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2. 13. 03:58

 

 


터키 괴레메 지역의 오픈 에어 뮤지엄(Open Air Museum)

 

 

 

 


터키 괴레메 로즈밸리(Rose Valley)의 한 암벽 동굴집을 찾아
현장에서 만난 베컴, 허이준, 허이훈 형제 등과 차를 마시며[2005년 12월]

 

 

 

 


터키 괴레메의 로즈밸리 지역

 

 

 

 


터키 괴레메 인근 언더그라운드 시티(Underground City)의 거실에서 만난 맷돌 아래 짝

 

 

 

 


터키의 셀르메 지역에서 만난 암벽 동굴들

 

 

 

 


터키 우흘라라 계곡의 암벽동굴 집에서 만난 프레스코화

 

 

 

 

 

 

 

암굴 속에 서린 생존 의지,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Bandelier National Monument]’의 말 없는 외침

 

 

 

 

9년 전 유럽 여행 중 터키 카파도키아의 괴레메 지역에서 만난 암굴 주거지는 지금까지도 큰 충격으로 남아 있다. 화산활동으로 생긴 다양한 모양의 암석과 암봉들에 침식작용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 안에 거주한 흔적들이 그 때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특히 카이마클르의 지하도시와 으흘라라 계곡, 셀르메 계곡 등 네브셰히르 코스에는 바로 어제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듯 온기까지 느껴졌다. 페르시아와 아랍인들의 침입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6세기부터 10세기까지 8층 깊이[높이가 아닌]로 뚫린 카이마클르의 언더그라운드 시티(Underground City)에는 각 층을 연결하는 가파르고 좁은 통로가 설치되어 있었고, 각 세대마다 거실과 침실은 물론 와인을 제조하고 저장하던 시설, 공동 주방 및 식당, 교회 등은 물론 까페도 있었다. 으흘라라와 로즈 계곡 등 지상에 서 있는 암굴 주택들의 벽과 천정에는 기독교 관련 프레스코화들이 그득했다.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 놀라움을 미국에서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산타페의 박물관들을 주마간산 격으로 스킴하고 멋지게 꾸민 이탈리아 식당에서 시장기를 달랜 후 우리는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Bandelier National Monument]’를 향해 쾌속으로 달렸다. 욕심도 과하지! 그곳을 본 다음 우리는 부랴부랴 멀고 먼 귀로에 올라 뉴멕시코를 벗어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산타페에서 반델리어 가는 길은 지금까지의 어떤 길보다도 만만치 않았다. 84[285] 하이웨이를 타고 산타페로부터 한 시간 가까이 사막지대를 달리다가 퍼와이키(Pojoaque) 턴파이크에서 502번으로 갈아탄 다음 더욱 높아진 산록 도로를 통해 몇 십 분을 더 달렸다. 제법 큰 도시의 모습을 갖춘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부터는 가파른 산길이었다. 길은 그런대로 넓었고 노면 상태 또한 괜찮았으나, 왼쪽은 천 길 낭떠러지! 잔뜩 구름 낀 하늘엔 커다란 독수리가 선회하고 있었다.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의 음산한 분위기가 계곡 아래쪽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그 옛날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등짐을 진 어른들과 올망졸망 어린 것들이 길도 없는 이 등성이들을 넘었겠구나! 넘다가 실족하여 저 아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린 삶들도 좀 많았으랴!’ 생각하니, 삶에 대한 집착과 허무 사이의 드넓은 간극에 갑자기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구불구불 산길을 넘어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비지터 센터에 도착했다. 추운 겨울, 비수기라서인지 우리를 포함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긴 코스와 짧은 코스가 있었지만, 시간 때문에 우리는 짧은 코스를 택했다. 사실 짧다 해도 충분히 둘러보려면 1시간 반 정도나 걸리는 코스였다. 비지터 센터를 떠나 본격 트레일에 접어드니 거대한 넓이로 땅 밑을 파낸 두 종류의 유허(遺墟)가 나타났다. 이른바 빅 키바(Big Kiva)’ 즉 푸에블로 인들의 지하 예배장이 아래쪽에 있었고, 그 위쪽에는 음식 저장고로 쓰이던 400개의 방을 가진 2층 구조물 즉 츄웨니[Tyuonyi]가 있었다. 그 주변에는 가옥으로 추정되는 지상 건축물들의 터가 많이 남아 있고, 거기서 올려다보니 주택 혹은 주택의 일부로 사용되던 벌집 모양의 암봉이 거대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었다그곳이 바로 푸에블로 인들의 암벽 주거지[Cliff Dwellings]’였다.

