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8. 4. 20:08

 


무스코기 초입의 이정표

 

 


무스코기 초입에서 만난 인포메이션 센터

 

 


아미쉬 레스토랑의 표지판

 

 


아미쉬 레스토랑의 정갈하고 소박한 음식

 

 


아미쉬 레스토랑의 내부

 

 


아미쉬 버터 및 치즈 광고판

 

 


무스코기 네이션의 문장(紋章)

 

 


연합 인디언 네이션의 문장

 


무스코기 네이션의 국기 

 

 


삼강박물관(The Three Rivers Museum)에서 큐레이터들 및 보안관과 함께

 

 


보안관의 현란한 '권총 돌리기'

 

 


삼강박물관의 생활사 자료

 

 

 

 

크릭(Creek) 족의 꿈과 현실을 찾아

 

 

 

2014224일 아침 8시 오클라호마시티 윌 라저스 공항[Will Rogers World Airport]’ 발 유나이티드 아메리카 항공편으로 시카고 오헤어 공항으로 이동, 한국행 아시아나에 몸을 실으면 미국 생활은 끝이었다. 그래서 이 땅에 남은 미련을 남김없이 태우고자 21-22일 크릭 인디언들의 집거지를 거쳐 출발 전날 오클라호마 시티에 입성하기로 했다. 무스코기(Muscogee)와 오크멀기(Okmulgee)에 모여 산다는 크릭 인디언들을 만나기 위해 털사(Tulsa) 방향의 동쪽 우회로를 택하기로 한 것이다.

 

체류하는 동안 오클라호마에 거주하는 39개 인디언들 가운데 겨우 10여개 부족들을 접한 우리였다. 10여개 부족들 가운데는 이른바 문명화된 다섯 부족들[The Five Civilized Tribes: 체로키(Cherokee), 치카샤(Chickasaw), 촉토(Choctaw), 크릭(Creek/Muscogee), 세미놀(Seminole)]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오클라호마 동쪽의 크릭은 마지막 코스로 남겨 두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인들은 이 다섯 부족들을 ‘Civilized Tribes’로 부르고 있었으나, 그동안 우리는 그 말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civilized’문명화된으로 번역할 경우, 그동안 우리가 만난 여타의 인디언들은 뭐란 말인가. 우리가 보기에 그들 역시 이미 문명화된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훌륭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고 있는 OSU 역사과의 모제스(Dr. L. G. Moses) 교수에게 물었더니, 이 다섯 부족들이 식민시대나 초기 미 연방시대에 앵글로 색슨 계열 정착자들의 생활방식이나 관습을 수용, 그들과 선린관계를 맺어오면서 문명화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라고 했다. 내가 그 말을 미국화로 바꾸어 이해해도 무방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221. 겨울날씨치곤 쨍쨍하게 맑고 온화했다. 이 땅을 떠나기로 되어 있는 24일까지 만 3. 하룻밤은 인디언 구역에서, 나머지 이틀 밤은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보내기로 했다. 짐가방들을 트렁크에 때려 실은 우리는 렌터카를 몰고 학교를 한 바퀴 돈 뒤 177, 412, 44번 하이웨이 등을 번갈아 타면서 무스코기로 달렸다. 털사로부터 한 시간쯤이나 달렸을까. 무스코기 초입의 길가에 자그마한 관광안내소[Muskogee Tourist Information Center]가 나타났고, 그 건너편에 참한 식당 하나가 숨듯 서 있었다. 이곳에서 아미쉬 레스토랑[Amish Restaurant]’을 만나다니! 행운이었다. 전통 기독교 교회공동체 아미쉬. 메노파(Mennonite) 교회들과 비슷하지만 다른 집단이다. 그들은 스위스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재세례파(再洗禮派)’[16세기 종교개혁의 급진적 좌파 운동 집단으로서 유아세례를 부정, 죄와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성인세례를 받는 것만이 타당한 세례라고 보았음]와 근원을 공유한다. 단순한 생활, 검소한 복장, 문명과 기술의 이기(利器) 등을 기피하는 그들이었다. ‘목마른데 옹달샘 만난 격으로 여기서 그들이 운영하는 식당을 만나게 된 것. 앤틱 풍의 인테리어가 약간은 생소했으나, 벽면 가득 옛날 장식품들이 편안해 보였고 이들만의 풍미(風味) 또한 일품이었다.

