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 2. 27. 10:39

50년이 한 나절이라?

 

 

 

초등학교 동기 박병철(교안유아교육협회 회장)

일산에서 번개를 때리고,^^ ‘당연 참석 1으로 나를 지목했다.

지면이나 SNS를 제외하곤 초등학교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와 그들이었다.

막판에 지방 행사핑계를 대고 불참을 통보하니, 몹시 낙담하는 그였다.

그 후 며칠 동안 마음에 갈등이 일었다.

50년 세월의 격랑을 무난히 넘어, 나는 그들과 해후할 수 있을까?

 

지방에서의 이른 아침 출발은 무리였지만, 가기로 했다.

숨차게 달려가니 일산 중심가의 한식집에 몇몇 동무들이 모여 있었다.

, 50년 전 그들의 해맑은 표정이었다!

얼굴 한 복판에 남아 있는 추억의 모습들.

이름을 부르니 대답이 돌아왔다.

그로부터 그 시절의 이야기들이 누에고치의 실처럼 술술 풀려나왔다.

영민한 그들의 기억력에 잠자던 내 기억의 창고가 드디어 빗장을 푼 것이다.

 

흘러간 50년이 겨우 한 나절이었다!

그간 나는 무얼 찾아 어디를 헤매고 있었을까.

삶의 파도를 넘으며 많이 지워지긴 했지만,

희미하게나마 어둡던 시절의 개구진 흔적들이 얼굴 한 복판엔 남아있었다.

돈을 많이 번 친구도, 자식들을 잘 둔 친구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친구도, 그저 매일매일 즐겁게 살아가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지금의 얼굴들은 잠시 벗어둔 채

마주 보고 착하게 웃으니 좋았다.

서로 확인하는 것이 초심(初心)’이고 동심이었다.

 

세월이 험악하여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따지고 드는 옳고 그름의 논쟁속에

배려와 사랑이 사라져 버린 시절 아닌가.

그러나,

해맑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누구에겐들 없으랴.

헐벗음과 굶주림의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한

베이비부머 세대의 중심에 서 있는 우리다.

남들이야 알아주든 말든

그런 시절에도 웃음을 잃지 않던 우리였기에

지금 이 순간의 행복도 누릴 수 있는 것 아닐까.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등짝에

서해의 낙조가 따스하게 비쳐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오늘 가졌던 만남의 추억을

삶의 에너지로 바꾸어 자신들의 내면에 가득 충전했으리라.

그 에너지가 소모되고 나면

누군가가 나서서 또 한 번의 번개를 때리겠지.

번개를 때리고 맞으며

이 모진 세태를 견뎌내는 지혜를 키우리라.

그 지혜가 모여

살벌하고 위험하며 앞이 보이지 않는 나라의 어려움도 다독여 나갈 것이다.

동무들 만세!!!

 


그 시절의 내가 대체 어디에 서 있단 말인가.ㅠㅠ

 

 

 


취하기 전에 한 컷!

 

 


주명문-김영도-박병철, 그리고 싱싱한 선인장들

 

 


주명문-김희순-김영일-조정임-김영도-조순옥-박병철, 선인장같은 그대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0. 9. 19:51

책 단상

 

 

 

초년병 시절. 책을 한 권 내면 세상의 한 모퉁이라도 정복한 듯 설렘으로 붕 뜬 채 며칠을 지내곤 했다. ‘사람들이 아마 요건 모르고 있었을 거야!’ 초등학교 소풍 날 보물찾기 시간, 후미진 곳에서 하얀 쪽지를 찾아낸 뒤 콩닥거리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던 아이가 그러했으리라. 책도, 책을 내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 내로라하는 학계의 거물들이 존재감을 드러내시던 유일한 지표가 저서였다. 잘 나가는 일간지들의 신간안내에는 무게 있는 학술서들이 가끔 소개되었고, 나는 그 기사를 오려갖고 다니다가 서울 가는 기회에 그것들을 사서 소중하게 모셔오곤 했다. 요즘과 달리 방방곡곡의 제제다사들이 총집합하는 학회에 갈 때는 혹시 이 거물들을 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최소한 그 분들이 출판한 책 제목과 목차라도 몇 번씩 훑어보고 가는 것이 내 습관이었다.