 

이 구역의 암벽 주거지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짧은 코스에 있는 것들이고 또 하나는 그 위쪽의 긴 주택[Long House]’들이었다. 우리는 짧은 코스의 것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미 터키에서 정교하게 꾸며진 암굴(巖屈)들을 자세히 본 바 있는 내 입장에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으나, 미국에도 이런 유형의 집들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화산암[volcanic tuff]에 뚫린 동굴들은 그 자체가 좋은 집이나 안락한 방의 역할을 한 공간들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안에 들어가니 대부분의 벽들은 불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까맣게 그을려 있어 누군가 이 안에서 불을 피우고 살았음이 분명했다. 암벽을 둘러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작은 구멍들이 나 있었는데, 이것은 통나무들을 그 구멍에 끼운 다음 암벽에 의지하여 지어낸 푸에블로 전통가옥들의 흔적이었다. 구멍의 숫자로 보아 전성기 때는 매우 많은 세대의 집들이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 가는 교통망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의 위치

 

 

 


반델리어 지역 표지판

 

 

 


반델리어 지역 푸에블로 인들의 합동 예배장 유허

 

 

 


동굴집들이 있던 거대한 암벽

 

 

 


동굴집들이 있던 거대한 암벽

 

 

 


동굴집들이 있던 거대한 암벽

 

 

 


동굴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설치한 사다리

 

 

 


암벽 동굴집들과 벽에 잇대어 집을 지었던 흔적으로 남아 있는 작은 구멍들,
그리고 암벽화[pictograph]

 

 

 


암벽동굴집들과 그 주변에 덧붙여 지은 집의 유허

 

 

 


암벽 동굴집 아래쪽에 있던 주택가의 유허

 

 

 


암벽 동굴집 아래쪽에 있던 주택가와 각종 시설들의 유허

 

 

 


암벽 동굴집 아래쪽에 있던 주택가와 각종 시설들의 유허

 

 

 


암벽 동굴집 내부[벽이 온통 그을려 있음]

 

 

 


암벽 동굴집에서 내다 본 바깥 풍경

 

 

 

 

그렇다면 그들은 이 깊고 척박한 산중에서 무얼 먹고 살았을까. 대략 12세기 중반에서 16세기 중반에 걸쳐 이곳에서 살았던 () 푸에블로[Ancestral Pueblo]’ 인들은 메사(mesa)의 위쪽에 있던 들판에 농작물들을 재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옥수수, , 호박 등은 그들의 주식이었으며, 자생식물들과 우리가 현장에서 발견한 사슴, 토끼, 다람쥐 등의 고기도 영양분을 보충하기에 요긴했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의 집 주변에서 기르던 칠면조로부터는 깃털과 고기를 얻었을 것이며, 개를 이용한 사냥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였다.

 

반델리어에 인간이 깃들기 시작한 세월은 10,000년이 넘는다. 메사와 계곡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야생 조수(鳥獸)들을 따라 다니던 수렵채취 부족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서기 1,150년에야 선 푸에블로인들은 반영구적인 주거지를 짓기 시작했고, 1550년에는 이곳을 떠나 리오 그란데(Rio Grande) 강가로 주거를 옮겼다. 코치티(Cochiti), 산 펠리페(San Felipe), 산 일데폰소(San Ildefonso), 산타 클라라(Santa Clara),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등이 그들의 새로운 주거지역이었다.

