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2. 4. 12:03

 

 

 

 

 


OSU의 중앙도서관

 

 

 


OSU 중앙도서관의 서고

 

 

 


오클라호마주 거쓰리시티(Guthrie City)의 카네기 도서관
(오클라호마 주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음)

 

 


오클라호마주(Oklahoma State) 스틸워터(Stillwater)의 시립도서관

 

 

 

 

 

               

부럽기만 한 미국의 도서관들

 

 

 

 

15년 전 미국의 유명대학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도서관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대학의 질을 좌우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낀 바 있다. 당시의 내 의식수준으로 그들의 도서관 시스템은 환상 그 자체였다. 도서관에 신청만 하면 미국 전역, 아니 유럽의 대학 도서관에 있는 자료들까지 입수해 빌려주는 그들의 제도가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도서관이 교수와 학생들에게 연구와 공부의 중심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나는 또 다른 미국의 대학에 와 있다. 그런데 웬만한 자료들이 거의 모두 디지털화 된 지금의 상황이 도서관 시스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연구 자료를 신청하면 세계 전역의 디지털 자료까지 일일이 찾아내어 이메일로 서비스해주는 환상적인 체험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지난 15년 동안 한국의 대학들은 장서 숫자의 확충이나 새 건물들의 건립에 치중해 온 것이 사실이다. 대학평가의 주요 항목 가운데 장서량이 절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해외 대학 도서관들과 자료를 교환하기는커녕 국내 대학도서관들 사이에서도 자료교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좋은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큰 대학들이 그 제도에 응할 리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대학의 도서관들만 훌륭한 건 아니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각 지역에는 공공도서관들이 있고, 질 좋고 풍부한 장서를 자랑한다. 수시로 독서 관련 이벤트를 여는 등 도서관은 그 지역의 문화센터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 뿐인가. 도서관마다 새로운 도서들이 수시로 들어오니 오래 된 책들이나 복권(複卷)들은 퇴출시키는데, 그걸 주민 상대로 공짜에 가까운 가격[수십 센트에서 1불 혹은 2]으로 판매하는 행사를 주기적으로 연다. 많은 사람들이 흡사 선물 받아 기쁘다는 표정으로 좋은 책들을 한 아름씩 안고 가는 모습을 부럽게 바라본 경험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퇴근 무렵 직장인들이 책을 한 아름 안고 와서 반납한 뒤 새로운 책들을 빌려가는 모습, 마트 가는 길에 들러 책을 반납하고 빌려가는 아주머니들, 손자손녀들과 손을 잡고 도서관에 들러 독서삼매에 빠져 드는 할아버지할머니들, 도서관에 비치된 고급 서적들을 꺼내 놓고 읽어가며 과제물 작성하기에 바쁜 고등학생들, 설치해 놓은 컴퓨터들을 통해 각종 인터넷 정보를 검색하고 출력하는 데 몰두하는 일반인들... 대학 도서관에 가보아야 미국 대학들의 경쟁력을 알 수 있고, 지역의 공공 도서관에 가보아야 미국의 힘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변함없는 내 지론이다.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카네기(Andrew Carnegie)20세기 미국 최고의 부자였다. 스코틀랜드 계 미국인이었던 그는 미국사회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쓴 인물이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도서관을 짓는 일에 헌신했다는 점이다.

 

그는 1883년부터 1926년까지 전 세계에 2,509개의 도서관을 지어주었다. 그 가운데 1,689개는 미국에, 660개는 영국과 아일랜드에, 125개는 캐나다에, 나머지는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세르비아피지 등에 각각 세워졌다. 1919년 미국 전역에 3,500개의 공공 도서관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카네기가 지어준 것이라니, 얼마나 놀랄만한 일인가.

 

돈과 권력을 자손들에게 넘겨 줄 욕심으로 독직(瀆職)의 죄를 지어왔고 지금도 짓고 있는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세습하기 위해 애쓰는 이 나라의 재벌들이 우리의 현주소다. 그들이 어렸을 적에 카네기의 전기를 단 한 페이지만 읽어 봤어도 자신들이 갖고 있는 부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았을 텐데. 단돈 한 푼 책이나 도서관에 기증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며, ‘참 돈 쓸 줄 모르는그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

 

내가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던 때는 우리 사회에 책이 몹시도 귀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초등학교에도 도서관은커녕 읽을 만한 낱권의 책조차 없었다. 서울의 어떤 독지가가 기증했다는 수십 권의 동화책들이 전부였는데, 그나마 늘 자물쇠가 채워진 채 교무실 한 구석을 지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책을 좋아하게 된 것은 내게 더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그렇게 60년대~70년대의 학창시절 내내 지적인 궁핍의 상황은 지속되었다.

