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5. 8. 29. 21:28

 


한국을 떠나기 전 백규서옥을 방문한 세바스티안

 

 


한여름날의 백규서옥에서 게리(Gary Younger), 백규, 세바스티안

 

 


백규서옥을 방문한 세바스티안의 지도교수 키이스 하워드(Keith Howard) 교수와 함께

 

 


한 겨울의 숭실 교정에서 세바스티안과 키이스 교수

 

 


 한국의 전통악기들과 탈들이 진열된 키이스 교수 자택 거실 모습

 

 


키이스 교수의 한국음악 관련 디지털 자료들

 

 

 

며칠 전 일본의 교토에서 세바스티안으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국내에 있는 줄 알고 전화했다가 해외로밍으로 연결되자 다급하게 문자를 보낸 것. ‘연수기간이 끝나 831일 런던으로 돌아가는데, 한 번 뵙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점심약속으로 간신히 잡아놓은 2712시 정각에 독일 술 한 병을 든 그가 찾아왔다. 그간 머물렀던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다시 돌아가 짐 싸는 일을 마무리해야 하므로 점심 식사의 여유가 없다는 그를 잡아놓고, 겨우 30여 분 간 석별의 대화를 나누었다.

 

1986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스물아홉의 약관이었다. 함부르크 출생의 독일인. 이른 나이임에도 많은 학교들과 많은 나라들을 거쳐 온 점이 놀라웠다. 1997~2006년까지 미션계 김나지움에서 공부했고, 그 사이의 1(2003~2004) 동안은 교환학생으로 남미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을 다녀오기도 했다.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2007~2012년 함부르크 대학에서 조직음악학[혹은 과학음악학: systematic musicology]을 전공하여 우수한 성적(Excellent grade)’으로 학사학위를 받았고, 그 기간 중 터키 이스탄불의 빌기대학교(Bilgi University)에서 1년간(2008~2009), 서울대학교에서 1년간(2010~2011) 교환학생으로 머물기도 했다. 2012~2013년에는 런던대학교의 동양아프리카학 대학(SOAS: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에서 민족음악학(ethnomusicology) 석사학위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고, 2013년부터 같은 대학에서 민족음악학의 권위자 키이스 교수(Dr. Keith Howard)의 지도로 박사과정을 이수하는 중인데, 작년부터 지금까지 1년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 시조에 관한 현장연구를 수행하다가 이번에 체류기간 만료로 떠나게 된 것이다.

 

그는 독일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철이 들면서 파라과이터키한국영국 등 세계를 무대로 자신의 꿈을 키워가는 수재였다. 그 과정에서 모국어인 독일어 외에 영어스페인어터키어프랑스어라틴어 등을 유창하거나 능숙하게 구사했고, 한국어 실력 또한 어떤 외국인들보다 월등했다. 기필코 최단기간인 내년에 박사학위를 받겠노라는 그의 결심이야말로 모험에 가까운 그동안의 해외 편력으로부터 길러진 용기의 소산이리라.

 

그는 우리의 시조에 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쓰려고 하는 박사논문 또한 시조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시조의 음악적 본질이나 텍스트와 콘텍스트에 관하여 한국의 누구보다도 폭 넓고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한국에서 전통가곡이나 시조의 명창들을 만나 창법과 이론을 익히려고 애쓰면서 얻게 된 개인적 자산이기도 했다. 그의 지도교수인 키이스 교수 역시 우리 음악에 관한 몇 안 되는 외국인 전문가였다. 사실 세바스티안이 오래 전부터 나를 알게 된 데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경희대 영어영문학부 교수로 정년을 한 케빈 오록(Kevin O’Rouke) 교수는 탁월한 감성으로 한국문학을 꾸준히 서양에 소개해 왔는데, 키이스 교수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데 케빈 오록 교수가 13년 전 펴낸 자신의 저서 The Book of Korean Shijo(Harvard-Ewha Series on Korea,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02)의 첫머리에 내 견해를 인용함으로써 키이스 교수도 나를 알게 되었고, 다시 그가 세바스티안에게 이 책을 사서 읽어볼 것을 권함으로써 세바스티안 또한 나를 알게 된 것이었다. 그가 한국 오는 기회에 나를 찾아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케빈 오록 교수의 시조 관련 저서

