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07.26 17:45

싸드(THAAD)와 중국의 커밍아웃

 

 

 

 

근자 싸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우리 사회의 이슈로 떠오르면서 우리 모두 그간 잊고 있던 중국의 정체와 본질을 아프게 깨닫는 중이다. 유사 이래 우리는 단 하루도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무슨 논리로 합리화하려해도, 중국과의 관계는 항상 침략과 굴종/지배와 피지배의 식민주의적 패러다임에 갇힌 채 지속되어 왔다. 그들이 자신들의 족속을 우리의 왕으로 세운 적도, 우리 땅을 봉토(封土)로 활용한 적도 없건만, ‘사대(事大)’라는 중세적 외교의 명분 아래 그들은 식민주의자들 이상의 폭압과 전횡을 부려 온 것이 사실이다.

 

혹자는 그들로부터 한자와 한문을 들여왔고, 유교불교도교 및 제자백가 등 사상이나 사유체계를 도입했으니, ‘가르침과 배움이란 선한 관계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역시 크게 보아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굴종의 역사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전혀 바뀌지 않고, 오히려 진화하는 양상을 발견하게 된다625 때 마오쩌뚱이 김일성을 도와 한반도의 통일을 결정적으로 막은 항미원조(抗美援朝)’의 타산적 명분이야말로 지금까지 이 지역의 정치적이념적 지형을 주도해온 굴종적 역사의 또다른 구도라 할 수 있다.  

 

항미란 무엇인가. 자신들의 눈앞에서 통일 한반도를 재현시킬만한 힘을 지닌 미국에게 대항하겠다는 것이다. ‘원조가 말만으로는 자신들의 괴뢰인 북한을 돕겠다는 것인데, 처음부터 그 말의 이면에는 북한을 살려서 미국에 대항하는 주구(走狗)로 삼겠다는 뜻이 들어 있었고, 그 해석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이미 마오쩌뚱 당시부터 북한의 효용가치는 미국에 대한 견제 카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대규모 원군(援軍)을 출병시켜 망하기 일보직전의 김일성을 구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한반도 전체를 김일성 치하에 놓이도록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좀 더 확실한 대미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 625에 참전한 마오쩌뚱의 원대한(?)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중국은 시종일관 북한의 후원자 혹은 후견인 노릇을 하면서 독점적으로 열매를 따왔다. 그런 그들의 행태는 개혁 개방 이후라고 달라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물건 팔고 돈 벌어오는 새 시장 남한과 거래를 시작했으니, 그들로서는 이제 한반도에 관한한 알 먹고 꿩도 먹는단계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냉전시대에는 냉전시대대로, 탈냉전시대에는 탈냉전시대대로 한반도는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일 뿐이다.

 

그로부터 몇 발 더 내디딘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 바로 시진핑의 행보와 2006년부터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대국굴기(大國崛起)’의 결합이다. 최근 중국은 '샤오캉(小康)'에서 '화평(和平)굴기'를 거쳐 비로소 '대국굴기'의 본심을 단계적으로 만방에 드러내 왔다. 그것이 시진핑 체제의 등장과 함께 떠오른 '중국몽(中國夢)'과 직결되는 말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Chinese Dream! 일견 멋진 듯하지만, 주변의 소국들을 아연 긴장시킬 만큼 고약한 것이 바로 그 말이다. 만주벌판도, 한반도도, 일본도, 동남아도 모두 손아귀에 쥐고 호령했던 그 옛날 '천자의 나라' 즉 중화제국을 복원하는 것. 바로 그것이 지금 중국의 전권을 거머쥔 채 실질적으로 황제 행세를 하고 있는 시진핑의 꿈이자 중국 지배계층의 꿈이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의 집권세력도 '한국 따위'는 애당초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 늘 중원의 정치적 향배를 예의주시하며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워온 게 조선이었고 한국 아니던가. 모처럼 실용외교를 추구하던 광해군을 당당하게(?) 제거하고 인조를 옹립한 서인 반정세력이 향한 곳은 망해가는 명나라였다. 서슬 퍼렇게 중원을 먹어가던 누르하치를 애써 외면하며 한사코 망해가던 명나라에 빌붙고자 한 반정세력의 눈에는 오직 작은 한반도 안에서의 보잘 것 없는 권력만이 관심사였을 뿐 민족이나 국가, 백성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백성들이야 그들의 말발굽에 짓밟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의 어이없는 패거리들, 힘을 가진 어느 누가 중원의 지배자가 되어 우리에게 압박을 가해오든 그에게 빌붙어 자신들의 목숨과 권력만 부지하면 그만인 '망종(亡種)'들이었다. 그들과 단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군상이 바로 지금의 이른바 '정치인들'이다. 아무런 식견도 밸도 없으면서 알량한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뒤집어 쓴 채 권력과 돈만 탐한다는 점에서 17세기의 그들과 정확히 부합하는 한심한 '불량배'들이다. 국민들을 편 갈라 싸움질시키는 행태를 보면, 오히려 당시의 그들보다 훨씬 더 사악하고 음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중국은 중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우리를 얕보고 덤비는 것 아닌가.

 

2005년 탈북자들에 대한 부당한 횡포를 항의하기 위해 중국 본토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김문수 전 의원이 무도한 중국 공안들에 의해 폭행을 당한 사건을 기억들 하시는지? 나는 1624년 혹독한 겨울 명나라의 관원들에게 수모를 당하던 주청사행의 정사(正使) 죽천 이덕형(李德泂)의 사건을 김문수 의원의 사건과 비교하며 민족의 자존심이란 제목의 글을 조선일보(2005. 1. 17.)에 기고한 바 있고, 중국 당국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김영환 씨의 사건을 통해 김문수 의원 사건이후 전혀 바뀌지 않은 중국의 태도를 간파하고 중국은 무도(無道)'깡패국가', 세계 평화의 최대 걸림돌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이 블로그(2012. 8. 1.)에 올린 바 있다. 통탄스럽게도, '1624년2005년2012년'을 거쳐 드디어 2016년의 싸드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한국이 제 나라 제 국민을 지키겠다고 싸드를 배치하려는데, 못하도록 위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 중국이다. 그들의 눈에 한국은 자기네 나라의 한 성()에 불과할 뿐, '독립된 국가'가 아닌 것일까. 그간 핵을 개발하겠다고 광분하는 북한을 제재하겠노라고 선언한 것은 그야말로 제스처였고, 어떻게든 북한을 살려서 미국에게 달려드는 사냥개로 만들겠다는 것이 진정한 속내였던 것이다. 뼈다귀 몇 개 던져 놓으면 저희들끼리 물고 뜯는 싸움질로 날들을 지새울 게 뻔한 남한 쯤 굴복시키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라는 판단도 저들 내부적으로는 이미 서 있으리라.