 

정치적문화적으로 격동의 시대였던 80년대. 책의 생산량과 국민들의 독서량이 막 늘어나려는 찰나 프로 야구가 시작되었고, 컬러 TV의 방송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책을 잡는 대신 한층 야해진 영화, TV 드라마, 프로 스포츠에 빠져들었다. 도서관이래야 잡동사니들을 다 합쳐서 100만권을 소장하는 대학들이 거의 없었고, 공공도서관 없는 지역들도 수두룩했다. 도서관은 그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시대가 우리 사회에서 최근까지 지속되었다. 도서관이란 한낱 독서실’, 그것도 시험 때나 잠시 찾아가는 공부방이란 것이 우리 학창 시절의 일반적 인식이었다. 그러니 독서열풍은커녕 책이 뭣에 쓰는 물건인지에 대한 기본 상식을 지닌 국민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 국민의 화끈한 성품대로 시절은 순식간에 디지털 시대로 넘어갔다. 정신 나간 교육부 인사들이 이젠 종이 책을 없애고 아이들 교과서도 이북[e-book]’으로 바꾸겠다고 나섰다. 종이 책을 아날로그 시대의 뒤쳐진 산물, ‘이북디지털 시대 발전의 산물로 동일시하는 인사들이 나라의 정책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다. 공짜로 주어지는[아니, 사실은 아주 비싼 값으로 주어지는] 단말기를 손에 넣자마자 아이들은 게임을 즐기기에 바빠 그것을 교과서로 쓰는 시간은 하루에 단 몇 분, 길어봐야 한 두 시간에 불과했다. 그게 손아귀에 들어가는 순간 그나마 개꼬리만 하던독서시간은 아예 사라져 버려, 다시 독서 시대의 영광을 되돌리기엔 불가능해졌다. 독서의 습관을 처음부터 가져 보지 못한 기성세대와, 디지털에 사로잡힌 신세대가 어우러진 이 나라의 현실이 걱정이다.

 

지금 우리가 국민소득 2만 불을 가까스로 넘겼다고는 하나, 국민의식이 변하지 않고는 3~4만불 대의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기 어렵다. 그러나 교육을 통하지 않고는 국민의식을 변화시킬 수 없고, 지금 같은 교육열만으로 세계와 경쟁할만한 인재를 길러내기란 쉽지 않다.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올바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아이디어와 능력은 기본적으로 독서를 통한 자발적 공부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억지로 주입시킨다고 두뇌의 용량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식 교육에 큰돈을 쏟아 부어야 하는 부정적 풍조를 고쳐야 나라가 산다. 그러기 위한 지름길이 바로 독서운동이다. 어머니나 주부들이 하루에 단 한 두 시간만이라도 조용히 앉아 책을 읽어보라. 아버지들이 퇴근 후 곧바로 집에 들어와 단정한 모습으로 책을 읽어보라. 휴일에 부모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좋은 서점에 가서 몇 권의 책을 사주고, 책 읽은 아이들에게 칭찬이라도 건네 보라. 그 순간 아이들의 분위기는 달라질 것이다. 자신들은 책을 멀리하면서 아이들보고만 공부하라, 책을 읽어라!’고 야단치는 것처럼 모순적인 행동은 없을 것이다. 부모들부터 바뀌면 아이들은 책을 가까이하게 될 것이고, 아이들이 책과 가까이만 할 수 있다면 사교육비로 큰 돈 쓸 필요는 없어지게 될 것이다.

 

***

 

현재 우리나라에는 700개 정도의 공공도서관이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동네마다 한 개씩 도서관이 있어야 한다. 방과 후 학생들의 학습이나 독서, 어른들의 여가활용도 동네 도서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국가 예산만으로는 모자랄 것이다. 재벌들이나 돈을 많이 모은 사람들이 도서관 운동에 헌신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카네기가 자신의 재산을 기울여 도서관을 지어준 것도 도서관에 국가의 장래가 걸려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책을 왜 읽어야 되는지, 도서관이 왜 필요한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국민이나 국가는 결코 흥할 수 없다. ‘책 읽는 민족에게 미래가 있고, 도서관이 우리 삶의 희망 공간임을 이제 우리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살 길이다.