 

 

저자의 급에 따라 달랐겠으나, 책을 내면 초판 1,000권이 기본이었고, 초짜인 내게는 인세조로 100부가 들어오는 것이 다였다. 평소 손꼽아 두었던 학계의 어른들과 동학들에게 정성스레 헌사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드리는 것도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누구 말대로 출신이 한미하여’^^ 대면할 기회는 없었지만, 책과 논문 혹은 입소문을 통하여 익히 알고 있는 그 분들에게 내 목소리를 보낸다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었다. 이 분들로부터 무슨 반응이 오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없었고, 다만 비웃음이나 사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뿐이었다. 몇 차례 그런 일 들이 반복되는 중에도 가뭄에 콩 나듯몇 분들로부터 반응이 있었는데, 잊히지 않는 몇몇 분들이 있다. 소재영, 김대행, 이규호, 성호주, 박노준, 이상보, 조재훈 선생님 등이 그런 분들이었다. 어떤 분은 전화로, 어떤 분은 편지 혹은 엽서로 감사의 마음을 보내주셨는데, 의례의 수준을 넘는 곡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돌아가신 성호주 선생님은 내게 큰 가르침을 주신 분이었다. 책을 보내드리고 나서 한 주쯤 되었을까. 소포가 하나 배달되어 왔다. 뜯어보니 속옷과 양말 한 세트, 그리고 정성스런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의 내용도 물건도 감동이었다. 그로부터 책을 받으면 최소한 답장만이라도 정성스럽게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매우 혼잡한 어떤 인사의 서재

 

 

그 뒤로 세상은 마구 변했다. 누구 말대로 아무나 책을 내는시절이 되었다. 학술서의 원고를 들이밀면 출판사에서도 외면을 한다. 거짓말이나 허접한 거라도 좋으니,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원고를 가져 오란다. 돈이 될 만한 원고를 말하는 것이리라. 마음만 먹으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학술서를 낼만한 모모 인사들도 이젠 가벼운 대중서를 통한 매명(賣名)의 덫에 걸린 것 같아 안타까운 요즈음이다. 재미있는 책도 안 읽는 세상이니 고리타분한 학술서를 읽을 턱이 없다. 학술서는 초판 500부 혹은 300부가 고작이다. 그나마 정부에서 우수학술도서제도를 통해 돈을 주니 찍어내는 것이겠지만, 우수학술도서라는 것도 로또일 수밖에 없다. 선정되는 우수학술도서 저자들의 분포를 보며 심사위원들을 점쳐보기도 하는데, 나중에 공개되는 것을 보면 대개 맞는다. 누군가는 그것도 권력이라고, ‘짬짜미가 있다는 말도 하지만, 대체 한 두 번 책을 만지작거린 뒤 수천수백 권의 책 더미 속에서 어떻게 우수학술도서를 골라낸단 말인가.

 

 

이제 책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책을 놓아둘 자리가 없는 아파트는 현대판 노마드의 텐트일 뿐이다. 어느 곳에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는 소문에 서둘러 텐트를 걷는 노마드처럼, 춤추는 아파트 시세에 따라 수시로 짐을 싸는 존재들이 오늘날의 우리다. 그런 와중에 책만한 천덕꾸러기도 없다. 무겁지, 돈도 안 되지, 놓을 자리도 없지... 이삿짐 센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책짐이다. 그래서 이사철 아파트의 쓰레기장에는 책들이 수북수북 쌓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배운 도둑질이라고, 책을 내지 않을 수 없다. 책을 내면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사볼 이유는 없으니, 내 돈을 들여서라도 사서 보내주어야 한다. 요즘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저 물어본다. “내가 이러이러한 책을 냈는데, 한 부 주어도 되겠나?”라고. 인사치레겠지만, 그럴 경우 대부분 주세요!”라고 하지만, 속내는 믿을 수 없다. 아마도 50~60%는 쓰레기장으로 가거나,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이리라 생각하면서도 배냇짓처럼헌사를 써서 건네곤 한다. 문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요즘엔 우편으로 책을 부치는 일이 힘도 들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더 힘 빠지는 경우는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다. 나보다 연상으로부터 반응 없음은 늙어 귀찮으니 그렇겠지하고 이해할 수 있으나, 동년배나 연하의 동업자들에게 반응이 없는 일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그럴 지도 모른다. ‘누가 그깟 책 보내라 했나?’ 그렇다. 그들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책을 보내놓고 서운해 하는 내가 바보인지 모른다. 어쩜 가뜩이나 연구실도 좁고 집도 좁은데 책까지 보내왔으니, 투덜거리며 뜯지도 않은 채 던져 놓고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더 심한 추정을 해보자면, 발송인을 확인도 아니 한 채 아예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내온 책이 어떻든 상대방이 고심참담 끝에 만들어, 정성스런 헌사와 함께 우편으로 보내온 선물이다. 학자가 자신의 저술을 보내는 행위는 적어도 당신은 내 공부를 이해하고 조언해줄만한 분으로 생각하기에 이 책을 보낸다는 영광스런 믿음을 전제로 한다. 한 손으로 밥을 떠 넣으며, 다른 한 손으론 SNS를 희롱하는 시절이다. 설사 방금 전 그 책을 쓰레기통에 쳐 박았다 해도, “선배, 좋은 책 잘 받았어요. 언제 그렇게 좋은 책을 내셨어요? 참 놀랍네요. 잘 읽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잠시 엄지 손가락 몇 번 움직여 무성의한 문구 하나 스마트폰으로 날리는 게 그리도 어려울까. 하기야 책을 받은 뒤 전화 통화를 해도, 직접 대면하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요즘 세태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제부터라도 어쭙잖은 책 내려 하지 말고, 잘 있는 산의 나무들이나 건사할 일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8. 7. 21:23