 

***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를 선언한 미국이 일본, 한국과 손을 잡으면서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된 것은 시진핑의 이른바 '중국몽'이다. 바야흐로 자신들의 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는 한국. 이미 품에 안겨있는 북한과 남한을 동시에 집어 삼키면, 일본쯤이야 큰 문제 아니라는 계산이 서 있었으리라. 이처럼 중국몽의 실현을 통해 세계의 중심 즉 '중화대국(中華大國)'으로 굴기해야겠는데, 일이 하나로 뭉치면 그 꿈은 자칫 '백일몽(白日夢)'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어려운 현실과 마주친 것이다. 제재를 이행하는 척 적당히 세계의 눈을 속이며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개발하여 미국에 맞서게 하려는 중국으로서는 그런 꼼수까지 간파되고 말았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 당황함과 분노를 누구에게 옮길까. <<논어(論語)>>옹야편(雍也篇)'불천노(不遷怒: 이쪽에게 성낼 것을 저쪽에게 옮기지 말라)'는 남한을 향해 수백기의 미사일을 배치해 놓았다는 산동성 노나라 출신의 공자께서 하신 말씀이다. 땅덩어리만 크다고 대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먹만 세다고 리더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유교의 핵심은 도()와 덕()이다. 무도(無道)하고 부덕(不)한 개인은 깡패나 강도일 수밖에 없고, 그런 나라는 깡패국가나 강도국가일 수밖에 없다. 중국이 중국몽을 실현하려면 우선 깡패국가의 굴레를 벗고 주변 국가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존경 받을 만한 도와 덕도 없으면서 아무리 미사일을 많이 만들고 항공모함이나 전투기를 많이 만든들, 종당에는 고철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는 진리. 지금 당장 시진핑 주석과 중국의 지도층은 그 간단한 진리를 역사로부터 배우기 바란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03.28 17:48

 


백규서옥을 방문한 아리안 군

 

 


백규서옥을 방문한 유리 군

 

 

언어구사의 천재들을 가까이에서 보며

 

 

 

몇 년 전 고려인들을 찾기 위해 벨라루스의 민스크에 간 적이 있다. 공항에서 호텔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들판과 자작나무 가로수 길이 인상적이었다. 벨라루스는 1922년 소련에 편입되어 1991년까지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존속하다가, 1991년 독립 선언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와 함께 독립 국가 연합(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의 창설을 주도한 나라다. 당연히 공용어는 벨라루스어와 러시아어였다. 동쪽으로는 러시아, 서쪽으로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남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북쪽으로는 라트비아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이를테면 다수의 민족국가들 속에 파묻힌 육지 속의 섬과 같은 나라였다.

민스크 도착 다음 날 벨라루스 국립대학 한국어과의 요청으로 학생들에게 강연을 하게 되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학생들을 통해 알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곳 사람들의 혈통과 말이었다. 강의실에서 젊은 학생들을 만났다. 한국어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서는 영어를 썼는데, 소통의 정도는 기가 막힐 정도였다. 얼굴 모습들은 슬라브 계통의 백인들이었으나, 피부 한 꺼풀만 벗기면 다양한 모습들이 드러났다. 다음 날부터 학과에서 소개해준 두 명의 학생들이 민스크 곳곳을 안내해 주었다. 한 사람은 아리안(Aryan), 또 한 사람은 유리 킴(Yuri Kim)이었다.

 

#1 아리안의 할머니는 이란인으로서 현재 테헤란에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에 관해서는 미처 묻지 못했는데, 그의 얼굴 모습으로 보아 할아버지가 아리안족인 듯 했다. 그러니 그의 아버지는 이란과 인도계의 혼혈일 것이고, 그 혼혈 아버지와 우크라이나 출신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것이 아리안이었다. 내 관심은 그가 지닌 외국어 능력이었다. 그는 이란어, 러시아어, 벨라루스어, 우크라이나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한국어에 이미 능통해 있었고, 막 일본어에 손을 대고 있었음은 물론 중국어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자도 제법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어머니로부터 젖을 받아먹듯 우크라이나어와 벨라루스어를 마더 텅(mother tongue)으로 받았고, 할머니 혹은 아버지로부터 이란어를 받았으며, 중학교~대학에 이르는 학교 교육에서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한국어를 익힌 것이었다. 대개 마더텅으로 두, 세 개의 언어를 습득한 경우, 마음만 먹으면 또 다른 언어를 배우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라는 것을 그들로부터 알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한국에 와서 모 대학의 어학코스를 최우등으로 마치고 돌아가 벨라루스 국립대학에서 대학원을 이수하면서 어학 교수로 활약하고 있다.

 

#2 내가 벨라루스에 머무는 동안 내게 친절을 베푼 또 하나의 벨라루스 청년이 유리였다. 워낙 한국어에 출중하여 당시 학부생의 신분임에도 한국어 강사로 활약하며 돈을 벌고 있었다.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던 할아버지가 고려인이긴 했으나, 할아버지 자신이 고려 말을 버린 지 오랜 상태였을 뿐 아니라 그들은 서로 왕래도 없었다. 당연히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서 한국인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우자마자 마스터했다고 한다. 그의 언어 내력이 궁금하여 가계를 캐물었다. 할아버지는 고려인이고 할머니는 타타르인으로서 카자흐스탄 사람들이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벨라루스로 이주하여 벨라루스인 여자와 결혼하여 유리를 낳은 것이었다. 화학 전공자였던 외할아버지와 프랑스어 음운론 교수였던 외할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어머니는 편집 기자였고, 아버지는 가구 및 건축 디자이너였다. 그러니 그가 태어나자마자부터 접했을 언어적 다양성의 실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벨라루스어와 러시아어를, 아버지로부터 카자흐스탄어와 러시아어 및 벨라루스어를, 그리고 간혹 아버지로부터 단 몇 단어라 할지라도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고려어의 냄새 정도는 맡았던 것 같다. 따라서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3개 국어를 마더텅으로 물려받은 것이고, 그 후 자라는 과정에서 다민족 친구들과의 만남이나 학교교육을 통해 여러 외국어들을 덤으로 배우게 된 것이었다. 벨라루스어, 러시아어, 불어, 영어, 독일어,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는 그는 지금 한국에서 공부하는 중이다.

 

일생을 노력해야 겨우 영어 하나를 외국어로 구사하게 되는 우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그들이었다. 참으로 부러운 그들이었다. 간혹 외국에 나가면서 몇 개의 외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들을 흔히 만난다. 그러면서 외국어에 관한한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뒤처진 사람들이 또 있을까?’라는 한탄을 매번 하게 된다. 그러면서 말은 혼임을 깨닫는다. 혼은 물려받는 것일 뿐 흉내를 내거나 노력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3 최근 나에게 이쁜손녀가 하나 생겼다. 이제 돌을 갓 지난 녀석을 보며 나는 언어 학습의 과정과 실상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다. 녀석이 말을 배워가는 과정과 방법이 참으로 신기하다. 제 어미가 젖병을 물리는 동안 녀석의 눈길 멈추는 곳이 예사롭지 않다. 바로 엄마의 얼굴인데, 그 가운데도 입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었다. 녀석은 무얼 보고 듣는 것일까. ‘자 이제 다 먹었네? 그럼 일어나 트림을 해야지!’라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엄마 입술의 움직임을 유심히 보는 듯 했다. 말하자면 녀석은 엄마 입술의 움직임만으로도 그 말을 알아듣겠다는 듯 반응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오묘했다. 그러다가 엄마의 말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한 단어, 두 단어, 세 단어...녀석이 흉내 내는 엄마 말의 분량은 주간 단위로 늘어나는 것이었다.[나는 사실 짧으면 한 주, 길면 두 주 정도에 한 번씩 녀석을 만나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 사실은 매일 달라지고 있을 것이다!] 이제 세 음절짜리 단어들을 흉내 내어 구사하기 시작했고, 문장 단위의 말을 내뱉으려 할 땐 , 하고 소리치며 손짓을 하기에 이르렀다. 말 뿐 아니라, 행동거지도 제 부모와 우리를 흉내 내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따라쟁이라는 애칭으로 놀리기도 하는데, 바로 그 점에 언어 학습의 요체가 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인류가 세상에 출현한 이래 말이란 그렇게 전승되어 온 것이다. 젖을 먹을 때 엄마로부터 자연스럽게 물려받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마더 텅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엄마가 다중언어 구사자(multilingual speaker)’라면, 말에 따라 순위는 생기겠지만, 그 언어들이 그대로 아기에게 전수되지 않겠는가. 바이링궐(bilingual), 트라이링궐(trilingual) 등 흔한 다중언어 구사 엄마들이야 기분 내키는 대로 자유자재로 여러 언어들을 갖고 아기와 소통할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런 엄마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이미 다중언어 구사자가 될 소지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