 

 


케빈 오록 교수 저서의 서론 부분

 

 

***

 

최근 나는 일본에서 호주 출신의 토키타 박사(Dr. Alison Tokita)로부터 일본음악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강의내용도 중요했지만, 일본음악이나 일본문화에 대하여 영어권 전문가로서의 토키타 박사가 갖는 사회적 위치나 의미가 각별함을 깨닫게 되었다. 토키타 박사 같은 자발적 외국 학자들 아니면 누가 세계에 일본음악이나 문화를 선전하고 유포시킬 것인가. 서양인이 영어로 외국의 수요자들을 상대로 한국음악이나 문화를 강의한다면, 그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내가 세바스티안을 보며 무릎을 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앞으로 더 노력한다면 한국어도 발전할 것이고, 한국음악이나 문화에 대한 조예 또한 깊어질 것이니, 그는 우리에게 일본의 토키타 박사 못지않은 소중한 존재다.

 

민족문화를 세계에 선양한답시고 엉뚱한 사람들을 수억원씩 주며 불러다가 1회성 돈 잔치나 벌이는 우리나라 문화 담당부서는 참으로 한심할 따름이다. 앞으로 세바스티안 같은 외국의 젊은 인재를 발굴하여 우리 음악과 문화의 전도사 역할을 하게 한다면큰 돈 들이지 않고도 엄청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민족음악학 전공자들을 불러모아 한국음악과 문화의 우수성을 외국어로 설명하게 함으로써 우리 문화의 세계화를 앞당기도록 하는 것도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꽉 막힌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왜 외국인에게 귀한 교수자리를 안겨주며, 왜 한국어를 놔두고 영어로 외국인들에게 강의를 해야 하느냐고. 그런 류의 답답한 사고방식 때문에 지금 우리의 전통문화나 예술은 비좁은 이 나라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시들어가고 있다. 세계인들이 배우고 익히며 재창조재생산을 해야 그나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한 지금의 상황이 암담하다. 우리 스스로가 민족의 전통문화이나 예술을 외면하는 현실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제라도 우리 전통음악이나 문화의 외국인 전문가를 양성하는 데 깜짝 놀랄 만큼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세바스티안 같은 젊은 인재를 한국 전통음악과 문화의 전문가로 키운다면, 우리 전통음악과 문화의 세계화는 그 시점부터 가속화될 것이다. 우리의 정신문화를 국가와 민족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둠으로써 시들게 할 수는 없다. 문호를 개방하고 보편적 지식과 교양에 목마른 세계인들에게 들려주고 보여줄 때 우리 문화는 세계인들의 공유물이 되고, 꾸준히 발전할 수 있다. 세바스티안은 그런 점에서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우리의 보배로운 인재다.

 

 


문현 선생의 노래 발표회가 끝나고. 국립국악원에서

 

 


선무 치료의 대가 이선옥 박사 자택에서의 파티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3. 8. 05:47

 


백규서옥에서 

 

 

 

 

한국의 친구들에게

 

 

                                                                                              게리 영거

 

 

누구나 한국에 와 보고 갖게 되는 첫 인상들 가운데 하나는 서두른다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거나,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하거나, 음식을 먹는 등 무엇을 하든 한국인은 항상 급하다. 한국인들은 항상 서둔다. 그러나 밖에서 친구들과 만날 땐 서두르지 않는다. 예컨대, 한국인 친구들과 저녁을 먹을 때 어떤 이는 먹고 이야기하느라 두 시간까지도 소비하지만, 반면에 점심시간으로 20분을 길다고 여긴다. 버스들은 한국인의 빨리빨리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사례들 가운데 하나다. 버스 운전사가 지그재그로 차를 몰아대고, 승객이 교통카드를 스캔하자마자 차를 출발시킬 땐 무섭다. 그리고 때로 모퉁이들을 휭하고 돌 때, 그들은 흡사 버스를 충돌시키려는 것 같다. 항상 서두르는 행동양식은 외국인들이 급히 서두는 한국인 누구에게서나 목격하는 첫 모습이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약간 느긋해지는 한국인들을 목격하기 시작한다.

