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2. 16. 04:52

 

 

 


숲속 길-1

 

 

 

 


숲속 길-2

 

 

 

 


숲속 길-3

 

 

 

 


숲속 길-4

 

 

 

 


숲속 길-5

 

 

 

 

 

 

아찔했던 순간, 엔젤 파이어 마운틴의 환상

 

 

 

 

타오(Taos)로부터 빠져나왔을 땐 오후 4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뉴멕시코를 벗어나는 길은 두 갈래였다. 다시 산타페 쪽으로 돌아가 I-40을 타는 코스, 그 반대로 북쪽에 가로막힌 산맥을 넘는 지름길 코스 등 두 개의 옵션이었다. 하늘에는 무거운 구름이 잔뜩 몰려들어 타오 산의 절반 이상을 덮었고, 저녁이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지름길이든 우회로이든 I-40에 접어들어야 뉴멕시코를 벗어난 뒤 애당초 계획대로 텍사스 주의 아마리요(Amarillo)에서 1박을 할 수가 있었다. 지도상으로 지름길은 긴 코스에 비해 절반가량의 거리였다. 순간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좋다. 지름길로 간다. 1,800년 이태리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이 지름길인 알프스를 넘던 기백을 상상하며 산길을 타기로 한 것이다.

 

꼬불꼬불, 오르락내리락, 산길은 예상보다 험했다. 깊이 들어갈수록 오고가는 차량들도 뜸했고, 말 두 마리와 검정 소 10여 마리가 서 있던 목장을 끝으로 인가도 사라졌다. 석양은 저 멀리 산 끝에 간신히 걸려 있었다. 다시 울창한 삼림으로 들어서면서 사위(四圍)는 어둑해지고, 하늘의 구름은 더 두꺼워졌다. 눈발이 날렸고, 설상가상으로 아스팔트가 끊기면서 비포장도로가 시작되었다. 흙과 자갈이 적당히 섞인 길바닥엔 1~2인치 정도의 눈이 쌓여 있었다. 산속의 기후가 평지와 다르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지도상에 점선으로 표시된 길이가 매우 짧았음을 생각하고 애당초 가졌던 나폴레옹의 기개를 견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가도 가도 눈 덮인 산길은 끝을 보이지 않았다. 가슴 저 밑에서 작지 않은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지만, 사령관이 흔들리면 전투력은 와해되는 법. 그냥 밀고 나갔다. 이미 인적(人跡)이고 차적(車跡)이고 끝난 지 오래되어 적막한 산길임에도 주변의 경치는 끝내주게좋았다. 쭉쭉 뻗어 올라간 나무들에는 하얀 눈이 덮여 어딜 보나 한 폭의 겨울풍경화였다. 군데군데 손바닥만하게 펼쳐진 풀밭들에는 눈과 수정모양의 얼음이 어울려 하늘이 조화를 부린 듯 했다.

 

몇 구비 산을 넘은 뒤 우리는 진짜로 동화의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 분지 형으로 생긴 계곡 한쪽의 산록에 수많은 사슴들이 눈밭을 헤집으며 먹이를 찾고 있는 것 아닌가. , 전 세계 산타 할아버지들이 타고 다니는 사슴들이 여기서 사육되는 것이로구나! ‘인영(人影)이 불견(不見)’인 이 산중에 도대체 이 많은 사슴들은 어떻게 모여 있단 말인가. 길 가에 차를 세우고 차창을 내렸다. 몇 녀석은 풀을 찾다 말고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고, 다른 녀석들은 오불관언(吾不關焉)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이게 바로 동화의 세계가 아닌가.

 

 

 

 

 


선경에 노니는 사슴들-1

 

 

 


선경에 노니는 사슴들-2

 

 

 


선경에 노니는 사슴들-3

 

 

 


선경에 노니는 사슴들-4

 

 

 

 

