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5. 11. 5. 07:08

세인트루이스(St. Louis)에서의 56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세인트루이스 공항 인근

 

 

 


발표문 ppt 일부

 

 

 


발표문 ppt 일부

 

 

 


워싱턴대학교 댄포스 캠퍼스 남쪽 입구

 

 

 


브루킹스홀 쪽의 게이트

 

 

 


캠퍼스 일부

 

 

 

 

작년에 신청했어야 하는데, 게으름을 부린 탓에 그만 올해 아시아학회(AAS: Association for Asian Studies) 참여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올해 초반 부랴부랴 찾아낸 학술발표회가 바로 AAS의 중서부 지역 분회에서 열리는 MCAA(Midwest Conference on Asian Affairs). ‘미국 중부의 하버드라 불리는 워싱턴대학교에서 열린다 하여 더 매력적이었다. 발표 및 참가 신청, 발표문 송부 및 심사, 숙소 및 항공편 예약 등 자잘한 절차들이 자못 번거로웠으나, 서양의 학자들을 만나 의견을 나누면서 새로운 기운을 받고 싶다는 욕구가 나를 움직인 것이 사실이었다. 그 과정에서 큰 학술발표회를 조직하고 움직이는 그들의 메커니즘을 배울 수도 있었고, 연락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들의 내면 또한 살짝 훔쳐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아직 가보지 못한 세인트루이스와 워싱턴대학교였다.

 

멀었다. 비행기가 태평양 상공에 도달할 즈음에야 모니터에 뜨는 항로를 보며 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약간의 후회가 생겨난 것도 사실이었다. 시카고의 오헤어(O’hare) 공항까지 꼬박 12시간, 오헤어에서 기다린 3시간, 오헤어에서 세인트루이스 공항까지 1시간 20, 공항에서 호텔까지 30분 등 무려 17시간이나 걸렸으니!

 

시차 부적응으로 피곤한 몸을 끌고 다음 날의 발표(*발표문은 백규서옥http://kicho.pe.kr 연구업적>논문>No.221’ 참조)를 포함, 꼬박 사흘간의 학술발표회 일정을 소화하게 되었다. 61개의 패널, 패널 당 4명의 발표였으니, 발표자만 해도 240명이 넘었다. 토론자, 진행자, 참관자까지 합치면 1,000명이 넘는 규모였다. 발표도, 발표에 대한 반응도 비교적 만족스러웠기 때문일까. 몸과 마음 상태는 크게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워싱턴 대학의 이지은 교수와 전임강사로 있는 고인성 박사, 울산과기원의 이재연 교수 등을 만난 것은 피로를 가시게 한 청량제였다. 이지은 교수, 이재연 교수 등과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한 대화는 무엇보다 유익했다. 발표장을 메운 외국의 학자들에게 조선의 건국서사시(foundational epic of Joseon Dynasty)를 소개하고, 그 밑바탕으로 작용한 유토피아 찾기로서의 풍수론을 전통 생태 담론적 차원에서 설명한 것은 아주 짜릿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학회 종료 후 하루 반 동안의 여유가 있었다. 워싱턴대학교 댄포스(Danforth) 캠퍼스의 구석구석, 밀드레드레인켐퍼 미술박물관(Midred Lane Kemper Art Museum), 미주리 역사박물관(Jefferson Memorial Missouri History Museum), 게이트웨이 아치(Gateway Arch) 등을 포함, 다운타운 몇 곳들을 도는 데 그쳤지만, 그간 서구 여러 나라의 도시들을 돌아보며 익힌 노하우(?) 덕분일까. 세인트루이스와 워싱턴대학교의 장점들을 순식간에 체감할 수 있었다.

 

1853년 윌리엄 그린리프 엘리엇(Willam Greenleaf Eliot)이 주도하여 엘리엇 세미너리(Eliot Seminary)를 세웠는데, 이 학교가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교로, 다시 워싱턴대학교로 확대발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 전역에 워싱턴의 이름을 딴 대학들이 늘어나자 다시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대학교(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로 교명을 환원했다 한다. 댄포스 캠퍼스는 빅벤 대로(Big Bend Boulevard), 퐈리스트 팍 파크웨이(Forest Park Parkway), 스킹커 대로(Skinker Boulevard), 와이다운 대로(Wydown Boulevard) 등으로 둘러싸인 변형된 직사각형 모양으로 되어 있었는데, 중앙에서 동서로 가로지르는 포시쓰 대로(Forsyth Boulevard)가 캠퍼스를 남북으로 가르는 형국이었다.