 

우리의 실상을 보자. ‘단일 언어를 쓰는 단일민족이란 말을 자랑처럼 달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같은 말을 쓰면 같은 생각을 하게 되고, 소통 또한 더 잘 되겠지.’라는 우리의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세계화의 시대에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지금 세계에서 유일하게 같은 말을 쓰는동족끼리 총부리를 마주대고 으르렁거리는 곳이 바로 한반도다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부모 자식 간에, 형제자매 간에, 좌파와 우파 간에 툭하면 같은 말을 무기로 죽고 죽이는 싸움판을 벌이는 곳이 바로 이 나라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모습을 한 사람들 사이에 죽고 죽이는 싸움판을 벌이는 데, 대체 단일어를 쓰는 단일민족이 무슨 자랑거리란 말인가.

 

눈만 뜨면, 베트남에서 필리핀에서 시집 온 새댁들을 무시하고 구박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그들이 한국어를 잘 몰라서 말이 안 통하니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이다. 우리말을 모르는 것을 차이 아닌 차별의 근거로 내세우려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다. 더 고약한 것은 우리말을 모르는 백인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우리말을 모르는 유색인들은 매몰차게 무시하려 드는 일이다바로 우리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못난 식민주의 근성 때문이다.

 

그들이 한국어를 잘 모르면 우리가 먼저 베트남어를 공부하고 필리핀어를 배우면 안 되나? 우리 자식들에게 시집와서 손자 손녀들을 낳아주는 베트남 필리핀 며느리들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들인가그러니 외국인 며느리들은 구박의 대상이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가 떠받들어야 할 보배들이다. 우리의 아이들을 낳아 이중언어 구사자로 키워줄 훌륭한 어머니요 선생님들 아닌가. 아이를 낳아 젖 먹여 키우는 과정에서 우리말과 베트남 말을 '마더 텅'으로 동시에 전해준다면, 나중에 그들은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우수한 국제인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우리 아이들과 나라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우린 그들을 소중하게 대접해야 한다. 그들이 당장 우리말을 못하고 못 알아듣는다면, 우리가 먼저 그들의 말을 배워서라도 그들의 마음을 잡아두고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일자리를 찾아 우리나라에 온 동남아 노동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도 그들이 우리보다 좀 더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 우리말에 서툴다는 이유 때문일 텐데, 그들 역시 우리에겐 소중한 보배들이다. 우리가 마다하는 궂은 일들을 달게 맡아하는 그들. 생각하기에 따라 그들은 우리의 훌륭한 선생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참 못 말릴 정도로 무지하고 거친 사람들이 나를 포함한 오늘날의 한국인들이다. 인종의 전시장인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 나가서는 입도 뻥긋 못하면서, 좁디좁은 내 땅에만 들어오면 안방 호랑이 노릇을 잘도 하는 우리의 잘못된 습성이 바로 언어능력 콤플렉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내 생각인데, 이런 판단에 반론을 제기하실 분 있으면 말씀들 좀 해 보소서!

 

 


벨라루스 국립대학에서 유리 김, 샤두르스키 학장과 함께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만난 고려인들

 

 

 


밥을 받아먹는 YB

 

 


엄마를 흉내내는 YB

 

 

YB and her Mom walking on the road by the Han River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10.09 11:32

 


고려극장 창고에 쌓인 연극대본들

 

 


고려극장 창고에 쌓인 연극대본들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심청전의 포스터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상속자들의 포스터

 

 

 

 

치원(致遠)의 성과

-조규익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 2013)을 읽고-

 

 

                                                                                                                            이경재(숭실대 국문과 교수)

 

 

 

1. 학문이 다다른 곳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을 읽으면서, 제갈공명이 쉰 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여덟 살이었던 아들에게 남긴 계자서가 생각났다. 계자서의 핵심 내용은 주지하다시피 담박명지(淡泊明志), 영정치원(寧靜致遠)’라는 여덟 글자로 압축된다. 이 중에서도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치원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도록 만든다. ‘먼 곳에 도달한다는 뜻의 치원은 남들보다 크고 무겁고 많은 성취를 이룬다는 뜻이다. 평생 한 동네에 살면서 산 너머의 이웃 동네를 둘러보는 일도 어려웠을 옛사람의 관념을 드러내는 이 말은, 자신이 갈 방향을 뚜렷하게 정한 채 그 길을 꾸준하게 가면 마침내 먼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저서야말로 필자가 초인적 노력의 결과 다다른 학문적 먼 곳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은 꼴호즈나 솝호스 등 CIS 지역 고려인들의 생산 및 생활 공동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자생적 소인예술단과 고려극장으로 대표되던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을 살펴보았다. 소인예술단은 꼴호즈 등 집단농장에서 운영하던 아마추어 단체이고, 전문예술단은 국가에서 설립 운영하던 예술인 집단으로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에서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창립되어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고려극장이 유일하다. 구소련 체제의 대중예술은 전문예술과 소인예술의 분담과 협업으로 지탱되어 왔다. 인적 차원에서나 예술적 차원에서 전문예술단의 근원은 소인예술단에 있었으나, 상호 보완의 역할을 수행하는 단계에 이르자 양자는 구소련의 공연예술을 완성시키는 두 축으로 정립되었다.

 

원래 소인예술단의 경우 연극, 노래, 춤 등이 주된 장르였고, 전문예술단인 고려극장의 경우 연극 전문으로 출발했다가 공연예술로서의 노래와 춤이 추가되었다. 고된 생산의 현장에서 괴로움을 달래준 동시에 민족적 동질감을 확인시켜 준 무명 예술인 집단이 소인예술단이었고, 탁월한 예술적 재능으로 민족의 애환을 대신 표출함으로써 고려인들을 정서적으로 결집시킨 예술인 집단이 전문예술단으로서의 고려극장인 것이다.