이른바 국회의원이란 자의 천박한 입

 

                                                                                                                                                         백규

 

본인에게는 약간 미안한 말이지만, ‘이종걸’이란 국회의원[통합민주당]이 있었는지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트위터에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를 ‘그년’으로 지칭했다 하여 언론매체들이 떠들썩하다. 네티즌 가운데 몇 사람이 표현의 지나침을 지적하자 ‘그년’이 ‘그녀는’의 준말이라고 강변했다니, 더욱 기가 찰 일이다. 30년 가까이 국어선생을 하고 있지만, ‘그년’이 ‘그녀는’의 준말로 일상 언어생활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서야 알게 되었으니, 나도 문제적 인간인가?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지난 번 김용민이란 사람이 막말파동으로 국회의원 후보 자리에서 쫓겨난 지 채 몇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같은 당에서 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런 걸 보면 바야흐로 이제 정치의 계절은 시작된 것 같다. 5년 전 선거철에도  정치인들의 험한 말은 차마 들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정치인들의 언어순화를 요구하는 내용의 칼럼을 쓴 적이 있었다.[조선일보 바로가기] 그러나 상황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지금, 반복되는 ‘역사의 법칙’이나 씁쓸하게 떠올릴 뿐이다.

 

                           ***

 

그렇다면 왜 이렇게 험한 말들이 속사포처럼 튀어 나오는 것일까. 그 이유를 요즈음 사람들이 ‘없으면 단 한 시도 못 산다’는 SNS 즉 ‘사회적(사교적) 연결망 서비스’에서 찾게 된다. 긴 문장 대신 짧은 문장으로 수시로 일어나는 상황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메커니즘이 바로 그런 서비스이다. 어떤 사실을 목도하거나 말을 들었을 때, 또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 때 잠시잠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돌멩이 던지듯 뱉어내는 것이 바로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다.

 

참 가관인 것은 나이가 지긋이 들었다고 생각되는 서울시장도, 정당의 대표나 국회의원도, 상당수 대학교수들도 여기에 목을 매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그 말의 진위를 따져 볼 겨를도 없이 그냥 쏘아대고 만다. 그 말은 즉각 팔로워(follower)들에게 전달되고, 그들은 또 자신들의 팔로워들에게 리트윗(retweet)함으로써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간다.

 

일단 트윗 혹은 리트윗된 말들은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옆에 있는 단 한 사람에게 속삭이듯 건넨 말도 주워 담을 수 없거늘 하물며 수십만 수백만에게 전달된 말을 무슨 수로 주워 담는단 말인가. 그런 말들은 진위에 관계없이 여론이란 허울을 쓰고 나라를 흔들어 놓기 일쑤다.

 

                          ***

 

박원순 서울시장도, 서울법대 조국 교수도, 소설가 이외수 씨와 공지영 씨도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SNS 애용자들이다. 엄청난 팔로워들을 거느린 그들이 부러워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사실 이들의 한 마디 말이 갖는 의미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가. 자신들의 말 한 마디에 따라 대중들이 쉽게 움직인다고 생각한다면, 그 말들을 가볍게 SNS로 던져댈 일은 아니다. 그래서 SNS에 의존하는 요즈음의 정치인들이나 사회운동가들, 문화인들이 그렇게 천박스러워 보일 수가 없다.

