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8. 7. 6. 12:05

 

 

관련 유튜브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z4CNmiLF-YU&feature=youtu.be

 

 

팔불출(八不出)의 변(辯)-학자로 자란 아들을 보며

 

 

누군가는 말했다. ‘저 잘났다 자랑하는 놈, 마누라 자랑하는 놈, 자식 자랑하는 놈, 선조와 부모 자랑하는 놈, 형제 자랑하는 놈, 후배 자랑하는 놈, 돈 자랑하는 놈, 고향 자랑하는 놈을 팔불출(八不出)이라 부른다고. ‘불출이란 사전적으로 못난이란 뜻이지만, 어감(語感) 상으론 엄청 못난 놈쯤 되는 말이다. 체면 중시 사회에서 수오지심(羞惡之心: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뼛속 깊이 간직하고 이 나이까지 살아 온 나다. 그런데 지금 팔불출 가운데 세 번째 불출이 되어 보고자 한다.

 

근래 한두 가지 일을 경험하면서 내 알량한 자존심의 메커니즘이 더 이상 작동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내 생각에 자존심이란 살아 갈 날들이 살아 온 날들보다 많을 때생겨나기 쉬운, 특이한 심리다. 이제 교수로서 내 인생의 한낮은 기울었고, 내 뒤에 끝도 없이 늘어선 후생(後生)들은 빨리 비켜서라고 재촉한다. 가당치 않은 자존심으로 그들에게 군림하려 한 과거를 버리고, 그들의 장점을 인정하면서 슬그머니 앞자리를 양보하는 것. 그 길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출구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따라서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아들의 장점을 인정하는 것도 즐거움일 뿐 자존심 차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제 내 협소한 울타리를 걷어내려는 것은 꽤 오래 전부터 견지해 온 학자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는 중이고, 어쩌면 그런 도전들의 정당성이 역사적 필연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조경현(Kyunghyun Cho)33살 된 내 큰 아들이다. 이번 방학에 그가 보여준 놀라운 일을 계기로 망설임 없이 이 공간에서 그를 언급하게 되었다. 그는 현재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다. 20022, 인문계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카이스트(KAIST)로 진학하는 그를 보내며 쓴 글(공부하러 집 떠나는 아들을 보며, <<어느 인문학도의 세상 읽기>>, 인터북스, 2009)의 마무리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 소망을 담은 바 있다.

 

자식이 어찌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으랴? 그리고, 알아주기를 바란들 무엇 하랴? 그러나, 세상의 아들들이 이것만은 알아야 할 것이다. 세상의 부모들 대부분은 공부하러 집 떠나는 아들들에게 물질로 호강시켜 줄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험한 세파 속에서도 자신의 두 발로 서서 당당하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 그러나 이왕이면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민족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부모에게 자부심을 안겨 주는 것. 이 시대의 부모로서 그 이상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247~248)

 

이것이 16년 전 집을 떠나던 그에게 아버지의 입장에서 표명한 소망이었고, 그 점은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카이스트를 나온 그는 핀란드의 알토대학(Aalto University: 201011일에 설립된 핀란드의 대학교. 2010년부터 정부 주도 하에 핀란드의 산업경제문화를 선도하는 기존의 세 대학-헬싱키 기술 대학교헬싱키 경제대학교헬싱키 미술 디자인 대학교-을 합병하여 출범했음)에서 석박사학위를 받고, 몬트리올 대학교에서 박사 후 과정을 거친 뒤, 2016년 뉴욕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처음에 그가 영국이나 스웨덴 등의 전통 명문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으면서도 핀란드의 대학교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지만, 결국 묻지 않았다. 그의 고집을 알고 있었고, 그를 믿어야 한다는 나의 자기억제(self-control) 소신' 때문이기도 했다. 그 후 우연한 기회에 핀란드의 그 대학에서 유능한 교수의 지도로 인공지능분야를 공부한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인공지능이란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고, 그 때만 해도 내겐 뜬구름 잡는 듯한그 분야나 공부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카이스트에서는 물론 핀란드로 간 뒤에도 그는 부모에게 돈 한 푼 요구하지 않았다. 매우 궁금했지만, 그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핀란드는 학비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당시만 해도 우수한 핀란드 교육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파견되던 우리나라 시찰단들을 위해 그가 틈틈이 영어 통역 알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었다박사과정에 진학한 뒤에는 큰 규모의 핀란드 정부 장학금을 받았는데, 학비와 생활비는 물론 해외 컨퍼런스 참여에 따르는 모든 비용을 해결할 만큼 풍족한 것이었다. 그 장학금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비로소 나는 핀란드라는 나라를 존경하게 되었다. 외국인을 무료로 교육시켜주고 장학금까지 지급하면서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는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가능성 있는 젊은 인재라면 국적을 불문하고 국가가 나서서 양성해야 한다는 책임감이야말로 국가 이기주의가 그악하달 정도로 팽배한 지금의 상황에서 매우 숭고한 일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인구 550만의 작지만 강한 나라 핀란드를 존경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런 과정에서도 나는 그가 컴퓨터 계통을 전공한다는 사실 외에 구체적인 것을 알고 있지 못했다. 문외한이기도 하려니와 내 전공에 묻혀 살아 온 나로서는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야 어렴풋이 그가 당시에 갖고 있던 학문적 비전(vision)을 짐작하게 되었다. 석사논문(Improved Learning Algorithms for Restricted Boltzmann Machines/2011)과 박사논문(Foundations and Advances in Deep Learning/2014)에 그가 꿰뚫어 본 미래가 분명 담겨 있지 않은가! Dr. Juha Karhunen, Dr. Tapani Raiko, Dr. Alexander Ilin 등 유수 학자들의 지도 아래 그는 이미 8년 전부터 10년 이내에 핫이슈로 부상될 딥 러닝(deep learning)의 중요성을 알고 차곡차곡 준비해 왔음을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학위를 받고 핀란드를 떠난 그는 캐나다의 몬트리올 대학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자기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 요슈아 벤지오(Dr. Yoshua Bengio) 교수를 찾아간 것이다. 그곳으로 간 지 1년쯤 지났을까. 채용 공고에 응모한 미국과 영국, 스위스, 스코틀랜드 등의 유수 대학들에서 교수직 제의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저울질한 것은 미국의 뉴욕대학교와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였는데, 내가 보기에도 두 곳의 장단점은 분명했다. 오래도록 대학물을 먹은 나로서는 전통적인 명성과 함께 정년보장 직으로 채용되는 옥스퍼드가 나아 보였으나, 결국 그는 뉴욕대학을 선택했다. 그 대학에 딥 러닝 분야의 석학 얀 르쿤(Dr. Yann LeCun) 교수가 있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세계의 중심인 뉴욕, 경쟁과 자기혁신의 용광로인 미국 대학사회에서 맘껏 연구 활동을 펼치고자 한 그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잘은 모르지만, 캐나다로 건너 간 뒤부터 그의 학문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랩(lab)에 몰려드는 세계의 수재들을 지도하며 다양한 테마의 연구에 몰두하고, 한 주에 한 번씩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을 이끌어주며, 연간 십여 차례씩 국내외 컨퍼런스와 연구교류 여행을 해야 하는 간단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의 주된 관심사는 컴퓨터의 딥 러닝을 이용한 자연어 처리(natural language processing with deep learning)’인 듯하다. 그가 고안한 것으로 알고 있는 NMT(Neural Machine Translation/신경망 기계번역)는 이미 인공지능 컴퓨터 언어학습 분야의 핫 이슈가 되어 있고, 현재 그는 서로 다른 언어들 사이에서 통번역을 자유자재로 처리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메커니즘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