 

고려극장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당시 극작가들은 민족정신의 유지와 확인이라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고전작품들을 연극의 소재로 많이 다루었다. 창작극 외에 그들이 집착한 분야는 고전의 각색이었다. 고전의 각색은 민족정신이나 민족어의 보존과 전승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다. 결국 고려극장은 고려인들의 정체성을 함양시켜온, 일종의 민족 정체성 고양의 메카역할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수많은 극작가들을 등장시켜 활약하게 한 일은 고려극장의 가장 빛나는 공적이다. 그 가운데 극장의 초석을 놓은 인물은 연성용과 태장춘이었고, 최고의 연극미학을 보여준 인물은 한진이다. 한진에 대한 필자의 관심은 집요한 바가 있어,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이 발간된 거의 동시기에 <<한진의 삶과 문학>>(글누림, 2013)이라는 책을 김병학 선생과 공저로 출판하였다.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

 

 

 

 

2. 지속과 변이

 

자료는 말한다. 이 명제는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자료는 연구자의 문제의식과 만났을 때, 비로소 고유의 목소리를 내는 까닭이다. 이만한 두께의 단일저서가 그에 걸맞은 하나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는 힘들다. 이 작품이 고려인들의 문학을 바라보는 기본 관점은 지속과 변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인들은 원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타율적 디아스포라들이었다. 현실적으로는 구소련 혹은 중앙아시아 국민의 일원이었고, 정서적으로는 고려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이중적 존재들이었다. 구소련 시절에는 구소련의 다수민족에 의해, 공화국의 독립 이후에는 공화국의 주도 민족에 의해, 힘들게 찾아온 할아버지의 나라에서는 고국의 사람들에 의해 3중의 타자 체험을 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현실적으로는 구소련 혹은 중앙아시아 국민의 일원이었고, 정서적으로는 고려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두 방향으로부터 상반되는 인력을 느끼는 존재들이었다. 노래나 춤을 통해 표출되는 이념 지향적 의식이나 디아스포라 의식은 상반되는 인력에 상응하는 주제의식이다.

 

스탈린은 러시아 중심의 언어 예술 정책을 폄으로써 고려인을 포함한 비 러시아인들은 예술의 창작과 향유에서 큰 난관에 봉착하였다. “스탈린의 폭압적인 동화정책에 어쩔 수 없이 그 무거운 민족의 표지를 내려놓”(5)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고려인들은 자민족 중심의 전통 형식 고수라는 구심력과 소련의 사회주의 추구라는 원심력을 적절히 조정한 미학을 고안했다. 그로부터 나온 것들이 민요를 비롯한 우리 전통노래들의 음곡에 사회주의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노랫말을 올려 부른,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들이다. 이를 통해 집단주의라는 사회주의 통치이념의 폭력적 군림에 순응하는 방법으로 민족 정서의 실낱같은 생명만큼은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언어와 문화의 동화정책을 밀어붙인 스탈린 체제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이 우리 전통예술의 한 부분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규정 덕분이다.

 

고려인들의 노래는 우리나라 전통 민요의 운율과 사설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경우도 있고, 노랫말을 러시아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맞게 새로 만든 것들도 있다. 전자를 지속의 측면에서 후자를 변이의 측면에서 각각 설명할 수 있다. 지속의 측면은 고려인 혹은 한인이라는 민족의 정체성이 유지되는 한 변할 수 없는 불변의 정서적 형태적 전승소이며, 변이의 측면은 적응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 조정될 수밖에 없는 가변적 요소다. 이처럼 고려인들이 갖고 있던 전통 노래의 관습적 레퍼터리는 새로운 정착지의 생경한 분위기와 충돌을 일으키며 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조정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고려인들의 노래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문화 접변 현상이다. 고려인들이 접변을 통해 새로운 공연예술을 창출할 수 있었다면, ‘디아스포라의 현실과 새로운 이념에의 적응이라는 복잡한 원리가 그 근저에서 작동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3. 학문적 가치와 필자의 노력

 

이상으로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의 기본적인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 작품이 던져주고 있는 중요한 논점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제목에도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는 한글문학이라는 개념이다. 보통 국문학자는 국문학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며, 이때의 국문학이 한국인이, 한국어로, 한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문학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춘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한글 창제 이전의 문학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것은 아니지만,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국문학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해외동포들의 작품을 과연 국문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는 실정이다. 조선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재일교포들의 일본어 작품이나,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작가가 쓴 영어 작품이나,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교포의 한국어 작품 등을 과연 국문학에 포함시킬 수 있는지 판별하는 것은 뜨거운 난제일 수밖에 없다.

 

사실 언어, 국적, 사상과 감정이란 세 가지 요소는 일종의 형식논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 중요한 것은 공동운명체로서 느끼는 실감일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오래 전에 한반도를 떠나 고려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창작한 문학을 과연 국문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남을 수밖에 없다. 연구자는 이러한 난관을 나름의 방식으로 돌파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의 문학을 한글문학으로 칭하는 것이다. 조규익 교수는 이 저서에서 각지의 소인예술단들과 고려극장으로 대표되는 전문예술단이 지난 시절 만든 한국어 노랫말과 극본들을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백여 년 전에 한반도를 떠나 멀고 먼 중앙아시아에서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산 사람들의 문학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서이다. 이것은 첫 번째 문제와도 관련된다. 이 고려인들을 우리와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오만일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고려인들을 우리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말하는 것은 섣부른 편견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난 시절 고려인들의 문학을 우리 것이자 동시에 우리 것이 아닌 것으로 이해하는 어찌 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섬세한 관점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능한 입장을 저자는 누구보다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다. 이 저서의 서론격인 1부의 마지막은 조속히 청산해야 할 중심부의 시각으로 우리 정서의 맥을 힘겹게 이어 온 변방의 정서적 산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려는 것이다.”(36)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이 문장은 고려인 문학을 접하는 한국인 연구자의 솔직하고도 곤혹스러운 관점을 잘 드러낸 고백으로 읽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무래도 고려인 문학은 우리 것이라는 입장에 한층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들의 전통노래를 발전적으로 지속시켜 나가야 하는 것은 해외에 우리의 문화영토 혹은 정신적 영역을 화복해 나가야 한다는 관점에서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108)는 문장에서 고려인=대한민국인이라는 관점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저서의 마지막 문장인 “‘갈 짓 자행보 속에 마구 변해버린 또 다른 중심부 한반도. 그 중심부와의 행복한 합일을 꿈꾸는 주변부의 오늘과 내일을 바라보며, 우리 스스로 성찰적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그들을 위해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356)라는 격정적인 문장에서도 중심부와의 행복한 합일을 꿈꾸는 주변부로서의 고려인들을 사유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저서에 담겨 있는 학문적 가치와 필자의 노력에 대해서이다. 이 저서에서 조규익 교수는 소인예술단 공연 때 불리던 국문노래의 존재양상과 이념, 고려인 민요의 전통노래 수용 양상, 고려인 한글노래에 나타난 디아스포라의 양상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소인예술단의 한글문학이 지닌 본질을 찾아보았고, 1932년 고려극장 창립 이래 최근까지 공연된 연극들(200여 편)을 개관한 다음 고려인 사회 연극의 초석을 놓은 연성용, 태장춘의 연극세계와 함께 구소련 고려인 문단에서 최고의 미학을 성취한 한진의 연극을 분석하였으며, 연극무대 혹은 그 바깥에서 가창된 노래들까지 살펴봄으로써 고려극장의 한글문학이 지닌 본질을 밝히고자 했다.

