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5. 9. 12. 11:42

 


호산방의 박대헌 사장

 

 

 

고서점 호산방(壺山房).

그 호산방이 문 닫았다는 소식을

어제 날짜 신문에서 접했습니다.

바닷물에 모래성 무너지듯

수많은 점포들이 어제도 오늘도 사라지는 세상.

서점이 어디 일반 가게와 같은가?’라는

제 믿음도 이제 접을 때가 된 것일까요?

십 수 년 쯤 되었나요? 종로서적이 닫을 때

며칠 동안 마음이 허전했었는데,

그 때보다 더 한 허탈감입니다.

 

사실 책에 굶주려 지내던 대학원 재학시절엔 고서점들을 뻔질나게 찾았지요.

호주머니엔 구겨진 지전 몇 장과 동전 몇 낱이 전부였는데,

무슨 호기로 그런 책들을 탐내곤 했는지...

뒤통수에 꽂히는 주인장의 눈총을 느끼면서도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며 마냥 시간이나 끌기 일쑤였지요.

미련을 남겨 둔 채 서점 문을 나서는 마음은 왜 그리도 허전했을까요?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박대헌 사장님을 제 연구실에서 뵈었지요.

박 사장께서 ‘150만원 정가의 책을 저술출판하여

한국 지식사회를 경동(驚動)시킨 시점.

그 책을 앞에 두고

궁핍했던 시절 고서점들에서 입은 상처를 차마 거론할 순 없었지요.

 

그 후로 세월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고,

고서점들 또한 많은 시련과 변신을 시도했겠지요.

결국 그 험한 물결을 되돌리지 못한 채

호산방은 장렬히 문을 닫은 것 아니겠는지요?

지금 제 나이 또래의 우국지사(憂國之士)’라면

누군들 이 세월의 변화를 반길 수 있을까요?

얄팍한 매명(賣名)의 상술(商術)들을 보시나요?

인문학의 두겁을 뒤집어 쓴 채 세상을 호리는 사람들을 말이지요.

세상을 뒤덮은 인터넷의 그늘 아래

자리 깔고 펼치는 개그를 학문이라 착각하고 있는 세태를 말이지요.

 

일본,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

아직도 멋진 고서점들이 즐비한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동네 도서관을 출입하고,

시장을 다녀오는 아주머니들의 장바구니 속에 도서관의 책이 한 두 권씩 들어 있는 모습.

그들의 멋진 건물이나 번쩍이는 거리의 모습보다 훨씬 부러운 광경이지요.

 

책을 찢어 벽지로 쓰고, 절구에 빻아 지공예의 재료로 쓰던 시절이 엊그젠데,

이삿짐센터의 제1 기피 대상이 책 박스라는 사실을 아시지요?

그래서 노마드의 임시 공동체인 우리네 아파트 쓰레기장,

그 공간의 단골손님이 멋진 장정의 책들이라는 사실도 잘 아시지요?

 

역사의 공간으로 사라진 호산방.

그 호산방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순 없을까요?

발효되는 고서의 향기 그득한 옛날의 서점으로,

힘들 때면 찾아가 고서들과 대화하며

위안을 받을 수 있는 휴식의 공간으로 말이지요.

 

우린 자손들에게 무얼 남겨야 할까요?

날카롭게 벼린 이데올로기?

번쩍이는 빌딩?

엄청난 파괴력의 ()무기?

국내외의 페이퍼 컴퍼니들에 숨겨둔 천문학적 재산?

 

동네마다

멋진 고서점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건사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을까요?

문화나 전통, 역사란 말이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신다면

선진국의 멋진 고서점에 한 번 들러 보세요!

나이 먹은 책들의 숲에서 아이들과 함께

그 책들의 나지막한 음성을 들어보세요.

그 음성에 녹아있는 것이 바로 문화, 전통, 역사이지요.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 미래에 대한 통찰이지요.

