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4.02.16 미국통신 66: 아찔했던 순간, 엔젤 파이어 마운틴의 환상
  2. 2011.08.13 아, 두메솔 선생님!
  3. 2011.02.13 '말씀의 힘' (1)
글 - 칼럼/단상2014. 2. 16. 04:52

 

 

 


숲속 길-1

 

 

 

 


숲속 길-2

 

 

 

 


숲속 길-3

 

 

 

 


숲속 길-4

 

 

 

 


숲속 길-5

 

 

 

 

 

 

아찔했던 순간, 엔젤 파이어 마운틴의 환상

 

 

 

 

타오(Taos)로부터 빠져나왔을 땐 오후 4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뉴멕시코를 벗어나는 길은 두 갈래였다. 다시 산타페 쪽으로 돌아가 I-40을 타는 코스, 그 반대로 북쪽에 가로막힌 산맥을 넘는 지름길 코스 등 두 개의 옵션이었다. 하늘에는 무거운 구름이 잔뜩 몰려들어 타오 산의 절반 이상을 덮었고, 저녁이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지름길이든 우회로이든 I-40에 접어들어야 뉴멕시코를 벗어난 뒤 애당초 계획대로 텍사스 주의 아마리요(Amarillo)에서 1박을 할 수가 있었다. 지도상으로 지름길은 긴 코스에 비해 절반가량의 거리였다. 순간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좋다. 지름길로 간다. 1,800년 이태리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이 지름길인 알프스를 넘던 기백을 상상하며 산길을 타기로 한 것이다.

 

꼬불꼬불, 오르락내리락, 산길은 예상보다 험했다. 깊이 들어갈수록 오고가는 차량들도 뜸했고, 말 두 마리와 검정 소 10여 마리가 서 있던 목장을 끝으로 인가도 사라졌다. 석양은 저 멀리 산 끝에 간신히 걸려 있었다. 다시 울창한 삼림으로 들어서면서 사위(四圍)는 어둑해지고, 하늘의 구름은 더 두꺼워졌다. 눈발이 날렸고, 설상가상으로 아스팔트가 끊기면서 비포장도로가 시작되었다. 흙과 자갈이 적당히 섞인 길바닥엔 1~2인치 정도의 눈이 쌓여 있었다. 산속의 기후가 평지와 다르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지도상에 점선으로 표시된 길이가 매우 짧았음을 생각하고 애당초 가졌던 나폴레옹의 기개를 견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가도 가도 눈 덮인 산길은 끝을 보이지 않았다. 가슴 저 밑에서 작지 않은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지만, 사령관이 흔들리면 전투력은 와해되는 법. 그냥 밀고 나갔다. 이미 인적(人跡)이고 차적(車跡)이고 끝난 지 오래되어 적막한 산길임에도 주변의 경치는 끝내주게좋았다. 쭉쭉 뻗어 올라간 나무들에는 하얀 눈이 덮여 어딜 보나 한 폭의 겨울풍경화였다. 군데군데 손바닥만하게 펼쳐진 풀밭들에는 눈과 수정모양의 얼음이 어울려 하늘이 조화를 부린 듯 했다.

 

몇 구비 산을 넘은 뒤 우리는 진짜로 동화의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 분지 형으로 생긴 계곡 한쪽의 산록에 수많은 사슴들이 눈밭을 헤집으며 먹이를 찾고 있는 것 아닌가. , 전 세계 산타 할아버지들이 타고 다니는 사슴들이 여기서 사육되는 것이로구나! ‘인영(人影)이 불견(不見)’인 이 산중에 도대체 이 많은 사슴들은 어떻게 모여 있단 말인가. 길 가에 차를 세우고 차창을 내렸다. 몇 녀석은 풀을 찾다 말고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고, 다른 녀석들은 오불관언(吾不關焉)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이게 바로 동화의 세계가 아닌가.