 

멋진 캠퍼스였다. 어떤 건축양식을 본떴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평탄한 대지에 늘어선 단정한 베이지색 톤의 건물들은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따스해보였으며, 안으로 들어가니 철저히 인체공학에 맞추어 지은 듯 이동하기에 편했다. 거의 반반인 대학원과 학부 합쳐 14천의 학생들과 3000여명이 넘는 교수진이 댄포스 캠퍼스(206,885), 메디컬 캠퍼스웨스트캠퍼스노스캠퍼스(165.263) 등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들 캠퍼스에 산재해 있는 14개의 도서관들엔 총 420만권의 도서가 소장되어 있었으며, 이 대학의 자랑인 밀드레드레인켐퍼 미술박물관도 미시시피강 서부 연안 최고(最古)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교수진에 22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10명에 가까운 퓰리처 수상자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 미국 대학평가에서 늘 10위권(12~14)을 유지하고 있는 최고 명문이라는 점도 놀라웠다.

 

학회 덕에 이 대학에서 종신 교수직을 받고 한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이지은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연세대학교에서 노문학을 전공하고 하바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 교수는 이 대학교 인문대학(Arts & Sciences) 동아시아 언어문화학부(East Asian Languages and Cultures) 한국학과의 학과장이었다. 이 교수는 저서 <<Women Pre-Scripted: Forging Modern Roles through Korean Print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5)>>를 비롯하여 많은 논문들을 발표했으며, ‘한국문명론(Korean Civilization)근현대 한국문학(Literature of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한국문학과 문화의 주제들: 젠더 구축하기(Topics in Korean Literature & Culture: Constructing Gender)현대 한국인의 자아: 한국문학과 문화의 주제들(Contemporary Korean I: Topics in Korean Literature and Culture)한국문학과 문화의 주제들(Topics in Korean Literature and Culture)’ 등의 강의를 통해 미국 학생들과 만나고 있었다. 이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미국 인문학계의 자세한 모습들을 들을 수 있었다. 함께 발표에 참여한 울산 과기원의 이재연 교수 또한 하바드와 시카고대학에서 공부한 한국문학 세계화의 주역이었다.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를 비롯한 한국문학 전공자들이 앞으로 무엇에 주력해야 할지를 깨닫게 되었다. 아젠다(agenda)의 쉼 없는 발굴과 논리 구축을 통해 세계 학자들과 소통하는 일만이 우리의 낙후성을 탈피하는 유일한 출구임을 알게 된 것이다.

 

***

 

귀국 날까지 짬을 내서 찾은 워싱턴대학교의 밀드레드레인켐퍼 미술박물관은 건물도 훌륭했지만, 마침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내 가슴을 뛰게 했다. 하루를 쉰 다음 찾은 미주리주 역사박물관과 게이트웨이아치는 미주리 주와 세인트루이스의 어제와 오늘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명소들이었다. 미주리 역사박물관은 제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을 기념하는 의미도 갖고 있었다. 사실 제퍼슨 대통령이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강에서 로키산맥에 이르는 80만 평방 마일의 광대한 땅을 사들임으로써 미주리 주는 비로소 미국 땅이 되었고, 본격적인 번영이 시작된 것이다. 세인트루이스의 역사가 독립선언을 기점으로 시작된 미국의 역사보다 100년 이상이나 긴 것도 그 때문이다. 1673년 이 지역에 도착한 프랑스 탐험가들은 원주민이 살고 있던 이 땅을 접수하여 프랑스령으로 만들었고, 자신들의 왕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서 루이지애나(Louisiana)로 명명한 것. 3대 대통령 제퍼슨이 1803년 나폴레옹으로부터 이 땅을 매입하여 1804310일 미합중국의 한 부분으로 공식화한 다음 1808년에 시의원단을 선출했고, 1809년에 정식 시로 등록한 것이다. 1904년의 국제무역박람회, 커피산업, 도시 확장 및 정비 등이 박물관 소장품의 대표적 컨셉들이었다. 사실 1904년의 국제무역박람회와 하계올림픽은 1896년에 세인트루이스를 덮친 허리케인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 시도였는데, 역대 최악이었던 올림픽과 달리 박람회는 성공적이었다. 그 내용들이 박물관 중심의 전시물들을 통해 설명되고 있었다.