 

 

 


박대헌 사장의 저서 <<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호산방, 1996)

 

 

 


<<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의 내용

 

 

 


박대헌 사장의 헌사(<<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

 

 

 


일본 천리시내의 한 고서점

 

 

 


일본 천리시내의 고서점에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3. 8. 05:47

 


백규서옥에서 

 

 

 

 

한국의 친구들에게

 

 

                                                                                              게리 영거

 

 

누구나 한국에 와 보고 갖게 되는 첫 인상들 가운데 하나는 서두른다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거나,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하거나, 음식을 먹는 등 무엇을 하든 한국인은 항상 급하다. 한국인들은 항상 서둔다. 그러나 밖에서 친구들과 만날 땐 서두르지 않는다. 예컨대, 한국인 친구들과 저녁을 먹을 때 어떤 이는 먹고 이야기하느라 두 시간까지도 소비하지만, 반면에 점심시간으로 20분을 길다고 여긴다. 버스들은 한국인의 빨리빨리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사례들 가운데 하나다. 버스 운전사가 지그재그로 차를 몰아대고, 승객이 교통카드를 스캔하자마자 차를 출발시킬 땐 무섭다. 그리고 때로 모퉁이들을 휭하고 돌 때, 그들은 흡사 버스를 충돌시키려는 것 같다. 항상 서두르는 행동양식은 외국인들이 급히 서두는 한국인 누구에게서나 목격하는 첫 모습이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약간 느긋해지는 한국인들을 목격하기 시작한다.

 

그 다음의 역설은 외국인들의 눈에 뚜렷이 보인다(특히 서양 사람들에게). 한국인들은 친절하기도 하고, 접촉을 꺼리기도 한다. 어떤 이는 내 말을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에게 길을 가르쳐 줄 때, 헛갈리는 외국인 여행자들을 도와 줄 때 매우 친절하다. 그리고 그들이 음식을 주문할 때도 참을성이 있다. 그러나 이처럼 특수한 경우들 외에 한국인을 친구로 사귀는 일은 약간 어렵다. 백인으로서 나는 한국인들이 침범하려 하지 않는, 나를 두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과 함께 여행을 한다.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내 좌석엔 항상 나 혼자. 장을 보고, 관광을 하고, 혹은 캠퍼스에서 공부를 할 때, 한국인들은 우리들(외국인)로부터 의식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이것이 복잡한 군중 속에서 편히 돌아다닐 수 있게 하긴 하지만, 그것은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의) 상호작용을 최소한으로 축소시키기도 한다. 그것은 때로 약간씩 짜증나는 일이기도 한데, 예컨대 엘리베이터를 탈 때 한국인들은 나를 보곤 그들 스스로 외국인인 나와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뒤로 물러선다. 최악의 경우 식당이나 상점에 들어갈 때 외국인들을 상대하게 되는 것을 피하려 달리기도 하고 숨기도 하는 한국인들을 보게 된다. 이것이 아마 한국 여행에서 가장 좌절감을 주는 일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외국인들은 한국인으로부터 배우고, 한국문화를 경험하고, 한국 역사를 공부하고,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관찰할 목적으로 한국에 온다. 한국인들이 외국인들을 가까이 오게 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들을 하기는 어렵다.

 

그 다음은 절이나 역사 유적 근처에서 가장 잘 목격되는 일들이다. 한국은 갑자기 근대화 되고, 서구화 되고, 기술 대국이 되었지만,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한국이 겪어온 사건과 역사들을 떠올리게 하는, ‘고풍스런 나라이기도 하다. 예컨대, 한국을 여행할 때, 외국인들은 커피숍, 서양의 음악, 의상, 음식, 그리고 서양문화의 변종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한국인들은 당당하게 그들의 기술적 성취를 자부하고, 그들의 큰 기업들을 외국 관광객들에게 기꺼이 자랑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나 그들이 만들어낸 것들을 위해 박물관들을 짓기도 한다우리는 한국의 어느 곳에서나 많은 박물관들, 역사적 현장들, 고대의 건축물들, 그리고 문화유적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대의 유적들을 둘러보는 순간, 거대한 건물들, 서구식 레스토랑들, 유럽풍의 커피점들이 그 지역을 둘러싸고 있음을 깨닫곤 놀라게 된다. 관광산업으로부터 얼마간의 득을 볼 수는 있겠지만, 고층빌딩과 스타벅스 커피점들이 이런 아름다운 유적들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은 실망스런 일이다. 이런 것들이 한국 경험의 한 부분이고, 그 독특함이다일상생활 속에 역사와 모더니티가 융합되어 있고최신의 고층빌딩으로부터 걸어 나와 고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경우는 한국이 유일한 듯 하다. 