 

 

 

 

 


선경에 노니는 사슴들-1

 

 

 


선경에 노니는 사슴들-2

 

 

 


선경에 노니는 사슴들-3

 

 

 


선경에 노니는 사슴들-4

 

 

 

 

온통 눈에 덮여 순백으로 변한 무대에 사슴의 무리가 연출해내는 환상의 순간을 우리는 어쩔 줄 모르고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자연의 위대한 아름다움에 흠뻑 취한 것이다. ‘어떻게 이 산을 벗어날 것이며, 우리에게 닥친 위험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라는 걱정과 불안은 이미 우리의 뇌리를 떠난 지 오래였다. ‘저 아름다운 사슴들이 살아가는 이 공간에 무슨 위험이 있을 것이며, 설사 차가 전진하지 못한다 한들 저 녀석들과 하룻밤 지새지 못할 이유가 뭔가?’라는 오기가 발동한 것이었을까. 그 녀석들에게 눈길을 주는 동안은 단 한 점의 걱정도 없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저들은 환상 속의 존재들이고, 우리는 현실의 존재들 아닌가. 어떻게든 벗어나야 했다. 그로부터 자동차를 살살 달래가며 액셀러레이터에 힘을 가했다. 묘하게도 사슴을 만난 곳으로부터 30분쯤 지나자 숲이 끝나고 다시 광대한 대지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20여 분을 달리자 하나 둘 민가가 나타나고, 10여 분을 더 달리자 아스팔트 도로가 나타났다. 까맣게 밤이 내린 드넓은 대지를 쾌속으로 달려 밤 8시나 되어서야 겨우 모텔 하나가 있는, 주 경계선 지역의 작은 도시 로건(Logan)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텔에 도착한 뒤 하루 행적을 복기(復碁)해 보았다. 모텔에 도착하고 나서야 겨울 동안 미국 각지의 산악지역에서 조난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조난당했을 때 얼마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장비들은 갖추고 다니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행을 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우리는 어땠나? 우리의 트렁크엔 간단한 캐리어 하나만 달랑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 흔한 담요도, 랜턴도, 간식거리도, 여분의 옷도 없었다. 스모커 아닌 내게 라이터나 성냥이 있을 턱도 없었다. 그 산중에서 터지지도 않는 전화기는 무용지물이었다. 인가가 있다 해도 미국의 관습상 찾아들어가 구조를 요청할 수 없는 것이 상식이지만, 아예 그런 인가마저 없었다.

 

그 눈 내리는 산 속에서 자동차가 덜컹하고 서거나 미끄러지기라도 했다면, 작은 눈이 폭설로 변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면, 그래서 꼼짝 없이 그곳에 갇혔다면, 자동차의 연료가 소진되는 순간, 우리는 딱딱하게 굳은 채 세상을 하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이 세상에 많은 인연을 남겨 둔 우리가 미국 뉴멕시코의 산길에서 속절없이 세상을 하직하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허무한 일 아닌가.

 

미국에서 장거리 자동차 여행을 하시는 분들은 명심해야 할 일이 있다. 자동차 트렁크에 각종 구난 장비들을 철저히 챙겨두시라. 차를 구입하자마자 어디서나 터지는 스마트 폰, 성능 좋은 랜턴, 라이터나 성냥, 담요, , 여분의 옷가지, 충분한 간식, 작은 톱[조난 시 불 지필 나무를 자를 때 필요함], [혹시 간단한 요리나, 사냥 혹은 위급할 때 필요함] 등을 챙기시라. 6개월 동안 유럽을 자동차로 돌아다니면서도, 한국의 그 험한 산길들을 종횡무진 다니면서도, 아무 문제없었다는 자만과 안이함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엄청난 위험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자만은 금물이다.

 

다만, 그 순간에 만난 사슴 떼는 우리의 불안을 잊게 만든 하늘의 배려였다. 그래서 그 순간을 생각하며 하나님과 그 사슴들에게 감사하고 있는 요즈음이다.

 

 

 

 

 


산 속의 작은 공간-1

 

 

 


산속의 작은 공간-2

 

 

 


눈 내리는 산길

 

 

 


눈 맞은 자작나무 숲

 

 

 


눈 내린 고갯길

 

 

 


다시 찾은 대지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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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1. 8. 13. 19:30


아, 두메솔 선생님!



남의 글을 읽으며 눈물을 흘려 보기 그 얼마만인가? 갈수록 인간의 나약함과 삶의 유한함을 깨달으며 내 이웃의 비극을 ‘타자화(他者化)’하는 데 익숙해지는 나날이다. 선생의 글과 시는 ‘인간 실존’에 대한 통곡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어 세속적인 행복을 누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맞닥뜨린 불행. 요즘 흔히 보는 남녀 간의 다툼이나 이른바 ‘황혼이혼’ 같은 류가 아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아니 죽음보다 못할 수도 있는 삶의 한 복판에서 겪는 실존의 위기를 이보다 더 절절하게 외칠 수 있을까.