온통 눈에 덮여 순백으로 변한 무대에 사슴의 무리가 연출해내는 환상의 순간을 우리는 어쩔 줄 모르고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자연의 위대한 아름다움에 흠뻑 취한 것이다. ‘어떻게 이 산을 벗어날 것이며, 우리에게 닥친 위험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라는 걱정과 불안은 이미 우리의 뇌리를 떠난 지 오래였다. ‘저 아름다운 사슴들이 살아가는 이 공간에 무슨 위험이 있을 것이며, 설사 차가 전진하지 못한다 한들 저 녀석들과 하룻밤 지새지 못할 이유가 뭔가?’라는 오기가 발동한 것이었을까. 그 녀석들에게 눈길을 주는 동안은 단 한 점의 걱정도 없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저들은 환상 속의 존재들이고, 우리는 현실의 존재들 아닌가. 어떻게든 벗어나야 했다. 그로부터 자동차를 살살 달래가며 액셀러레이터에 힘을 가했다. 묘하게도 사슴을 만난 곳으로부터 30분쯤 지나자 숲이 끝나고 다시 광대한 대지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20여 분을 달리자 하나 둘 민가가 나타나고, 10여 분을 더 달리자 아스팔트 도로가 나타났다. 까맣게 밤이 내린 드넓은 대지를 쾌속으로 달려 밤 8시나 되어서야 겨우 모텔 하나가 있는, 주 경계선 지역의 작은 도시 로건(Logan)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텔에 도착한 뒤 하루 행적을 복기(復碁)해 보았다. 모텔에 도착하고 나서야 겨울 동안 미국 각지의 산악지역에서 조난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조난당했을 때 얼마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장비들은 갖추고 다니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행을 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우리는 어땠나? 우리의 트렁크엔 간단한 캐리어 하나만 달랑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 흔한 담요도, 랜턴도, 간식거리도, 여분의 옷도 없었다. 스모커 아닌 내게 라이터나 성냥이 있을 턱도 없었다. 그 산중에서 터지지도 않는 전화기는 무용지물이었다. 인가가 있다 해도 미국의 관습상 찾아들어가 구조를 요청할 수 없는 것이 상식이지만, 아예 그런 인가마저 없었다.

 

그 눈 내리는 산 속에서 자동차가 덜컹하고 서거나 미끄러지기라도 했다면, 작은 눈이 폭설로 변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면, 그래서 꼼짝 없이 그곳에 갇혔다면, 자동차의 연료가 소진되는 순간, 우리는 딱딱하게 굳은 채 세상을 하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이 세상에 많은 인연을 남겨 둔 우리가 미국 뉴멕시코의 산길에서 속절없이 세상을 하직하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허무한 일 아닌가.

 

미국에서 장거리 자동차 여행을 하시는 분들은 명심해야 할 일이 있다. 자동차 트렁크에 각종 구난 장비들을 철저히 챙겨두시라. 차를 구입하자마자 어디서나 터지는 스마트 폰, 성능 좋은 랜턴, 라이터나 성냥, 담요, , 여분의 옷가지, 충분한 간식, 작은 톱[조난 시 불 지필 나무를 자를 때 필요함], [혹시 간단한 요리나, 사냥 혹은 위급할 때 필요함] 등을 챙기시라. 6개월 동안 유럽을 자동차로 돌아다니면서도, 한국의 그 험한 산길들을 종횡무진 다니면서도, 아무 문제없었다는 자만과 안이함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엄청난 위험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자만은 금물이다.

 

다만, 그 순간에 만난 사슴 떼는 우리의 불안을 잊게 만든 하늘의 배려였다. 그래서 그 순간을 생각하며 하나님과 그 사슴들에게 감사하고 있는 요즈음이다.

 

 

 

 

 


산 속의 작은 공간-1

 

 

 


산속의 작은 공간-2

 

 

 


눈 내리는 산길

 

 

 


눈 맞은 자작나무 숲

 

 

 


눈 내린 고갯길

 

 

 


다시 찾은 대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27. 06:44

 

 


오클라호마와 텍사스를 거쳐 뉴멕시코로 연결되는 I-40을 비롯한 각종 도로들

 

 


오클라호마의 길가에서 흔히 보이는, 목장과 유전이 어우러진 모습

 

 


오클라호마에서 텍사스로 들어가는 입구

 

 


텍사스의 도로

 

 

뉴멕시코의 남성미, 오클라호마의 여성미

 

 

아름다움이란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변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시기나 장소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

 

걸출한 철학자이자 미학자이며 인기있는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가 그의 저서 <<미의 역사>> 머리말에서 강조한 미학의 원리다. 그렇다. 아름다움이란 그렇게 상대적인 것이다. 에코 뿐 아니라 현대 미학자들 가운데 아름다움의 상대성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아름다움에 관해 겨우 아마추어 수준의 인식을 갖고 있는 백규에게조차 미의 상대성론은 부담감 없는 상식이다.