 

1년에 단 한 번, 체류기간은 단 1주일. 그는 여름 방학 초에만 부모가 있는 서울로 온다. 그 짧은 체류기간도 이곳저곳에서 요청한 강연 스케줄로 빡빡하다올해 강연들 중 핵심은 네이버(NAVER)의 커넥트(Connect) 재단에서 있었다. 등록자 200명을 위해 하루 네 시간 씩 이틀 동안 여덟 시간을 강의하고 온 그는 늘 그러하듯 담담했다. 강연료는 얼마나 받았느냐고 농담조로 묻자 천만 원이오. 그런데 모두 기부했어요.”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강연료 액수에 우선 놀랐고, 기부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는 그의 무심함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래도 태연한 척 어디에 기부했니?”라고 물으니, “여성 과학자들을 위해 소셜 벤처 걸스로봇(Girlsrobot)에 기부했어요.” 한다. “잘 했다고 대답은 하면서도 궁금증은 커졌다. 그의 전공 지식이 대체 무엇이관대 8시간 강의에 천만 원씩이나 받는 것이며, 그 돈을 한꺼번에 기부하는 배포나 철학은 또 뭐란 말인가. 궁금했으나,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아버지이지만, 가난한 나라의 국문학 교수가 그 내용을 자꾸만 캐묻는 것도 후학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었다. 이삼일 후 그가 떠나고 나서 우연히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동아일보의 놀라운 기사 한 건을 접하게 되었다.

 

donga.com

 

과학인 키워달라” 30대 과학자 통 큰 기부

 

조경현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

국내 강연료 1000만원 전액 쾌척

30세에 신경망 기계번역논문으로 딥러닝 분야 세계적 연구자 반열에

 

 

딥러닝 분야에서 학계의 주목을 받는 젊은 한국인 과학자가 국내 대중을 대상으로 연 강연의 강연료 전액을 여성 과학 기술인을 지원하는 국내 소셜 벤처에 기부해 화제다. 주인공은 조경현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33·사진). 그는 공동연구를 위해 방한한 이달 11, 12일 커넥트재단 초청으로 경기 성남시 네이버 본사 강당에서 딥 러닝을 이용한 자연어 처리강연을 했다. 8시간 동안 2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대형 강연이었다.

 

해외 석학을 초청한 자리인 만큼 강연료가 1000만 원에 이르렀지만, 조 교수는 예비 여성 과학기술인과 대학원생을 지원하는 데 써 달라며 전액을 소셜벤처인 걸스로봇에 쾌척했다.

 

조 교수는 평소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이공계 분야 여성의 활약과 진출이 아직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뉴욕대 학부에 개설한 머신러닝 입문과목은 정원이 70명이지만 이 중 여학생 수는 한 손에 꼽을 만큼 적다. 한국은 미국보다 상황이 더 열악할 것이라는 생각에 기부를 결심했다. 그는 미국에서는 아프리카의 과학, 공학 발전을 위해 교수들이 연중 몇 주씩 현지를 찾아가 강의를 하는 등 지역별, 인종별 격차를 줄이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미국 동료 과학자들의 이런 자세에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현재 구글 번역과 네이버 파파고 등이 채용 중인 신경망 기계 번역기술의 이론적 토대가 된 기념비적인 논문을 2014년 공동 저술해 학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정렬 및 번역 동시 학습에 의한 신경망 기계번역이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20일 현재까지 3674회 인용된 딥 러닝 분야의 베스트셀러로 꼽힌다.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80621/90681370/1#csidxc09a80b7f83fa0ea2f4c765d86099f0

 

 

 

, 그랬구나! 세상은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데, 나만 그의 성장을 모른 채 늘 어린 아이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1997년 첫 연구년을 받아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할 때, 초등학교 6학년인 그와 4학년인 둘째 아이에게 초급 영어 회화를 가르치며 초조해 하던 나를 떠올렸다. 이 어린 것들을 데리고 낯설고 물 선 미국 땅에서 무사히 1년을 지내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내게 주어진 천금 같은 기회를 살려 이 철부지들을 낯선 미국 땅과 문화에 잘 적응시킬 수 있겠는가. 가족들을 끌고 물을 건너는 가장에겐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미국에 건너가자마자 영어도 미국 생활 자체도 그들에게 대뜸 추월당한 나였다.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들을 앞서 갔지만, 바로 어제까지 그들은 내게 코흘리개 아이들일 뿐이었다. 올해 초 그는 미국의 블룸버그 통신이 선정한 ‘201850개 분야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에 들었다. 사실 놀라워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뭘 갖고 그러지?’라고 심드렁하게 생각한 나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새 그는 이미 남들이 인정하는 세계적인 학자가 되어 있었다. 논문의 인용지수나 강연파일들의 태그 건수가 내 상식을 초월하고, 미국 안에서는 물론 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도 그를 찾는 곳들이 많아 일일이 응대할 수 없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특히 인공지능이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 오늘날 그는 순풍을 탄 독수리처럼 하늘로 솟고 있다. 그러면서도 늘 겸손한 자세로 구부정하게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가 대견하다. 좀 잘 나간다고 까불다가 추락하는 세상 천재들의 말로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밤낮으로 노력하는 그를 보며 안심을 한다.

