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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4.15 내부자들의 파티 2
  2. 2007.04.21 퍼옴) 오세재 문학비 '극암(戟巖)
글 - 칼럼/단상2016. 4. 15. 14:21

 

 


영화 <내부자들>의 포스터

 

 

 


논설주간 이강희

 

 

 

내부자들의 파티

 

 

 

모처럼 한 건 올렸다. 은근히 보고팠던 영화 <내부자들>친견한 것이다. 비록 답답한 아파트 거실에서이지만, 모처럼 엔딩 타이틀이 뜰 때까지 졸지 않았다. 배우들의 미친 연기, 충격적인 장면들이 내내 나를 쫄게했다. , 언제부터 우리가 이런 배우들을 갖고 있었던가? 도끼로 찍히고 톱에 썰려 나뒹구는 손목, 튀는 피, 빙빙 돌려 뽑은 의수(義手)로 상대의 눈앞에 종주먹을 들이대는 안상구(이병헌 분) 눈동자의 살기, 뜨거운 피를 얼려버리는 저음의 협박, 갈가리 찢기는 영혼...상대 심장의 생명 에너지를 느글느글 뽑아가는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 분)는 아예 사이킥 뱀파이어(Psychic Vampire)’였다!

 

그러나 스토리는 뻔했다. 재벌정치인법조인언론인정치깡패 등등, 참으로 휘황찬란하지만 식상한 스타일의 내부자들이었다. 은밀하게 우리나라를 휘어잡고 있는 그들. 그들만의 리그에서 벌이는 배신과 복수극이 기똥차게리얼해서 오히려 미학적었다. 사실 미학이 아름다움의 원리만은 아니다. 아름다움을 뒤틀면 추함이 된다. ‘추한 아름다움추미(醜美)’가 엄연한 미적 범주의 하나로 정착된 건 꽤 오래 전의 일이다.

 

부와 권력으로 옹골차게 짜인 최상층부 리그의 행태가 늘 궁금했다. 세계는 세계 나름대로, 나라는 나라 나름대로, 대학은 대학 나름대로 내부자들의 리그가 움직여 나가는 건 아닐까? 궁금증은 상상의 원동력. 상상력은 그럴 듯한 가설을 만들어낸다. 그들이 늘 그러리란 가설을 내가 만들어 갖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법과 정의는 교과서에나 나오는 것이고, 세상을 돌리는 힘은 으레 내부자들의 스크럼에서 나오는 법. 제법 멋진 가설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연구실에 처박혀 읽히지 않는 논문이나 줄창써온 내겐 식은 죽 먹기라고나 할까.

 

그럴 듯한 글줄로 장삼이사들의 여론을 움직이고 뒷거래의 판을 짜는 논설주간, 뒷거래의 주역인 유력 대통령 후보와 재벌 회장. 이들이 만든 리그에 참여하려 애쓰다 버려지는 정치깡패와 족보 없는검사의 복수극. 이 영화를 보고나서야 내 가설이 그럴 듯했음을 알았다. 물론 내가 논설주간이나 유력 대통령 후보, 혹은 재벌회장 중의 하나가 되거나, 하다못해 족보 없는 검사 우장훈 아니면 정치깡패 안상구라도 되어야 내 논문의 그 가설은 완벽한 결론으로 마무리될 수 있을 텐데. 멋진 원작, 멋진 각색, 멋진 캐스팅, 멋진 연기... 이제 바야흐로 더러운 세상비판도 예술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

 

덤으로, 우스갯소리 하나.

 

주고받는 비자금을 매개로 권력을 설계하며 검은 거래의 현장에 모인 그들은 늘 애국과 정의를 농하곤 했다. 죽이거나 병신을 만들어버리는 복수극 또한 또 다른 정의를 그들 식으로 패러프레이즈(paraphrase)한 데 지나지 않았다. 검은 거래에 복수가 따르는 것은 희랍 시대 이래 연극의 정석 아닌가. 그러니 그런 것들 쯤이야 내 논문 속에서는 스테레오 타입(stereo type)에 불과할 뿐이다.