 

***

 

오클라호마 체류 기간 끝 부분에 뉴멕시코를 다녀오기로 했다. 머나먼 길을 운전하여 텍사스를 거쳐야 갈 수 있는 곳이라서 더 매력적이었다. 오클라호마 인디언들을 대충 만나 보았으니, 그곳에 옛 모습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는 푸에블로(Pueblo) 인디언들을 보고 싶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나마 세 개 주의 인상(印象)을 비교해보고 싶은 것이 내심의 욕구였다. 무엇보다 역마살을 사랑하는 내가 새로운 길을 만나는 일을 마다할 리 없으니, 그야말로 일타삼피(一打三被), 일석삼조(一石三鳥), 혹은 One Serve, Triple Purposes’의 쾌거 아닌가.

 

오클라호마의 중심을 서남쪽으로 뚫고, 텍사스의 팬 핸들(Panhandle)을 가로질러, 앨버커키(Albuquerque)와 산타페(Santa Fe), 반들리어(Bandlier), 타오(Taos) 등 뉴멕시코의 북부 일대를 돌아오는, 총연장 2천 마일에 가까운 장도(壯途)였다. 오클라호마 주는 우리나라[남한] 면적의 두 배인 181,195, 텍사스 주는 7.8배인 696,241, 뉴멕시코 주는 3.5배인 315.194이니, ‘눈물겹도록광활한 땅 아닌가. 비록 그 면적의 작은 부분들만을 거치는 노정이었으나, 그 장대함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2014. 1. 19. 오전 8시 스틸워터 출발. 타고 가던 35번 하이웨이를 오클라호마 시티에서 40번으로 갈아타면서 쾌속의 질주를 계속했다. 르노(El Reno), 엘크(Elk), 세이어(Sayre) 등 오클라호마 구간을 지나자 풍광이 바뀌면서 I-40은 텍사스로 접어들었다. 주 경계를 넘어 텍사스 경내의 전망대 겸 휴게소에 들어서니 사방에 돌투성이의 언덕들과 까마득하게 늘어선 야산들이 보였으나, 그로부터 빠져나와 잠시 달리자 이내 오클라호마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텍사스의 벌판이 펼쳐졌다. 그렇게 텍사스의 팬 핸들 지역을 몇 시간 동안 달리자 66번 도로(Historic Route 66)’ 상의 핵심도시 아마리요(Amarillo)’가 나오고, 그로부터 두어 시간 더 달려 뉴멕시코에 들어섰다.

 

매혹의 땅 뉴 멕시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New Mexico, Land of Enchantment]’라고 도로를 가로질러 세운 경계표지가 인상적이었으나,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확연히 달라진 풍광이었다. 오클라호마에서 텍사스까지 끝없이 펼쳐지던 벌판들, 비옥해 보이진 않았으나 온갖 식물들을 키워내던 땅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척박한 돌투성이의 땅에 깔리듯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사막식물들의 삶터가 무한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텍사스와 뉴멕시코를 변별(辨別)하는 표지야말로 경계표지가 아니라 이런 경관의 변화였다.

 

경계표지를 지나자마자 만난 글렌리오 뉴멕시코 관광 비지터 센터[Glenrio Visitor Center NMDOT]’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은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늘 그렇게 해왔다는 듯, 우리의 인사에 응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지도를 펼치면서 묻지도 않는 관광명소들을 일사천리로 설명했다. 관광 비수기이긴 했으나, 우리가 보고자 한 포인트들은 가까스로 겨울철 폐장을 하루 이틀 앞두고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곳이 바로 시간 변경대인 듯 직원은 우리 시계의 시침을 한 시간 뒤인 3시로 되돌리라고 했다.

