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8. 4. 20:08

 


무스코기 초입의 이정표

 

 


무스코기 초입에서 만난 인포메이션 센터

 

 


아미쉬 레스토랑의 표지판

 

 


아미쉬 레스토랑의 정갈하고 소박한 음식

 

 


아미쉬 레스토랑의 내부

 

 


아미쉬 버터 및 치즈 광고판

 

 


무스코기 네이션의 문장(紋章)

 

 


연합 인디언 네이션의 문장

 


무스코기 네이션의 국기 

 

 


삼강박물관(The Three Rivers Museum)에서 큐레이터들 및 보안관과 함께

 

 


보안관의 현란한 '권총 돌리기'

 

 


삼강박물관의 생활사 자료

 

 

 

 

크릭(Creek) 족의 꿈과 현실을 찾아

 

 

 

2014224일 아침 8시 오클라호마시티 윌 라저스 공항[Will Rogers World Airport]’ 발 유나이티드 아메리카 항공편으로 시카고 오헤어 공항으로 이동, 한국행 아시아나에 몸을 실으면 미국 생활은 끝이었다. 그래서 이 땅에 남은 미련을 남김없이 태우고자 21-22일 크릭 인디언들의 집거지를 거쳐 출발 전날 오클라호마 시티에 입성하기로 했다. 무스코기(Muscogee)와 오크멀기(Okmulgee)에 모여 산다는 크릭 인디언들을 만나기 위해 털사(Tulsa) 방향의 동쪽 우회로를 택하기로 한 것이다.

 

체류하는 동안 오클라호마에 거주하는 39개 인디언들 가운데 겨우 10여개 부족들을 접한 우리였다. 10여개 부족들 가운데는 이른바 문명화된 다섯 부족들[The Five Civilized Tribes: 체로키(Cherokee), 치카샤(Chickasaw), 촉토(Choctaw), 크릭(Creek/Muscogee), 세미놀(Seminole)]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오클라호마 동쪽의 크릭은 마지막 코스로 남겨 두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인들은 이 다섯 부족들을 ‘Civilized Tribes’로 부르고 있었으나, 그동안 우리는 그 말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civilized’문명화된으로 번역할 경우, 그동안 우리가 만난 여타의 인디언들은 뭐란 말인가. 우리가 보기에 그들 역시 이미 문명화된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훌륭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고 있는 OSU 역사과의 모제스(Dr. L. G. Moses) 교수에게 물었더니, 이 다섯 부족들이 식민시대나 초기 미 연방시대에 앵글로 색슨 계열 정착자들의 생활방식이나 관습을 수용, 그들과 선린관계를 맺어오면서 문명화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라고 했다. 내가 그 말을 미국화로 바꾸어 이해해도 무방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221. 겨울날씨치곤 쨍쨍하게 맑고 온화했다. 이 땅을 떠나기로 되어 있는 24일까지 만 3. 하룻밤은 인디언 구역에서, 나머지 이틀 밤은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보내기로 했다. 짐가방들을 트렁크에 때려 실은 우리는 렌터카를 몰고 학교를 한 바퀴 돈 뒤 177, 412, 44번 하이웨이 등을 번갈아 타면서 무스코기로 달렸다. 털사로부터 한 시간쯤이나 달렸을까. 무스코기 초입의 길가에 자그마한 관광안내소[Muskogee Tourist Information Center]가 나타났고, 그 건너편에 참한 식당 하나가 숨듯 서 있었다. 이곳에서 아미쉬 레스토랑[Amish Restaurant]’을 만나다니! 행운이었다. 전통 기독교 교회공동체 아미쉬. 메노파(Mennonite) 교회들과 비슷하지만 다른 집단이다. 그들은 스위스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재세례파(再洗禮派)’[16세기 종교개혁의 급진적 좌파 운동 집단으로서 유아세례를 부정, 죄와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성인세례를 받는 것만이 타당한 세례라고 보았음]와 근원을 공유한다. 단순한 생활, 검소한 복장, 문명과 기술의 이기(利器) 등을 기피하는 그들이었다. ‘목마른데 옹달샘 만난 격으로 여기서 그들이 운영하는 식당을 만나게 된 것. 앤틱 풍의 인테리어가 약간은 생소했으나, 벽면 가득 옛날 장식품들이 편안해 보였고 이들만의 풍미(風味) 또한 일품이었다.