 

이상의 내용 중에서 어느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으며, 어느 것 하나 책상머리에서 자판 몇 번 두드려 얻을 수 있는 자료에 바탕한 것이 없다. 거의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 직접 발로 뛰며 얻은 자료를, 별다른 선행 연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해 나가며 이룩한 업적인 것이다. 후학으로서는 감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또한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저자가 기울인 공력은 후학들에게 많은 귀감이 된다. 발로 뛰며 쓴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각종 사진으로 책의 여러 부분이 채워진 것이 그러하고, 전 세계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 뒤에 15페이지에 이르는 영문 초록을 붙인 것이 또한 그러하다. 조규익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은 앞으로 고려인 문학을 연구하는 모든 연구자들이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명저이다.

 

“<<한국문학과 예술>> 12,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2013. 9. 30.”에서 퍼옴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02.01 01:15

 

 

 


연구실에서 포즈를 취한 림멜 교수

 

 

 

한국의 통일을 열망하는 러시아 역사 전문가, 림멜(Lesley A. Rimmel) 교수

   

 

미국에 있는 동안 꽤 많은 미국의 지식인들을 만났다. 주로 교수나 강사, 박물관의 큐레이터들,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 등인데, 그 가운데는 오가는 도중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금까지 비교적 자주 만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미국 지식인들이 타인들 특히 외국인들을 낯설어 하며 자신들만의 울타리에 갇혀 지내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자신의 전공을 통해 얻은 통찰력으로 남을 이해하기도 하고, 남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를 통해 전공에서 만난 문제들을 풀기도 한다.

 

12월 중순의 어느 날 점심시간. 브레이크 룸에서 커피를 데우고 있는데, 평소 눈인사 정도를 나누던 여 교수 한 분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 며칠 전 PBS에서 방영된 비밀의 국가 북한[Secret State of North Korea]’란 다큐멘터리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 순간 나는 참으로 많이 부끄러워졌다. 방영된다는 소식을 뉴스로 듣긴 했으나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동족의 끔찍한 참상들이 미국인들의 눈앞에 발가벗겨진 채 드러난 모양이구나! 집에 돌아가자마자 포털사이트에서 그 방송을 확인했고, 며칠 후에는 다운로드해서 직접 보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거나 짐작하고 있는 사실들의 반복에 불과했지만, 미국인들에겐 충격으로 다가왔을 내용이었다. 특히 군사조직에 가까울 정도의 병영국가 체제, 대한민국과 미국을 주된 표적으로 무력을 앞세운 협박, 몽땅 쇼 윈도우의 컨셉으로 꾸며진 평양, 비참하고 끔찍한 정치범 수용소들, 살아남을 힘마저 상실한 아이들과 일반국민들의 참상 등. 내게 북한의 현실을 일깨워 준 림멜 교수에게 달리 할 말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녀를 만나 South Korean들의 입장을 말하지 않으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 드디어 림멜 교수의 연구실에서 장시간 만나 한반도의 현실을 설명하고, 그녀의 관심사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대화들 가운데 한 부분을 이곳에 올리기로 했다.

 

 


                                                      연구실에서 필자와 대담 중인 림멜 교수

 

 

 

***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림멜 교수는 자신의 전공을 통해 얻은 통찰력으로 남을 이해하게 된대표적 미국 지식인이다. 명문 예일 대학 역사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그녀는 이듬 해 국제 교육 교류 위원회[Council on International Educational Exchange]’의 수혜자로 선발되어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레닌그라드 주립대학[Leningrad State University]에서 러시아어 프로그램을 이수했으며,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키로프(Kirov) 살해와 소비에트 사회: 1934-35년 레닌그라드에서의 선전과 여론[The Kirov Murder and Soviet Society: Propaganda and Popular Opinion in Leningrad, 1934-35]’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였다.

 

1995-96년에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강사로 재직했고, 1998년 가을학기부터 이곳 OSU에 자리를 잡고 주로 러시아중앙아시아근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과목들을 강의해 왔으며, 20여 종에 가까운 수상 및 그랜트(Grant) 수혜 경력을 갖고 있는 탁월한 교수임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 가운데는 풀브라이트(1991-92), 앨리스 폴 어워드(Alice Paul Award/1991), 국제 교류 연구 기금(International Research and Exchanges Board Grant/1991-92) 등을 비롯,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혜를 받은 학자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녀의 주된 관심사는 스탈린 시대 소련 역사에서 통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폭력이었고, 전쟁을 비롯한 집단 폭력이나 지하경제와 같은 국제적 기층민중의 현실 등에도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북한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현실에 관심을 갖는 걸까. 북한 얘기를 꺼내자 그녀는 김정은을 입에 올리며 스탈린보다 훨씬 잔인한 그의 성격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야기 도중 책장 위에 올려놓았던 스탈린의 배불뚝이 동상을 꺼내더니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체형(體形)이 스탈린과 똑같지 않으냐고 내게 물었다. 국민들을 배고프고 괴롭게 하면서 자신의 배를 불린 전형적인 독재자의 모습을 스탈린에게서 찾을 수 있고, 한반도의 김씨 3대는 바로 그 아류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스탈린 시대를 중심으로 러시아 역사를 긴 세월 연구해 온 그녀로서 국민 착취 및 학대의 전형적인 독재자로 스탈린을 꼽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체형과 인간성의 유사성까지 들면서 김씨 3대를 스탈린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인물들로 규정하고 있는 점은 흥미로웠다. 그나마 스탈린은 자기 당대에 끝이 났지만, 김씨 왕조는 대물림을 하고 있으므로 훨씬 지독한 인물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탈린이나 김씨 3대 등 배불뚝이 독재자들주민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악마적 지도자의 시각적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음을 그녀의 설명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스탈린의 독재가 결국 소련 해체의 단서로 작용한 것처럼 그보다 더 잔인한 모습으로 한반도 북쪽에 군림하고 있는 김씨 3대 특히 김정은의 폭력성이 조만간 체제의 전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그녀의 관점이었다.

 

 


연구실에서 필자와 대담 중인 림멜 교수

 

 


연구실에서 필자에게 설명 중인 림멜 교수

 

***

 

주변에 입양된 한국의 고아들을 언급함으로써 나를 부끄럽게 했지만, 이내 한국인 친구들이나 한국과의 친분을 강조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친밀감을 갖게 한 그녀.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삼성현대기아엘지•대한항공 등 미국을 비롯한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한국의 기업들을 죽 나열하고 그들의 장점까지 거론했으며,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삼성 폰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뿐인가. 한국의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을 독재자로,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을 민주주의 정착기의 대통령으로, 그 사이에 있는 노태우 대통령을 과도기로 각각 규정하는 등 한국 대통령들의 이름과 공적을 꿰고 있었으며, 반기문 총장, 김용 세계은행 총재 등 세계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명사들의 이름을 줄줄 외움으로써 한국인인 나를 적잖이 놀라게 했다.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산업화의 결정적 초석을 놓은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고 있으며, 그 여파로 박근혜 대통령도 정계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다고 내가 설명하자 그 말을 수긍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물어왔다. 세대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믿음직하다는 평가를 받아 비교적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말하자, 동북아시아의 큰 나라들이나 미국도 내지 못한 여성 대통령을 선출했다는 점과 함께 여성의 리더십이 나라를 흥하게 하는 선례를 한국이 만들 것이라는 고무적 관측까지 내놓는 것이었다. 북한이 매우 폭력적으로 나오는 것도 국제사회에서 보여주는 한국의 다양한 활약이나 선전(善戰)에 불쾌감을 느끼는 데 큰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그 나름의 분석을 보여주기도 했다.