 

미국에는 동부 시간[Eastern Time], 중부 시간[Central Time], 산악 시간[Mountain Time], 태평양 시간[Pacific Time] 등 네 개의 시간대가 존재하는데, 우리가 출발한 오클라호마는 텍사스와 함께 중부 시간대에 속해 있었고 뉴 멕시코는 산악 시간대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 먼 곳을 가는 길에 한 시간 벌었구나! 쾌재를 불렀으나, 태양은 이미 저 멀리 지평선 바로 위에 걸려 있었다. 한 시간을 벌긴 했으나, 앨버커키까지 세 시간이 넘어 걸린다는 비지터 센터의 직원 말에 오후 4시쯤 도착하여 느긋하게 숙소를 정하리라 생각한 우리의 계획이 멋지게 빗나갔음을 알게 되었고, 가끔씩 속도제한[Speed Limit] 상한선 75마일을 넘기며 달려 나갔다.

 

 

비지터 센터를 나온 우리는 목적지인 앨버커키(Albuquerque)까지 3~4백 마일을 더 달려야 했다. 엔디(Endee), 바드(Bard), 투쿰카리(Tucumcari) 등 연도의 대소 도시들을 지나고 앨버커키에 도착하기까지 주변에 펼쳐지는 풍광을 표현할 말이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황량함이란 말 은 사전에 나오겠지만, 그 말도 결국 우리 인식의 한계만 드러낼 뿐이었다. 약간씩 오르내리는 구릉들을 제외하고 산은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지평선에 아련히 보이는 것이 바로 버날리요(Bernalillo) 카운티와 샌도발(Sandoval) 카운티에 걸친 샌디아 산맥[Sandia Mountains]일 것인데, 그마저 저녁 어스름과 아련히 피어오르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 앨버커키에 들어서기 위해 넘을 때에야 그 산맥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곳을 포함하여 뉴멕시코 전역의 평균 높이가 해발 1710m이고, 가장 낮은 지역도 852.6m에 달하니 뉴멕시코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내내 1천 미터가 훨씬 넘는 산길을 타고 있는 셈이었다. 이 넓은 땅을 덮고 있는 것은 거무튀튀한 돌들, 그 사이에 모습을 내민 블랙 그래머(Black Grama), 아리스티다 퍼푸리아(Aristida Purpurea), 크레오소트 부쉬(Creosote Bush) 등 사막식물들 뿐이었다. 사람이나 짐승이 깃들만한 교목은 한 그루도 보이지 않고, 기껏 쥐나 프레이리독 같은 작은 짐승들이나 몸을 숨길만한 식물들이 듬성듬성 성장을 멈춘 채 사막의 맨살을 가려주고 있었다.

 

 


텍사스에서 뉴멕시코로 들어가는 입구

 


끝없이 펼쳐진 뉴멕시코의 평원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Rio Grande 강과 George Bridge 주변에 펼쳐진 사막지대

 

 


샌디아 산맥Sandia Mountains)과 앨버커키(Albuquerque) 사이의 사막지대

 

 


샌디아 산맥의 보호를 받고 있는 앨버커키 시가지

 

 


앨버커키 인근 스카이시티 가는 길에 만난 황량한 평원

 

 


스카이시티 가는 길에 만난 어도비 건축양식의 천주교 성당

 

 


성당 옆쪽에 마련된 성모상

 

 


애코마(Acoma) 푸에블로(Pueblo) 스카이시티에서 내려다 본 관광안내소

 

 


뉴멕시코를 달리며 찍은 황량한 모습

 

 


뉴멕시코의 황량한 벌판

 

 


뉴멕시코의 끝없는 지평선 너머로 아련한 여운을 남기면서 해가 지고 있다.

 

 

해발 1,619.1 m의 고지대에 위치한 앨버커키에 도착하자 붕 뜬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그만큼 기압이 낮은 때문일 것이다. 1박을 한 다음날 찾은 곳은 스카이 시티(Sky City). 예의 그 광활한 평원 한 복판에 잔구 형태의 돌덩어리들과 엄청난 규모의 돌산이 서 있고, 그 위에 만들어진 애코마 푸에블로(Acoma Pueblo) 인디언들의 공동체가 바로 그곳이었다.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돌 주거지. ‘그로테스크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그곳에서 상상되는 그들의 삶 역시 우리의 상식을 배반하는 모습이었다.

