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12. 30. 14:37

 

 

 

교육으로 일어선 촉토 족의 어제와 내일(1)

 

 

 

치카샤 땅인 티쇼밍고를 거쳐 촉토 땅인 듀랭(Durant)에 들어섰다. 이곳 사람들은 듀랭이 오클라호마 시티나 털사 이외의 지역들 가운데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며,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도시들 가운데 하나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도심으로부터 겨우 10마일 이내에 미국 최대 인공호수들 중의 하나인 텍소마 호수(Lake Texom)가 있어 매년 8백만~1천만의 관광객이 몰리며, 해마다 메모리얼 데이에 이어 열리는 목련 축제에도 대규모의 관광객들이 밀려들 만큼 매력적인 도시라고 했다. 무엇보다 우리가 찾는 촉토 네이션의 본부[headquarter]가 있었으며, 규모 또한 촉토 네이션 안에서는 맥컬레스터[McAlester]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특이한 점은 주 의회에 의해 오클라호마 목련의 수도로 지정되었다는 점인데, 목련 축제 역시 그런 공식적인 인정에 의해 열리는 행사였다. 이곳에 있는 남동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Southeastern Oklahoma State University]’의 캠퍼스는 천 개의 목련꽃 캠퍼스[The Campus of a Thousand Magnolias]’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이 도시는 오클라호마 주 안에서 목련꽃의 본고장인 셈이었다.

 


듀랭의 다운타운

 


듀랭 시가지에서 만난 의자. '듀랭'이란 글자를 아래쪽 햇살무늬와 어울리게 디자인한 점이 돋보임.

 

그러나 도시의 첫인상은 그리 밝거나 윤택하지 못했다. 한켠에 괴물처럼 서 있는 엄청난 규모의 회색 공장[정확한 것은 아니나 시멘트 공장 같은 느낌을 주었음]은 도시를 우중충하게 만들었으며, 다운타운의 상당수 비어있는 건물들도 기름기가 빠져 부분적으로 폐허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중소도시들의 경기가 나빠지자 사람들이 대도시로 이사 간 뒤 남겨진 집들을 처리하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관리되지 않는 빈 집은 도시 전체의 활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어떤 건물은 전통음식점으로 탈바꿈 되어 생명을 이어가는, 다행스런 모습도 보였으나, 전체 분위기를 추스르지는 못했다. 비교적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신시가지의 호텔에 잠자리를 정하고, 그 인근에서 저녁 한 끼를 해결한 우리는 이 도시에 큰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아침 일찍 인근의 포트 와쉬타(Fort Washita)삼강 계곡 박물관[The Three Valley Museum]’을 본 다음 다시 1박을 하게 될 아이다벨(Idabel)로 달려가기로 한 것이다.

 

사실 치카샤와 마찬기자로 촉토도 넓은 땅이었다. 원래의 면적을 반분하여 치카샤에게 넘겨 주고 남은 땅이었고, 평원뿐인 오클라호마 주에서 보기 드물게 산악[그렇다고 아주 높거나 험준하지 않은] 지역이 많다는 점 또한 특이했다. 대표적으로 Fort WashitaFort Towson 등의 군사기지들이 있을 만큼 고지대였고,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산악을 따라 수많은 호수들, 계곡들을 기반으로 하는 주립공원들이 집중된 곳이 바로 촉토 네이션이었다. 촉토는 이런 지형을 가진 11개의 카운티[휴즈(Hughes)/코울(Coal)/아토카(Atoka)/브라이언(Bryan)/피츠버그(Pittsburg)/하스켈(Haskel)/래티머(Latimer)/푸쉬마타하(Pushmataha)/촉토(Chocktaw)/르 플로어(Le Flore)/맥커튼(McCurtain)]에 총 인구 256,598, 29,594 km, 치카샤에 비해 인구는 적으나 면적은 약간 큰 규모였다.