 

다시 관광안내소로 돌아와 체구 좋은 중년 여성 자원봉사자의 친절한 설명을 들었다. 무스코기라 지칭하기도 하는 크릭 족은 오클라호마 주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현재 이곳 외에 앨라배마조지아플로리다 등에도 분포되어 있었다. 우리가 이미 만나 본 세미놀 족 역시 이들처럼 무스코기 어[크릭 어]를 사용하는, 가까운 부족이었다. 원래 무스코기 족은 오늘날 테네시조지아앨라배마 주에 걸쳐 흐르는 테네시 강을 따라 건축물을 쌓았던 미시시피 문명의 후예로 추측된다. 미시시피 문명을 이룬 사람들 가운데 최대의 공동체는 카호키아 토성터[Cahokia Mounds]’로부터 나왔으리라 추정되는데, 이미 그 시대에 계급화된 사회나 상속이 이루어지던 종교적정치적 집단이 생겨나 미국의 중서부와 동부를 800년부터 8세기 가까이 지배하고 있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무스코기 족이 바로 그 후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초기에 개척자로 등장한 스페인 사람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고, 그 가운데 탐험대를 이끌고 나타난 스페인 사람 데소토와 마빌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데소토의 탐험대가 퍼뜨린 전염병으로 많은 인디언들이 죽어 인구가 급격히 감소되었고, 결국 미시시피 문명도 붕괴되기에 이르렀으나, 살아남은 인디언들 가운데 무스코기 어를 쓰는 사람들이 무스코기 부족 혹은 무스코기 부족 연합으로 다시 뭉치게 된 것이다.

 

1866년 새 정부를 세운 크릭 족은 오크멀기를 수도로 정했고, 1867년에 세운 의사당을 1878년엔 더 크게 확장했다. 우리가 돌아본 크릭 네이션 의사당은 국가의 역사적 랜드마크로서 크릭 족 의사당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크릭 족은 번영기였던 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학교교회공공건물 등을 지었는데, 이 시기 이 종족은 자치조직을 갖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연방정부로부터는 최소한의 간섭만 받고 있는 상태였다.

1898커티스 법[Curtis Act]’에 의해 부족 정부가 해체되었고, ‘도스 할당법[Dawes Allotment Act]’에 의해 부족의 임대 토지는 사라지게 되었다. 도스 위원회는 부족원들을 혈통에 의한 크릭 족자유민으로서의 크릭 족으로 나누어 등록을 했다. 그런데 그들은 부족원들이 갖고 있는 크릭 혈통의 비율에 상관없이 아프리카 혈통만 인정되면 누구나 그 범주에 분류해 넣었던 것이다. 1906426, 미합중국 의회는 1907년에 오클라호마가 주의 자격을 인정받을 것으로 예상, ‘1906년 문명화된 다섯 부족 법안을 통과시키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크릭 족은 8,100의 땅을 비원주민 정착자들과 정부에 빼앗기고, 그 후에야 ‘1936년 오클라호마 인디언 복지법아래 일부 무스코기 족 도시들은 연방의 승인을 받게 된 것이다. 크릭 네이션은 1970년까지 재조직되거나 연방의 인정을 다시 얻지 못하다가 1979년에야 1866년의 헌법을 대체하는 새 헌법을 만들어 비준하게 되었다. 1976년 하르호(Harjo)와 클레피(Kleppe) 간의 법정 소송사건으로 미합중국의 가부장주의는 종식되고, 민족자결권이 고양되었다. 크릭 네이션은 후손들의 구성원 자격을 결정하기 위한 기초로 도스 법의 명단을 이용, 58,000명이 넘는 할당자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등록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현재 크릭 족의 인구는 69,162, 주요 거주지는 미국의 오클라호마 주이며, 종교생활은 기독교[특히 침례교와 감리교], 종교적정치적전통주의적 조직인 네 엄마들의 결사(結社)[Four Mothers Society]’를 중심으로 영위되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특히 크릭, 체로키, 촉토, 치카샤 등 네 종족이 주로 그들의 땅을 비원주민 이주자들에게 할양하도록 한 도스 법이나 미 의회의 법안 활동 등에 반발하여 결성한 복합적 조직이 바로 이것이었다.

인포메이션 센터의 직원으로부터 무스코기와 오크멀기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얻은 다음 본격적인 탐사에 나섰다. 먼저 언덕 위의 ‘Five Civilized Tribes Museum’에 들렀는데, 1850526일에 세워진 무스코기 네이션의 옛 건물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들어가 보니 소장품은 별스럽지 않았다. 1층에는 다섯 부족의 휘장[seal]들과 사진 몇 장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조차 찍지 못하게 했다. 1층에서 올려다보니 2층에도 식탁이나 의자 등 생활사 자료들이 몇 가지 진열되어 있을 뿐이어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다른 네 부족들을 찾아 그들 문화와 역사유물들의 진수를 맛보고 온 우리였다. 그러한 유물들의 일부를 복제하여 모아 놓고 ‘Five Civilized Tribes Museum’의 간판을 붙인 뜻은 좋았으나, ‘통합문화를 보여주기엔 턱 없이 모자라는 컬렉션이었다.