 

그 후로 4백여 년 간 이 땅에는 사람들이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심한 가뭄까지 닥쳐오게 되었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들의 구비전승[口碑傳承, oral tradition]에 의하면, 리오 그란데 강을 따라 남쪽과 동쪽에 위치한 코치티 푸에블로와 산 일데폰소 푸에블로가 프리올레 캐년에 집을 짓고 살던 이들의 가장 가깝거나 직접적인 후손들로 보인다고 한다.

 

비지터 센터에는 박물관과 함께 이들의 생활사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관이 있었다. 거기서 확인하게 된 흥미로운 사실들 중의 하나는 이들이 구비전승을 통해 조상들과 연결했고, 그에 의존하여 삶의 지혜를 얻거나 적응해 나왔다는 점이다. 푸에블로의 구비전승은 자신들의 믿음, 이야기, 노래, , 생활 속의 기술 등 모든 것을 포괄한, ‘옛날과 현재의 대화E.H. 카아의 말대로 역사였다. 따라서 구비전승은 선대 푸에블로의 생존에 기본적인 텍스트였고, 오늘날에도 푸에블로로 하여금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 하는 필수적인 지식의 창고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푸에블로의 이야기들에는 그들의 활동이 묘사되어 있기도 하고 교훈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여, 대대로 그것을 가르쳐 왔음은 물론 그 안에 들어 있는 생생한 정보들을 공유하기도 했다. 대부분 구비로 전승되어 왔지만, 개중에는 그림, 암각화, 혹은 춤으로 묘사되기도 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들의 주거지 주변에서 목격한 암각화도 그 사례들 가운데 하나였다.

 

1,700년대 중반 스페인 정부가 불하해준 땅을 소유한 스페인 정착자들은 프리욜레 캐년(Frijoles Canyon)에 자신들의 주거지를 만들었고, 1880년 코치티 푸에블로의 호세 몬토야(Jose Montoya)는 고고학자 반델리어[Adolph F. A. Bandelier, 1840. 8. 6.~1914. 3. 18.]를 프리욜레 캐년으로 데리고 가 조상들이 살던 고향땅을 보여주었다. 그 때부터 반델리어는 이 지역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델리어는 스위스 베른 출신의 미국 고고학자인데그의 이름을 따서 이 유적지의 명칭으로 삼았을 정도로 그는 이 지역에 관한 전문가였다. 그는 젊은 시절 미국으로 이주하여 노동을 하며 힘들게 살았다. 당시 대단한 인류학자 모건(Lewis Henry Morgan)의 지도 아래 그는 미국 남서부, 멕시코, 남아메리카 등지의 미국 원주민들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멕시코의 소노라(Sonora),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지에서 연구를 시작하여, 이 지역 연구를 선도하는 권위자가 되었고, 쿠싱(F. H. Cushing) 및 그의 후계자들과 함께 선사 문화 분야의 선도적인 학자가 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을 딴 곳이 바로 이 구역이었다.

 