 


최신 지도에 표시한 촉토 네이션 관내 카운티들

 


촉토 네이션 내 각 카운티 분할도

 


촉토 네이션의 강, 호수. 도시 등이 표시된 지도

 


촉토 네이션의 관내 카운티 표시 지도

 


1800년 당시 촉토 족 영역

 

***

 

그렇다면 촉토 족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치카샤 지역에서 만난 어떤 지식인은 촉토 족이 원래는 자신들과 동조동근(同祖同根)이었다가 나중에 갈라졌다고 했으나, 나는 아직 문헌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그들은 무스코기 어족[Muskogean Linguistic Family]의 일원이고, 유럽에서 건너 온 백인들과 접촉하기 전까지 천년 이상을 미시시피 강에서 번성하던 마운드 빌딩[mound-building, 무덤이나 흙 둔덕을 남긴 선사시대 북미 인디언 제 부족의 건축양식]’옥수수 주식 기반[maized-based]’ 사회에 뿌리를 둔 부족이었다. 그들 역시 치카샤와 마찬가지로 에르난도(Hernando de Soto)가 이끄는 스페인 탐험대와 피나는 싸움을 벌이기도 했으나, 그로부터 2세기 뒤에는 유럽의 무역상들을 받아들여 거래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워싱턴 대통령이 인디언 부족들을 통합하여 유럽계 미국인 문화에 적응시키고자 했고, 많은 촉토인 들도 이미 백인들과 결혼하기 시작했으며, 기독교를 신봉하거나 백인들의 관습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촉토는 체로키, 치카샤, 크리크, 세미놀 등과 함께 문명화된 다섯 종족[Five Civilized Tribes]’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당시 촉토족의 오두막집

 


1830년대 이전 촉토족의 움집

 

다른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을 겪었다. 촉토는 1786호우프웰의 조약[Treaty of Hopewell]’을 시작으로 남북전쟁 이전 이미 미국정부와 9개의 조약을 맺은바 있었다. 물론 모두 미국과 촉토족 사이의 경계를 확정하거나 평화적인 관계를 수립하자는 것이 그 조약들의 공통된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후 미국 정부는 촉토와의 경계선을 재조정하거나 심지어 촉토로 하여금 수백만 에이커의 땅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결국 1830년 미국 정부는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온 촉토 땅을 빼앗고, 미시시피 강 서쪽 인디언 구역에 그들을 몰아넣고 말았다. 그곳으로 옮기는 과정이 바로 눈물의 여정이었고, 그 여정 중에 2,500여명이 죽었다. 그런 쓰라림을 겪은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심성은 모질지 않았다. 새로운 땅에서 필사적인 노력으로 생업을 일으켰고, 자신들의 새로운 헌법과 자치제도를 만들었다. 학교와 교회들을 세웠고, 감자 흉년으로 기근이 들었을 때에는 돈을 거두어 고통을 함께 하기도 했다.

 


촉토족이 겪었던 '눈물의 여정' 그림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미국정부를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혼이나 교육을 통해 미국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1차 세계대전에는 많은 부족의 젊은이들이 참전하여 큰 전공을 세웠으며, 한국전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참전하여 이들 중 전사한 사람도 16명이나 된다는 것이었다.[‘미국통신 41’ 참조] 특히 1차 세계대전에는 촉토어가 연합군의 암호로 채택됨으로써 암호 해독병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활약했으며, 그 중 다섯 명은 대통령의 훈장까지 받게 되었다고 한다.['미국통신 41' 참조]

 


1차대전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운 촉토 족 암호해독병 기념 메달

 

***

 

우리는 아침 일찍 포트 와쉬타(Fort Washita)를 찾아 이곳에서 같은 국민들이 편을 갈라 싸운 전쟁의 참화와 비극을 확인하기로 했다. 다운타운에서 진지까지 30분 정도 걸리는 길은 호수와 숲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경관의 연속이었다. 전적지 문을 들어서자 사방에 밑동만 남은 채 당시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었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안내원이 남군과 북군으로 갈려 싸우던 당시의 상황을 특유의 남부 사투리로 실감나게 설명했다.