 

약간의 실망감을 안고 무스코기 시내로 달려 들어갔으나, 이곳 역시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경기가 안 좋아서인지 기름기가 빠져 있었다. 간판마저 흐릿하게 퇴색되고 있는 옛 건물들만 경기가 좋았던 그 시절의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을 뿐 널찍한 시내 도로들에는 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우리는 옛날의 역사(驛舍)를 재활용하여 만든 삼강박물관[Three Rivers Museum]’을 방문했다. 잘 나가던 시절 카우보이들이 텍사스나 오클라호마의 중남부로부터 몰고 온 소떼들을 열차에 싣고 동부로 나아가던 오클라호마 주의 출구가 바로 이곳이었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성 자원봉사자 한 분이 오랜만에 만나는 외국 손님에 당황했는지 허둥거리며 친절을 베풀었다. 큰 역사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만큼 세련되지는 않았으나, 오클라호마 주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장감이 이곳에서도 물씬 풍겨났다. 잠시 후 그 여성이 전화로 호출한 정식 큐레이터가 달려왔고, 그녀로부터 박물관을 꽉 채운 각종 생활사 자료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설명이 다 끝나갈 무렵 크릭 인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보안관이 들어왔다. 홀을 꽉 채울 듯 거대한 몸집의 그는 꽤나 붙임성이 좋았다. 대대로 이 도시에서 살아온다는 그는 보안관이라는 자신의 직책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 했다. 무엇보다 한국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가계와 이 도시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바빴다. 급기야는 우리를 환영하려는 의도였는지 자신의 권총을 빼내 현란한 손놀림을 보여주기도 했다. 밖에 놓인 열차 유물까지 둘러 본 다음, 친절한 사람들로부터 간신히 빠져 나온 우리는 즉시 차를 몰아 1시간 거리의 오크멀기에 도착, 1박을 하게 되었다.

토요일인 다음날 오크멀기의 탐사에 나섰다. 공공기관이나 박물관 등은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 하는 수 없이 도심 주요부분들을 걸어 다니며 느껴보기로 했다. 윤기가 빠진 점은 다른 도시들과 같았으나, 규모가 제법 컸다. 오클라호마 주 오크멀기 카운티의 도시이자 남북전쟁 이래 크릭 네이션의 수도였던 곳이다. 그 명칭 ‘Okmulgee’는 영어로 끓는 물(boiling water)’를 뜻하는 크릭 단어 ‘oki mulgee’에서 나왔다는데, ‘졸졸 흐르는 시내[babbling brook]’ 혹은 증발악취[effluvium]’ 등으로도 번역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곳은 분명 노천온천 지역이었을 것이다. ‘악취 나는 끓는 물이라면 아마도 유황온천이었으리라. 인근의 체로키 네이션에서 발견한 그들의 환영사 ‘Osiyo[오시오]’를 내가 우리말 ‘(어서) 오시오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했듯이, ‘oki mulgee’ 아쿠 (뜨거운) !’로부터 나온 것이나 아닐까 상상해 보았으나, 근거를 대지 못하는 한 부질없는 생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 내내 크릭 네이션의 수도였던 만큼 시내 곳곳에 고풍스런 자취가 많이 남아 있었다. 33.2의 넓은 땅에 2010년 기준 12,321명의 인구가 분산되어 살고 있으므로 한산할 수밖에 없지만, 전체적으로 기름기는 빠져 있었다. 우리가 찾으려 한 오크멀기 다문화 역사 박물관[Okmulgee Multicultural Historical Museum]’을 길가에서 발견하고 차를 멈추었으나, 이미 문을 닫은 채 이전했다는 메모만 문 앞에 걸려 있었다. 주변에 물었으나,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고, 찾아간들 토요일에 문을 열었을 리 없어, 하릴없이 무스코기 네이션 본부가 위치한 곳을 찾았다이미 130여년이나 지난 시기의 건물들이 넓은 땅에 여유롭게 늘어서 있었다. ‘무스코기 네이션 크릭 의사당[Muscogee Nation Creek Council House]’, ‘크릭 의회[Creek Capitol]’, ‘크릭 네이션 수도 청사[Creek Nation Capital]’ 등 단순 소박한 건물들이 주변의 상가들과 행복한 어울림을 이루고 있었다. 1867년 조직된 크릭 네이션의 수반 코우치먼[Ward Coachman] 시대에 오크멀기는 수도로 지정되었고, 1870년에는 오크멀기 헌법도 제정되었다. 수도 청사 의사당 건물 뒤편의 잔디밭에는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인디언 관련 유물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가운데 눈물의 행진[Trail of Tears]’ 표지가 버티고 서 있었다. 미국이 인디언 특히 크릭 족에 대하여 자행한 횡포를 고발하는 내용임은 물론이다. 어느 인디언 네이션에 가도 ‘Trail of Tears’ 표지가 서 있는 곳은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이다. 인디언들에게 가한 미국의 원죄는 인디언이 살아 있는 한 업보가 되어 그들을 괴롭힐 것임을 이 표지판은 말해주고 있었다.

 

 


삼강박물관의 생활사 자료[MKT 라인, 즉 '미주리-캔자스-텍사스' 간 철도 노선에서 사용되던 각종 물건들] 

 

 


삼강박물관에 소장된 인디언 관련 그림[승천하는 전사의 영혼?]

