우리 또한 제3국 미국의 한 구석에서 제법 재현한 셈이니, 참으로 희귀한 일 아닌가.

 

중국인인 그에게 나는 중화주의(中華主義)’의 협소함에서 벗어나라는 주문을 누차 건넸고, 그 역시 마오쩌둥을 좋아하지만, 미래지향적 행동지표로서의 글로벌리즘을 잊지 않고 있다는 말로 화답하곤 했다. 학문의 바다 미국에서 조만간 그는 아시아사의 최고 전문가로 성장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는 분명 민족주의의 편협한 굴레에서 벗어나 완벽하게 균형 잡힌 미래의 지식인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으리라 믿어본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8. 31. 23:25

 


하늘에서 내려다 본 오클라호마시티 시가지


하늘에서 내려다 본 오클라호마 산하


한가한 오클라호마 공항에서


오클라호마 공항에서 확인한 자연의 위력


공항으로 픽업 나왔던 OSU의 Du 교수 내외와 스틸워터의 중국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하며

 

 

스틸워터(Stillwater), 그 평온과 정밀(靜謐)의 입체적 공간성

 

 

27일 오전 11[한국 시각] 인천공항을 출발, 큰 원을 그리며 태평양 상공을 건넌 OZ23627일 오전 950[미국 시각] 시카고의 오헤어 공항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내외국인들로 장사진을 친 가운데 두 시간이 넘는 검색과 입국 수속을 거친 오후 230. 드디어 오클라호마로 가는 작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그로부터 두 시간 후 한적한 오클라호마 공항에 도착했다.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오클라호마의 산하(山河)이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 뿐. 수없이 가로 세로 직선으로 그어진 도로망은 마치 신의 솜씨인 듯 망망한 평원을 바둑판처럼 분할하고 있었고, 그 위로 부드러운 구름뭉치들이 한가롭게 떠다니고 있었다. 평화 그 자체의 정물화였다. 그 위에 어찌 토네이도의 폭력을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바닷가 모래사장에 한참동안 공들여 이쁜성채를 만들어 놓은 어린아이가 갑자기 생겨난 심술로 마구 휘저어 놓듯, 인간의 앞에서 조화를 부리고픈 신의 의지도 그렇게 작동되는 것일까. 한적하면서도 요새같이 든든하게만 보이는 공항의 화장실 팻말 위쪽의 토네이도 피난처[Tornado Shelter Area]’란 팻말을 보고서야 지난 5월의 악몽 같았을 토네이도의 현장이 바로 이 지역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

순식간에 짐을 찾은 뒤, 픽업 나온 OSU 역사과의 Du[Yongtao Du] 교수를 만난 것이 오후 5시 반. 한적한 길을 두 시간여 달려 드디어 스틸워터에 도착했다. 오클라호마가 카우보이의 본산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스틸워터는 소떼를 몰던 카우보이들이 소들과 함께 코를 박고 물을 마시며 갈증을 지웠을 만한, 조용한 평원이었다. 시차로 감기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Du 교수 부부를 따라간 곳은 자신들의 홈 푸드를 대접하겠다며 데려간 대형 중국음식점이었다. 그들의 호의와 성의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그곳 식당의 음식을 통해 강남의 유자를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속담을 새삼 확인한다. 잔디 곱게 깔린 구릉에는 나지막한 대학 아파트들이 널찍널찍 앉아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조용한 곳이 바로 우리가 들어갈 윌리엄스 아파트[101 N. University Place Apt #1]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기 무섭게 시차에 지친 아내는 곯아떨어지고, 나는 나답게불면의 새벽을 맞아야 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