 


포트 와쉬타 정문

 


포트 와쉬타 전시 및 행정실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나서

 

설명을 들은 후 우리는 전쟁의 폐허를 직접 만져 보기로 했다. 참호들, 중대 막사, 포대, 주방 등이 곳곳에 널려 있었고, 전몰자들을 묻은 공동묘지가 한켠에 있었다. 그리고 골드 러쉬(Gold Rush)’ 당시 캘리포니아 행 열차가 이곳에서 출발했음을 알려주는 객차 한 량도 전시되어 있었다. 드넓은 황야에서 돈을 캐러몰려다니던 당시 백인들의 충혈된 눈동자가 폐허들 곳곳에 박혀 있는 듯 했다. 전쟁 당시 이곳 인디언들은 남부 연합군에 소속되어 있었고, 그들 가운데서 장군까지 배출되었다. 돈이 많고 대오(隊伍)가 정렬되어 있던 북군과 달리 옷도 장비도 시원치 않고 무엇보다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을 남군의 초라한 모습이 벽면 가득 그려져 있었다. 이 진지에도 인디언의 흔적은 그렇게 남아 있었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복장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복장

 


유적지에서 나온 연장들

 


남북전쟁에서 전사한 용사 Darrel Lamar의 묘

 


남북전쟁에 참여한 벨크납(W.M. Belknap) 장군의 묘와 기념비

 


골드러쉬 당시 캘리포니아로 떠나던 열차의 한 부분.

 


전쟁 당시 사용하던 우물

 


남북전쟁 때 남부연합군의 더글러스(Douglas Hancock Cooper)장군이 기거하던 집

 


남북전쟁 때 남군의 중대 막사


 

우리는 듀랭의 다운타운으로 귀환하여 앤틱 풍의 식당에서 이곳 전통음식으로 시장기를 지운 뒤 삼강계곡 박물관[Three Valley Museum]’을 찾았다. 삼강(三江)이란 ‘Blue River, Red River, Washita River’ 등인데, 1976년 개관한 이 박물관의 이름은 듀랭에 관한 맥 크리어리(McCreary)의 책 “Queen of Three Valleys”에서 따왔다고 한다. 듀랭 역사학회에 의해 운영되는 이 박물관의 핵심 컬렉션은 생활사 자료들이었다. 1873년에 시작된 브라이언 카운티와 듀랭을 대표하는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이 학회의 목표로서, 이곳에 소장전시된 모든 컬렉션들은 시민이나 관광객들, 연구자들이 모두 즐기고 참고할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 안내원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안내원의 설명에 비해 실제 컬렉션들은 우리가 이미 보아 온 지역의 어느 박물관에 비하더라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낫다고 할 만한 것들이 없었다. 그런 실망감 속에 박물관을 떠나 촉토 네이션 본부와 다운타운을 둘러 본 다음 듀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계속>

 


듀랭의 다운타운에서 만난 이 도시의 전통음식점[Main Street Barbecue]

 


Main Street Barbecue에서 주문을 받고 있는 종업원 Hailey양. 매우 친절하고 상냥하고 명랑했음.

 


듀랭 다운타운의 '삼강계곡 박물관'[Three Valley Museum]

 


박물관에 전시된 농기구

 


박물관에 통째로 기증, 전시되고 있는 'J.R.Jarrell & Co.'사무실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옛날 우체통

 


박물관에 전시중인 옛날 솜틀기계

 


듀랭에 있는 촉토 네이션 본부

 


듀랭에 있는 Bryan County 청사

 


전 세계의 전장에서 죽은 이 지역 군인들의 명단을 새겨 놓은 비석

 


전몰용사들을 추모하는 사업을 하고 있는 브라이언 카운티 재향군인회

 


포트 와쉬타 전시실에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2. 28. 10:40

 

 

 

지혜로운 치카샤 족, 인디언 사회의 자존심

 

 

 

 

 

 

엄청난 공동체였다. 규모도 규모려니와 곳곳에 잠재된 역사와 문화의 실체, 그리고 진하게 감지되는 그들의 민족적 의지가 놀라웠다. 그동안 인디언들에 대해 갖고 있던 내 편견이나 무지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오클라호마 주 서북쪽과 동쪽을 여행하면서 체로키와 오세이지 인디언들의 실체를 이미 확인한 바 있지만, 이곳 중남부에서 만나는 치카샤 인디언들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오클라호마 주 전체 153개의 카운티 중 13[그래드(Grad)/맥클레인(McClain)/가빈(Garvin)/폰타탁(Pontotoc)/스티븐스(Stephens)/카터(Carter)/머레이(Murray)/쟌스톤(Johnston)/제퍼슨(Jefferson)/러브(Love)/마샬(Marshall)/브라이언(Bryan)/코울(Coal)]로 구성되어 총인구 318,658명, 면적 2,3456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의 치카샤 네이션이었다.