 

 


삼강박물관에 소장된 인디언 관련 그림[크릭 족 전사?]

 

 


삼강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기관차

 

 


박물관에 전시된 기차의 기관실


 


지금은 박물관과 음악 홀로 쓰이는 당시의 화물열차 역

 

 

 
무스코기 초입의 환영 표지판

 

 


오크멀기에서 저녁을 먹은 집[값싼 등심이 맛있는 집]

 

 


한산한 오크멀기 시가지

 

 


크릭 네이션 의사당

 

 


크릭 네이션 의사당

 

 


'눈물의 여정' 설명판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

 

 

의사당을 떠난 우리는 널찍널찍한 주택가를 배회하다가 크고 멋진 교회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는 미국에서 보기 드문 천주교 성당도 있었다. 이름은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St. Anthony of Padua Catholic Church]’. 천주교 신자인 아내의 말대로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성당 뒤편 주차장에 차를 대는데, 작은 차 한 대가 또르르 달려왔고, 문이 열리면서 로만칼라 복장의 연세 지긋하신 신부 한 분이 의상을 손에 들고 급히 나와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곳에 들어오면서 미사가 있다고 공지되어 있는 것을 본 터라 우리도 부랴부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미사 예정 시각이 지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당 안은 텅 비어 있는데, 아까 들어온 신부가 촛불을 붙이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물으니 오늘 특별 미사가 있는데, 아직 수녀가 당도하지 않아서 당신이 직접 미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라 하자 반색을 하며 우리를 위해 포즈를 취해 주었다. 휑하니 넓은 성전에는 우리 둘 만 앉아 있었고, 신부 혼자 미사 준비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참 겸연쩍었다. 최소한 한 시간 가까이 걸릴 미사에 우리 둘만, 그것도 천주교 신자로는 아내 한 사람만 참여하는 셈이니, ‘참으로 기이하고 멋쩍은 경험아닌가.

 

우린 갈 길이 바쁘니 어여 나갑시다!’ 신부가 옷을 입으러 들어간 틈에 나는 아내의 옆구리를 찔렀다. 나의 표정이 완강해 보였던지 아내도 마지못해 따라나선다. 밖으로 나오며 생각하니 참으로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특별미사에 신도는 하나도 없고, 그나마 찾아온 한국인 관광객 두 명마저 종적이 묘연하게 사라지고 말았으니, 미사복을 입고 나온 신부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7~8년 전 유럽 자동차 여행에 나섰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상당수의 성당이나 교회들은 주일날에도 문이 닫혀 있었다. 주일 예배에 참여하고자 하이델베르그의 한 교회에 갔더니 교회 문은 열려 있었으나 목사 한 분이 앉아서 무료하게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서구사회에서 교회가 망하고 있음을 절감한 순간이었다. 그래서인가. 이 성당 정면엔 미국정신과 함께 가톨릭 정신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며[Keeping Catholicism Alive With American Spirit]’라고 쓰인 걸개가 늘어져 있었다. 그에 비해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교회에 모여 활동을 벌이는 젊은이들은 미국 사회에 뿌리내린 신교의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도시 외곽에 자리 잡은 OSU 무스코기 캠퍼스를 거쳐 무스코기 참전용사 비’, ‘무스코기 크릭 네이션 지방법원등을 일별한 다음 마지막 행선지 오클라호마시티를 향해 40번 하이웨이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크릭 탐사는 끝이 났다.

 

***

 

크릭 족을 대면하기 위해 무스코기와 오크멀기를 찾았으나, 박물관의 유물이나 건축물로 남아 있는 삶의 흔적만 보았을 뿐, 그들의 종적은 없었다. 그렇다. 아직도 검붉은 얼굴에 검은 머릿결을 날리는 그들의 모습이 유지될 리는 없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도 아닐 것이다. 나와 다른 모습의 이웃들과 섞이고 사랑함으로써 나를 변모시키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었을 터. 그러나 신화 속에 살아 숨 쉬는 인디언들의 문화나 의식도 언젠간 새로운 시대 삶의 원리로 부활될 수 있으리라. 돌고 도는 것이 세상 이치라면, 지금 위세를 떨치는 서구문화의 끝판 어디쯤에서 그 옛날 인디언들이 영위하던 생활양식이나 정신이 그들의 이름을 잊어버린 채 새로운 삶의 원리로 사람들을 고양(高揚)시키게 되리라. 그 때를 기다리며 은인자중하며 살아가는 크릭 인들을 우리는 여기서 만난 것이다.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의 사제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 100주년[2008] 기념 표지

 

 


빠두아의 성 안토니 교회 내부

 

 


오크멀기 제일 장로교회

 

 


오크멀기 제일 장로교회 내부

 

 


오크멀기 연합 감리교회

 

 

 


무스코기 전몰용사 추모비[한국전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병사들 포함]

 

 


오클라호마시티의 '윌 라저스 공항' 인근에서 만난 석유채굴기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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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 1. 6. 03:45