 

그 다음의 역설은 외국인들의 눈에 뚜렷이 보인다(특히 서양 사람들에게). 한국인들은 친절하기도 하고, 접촉을 꺼리기도 한다. 어떤 이는 내 말을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에게 길을 가르쳐 줄 때, 헛갈리는 외국인 여행자들을 도와 줄 때 매우 친절하다. 그리고 그들이 음식을 주문할 때도 참을성이 있다. 그러나 이처럼 특수한 경우들 외에 한국인을 친구로 사귀는 일은 약간 어렵다. 백인으로서 나는 한국인들이 침범하려 하지 않는, 나를 두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과 함께 여행을 한다.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내 좌석엔 항상 나 혼자. 장을 보고, 관광을 하고, 혹은 캠퍼스에서 공부를 할 때, 한국인들은 우리들(외국인)로부터 의식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이것이 복잡한 군중 속에서 편히 돌아다닐 수 있게 하긴 하지만, 그것은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의) 상호작용을 최소한으로 축소시키기도 한다. 그것은 때로 약간씩 짜증나는 일이기도 한데, 예컨대 엘리베이터를 탈 때 한국인들은 나를 보곤 그들 스스로 외국인인 나와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뒤로 물러선다. 최악의 경우 식당이나 상점에 들어갈 때 외국인들을 상대하게 되는 것을 피하려 달리기도 하고 숨기도 하는 한국인들을 보게 된다. 이것이 아마 한국 여행에서 가장 좌절감을 주는 일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외국인들은 한국인으로부터 배우고, 한국문화를 경험하고, 한국 역사를 공부하고,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관찰할 목적으로 한국에 온다. 한국인들이 외국인들을 가까이 오게 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들을 하기는 어렵다.

 

그 다음은 절이나 역사 유적 근처에서 가장 잘 목격되는 일들이다. 한국은 갑자기 근대화 되고, 서구화 되고, 기술 대국이 되었지만,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한국이 겪어온 사건과 역사들을 떠올리게 하는, ‘고풍스런 나라이기도 하다. 예컨대, 한국을 여행할 때, 외국인들은 커피숍, 서양의 음악, 의상, 음식, 그리고 서양문화의 변종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한국인들은 당당하게 그들의 기술적 성취를 자부하고, 그들의 큰 기업들을 외국 관광객들에게 기꺼이 자랑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나 그들이 만들어낸 것들을 위해 박물관들을 짓기도 한다우리는 한국의 어느 곳에서나 많은 박물관들, 역사적 현장들, 고대의 건축물들, 그리고 문화유적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대의 유적들을 둘러보는 순간, 거대한 건물들, 서구식 레스토랑들, 유럽풍의 커피점들이 그 지역을 둘러싸고 있음을 깨닫곤 놀라게 된다. 관광산업으로부터 얼마간의 득을 볼 수는 있겠지만, 고층빌딩과 스타벅스 커피점들이 이런 아름다운 유적들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은 실망스런 일이다. 이런 것들이 한국 경험의 한 부분이고, 그 독특함이다일상생활 속에 역사와 모더니티가 융합되어 있고최신의 고층빌딩으로부터 걸어 나와 고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경우는 한국이 유일한 듯 하다. 