 

 


치카샤 네이션의 현재 영역[표시 부분은 카운티 이름들]

 


테네시 주에 있던 치카샤 영역

 


오클라호마 주에서 치카샤가 차지하는 부분들과 카운티 이름들

 


치카샤 네이션 영역도

 

177번 하이웨이를 타고 내려가던 중 아이오와 인디언 네이션을 만났고, 그로부터 대략 두 시간 쯤 뒤 치카샤 인디언 네이션이 있는 폰타탁 카운티의 에이다(Ada) 시티에 도착했다. 원래는 스틸워터에서 직접 설퍼(Sulphur)로 달려가려 했으나, 네이션 본부 건물이 있는 에이다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이곳에는 현재 네이션 본부 건물들만 남아 있고, 그들의 실제 역사나 문화는 컬츄럴 센터가 있는 설퍼와 지난 날 이들의 수도였던 티쇼밍고(Tishomingo)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에이다(Ada) 시티에 있는 치카사 네이션 건물의 일부

 


번성한 에이다 시티의 다운타운[현재 도로공사중]

 


에이다 시티 치카샤 네이션 앞뜰에 있는 전사[Warrior]상

 

에이다로부터 30분쯤 걸려 설퍼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치카샤 문화센터[Chickasaw Cultural Center]를 찾았고, 거기서 치카샤 족의 지식인 여성 큐레이터 들로리스(Deloris Jefferson)를 만났다. 마침 관람객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녀와 독대하여 치카샤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설명을 비교적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고, 설퍼에서 하룻밤을 묵고 난 다음 날에 들른 티쇼밍고(Tishomingo)치카샤 의회 박물관[Chickasaw Capitol Museum]’에서도 역시 지성적인 풍모의 여성 큐레이터 플로라 핑크(Flora Fink)로부터 다양한 콜렉션들에 얽힌 정치적인류학적 설명을 들었다. 두 여성 모두 경제적으로 부강하고 문화적으로 생동감 넘치며 활기에 찬 주민들로 이루어진 것이 치카샤 네이션임을 강조하기에 바빴다. 치카샤 문화센터와 의회박물관 모두 치카샤가 이 땅에서 한 때 살다가 사라진 민족이 아니라, 지금도 왕성하게 확장되는 현재와 미래의 민족임을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치카샤의 여성 지식인들을 대표한다고 생각되는 두 사람으로부터 들은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설퍼(Sulphur)시티 치카샤 컬츄럴 센터 전시관의 세련된 모습

 


건축미가 돋보이는 치카샤 컬츄럴 센터

 


치카샤 컬츄럴 센터의 세련된 모습

 


치카샤 컬츄럴 센터의 전시물[독수리 깃털로 만든 추장의 옷]

 


치카샤 컬츄럴 센터에서 만난 큐레이터 Deloris Jefferson

 


치카샤 컬츄럴 센터 전시관의 생활사 자료들[치카샤의 자부심이 드러나 있음]

 


치카샤 컬츄럴 센터 뒷편에 마련된 주거지 모형 위에서 멜라니

 


치카샤 컬츄럴 센터 안뜰에 세운 가족상

 


티쇼밍고 시티의 치카샤 네이션 의사당 건물

 


치카샤 의사당 건물 앞에 세워진 전사 티쇼밍고 상

 

분명치는 않으나 치카샤 족은 원래 촉토(Choctaw) 족과 함께 오늘날의 멕시코에서 시작되어 북미 쪽으로 이주했다 한다. 그들은 미시시피 강 근처에 살고 있었으며, 일부는 남부 캐롤라이나 주의 사바나(Savannah) 타운에도 살고 있었다.

치카샤 족이 미시시피, 앨라배마, 테네시, 켄터키 등지의 사냥터들을 비롯한 큰 땅을 점유하고 있던 때는 다른 부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시절이었다. 그들은 16세기 중반 스페인 사람 에르난도(Hernando de Soto)가 이끄는 탐험대와의 만남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들은 결국 과도한 요구를 하던 탐험대를 공격하여 패주시킴으로써 치카샤가 남동부 인디언 부족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존재라는 평판을 만들어 낸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남북전쟁 이후 백인 이주자들이 서부로 이동하면서 치카샤 족의 땅이 서부 팽창을 위한 주요 타깃으로 부상되었고, 루이지애나 매입지에 있던 미시시피 강 서쪽 땅을 미국정부가 차지하면서 치카샤 족과 다른 동부 부족들을 서부로 이주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은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1832년 이주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치카샤 족은 미국 정부에 굴복했고, 그 조약은 1834년에 다시 협상될 수밖에 없었다새 인디언 구역 안의 미시시피 서쪽에 살만한 땅이 찾아질 때까지 정부의 이주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 조약 속의 주요 조항들 가운데 하나 때문이었다. 