 

 


세미놀의 초기 생활상(주방의 모습)

 

 


세미놀 족 주술사 부녀(정면의 사진은 옥수수밭에서 의식을 행하는 장면)

 

 


주술사의 의식(儀式)

 

 


주술의식을 행하고 있는 주술사

 

 


세미놀 여인과 옥수수

 

 


옥수수의 정령

 

 


집 안에 저장한 옥수수

 

 


옥수수의 정령

 

 


플로리다 세미놀 족에 남아있는 Green Corn Dance

 

 


세미놀 족 처녀와 거북이

 

 


추장을 중심으로 앉아있는 세미놀 족 남자들

 

 


세미놀 족 여인들의 삶과 전통복장

 

 


세미놀 족 부엌도구들과 주식인 옥수수

 

 


세미놀 족 메디신 맨(Medicine Man)이 사용하던 주구(呪具)

 

 

 

놀라운 세미놀(Seminole) 인디언들()

 

 

세미놀 족이 전통시대에 풍요를 기원하던 의식들은 사진이나 그림으로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었다. 주술의식을 통해 인간과 신을 매개하던 현존 주술사의 주술의례는 전시되어 있었으나, 기대했던 그린 콘 댄스리본 댄스버팔로 댄스페더 댄스 등 다양한 의미가 함축된 군무(群舞)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어렴풋이나마 자연물들에 정령(spirit)이 있다고 믿어온 그들의 전통신앙이 그림으로, 실제 행위로 구현된 모습을 전시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주술사가 그들의 주식(主食)이었던 옥수수 밭에서 정령의 존재를 불러오는 듯한 그들의 의식이 아주 흥미로웠다. ‘먹는 것속에 자신들의 안위나 세계질서를 좌우할 힘이 내재되어 있다고 믿고, 그것을 소중히 대하여 온 그들의 태도는 매우 합리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다. 삶을 유지하는 데 곡식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면, 곡식을 관장하는 초월적 존재나 힘이야말로 가장 높은 곳에서 인간사의 모든 면을 관장하는 권능을 지녔다고 생각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그린 콘 댄스(Green Corn Dance)는 그런 생각이 극적으로 표출된 집단예술이다.

 

전통시대의 북미 인디언 종족들은 자신들이 옥수수와 동질적 존재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파종 축제, 수확 축제와 그린 콘 세리머니 등 옥수수에 관한 축제들이 있는 점이 그 방증이었다. 옥수수가 익어갈 무렵, 혹은 수확 전 몇 주일에 걸쳐 계속되는 것이 그린 콘 세리머니이며 그 축제의 중심이 바로 그린 콘 댄스였다. 그들은 그린 콘 댄스가 열릴 때까지 새로 익은 옥수수를 먹거나 손을 대는 일은 신을 모독하는 죄라고 생각했다. 흡사 우리나라에서 천신(薦新)’의례를 마친 다음 본격 수확을 시작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리라. 인디언 사회에서 플로리다의 세미놀 인디언들만이 아직도 5월의 그린 콘 댄스를 연다고 하는데희미하게나마 그 전통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오클라호마 세미놀 네이션 아닐까. 그런 점에서 그 시대의 주술사도, 평범한 인간들도, 정령을 불러내어 풍요와 자신들의 안위를 호소한 행위들에서 그 시대 나름의 보편적 합목적성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미놀의 역사나 의례 등 전통적인 삶을 묘사한 현대 예술가들의 그림들이 독립된 공간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속에 흥미로운 그림 하나가 있고, ‘뱀으로 변한 아우라는 제목이 합당할 법한 설화 한 편이 적혀 있었다. 독자들의 흥미를 위해 그 설화의 서사적 골자를 들기로 한다.

 

 