 

인천공항 출국장. 그를 탑승구로 들여보내고 나는 아내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지금 보니 저 녀석은 대양을 헤엄치는 고래이고, 나는 고향 마을 실개천의 붕어나 미꾸라지일세. 고래가 실개천으로 돌아올 이유도 없고, 붕어나 미꾸라지가 대양으로 나갈 이유도 없겠지. 나는 개천 속 붕어와 미꾸라지의 삶을 녀석에게 보여주며 항상 교만하지 않고 초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할 셈이네!”

 

제주도의 호텔 로비에서

제주도 목장에서 오른쪽부터  조경현, 백규, 임미숙, 김미언, 조원정, 조영빈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4. 13. 14:37

 

 

 


<딸린항에 도착한 핀란디아호> 


<딸린에서 만난 Stockmann백화점의 홍보단> 


<딸린에서 1박을 한 슈넬리 호텔> 


<호텔 창밖으로 보이는 기차 역> 


<St. Alexander Nevsky Cathedral>


<구시가지 들어가는 문> 


<성벽 밖에서 본 구시가의 건물들> 


<Cathdral of Saint Mary The Virgin> 


<딸린 항에서 바라본 St. Olaf's Church 원경> 


<성벽 위의 까페> 


<구 시가지 마켓 광장> 


<구시가의 한 건물> 


<해양박물관 소장품> 


<해양박물관 옥상의 등대> 


<St. Olaf's Church의 원경> 


<중세식 식당 Olde Hansa의 간판>


<Olde Hansa에서, 중세식으로 요리되었다는 돼지고기와 토끼고기>

 

 

발트해의 보석 에스또니아 딸린(1)

 

 

내 마음에 각인된 유럽의 추억 때문이었을까. 한동안 벽에 붙여놓은 유럽 전도를 보면서 화려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곳곳에 펼쳐진 옛 문화와 역사의 흔적들이 내 추억에 불을 붙이고 마음을 흔들어 놓기 때문이었다. 고스란히 남아있는 옛 역사의 자취들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그들이 부러울 뿐이었다. 몇 걸음만 옮겨도 기원전 로마시절의 문화유적들이 즐비하고, 지금도 중세 때의 돌집에서 살아가는 그들. 단 하루만이라도 그런 역사의 잔존물로 이루어진 보금자리에 내 천박한 의식이나마 편안히 누이고 발효시킬 수만 있다면, 황무지 같은 지식사회의 일원으로 내던져져 진보에 대한 아무런 희망조차 없는 지금의 처지에서 무슨 호사를 더 바란단 말인가.

 

그런 꿈을 꾸어오는 동안에도 에스또니아는 내 안중에 아예 없었다. 북유럽과 일의대수(一衣帶水) 발트해로 연결된 에스또니아의 딸린에 다녀오라는 헬싱키 지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에스또니아나 딸린이 지닌 의미에 대하여 그리 진지하게 알아보지 못한 건 전적으로 내 지적 천박성 때문이리라. 아침 일찍 헬싱키 항에 나가 수만 톤은 족히 될 정도의 거대한 여객선 ‘핀란디아(Finlandia)’에 오른 것도 그간의 내 편견에 대한 발 빠른 반작용에 지나지 않았다. 배 이름이 그랬던 만큼 배 앞머리에 새겨진 오선보 역시 시벨리우스의 악보에서 따온 소절일 것이다. 시벨리우스를 생각하며 쇄빙선이 그어놓은 뱃길을 따라 불과 80km 떨어진 딸린으로 건너가며 2시간 반이 넘는 동안 안개 자욱한 발트해를 느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

 

선상 공연 무대의 음악 소리와 관중들의 환호에 취한 채 두시간 반을 달리고 나서야 딸린 항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여객들 틈에 끼여 느릿느릿 밖으로 나오자 유럽의 여느 항구들과 마찬가지로 산덩이만한 크루즈선들이 정박하여 만남과 이별의 정취를 조금은 가볍게 날려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날카롭게 하늘을 찌를 듯 교회의 녹청색 첨탑이 솟아 있고, 그 밑으로 고색창연한 건물 지붕들이 나지막하게 열 지어 있는 모습이 눈 가득 들어왔다. 마음속에 갑자기 생겨난 묘한 기대와 함께 내 편견의 한쪽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첨탑이 바로 딸린의 전망대이자 랜드마크인 ‘성 올라프 교회[St. Olaf's Church]’였다. 그 첨탑을 통해 비로소 이곳에도 ‘알트슈타트(Altstadt)’[Old City 즉 ‘구시가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8년 전 5개월 동안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매혹되어 있던 그 ‘알트슈타트'가 이곳에도 있어 이 나라의 역사성과 문화적 수준을 증거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점심을 해결한 다음 즉시 알트슈타트의 탐사에 나섰다. 깨끗하게 보존된 중세 도시가 눈앞에서 약여(躍如)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성 밖의 신시가지와 행복한 조화를 이루며 펼쳐져 있는 것이 바로 딸린의 알트슈타트였다. 알트슈타트 안에서 방위마다 거의 정확하게 솟아 있는 거대한 교회들, 칼날 하나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빈틈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건물들, 거미줄처럼 4통8달된 골목길들, 숨듯이 곳곳에 틀어박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공공기관, 각 급 학교, 박물관, 약국, 서점, 문방구, 커피 점, 제과점, 갤러리, 꽃 가게, 레스토랑, 선물가게, 패션가게, 이발소 및 미용실 등등.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삶의 충실한 현장이었다. 그 뿐인가. 사람들이 모여 축제를 벌이며 친교를 나누었음직한 작고 큰 광장들도 곳곳에 널려 있었다. 교회의 경우 이르게는 12~3세기에 지어진 것들도, 늦게는 18~9세기에 건축된 것들도 있는데, 그 규모와 아름다움이 나그네의 정신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루터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 대충 헤아려도 50여에 달하는 이 거대한 교회들을 대체 누가 다 세웠으며, 그 공간을 누가 있어 다 채웠단 말인가.