1916반델리어 국립 유적지법령이 만들어지고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 서명했으며, 1925년에는 에벌린 프라이(Evelyn Frey)와 그의 남편 죠지(George)가 이곳에 도착하여 1907년 애벗 판사(Judge Abbot)가 건립해온 ‘10 엘더스 랜취(the Ranch of the 10 Elders)’를 이어받게 되었고, 1934년과 1941년 사이에 민간 자원 보존단[Civilian Conservation Corps]’의 노동자들이 프리욜레 캐년에 만들어진 캠프에서 작업을 하는 등 최근까지의 노력으로 지금의 유적지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암벽 주거지를 거쳐 내려오는 길은 지난여름 이 일대를 휩쓸었던 것으로 보이는 홍수의 현장이었고, 근년에 일어나 아름드리 소나무들을 태워버린 무서운 자연 화재의 현장이기도 했다. 무수한 나이테들을 몸에 새기고 벌렁 누워있거나 아직 청청하게 버티는 소나무들은 그 옛날 이곳에서 살아간 푸에블로 인들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이 계곡에서 먹고 자고 사랑하며 생존의 나날을 버텨내던 푸에블로 인들은 벌써 오래 전에 이 계곡을 떠났다. 그러나 리오 그란데 강줄기를 따라 새로운 터전들을 일군 그들은 변함없이 옛날이야기들 속에 숨어 있는 조상들의 지혜를 이어가며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는 프리욜레 계곡의 거센 냇물 소리를 기억하며...

 

 

 


당시 이곳 주민들이 잡아먹고 살았을 다람쥐

 

 

 


당시 이곳 주민들이 잡아먹고 살았을 사슴들[Mule Deer]

 

 

 


당시 이곳 주민들이 따 먹고 살았던 잣나무 열매[piňon nuts].
지방과 단백질의 공급원이었음.

 

 

 


당시 이곳 주민들에게 비타민과 무기질을 공급했을 선인장 열매들

 

 

 


당시 이곳 주민들이 동굴집 주변에 남긴 암각화[pictograph]

 

 

 


스페인 이주자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암시하는 암벽 위의 십자가

 

 

 


열매를 갈아 식량을 확보하던 당시 여인들의 삶[비지터 센터 박물관 그림]

 

 

 


당시 이곳 주민들이 사용하던 바구니와 갈돌, 그리고 화살촉[비지터 센터 박물관]

 

 

 


당시 이곳 주민들이 사용하던 도자기와 각종 생활 도구들[비지터 센터 박물관]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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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 2. 1. 01:15

 

 

 


연구실에서 포즈를 취한 림멜 교수

 

 

 

한국의 통일을 열망하는 러시아 역사 전문가, 림멜(Lesley A. Rimmel) 교수

   

 

미국에 있는 동안 꽤 많은 미국의 지식인들을 만났다. 주로 교수나 강사, 박물관의 큐레이터들,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 등인데, 그 가운데는 오가는 도중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금까지 비교적 자주 만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미국 지식인들이 타인들 특히 외국인들을 낯설어 하며 자신들만의 울타리에 갇혀 지내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자신의 전공을 통해 얻은 통찰력으로 남을 이해하기도 하고, 남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를 통해 전공에서 만난 문제들을 풀기도 한다.

 

12월 중순의 어느 날 점심시간. 브레이크 룸에서 커피를 데우고 있는데, 평소 눈인사 정도를 나누던 여 교수 한 분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 며칠 전 PBS에서 방영된 비밀의 국가 북한[Secret State of North Korea]’란 다큐멘터리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 순간 나는 참으로 많이 부끄러워졌다. 방영된다는 소식을 뉴스로 듣긴 했으나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동족의 끔찍한 참상들이 미국인들의 눈앞에 발가벗겨진 채 드러난 모양이구나! 집에 돌아가자마자 포털사이트에서 그 방송을 확인했고, 며칠 후에는 다운로드해서 직접 보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거나 짐작하고 있는 사실들의 반복에 불과했지만, 미국인들에겐 충격으로 다가왔을 내용이었다. 특히 군사조직에 가까울 정도의 병영국가 체제, 대한민국과 미국을 주된 표적으로 무력을 앞세운 협박, 몽땅 쇼 윈도우의 컨셉으로 꾸며진 평양, 비참하고 끔찍한 정치범 수용소들, 살아남을 힘마저 상실한 아이들과 일반국민들의 참상 등. 내게 북한의 현실을 일깨워 준 림멜 교수에게 달리 할 말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녀를 만나 South Korean들의 입장을 말하지 않으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 드디어 림멜 교수의 연구실에서 장시간 만나 한반도의 현실을 설명하고, 그녀의 관심사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대화들 가운데 한 부분을 이곳에 올리기로 했다.