 

현대와 고대의 융합은 오늘날의 한국을 정의하는 측면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한국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은 박물관들과 고궁들에 접근할 때다. 거의 모든 박물관들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고, 고궁들의 경우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날들이 있다. 이것은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과 분명히 대비되는 점이다. 그 지역의 나라들에서 당신은 그 나라들의 과거를 배우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한다. 과거를 이해하고 대중들이 역사를 친숙하게 만들기 위해, 서구의 국가들은 한국의 방식을 제대로 모방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주의하지 않는다면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과거에 대한 지식이고, 과거의 보존이야말로 어떻게 현재에 대처해야할지를 알려주기에 중요하다. 그렇긴 하지만, 한국은 외국인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서양 국가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거품을 부수는 일은 한국인들이 국제적인 기업과 세계 공동체를 통합하기 위해 반드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들 가운데 하나다. 외국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그들로 하여금 부담 없이 한국을 환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외국인에게 다가가고 버스에서 그들 곁에 앉으며 날씨에 관해 묻는 것만으로도 한국에 대한 외국인의 인지도를 높이는 일이 될 것이다. 내가 만난 많은 연구자들과 외국 학생들은 자신들 가운데 소수만이 한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만날 수 있었을 만큼 한국이 은자의 왕국[Hermit Kingdom]’이라는 점을 계속 강조했다. 이제 수년 동안 한국에 있어온 그들은 비즈니스 중심으로서의 한국에 대한 최신의 관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학생들마저 한국 사회의 거품 안에서 방황한다. 한국어와 영어로 기꺼이 묻고 대답하는 것은 한국의 이미지를 엄청나게 확장시킬 것이고, 그것은 한국의 낡은 이미지를 깨부수고 외국인들이 한국에 머무는 동안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주게 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몇몇 한국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리고 그들과 계속 접촉하면서, 다음 번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 만남이 다시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나는 조규익 교수님과 이완범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한국에 올 수 없었을 것이고 내 개인 연구에서 이만큼의 진전을 이룰 수도 없었을 것이다.

 

 

 

My Impression of Korea

 

Gary Younger

 

One of the first things that one notices in Korea is the speediness of everything. No matter what you are doing Korean are always in a hurry, whether drinking coffee, traveling on the bus, or eating food. Koreans are always in a hurry. However, Koreans also take their time when they are out with friends. For example, when having dinner with Korean friends one might spend up to two hours eating and talking, while Koreans consider a long lunch twenty minutes. The busses are one of the most dramatic demonstrations of the Korean balli balli. For the first month the buses are terrifying as the driver weaves in and out of traffic, takes off as soon as you scan your card, and at times seems as if they are going to crash the bus as they zoom around corners. This style of hurry up all the time is the first thing that foreigners notice about Korea everyone is in a hurry and as time passes you start to notice the people and groups that slow down a little when they are with friends.

 

The next paradox is apparent to foreigners(westerners especially). Koreans  are both friendly and closed off from contact.One mightwonderwhatImean. Koreans are very nice to foreigners, when it comes to giving directions, helping the confused foreigners travel around, and are patient when they order food. However, outside of these particular instances making Korean friends is a little difficult. As a Caucasian, I travel with an invisible boundary around me that Koreans will not cross. When taking the bus I always have a seat to myself, the same on the subway. When shopping, sightseeing, or working on campus Koreans maintain a conscious distance between us. While this makes traveling through a crowd easy, it does keep interactions to a minimum. It is also slightly annoying at times, for example when taking the elevator and Koreans step onto the elevator, see me, and step back off the elevator to avoid having to get closer to the foreigner. In the worst cases, one can see Koreans run and hide when you walk into a restaurant or store to avoid having to deal with the foreigners. This is probably one of the most frustrating things about traveling to Korea. Foreigners come to Korea to learn from Koreans, experience Korean culture, study Korean history, and observe the Korean mindset. This is difficult to do when Koreans will not allow you to approach.

 

The next point is noticeable mostly around the temples, and historical sites. Korea is at once a modern, western, technological powerhouse, and also an ancient country constantly reminding the people that visit of the events and history that Korea has lived through. For example, when traveling around Korea, one finds coffee shops, western music, clothing, food, and variations of western culture. Now, Koreans are justifiably proud of their technological accomplishments and love to show off their large firms to tourists. Some have even gone so far as to create museums dedicated to their history or their products. At the same time, one will find hundreds of museums, historical sites, ancient buildings, and cultural relics around every corner in Korea. However, when traveling around the ancient sites one will suddenly realize that tall buildings, western restaurants, and European style coffee shops surround the location. While in part this is to benefit from the tourist industry, it is disappointing that skyscrapers and Starbucks surround these beautiful areas. That said this is part of the experience and the uniqueness of Korea. Only in Korea is there such a fusion of history and modernity in everyday life, where one can walk out of a brand-new skyscraper into an ancient palace.