 

***

 

4만 5천여 평방킬로미터의 면적으로, 작지만 국토의 절반 이상이 숲으로 덮여 있고, 3500여㎢에 달하는 큰 호수[페이푸스(Peius)]를 갖고 있는 아름다운 에스또니아. 라트비아 및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독립을 지키고 정체성을 지키려는 투쟁의 과정에서 소련과 나치 독일 등 주변의 강국들에게 심한 박해를 받아온 나라다. 1920년 소련과의 평화협정서는 휴지조각이 되었고, 결국 1939년 독소불가침 조약에 의해 소련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독립을 완전히 상실한 채 소련의 한 부분으로 예속된 비운의 나라였다. 그 뿐인가. 스탈린에 의해 극동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었듯이 에스또니아 사람들 역시 강제이주의 쓰라림을 맛보게 된 것. 1920년 이후 강제이주 시기까지 50여만 명의 인구가 학살을 당했으니, 그 사실이 현재 인구가 150만 명에 불과하다는 점의 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어쨌든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의 페레이스트로이카와 자신들의 노력에 힘입어 1991년 8월 결국 독립을 쟁취했고 UN에 가입했으며, 2004년에는 EU에 가입함으로써 이 지역 강소국의 하나가 되었으니, 시련과 고통만이 한 국가와 민족을 강하게 만든다는 역사의 원리를 보여준 사례라고나 할까. 그 적은 인구 150만도 에스또니아인․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 등으로 나뉘며, 수도 딸린의 인구 또한 44~5만 정도라 하는데, 나라 전체로 따져도 기껏 우리나라 대전광역시의 인구와 맞먹는 정도가 아닌가. 그 옛날엔 이보다 덜하면 덜했지 더 많았을 리는 결코 없었을 것이니, 무슨 수로 이런 대규모의 교회들을 채웠던 말인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계속>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4. 11. 17:31

 


<땀뻬레 시가지>


<땀뻬레 시가지>


<땀뻬레 상설시장>


<땀뻬레 상설시장의 육류가게>


<땀뻬레 상설시장의 빵가게>


<핀레이슨 산업단지>


<핀레이슨 산업단지 주차장 표시 및 구역도>


<핀레이슨이 지은 교회>


<핀레이슨 산업단지 내 신발가게>


<땀뻬레 핀레이슨 저택>


<하메 성 입구>


<하메 성에서 조경현과 백규>


<하메 성 안의 우물> 


<하메성 안의 채플>



<하메성 안에서, 임미숙과 조경현> 


<하메 성에서 만난 악사> 



<다시 헬싱키로>


<핀란드의 국민적 영웅 칼 구스타프 만네르하임 장군 상>


<핀란드의 루터교회>

 

 

산업화, 외세와의 투쟁, 그리고 미래의 꿈

 

 

뽀리(Pori)의 아름다운 추억을 마음 가득 충전한 뒤 다시 향한 곳은 헬싱키. 이번 일정의 막바지에 가까워진 것이다. 바쁜 일정에서 10여일을 덜어 다른 나라의 핵심 지역들을 순력(巡歷)하는 건, 우리 나름의 ‘장정(長征)’일 수 있었다. 아랫 날씨는 쌀랑했으나, 위에서는 태양이 빛났다. 로바니에미 인근과 달리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에 차들이 제법 많았다. 아직도 몸서리쳐지는 추위 속에서 허우적대는 북쪽과 달리 이곳 길가의 자작나무들에는 녹색이 돌기 시작했다. 국토를 따스하게 감싸고 있는 나무들이 봄볕의 세례 아래 몸을 풀기 시작한 것이다.

 

***

 

규모로 보아 핀란드 제2의 도시 땀뻬레(Tampere)에 들렀다. 네시 호수와 퓌헤 호수를 잇는 작은 물길이 지나는 항구도시. 방직공장, 피혁공장, 제재소, 각종 기계공장, 아이티 업체 등 내용은 공업 중심의 현대 도시였으나, 모든 공장들은 자연환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화석연료 대신 풍부한 수력을 이용하기 때문일까. 대기오염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 곳이었다. 18만에 육박하는 인구도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사는 관계로 도심에서 약간의 인파를 목격할 수 있을 뿐 전반적으로 한산한 느낌을 받는 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였다.

 

맨 처음 찾은 곳은 이 도시의 상설시장. 각종 먹거리 중심의 살아 있는 생활문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빵과 생선, 각종 패션용품 등 모든 것들이 공존하며 그들의 풍요로운 현재를 증거하는, 생생한 공간이었다. 우리가 어딜 가나 들르는 ‘과거 혹은 죽은 자들의 박물관’ 아닌 보통 사람들이 등장하여 보여주는 ‘지금 혹은 산 자들의 박물관’이었다. 그 다음으로 찾은 곳이 도심의 큰 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섬유재벌 핀레이슨(Finlayson)의 산업단지. 그는 가고 없었지만, 그가 살아가던 저택도 신을 만나던 교회도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고, 그의 꿈을 구현하는 각종 업무 공간들이 이 시대 산업화의 인력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곳이었다. 그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매장에서는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핀레이슨 디자인의 각종 생활용품들이 팔리고 있었다. ‘디자인 천국’으로 자처하는 핀란드 인들의 자부심, 그 근원을 알려주는 곳이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핀레이슨 산업단지였고, 그곳을 품고 있는 공간이 땀뻬레였다.