우리는 입만 열면 인간의 본질을 말한다. 신을 모델로 만들어졌다고 착각하는 인간, 완전무흠한 신의 곁으로 올라가고자 애쓰는, 아니 올라갈 수 있으리라고 믿는 인간. 그러면서 수시로 맞닥뜨리는 온갖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는 불쌍한 존재가 인간 아닌가. 우주 최고의 영장류(靈長類)로 자부하지만, 인간이 갖는 ‘영성(靈性)’이란 그 얼마나 하잘 것 없으며 비극적인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거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오늘 두메솔 선생의 글에서 아프게 확인한다.

일생을 함께 한 배우자의 불행 앞에서 그 불행의 완력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 두메솔의 절망과 불안이 어찌 선생 혼자만의 것이란 말인가. 사랑하는 배우자 주변에 어른거리는 죽음과 불안, 아니 자신의 주변에 어른대는 그런 불안이 어찌 두메솔 혼자 안고 가야할 개인적인 숙명일 것인가. 선생이 절규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절절한 현실이다. 우린 흔히 그럴 듯한 논리로 객관과 보편을 논하지만, 그런 논리가 결코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다.

***

두메솔 선생의 <<나와 미학, 실버세대를 위하여>>(조이웍스, 2011)를 눈물을 훔치며 읽었다. ‘지우며 읽는 시화집’이란 부제가 페이지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이 책. 두메솔 선생의 평소 모습처럼 깔끔하고 단정한 장정(裝幀)의 이 책이 슬픔을 배가해주는 건 글 속에 가득 들어찬 진실 때문이다. 루푸스 증상과 그 합병증으로 나타난 뇌경색, 아내의 뇌경색 징후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두메솔 선생의 자책,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잊은[아니 잃어버린] 아내를 찾아 도시의 미로를 헤맨 두메솔 선생. 선생은 그 미로를 다음과 같이 ‘미로’라는 제목으로 설명하고 있다.

당신이 머릿속 지도를 지우기 시작한 날

나는 지도를 꺼내들고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전화하기를 그만 둔 그 때부터

나는 애원했습니다.

수신 좀 하라 먼저 끊지 말라

도시는 천 갈래 만 갈래.

인생의 미로보다 더한 미로,

어두운 골목에 있지 말고 큰 길로 나가요,

간판을 읽어요, 어딘지 물어요.

“나 힘들어 빨리 와줘” 라고 외치게 하는

솔직한 세포는 지워졌는가.

세포가 사랑보다 위대한 것인가

오토바이 소리가 귀청 울리는 거기

간판도 없는 회색의 미로에서

당신은 기진했으나 곧 일어나 걸었습니다.

며칠을 계속 걸었습니다.

분수광장 한 구석에서 누가 자고 있다.

커피를 엎지르며 마구 달려 가보니 남루한 사내.

이 무슨 실례의 상상일까

어딘가 조용한 벤치에 꼿꼿하게 앉아 눈 감고 있겠지

우리가 좋아라고 함께 마시던 커피 향기가 쓰다

죽을 만큼 쓰다.

나 같으면 지하철역을 택하겠다.

당신이 좋아하는 도넛 가게 그 옆엔 푹신한 소파와

나무의자, TV, 꽃무늬 벽, 바로 옆에 화장실,

조금 더 가면 초등학교, 어린 시절이 따라온다.

택시기사가 속도를 늦추며 눈을 닦는다.

차에서 내려 몇 발 못가 엉엉 울었다.

내게로 오는 길을 잊었어도 상관없습니다.

따지기 잘하는 사람과

평생의 미로를 뱅뱅 돌다가

시시한 기억부터 지워야 했겠지

그래도 서로 좋아하는 느낌,

너와 나의 골자,

사랑은 퍼내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귀갓길을 잊어 버려 방황하는 아내, 그 아내를 찾아 미로를 방황하는 남편, 남편의 간절한 염원 등 우리가 주변에서 늘상 목격하는 광경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대책이 없다. 곁에 있다 사라진 아내를 찾아 남편을 찾아 헤매야 할 미로 만이 있을 뿐이고, 총명하던 시절의 음성이나 젊은 시절의 화사한 추억만 피곤에 절은 몸 안 어딘가에 남아 있을 뿐이다. 과연 사랑 만으로 그런 미로의 기억을 되살려낼 수 있을까.

***

이제 본격적인 재활의 단계. 두메솔 선생의 마음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도 지쳐가고, 추억이 빠져나간 환자의 몸은 새로운 추억에의 갈구로 허전하고 피곤하다. 다음의 묘사는 바야흐로 후회의 무덤에 빠져들고 있는 우리를 건져내려는 배려에서 나온 것이리라.