 

그 다음 날 만난 아름다운 산타 페(Santa Fe) 역시 2,134 m 의 고도(高度)를 자랑하는 도시였다. 앨버커키보다 기압이 더 낮은 때문일까, 자동차에 넣어 갖고 온 과자 봉지가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산타페 산맥에 안겨 넓은 평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대도시. 이곳 역시 뉴멕시코의 주 건축양식인 어도비(Adobe) 일색의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앨버커키도, 스카이시티도, 산타페도, 타오(Taos), 그 도시들 사이사이에서 만나는 주택들도 대부분 어도비 양식이었다. 어도비란 모래, 진흙, , 막대기, , 동물의 배설물 등 섬유질이나 유기질 재료 등을 섞어서 벽돌을 만들고 햇볕에 말리는 공법으로 짓는 건축양식이다. 볼그레한 땅 색깔과 어울리게 지은 어도비 건축물들이야말로 자연에 맞추어 살려는 이 지역 주민들의 미학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직선과 기하학에만 익숙해 있던 내게 곡선과 흙빛의 따사로움을 갖춘 이 건축양식이 첨엔 좀 생소했지만, 눈에 익을수록 미학이란 결국 자연과의 위대한 조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평범한 이치의 깨달음으로 연결되었고, 결국엔 정겨움을 느끼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비록 일부분이나마 뉴멕시코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고 나서야 그곳에 차원 높은 아름다움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럴 듯한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돌투성이의 사막이 아름다울 수는 없다. 수만 년 웅웅거리며 쓸어오는 바람결 외에 움직임 하나 없는 이 벌판을 전통 미학의 기준으론 추하다고 보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이 벌판을 달리면서 감동과 함께 울고 싶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을까. 나는 이미 오클라호마 북부의 오세이지(Osage) 인디언 구역에서 대초원[Tall Grass Prairie]을 만나 연암 박지원의 호곡장(好哭場)’을 떠올린 바 있다. 광대한 요동 들판을 걸어가던 박지원은 그곳을 가히 울어볼 만한 곳이라 말하고, 인간 7(七情)의 발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기도 했다.

 

대초원 앞에 선 나도 연암선생이 느꼈던 그 심정을 이곳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기쁨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미움이 극에 달해도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니, 답답하고 울적한 감정을 확 풀어 버리는 것으로 소리 쳐 우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이 없다.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 뇌성벽력에 비할 수 있는 것이니, 북받쳐 나오는 감정이 이치에 맞아 터지는 것이 웃음과 다를 게 뭐겠는가.”라는 연암 선생의 논리야말로 뉴멕시코의 대평원 앞에 선 내 감정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감정적 여과를 거치고 나서야, 뉴멕시코 대자연의 추함은 결국 아름다움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극도의 추함이 아름다움과 합치될 수도 있다는 미학의 상대성이야말로 뉴멕시코의 황량한 사막으로부터 터득하게 되는 진리 아닌가.

 

***

 

잠시 오클라호마에 체류하면서 평원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고, 텍사스를 보고 나서 그 아름다움의 선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뉴멕시코의 사막 벌판을 만나면서 새로운 미학을 덤으로 깨닫게 되었다. 오클라호마의 평원에는 나무가 많고, 돌보다는 기름 진 흙이 많다. 기름 진 흙으로 나무를 키워내는 것이야말로 여성성(女性性)’의 본질 아닌가. 오클라호마의 대지를 달리다 보면 식물을 키우고 인간을 길러내는 지모신(地母神)’의 속삭임을 듣게 된다.

 

이와 달리 돌투성이의 사막, 뉴멕시코의 대지에서는 쩌렁쩌렁 울리는 거친 남성의 포효를 들었다. 뉴멕시코를 달리면서 눈물 나는 감동으로 긴장하다가 오클라호마에 들어오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따뜻해지는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숭고와 비장의 남성 미학적 공간에서 부드럽고 우아한 모성 미학의 공간으로 입사[入社, initiation]했기 때문이리라. 다른 시간대 즉 Mountain Time에서 Central Time으로 넘어가면서 미학적 차이까지 경험하게 된 내 가슴에 희열이 넘치는 순간이다.