 

***

 

땀뻬레로부터 40여분을 달린 뒤, 굳건한 핀란드 국방의지의 상징적 표상 ‘하메 성(Häme Castle)’을 만났다. 지배세력인 스웨덴에 의해 13세기 후반쯤 지어진 중세의 성으로, 최근까지 보수(補修)를 거듭해 온 역사적 공간이었다. 차에서 내려 보니 육지와 연결된 호수 안의 섬이었다. 중세 전반만 해도 이곳에는 여러 개의 섬들이 있었고, 스웨덴 지배 이전 즉 가톨릭이 들어오기 이전에는 이 지역의 핀족 원주민들에 의해 공동묘지나 시장터 등으로 사용되던 곳이라 한다. 지금은 껍데기만 남아 있지만, 단단한 암석과 벽돌들을 여러 겹으로 쌓아 만든 성벽은 나그네로 하여금 다채로운 ‘역사적 상상력’을 발동하게 했다.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투자했을 많은 노력들이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여울을 뛰어넘게 했다. 그들이 추위와 배고픔, 외적의 약탈에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을 성 밖의 백성들을 얼마나 생각했을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두터운 성벽 안에서 자신들의 영화가 언제까지나 유지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을 그들의 우매함이 서글퍼지는 순간이었다. 화려한 카펫에 각종 명화들로 장식된 빛나는 내부, 따뜻한 벽난로와 고량진미의 행복 속에 펼쳐지는 화려한 무도회, 성 밖 전투에서 한 팔을 잃고 돌아온 기사에게 건넸을 형식적인 위로의 말 한 마디, 추수 때 들어온 세곡의 부족을 질책하던 노여운 음성 등등. 그 공간엔 역사의 환영(幻影)들이 끝없이 명멸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피지배의 질곡에서 고통 받다가 가까스로 독립하여 민족적 자존심을 세워가고 있는 핀란드 인들의 영욕(榮辱)이 나그네의 눈앞에서 파노라마로 재현되고 있었다. 바로 그 역사의 질곡을 확인하기 위해 여섯 시간 시차의 땅에서 9시간 비행의 고통을 참아가며 이곳에 왔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인가.

 

***

 

다시 돌아온 헬싱키. 겨울에 내려 쌓인 눈은 녹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바람결이 찬 걸로 미루어 이 눈이 따스하고 달디 단 봄물로 흐르기까지 아마 두어 달은 족히 걸리리라. 헬싱키 현대 미술관 KIASMA 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칼 구스타프 만네르하임 장군 곁을 지나며 핀란드 인들의 정신적 지표를 상상한다. 핀란드 내전과 겨울전쟁 등에서 소련과의 전쟁을 이끌어 많은 전과를 올린 만네르하임 장군. 결국 약소국이었던 핀란드의 패배로 끝나긴 했지만, 만네르하임이 보여준 불굴의 군인정신이야말로 오늘날의 핀란드를 이룬 초석이었을 것이다. 만네르하임 장군 곁에서 하룻밤을 묵고 내일은 에스또니아(Estonia)의 딸린(Tallin)을 향해 발트해를 건넌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4. 10. 15:23

 


<뚜르꾸 대성당> 


<뚜르꾸 대성당의 천정과 파이프 오르간> 


<뚜르꾸 대성당의 제단> 


<뚜르꾸 대성당 박물관의 피에타상> 


<뚜르꾸 성> 


<올드 라우마(Old Rauma)의 인포메이션 센터가 들어 있는 고건물>

 
<라우마의 박물관>


<라우마 박물관의 자수 도구와 작품> 


<라우마 박물관의 요람> 


<라우마의 마렐라(Marela)> 


<마렐라의 서재> 


<마렐라에 전시된 옛날 교과서>


<라우마의 성 십자가 교회>


<라우마 성 십자가 교회 성전> 


<얼어붙은 Yyteri 해변에서 임미숙, 조경현 모자> 


<레포사아리(Reposaari)-조선소의 흔적> 


<레포사아리(Reposaari)의 루터 교회> 

 

 

교회와 고성(古城), 옛 도시에 살아 숨 쉬는 핀란드 정신을 찾아

 

 

 

 

라우마(Rauma)를 거쳐 뽀리(Pori)까지 가는 날. 그간 끝없이 펼쳐지는 수해(樹海)와 잘 보존된 자연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핀란드 인들의 행복을 훔쳐 보기 위한 일정의 연속에 지루해진 것일까. 방향을 약간 틀어 역사와 정신의 자취를 느끼기로 했다. 호텔에서 이른 조반을 마친 우리는 카우 광장의 동쪽 강변에 서 있는 뚜르꾸 대성당을 찾았다. ‘핀란드 루터 교회의 어머니’격인 뚜르꾸 대성당. 14세기에 착공하여 16세기에 완공되었다니, 200년 대역사(大役事)의 산물이 아닌가? 그로부터 5세기. 세월의 강을 묵묵히 건너가고 있는 성당은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며 녹청으로 아로 새겨진 시간의 허물을 뒤집어 쓴 채 고고하게 서 있었다. 정문 앞에 세워진 초대 비숍 미카엘 아그리콜라(Mikael Agricola) 상 주변을 쓸고 있던 성당 관리자로부터 자부심 묻어나는 설명을 들으며 성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성전 안 곳곳에 다양한 채플들[Tigerstedt-Wallenstierna Chapel/Mayor's Chapel/Chapel of All Souls/Gezelius Chapel/Tavast Chapel/Kijk Chapel]이 마련되어 있었고, 연륜과 달리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스테인드 글라스, 하얗게 빛나는 파이프 오르간 또한 강한 인상을 주었다. 분명 핀란드 정신과 역사는 이곳 뚜르꾸 대성당에 압축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이 아우라 강 하구의 뚜르꾸 고성. 600여년 핀란드를 통치하던 스웨덴이 세운 성채로,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외관을 갖고 있었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소박하면서도 견고한 인상을 갖추고 있어 몇 년 전 둘러본 슬로바키아의 오라바 성과 흡사한 모습의 요새였다. 그리고 그것은 핀란드 인들의 아픈 과거가 새겨진 역사의 물증이기도 했다.