 

그보다 내 눈을 비비게 한 건 그들의 파티 현장이었다. 술상 뒤편으로 발가벗고 늘어선 팔등신 미녀들.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채 그녀들을 골라 앉힌 뒤 곧추세운 거시기로 폭탄주를 제조하며 미쳐가는 그들. , 두어 해 전 법무부 고위관리 아무개로 인해 세상에 까발려진 성 접대의 현장이 바로 그거였다! 벌거벗은 그들 사이사이에 발가벗은 여인들을 하나씩 끼워 앉히고 술을 마시며 고담준론(?)을 토해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문득 옛날 책에 나오는 좌우보처(左右補處)’를 떠올렸으니, 나도 참 못 말리는 거시기임에 틀림없으리라.

 

성종 때 대학자 성현(成俔)<<용재총화(慵齋叢話)>>에 나오는 일화다. 새로 과거에 급제하여 삼관(三館)에 들어가는 자가 고참 관리들을 위해 열곤 했던 신고식이 허참면신지례(許參免新之禮)’였다. 그 중 신참에 대한 행패로 치면 예문관(藝文館)의 파티가 가장 심했다. 처음으로 직위를 받고 베푸는 연석을 허참(許參), 50일이 지나 베푸는 연석을 면신(免新), 그 중간에 베푸는 연석을 중일연(中日宴)이라 했다. 춘추관과 여러 겸관(兼官)들을 청해 연석을 즐기고 한밤중에 파한 뒤 손님들이 돌아가면 그 때서야 본 공연(?)은 시작되었다. ‘선생들을 맞아 베푸는 연석인즉 상관장(上官長)이 곡좌(曲坐)하고 봉교(奉敎) 이하 모든 관리들은 각각 기생 하나씩 끼고 앉는데, 그걸 좌우보처라 한다는 것. 원래 사찰의 극락전에 봉안된 아미타 삼존도에서 아미타불의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배치되는 그것이 좌우보처였다. 그들만의 파티에서 좌우보처가 이루어지고 난 뒤 아래로부터 위로 술을 부어 돌리고 차례로 일어나 춤추되, 혼자 추면 벌주를 먹였던 모양이다. 새벽이 되어 상관장이 주석에서 일어나면 모든 사람은 박수하며 흔들고 춤추며 <한림별곡>을 부르는데, 매미 울음소리 같이 맑은 노래 사이에 개구리 들끓는 듯한 소리를 섞어 시끄럽게 놀다가 날이 새면 헤어진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술에 취한 뒤 무슨 난장판이 벌어졌을지는 독자 여러분이 상상하실 일이다. 묘하게도 그 좌우보처의 광경이 영화 속 파티와 오버랩되었으니, ‘내부자들의 파티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그들만의 일상아닐까.

 

 


대통령 후보 장필우

 

 

 

검사 우장훈과 정치깡패 안상구

 

 

 


안상구

 

*이 글은 <<인문시보>> 12호(숭실대학교 인문대학/2016. 4. 15.)에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kicho
자료 - 전공자료2007. 4. 21. 08:01
 

戟巖            극암              창바위

北嶺巉巉石  북령참참석    북쪽 산마루 우뚝솟은 저 바위를

邦人號戟巖  방인호극암    사람들은 모두 창바위라 부른다네.

逈樁乘鶴晋  형장승학진     까마득 멀어 선학타고 오르려하나

高刺上天咸  고자상천함    가파으게 높아 하늘 찌를듯 하구나.

揉柄電爲火  유병전위화    자루꽂아 휘두르며 번갯불 번뜩이고

洗鎽霜是鹽  세봉상시염     창끝 씻으면 서릿발 같이 예리하다오.

何當作兵器  하당작병기    어느때 이를 병기로 만들어서

敗楚亦亡凡  패초역망범    교활한 오랑캐를 남김없이 섬멸할까   해석: 숭실대교수 조규익


상기의 해석과 다소 차이가 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세재 문학비

 

 북쪽 산마루 높이 깎아지른 암석을

 옆사람이 창바위라 부르는데

 아득히 말뚝같이 뻗질러 학을 타고 가야겠고

 높이 솟아 하늘을 찌를 듯하 네

 자루를 휘면 번개로 불을 붙이고

 칼끝의 서리 씻으면 소금이겠는데

 어찌 반드 시 병기가 되게 하여

 초나라를 패멸하 고 또 범을 망치는가.