 

 

 

 

 

 

 

 


오클라호마주(Oklahoma State) 스틸워터(Stillwater)의 시립도서관 서가

 

 

 


       오클라호마주(Oklahoma State) 스틸워터(Stillwater)의 시립도서관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주민들에게 도서관 서고에 있는 책[겹치는 책이나 퇴출시키는 책]을
'몇 센트~1, 2 불' 정도의 싼 값으로 판매하는 행사장

 

                                                                               @@@@@

 

                                  ***이 글은 태안도서관에서 발간하는 <<천자만홍>> 14호에 특집으로 실렸습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22. 12:58

 

 

미국에서 풀브라이터(Fulbrighter)’로 지내기

 

 

 

#1 세관 검사나 입국심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시카고 오헤어 공항[O'Hare International Airport]. DS-2019 서류와 비자를 내밀자 그 여성 심사관은 , 풀브라이트, G-1, 팬태스틱!’하며 서류를 대충 훑어 보고 기본적인 사항만 확인한 뒤 선선히 통과시켰다.

 

#2 스틸워터(Stillwater)에 도착하여, OSU의 역사학과 사무실을 찾은 때는 섭씨 40도가 넘는 한여름 대낮이었다. 학과 비서 수잔(Susan Oliver)이 연구실로 나를 안내했다. 연구실 문 옆에 ‘Dr. Cho, Kyu-Ick/Visiting Fulbright Scholar’라고 선명하게 쓰인 명패와 깨끗하게 청소된 연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며칠 뒤에는 풀브라이트 방문학자라고 명시한 학과의 명함도 찍어 주었다. 정중하게 환영받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풀브라이트의 수혜자로서 이 학과를 연구기관으로 선택한 것은 내가 처음이란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지금껏 나는 그들이 내게 베풀어주는 호의에 감사하고 있었는데풀브라이터가 그들을 선택한 것이 어쩌면 그들에게도 영예일 수 있다는 점을 비로소 느껴 알게 되었다.

 


연구실 명패


한국에서 연구기관 신청의 메일을 보내자 마자 환영의 답신을 보내 준 대닐로위츠 학장

 

#3 미국에 도착하고 나서 셋업이 진행되는 과정에 소셜 시큐리티 넘버[Social Security Number]가 필요했다. 한국에서 주민등록이 되어 있어야 보험계약이나 은행계좌 개설을 할 수 있듯이, 이곳에선 그게 필요했다. 15년 전 LA에서의 기억으로 미루어 보면, ‘소셜 시큐리티 사무소는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곳이었다. 당시 내 앞의 어떤 사람은 사무원의 질문에 대답을 잘못하여 퇴짜를 맞는 경우도 보았다. 그런 기억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으나,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를 맞이한 나이 든 여성 사무원은 참으로 고상하고 친절했다. 시스템을 검색하더니 아내의 번호는 남아 있으나, 내 기록은 아예 없다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풀브라이트로부터 받은 편의 요청공문과 미 국무성이 보증한 비자[U.S. Department of State (Fulbright Scholars Bearer Is Subject To Section 212(E)]를 보여주자, 놀란 표정으로 여기서 풀브라이트 학자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하며 간단한 인적 사항만 확인한 후 일을 처리해 주었다.

 


친절한 직원을 만난 스틸워터의 소셜 시큐리티 사무소

 

#4 거쓰리 시티(Guthrie City)답사하다가 박식하고 교양이 풍부한 찻집 주인을 만났다. 이야기가 무르익어 가는 도중 서로의 연락 정보가 필요하여 학교 명함을 건넸다. 명함을 펼쳐 보더니 풀브라이트 학자시군요!’하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대화를 끝내고 나가며 커피 값을 계산하려 하자 극구 사양했다. 우리는 팁이라 우기며 간신히 5불을 놓고 나왔다.