 

 


애코마 푸에블로 인디언 스카이시티의 광장에서
(기우 제의에 쓰이는 사다리-세 개의 기둥은 빗줄기를, 상부의 가로막대는 구름을 각각 상징한다 함.
비가 부족한 이곳의 상황을 보여주는 물건임) 

 


스카이시티에 있는 성당[16세기에 스페인 사람들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음)

 

 


앨버커키의 푸에블로 문화센터(Indian Pueblo Cultural Center)에서
공연을 마친 푸에블로 남성 무용수와 함께

 

 


앨버커키를 떠나 산타페에 들어가는 중. 멀리 보이는 것이 산타페 산맥이며
그 앞에 널리 퍼진 것이 산타페 시가지임.

 

 


산타페 시내의 산 미구엘(San Miguel) 성당. 미국 최초의 어도비 양식 성당임.

 

 


어도비 양식의 호텔 산타 페 


 


타오(Taos) 시내 어도비 양식의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

 


타오 시내의 '랜처 장로교회[Rancho's Presbyterian Church)

 


타오 시 외곽에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전통 가옥

 


푸에블로 인디언의 전통가옥. 앞에 있는 둥근 것이 빵을 굽는 화덕임.


타오(Taos)로부터 로건(Logan) 가는 길에 지나온 Angel Fire Mountain 속의 농장 입구

 


타오(Taos)에서 로건(Logan) 가는 길에 지나온 Angel Fire Mountain 속에서 만난 사슴떼.
환상 속의 한 장면 같지요?

 


뉴멕시코의 카운티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2. 8. 15:31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3: 클린턴 시티(Clinton City)‘66번 도로 박물관[ Rt. 66 Museum]’-

 

 

 

손 형,

 

엘크시티를 떠나 동북쪽 30분 거리에 있는 클린턴시티로 가는 길은 늘 그랬던 것처럼 아득히 넓은 들판의 연속이었소. 가끔 고개 들어 우리를 쳐다보는 소떼들과 끄덕거리며 땅 속의 기름을 길어 올리는 사마귀 모양의 원유 채굴기 만이 시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움직임의 전부였소. 거칠 것 없는 바람은 그 들판 위를 달리는 차를 흔들어 나그네의 마음을 마냥 스산하게 만들었소. 그저 에머럴드 빛 하늘에 번지는 새하얀 구름만이 땅 위에 깔린 초록빛 목초와 어울려 그나마 운전자의 지루한 마음을 달래 줄 뿐이었다오.

 

 


엘크 시티에서 클린턴, 엘 르노, 오클라호마 시티 등이 표시된 66번 도로(I-40) 주변 지도

 


엘크시티에서 클린턴 오는 길에 만난 들판의 관개시설(?)

 

 

***

 

넓은 대지 위에 띄엄띄엄 집들이 들어서 있는 클린턴시티는 엘크시티보다 더 휑했소. 그러나 이곳에도 역시 많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소. 우리나라는 역사가 길어 대도시를 제외한 소규모 도시들은 유래를 알기 어렵고, 도시 형성에 관련된 스토리 또한 딱히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 아니오? 그러나 미국은 역사가 짧아서인가 도시 형성의 유래가 분명하고, 영고성쇠(榮枯盛衰)로 요약되는 역사의 굴곡 또한 분명하더이다. 처음에 우리는 이 도시가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일가와 관련이 깊을지도 모른다는 가소로운 추정을 해보았소. 빌 클린턴의 기반 지역인 아칸사 주는 오클라호마 주와 인접해 있는 만큼본관(本貫)을 가진 한국인들처럼 그 옛날 클린턴 가문도 이곳에서 일어난 뒤 그 쪽으로 이주했으리라는, 그럴듯한 상상을 했던 것이오. 그러나 뮤지엄 관계자에게 물어보자마자 일언지하에 ‘No!’랍디다.

 

 


클린턴 시청 

 


클린턴 다운타운 입구의 시원한 모습

 


66번 도로 박물관 앞에 세워진 윌 로저스 기념비

 


66번 도로 박물관 로비에서 만난 각 도시의 관광안내서들

 

 

1899년 아반트(J.L. Avant)와 블레이크(E.E. Blake)가 와쉬타(Washita) 강 옆의 계곡에 도시를 세우기로 결정한 데서 클린턴시티는 출발을 보았다고 하오. 이 지역 인디언들로부터 320 에이커의 땅을 사들여 와쉬타 지역 교차점에 작은 정착지를 조성함으로써 클린턴 지역 공동체는 시작되었소. 1902년 의회로부터 승인을 받음으로써 와쉬타 공동체는 급속히 발달하게 되었으며, 그와 함께 커스터 카운티 크로니클 신문사(Custer County Chronicle Newspaper)’1국립은행(The First National Bank)’ 같은 기관들이 지역 사업체로서는 처음으로 등장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우체국이 신설되면서 체신부가 와쉬타 교차점이라는 명칭을 받아들이지 않자 세상을 떠난 이 지역 재판관 클린턴 어윈(Clinton Irwin)’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의 이름으로 삼았다는 것이오.