출처  http://www.andongkwon.or.kr/

       

3행의 晋:학을 탄 왕자 진-주나라 영왕의 태자로, 피리를 잘 불렀으며 신선이되어 학을타고 하늘로 올랐다 한다.

4행의 咸:중국 황제시대의 무당인 계함-季咸을 말함

8행의 凡:옛 주공-周公의 아들을 봉했던 하남성-河南省에 있던 나라.



상기 극암을 읽고 송나라 사람이 탄복을 하여

"지금 이사람이 살아 있는가? 지금 무슨 관직에 이러렀는가?

송나라에 이와같은 시를 짓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관직을 준다.

이 詩는 여한-餘閑에 지은 제영-題詠이 아니고 거의 남이 어려운 운자-韻字를 주어 -즉석에서- 짓게 강작한것일 것이다."

실지로 이시는 고의로 어려운 운자를 하여  즉석에서 지었다고 한다.

출처:대동운부군옥 8 - 한국학술진흥재단학술명저번역총서 동양편 18.



오 세재-吳 世才 (인종 11년.1133) ~ (명종 17년.1187).

            고려 중기 명종 때의 학자·문인.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덕전(德全).



한림-翰林 학린-學麟의 손자이며, 세공-世功, 세문-世文의 아우로 문장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무신란이후 집안이 몰락하여 궁색하게 되었다. 의종(1151)에 진사에 오르고,

명종12년(1182)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성격이 소루-疎漏, 준철-俊哲하여 검속-檢束함이 적어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였고,

친우 이인로-李仁老가 세번이나 추천하였으나 끝내 벼슬에 오르지 못하였다.

그는 당시 18세였던 이규보-李奎報에게 53세의 나이로 망년지교-忘年之交를 허락하였고,

이른바 해좌칠현-海左七賢: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이인로 등과 시주-詩酒로 즐겼다.

만년에는 외할아버지의 출생지인 동경-東京:지금의 慶州-으로 제고사-祭告使의 축사-祝史가 되어

역마를 타고 가 이내 그곳에 살면서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고, 마침내 가난에 시달리다 죽고 말았다.



<주역>을 암송하고 다른 육경 서적을 박통할 정도로 유학 경전에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작품도 당시에 상당한 평가를 받았으니, 이규보는 그의 시를 '준매경준-遵邁勁俊'이라 하였고,

최자(崔滋)는 ‘풍섬혼후(豊贍渾厚)’라고 평한 바 있다. 또한 글씨에도 뛰어났으니,

경기체가 <한림별곡 翰林別曲> 제3장에서 말한 바,

"오생,유생 양선생 위 주필경 하여-吳生劉生 兩先生 偉 走筆景 何如-"에서 오생은 바로 오세재를 가리킨다.

결론적으로 그는 명종시대 문신수난기를 통하여 현실에 타협 내지는 조화하지 못하고



문학과 시주에 탐닉하므로써 자신의 고민을 해소하려 한 것이다.

그러한 그에게 이규보는 나이를 떠난 진정한 벗이었으며,

이규보 역시 그의 재주를 아끼고 삶을 애석히 여겨 <오선생덕전애사 吳先生德全哀詞>를 지어 추모하였다.

여기에서 이규보는 그를 복양선생이라 부르고,

친구 아닌 문하생의 입장에서 사사로이 현정선생-玄靜先生이라 시호하여 영전에 바쳤다.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동문선-東文選>에 오언율시 2편, 칠언율시 1편이 있다.

파한집-파한집, 보한집-보한집, 고려사, 동경지-東京誌등에

극암-戟巖, 병목-病目, 혜정시-惠政詩, 풍의종미행시-諷毅宗微行詩, 자서-自敍,

차운김무적견증-次韻金無迹見贈등 일부가 전해진다.

시호는 현정-玄靜, 호는 복양-濮陽.



참고문헌 

東國李相國集, 高麗史. <朴魯春〉 출처:엠파스

2001.10

한국문학비건립동호회 세우고 숭실대교수 문학박사 조규익 짓고 한성대  외래교수 농산 정충락 쓰다.

경북 경주시 황성동 황성공원에 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

노래중에 2절 죽림칠현(임춘. 오세재. 이인로. 조통. 황보황. 이담지. 함순)에 나온다.


출처-블로그  항구가 사는 이야기(http://blog.empas.com/pyo7803/12045457)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