 

다시 관광안내소로 돌아와 체구 좋은 중년 여성 자원봉사자의 친절한 설명을 들었다. 무스코기라 지칭하기도 하는 크릭 족은 오클라호마 주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현재 이곳 외에 앨라배마조지아플로리다 등에도 분포되어 있었다. 우리가 이미 만나 본 세미놀 족 역시 이들처럼 무스코기 어[크릭 어]를 사용하는, 가까운 부족이었다. 원래 무스코기 족은 오늘날 테네시조지아앨라배마 주에 걸쳐 흐르는 테네시 강을 따라 건축물을 쌓았던 미시시피 문명의 후예로 추측된다. 미시시피 문명을 이룬 사람들 가운데 최대의 공동체는 카호키아 토성터[Cahokia Mounds]’로부터 나왔으리라 추정되는데, 이미 그 시대에 계급화된 사회나 상속이 이루어지던 종교적정치적 집단이 생겨나 미국의 중서부와 동부를 800년부터 8세기 가까이 지배하고 있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무스코기 족이 바로 그 후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초기에 개척자로 등장한 스페인 사람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고, 그 가운데 탐험대를 이끌고 나타난 스페인 사람 데소토와 마빌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데소토의 탐험대가 퍼뜨린 전염병으로 많은 인디언들이 죽어 인구가 급격히 감소되었고, 결국 미시시피 문명도 붕괴되기에 이르렀으나, 살아남은 인디언들 가운데 무스코기 어를 쓰는 사람들이 무스코기 부족 혹은 무스코기 부족 연합으로 다시 뭉치게 된 것이다.

 

1866년 새 정부를 세운 크릭 족은 오크멀기를 수도로 정했고, 1867년에 세운 의사당을 1878년엔 더 크게 확장했다. 우리가 돌아본 크릭 네이션 의사당은 국가의 역사적 랜드마크로서 크릭 족 의사당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크릭 족은 번영기였던 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학교교회공공건물 등을 지었는데, 이 시기 이 종족은 자치조직을 갖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연방정부로부터는 최소한의 간섭만 받고 있는 상태였다.

1898커티스 법[Curtis Act]’에 의해 부족 정부가 해체되었고, ‘도스 할당법[Dawes Allotment Act]’에 의해 부족의 임대 토지는 사라지게 되었다. 도스 위원회는 부족원들을 혈통에 의한 크릭 족자유민으로서의 크릭 족으로 나누어 등록을 했다. 그런데 그들은 부족원들이 갖고 있는 크릭 혈통의 비율에 상관없이 아프리카 혈통만 인정되면 누구나 그 범주에 분류해 넣었던 것이다. 1906426, 미합중국 의회는 1907년에 오클라호마가 주의 자격을 인정받을 것으로 예상, ‘1906년 문명화된 다섯 부족 법안을 통과시키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크릭 족은 8,100의 땅을 비원주민 정착자들과 정부에 빼앗기고, 그 후에야 ‘1936년 오클라호마 인디언 복지법아래 일부 무스코기 족 도시들은 연방의 승인을 받게 된 것이다. 크릭 네이션은 1970년까지 재조직되거나 연방의 인정을 다시 얻지 못하다가 1979년에야 1866년의 헌법을 대체하는 새 헌법을 만들어 비준하게 되었다. 1976년 하르호(Harjo)와 클레피(Kleppe) 간의 법정 소송사건으로 미합중국의 가부장주의는 종식되고, 민족자결권이 고양되었다. 크릭 네이션은 후손들의 구성원 자격을 결정하기 위한 기초로 도스 법의 명단을 이용, 58,000명이 넘는 할당자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등록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현재 크릭 족의 인구는 69,162, 주요 거주지는 미국의 오클라호마 주이며, 종교생활은 기독교[특히 침례교와 감리교], 종교적정치적전통주의적 조직인 네 엄마들의 결사(結社)[Four Mothers Society]’를 중심으로 영위되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특히 크릭, 체로키, 촉토, 치카샤 등 네 종족이 주로 그들의 땅을 비원주민 이주자들에게 할양하도록 한 도스 법이나 미 의회의 법안 활동 등에 반발하여 결성한 복합적 조직이 바로 이것이었다.