 


Guthrie City의 찻집에서 만난 지성적인 주인 셰릴(Cheryl)

 

#5 털사(Tulsa)에서 열린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 학자 발전 세미나[2013 Fulbright Visiting Scholar Enrichment Seminar]’가 끝나던 날, 주최 측에서 스틸워터까지 나를 태워 줄 자원봉사자를 주선해 주었다. 그는 OSU 털사 캠퍼스 행정부서의 고위직 인사였고, 털사에 살고 있었다. 나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미국인으로부터 라이드 서비스를 받기가 부담스러웠지만, 그는 자기의 즐거움이라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한 시간이 훨씬 넘는 거리를 운전해 왔다가 다시 돌아가셔야 하니 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자, 그는 풀브라이트 학자에게 이런 봉사를 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부연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편했고, 그 역시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털사에서 나를 태우고 스틸워터까지 왔다가 돌아간 Dr. Ron Bussert

 

#6 텍사스 주의 달라스(Dallas)시에 갔을 때였다. 끝없이 펼쳐진 광야를 달려 겨우 도착한 달라스는 오클라호마와 달랐다. 미국에서 다른 주로 넘어가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다른 도로 넘어가는 것쯤으로 착각한 우리였다. 오클라호마 주만 해도 면적이 우리나라의 두 배였다. 그러니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것과 오클라호마 주에서 텍사스 주로 넘어가는 것이 같을 리 없었다. 가보니 시내의 교통체계도 오클라호마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의 것이었다. 간신히 주차해놓은 다음, 아무래도 불안하여 막 떠나려는 어떤 중년 부부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차에서 내려 주차방법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네 차도 한국 차라며, 얼마 전 부산에 다녀왔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의 차종은 기아 소울이었다. 하도 반가워 함께 사진을 찍었다. 찍고 나서 그의 이름과 주소 혹은 이메일을 물어보기 위해 내 명함을 건넸더니, 보고는 풀브라이트 학자라며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 그[Mr. Carl Smith]에게 사진을 보냈고, 그는 내게 정중한 답신을 보냈다. 그 답신 메일 가운데 우리는 당신을 만나게 되어 기뻤고, 더더욱 풀브라이트 학자를 만나서 감격했습니다![We were delighted to meet you and thrilled to have met a Fulbright scholar!]”라는 문장이 있었다. ‘thrilled’란 말 속에는 전율을 느끼다, 기쁘다, 감격하다등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그가 어떤 기분으로 이 말을 썼는지 분명치는 않으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매우 긍정적인 뜻으로 쓴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달라스의 한 주차장에서 만난 칼[Mr. Carl Smith] 선생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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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아칸사(Arkansas) 주의 새내기 상원의원이던 풀브라이트(J. William Fulbright)가 입안하고 다음 해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이 사인함으로써 법안으로 성립된 것이 바로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쟁의 잉여 자산들에 주목한 풀브라이트 의원은 그것들을 팔아 교육, 문화, 과학 분야 학생이나 학자들의 교류를 통해 국제 친선을 증진시키는 자금으로 활용하자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고, 1년 뒤 트루먼 대통령이 여기에 사인하여 확정을 본 것이 바로 이 법이다.

 

풀브라이트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인정받고 있는 국제 교류 프로그램으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사실 미국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매년 미국 의회의 세출 승인을 받아 미 정부가 예산을 출연하고, 미국 이외의 국가들도 이에 상응하는 돈을 부담함으로써 문화 및 교육 교류를 위한 국제적인 협력 프로그램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한국 내 Fulbright Commission한미교육위원단의 경우 한국과 미국 정부의 예산 출연으로 운영되며, 이 기구가 장학생 선발 및 프로그램 운영에 관한 모든 정책을 결정한다. 여기서 선발된 한국인 수혜자들은 미국에서 강의나 연구, 대학원 학위과정 이수, 중등교사 영어 연수 등에 참여하며, 미국인 수혜자들은 한국에서 강의 혹은 연구를 하거나, 중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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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느낌으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한국인들과 달리 미국인들은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을 학생이나 연구자가 누리는 최고의 영예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색도 모른 채 연구비 주는 것만 고마워하다가 미국에 와서야 풀브라이트에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내게 주어진 영예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면서 지내야겠다고 새삼 결심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남들의 인식을 통해 풀브라이트의 진면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으니, 그동안은 풀브라이트 수혜라는 영예가 내겐 일종의 개 발의 편자였던 셈이다. 아는 자만이 혜택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곰곰 생각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