 

***

 

뚜르꾸를 떠나 30분쯤 달렸을까. 옛 도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갖춘 라우마[Vanha Rauma/Old Rauma]가 눈앞에 닥친다. 199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통째로 등재된 ‘올드 라우마’. 라우마의 알트슈타트(Alt Stadt)는 걸어서 한 시간 안에 섭렵할 수 있을 만큼 작았지만, 상가와 주거를 겸한 600여 채의 목조주택에 8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중세 도시였다. 양파 모양 첨탑의 박물관, 성십자가 교회(Church of the Holy Cross), 19세기 생활사를 보여주는 마렐라(Marela) 등이 우리가 꼽은 이 도시의 핵심들이었다. 걸을 때마다 마룻바닥의 삐걱대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긴 했으나, 박물관 안에는 옛 주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정겨운 물건들이 그득했다. 이 박물관이 제공하는 감동의 포인트는 수백 가닥의 미세한 실을 바늘에 꿰어 짜 나가는 레이스 예술이었다. 여인들의 섬세한 손가락이 날듯이 오가며 한 땀 한 땀 짜 나아가는 환영(幻影)이 유리 케이스에 얼른거렸다.

 

다음으로 찾은 곳이 마렐라. 마렐린[Abraham Marelin]이 18세기 후반에 살았던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그들이 남긴 생활사의 자료들을 전시한 곳이었다. 옷, 책, 책상, 타자기, 장신구, 교과서, 요람, 침구, 그릇 등등 지난 시대 이곳 주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거기서 몇 골목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니 성십자가교회가 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뜰에는 아씨시의 프란체스코 성인이 비둘기를 안은 채 교회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터 교회로 바뀌었지만, 원래 15세기에 프란체스코 수도원으로 세워졌던 곳이다. . ‘성삼위 교회(Church of the Holy Trinity)’가 1640년의 화재로 파괴된 뒤 루터 교회로 되었으며, 작년에 500주년 기념식을 가졌을 만큼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였다. 정갈하면서도 고요한 성전에 들어가 앉았을 때 비로소 지금껏 지속되는 올드 라우마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간의 격랑에 휩싸여 사라지는 것이 역사는 아니며, 삶의 모습이 바뀐다하여 사라지는 게 정신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올드 라우마는 성십자가 교회의 고적한 성전, 그 울림을 통해 나그네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

 

올드 라우마로부터 4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이 바로 지금 이곳 뽀리(Pori)다. 라우마와 마찬가지로 평원을 그득 채운 목조주택들이 햇살에 산뜻한 모습을 드러낸 곳. 호텔이 여의치 않아 펜션으로 개조한 뽀리 주민의 집 한 채를 빌려 하루를 묵게 된 것이다. 정갈하게 꾸민 침실과 주방, 화장실 등에 선진국 핀란드 인들의 안목은 묻어나고, 말없는 주인장의 미소에서 핀란드 인들의 정이 피어난다. 오후 늦게 찾은 핀란드의 최장[6km] 모래해안 Yyteri. 트레킹이나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즐기는 핀란드 인들만 간혹 오갈 뿐 꽁꽁 얼어붙은 바닷가의 텅 빈 모래사장엔 얼음만 가득하고, 모래사장을 출발 자작나무 숲을 지나 도착한 레포사아리(Reposaari)의 해변에는 옛 조선소의 영광을 증언하는 스크류 하나만이 훈장처럼 내 걸려 찬 기운에 떨고 있었다.

 

그렇다. 역사와 정신은 함께 가는 것이다. 우리가 짚어나가는 곳곳에 그 둘은 손에 잡힐 듯 배어 있었다. 그것들을 바탕으로 핀란드의 정신이나 역사의 속살을 느껴보려는 우리가 만용을 부리는 것일까. 대강 지나며 곁눈질로 바라보는 우리의 여행을 ‘장님이 코끼리 더듬듯 한다’는 이유로 웃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국 맛을 알기 위해 한 솥의 국을 모두 마실 필요가 있겠는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4. 9. 13:38

 

 


<올해 6월에 개장하는 로바니에미의 산타 파크> 


<산타마을 매장에서> 


<산타마을에서> 


<산타마을에서> 


<산타 파크에서>


<산타마을에서> 


<각국의 시민들이 산타에게 보낸 편지들, Etela-Korea, South Korea> 


<지도에 표시된 북극권> 


<산타마을의 위도> 


<로바니에미에서 헬싱키 가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핀란드 산하>  


<뚜르꾸 시가지> 


<뚜르꾸의 아우라 강> 


<뚜르꾸 시립도서관> 


<뚜르꾸 시립도서관> 


<뚜르꾸 시립도서관> 


<뚜르꾸 시립도서관>


<뚜르꾸 러시아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정문에 놓인 종> 
<뚜르꾸 Art Museum> 


<뚜르꾸 Art Museum>에서 


<뚜르꾸 Art Museum에 내걸린 작품> 


<뚜르꾸 Art Museum으로부터 시내를 관통하는 도로> 


<Art Museum hill에 위치한 레닌 흉상-레닌 망명시절의 집터>


                                                                             <4월 8일 1박을 한 래디슨 호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든 산타마을, 영욕의 역사 현장 뚜르꾸(Turku)

 

 

사흘간의 로바니에미 체류를 마무리하기 위해 산타마을에 들렀다. 산타클로스! 꿈과 기대로 아이들을 설레게 하여 어렵던 시절을 무사히 넘기게 했던 환상 속의 존재였다. 산타를 대망(待望)하던 아이들이 자라나 지금 세계 곳곳의 중추로 자리 잡고 있으며, 또 그들의 아이들이 산타를 기다리며 자라고 있다. 누구는 만개(滿開)한 상업정신의 대표 장소로 산타마을을 꼽지만, 마냥 비판만 할 일은 아니다. 찬 공기 넘나드는 전나무와 소나무, 자작나무들이 주변을 둘러 있고, 단 몇 달을 뺀 나머지 기간엔 늘 눈과 얼음에 덮여 있는 이곳. 그나마 산타 할아버지의 인자한 얼굴을 형상하는 것 외에 무슨 희망이 있었을까. 그 환상을 세계 아이들과 공유하며 그들과 함께 성장기의 고뇌들을 넘어 미래에의 꿈과 희망을 갖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상업화된다 한들 무슨 상관있단 말인가. 가게 진열대들을 그득 채우고 있는 산타 관련의 온갖 캐릭터 상품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할만한 각종 동물 형상들과 의상들, 산타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 각국에서 보내온 크리스마스 카드들[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보내온 카드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미리 써서 보낼 수 있다는 우체국 서비스가 재미있었다. 이곳을 여행하는 사람이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보낼 카드를 미리 써서 부치면 산타클로스 우체국 마크를 찍어 크리스마스 즈음에 전달해준다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발상들에 잠시 세상의 번뇌를 잊어보는 순간이었다.