 

다양한 전시물들을 통해 커피 산업이 미주리의 중심에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 부분이나 도시의 형성, 발전, 팽창을 보여주는 대형 사진들과 각종 생활사 자료들은 박물관을 매우 인상적인 공간으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그것들은 여타 국가나 지역의 박물관들과 비교하여 특별한 의미와 함께 차별성 또한 보여주고 있었다. 그곳을 찾은 모든 이들에게 우리도 이런 역사박물관 하나쯤은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박물관을 나와 들른 곳은 이 도시의 어느 곳에서도 보이는 게이트웨이 아치(Gateway Arch). 국립 제퍼슨 국토 확장 기념관(Jefferson National Expansion Memorial)을 장식하는 조형물이자 '게이트웨이 시티(Gateway City)'라는 세인트루이스의 별칭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랜드마크였다. 서부개척 시대, 서부로 넘어가는 관문이 바로 세인트루이스였고, 그 개척의 상징물이 바로 이것이었다. 1947년 핀란드 계 미국 건축가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과 건축기사 한스카를 반델(Hannskarl Bandel)의 설계를 채택, 1963212일 착공, 19651028일 완공, 1967724일 일반에 개방되었으니, 설계로부터 무려 20년이나 걸린 큰 공사였다. 전체 높이 192m의 무지개 형상 스테인리스강 구조물로서 남쪽과 북쪽 두 방향에서 엘리베이터 격인 트램(tram)을 타고 아치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꼭대기의 좁고 긴 방에서 창문을 통해 미시시피강과 일리노이 평원, 세인트루이스 시내를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아치 밑으로는 웨스트워드 익스팬션 박물관(Museum of Westward Expansion)이 연결되었다.

 

 

세인트루이스는 도착부터 떠나는 날까지 평화와 안온함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조용한 가운데 안으로는 바글바글 끓어 넘치는 용광로처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미국의 여느 도시들처럼, 짧지만 화려한 역사와 전통을 기반으로 아이디어와 활력이 맥박치고 있었다. 그 한 복판에서 세계의 인재들을 불러 모으는 곳이 바로 워싱턴대학교였다. 그러나, 어쩌랴! 56일 간의 짧은 일정 속에 바늘구멍으로 들여다 본 풍경. 그게 세인트루이스의 허상일까, 아니면 실상일까.

 

 


Thinker on rock-Barry Flangan 작, 1997. 워싱턴대학교 교정

 

 

 


John M. Olin Library

 

 

 


 Carl Neureuther에 대한 감사 동판

 

 

 


도서관 서가

 

 

 


도서관 서가

 

 

 


동아시아 도서관

 

 

 


인문대학 동아시아 언어문화학과 이지은 교수 연구실

 

 

 


이 교수 연구실의 서가

 

 

 


MCAA 첫날 연회

 

 

 


학술발표회에서. 린덴우드 대학교 중국어학과 Brian Arendt 교수와 함께

 

 

 


동아시아학과의 Rebecca Copeland 교수(일본문학교수/동아시아학부 학부장), 

Holden Thorp 박사(교무처장/학사부총장/리타 레비-몬탈시니 석좌교수)와 함께

 

 

 


이지은 교수와

 

 

 


연회장에서 이지은 교수, 이재연 교수, 고인성 교수 등과 함께

 

 

 


저녁식사 자리에서 함께 한 한국학자들

 

 

 


밀드레드레인켐퍼 미술박물관

 

 

 


미술박물관에서 만난 시팅불(Sitting Bull)[Andy Warhol 작]

 

 

 


피카소의 <알제리의 여인들(Women of Algiers)>

 

 

 


Max Beckmann의 <Artists with vegetable>

 

 

 


미주리 역사박물관

 

 

 


미주리 역사박물관 소장 '세계무역박람회장 가는 길'

 

 

 


역사박물관 전시품

 

 

 


역사박물관 소장 포스터

 

 

 


역사박물관 소장 '수레'

 

 

 


커피산업에 대한 세인트 루이스의 자부심 "시애틀은 비켜 서세요!"

 

 

 


그 당시 커피 브랜드의 하나

 

 

 


세계 각국에서 수입되는 커피 원두들

 

 

 


어렵던 시절의 미주리주 주민들

 

 

 


당시 야구경기 모습.