 

***

 

학자로서 자신이 전공한 학문을 바탕으로 현존하는 체제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걸출했던 역사철학자 E. H. 카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가 역사라고 했다. 그 대화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온당한 해석 행위이고, 그런 해석을 통해 역사의 객관성은 확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스탈린 시대에 생겨난 역사적 사건들의 해석을 통해 단순히 그 시대의 규명에나 그치고 만다면, 그것을 진정한 역사가의 안목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 학자를 만나자마자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김씨 3대 혹은 북한의 미래까지 내다보는 통찰을 림멜 교수는 내게 보여준 것이리라. 여지없이 엄정한 시각을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들의 해석에서 얻어내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역사학자들을 만나는 일이 내겐 큰 즐거움이고, 그 즐거움을 림멜 교수와의 만남에서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컴퓨터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는 림멜 교수

 

 


림멜 교수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삼성 폰

 

 


2013. 12. 14. PBS에서 방영한 '비밀의 국가 북한' 타이틀 화면[방송화면 캡쳐]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의 어린이[방송화면 캡쳐]

 

 


군 진지를 순시하는 김정은에게 달려가며 충성을 과시하고 있는 인민군들[방송화면 캡쳐]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10.16 13:24

    
       일본에서 만난 한국학

-제 62회 조선학회(朝鮮學會) 학술발표회에 다녀와서-

                                                                                                                     조규익

지난 여름방학 중의 어느 날, 천리대학(天理大學)[일본 나라현 천리시]의 오카야마[岡山善一郞] 교수를 통해 조선학회로부터 ‘초빙발표’의 제의를 받았다. 일찍부터 조선학회의 명성을 들어왔고,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터라 망설임 없이 응했고, 발표논문 또한 기한보다 앞서 마무리해 보낼 수 있었다. 발표 청탁부터 원고 수납, 일정 통보, 의전(儀典) 등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치밀함은 과연 혀를 내두를 만 했다.

9월 30일 오후 3시 오사카 간사이[關西] 공항 도착. 출영 나온 두 명의 천리대 학생들과 함께 리무진 버스를 타고 천리시로 이동하는 내내 날씨는 흐려 있었다. 일본식 전통가옥들과 현대식 빌딩들이 조화를 이룬 오사카 외곽의 모습이 차분했다.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천리시. 천리교(天理敎)를 핵으로 이룩된 종교도시이기 때문일까, 일본의 중소규모 지방도시가 대부분 그러해서일까, 조용한 분위기가 약간은 이색적이었다. 간이 정류소에서 내린 우리는 다시 택시로 10여분을 이동하여 천리관광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깨끗하고 소박한 다다미방에는 녹차 응접세트가 놓인 다탁(茶卓)이 앉아있고, 작은 테라스에는 앙증스런 탁자 및 의자와 함께 양치질이 가능한 세면대가 달려 있었으며, 창밖으로는 파스텔톤의 일본 전통가옥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한 사람 정도 용납할 만한 화장실과 별도의 욕실이 참하고 청결한 자태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침실과 욕실 및 현관 사이에 마련된 작지만 넉넉한 공간에는 옷장도 있었다. 이런 점들 때문일까. 일본에서 숙박할 때마다 그들의 고집스런 주거(住居) 철학을 깨닫게 된다. 깔끔한 다다미방과 작은 공간의 앙증스런 활용.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침대보다 ‘일본적이어서’ 괜찮다는 느낌이다. 굳이 일본인의 집을 방문하지 않아도 그들의 주거방식을 일부나마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녹차로 갈증을 달래고 로비의 응접실로 내려가니 천리대학의 마츠오[松尾 勇] 교수가 우리를 반겼다. 참으로 우리말이 능숙한 젠틀맨이다. 그와 잠시 환담한 뒤 천리대학의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과 20여명의 학자들[일본 전역에서 모인 조선학회 임원들]이 모여 있는 식당으로 안내되어 저녁식사를 겸한 환영행사를 가졌다. 참석자 개개인 앞에 놓인 커다란 도시락 형태의 식판에 맥주를 곁들인 ‘조촐하면서도 깔끔한’ 식사였다. 늘 지글지글 끓는 전골이나 고기구이 혹은 생선[회/매운탕]에 익숙한 나로서는 참으로 이색적인 경험이었고, 마지막 날 밤 이자까야(いざかや)에서의 간친회(懇親會)를 빼곤 일본 체류 내내 ‘도시락 스타일’의 식사가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이튿날. 일찍 호텔을 나서 천리교에 봉직하는 젊은 직원 요코야마씨의 안내로 신전을 방문했다. 시가지에 넓게 자리 잡은 거대한 전통 일본식 건물이었다. 건물의 규모나 모습이 천리교의 중심임을 보여주는 ‘종교적 숭엄’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었다. 건물의 안쪽으로 넓은 광장이 있고, 큰 길에서 신전으로 들어오는 입구 쪽에 청동색의 큰 도리이(とりい[鳥居]) 가 서 있었으며, 길 건너에 박물관[천리참고관(天理參考館)]과 천리대학이 있었다. 신전에는 많은 교인들이 나와 무릎을 꿇고 주문을 외우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되어 있는 신전의 내부는 운동장처럼 넓었다. 목조 건물인 신전은 어느 곳이나 반들반들 빛을 내고 있었다. 복도를 통해 걷고 있는데,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일군(一群)의 교인들이 손에 큰 벙어리장갑 같은 것을 끼고 바닥을 닦으며 무릎걸음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입으로 주문을 외우며 바닥을 닦아나가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의식으로 ‘근행(勤行?)’이라는 , 요코야마 씨의 설명이었다. 종교의 의식이야 원래 합리(合理)를 초월하는 것이지만, 이런 근행이야말로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주문을 외우며 ‘마음의 때를 닦아내듯’ 신전의 내부를 닦는 일. 따로 품을 들여 청소할 필요도 없고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으니, 그 아니 합리적인가.

요코야마 씨의 설명에 의하면 천리교는 1838년 10월 26일 교조 나카야마 미키에게 내린 ‘어버이 천리왕님’의 계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버이 신(神)’은 인간들이 서로 도우며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고 함께 즐기려는 마음에서 인간을 창조했으며, 그런 이유로 ‘즐거운 삶’이야말로 인간생활의 목표라는 것이다. 신전 중앙에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지점인 ‘터전[지바]’이 있는데, 이곳에서 세상의 구제를 위한 근행이 올려 진다고 했다. 그들은 그곳을 온 세상 사람들의 ‘으뜸 고향’이라 여기고 있었다.

신전을 포함하고 있는 천리교 본부는 정기적으로 각종 행사나 모임을 갖는 한편 ‘즐거운 삶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강습회 또한 수시로 열린다고 했다. 앞서 말한 ‘터전’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일대를 ‘본고장’이라 하며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각종 교육시설들이 완비되어 있었으며, 종합병원을 비롯한 사회복지시설, 도서관이나 박물관 등의 문화시설들도 갖추어져 있었다. 시내를 돌아보면 ‘○○詰所’나 ‘○○母屋’ 등의 간판이 붙은 건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들이 바로 신자들의 숙소라 했다. 누구든 원하면 싼값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란다.