 

북위 66도 32분 35초. 북극의 추위에 다져진 때문일까. 라플란드 지역의 핀란드인들은 다소 무뚝뚝한 표정 속에 성실하고 다감한 내면을 감추고 있었다. 형상을 가진 모든 것들은 얼어붙어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따스한 난로가 하나씩 갖추어져 있음을 여행 중 여러 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추위 속에서 빛나던 그 난로 하나를 마음으로 얻은 우리는 찾아온 길을 되짚어 헬싱키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구도(舊都) 뚜루꾸로 가기 위해서였다.

 

***

 

예상했던 대로 뚜르꾸는 참하고 한적한 도시였다. 대(大) 화재로 모두 부서진 뒤, 1800년대에 새로 지었다는 도심의 건물들은 나름대로 고풍(古風)을 간직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러시아의 쌩뜨 뻬쩨르부르그나 동유럽 도시들에서 가졌던 느낌이 되살아났으나, 그 이유를 딱히 짚어낼 수는 없었다. 호텔[Radisson] 뒤편의 아우라 강 (Auranjoki) 도 꽁꽁 얼어 레스토랑이나 까페로 쓰이는 큰 배들이 제자리에 묶여 있지만, 넘실대는 여름날의 푸른 물 위에 불야성을 이룰 모습들을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강 건너에 높은 언덕 중턱에 박물관이, 그 너머엔 뚜르꾸 대학이 있었으며, 자그마한 옛 성도 있었다. 아우라 강을 따라 발트 해로 연결되는 뚜르꾸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한 지배자 스웨덴 인들과, 스웨덴을 멀리 하려 헬싱키로 통치의 중심을 옮겨버린 또 다른 지배자 러시아인들의 갈등이 눈에 보이듯 도시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최신식 건물에 따스하고 안락한 분위기였다. 독서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무엇보다 몇 권의 책을 안고 들어와 반납한 뒤 새로 대출해가는 점잖은 신사들의 모습이 이채로웠다. 아마 퇴근 후 들른 것이리라. 우리나라에서 퇴근 후 몰려드는 직장인들 때문에 예산을 들여 도서관을 증축할 수밖에 없다는 소식이 각 지방자치단체들로부터 들려오는 날은 그 언제일까. 우리의 진정한 르네상스는 그런 날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점을 이곳 뚜르꾸의 시립 도서관에서 깨달았다.

 

***

 

도서관을 나와 ‘손바닥 만한’ 뚜르꾸 시가지를 체험하는 도중 언덕 위에 우뚝 선 ‘Art Museum'을 만났다. 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는 없었으나, 건물의 모습은 물론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위치가 범상치 않았다. 뮤지엄이 서 있는 언덕 아래로 시원하게 뚫린 대로(大路)가 그대로 도시를 관통하여 아우라 강을 자르며 맞은편 언덕으로 이어지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란 건 그 뮤지엄 바로 밑에 레닌의 흉상이 서 있는 일이었다. 아, 그곳이 바로 10월 혁명 이전 몇 차례의 거사에 실패하여 짜르에게 쫓긴 레닌이 망명생활을 하던 곳 이었다! 이상한 열기가 몸에 전해진다 싶었는데, 혁명가의 열정이 아직도 살아남아 벌떡거리는 박동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혁명의 와중에 유일하게 적군이 백군에게 패한 곳이 핀란드였는데, 레닌이 바로 그곳에 망명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어, 귀국하면 그 역사를 다시 들춰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핀란드와 가까운 곳에 레닌그라드[현재 쌩뜨 뻬쩨르부르그]가 있고, 도시 전체에서 미미하나마 러시아나 동유럽의 기풍을 감지한 내 첫 느낌이 그 사실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섣부른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내일 이곳에서 가장 크다는 교회와 박물관을 찾아 이 느낌의 합리성을 따져 보기로 한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4. 8. 13:24

 


<로바니에미에서 께미야르비로 가는 길>


<께미야르비의 루터 교회>


                                                                          <께미야르비 루터 교회의 내부>


                                                            <코르타바아 전망대에 오르다가 눈길에 빠져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는 모습>


<연락을 받고 트랙터를 몰고 오는 현지 주민>


                                                                          <차를 살펴보는 현지 주민>


 <트랙터에 끈을 묶고 차를 구해내는 현지 주민>


<코르타바아 전망대에서 조경현과 임미숙 모자>


                                                              <뽀시오 가는 갈림길>                             
                                                                         
                                                                   <리시툰투리 국립공원의 이정표>


 <리시툰투리 국립공원, 눈과 얼음에 뒤덮인 나무>


< <리시툰투리 국립공원, 눈과 얼음에 덮인 나무>


                                                                     <리시툰투리 국립공원, 눈과 얼음에 덮인 나무들>

 

 

 