 

현대와 고대의 융합은 오늘날의 한국을 정의하는 측면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한국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은 박물관들과 고궁들에 접근할 때다. 거의 모든 박물관들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고, 고궁들의 경우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날들이 있다. 이것은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과 분명히 대비되는 점이다. 그 지역의 나라들에서 당신은 그 나라들의 과거를 배우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한다. 과거를 이해하고 대중들이 역사를 친숙하게 만들기 위해, 서구의 국가들은 한국의 방식을 제대로 모방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주의하지 않는다면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과거에 대한 지식이고, 과거의 보존이야말로 어떻게 현재에 대처해야할지를 알려주기에 중요하다. 그렇긴 하지만, 한국은 외국인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서양 국가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거품을 부수는 일은 한국인들이 국제적인 기업과 세계 공동체를 통합하기 위해 반드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들 가운데 하나다. 외국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그들로 하여금 부담 없이 한국을 환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외국인에게 다가가고 버스에서 그들 곁에 앉으며 날씨에 관해 묻는 것만으로도 한국에 대한 외국인의 인지도를 높이는 일이 될 것이다. 내가 만난 많은 연구자들과 외국 학생들은 자신들 가운데 소수만이 한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만날 수 있었을 만큼 한국이 은자의 왕국[Hermit Kingdom]’이라는 점을 계속 강조했다. 이제 수년 동안 한국에 있어온 그들은 비즈니스 중심으로서의 한국에 대한 최신의 관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학생들마저 한국 사회의 거품 안에서 방황한다. 한국어와 영어로 기꺼이 묻고 대답하는 것은 한국의 이미지를 엄청나게 확장시킬 것이고, 그것은 한국의 낡은 이미지를 깨부수고 외국인들이 한국에 머무는 동안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주게 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몇몇 한국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리고 그들과 계속 접촉하면서, 다음 번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 만남이 다시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나는 조규익 교수님과 이완범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한국에 올 수 없었을 것이고 내 개인 연구에서 이만큼의 진전을 이룰 수도 없었을 것이다.

 

 

 

My Impression of Korea

 

Gary Younger

 

One of the first things that one notices in Korea is the speediness of everything. No matter what you are doing Korean are always in a hurry, whether drinking coffee, traveling on the bus, or eating food. Koreans are always in a hurry. However, Koreans also take their time when they are out with friends. For example, when having dinner with Korean friends one might spend up to two hours eating and talking, while Koreans consider a long lunch twenty minutes. The busses are one of the most dramatic demonstrations of the Korean balli balli. For the first month the buses are terrifying as the driver weaves in and out of traffic, takes off as soon as you scan your card, and at times seems as if they are going to crash the bus as they zoom around corners. This style of hurry up all the time is the first thing that foreigners notice about Korea everyone is in a hurry and as time passes you start to notice the people and groups that slow down a little when they are with friends.

 

The next paradox is apparent to foreigners(westerners especially). Koreans  are both friendly and closed off from contact.One mightwonderwhatImean. Koreans are very nice to foreigners, when it comes to giving directions, helping the confused foreigners travel around, and are patient when they order food. However, outside of these particular instances making Korean friends is a little difficult. As a Caucasian, I travel with an invisible boundary around me that Koreans will not cross. When taking the bus I always have a seat to myself, the same on the subway. When shopping, sightseeing, or working on campus Koreans maintain a conscious distance between us. While this makes traveling through a crowd easy, it does keep interactions to a minimum. It is also slightly annoying at times, for example when taking the elevator and Koreans step onto the elevator, see me, and step back off the elevator to avoid having to get closer to the foreigner. In the worst cases, one can see Koreans run and hide when you walk into a restaurant or store to avoid having to deal with the foreigners. This is probably one of the most frustrating things about traveling to Korea. Foreigners come to Korea to learn from Koreans, experience Korean culture, study Korean history, and observe the Korean mindset. This is difficult to do when Koreans will not allow you to approach.