 

어쨌든 클린턴 시티는 66번 도로와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 왔고, 그 덕분에 많은 이점을 얻었다고 할 수 있소. 66번 도로 가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클린턴도 여행자들을 상대로 하는 업종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지요. 예컨대, 각종 레스토랑, 까페, 모텔, 주유소, 자동차 정비소 등이 그런 것들이지요. 그 업소들 가운데 하나만 예를 든다면, ‘팝 힉스 레스토랑(Pop Hicks Restaurant)’ 같은 경우는 66번 도로에서 가장 오랫동안 운영되던 식당이었다지요. 말하자면 길에서 돈이 생기는환상적인 체험을 적어도 66번 도로가 거쳐 가는 도시민들은 절감하게 된 것이지요. 사실 이 도로가 쇠락의 길을 걷다가 다시 부활한 것도 이 길과 이해를 함께 한 사람들의 추억 덕분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말하자면 옛날의 영광이여, 다시 한 번!’이란 인간 욕망의 구현이라고나 할까요?

 

 


66번 도로 박물관에 협찬한 기업들과 인물들

 


66번 도로 박물관 로비(접수대 및 매점)

 


66번 도로와 각 지역의 우편 스탬프

 


당시 66번 도로 가에 있던 방울뱀 쇼 포스터

 

 

1970년대만 해도 이 도시를 우회하던 I-40¹[Interstate highway #40]이 오늘날엔 이 도시를 통과하게 되었고, 많은 길들이 이에 연결됨으로써 이 도시는 이 지역에서 매력적인 관광의 거점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렀다 가는 정거장 역할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여기서 가까운 텍사스 주의 아마리요(Amarillo)와 오클라호마 시티를 연결하는 66번 도로 가의 큰 도시들 중의 하나이자 여행객들을 위한 중간 쉼터로서의 기능을 해내고 있다는 거지요. 이 도시 안에 일찍부터 해군비행단과 군용비행장이 있었고, 그에 따라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많은 부침(浮沈)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 도시가 66번 도로와 함께 되살아난 점은 길이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도시에 들어오자마자 마주치게 되는 ‘66번 도로 박물관[Rt. 66 Museum]을 찾았어요. 규모는 엘크시티의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National Rt. 66 Museum Complex]’보다 작았으나, 질 높은 컬렉션과 정제된 기획력이 돋보이는 박물관이었어요. 특히 66번 도로의 역사성을 미국 현대사나 문명의 변화와 직결시킴으로써 길과 인간의 뗄 수 없는 관계를 보여주고자 한 의도는 다른 어떤 박물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장점이었어요.

 

 


66번 도로 박물관

 

 

66번 도로의 개통 및 변화, 길 주변 도시들의 영고성쇠 등과 정치경제사회의 변화가 어쩌면 그렇게 정확히 맞물려 돌아가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지요. 1920년대 세계 대공황의 산물이 바로 66번 도로였고, 2차 세계대전과 산업의 발전이 이 도로를 쇠락하게 만든 주범이었으며, 과거에 대한 집단적 회상과 추억을 추구하는 새로운 사조의 등장이 이 도로를 부활시킨 힘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고비마다 위대한 대통령들이 등장하여 그런 분위기를 견인해 나온 미국 현대사의 물결이 바로 이 도로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너무 과한 해석을 한 걸까요?