 

This fusion of modern and ancient is one of the defining aspects of modern Korea.  However, the best part of Korea is how accessible the museums, and ancient palaces are. Almost all of the museums are free and the palaces have days that one can enter for free. This is a stark contrast to America and the European countries where you have to pay to learn about the past of those countries. This desire to understand the past and to make history accessible to the populace is something that western countries would do well to copy from Korea. Knowledge of the past is something that can be easily lost when if you are not careful, and the preservation of said past is important as it shapes how one deals with the present. That said Korea could take a page from the western nations in dealing with foreigners.

 

Breaking the bubble is one of the first things that Koreans need to do to integrate into the international business and global community. Approach the foreigners, talk to them, and make them feel welcomed to the country. Just by approaching a foreigner, sitting by them on the bus asking about the weather will help to improve the foreigner’s perception of Korea. Many of the researchers and foreign students that I have meet continue to focus on Korea as the Hermit kingdom as few have found a group of Koreans that they can speak with or meet. Now those that have been in Korea for multiple years have a more up to date view of Korea as a business center, but even those students move about within a bubble in Korean society. A willingness to ask and answer questions in both Korean and English would benefit Korea’s image abroad tremendously as it would start to break down this old image of Korea and will also make the foreigners feel welcomed during their stay in Korea.

 

That said, I have made a few Korean friends and I hope to stay in touch with them and to meet them again when I return to Korea the next time. I would like to thank Dr. Cho, Ku Ick and Dr. Lee, Wan Bom as without their assistance I would have been unable to travel to Korea and progress so far in my own personal research.

 

 

 

 


게리와 함께 소주 한 잔!

 


 

 


올림픽 공원에서

 


 

 


함께 공부하던 외국인들과 야외파티를

 


 

 


외국인 동료들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3. 3. 17:01

 


떠나기 전날 찾아온 게리와 함께 숭실교정에서

 

 

 


어느 여름날 찾아온 두 사람.
왼쪽부터 게리, 백규, 세바스티안(시조를 전공하는 독일인) 

 

 

 

게리(Gary Younger)를 보내며

 

 

 

작년 9월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차세대 한국학자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6개월을 보낸 게리(Gary Younger)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간 한국말을 열심히 배운다고 했는데, 30여년 모어(母語)인 영어만 쓰다가 처음으로 한국어를 접해서인가. 귀국 인사차 연구실로 찾아온 그의 한국어 실력을 테스트하다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참 외국어를 익히는 것이 이렇게도 어렵구나!’란 깨달음과 함께, 나이 들 만큼 든 지금도 영어 책을 놓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그에게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 없다.

 

***

 

201391일부터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 역사과에서 나는 한 학기 예정의 풀브라이트 방문학자(Fulbright Visiting Scholar)’ 생활을 시작했다. 맨 처음 공항으로 픽업 나왔던 중국인 두 교수(Du, Yongtao), 학과의 비서인 수잔(Susan Oliver)과 다이아나(Diana Fury) 등이 일상적으로 만나던 사람들이었고, 연구실로부터 가까운 우편함이나 복사실 혹은 간식이 준비되어 있던 휴게실에서 만나는 교수들이 주로 접하는 대학인들의 대부분이었다. 사실 두 교수도 강의실-연구실-복사실등을 통통거리며 굴러다니듯 바쁘게 지내는 바람에 대면할 틈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쯤이나 되었을까. 두 교수가 메일과 전화로 강사 중 누군가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보내 왔다. ‘한 공간에 살면서 그냥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 되지, 중간에 누구를 넣는 건 뭐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면서도 ‘Any time okay!’라는 답신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도 한 주일이나 되어서야 그는 조심스럽게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전형적인 코카서스 인종의 미국인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예의 바르다고 할 수도, 낯을 가린다고 할 수도 있는 그의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있다가 사직한 뒤, 이곳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미 외교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젊은이였다.