 

 


                                                      연구실에서 필자와 대담 중인 림멜 교수

 

 

 

***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림멜 교수는 자신의 전공을 통해 얻은 통찰력으로 남을 이해하게 된대표적 미국 지식인이다. 명문 예일 대학 역사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그녀는 이듬 해 국제 교육 교류 위원회[Council on International Educational Exchange]’의 수혜자로 선발되어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레닌그라드 주립대학[Leningrad State University]에서 러시아어 프로그램을 이수했으며,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키로프(Kirov) 살해와 소비에트 사회: 1934-35년 레닌그라드에서의 선전과 여론[The Kirov Murder and Soviet Society: Propaganda and Popular Opinion in Leningrad, 1934-35]’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였다.

 

1995-96년에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강사로 재직했고, 1998년 가을학기부터 이곳 OSU에 자리를 잡고 주로 러시아중앙아시아근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과목들을 강의해 왔으며, 20여 종에 가까운 수상 및 그랜트(Grant) 수혜 경력을 갖고 있는 탁월한 교수임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 가운데는 풀브라이트(1991-92), 앨리스 폴 어워드(Alice Paul Award/1991), 국제 교류 연구 기금(International Research and Exchanges Board Grant/1991-92) 등을 비롯,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혜를 받은 학자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녀의 주된 관심사는 스탈린 시대 소련 역사에서 통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폭력이었고, 전쟁을 비롯한 집단 폭력이나 지하경제와 같은 국제적 기층민중의 현실 등에도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북한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현실에 관심을 갖는 걸까. 북한 얘기를 꺼내자 그녀는 김정은을 입에 올리며 스탈린보다 훨씬 잔인한 그의 성격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야기 도중 책장 위에 올려놓았던 스탈린의 배불뚝이 동상을 꺼내더니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체형(體形)이 스탈린과 똑같지 않으냐고 내게 물었다. 국민들을 배고프고 괴롭게 하면서 자신의 배를 불린 전형적인 독재자의 모습을 스탈린에게서 찾을 수 있고, 한반도의 김씨 3대는 바로 그 아류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스탈린 시대를 중심으로 러시아 역사를 긴 세월 연구해 온 그녀로서 국민 착취 및 학대의 전형적인 독재자로 스탈린을 꼽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체형과 인간성의 유사성까지 들면서 김씨 3대를 스탈린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인물들로 규정하고 있는 점은 흥미로웠다. 그나마 스탈린은 자기 당대에 끝이 났지만, 김씨 왕조는 대물림을 하고 있으므로 훨씬 지독한 인물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탈린이나 김씨 3대 등 배불뚝이 독재자들주민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악마적 지도자의 시각적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음을 그녀의 설명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스탈린의 독재가 결국 소련 해체의 단서로 작용한 것처럼 그보다 더 잔인한 모습으로 한반도 북쪽에 군림하고 있는 김씨 3대 특히 김정은의 폭력성이 조만간 체제의 전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그녀의 관점이었다.

 

 


연구실에서 필자와 대담 중인 림멜 교수

 

 


연구실에서 필자에게 설명 중인 림멜 교수

 

***

 