세미놀 형제가 마을을 위해 사냥하러 나갔다/다음날 하루 종일 비가 내려 사냥을 못하다가 오후 늦게 개자 형은 사냥을 포기하고, 가지고 있던 사슴고기로 요리를 시작했다./밖으로 나갔던 동생은 두 마리의 큰 물고기 배스를 잡아왔다./그는 설명하기를, ‘이 물고기들이 근처 호수에서 길바닥으로 튀어 올라와서 잡았다고 했다./형이 그 물고기들을 놓아주고 오라 하자, 동생은 펄쩍 뛰며 요리를 해 먹었다./한밤중 동생은 소리를 지르며 형을 불렀다./동생의 모기장으로 가자 동생은 형에게 내가 뱀이 되고 있어. 형이 먹지 말라고 하는데도 먹었더니, 이것 좀 봐!’라고 놀라며 소리쳤다./형이 불을 켜고 자세히 보자 동생의 다리들은 이미 뱀의 꼬리가 되어 있었다./동생이 형에게 내일 가족들을 데리고 호수 가의 큰 통나무로 와서 태양이 중천에 오르거든 통나무를 네 번 쳐. 그렇게 하면 나를 볼 수 있으니, 그렇게 해줘. 나는 그들을 만나 할 이야기가 있어.’라고 했다/다음 날 형은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호수로 와서 둥근 달 아래 캠프를 하며 다음 날 해 뜨기만을 고대했다./다음 날 해가 중천에 오르자 가족들을 데리고 통나무로 가서 동생의 말대로 통나무를 네 번 두드렸다./그가 네 번 두드리자 호수 밑에서 거품이 올라오고 큰 뱀의 머리가 올라왔다./아이들이 무서워하자 어른들은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한 다음, 뱀이 하는 말을 듣고자 했다./뱀이 호수 표면으로 떠올라 그의 가족들이 서 있는 호숫가로 주르르 미끄러져 왔다./뱀은 천천히 그들에게 움직여 가며 가까이 오세요. 이게 나예요. 말씀드릴 게 있어요. 잘 들으세요. 이후로 나는 다시는 말을 할 수 없어요. 내가 물고기들을 닦고 요리하여 먹은 것이 잘못된 일이었어요. 나는 뭐가 더 좋은지 알고 있었지만, 우리 문중 어른들의 금지법을 위반했어요. 나는 지금 그 벌을 받은 거예요. 여러분이 떠난 후에도 나는 우리 가족이 나에 관하여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요. 장래를 생각하고 여러분의 삶을 살아가세요. 나는 결코 돌아갈 수 없어요. 이 호수는 나의 집이 될 거예요. 나는 이 물 속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갈 거예요. 여러분 모두 돌아가거든, 결코 이 호수에는 돌아오지 마세요. 일단 여러분 모두 떠나면, 내 모든 기억들은 사라져서 여러분을 전혀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 나는 사악해져서 여러분을 해칠 거예요. 그것이 내가 살아갈 뱀의 삶이예요. 다만 좋았던 일들만을 기억하고 나를 용서하세요.’라고 말하고 나서 그의 형에게 머리를 돌리고 나는 형이 우리 가족을 도와주시고 그들에게 고기를 나눠주시기를 바라요. 내 아들들이 형처럼 좋은 사냥꾼이 되도록 가르쳐 주세요. 그 아이들이 제 어미를 돌보도록 해주세요.’라고 말했다./그 사냥꾼의 친구[*brother가 이곳에서는 friend로 바뀌어 있음. 착오로 보임-인용자 주]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그 뱀이 이제 나는 저 위로 올라가니 여러분은 내 몸 전체를 잘 보세요.’라고 말했다./그가 그렇게 하자, 모든 사람들은 그가 아주 크고, 큰 카누보다 더 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갑자기, 뱀은 그가 떠올라 온 물속으로 들어가 호수 가운데로 들어가기 시작했다./뱀은 그의 꼬리를 물 밖으로 내밀고 그들에게 흔들었다./그런 다음 그 뱀은 깊이깊이 큰 호수의 검은 물속으로 내려갔다./슬픔을 느끼며 그의 가족들은 큰 호수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고, 다시는 그곳에 오지 않았다.”

 

 

보는 사람에 따라 이 설화의 주지(主旨)는 달라지겠지만, 물고기 배스를 잡아먹은 행위가 어른들의 금단법(禁斷法)[Forbidden Law]’을 어긴 것이라는 말로 미루어, 아마도 배스는 그가 속한 문중, 즉 클랜(Clan)의 상징 동물이었을 것이다. 당시 인디언 사회에서 클랜의 상징동물을 신성하게 여기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불문율이었다. 따라서 상징동물을 해치면 하늘의 벌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2세들에게 교육할 필요가 있었고, 그런 의도에서 이런 설화는 나왔을 것이다.

이 외에도 진기한 컬렉션들이 많았다. 예컨대, ‘Military Corner’에서 만난 한국전 관련 컬렉션들은, 한국전을 바라보는 현재의 관점과 한국인들을 바라보는 당시 그들의 관점이 매우 따스하고 긍정적이라는 점에서 감동적이었다.[미국통신 41 참조] 자기 민족의 젊은이들을 낯선 나라의 전쟁터에 보내면서 얼마나 걱정이 많았을까. 그들이 만들어 자국 병사들의 교육에 썼을 그 자료들에는 그런 걱정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식에 대한 정이 지극한 우리네 부모들과 그들의 정서가 동질적임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

 

애당초 플로리다에 살던 세미놀 족의 일부가 오클라호마까지 오기까지 많은 고통이 따랐을 것이다.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은 다른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끔찍하게 겪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오클라호마 인디언 구역 내에서도 소수자로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지만, 그들 나름의 화려한 문화와 내면세계, 혹은 역사에 대한 자부심만은 확실하게 지닌 채 살아 온 것으로 보인다. 결국 미국의 체제에 순응하여 그들의 일원으로 정착했고, 그들의 생활양식에 동화되어 오긴 했지만, 아직도 언어와 문화를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지켜 가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소수 부족이면서도 개명(開明)된 다섯 종족 가운데 하나로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는 그들의 위치와 현실적인 활동이 바로 이런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물고기 배스를 삶아먹은 죄로 뱀이 되고 있는 동생을 안고 있는 형