“(엉금엉금 기어가는 아내를) 화장실 문 앞에서 일으켜 세울 때, 소파로 돌아와 앉기와 일어서기 운동을 시킬 때, 내 손이 거칠었나 보다. ‘그것도 못해?’ 나도 모르게 거친 말이 되었다. 금방 움츠린다. 억지로 시키는 내가 밉다고 한다. 야단친다는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욕한다’고 한다. 무슨 욕을 했단 말인가. 억울하다. 아랫도리가 추울 테니 하의를 하나 더 입자고 했다. 반발하며 입지 않는다. TV를 틀고 과일 한 쪽과 찻잔을 앞에 놓아주고 돌아서니 오전 11시. 미뤄두었던 설거지를 하는데 한숨이 나온다. 총명하던 당신은 어디로 가셨나요. 그립습니다. 그립습니다. 지금 당신은 누구인가요. 나는 또 왜 이러나요.”

그렇다. 뇌를 다친 아내는 낯선 이로 변해 내 삶의 한 부분을 비집고 들어 앉아있으나, 피곤하고 낯설어 나 자신을 닦달할 뿐, 뾰족한 방도가 없다. 소통이 되지 않으니, 타인이다. 총명하고 조신하던 아내, 내 몸보다도 더 잘 소통되던 아내는 남으로 변했고, 그 ‘남처럼 낯설어진’ 아내를 받아들이기 위해 마땅히 사용할 도구가 없는 이 상황을 선생은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가.

그러나, 끈질긴 두메솔 선생, 드디어 소명(召命)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소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 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아니,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일’이 소명이다. 선생은 그 소명을 다음과 같이 들었다.

아름드리나무도 못하는 일을 하란다.

자투리땅에 화초 심듯

은근슬쩍 시작하는 사랑 이야기

쉴 새 없이 귓가에 속삭이시니

토마토가 오직 바라는 것은

햇빛과 흙, 버팀목,

타드는 날 장대비,

그뿐

가야지, 달려가야지

두툼한 과육과 작은 씨앗 만들어

얇은 표피 안에 감추는 재미

누가 알까

영혼의 단맛까지

소쿠리 듬뿍 담아 그대에게 바치리.

선생도 방황을 했으리라. 하나님이 시키신 일은 사실 ‘아름드리나무도 못할’ 정도로 크지 않은가. 그럼에도 하라고 시키신 데는 큰 뜻이 있을 것이다. 애당초 시련을 주신 데는 더 큰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 크신 뜻을 따르는 일이 지금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임을 알고, 선생은 달려가려는 것이다. 새롭게 태어난 아내와 함께 어디까지든 가야 한다는 것이 그 분의 소명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선생은 에필로그로 다음과 같은 아포리아(aporia)를 남겼다. 선생은 쉽게 말씀하시지만,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에겐 해결할 수 없는 난제이면서 다른 방법이나 관점으로 새롭게 추구하고 탐구해야 할 출발점인 것이다.

“간병은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봉사가 아니다. 손해만 보는 일이 아니다. 서로 친구가 되어 시간마다 함께 즐기는 일이다. 환자에게 우월성을 과시하듯 리드하면 실패하기 쉽다. 서로 돕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 나는 환자를 돕고 환자는 나를 돕는다.”

2011. 8. 13. 텅 빈 교정에 내려 꽂히는 빗소리를 들으며, 백규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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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1. 2. 13. 12:34

‘말씀의 힘’

 

‘작년에 왔던 각설이’ 올해 또 왔다고 낙산 비치호텔 앞 소나무는 꿍얼거릴 것이다. 작년처럼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낙산 비치호텔의 신앙수양회. 기독교 대학에 20년 넘게 봉직하며 매년 겨울 한 차례 ‘성령’의 폭포수에 몸을 담그곤 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 때 뿐이었다. 솔잎 사이로 맑은 바람 빠져 지나듯, 의미 없는 만남의 반복이었다. 습관처럼 차려지는 행사장에 돌덩어리처럼 앉아 있다 빠져 나오곤 하던 지난날들이었다. 정열이 활화산처럼 끓어올라 물불을 가리지 못할 때는 그나마 몰랐다. 쥐꼬리만한 지식과 팽팽해진 자의식이 오만의 근원임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것으로 세상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으려니 믿고 지내던 무명(無明)의 시간대였다. 그러나 화살처럼 달려 나가는 시간의 가차 없이 차가운 결을 비로소 느끼게 된 지금. 내게 밀물처럼 찾아왔다가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 채 내년을 기약하며 밀려가는 바닷물처럼 ‘말씀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깨달음이 생긴 것이다. 그간 독실한 신앙인들을 내심 ‘도그마에 붙들려 자의식을 잃은 한심한 영혼’으로 여겨오지는 않았는가. 옳건 그르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부귀영화와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들을 ‘융통성 없고 못 말리는 꼴통들’로 슬그머니 비하하며, 나 자신의 ‘중심 없음’을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난 지식인의 자유혼’ 쯤으로 합리화해온 것이나 아닌가.