 

 


1890년대의 치카샤 영역도

 

적절한 땅을 찾을 수 없었던 현실의 대안으로 선택된 것이 촉토 족과의 동거였다. 다시 말하여 치카샤 족은 새로운 인디언 구역 내 촉토 땅의 한 부분을 빌려 이주할 것을 강요당한 것이었다. 1937년의 조약이 바로 그것인데, 자신들의 정체성[identity]을 잃고 촉토 족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이 사실 그들에겐 가장 큰 문제였다. 촉토 족 의회에 대표를 파견하긴 했지만, 그로 인해 자신들이 촉토 네이션의 소수자가 되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불평등과 불합리를 해소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투쟁을 기울인 결과 드디어 1837년 촉토 족으로부터 완전한 자신들의 땅을 매입하기로 조약을 맺는 데 성공했고, 1855년의 새로운 조약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네이션을 다시 한 번 갖게 되었다. 이런 시대가 1907년까지 지속되었으나, 인디언 구역이 오클라호마 구역과 통합되면서 이 지역은 오클라호마 주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렇게 치카샤 네이션이 종말을 고함에 따라 모든 치카샤 인들은 결국 미국인으로 통합될 수밖에 없었다.

 

 


치카샤 의회 박물관 간판




치카샤 의회 박물관 입구

 

1907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치카샤의 혈통이나 연고를 계승한 비공식적 기구들 몇 개만 있었을 뿐, 치카샤 네이션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1856년의 치카샤 헌법에서 치카샤 인들은 부족의 추장이나 족장을 갖던 수준으로부터 선출된 거버너(Governor)’를 갖는 수준으로의 문명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정부에 대한 치카샤 인들의 권리나 땅 문제에 대한 협상 등 거버너가 수행해야 할 많은 일들을 미국의 대통령이 맡아서 처리하게 되었으므로, 이 시기가 치카샤 네이션에게는 사실상 죽은 기간(Limbo Period)’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인디언 운동가들이 거국적인 활동을 벌임으로써 인디언들의 권리가 새삼 사람들의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고, 그 덕에 치카샤 족도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1983년 치카샤 네이션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헌법이 채택됨으로써 이 운동은 절정에 올랐으며, 결국 네이션은 오늘날의 모습으로 확대발전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치카샤 족이 강제이주를 당하면서 먼저 이주한 촉토 족과 5년 간 힘든 협상을 계속했다. 그 결과로 1836년 땅을 사들이기로 합의한 뒤, 우선 53만 달러에 촉토의 서쪽 땅 대부분을 매입하여 1837년 상당수의 치카샤 인들을 이주시켰다는 점, 미시시피 강을 건너는 눈물의 여정[Trails of Tears]에서 500명 이상이 이질이나 천연두로 죽어나간 고통을 감내하면서 결국 현재의 땅에 안착하여 보금자리를 꾸린 점 등은 치카샤 족을 범상하게 보아 넘길 수 없게 하는 역사적 사건들이다전체적으로 우수한 자질을 갖춘 데다가 티쇼밍고(Tishomingo)나 잔스턴(Douglas H. Johnston) 같은 걸출한 지도자들 덕에 그들은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미합중국의 일원으로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사 티쇼밍고(Tishomingo)의 모습 

 


초대 거버너 Douglas H. Johnston과 그의 집무실

모든 인디언 네이션들이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우리가 찾은 치카샤 네이션은 가족과 민족 공동체, 역사 유산 등이 보존되고 확산되어온, 문화적 발효의 공간이었다. 국가가 부족의 독점적 운영권을 보장한 카지노들이 상당수의 인디언 부족들에서는 부족원들을 나태하고 해이하게 만드는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이들은 그런 수입을 무의미하게 탕진하는 대신 2세 교육이나 산업에 대한 재투자를 통해 미래의 재원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예컨대 자신들의 2세들이 돈 한 푼 내지 않고 대학을 다닐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투자의 좋은 사례임을 티쇼밍고 치카샤 뱅크 뮤지엄의 큐레이터는 적극 강조했다.