 

The next point is noticeable mostly around the temples, and historical sites. Korea is at once a modern, western, technological powerhouse, and also an ancient country constantly reminding the people that visit of the events and history that Korea has lived through. For example, when traveling around Korea, one finds coffee shops, western music, clothing, food, and variations of western culture. Now, Koreans are justifiably proud of their technological accomplishments and love to show off their large firms to tourists. Some have even gone so far as to create museums dedicated to their history or their products. At the same time, one will find hundreds of museums, historical sites, ancient buildings, and cultural relics around every corner in Korea. However, when traveling around the ancient sites one will suddenly realize that tall buildings, western restaurants, and European style coffee shops surround the location. While in part this is to benefit from the tourist industry, it is disappointing that skyscrapers and Starbucks surround these beautiful areas. That said this is part of the experience and the uniqueness of Korea. Only in Korea is there such a fusion of history and modernity in everyday life, where one can walk out of a brand-new skyscraper into an ancient palace.

 

This fusion of modern and ancient is one of the defining aspects of modern Korea.  However, the best part of Korea is how accessible the museums, and ancient palaces are. Almost all of the museums are free and the palaces have days that one can enter for free. This is a stark contrast to America and the European countries where you have to pay to learn about the past of those countries. This desire to understand the past and to make history accessible to the populace is something that western countries would do well to copy from Korea. Knowledge of the past is something that can be easily lost when if you are not careful, and the preservation of said past is important as it shapes how one deals with the present. That said Korea could take a page from the western nations in dealing with foreigners.

 

Breaking the bubble is one of the first things that Koreans need to do to integrate into the international business and global community. Approach the foreigners, talk to them, and make them feel welcomed to the country. Just by approaching a foreigner, sitting by them on the bus asking about the weather will help to improve the foreigner’s perception of Korea. Many of the researchers and foreign students that I have meet continue to focus on Korea as the Hermit kingdom as few have found a group of Koreans that they can speak with or meet. Now those that have been in Korea for multiple years have a more up to date view of Korea as a business center, but even those students move about within a bubble in Korean society. A willingness to ask and answer questions in both Korean and English would benefit Korea’s image abroad tremendously as it would start to break down this old image of Korea and will also make the foreigners feel welcomed during their stay in Korea.

 

That said, I have made a few Korean friends and I hope to stay in touch with them and to meet them again when I return to Korea the next time. I would like to thank Dr. Cho, Ku Ick and Dr. Lee, Wan Bom as without their assistance I would have been unable to travel to Korea and progress so far in my own personal research.

 

 

 

 


게리와 함께 소주 한 잔!

 


 

 


올림픽 공원에서

 


 

 


함께 공부하던 외국인들과 야외파티를

 


 

 


외국인 동료들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2. 23. 02:57

 

 

 

고마운 미국인들, 그리고 인디언 전사들

 

 

 

 

얼마 전 이곳 OSU 역사학과의 강사 Gary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미국에서도 이제 세계를 상대로 한 경찰국가의 노릇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으며, 그도 그 여론에 찬성한다고 했다. 나는 그의 생각이 얼마나 위험하거나 짧은지 말해 주었다. 미국이 경찰국가를 자청하는 의도의 이면에 엄청난 국가이익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 미국이 만약 경찰국가를 포기할 경우 다른 어느 나라[예컨대 중국, 일본, 러시아 등]가 경찰국가를 자임하고 나서거나 다양한 세력들의 춘추전국 시대가 전개되어 결국 미국은 자국마저 방어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것등을 들어 미국은 결코 그 역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포기할 수도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결국 그는 내 말을 수긍했다.