 

한 마디 말을 꺼내기 위해 수십 번 되 뇌이고 고민하는 과정을 이들은 아예 생략해 버린다. 일단 던져놓고, 나중에 잘못이 드러날 경우 수정하면 된다는 배짱들일 것이다. 그래서 늘 강호에는 무책임한 말들로 인한 혼란 때문에 단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참으로 한심한 인사들이 아닌가. SNS를 애용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흡사 ‘고자질하는 애들’ 같다. 무슨 문제만 생기면, 일단 자신이 곰곰 생각하며 해결하거나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의 팔로워들에게 큰 소리로 떠들고 본다. ‘그들이 어떻게 해주겠지’ 하는 심산일까.

 

팔로워들 가운데는 얼마나 단세포적이며 생각 없는 어린애들이 많은가. 이 사회의 어른을 자처하는 인간들이 자신들이 해결해야 할 공공의 일들을 ‘아가들’에게 고자질하여 들고 일어나게 만드는 격이다. 그래서 나는 툭하면 SNS에 의존하는 현대의 정치를 ‘고자질의 정치’라고 생각한다.

 

이종걸이란 국회의원도 아마 그 SNS의 마력에 빠져 있는 인물인 듯하다. 박근혜 후보에게 잘못이 있다면 기자회견을 하든 칼럼을 쓰든, 아니면 만나서 항의를 하든 방법은 많을 것이다. 어쩌자고 ‘그년’이란 상말 호칭을 사용하여 수많은 팔로워들에게 뿌려댄단 말인가. 그러고도 스스로가 국회의원임을 내세울 수 있는가? 국회의원으로서의 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

 

“구설자(口舌者)는 화환지문(禍患之門)이요 멸신지부(滅身之斧)라[입과 혀는 화가 들어오는 문이고 몸을 망치는 도끼다]”, “상인지어(傷人之語)는 환시자상(還是自傷)이니 함혈분인(含血噴人)이면 선오기구(先汚其口)니라[남을 해치는 말은 도리어 스스로를 해치니 피를 머금고 남에게 뿜으려 하면 먼저 자신의 입을 더럽히게 되느니라]” 등의 말들은 모두 옛날에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과서 <<명심보감(明心寶鑑)>>에 기록되어 있다. 아무리 몹쓸 시대로 변했다 한들, 환갑 진갑 다 지냈거나 그에 가까운 어른들이 옛날 열 살 남짓되던 아이들만도 못해서야 쓰겠는가? 정치인들이여! 부탁하노니 반성하는 뜻에서라도 당분간 제발 그 입들에 자물쇠 좀 채워주기 바란다.

 

<2012. 8. 7.>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4. 4. 15:34

국회의원 후보 김모씨의 ‘욕설 난장’