께미 야르비와 뽀시오의 설경, 그 가르침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든든히 마친 다음, 사흘째 핀란드 속살 탐험 길에 나섰다. 눈 덮인 300km 여정이니 만만치 않은 길이었다. 우선 향한 곳은 로바니에미 동북방으로 100km쯤 떨어진 인구 8천명의 소읍 께미야르비. ‘야르비’란 호수란 뜻인데, 께미 강이 발원되는 곳을 말한다. 과연 꽁꽁 얼어붙은 엄청난 호수가 자그마한 도회를 감싸고 있었다. 도시 한복판에 하늘을 찌르 듯 루터교회가 서 있었다. 마당에 들어서니 마침 오전 예배가 끝났는지 신자들이 몰려 나왔고, 멈칫거리는 우리에게 어떤 아주머니가 손짓으로 들어오라신다. 성전은 과연 깨끗하고 넓었으며, 성단 뒤 벽 중앙에 예수고상이 걸려 있었다. 젊은이들이 꽤 여럿 보였는데, 중․남부 유럽에서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교회를 뒤로 하고 4~5km쯤 떨어진 코르타바아 나카또르니(Kortavaa nȁkȍtorni) 전망대로 향했다. 눈 다져진 길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자 바닥의 눈은 더 두꺼워졌고, 아차 하는 순간에 차가 눈에 빠지고 말았다. 팬벨트 타는 냄새가 진동하도록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대며 수렁으로부터 빠져 나오려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렌터카 사무실도 전화를 받지 않아 망연자실해 있는 순간, 거짓말처럼 점잖은 노부부가 산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마을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주었다. 잠시 후 마을 주민 한 분이 트랙터를 몰고 올라왔다. 영어가 한 마디도 통하지 않는 그와 손짓 발짓으로 소통하며 어려움 끝에 차를 구해낼 수 있었다. 눈구덩이에서 무사히 빠져 나온 뒤 한사코 사양하는 그에게 가까스로 얼마간의 수고비를 건넬 수 있었지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고마움이었다. 우리는 차가운 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끈을 묵고 비좁은 길에서 커다란 핸들을 조작해가며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는 그를 보며 핀란드 인들의 순박하면서도 고운 심성을 경험하게 되었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어려운 순간에 말 한 마디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라도 선뜻 나서서 도와야 한다는 가르침을 ‘도움 받는 입장’에서 확인하게 되었다.

 

***

 

전망대에 올라 둘러 본 께미 야르비는 온통 흰 눈에 덮여 있었다. 보이는 건 띄엄띄엄 몇 채의 집들과 나무들이 전부였다. 색깔만 달랐다 뿐, 흡사 온천지가 물에 잠겨 사이사이로 몇 채의 가옥들만 간신히 모양을 드러낸 우리네 장마철의 모습이었다. 북극의 찬 기운이 여기서 만들어지는 듯 세상은 꽁꽁 얼어붙어 있는데, 유독 나무들만 꿋꿋하게 푸름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필시 신의 조화일 자연의 위력 앞에서 나약한 인간의 자리는 어디쯤일까.

 

***

 

눈 길 기백 리를 달려 도착한 뽀시오(Posio)의 리시툰트리 국립공원(Riisituntri National Park)에서 우리는 자연 질서의 엄정함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끝없이 평원만으로 이어지는 핀란드 국토 가운데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한 이 공원에서 자연의 위력과 사투를 벌이다가 살아남거나 죽어가는 생명의 진실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전나무들이 도열한 사이로 눈이 수북 쌓인 산을 올랐다. 적자생존 원리의 발현일까. 눈밭에는 세 종류 나무들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말라죽은 나무들, 아직 눈에 갇혀 가쁜 숨을 몰아쉬는 빈사 상태의 나무들, 생생하게 살아 있는 나무들. 이번 겨울[이곳은 아직 겨울이 진행중이다!] 이곳에 엄청난 눈이 쏟아졌었나 보다. 어떤 나무는 그야말로 눈으로 뒤덮여 나뭇잎 하나 밖으로 내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쩜 그 속에서 내내 비명을 지르다가 벌써 숨이 끊어졌을지도 모르지만, 힘없는 나그네로서 도움을 줄 수 없는 현실이 야속했다. 설사 한 그루의 나무에 작은 도움을 준다 해도, 온산에 널려 있는 생명의 아우성들을 어찌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무를 옥죄고 있는 눈 더미를 가만히 관찰해 보았다. 겉만 보드라운 눈일 뿐, 속은 단단히 얼어 있었고, 나뭇잎들도 줄기도 모두 함께 얼어붙어 있었다. 얼음 녹기만 기다리던 나무들은 결국 질식해 숨지고, 나무가 숨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얼음과 눈은 결박을 풀어 나무들의 초라한 나신을 만천하에 드러내 놓는 것 같았다. 그보다 형편이 나은 것들은 가지 끝, 옆구리 등 일부에만 눈과 얼음덩이들을 달고 살그머니 소생의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 이 언덕에 다시 쏟아져 내리는 눈만 없다면, 이들은 6월쯤 찾아올 환희의 계절에 새로운 가지와 잎을 피우리라.

 

그리고 마지막 부류. 당당하게 가지와 잎들을 하늘로 뻗어 올리고 선 나무들이었다. 그들의 오연한 패기가 교회의 종소리처럼 설원에 흘러 내렸다. 범접할 수 없는 승자의 힘과 기개는 죽은 자들의 침묵과 대비되며 바람마저 숨을 죽인 산등성이에 절묘한 하모니를 조성해놓고 있었다.

 

***

 

그러나, 보라. 산 자가 언제까지 산 자일 것이며, 죽은 자 또한 영원히 죽은 자일 것인가. 새로운 계절 칼바람이 불고 눈발과 얼음이 엄습하여 산 자들의 의지를 꺾어 놓을 날도 있을 것이다. 산 자들의 기세에 눌려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한 경우도 있을 것이고, 눈과 얼음의 결박에 질식되는 날도 있을 것이다. 어제까지의 영광이 오늘부터 오욕으로 치환되는 일이 이 공간의 생명들 사이에서도 비일비재할 것이니, 어느 한 순간인들 오만에 사로잡힐 수 있으랴. ‘말없는 웅변’으로 보여주는 죽은 자들의 비극이야말로 이 땅의 산 자들에 대한 최고의 가르침이 아닐까. 핀란드 라플란드, 그 죽음과 삶의 향연 앞에서 전쟁 같은 삶터를 잠시 탈출해온 동쪽의 나그네 백규는 새삼 옷깃을 여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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