 

***

 

길 가다가 한쪽 편을 들어 싸움판에 끼어들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한쪽 편을 대신하여 맞거나 때려야 하는 입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물며 다른 나라의 전쟁에 내 나라의 젊은이들을 파견하여 피를 흘리게 하는 일의 어려움이야 오죽하랴. 사실 미국이 관여해온 전쟁은 많았고, 지금도 어디에선가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미국이 취해왔거나 취하고 있는 대외정책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문외한인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Yukon City에서 베테란들을 만나 한국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진심어린 인사를 건넨 것처럼, 나는 미국이 625 때 우리를 구해줘서 말할 수 없이 고마운 나라라는 점은 뼈에 새길 정도로 갖고 있다. 625의 원인이나 동기를 따질 필요도 없이 만약 미국 등 UN 기치 하의 16개국이 자국의 젊은이들을 파견하지 않았다면, 죽었다 깨나도 백두혈통이 아닌 이 나이의 내가 갓 30의 애송이 김정은에게 마구 짓밟히고 있거나 분명 어느 수용소에라도 들어가 있을 것 아닌가. 그 끔찍함을 상상할 때마다 미국이 고맙기만 하다.

 

***

 

미국은 사실 베테란의 나라다. 역대 대통령들을 비롯한 정치인들 대부분이 베테란들이다. 그래서인지 어느 도시를 가든 베테란을 위한 뮤지엄이 있고, 추모기념관이나 공원들이 중심부에 마련되어 있다. 나는 유콘 시티의 베테란 뮤지엄에서 625 당시의 귀한 자료들을 얻었고, 그로부터 멀지 않은 엘 르노시티의 다운타운에서 625 전몰용사들의 추모비를 발견했다. 그리고 최근 치카샤 인디언 네이션을 답사하던 중 듀랭(Durant)이란 자그마한 도시에서 625 전몰용사 추모비를 또 발견했고, 잘 알려지지 않았던 촉토(Choctaw) 인디언 네이션 뮤지엄과 세미뇰(Seminole) 인디언 네이션 뮤지엄에서 625 관련 자료들을 여러 점 목격하고 감동을 받은 바 있다.


투스카호마(Tuskahoma)에 있는 촉토 네이션 뮤지엄(Choctaw Nation Museum)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자국의 용사들을 명예롭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나라가 미국임을 이런 사례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625가 끝난 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병사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자국으로 모셔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라. 살아있는 참전용사들마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우리와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베테란들을, 전몰용사들을 그딴 식으로대접해 놓고 어떻게 젊은이들보고 전쟁터에 나가라고 할 수 있을까.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해외의 전쟁터에 기꺼이 나가는 젊은이들을 보며, 미국의 시대가 쉽게 저물지 않을 것임을 감지하게 된다.

 

 


유콘 시티 베테란 뮤지엄의 한국전 코너

 


6 25 당시 한국전에 참여했던 카치니[당시 상사]가 표창을 받는 모습

 


엘 르노 시티 다운타운에 있는 전몰용사 추모 공원

 

***

 

엘 르노 시티 다운타운의 전몰용사 추모공원 한 복판. ‘Korea’라는 글자들이 선명한 비석 중심에 ‘Dobbs, Johnny F./Johnson, Melvin J./Reed, Amzie O./Rogers, Glenn R./Rother, Robert L./Stanphill, Verlyn L./Wiewel, James M./Williams, Johnny/Wosika, Paul J./Ruser, Charles H./Morse, Robert L./Hollman, Paul H.’ 등 한국에서 전사한 미국의 젊은이들의 빛나는 이름들이 올라 있었다.

 

 


엘 르노시티 전몰용사 추모공원의 한국전 전사자 추모비

 

 

치카샤 인디언 네이션에서 촉토 네이션으로 넘어가는 어름에서 듀랭(Durant) 시티를 만났고, 그 시청 앞의 ‘Korean War’라는 추모비에서 ‘Donnie J. Airington/Troy W. Bailey/J. C. Burr/James H. Cross/George H. Dillard/Carl Dill/Ernest H. Haddock/George O. Hiser/Arnett Lamb/Dewey E. McGehee/Charles L. Minyard/Loy A. Philpot/Ben D. Trout’ 등 젊은 전사자들을 발견했으며,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듀랭(Durant) 시티의 한국전 전몰용사 추모비