                                                                                                                                                               백규


국어선생으로서 낯을 들지 못하는 나날이다. 그간 어린 영혼들에게 교과서만 읽혔을 뿐 ‘정확하게 말하는 법’ ‘아름답게 말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한 점을 통렬히 반성한다. 이 땅에서 우리말과 글을 팔아 밥을 먹고 있지만, ‘지저분하고 천한 말들의 향연장’으로 전락한 우리네 삶터를 목도하면서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 없는 나날이다.
  최근엔 더욱 기가 질리는 광경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선량(選良)[즉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선 김모씨. ‘몸집만 어른’인 그로부터 우리 사회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고 들어서도 안 될’ 최악의 언어테러를 당하고 만 것이다.
그는 누구인가. 나이로 쳐도 불혹인 40이 멀지 않았고, 박사과정까지 수료했으며, 모 대학 교수까지 역임했으니, 그를 보고 ‘철이 없다’는 표현을 갖다 댈 수는 없으리라. 그 뿐인가. 아무나 명함을 내밀 수 없는 정당에서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까지 받은 몸이다. 선량이 되어 민의(民意)를 대변하겠노라고, 정치 일선에 뛰어들어 이 나라를 바로잡아 보겠노라고 대단한 포부를 밝힌 ‘대단한 인사’가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그는 입만 열면 하수구나 변기에서 풍기는 악취보다 더 구역질 나는 욕설들을 내뱉을 수 있을까. 그가 속한 그룹을 열렬히 지지하는 어떤 매체는 아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 매체와 비슷한 성향이면서도 얼마간 양식이 살아 있는 다른 언론들까지 그의 ‘지저분한 언사’를 대서특필할 정도로 그의 욕설은 우리 사회에 충격적이었다.
***
얼마 전, 길 가던 중 초등학생들 곁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주고받는 말들의 대략 90%가 욕이었다. 그들은 욕설을 그야말로 숨 쉬듯 내뱉었다. 그 욕설의 대부분은 성(性)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어쩌면 그들 대부분은 그런 욕설들이 진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그 초딩들’의 욕은 ‘나꼼수’나 유튜브를 통해 확인한 ‘그 어른들’의 욕에 비해 애교스럽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튜브를 통해 접한 김모씨의 욕설은 구역질이 나서 끝까지 들을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초등학생들과 김모씨의 언사가 연결되면서 나는 김모씨 같은 어른들의 말, SNS 등을 통해 여과 없이 중계되는 그 욕설들이 바로 우리 시대 아이들의 ‘언어 교과서’임을 알게 되었다. 나 같이 고지식한 국어 선생들의 입장에선 그들 말대로 우리들과 ‘쨉이 되지 않는’ ‘살아있는 국어선생들’이 바로 ‘김모씨들’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한편으론 고마운 일이라 할 수 있을까.^^
사실 요즘은 초등학생에서 어른들까지 욕이 일상화 되어 가고 있다 한다. ‘상아탑에 숨어 살아 그 나이에 이르기까지 험한 욕 한 번 듣지 않고 살아온 그대는 세상물정 모르는 말 하지 말라'는 면박을 친구로부터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요즘의 세태를 깨닫게 되었다.  
***
그렇다면 김모씨는 왜 그런 욕설을 내뱉는 것일까. 아니 그 이전에 ‘나꼼수’는 왜 욕을 일상어처럼 사용하는 것일까. 그들의 입장에서 그것을 ‘아주 잘 못 된’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자신들의 내면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오물’을 뱉어냄으로써 후련해지는, 일종의 자기중심적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노린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 모두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으리라는 전제 아래, 그런 ‘오물 치우기’를 그들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소영웅주의’의 발로일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길게 따질 필요도 없이 김모씨 역시 아내와 아이들을 거느리고 있는 가장일 텐데,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들을 아내나 아이들에게 들려 줄 수 있을까. 자신의 아이들이 밥상머리에서 자신이 ‘나꼼수’에서 내뱉는 그런 말들을 내뱉는다면[왜? 아빠가 이미 대중을 상대로 내뱉었으니까!], 그는 아버지로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또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
***
정치의 계절만 돌아오면 특히 ‘말’이 험해진다. 사실 김모씨가 뱉은 욕설은 ‘말’의 범주에 속하지도 못한다. 적어도 말이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욕설들에 대체 무슨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제대로 된 정치의 역사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들은 ‘말 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학교에서도 기껏 교과서만 읽었지, ‘제대로 된 화술’을 가르친 적이 없다. 그래서 정치인들만 모아 놓으면 육두문자와 폭력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지난 선거에도 나는 정치인들의 ‘담론 수준’을 비판하는 글들을 여러 편 쓴 바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저급해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확인한다. 예의를 갖춘 언사와 멋진 논리만이 상대를 굴복시키는 ‘최종병기’임을 알만한 인사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게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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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과 혀[즉 말]는 근심의 문이며, 몸을 죽게 하는[망치는] 도끼’라는 것이 <<명심보감>>의 금언이다. 철없는 아이들이 쳐주는 박수에 도취되어, 보기에도 딱한 ‘소영웅주의’에 도취되어, 아이들마저 사용하길 꺼려하는 욕설들을 마구 내뱉은 김모씨. 이제 그 말들이 가시가 되어 자신의 앞길을 막게 되었으니 ‘남을 이롭게 하는 말은 따습기가 솜과 같고, 남을 해치는 말은 날카롭기가 가시와 같으니 한 마디 말이라도 무겁기가 천금과 같고, 한 마디라도 남을 해치면 아프기가 칼로 베는 것과 같다’는 <<명심보감>>의 경구를 재삼 명심하면서, 깊은 산속에 들어가거나 가까운 교회당에라도 가서 꽤 긴 참회의 시간을 가져야 하리라. <2012. 4. 4.>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