인포메이션 센터의 직원으로부터 무스코기와 오크멀기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얻은 다음 본격적인 탐사에 나섰다. 먼저 언덕 위의 ‘Five Civilized Tribes Museum’에 들렀는데, 1850526일에 세워진 무스코기 네이션의 옛 건물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들어가 보니 소장품은 별스럽지 않았다. 1층에는 다섯 부족의 휘장[seal]들과 사진 몇 장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조차 찍지 못하게 했다. 1층에서 올려다보니 2층에도 식탁이나 의자 등 생활사 자료들이 몇 가지 진열되어 있을 뿐이어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다른 네 부족들을 찾아 그들 문화와 역사유물들의 진수를 맛보고 온 우리였다. 그러한 유물들의 일부를 복제하여 모아 놓고 ‘Five Civilized Tribes Museum’의 간판을 붙인 뜻은 좋았으나, ‘통합문화를 보여주기엔 턱 없이 모자라는 컬렉션이었다.

 

약간의 실망감을 안고 무스코기 시내로 달려 들어갔으나, 이곳 역시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경기가 안 좋아서인지 기름기가 빠져 있었다. 간판마저 흐릿하게 퇴색되고 있는 옛 건물들만 경기가 좋았던 그 시절의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을 뿐 널찍한 시내 도로들에는 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우리는 옛날의 역사(驛舍)를 재활용하여 만든 삼강박물관[Three Rivers Museum]’을 방문했다. 잘 나가던 시절 카우보이들이 텍사스나 오클라호마의 중남부로부터 몰고 온 소떼들을 열차에 싣고 동부로 나아가던 오클라호마 주의 출구가 바로 이곳이었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성 자원봉사자 한 분이 오랜만에 만나는 외국 손님에 당황했는지 허둥거리며 친절을 베풀었다. 큰 역사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만큼 세련되지는 않았으나, 오클라호마 주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장감이 이곳에서도 물씬 풍겨났다. 잠시 후 그 여성이 전화로 호출한 정식 큐레이터가 달려왔고, 그녀로부터 박물관을 꽉 채운 각종 생활사 자료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설명이 다 끝나갈 무렵 크릭 인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보안관이 들어왔다. 홀을 꽉 채울 듯 거대한 몸집의 그는 꽤나 붙임성이 좋았다. 대대로 이 도시에서 살아온다는 그는 보안관이라는 자신의 직책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 했다. 무엇보다 한국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가계와 이 도시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바빴다. 급기야는 우리를 환영하려는 의도였는지 자신의 권총을 빼내 현란한 손놀림을 보여주기도 했다. 밖에 놓인 열차 유물까지 둘러 본 다음, 친절한 사람들로부터 간신히 빠져 나온 우리는 즉시 차를 몰아 1시간 거리의 오크멀기에 도착, 1박을 하게 되었다.