 

 

촉토 네이션 뮤지엄의 한복판에도 각종 전쟁에서 활약한 촉토족 전사들의 활약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12차 세계대전에서 암호 해독병으로 활약한 그들의 공적이 크게 부각되어 있었다. 촉토족 언어가 전선에서 연합군 측 암호로 쓰인 점을 이 뮤지엄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한국전에서도 활용되었을 것이다. 미국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뮤지엄의 뜰에도 전몰용사를 추모하는 비석이 서 있었고, 한국전에서 사망한 용사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Amos, Morris/Bryant Jr., William/Burris, Tony *winner of Medal of Honor/Cole, William/Dill, Carl/Green, Joe/Franklin, Preston/Frazier, Elam/Kaniatobe, Charles/Killingsworth, Leo/Mcclure, Jim/Mccurtain, Buster/Mccurtain, Isaac/Ontayabbi, Timothy/Rasha, Willie/Watson, Leonard’ 16명의 혈기방장했을 젊은이들이 전사자 추모비에 자랑스럽게 올라 있었다. 이 가운데 명예훈장을 받았을 정도로 전공이 혁혁했던 인물 Burris, 형제가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BusterIsaac 등은 한동안 내 눈길을 끌었다. 추모비 뒤쪽에 촉토족의 용맹을 대표하는 붉은 전사[Red Warrior]’가 적의 가슴을 향해 활을 힘껏 당기는 모습의 동상이 서 있는데이들 전몰용사들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후예들이 아니겠는가.

 

 


촉토 네이션 뮤지엄 뜰에 서 있는 한국전 전몰용사 추모비


2차세계대전에서 암호병으로 활약하여 큰 공을 세우고 훈장을 받은 촉토족 전사들

 


촉토 네이션 뮤지엄 앞에 서 있는 '붉은 전사[Red Warrior]' 상

 

최근 만난 한 미국인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열아홉 나던 해 한국전쟁에 참여했다고 했다. 다행히 그는 살아 돌아왔지만, 그 점으로 미루어 이곳에서 만나는 전몰용사들 역시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걸치는 젊은이들이었을 것이다.

 

더 감격스런 일은 위워카(Wewoka) 시티의 세미뇰 네이션(Seminole Nation)에서 있었다. 세미뇰 네이션 뮤지엄에는 군사박물관[military museum]’이란 별도의 방을 마련하고, 제12차 세계대전, 한국전, 베트남전 등 미국인들이 참여한 세계 각처의 전쟁 코너들을 별도로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전 코너에서 참으로 인상적인 자료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해병중위 팩터(Kenneth J. Factor)가 정찰임무 수행 중 전선에서 실종되었다는 사실과 그의 사진이 전시되었을 뿐 전몰용사들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에 관한 귀한 자료들이 여러 점 전시되어 있었다. 그 때의 한국인들에 관한 캐리커츄어(caricature) 석 점인데, 그림도 그림이려니와 그 밑에 달아둔 멘트가 감동적이었다. 약간 서양식으로 변이된 복장의 노인 둘, 여인네 둘, 꼬마 셋, 장승 하나를 그린 다음, ‘한국인들은 우아하고 자부심 강한 민족[The Koreans are a graceful and proud race]’이라는 멘트를 달아놓은 것이 그 하나이고, 소달구지를 몰고 가던 중 넘어진 소에게 화를 내는 주인과 깔깔대며 재미있어 하는 구경꾼들을 그린 다음 한국인들은 가끔 화를 내면서도 예리한 유머감각을 지녔다[They have a keen sense of humor despite their occastional bursts of temper]’는 멘트를 달아 놓은 것이 두 번째 것이며, 장대비가 쏟아지는 속에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들을 그린 다음 한국에서는 7월과 8월에 장마철이 시작된다[The rainy season occurs in July and August]’는 사실 관계 멘트를 달아놓은 것이 세 번째 것이었다. 이들이 얼마나 따스하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한국인들을 관찰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사례들이었다.