 

 


The Bank of the Chickasaw Nation 건물[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음]

 


뮤지엄 안의 각종 옛 서적 및 장부들

 


뮤지엄 안의 캐쉬어 창구

 


뮤지엄에 소장된 당시 은행의 금고

 


뮤지엄의 큐레이터와 함께

 

티쇼밍고에서 30분 거리의 Chickasaw White House에서 읽어낸 그들의 정신도 그와 부합하는 것이었다. 1895년 오클라호마 밀번(Milburn)에 세워진 이 집은 1898년부터 1971[이 해에 이 건물은 국가 등록 사적지로 지정되었음]까지 치카샤의 거버너 잔스턴(Douglas H. Johnston)과 그 후예들이 살던 저택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자신들의 거버너가 살던 집을 ‘White House’로 불렀을까. 백인 중심으로 꾸려가던 미합중국에 결코 꿇리지 않겠는다는 치카샤 나름의 민족적 자존심이 그런 이름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미국을 이끌고 나가는 백인들이 워싱턴에 ‘White House’를 갖고 있듯이 자신들도 이곳 오클라호마의 밀번에 자신들만의 ‘White House’를 갖고 있노라는 자존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우리가 만난 치카샤 인들 모두 그런 자존심을 갖고 있었다.

 

 


Chickasaw White House

 


화이트 하우스의 거실

 


화이트 하우스의 식당


화이트 하우스 주인의 서재

 


화이트 하우스 안내원과 함께 한 멜라니

 

***

우리는 밀번으로부터 한 시간 가량 달려 촉토 땅의 듀랭(Durant)이란 도시에 들어갔다. 우리의 관심은 이곳에 있는 삼강 계곡 박물관[Three Valley Museum]’과 와쉬타 포트(Washita Fort)였다. ‘어쩌면 이곳에서 치카샤와 촉토의 겹치는 문화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안고, 도심의 작은 호텔에서 잠을 청했다.

 

 

*치카샤 명칭 표기[Chickasaw/Chickasha]' 및 그 발음에 관한 문제

치카샤 컬츄럴 센터 큐레이터 들로리스(Deloris Jefferson)의 설명에 따르면, 치카샤 인들은 자신들의 명칭을 'Chickasha'로 적고 '치카샤'로 발음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공적인 문서들 대부분에는 'Chickasaw'로 적혀 있으며, '치카사' 혹은 '치카소'로 발음한다. 그러나 치카샤 인들은 미국식 보다는 자기들의 방식을 더 선호한다고 했다. 나는 'Chickasaw'라는 미국의 공식 표기를 존중하되, 치카샤 인들의 생각도 존중하여 실제 발음은 '치카샤'로 하고자 한다. 

 

**치카샤 실[Seal, 문장(紋章)]에 대한 설명 

원 안에 있는 치카샤 전사의 모습은 치카샤 인디언들이 예로부터 위대한 용기를 지닌 사람들임을 상징하고, 그가 들고 있는 두 개의 화살은 치카샤 부족사회의 두 분파를 의미한다. 그 전사는 동쪽에 있는 고향을 버리고 서쪽의 촉토 사람들의 땅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추장 티쇼밍고다. 티쇼밍고는 치카샤 인들이 추앙하는 민족적 영웅이다. 티쇼밍고는 그의 부족원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트레일 도중인 1838년에 죽었다. 치카샤 인들은 그들만의 네이션을 만들기 위해 1856년 촉토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네이션을 만들어 그 수도를 티쇼밍고 시티로 명명했으며, 문장(紋章)으로 그의 용기를 선양했다. 1867816, 새 치카샤 네이션의 헌법에 따라 만들어진 이 문장은 치카샤 네이션이 호클라호마 주에 편입, 해산될 때까지 모든 공식 서류들에 빠짐없이 첨부되어 왔다.

 

 


치카샤 네이션 문장[紋章, seal]

 


Chickasaw Council Museum에서 컬렉션들을 일일이 설명해 준 큐레이터 Flora Fink

 

 


다운타운의 치카샤 음식점에서 Flora Fink와 함께 한 점심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