토요일인 다음날 오크멀기의 탐사에 나섰다. 공공기관이나 박물관 등은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 하는 수 없이 도심 주요부분들을 걸어 다니며 느껴보기로 했다. 윤기가 빠진 점은 다른 도시들과 같았으나, 규모가 제법 컸다. 오클라호마 주 오크멀기 카운티의 도시이자 남북전쟁 이래 크릭 네이션의 수도였던 곳이다. 그 명칭 ‘Okmulgee’는 영어로 끓는 물(boiling water)’를 뜻하는 크릭 단어 ‘oki mulgee’에서 나왔다는데, ‘졸졸 흐르는 시내[babbling brook]’ 혹은 증발악취[effluvium]’ 등으로도 번역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곳은 분명 노천온천 지역이었을 것이다. ‘악취 나는 끓는 물이라면 아마도 유황온천이었으리라. 인근의 체로키 네이션에서 발견한 그들의 환영사 ‘Osiyo[오시오]’를 내가 우리말 ‘(어서) 오시오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했듯이, ‘oki mulgee’ 아쿠 (뜨거운) !’로부터 나온 것이나 아닐까 상상해 보았으나, 근거를 대지 못하는 한 부질없는 생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 내내 크릭 네이션의 수도였던 만큼 시내 곳곳에 고풍스런 자취가 많이 남아 있었다. 33.2의 넓은 땅에 2010년 기준 12,321명의 인구가 분산되어 살고 있으므로 한산할 수밖에 없지만, 전체적으로 기름기는 빠져 있었다. 우리가 찾으려 한 오크멀기 다문화 역사 박물관[Okmulgee Multicultural Historical Museum]’을 길가에서 발견하고 차를 멈추었으나, 이미 문을 닫은 채 이전했다는 메모만 문 앞에 걸려 있었다. 주변에 물었으나,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고, 찾아간들 토요일에 문을 열었을 리 없어, 하릴없이 무스코기 네이션 본부가 위치한 곳을 찾았다이미 130여년이나 지난 시기의 건물들이 넓은 땅에 여유롭게 늘어서 있었다. ‘무스코기 네이션 크릭 의사당[Muscogee Nation Creek Council House]’, ‘크릭 의회[Creek Capitol]’, ‘크릭 네이션 수도 청사[Creek Nation Capital]’ 등 단순 소박한 건물들이 주변의 상가들과 행복한 어울림을 이루고 있었다. 1867년 조직된 크릭 네이션의 수반 코우치먼[Ward Coachman] 시대에 오크멀기는 수도로 지정되었고, 1870년에는 오크멀기 헌법도 제정되었다. 수도 청사 의사당 건물 뒤편의 잔디밭에는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인디언 관련 유물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가운데 눈물의 행진[Trail of Tears]’ 표지가 버티고 서 있었다. 미국이 인디언 특히 크릭 족에 대하여 자행한 횡포를 고발하는 내용임은 물론이다. 어느 인디언 네이션에 가도 ‘Trail of Tears’ 표지가 서 있는 곳은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이다. 인디언들에게 가한 미국의 원죄는 인디언이 살아 있는 한 업보가 되어 그들을 괴롭힐 것임을 이 표지판은 말해주고 있었다.

 

 


삼강박물관의 생활사 자료[MKT 라인, 즉 '미주리-캔자스-텍사스' 간 철도 노선에서 사용되던 각종 물건들] 

 

 


삼강박물관에 소장된 인디언 관련 그림[승천하는 전사의 영혼?]

 

 


삼강박물관에 소장된 인디언 관련 그림[크릭 족 전사?]

 

 


삼강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기관차

 

 


박물관에 전시된 기차의 기관실


 


지금은 박물관과 음악 홀로 쓰이는 당시의 화물열차 역

 

 

 
무스코기 초입의 환영 표지판

 

 


오크멀기에서 저녁을 먹은 집[값싼 등심이 맛있는 집]

 

 


한산한 오크멀기 시가지

 

 


크릭 네이션 의사당

 

 


크릭 네이션 의사당

 

 


'눈물의 여정' 설명판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

 

 

의사당을 떠난 우리는 널찍널찍한 주택가를 배회하다가 크고 멋진 교회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는 미국에서 보기 드문 천주교 성당도 있었다. 이름은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St. Anthony of Padua Catholic Church]’. 천주교 신자인 아내의 말대로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성당 뒤편 주차장에 차를 대는데, 작은 차 한 대가 또르르 달려왔고, 문이 열리면서 로만칼라 복장의 연세 지긋하신 신부 한 분이 의상을 손에 들고 급히 나와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곳에 들어오면서 미사가 있다고 공지되어 있는 것을 본 터라 우리도 부랴부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미사 예정 시각이 지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당 안은 텅 비어 있는데, 아까 들어온 신부가 촛불을 붙이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물으니 오늘 특별 미사가 있는데, 아직 수녀가 당도하지 않아서 당신이 직접 미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라 하자 반색을 하며 우리를 위해 포즈를 취해 주었다. 휑하니 넓은 성전에는 우리 둘 만 앉아 있었고, 신부 혼자 미사 준비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참 겸연쩍었다. 최소한 한 시간 가까이 걸릴 미사에 우리 둘만, 그것도 천주교 신자로는 아내 한 사람만 참여하는 셈이니, ‘참으로 기이하고 멋쩍은 경험아닌가.