주변에 입양된 한국의 고아들을 언급함으로써 나를 부끄럽게 했지만, 이내 한국인 친구들이나 한국과의 친분을 강조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친밀감을 갖게 한 그녀.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삼성현대기아엘지•대한항공 등 미국을 비롯한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한국의 기업들을 죽 나열하고 그들의 장점까지 거론했으며,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삼성 폰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뿐인가. 한국의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을 독재자로,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을 민주주의 정착기의 대통령으로, 그 사이에 있는 노태우 대통령을 과도기로 각각 규정하는 등 한국 대통령들의 이름과 공적을 꿰고 있었으며, 반기문 총장, 김용 세계은행 총재 등 세계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명사들의 이름을 줄줄 외움으로써 한국인인 나를 적잖이 놀라게 했다.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산업화의 결정적 초석을 놓은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고 있으며, 그 여파로 박근혜 대통령도 정계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다고 내가 설명하자 그 말을 수긍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물어왔다. 세대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믿음직하다는 평가를 받아 비교적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말하자, 동북아시아의 큰 나라들이나 미국도 내지 못한 여성 대통령을 선출했다는 점과 함께 여성의 리더십이 나라를 흥하게 하는 선례를 한국이 만들 것이라는 고무적 관측까지 내놓는 것이었다. 북한이 매우 폭력적으로 나오는 것도 국제사회에서 보여주는 한국의 다양한 활약이나 선전(善戰)에 불쾌감을 느끼는 데 큰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그 나름의 분석을 보여주기도 했다.

 

***

 

학자로서 자신이 전공한 학문을 바탕으로 현존하는 체제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걸출했던 역사철학자 E. H. 카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가 역사라고 했다. 그 대화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온당한 해석 행위이고, 그런 해석을 통해 역사의 객관성은 확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스탈린 시대에 생겨난 역사적 사건들의 해석을 통해 단순히 그 시대의 규명에나 그치고 만다면, 그것을 진정한 역사가의 안목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 학자를 만나자마자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김씨 3대 혹은 북한의 미래까지 내다보는 통찰을 림멜 교수는 내게 보여준 것이리라. 여지없이 엄정한 시각을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들의 해석에서 얻어내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역사학자들을 만나는 일이 내겐 큰 즐거움이고, 그 즐거움을 림멜 교수와의 만남에서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컴퓨터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는 림멜 교수

 

 


림멜 교수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삼성 폰

 

 


2013. 12. 14. PBS에서 방영한 '비밀의 국가 북한' 타이틀 화면[방송화면 캡쳐]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의 어린이[방송화면 캡쳐]

 

 


군 진지를 순시하는 김정은에게 달려가며 충성을 과시하고 있는 인민군들[방송화면 캡쳐]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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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지민

    오래된 삼성 폰이 참 정겹게 느껴집니다.
    우리나라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이 많은 분도 계시군요

    2014.02.02 00:51 [ ADDR : EDIT/ DEL : REPLY ]
  2. 최영민

    림멜 교수님은 아마도 스탈린 시대의 소련역사를 연구하시는 분 같은데요. 키로프가 스탈린의 친구였고, 당시 키로프의 도움이 스탈린에게는 절대적이었지요. 림멜 교수님의 논문을 읽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스탈린이 키로프를 죽인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지요. 말하자면 그를 '미래의 잠재적인 정적'으로 보았던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고모부 장성택'을 잔인하게 죽인 김정은과 '절친 키로프'를 교묘하게 죽인 스탈린, 둘 중에서 누가 더 고약한 인물일까요?

    2014.02.02 06:35 [ ADDR : EDIT/ DEL : REPLY ]
  3. 백규

    최영민 님의 댓글이 아주 인상적이군요. 그렇지요. 사실 스탈린은 열등감이 심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루지아인으로서 '대러시아'를 제창했을 정도로 러시안에 대한 민족적 열등감도 컸지요. 그런데 키로프는 스탈린보다 훨씬 잘 생겼고, 달변가로서 스탈린을 위한 대중선동의 선봉에 늘 그가 섰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기를 절대적으로 도와주는 친구에게 강한 열등감을 느꼈던 것일까요? 아니면 최영민 님의 견해대로 '미래의 잠재적 정적'으로 생각하여 미리 제거한 것일까요? 제 생각엔 아마도 두 가지 가능성이 다 해당된다고 봅니다만. 다른 분들의 견해를 더 기다려 보겠습니다.

    2014.02.02 06:55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