신전을 관람한 후 들른 참고관 즉 박물관은 엄청난 보물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박물관의 정확한 명칭은 ‘세계 생활문화와 고고미술 박물관’이었다. 아이누, 한반도, 중국ㆍ대만, 발리, 보르네오, 인도, 아시아 전역의 강과 하천변, 멕시코와 과테말라, 파푸아 뉴기니, 일본인들의 아메리카 이민과 천리교 전도, 일본의 서민생활 등의 생활문화와 한국ㆍ중국을 비롯한 세계의 고고미술품들. 주마간산 식으로 훑어보기에도 벅찬 내용이었고, 참으로 부러운 컬렉션이었다. 수십만 점의 소장품 가운데 3천 여 점 만 전시되고 있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 했다. 마침 우리나라의 석조유물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상당수는 국내 박물관에서 볼 수 없었던 진귀(珍貴)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과연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

10월 1일 오후 1시에 시작된 학회는 다음 날 오후 5시에야 마무리되었다. 하루 반에 걸쳐 28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나를 비롯 한국에서 초청된 3명의 발표자와 일본에서 유학하거나 교수로 있는 한국인 등 12명을 빼고는 모두 일본의 학자들이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발표논문의 수가 아니었다. 그들의 진지한 태도와 토론의 열기가 조선학회에 대하여 그간 지녀오던 호기심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큰 깨달음으로 발효(醱酵)된 점이 나 자신에겐 큰 수확이었다. 사실 ‘일본인들이 한국학을 하면 얼마나 하랴?’라는 것이 평소의 ‘오만했던’ 내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 땅에서 그 땅의 사람들이 그 땅의 말로’ 한국학을 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한국말로 하는 한국학’과 다른 또 하나의 한국학이 일본에서 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는 또 하나의 자각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솔직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이 말하는 조선학이란 바로 ‘한국어문학과 역사’였다. 1일 저녁의 간친회 자리에서 일본의 학자들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지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조선학회에 참여하여 다까하시 도오루나 오구라 신뻬이 같은 1세대 한국학 연구자들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조선학회의 바탕이 된 그 분들의 후예들을 만나보며 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다.”는 요지의 발언이었다. 그들의 ‘우리말과 문학, 역사에 대한 연구’가 식민지 경영의 일환으로 이 땅에서 행해진 것이며 분야에 따라 왜곡의 정치적 의도 또한 드러내긴 했으나, 그것들이 우리를 자극하여 우리 학자들로 하여금 어문학이나 역사의 연구에 매진토록 한 것도 사실이다. 이미 메이지 유신 때부터 서구로부터 근대학문의 방법을 익힌 그들. 최소한 반세기 이상 우리를 앞서 간 그들이었다. 우리의 일부 학자들을 발분망식(發憤忘食)하게 만든 그들의 공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억설(臆說)일까.

나는 일본 학자들의 학술발표를 들으며 영국이나 미국 등 서구의 학자들을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그들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영어영문학회’ 등 그들의 언어와 문학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학술대회를 참관할 것이다. 한국인들이 한국어로 영문학을 연구하고 발표하는 내용을 보고 들으며 무슨 느낌을 가질까. ‘놀고 있네!’라고 할까?, 아니면 ‘어, 이 사람들 봐라. 제법인데?’라고 할까?, 아니면 ‘아, 놀랍구나!’라고 할까? 나는 딱딱 끊어지는 어투로 이어나가는 일본인들의 발표를 들으며 세 번 째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아, 그곳에서 그곳 사람들이 그곳의 말로 새로운 한국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학자이니 당신들이 하는 한국학의 정확성을 검증해보아야겠소!’라는 오만한 객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별개의 패러다임이 그곳에 살아서 통용되고 있었다. ‘한국이 한국어문학의 종주국이고 세계의 중심이며 으뜸’이라는 생각은 어쩜 오만한 편견일 수 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문학연구의 핵심은 작품의 해석 작업이다. 무슨 언어로 해석하든 그 언어 사용자들이 공감할만한 논리적 정합성(整合性)만 갖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애당초 정답이 없는 문제를 놓고 변방에 대한 중심부의 권위를 어떻게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나는 그동안 한국학을 한다는 외국인들에 대하여 가당찮은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스스로 탈식민(脫植民)을 주장하면서 식민의 논리에 갇혀버린 셈이니, 이보다 더 우스운 꼴이 어디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국의 학회, 특히 우리의 어문학을 대표하는 국어국문학회를 떠올려 보았다. 나는 최근 2년간 연속 그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2년 전 경희대에서 발표할 땐 드넓은 발표장에 10명의 청중[그나마 경희대 교수들이 동원한 학생들로 보였다!]이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허공에 누군가의 얼굴을 그려놓고 발표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발표가 끝나고 어느 누구 하나 문제를 제기하거나 묻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발표를 끝내고 연단을 내려오며 ‘다시는 학회에 오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지만, 또 다시 때가 되자 습관적으로 역시나 그런 텅 빈 회의장에 가고 말았다. ‘혹시나’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공부를 시작하던 80년대의 국어국문학회 학술발표장엔 회원들이 바글바글 끓어 넘쳤다. 열기가 대단했다. 김동욱, 장덕순, 김석하, 황패강, 이기문 선생 등 원로들이 맨 앞자리에 좌정하여 분위기를 주도했다. 날카로운 지적과 질책이 이어지고, 발표자들은 적절한 대응으로 의기양양해 하거나 몸 둘 바를 모르기도 했다. 학문이 세대 간에 전승되어 내리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인터넷 덕분인가, 아니면 인터넷의 독성 때문인가. 이제 학술발표회장에서 후학들을 질책하는 원로들이 사라지고, 아예 학술발표회장에 발품 팔아가며 갈 필요조차 없다는 듯 후학들도 사라졌다. 발표회가 끝나자마자 즉각 인터넷으로 내용이 배포될 텐데, 무엇하러 시간 죽여 가며 차비 죽여 가며 발표회장을 찾을 것인가. 말인즉슨 그럴 듯하지만, 학문이 전승되는 세대 간의 통로가 막히고 생명이 끊어진 곳에 유령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문화의 사막화 현상’은 어찌 할 것인가.

물론 장르별로 분화된 학회들이 즐비하고, 그곳에서 열띤 토론들이 이루어진다고 항변할 수 있고, 또 얼마간 그것은 사실이다. 나 자신도 일본에 하나 뿐인 조선학회와 한국의 여러 학회들을 단순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이 지긋한 일본의 학자들이 어눌한 한국말로 한국학 관계 논문들을 진지하게 발표한 뒤 젊은 학자들이 따라붙어 묻고, 반대로 젊은 학자들이 일본어로 진지하게 발표한 뒤 고명한 교수들이 세세히 질문하고 충고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함보다는 두려움을 느꼈다면 내 느낌이 지나친 것인가.

***

허름하지만 낭만이 배어있는 이자까야. 그곳에서 어울린 일본의 조선학자들은 어쨌든 친한파(親韓派)들이었다. 그들 스스로 한국에서의 추억과 한국 음식을 떠올리며, 힘주어 한국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일본에서 한국의 주가가 올라가고는 있으나, 어쨌든 마이너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세월을 합리화하는 심리적 기제(機制)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학을 대하는 그들의 진지하고 치밀한 태도야말로 무슨 대상을 연구하든 학자로서 지녀야 할 본령(本領)이라는 점에서 존중될 필요가 있다.

