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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2.01 ‘연명의료 거부’를 신청하며
  2. 2018.01.02 지나온 40년, 또 다른 40년
글 - 칼럼/단상2019. 2. 1. 15:41

 

 

 

연명의료 거부를 신청하며

 

 

                                                                                                                   조규익

 

 

작년, 존경하고 따르던 박정신 교수의 빈소에 갔었다. 예를 차린 뒤 이곳엔 교수님의 유체가 안 계세요. 장기 기증을 위해 의료실에 계십니다.”라는 사모님의 말씀을 듣고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교회사를 전공으로 택하였으며, 기독교학과의 교수로 종신한 분이었다. 그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신 것일까. 마지막 순간 자신의 육신까지 아직 살아 있는 생명들에게 나누어주고 떠나는 그 분의 모습이 숭고했다. 빈소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오며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삶이란 무엇이며 육신이란 무엇일까? 무엇보다 삶과 죽음의 교체 과정에서 육신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의미를 만들기 위한 도구일까. 아니면 종국에 한갓 먼지나 쓰레기로 사라질 허망한 물질에 불과한 것일까. 많은 욕망을 만들어내고 투쟁을 추동하는 악의 실체일까. 갖가지 상념들이 내 마음에 난무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 어머니의 영정을 마주하고 한참 서 있었다. 영정 속엔 쭈그러진 육신 아닌 해맑은 웃음과 정신이 어려 있었다. 두어 해 전 병원에서 신음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회상했다. 눈을 감으시던 순간은 슬프도록 짧았고, 그 다음의 모습은 평화롭고 잔잔하셨다. 육신의 괴로움을 벗어난 편안함이었다. ‘격정에서 고요로의 넘어감, 바로 그것이 죽음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니 나는 왜 한사코 죽음을 거부하고 육신만 고집하는 것일까. 육신은 고통이고 구속인데, 왜 그것을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일까.

 

세상의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육신이 절대적이다. 그 세상의 의미란 무엇인가.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세상에는 쓰임새가 있다. 잘난 사람만 있는 세상, 못난 사람만 있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플라톤은 철인(哲人)들이 통치하는 나라를 이상국가라 했다. 그러나 그건 그냥 이상일 뿐이다. 그렇다고 바보들만 통치하는 나라도 있을 수 없다. 정치인들 중 정상적인 인간이 별로 없는 우리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는 것은, 정치인들 모두가 바보는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공존과 조화가 우주의 원리이고, 그 원리가 구현되는 곳이 인간 세상이다. 육신을 지닌 인간들이 이끌어가는 공간이 세상이고, 그 세상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동안 육신의 아픔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기한이 다한 기계가 고장 나고 망가지듯 인간의 육신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죽어가면서 쓸 만한 부속품이 있다면, 젊은 영혼에게 물려주고 가는 것도 스스로의 정신적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 아니겠는가.

 

옛날 어떤 현인은 다음과 같은 시구를 남겼다.

 

집에 천만금이 있어  家有千萬貫

평생 남에게 바라는 게 없었도다 一世不求人

죽기 전엔 未歸三尺土

일생 몸 보존하기 어렵고 難保一生身

죽은 후엔 旣歸三尺土

백년 무덤 보존 어렵다네 難保百年墳

 

그렇다. 인간이 세상에서 말짱한 제 정신으로살아갈 수 있는 시한이 그 몇 년이랴? ‘삼척토(三尺土/무덤)’로 돌아가기 전 입에 풀칠하며 자존심 유지하기 쉽지 않고, 죽은 뒤 100년 보존되는 무덤이 흔치 않다. ‘인생 백년은 예나 지금이나 꿈일 뿐이고, 그나마 반백년이라도 맑은 정신 속에 살아갈 수 있길 바라는 존재가 바로 가련한 인생인 것이다.

 

***

 

오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장기기증신청을 등록하기 위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들렀다. 그런데, ‘연명의료거부신청서는 적어냈으나 장기기증신청은 관할이 달라서 못하고 말았다. 평소 연명의료 거부와 장기기증은 함께 따르는 문제라고 생각해온 내겐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연명의료를 거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장기 기증의 의향을 가진 경우가 꽤 많을 것이다. 연명의료를 거부한다는 건 곧 숨을 거둔다는 뜻인데, 관할이 다를 경우 적시에 장기를 적출하여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식할 여유시간이 있겠는가. 연명의료거부와 장기기증신청을 한 기관에서 신속하게 처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이 문제 역시 기관 간의 이해가 달라서 생겼을 것이다이 자리에서까지 더 이상 무책임하고 미련한 정치인들이나 정부를 힘들여 욕하고 싶지 않다. 더 큰 욕 먹지 않으려면, 빨리 정신 좀 차리고 두 사안을 하나로 연계시켜 함께 처리해 주기 바란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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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8. 1. 2. 11:48