 

우린 갈 길이 바쁘니 어여 나갑시다!’ 신부가 옷을 입으러 들어간 틈에 나는 아내의 옆구리를 찔렀다. 나의 표정이 완강해 보였던지 아내도 마지못해 따라나선다. 밖으로 나오며 생각하니 참으로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특별미사에 신도는 하나도 없고, 그나마 찾아온 한국인 관광객 두 명마저 종적이 묘연하게 사라지고 말았으니, 미사복을 입고 나온 신부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7~8년 전 유럽 자동차 여행에 나섰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상당수의 성당이나 교회들은 주일날에도 문이 닫혀 있었다. 주일 예배에 참여하고자 하이델베르그의 한 교회에 갔더니 교회 문은 열려 있었으나 목사 한 분이 앉아서 무료하게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서구사회에서 교회가 망하고 있음을 절감한 순간이었다. 그래서인가. 이 성당 정면엔 미국정신과 함께 가톨릭 정신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며[Keeping Catholicism Alive With American Spirit]’라고 쓰인 걸개가 늘어져 있었다. 그에 비해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교회에 모여 활동을 벌이는 젊은이들은 미국 사회에 뿌리내린 신교의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도시 외곽에 자리 잡은 OSU 무스코기 캠퍼스를 거쳐 무스코기 참전용사 비’, ‘무스코기 크릭 네이션 지방법원등을 일별한 다음 마지막 행선지 오클라호마시티를 향해 40번 하이웨이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크릭 탐사는 끝이 났다.

 

***

 

크릭 족을 대면하기 위해 무스코기와 오크멀기를 찾았으나, 박물관의 유물이나 건축물로 남아 있는 삶의 흔적만 보았을 뿐, 그들의 종적은 없었다. 그렇다. 아직도 검붉은 얼굴에 검은 머릿결을 날리는 그들의 모습이 유지될 리는 없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도 아닐 것이다. 나와 다른 모습의 이웃들과 섞이고 사랑함으로써 나를 변모시키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었을 터. 그러나 신화 속에 살아 숨 쉬는 인디언들의 문화나 의식도 언젠간 새로운 시대 삶의 원리로 부활될 수 있으리라. 돌고 도는 것이 세상 이치라면, 지금 위세를 떨치는 서구문화의 끝판 어디쯤에서 그 옛날 인디언들이 영위하던 생활양식이나 정신이 그들의 이름을 잊어버린 채 새로운 삶의 원리로 사람들을 고양(高揚)시키게 되리라. 그 때를 기다리며 은인자중하며 살아가는 크릭 인들을 우리는 여기서 만난 것이다.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의 사제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 100주년[2008] 기념 표지

 

 


빠두아의 성 안토니 교회 내부

 

 


오크멀기 제일 장로교회

 

 


오크멀기 제일 장로교회 내부

 

 


오크멀기 연합 감리교회

 

 

 


무스코기 전몰용사 추모비[한국전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병사들 포함]

 

 


오클라호마시티의 '윌 라저스 공항' 인근에서 만난 석유채굴기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2. 26. 09:16

 

 

 

길 가다가 아이오와(Iowa) 족을 만나다!