 

그 때부터 우리는 간간이 만났다. 주로 내 연구실에서, 가끔은 학교 안팎의 식당들에서. 대화의 주제는 그와 내가 번갈아 정했다. 나는 한국의 정치 외교적 이슈들에 관해 주로 Korea Herald에 실리는 칼럼들을 소개했고, 그는 NYTWP 등에 실리는 미국의 정치 외교 관련 기사들을 준비해왔다. 내가 말하는 한국의 사정, 그가 말하는 미국의 사정은 수산시장의 새벽 경매에 나온 물고기들처럼 늘 싱싱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항상 종횡무진이었다. 그는 내게 최고의 미국 선생님, 나는 그에게 최고의 한국 선생님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가끔 호기를 부리며 여기서 나를 몇 달 동안 만나고 직접 한국으로 가서 공부하게 되면, 머지않아 당신은 미국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되리라!”고 큰소리치며 그에게 용기를 불어 넣었다. 사실 그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고, 그런 이유로, ‘돈 한 푼 안들이고’, 아니 오히려 약간의 돈이라도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한국에 체류하며 한국을 배우고 싶어 했다. 내 분야이든 정치 외교 분야이든 외국인의 한국 연수에 관한 정보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하던 나로서 약간 켕기기는 했지만,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대책도 없이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러나 내 미국 체류 예정기간이 점점 줄어들면서 그도 내 눈치를 보는 듯 했고, 나 역시 뱉어놓은 말들때문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등에 연락을 넣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답이 왔다. 게리에게 맞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차세대 한국학자 프로그램으로, 외국의 젊은 학자 혹은 학자 지망생이 돈을 받으며 공부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목 말라오던 차에 발견한 오아시스가 바로 이런 것인가. 다음날 게리를 만나 상세한 정보를 넘겨준 다음, 두 주의 여유를 줄 테니 양식에 맞추어 작성한 프로포절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득달같이 프로포절을 작성하기 시작하여 지도교수의 확인을 거친 다음 약속날짜 이전에 건네주는 게 아닌가. ‘한국전쟁 이후 한-미 외교 현안들의 이념적 기조라는 제목의 글. 아마 그가 박사논문으로 쓰려고 준비하던 내용의 일부인 듯, 논리가 매우 치밀하고 온당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기대지평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라 판단했는데, 과연 그는 선정되어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그는 처음 넉 달 동안 연구원 내에서 한국어를 열심히 수강했고, 나머지 두 달 동안은 국립중앙도서관을 오가며 자료수집에 몰두했다. 간혹 내게 찾아와 삼겹살에 소주를 즐기며 자신의 한국생활을 말하곤 했다. 작별의 인사를 하러 온 날. 그의 턱과 볼을 에워싼 멋진 수염을 보게 되었다. 객지에서 매일 수염 깎는 일이 귀찮아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 자신의 변화를 가시화 시키고자 하는 뜻이 들어 있었으리라.

 

많은 말들을 남긴 채, 또 멋진 수염을 통한 모종의 암시를 남긴 채, 그는 떠났다. 난생 처음 겪는다는 해외 체류이자 한국 체류 6개월. 그는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까. 내가 큰소리 친 것처럼, 머지않은 장래에 그는 미국 내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될 수 있을까.

 

 

 


    추석 지난 뒤 문현 선생의 작품 발표회에서. 왼쪽부터 세바스티안, 게리, 문현 박사, 백규, 
송지원 박사(국립국악원 연구실장), 케이트 교수(영국 런던대 음악과) 등과
숭실대 국문과 학생들(이수빈, 박문성, 리아, 최연, 권리나) 

 

 


2014년 추석날의 멋진 모임.
선무치료학의 대가 이선옥 박사 자택 뒷산의 '노래와 담소 모임'에 합류한 게리와 세바스티안.
왼쪽에서 두번째 인사가 이선옥 박사, 그 다음이 범패의 대가 범진 스님, 백규.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