 

***

 

예수님의 말씀과 생각을 자신의 말로 쉽게 풀어 우매한 내게 전해주려 애쓴 김지철 목사[소망교회 담임]의 ‘말씀’과 만났다. 그 ‘말씀’을 들으며, 어린 영혼들에게 무수한 말을 들려주며 살아 온 내 지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돌아갔다. 김 목사는 이스라엘인들이 신봉하던 ‘말의 힘’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힘’이라 했다. 그 분이 지적한 말은 바로 생명을 담은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말에 대하여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온 것은 아닌가. 말로 밥을 먹고 살면서도 ‘묵언(黙言)’을 숭상해온 내 진심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말을 많이 한 날들은 밤새 잠들지 못했다. 허공에 날려버린 ‘한없이 가벼운’ 말들의 펄럭임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불면(不眠)의 밤들을 보내야 했다.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어떻게 하면 말 안 하고’ 살 수 있을까를 화두로 몇 날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습관처럼 아침밥을 먹으며 준비운동을 시작하고 강의실에 들어가서 준비된 입으로 무언가를 지껄이는 일상이 바로 내 생활이었다.

 

***

 

문제는 진실성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그 분의 말과 행위가 일치되었기 때문이라고 김 목사는 강조했다. ‘말씀 없는 신비주의’나 ‘말씀 없는 도덕적 행동주의’는 신앙의 겸손을 앗아갈 수도 있다는 것, 바리새인들처럼 문자에 얽매여 지낸다면 말씀이 갖고 있는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회복받기 위해서 사람들은 주일마다 교회에 간다는 것 등등. 마치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듯이 김 목사는 그간 말에 대하여 갖고 있던 내 콤플렉스를 체험적으로 풀어주시는 게 아닌가. 그 뿐 아니다. ‘말의 힘을 가장 크게 신뢰하는 사람들이 교수’라는 그 분의 말씀은 유일한 수단이면서도 말의 권능을 부인해오던 내게 충격이었다. ‘교수의 필수적인 능력은 요약하는 능력과 부연하는 능력’이라는 그 분의 말씀은 내게 큰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는데, 그 말 속에는 ‘교수들 능력이라 해봤자 요약하는 능력과 부연하는 능력 뿐’이라는 속뜻이 숨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십계명은 크게 보아 요약인데, 그것을 또 요약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김 목사의 설명이 자신의 말을 듣고 가졌을지도 모르는 교수들의 부끄러움을 약간 덜어준 효과가 있긴 했으나, 그래도 부끄러움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 그간 내가 해온 일이라야 텍스트의 요약이나 이론의 부연 혹은 생명 없는 말의 전달밖에 더 있었겠는가. 그걸 반복하면서 지식사회의 일원이랍시고 오만에 젖어온 존재가 바로 나 아닌가. 남들이 토해 내는 ‘생명의 말씀들’을 귓전으로 들으며 ‘생명 없는 말의 허위’를 진실로 강변해온 것이나 아닌가.

 

***

 

그동안 나는 말의 겉만을 보았지, 말 속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언어는 존재의 집으로서, 인간은 언어의 주택 속에 산다’는 하이데거(M. Heidegger)의 말조차도 그다지 절실하게 여겨오지 않던 나인지라, 목사님들이나 선생들이 목청껏 외쳐대는 ‘생명의 말씀들’을 그저 귓가에 스치는 바람결로 들어온 것이나 아니겠는가.

오늘 풍광 좋은 낙산의 해변에서 김목사님의 절절하신 말씀을 들으며 바람처럼 흘려보낸 내 풋풋했던 날들을 반추한다. 내 젊은 날의 오만을 조상(弔喪)하며... <2011. 2. 10.>

조규익(숭실대 교수)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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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초보 블로거입니다. 자주 들리겠습니다.

    2011.02.13 16:1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