지나온 40, 또 다른 40

-새문사 40주년을 축하함

 

 

조규익(숭실대 교수)

 

 

사범대학 졸업 후 고등학교 국어교사가 되었고, 모 대학 교육대학원에 잠시 적을 두었었다. 어수선하기 짝이 없던 1978년의 일이다. 교육대학원 재학 중 그 대학 도서관에서 쉘리(P. B. Shelley)<<시의 옹호(A Defence of Poetry)>>를 우연히 만났다. 시론 강의를 들어볼 기회가 없었던 내게 이 책이 주는 충격은 컸다.

 

우선 제목이 흥미로웠다. ‘시의 옹호? ‘사람들의 비판으로부터 시를 변호하겠다는 뜻일 텐데, 그 말이 내 호기심을 도발했다. ‘를 경()으로까지 숭배해 온 동양에서야 시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 내가 알고 있는 시 혹은 시인에 대한 비판은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이 유일했고, 그의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발원한 서양 시론의 발판이었다. 그래서 그 책이 눈에 뜨였던 것일까.

 

다 읽고 나자, 새삼 번역자와 출판사가 눈에 들어왔다. 영문학자이자 비평가였던 윤종혁 선생은 당시 지식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던 인사였으나, 신생 새문사의 출판사명은 아주 생소했다. ‘새롭다는 뜻일 것이고, 출판사인 이상 이란 을 뜻할 텐데, ‘신문(新文)’이라 하든지 차라리 새 글이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아니면 말 그대로 새 문(new gate)’의 뜻일까. 의아함과 호기심으로 새문사란 명칭이 마음에 콕 박힌 것은 그 때부터였다.

 

직장과 교육대학원을 접고,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모 대학에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다. ‘지적 홀로서기를 준비하던 내 대학원 시절은 영인본 출판의 전성기였고, 의미 있는 연구서들이 대량 출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때 맞춰 새문사에서도 내 전공분야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병욱, 김열규, 신동욱 등 당대를 풍미하던 선학들이 국문학의 키를 잡고 새문사를 한국 지식사회의 광장으로 몰고 나왔다.

 

새문사의 책이 나올 때마다 두려움과 부러움이 엄습했다. 이 분들을 능가하는 이론과 논리로 내 시대를 열어 볼 수 있을 것인가. 새문사에서 이 정도의 책들을 낼 기회가 내게도 주어질 것인가. 전자는 두려움, 후자는 부러움이었다. 새문사의 책이 나올 때마다 내 호주머니는 가벼워졌고, 두려움과 부러움의 무게는 커져만 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몇몇 출판사들에서 내 책들을 내기도 했지만, 새문사에는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두려움과 부러움이 오기로 변하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흘려보낸, 긴 세월이었다. 좋은 글의 생산자도, 읽어줄 소비자도 많아 한국문학이 잘 나가던 당시였다. 시장의 활황으로 좋은 출판사들의 목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을, 무지한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베이비 부머 세대의 한 복판에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책에 갈급(渴急)하며 살아왔다. 교과서 외에 읽을 거라곤 비료 부대에 인쇄된 글들뿐이었다. 책에 관한 내 유년기의 트라우마 때문일까. 더 이상 책을 놓아둘 공간이 없는 최근까지 지출의 1순위는 책이다. 그래서 좋은 책과 저자, 출판사는 내가 선망하는 불변의 대상들이다. 3, 40년 세월의 갈피 속에서 저자와 출판사가 함께 이룩한 학문적 결실의 양적인 증대나 의미 있는 발전은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우리 지식사회가 이제 학문의 르네상스를 넘어 완숙기에 접어 든 것이다.

 

당시 40대 초반이셨을 이규 사장님을 몇 해 전에 뵈었다. ‘처음으로 부탁을 받아새로운 세대의 <<한국문학개론>>을 여러 학자들과 함께 만들었고, 내친 김에 <<조선조 악장 연구>>도 낼 수 있었다. 학생에서 학자로 변신해온 지난 세월은 책에 대한 내 트라우마의 치유 기간이었고, 바야흐로 장년에 접어든 새문사의 성장기였으며, 우리나라 지식사회의 완숙기였다. 이제 누군가 또 다른 트라우마 보유자를 발굴하여 그와 함께 또 다시 40년을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불혹(不惑)’에 접어든 새문사가 계획하고 수행해야 할 당면 과제가 아닐까.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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