 

 

 


게이트웨이 아치

 

 

 


게이트웨이 아치

 

 

 


Forest Park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멋진 개인주택

 

 

 


Forest Park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멋진 개인주택

 

 

 


세인트루이스 다운타운의 한가로운 모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14. 21:00
 

      잿더미로 변한 숭례문을 조상(弔喪)함


                                                                            조규익


그간 근대화 과정을 거쳐 오면서 문화의식을 깡그리 잃어버린 우리가 드디어 일을 내고 말았다! 이건 단순히 편집증에 사로잡힌 ‘늙은 미치광이’의 소행이 아니다. 바로 우리 모두의 천박한 문화의식이 일을 저지른 것이다. 게걸스레 눈앞의 먹을 것만 탐하고, 민족의 찬란한 과거와 미래는 남의 것인 양 날뛰던 우리가 결국 일을 저지르고야 만 것이다.


***


숭례문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 역사의 문이요, 문화의 문이요, 마음의 문이었다. 문을 없애버렸으니, 과연 우리가 들어갈 곳이 어디며, 나갈 곳이 어디란 말인가. 들고 날 수 없으니, 우리는 꼼짝없이 무덤 속에 갇힌 송장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다. 자존심도 자부심도 역사에 대한 책무도 모두 방기(放棄)한 채 남이 먹다 버린 음식물 찌꺼기나 주워 먹는 우리 속의 거먹 돼지들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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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 단정, 의연했던 우리의 숭례문


숭례문은 어떻게 세워졌는가. 개경에서 혁명에 성공한 태조 이성계는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했다는 풍수론을 근거로 즉시 천도하려 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수도를 옮기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우여곡절 끝에 태조 3년 9월 혁명세력의 실권자 정도전의 의견을 수용하여 한양을 신도로 정했으며, 그 한 달 후 천도는 단행되었다. 마음이 급한 태조는 우선 천도를 감행한 다음 신도를 건설했다. 천도 이후 태조 5년 9월 사이에 종묘·사직·궁궐 등 기본 건축물과 북악·낙산·남산·인왕산을 연결하는 전장(全長) 19km의 도성이 완공되었고, 동시에 그 출입문인 흥인문(동)·돈의문(서)·숙정문(북)과 함께 숭례문(남)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숭례문은 남방에서 나랏님이 계신 서울을 바라보고 몰려오는 백성들 누구나 몸을 굽히고 통과해야 하는 ‘나라의 문’이었다. 백성들에게 나라 법도의 엄숙함을 보여 온 위풍당당함, 외적으로부터 이 나라 최후의 보루를 지켜온 의연함과 강함, 역사의 갈피갈피 우여곡절을 극복해 나온 이 민족에게 자부심을 안겨 준 굳건함과 불변하는 아름다움 등. 숭례문은 모진 세월을 견디며 우리 민족의 가슴에 ‘불사조(不死鳥)의 이미지’로 살아남은 생명체였다.


그런데, 그걸 태우다니! 나라 땅을 침범한 외적과의 싸움에서 불탄 게 아니요, 우연한 사고로 불탄 것도 아니다. 70을 바라보는, 한 미친 노인의 소행이라니! 인생 70이 청춘으로 예찬되는 요즈음이며, 죽을 때까지도 철 못 드는 인간들로 가득 찬 세상이라 하나, 그래도 70이 적은 나이인가. 아무리 가슴에 맺힌 억울함이 병으로 돌았다 하나, 몹쓸 해코지의 대상으로 하필 숭례문을 택했단 말인가.


***


유럽을 가보라.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기원전의 유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위용을 뽐내는 그 문화의 꽃밭을 가보라. 과연 그들 중에 성벽의 돌을 빼내다가 구들을 놓는다거나 책장을 찢어 벽지로 바르거나 종이공예의 재료로 삼는 망나니들이 있는가. 지금도 몇 푼의 돈에 팔린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알게 모르게 ‘나까마’들의 품에 실려 일본으로 넘어가는, 비통한 현실을 우리 중의 몇 %나 알고들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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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트리어 시의 북쪽 문인 포르타 니그라. 기원전 2~3세기 로마지배 시절의 유적임


오호 통재라, 국보 1호를 통째로 구워먹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활보하는 ‘너와 나’의 무감각이여! 내려앉은 가슴 저 깊이에 미래의 탑은 산산이 부서진 채 널브러져 있는데, 그 불쌍한 잔해들 앞에 무력하게 주저앉아 숭례문의 최후를 슬퍼하노라.  

 


      숭례문이 불타던 다음날 아침


                        백규 통곡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