일본의 학자들과 현지에서 함께 한 3박4일이 내겐 깨달음의 기회였다.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만 죽이다가는 특출하던 일제시대 일본의 한국학자들이 그랬듯 그 후예들도 질적 양적인 면에서 조만간 우리를 추월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갖고 돌아왔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운 요즈음이다.



 <천리관광호텔의 모습>
 

 <호텔 테라스의 앙증스런 배치, 그리고 창밖 풍경>

 <호텔 방.외출했다 돌아오니 이불이 곱게 깔려 있었다!>

 <저녁식사 후 오카야마 교수,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 백규>

 <도착하여 저녁식사 후 들른 이자까야 논따로>

 <이자까야 논따로에 걸려 있는 오래 된 시계. 명치시대의 것으로 현재도 살아 있음>

 <천리교 신전>

 <천리교 신전에 걸린 상징문양>

 <도리이를 통해서 바라본 천리교 신전>

 <천리 참고관[박물관]>

 <호텔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주택가>

 <천리대학 건물>

 <천리대학 강의동 앞에서>

 <천리대학 구내식당에서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

 <천리대학 구내식당에서 마츠오 교수>

 <천리참고관[박물관]>

 <발표회가 열린 후루사토 회관>

 <간친회장>

 <간친회장에서 오카야마 교수, 오카야마 카이미, 백규>

 <간친회장에서 후지모토 유키오 교수 등 일본학자들>

 <첫날 발표를 끝내고 이자까야에서 일본의 학자들과>

 <이자까야에서 오카야마 교수와>

  <첫날 발표 후 들른 이자까야의 메뉴들>
 

 <학회 접수처>

 <발표회장>

 <이광수 관련 논문을 발표하는 하다노 교수>

 <첫날 발표 후 기념촬영을 준비하는 모습>

 <천리대학 강의동>

 <발표하는 동경대학원의 이현준 선생>

 <천리시청의 특이한 모양>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들>

  <뒷풀이 자리에서 천리대학의 교수들과>

  <뒷풀이자리에서 천리대학의 모리야마, 김선미 교수등>

 <뒷풀이 자리에서 마츠오 교수와 백규>

  <호텔의 아침식사>

 <천리관광호텔 근처의 고서점>

 <천리관광호텔 근처의 고서점에서, 백규>

  <이자까야의 벽에 붙은 가부끼 배우의 모습>

<학회 뒷풀이가 있었던 이자까야의 벽에 붙은 기린맥주 포스터와 술 메뉴들>
 

    <학회 뒷풀이가 있었던 이자까야의 벽에 달아맨 인형>

 <이자까야 내부의 벽에 붙은 각종 주류 및 음식 메뉴들>

<천리 시내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건물>

 <천리시 도처에서 볼 수 있는 母屋>

<천리시 도처에서 목격되는 신자 숙소인 쯔메쇼>

<오사카 외곽에서 간사이 공항으로 건너가는 다리>
 

<간사이 공항에서 인천으로 떠날 ANA 기가 이륙 준비를 하고 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01.03 08:10

2011년=민족자존심 회복의 원년


                                                                                                    조규익
                                                                        
 지난해의 천안함 격침과 연평도 포격만큼 최근 들어 우리의 현실을 각성시켜 준 사건들도 없었다. 북한에 의해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그간의 도발들이 지난 정권들의 '햇볕정책'과 맞물려 '안보 현실의 추상화'에 기여했다면, 이번 사건들은 우리에게 '안보 현실의 문제적 실상'을 구체적으로 인식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지난 정권들의 '햇볕정책'이 얼마나 공허한 '짝사랑'에 불과했는가를 만천하에 드러낸 동시에 반사적으로 우리의 체제나 대비가 얼마나 취약한가를 보여 준 것이 바로 이 사건들이다.


 그런데 두 사건의 바탕에는 간단치 않은 국제 정치적 맥락이 깔려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난 뒤 한국과 미국은 서해에서 대규모 연합훈련을 했고, 이어 우리 군은 포격사건으로 중단되었던 정례적 사격훈련을 재개했다. 이 훈련을 트집 잡아 북한은 보복타격의 협박을 공언했고, 연평도 포격사건의 책임소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던 중국과 소련이 들고 나서서 사격훈련을 저지하려 했다. 심지어 러시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소집을 요구하여 '한 국가가 자기 영토 안에서 실시하는 정례적 훈련'까지 포기시키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미국이나 영국 등 서방세계를 중심으로 하는 대다수 이사국들의 반대로 무산되긴 했으나, 일방적으로 북한 편을 들고 있는 러시아나 중국의 태도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치적 역학의 미래에 대하여 매우 시사적이다.


 또 한 가지 공교로운 일은 한국과 미국의 공조로 연평도 포격사건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응급대비를 하는 와중에, 미뤄두었던 '한미 FTA'의 원안이 미국에 유리한 쪽으로 수정·타결된 점이다. 의도 여부를 불문하고 미국의 군사적 지원이 '한미 FTA'를 미국에 유리한 쪽으로 타결되도록 한 지렛대로 작용했음은 뻔한 일이다.


 중국과 러시아 역시 자국의 이익을 생각하면 한반도의 현상유지가 바람직하다.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거나, 남한에 의한 통일국가가 출범하는 것은 두 나라 모두에게 껄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내버려두면 무너지게 되어 있는 북한을 어떻게든 떠받쳐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이들 나라의 최고 전략이다. 더욱이 조만간 미국과 중국의 정상이 만나 대화의 재개에 합의할 것으로 관측되고, 그간의 강성 기조를 바꾸어 6자회담의 수용을 암시한 이명박 대통령의 최근 언급을 미루어 본다면,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주판알 튀기기가 이미 본격 가동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그것대로 그들에게는 기회이고, 단순한 분쟁으로 끝난다 해도 한국에 고통을 주면서 통일한국의 출범을 막을 수 있으니 그건 그것대로 이익이다. 이런 와중에 국제적인 바보 역할을 하는 것이 남북한의 권력집단이고, 희생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민초들이다. 자국 내 이권을 담보로 식량이나 물자를 구걸하러 뻔질나게 중국을 찾는 김정일 집단에게 민족의 자존심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그에 대응하여 자신들의 이익 확보에 바쁜 미국이나 일본의 힘을 빌려야 하는 남한 또한 떳떳치 못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그간의 안이했던 자세를 고쳐 안보 분야의 '주적 개념'을 손 보고, 북한 주민들을 회유하는 방향으로 통일정책을 수정한다 해도,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구조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통일은 어렵다. 북한이 불시에 붕괴하도록 방치하지도 않을 것이며, 우리의 흡수통일 또한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의 입장에서야 분단구조의 고착화를 원할 텐데, 그 구조가 지속되는 한 안보 불안은 상존할 것이다. 이런 쉽지 않은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남북한 모두 의식의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김정일 사후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탈북자들을 관리하는 현행 체제를 좀 더 효율적으로 정비하여 통일 이후에 대한 북한주민들의 불안감을 없애주어야 한다. 주변 열강들의 이해에 휘둘리는 것이 남북한의 현재 모습이다. 남북통일의 대전제는 민족의 자존심이다. 2011년을 남북한이 함께 민족자존심 회복의 원년으로 삼을 수 있도록 힘을 합해야 하는 것은 남북한이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지속되어 온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숭실대 교수/인문대 학장>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