 


세미놀 족 여인들의 전통문양 치마

 


세미놀 족의 전통문양

 


세미놀 족의 집안 살림들

 


세미놀 족 전통 가옥의 생활사 자료들

 


세미놀 족 전통 생활예술 자료들

 


함께 방아를 찧고 있는 세미놀 족 여인들

 


매 나무[Wheeping Tree)에 죄인을 매달고 회초리형을 가하고 있는 세미놀 족 관리들

 


세미놀의 대표적 고등교육기관인 에마하카 아카데미(Emahaka Academy)와 두 명의 교육 공로자
[왼쪽이 교육자 앨리스 브라운(Alice Brown), 오른쪽이 윌리엄 패커 블레이크(William Packer Blake) 목사] 

 


왼쪽의 사진은 세미놀 네이션의 대표이자 오클라호마 주 의회의 첫 여성 의원이었던
앨리스 로버츤(Alice Robertson)과 그녀의 다섯 딸 및 세 손녀들

 

 


Military Corner에 전시되어 있던 한국전쟁 관련 자료들
[한국 및 한국인들에 관한 소개의 그림이나 필수 회화 내용]

 


한국전에 나가는 세미놀 족 병사들의 교육에 쓰인 것으로 짐작되는 한국인들의 캐리커츄어
['한국인들은 우아하고 자부심 강한 사람들'이란 설명이 인상적임]

 


세미놀 족 관련 교회 자료들

 


위 사진 속에 들어 있는 위워카 지역 감리교회의 모습

 


위워카의 시가지를 재구해 놓은 모습

 


당시 의원의 진찰실을 송두리째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는 모습

 


1966년의 세미놀 네이션 창립[1866] 백주년 기념식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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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 1. 6. 02:45

 

 


촉토 내셔널 히스토리 뮤지엄에서 63번과 270번 하이웨이를 번갈아 타며 두 시간 이상을 달려 세미놀 족의 본거지인 위워카에 도착했다.

 

 


세미놀 네이션 뮤지엄(Seminole Nation Museum)

 

 


오클라호마 주에 강제이주된 39개 인디언 종족의 고향들[세미놀 족의 고향은 플로리다였음]

 

 


세미놀 네이션 뮤지엄 문 앞에서 만난 세미놀 족 전사의 두상

 

 

 

 

놀라운 세미놀(Seminole) 인디언들(1)

 

 

 

 

세미놀 족을 만난 것은 참으로 우연이고 행운이었다. 브라이언 군의 졸업 축하 파티에 참석했을 때, 그의 미국인 친구 한 사람에게 고향을 물었더니 세미뇰이라 했다. ‘이란 발음에 혹시 스패니쉬 계통인가 하고 물었더니, ‘인디언 부족 이름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그날 밤으로 그것이 인디언 부족 이름이자 그 부족의 네이션이 있는 도시의 카운티 이름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스펠 ‘Seminole’세미뇰로 들은 것은 내 귀의 착각이었던 듯, 다른 미국인들에게 다시 물으니 모두 세미놀이라고 했다. 세미놀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치카샤와 촉토를 거쳐 드디어 그 실체를 육안으로 보게 되었다. 세미놀이 그동안 돌아 본 체로키치카샤촉토 등과, 앞으로 돌아 볼 크리크(Creek)와 함께 개화된 다섯 종족[Five Civilized Tribes]’을 이룬다고 하니, 적잖은 호기심이 발동된 것도 사실이었다.

 

'촉토 내셔널 히스토리컬 뮤지엄(Choctaw National Historical Museum)'을 나선 우리는 키아미치 산간을 꿰뚫는 63, 270번 하이웨이를 번갈아 타고 점심을 훌쩍 넘긴 무렵에서야 세미놀 카운티의 위워카(Wewoka) 시티에 도착했다. 뭔가 잔뜩 쏟아질 것만 같은 우중충한 날씨에 퇴락한 시가지의 모습이 겹치니 분위기가 음산했다. 다운타운엔 빈 상가들이 즐비했고, 페인트가 벗겨져 초라해 보이는 집들도 부지기수였다. 다른 지역의 상당수 중소도시들에서 이미 목격한 것처럼 이 도시도 기름기가 빠져 있었다. 아마도 원유의 고갈로 지역경기가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기가 좋은 대도시로 사람들이 빠져나가 텅 빈 집들은 사람의 온기를 쏘이지 못한 채 삭아들고 있었다. 살아있는 레스토랑 한 군데를 간신히 찾아내 시장기를 지우고, ‘세미놀 네이션 뮤지엄(Seminole Nation Museum)’에 갔다. 아담하고 아름다운 건물. 세미놀 사람들의 미학이 느껴지는 건축이었다.