 

 


위오카(Wewoka) 시티에 있는 세미뇰 네이션 뮤지엄

 


세미뇰 네이션 뮤지엄의 한국전 코너

 


한국전 코너의 '6 25 전쟁 종군 기장'

 


한국전에서 실종된 팩터(Kenneth J. Factor) 중위

 


한국전 코너에 전시된 자료들

 


한국전 코너에 전시된 자료

 


한국전 코너에 전시된 자료

 


한국전 코너에 전시된 자료

 


한국전 코너에 전시된 자료(한국 가이드북)

 


한국전 코너에 전시된 자료(한국 가이드 북)

 


한국전에 관한 저널의 보도

 

 

그러나 무엇보다 내 가슴을 찡하게 만든 것은 이들이 전선에 나가는 자민족 군인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만들었음직한 한국어 교재였다. ‘추가적인 표현[Additional Expression]’이란 표제가 붙은 것으로 보아 주 교재는 별도로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실린 총 18개의 표현들은 한국에 가면 꼭 알아야 하는 것들이라고 그들 나름대로 판단했던 것 같은데, 그 내용이 참으로 흥미롭다.

 

I’m hungry                                   SEE-jahng HAHM-nee-dah

I’m thirsty                                    MAWG mah-ROOM-nee dah

I’m lost                                         NAH-noon KEE-rool eer-huss-SOOM-nee-dah

I’m tired                                      NAH-noon CHAWM KAW-dahn HAHM-nee-dah

I’m wounded                              NAH-noon CHAWM tahch-huss-SOOM-nee-dah

Stop!(to someone running away)           KUG-ee sut-suh

Hold still!                                                     KAH-mah-nee ISS-suh

Wait a minute!                                           CHAHNG-gahn kee-dah-REE-see-yaw

Come here!                                                 EE-ree AW-see-yaw

Quickly!                                                       BAHL-lee

Right away!                                                 KAWT

Come quickly!                                            BAHL-lee AW-see-yaw

Go quickly                                                   BAHL-lee KAH-see-yaw

Help! SAH-rahm                                       SAHL-liyaw

Help me                                                      CHAWM TAW-wah choo-SIP-see-yaw

Bring help                                                  SAH-rahmool CHAWM TAHR-yudah CHIOO-see-yaw

I will pay you                                            TAWN too-ree-gess-SOOM-nee-dah

 

 


당시 한국전에 참가할 세미뇰 병사들에게 교육하던 한국어 추가 교재

 

 

 

자기 민족의 젊은이들을 아무런 정보도 없는 한국의 전쟁터에 내보낸다고 생각해보라. ‘이 녀석들이 배고프면 어쩌나, 목이 마르면 어쩌나, 낯설고 물 선 타국 땅에서 길을 잃으면 어쩌나!’ 얼마나 걱정이 많았을까. 미국 연방정부의 명령이니 네이션에서도 파병을 거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교육을 시킨 것 아닐까. 도망가는 적군에게 ‘stop!’ 대신 거기 섰어![KUG-ee sut-suh!]’라고 외쳐야 알아듣는다는 걸 대체 누가 알려 주었단 말인가. 이 추가적 표현들이야말로 생존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사항들인데, 영문자로 간신히적어놓은 이 발음대로 말했다 한들 알아먹었을 한국인들이나 인민군들이 몇이나 되었을까.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 채 보내는 것보다는 이 정도라도 알려서 보내는 것이 그나마 부모 형제, 동족으로서는 마음 놓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길 떠나는 자식에게 불안한 마음에서 쓸데없이이것저것 잔소리하는 우리네 부모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렇게 이역만리 전쟁터로 사랑하는 아들들을 보낸 미국인들, 혹은 인디언들이었다. 그들의 희생 덕에 우리는 기사회생(起死回生)했고,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지금 등 따습고 배부른우리는 당시 거지 몰골로 우리네 사립문을 흔들며 나는 시장합니다!’라고 외쳤을 인디언 전사들, 아니 이름 모를 험한 계곡에서 피 흘리며 죽어갔을 그들의 모습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기억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오히려 당시 우리를 죽이려 했던 적들에게 공공연히 부역(附逆)하려는 무리가 백주대낮에 활개를 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