 

 


1928년 66번 도로를 만들던 당시 사용하던 시멘트 믹서

 


66번 도로를 닦던 당시 작업 모습과 도구

 


가뭄으로 고통을 겪던 당시, 66번 도로 가에서 목격되던 이른바 'Dust Bowl'의 참상

 


66번 도로 가의 목화 수확 장면

 


케네디 대통령 암살 소식

 


베트남전 당시 반전의 목소리를 높이던 제인 폰다와 신인 정치인 존 케리(현재 미 국무장관)

 


지미 카터의 대통령 당선 소식

 

 

이런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통해 세계 대공황으로 무너진 산업의 기반을 일으켜 세우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길이란 필연적으로 여행의 욕망을 부추기는 공간이고, 여행은 어쨌든 소비 행위라 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2차 세계대전 같은 비상시에 소비행위는 억제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66번 도로의 쇠락은 필연적인 결과였겠지요. 전쟁 이후 산업화 시대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길의 수요에 따라 66번 도로 대신 넓고 빠른 하이웨이들이 건설되어 효율성을 추구하게 됨으로써 그 길은 다시 쇠락의 길을 걸었지요. 그러나 다시 시대가 바뀌어 삶의 질과 내면을 추구하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버려졌던 66번 도로는 부활하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66번 도로의 탄생-성장-쇠락-부활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컨셉으로 짜여 있는 곳이 바로 이 박물관이었어요.

 

 


당시 길가의 주유소

 


당시 버스 정류장 표지판

 


당시 66번 길로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던 도시들

 


버스 대합실의 풍경[고약하게도 당시는 백인 대기실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었음]

 


당시 66번 도로를 통해 전국으로 달리던 고속버스 그레이하운드의 트레이드 마크

 


당시 66번 도로를 달리던 화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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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66번 길가에 있던 자동차 정비소

 


당시 66번 도로 휴게소에 있던 공중전화 부스

 


당시 66번 도로가에 있던 카페

 


당시 코카콜라 서비스와 선전문구

 


당시 66번 도로 가의 카페

 


당시 66번 도로 가에 즐비하던 숙박업소들

 


당시 66번 도로에 설치되어 있던 각종 교통 표지판 및 경고표시들

 


당시 자동차에 사용하던 에어컨

 


당시 장거리 여행할 때 자동차에 갖고 다니던 유아용 젖병 보온기

 


당시 66번 도로 여행자들은 자동차 지붕에까지 짐을 싣고 다녔다.

 


66번 도로 부활 운동의 소식

 


66번 도로가 황폐화 되고 폐쇄된 여러 모습들

 


66번 도로에 관한 소식

 


66번 도로를 사랑한 작사가 바비 트룹

 


66번 도로에 관한 노래들과 가수들

 



66번 도로에 관한 노래들을 담은 음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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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클린턴에 와서야 비로소 미국인들의 꿈과 현실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뚜렷한 철학과 방향을 갖고 있는 두뇌들이 역사를 견인하고, 그 외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합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이들을 뒤따르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1세기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66번 도로는 탄생과 쇠락, 부활의 과정을 거쳤지만, 그거야말로 2세기 남짓한 미국 역사의 축도(縮圖)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제 판단이지요. 책임 있는 미국인으로부터 뚜렷한 해명을 들은 건 아니지만, 66번 도로를 사랑하는 미국인들의 심리 저변에 이런 철학이 잠재되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봐요. 그것을 잘 보여주는 곳이 바로 클린턴 시티의 ‘66번 도로 박물관[Rt. 66 Museum]’이었어요.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번으로 넘기지요. 그 때까지 편히 지내시기 바랍니다.

 

 


66번 도로 박물관 로비에 각국어로 쓰여진 인사말 간판

 


박물관을 살펴보고 나서 방명록에 쓴 백규의 소감

 


엘크시를 떠나기 앞서 

 

 

¹ I-40은 미국에서 I-90, I-80에 이어 세 번 째로 긴 -서 주간(州間) 고속도로. 그 서쪽 끝은 캘리포니아 주 바스토우(Barstow)I-15이고, 동쪽 끝은 117번 도로와 북 캐롤라이나 주 윌밍턴의 북 캐롤라이나 하이웨이 132번과 합쳐진다. 오클라호마 시로부터 바스토우까지 I-40 서쪽의 많은 부분은 역사적인 미국 66번 도로와 병행하거나 겹쳐진다. I-4010개의 주요 -남 주간 고속도로들가운데 여덟 개(I-5I-45를 제외한 모든 것)와 교차하고, I-24, I-30, I-44, I-81 등과도 교차하는 만큼, 미국에서 가장 쓰임새가 많은 도로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