 

연방정부에 의해 인정된, 미국 전역의 세미놀 족 집거지는 세 군데로 알려져 있다. 오클라호마 주의 세미놀 네이션, 플로리다의 세미놀 트라이브, 플로리다의 미코수키(Miccosukee) 트라이브가 그것들이다. 물론 세미놀 족의 원 고향은 플로리다이며, 2차 세미놀 전쟁 이후 8백명의 흑인 세미놀 인들을 따라 플로리다에서 인디언 거주구역으로 강제 이주되어 온 3천명 세미놀 인들의 후예들이 호클라호마 주에 살고 있다. 따라서 오클라호마의 세미놀 네이션은 세 군데 집거지들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우리가 찾아온 이곳 위워카 시티가 바로 오클라호마 세미놀 네이션의 본부가 있는 곳인데, 현재 등록 인원 18,800명 가운데 대략 13,500여명이 오클라호마 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세미놀 카운티에는 대략 5,3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1936년 인디언 재건법이 공표되면서 세미놀 족은 그들의 정부를 되살려 내기 시작했으며, 부족의 사법 관할지역 또한 그들의 다양한 자산들이 포함되어 있는 세미놀 카운티를 카버하게 되었다고 한다. 플로리다에 남아있던 수백 명의 세미놀 인들도 3차 세미놀 전쟁을 겪으면서도 미국 정부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드디어 평화를 찾게 되었으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후예들이 연방정부로부터 인정을 받는 두 개의 세미놀 트라이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들 조직된 세미놀 인들과 조직되지 않은 부족원들이 함께 1823년 미국 정부가 강제로 뺏어간 24백만 에이커의 땅에 대하여 1976년 기준으로 16백만 달러 가치의 정착지를 받아냄으로써 분쟁은 완결된 셈이다. 따라서 현재 세미놀 족이 오클라호마 한 군데와 플로리다 두 군데 등 세 지역으로 나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미놀 큐레이터의 설명에 따르면, 세미놀 인들의 말은 무스코기 어[Muskogean Language]에 속하는데, 전통적으로 서로 통하지 않는 두 말, 즉 미카수키(Mikasuki)와 크리크(Creek)어를 동시에 사용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크리크가 정치사회적 측면의 지배언어였으므로, 미카수기 어를 쓰는 사람들도 크리크 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다. 조사 결과 2000년대 초까지 부족원의 25% 정도가 크리크와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나머지는 영어만 쓰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현재 오클라호마에 있는 네이션의 대부분 세미놀 인들은 영어를 제1언어로 쓰고 있으나, 부족 차원에서 전통적인 크리크 어를 살려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한다.

 

다른 인디언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도 사회구조로서 가장 기본적인 가족 바로 위에 클랜(Clan)이란 단위가 있었다. 아주 오랜 옛날에 어떤 동물이나 초자연적 정령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고난을 견뎌 낸 것은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혈통으로 연결되는 사람들이 특정 동물의 정령들과 연관을 맺게 된 것이다. 치카샤 네이션에서도 촉토 네이션에서도 누구나 특정 클랜에 속해 있고, 너구리악어 등 어떤 동물이 자기 클랜의 상징동물인지 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점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불문(不文)의 제도 아래, 세미놀의 성인들은 자기네 부모가 속한 클랜들 밖에서 결혼상대를 찾아야 할 의무를 갖고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동성동본 혼인금지와 같은 차원의 제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근친혼을 금함으로써 종족을 건강하고 우수하게 유지하려는 지혜의 발로라고 할 수 있었다.

 

***

 

문을 열고 뮤지엄에 들어가니 실제 모습대로 전시된 세미놀 족의 전통 생활양식이 눈을 끌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주방과 거실이 함께 붙어 있었는데, 설명을 위해 그 옆에 붙여놓은 클레이(Clay MacCauley)의 말이 흥미로웠다.

 

세미놀의 가정에 들어가면 누구나 사람들이 모이는 중심에 모닥불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곳은 요리가 준비되는 장소이고, 가족과 그들의 친구들이 사교를 나누는 장소이며,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이야기되는 장소다.”

 

지금까지 만나본 모든 인디언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세미놀 족도 가족 간의 유대나 사랑을 중시한다는 점과 모계사회라 할 정도로 여성의 발언권이나 힘이 절대적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모닥불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수프와 그 주위에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 다 된 음식을 각자에게 덜어주는 주부 등 익히 보는 가족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이 뮤지엄의 첫 공간에 제시되어 있었다. 아마도 세미놀 인들은 끈끈한 가족공동체의 전통을 외부 손님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그 뿐 아니었다. 전통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활사 자료들과 예술품 들이 적절하게 분류, 전시되고 있었다.

 


 

각 부족의 구역이 할당된 시기와 점유지의 성격

 


조정이 끝난 1907년까지 각 부족의 점유지 현황

 

 


세미놀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초기 네이션 깃발

 

 


오클라호마 주 내 39개 인디언 부족의 분포 지역 리스트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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