 

 

 

 

 

 

미국에 온 이후 갖가지 일들에 정신이 팔린 채 살아왔으나,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다니는 분야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다. 지난 10월 털사(Tulsa)에서 34일간 진행되었던 ‘2013년 풀브라이트 강화 세미나[2013 Fulbright Enrichment Seminar]’에 참여하여 오세이지(Osage) 인디언 보호구역을 방문한 이래 11월 하순 체로키(Cherokee) 인디언 네이션까지 답사함으로써 문명화된 다섯 인디언 부족들[Civilized 5 Indian Tribes]’ 중 두 개를 체험한 셈이었다. 그러나 오클라호마 주만 해도 36개의 인디언 부족들이 주로 남부지역에 터를 잡고 있는데, 최소한 다섯 부족만이라도 접해보는 것이 내 목표였다. 그래서 이번 겨울방학 초반에 그 목표를 달성하고자 나선 길이었고, 그 행선지가 바로 치카샤(Chickasha) 인디언 네이션이었다.

 

***

 

20131216일 아침 10시쯤 집을 나섰다. 첫 목표지는 치카샤 인디언 네이션이 있는 아다(Ada)였고, 거기로 가기 위해 타는 길이 177번 하이웨이였다. 177번길의 스틸워터 시내 구간은 퍼킨스 로드(Perkins Road)였고, 묘하게도 그 길은 퍼킨스 시티(Perkins City)로 연결되었다. 즉 퍼킨스 로드를 따라 스틸워터에서 벗어나 30분쯤 가니 퍼킨스 시티가 나오고 그로부터 남쪽으로 계속 4마일쯤 달리다가 눈에 번쩍 뜨이는 표지판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Iowa Tribe of Oklahoma”란 글자들 밑에 이상한 모양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앙증스러운 표지판이었다.

 

 


스틸워터 시내의 퍼킨스 길(Perkins Rd.)

 


177번 도로에서 2~3분 가량 들어간 B의 위치에 아이오와 네이션이 있다.


 


177번을 달리다가 길가에 있는 이 표지판을 발견했다.

 

 

부족을 뜻하는 ‘tribe’란 말과 독수리 깃털로 만든 문장의 디자인이 분명 인디언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이전에 아이오와 주[Iowa State]’는 들어보았으되, 그런 이름을 달고 있는 인디언을 들어본 적이 없던 터라 의아해 하면서도 처음엔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1~2분 정도 달리다가 아무래도 그냥 지나칠 순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해도 그것이 인디언 부족인 이상 그냥 가면 나중에 후회가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차를 돌려 이곳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하이웨이로부터 빠져나가 5분 정도 들어가니 과연 오하이오 네이션이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관리 사무소에 들어가니 20대 후반의 아가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었으나 기초적인 사항을 제외하고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책임 있는 인사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묻자 한참 만에 족장[Tribal Chairman]이 나와서 나를 자기 방으로 불러 들였다. 수인사를 나눈 뒤 그에게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졌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는 자기네 부족의 과거와 현재가 술술 흘러나왔다.

 

 


네이션 입구의 간판


아이오와 네이션


 


아이오와 네이션의 친절한 아가씨 Miss Kent Tehavno

 

 

토착 원주민들 가운데 하나인 아이오와 부족은 (연방정부와의) 각종 조약과 법령으로 인정된 자치정부를 갖고 있는, 말하자면 독립적 주권국가의 중심에 있다고 했다. 자체 헌법과 각종 법률, 통치체제를 갖고 있다는 설명이었는데, 정말로 당신네 공동체가 독립국가냐고 물으니, 미국민이지만 어느 정도 자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식으로 정정하기도 했다.

 

 


아이오와 트라이브의 족장[Tribal Chairman] Mr. Gary Pratt

 

 

아이오와 사람들은 자신들을 회색 눈[grey snow]’을 뜻하는 바코제(Bah-Kho-Je)’로 부르는데, 그 말은 겨울 몇 달 동안 난방 연기로 그을린 눈에 뒤덮인 그들의 집이 회색으로 보인 데서 나왔으며, 아이오와 주[Iowa State]의 이름도 아이오와 부족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했다.

 

오네오타(Oneota) 지역민들의 후손인 아이오와 부족은 1600년대에 남서 미네소타의 파이프스톤 쿼리(Pipestone Quarry)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1730년에는 북서 아이오와 오코보쥐(Okoboji) 호수와 스피릿(Spirit) 호수 지역의 마을들에 살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들은 아이오와 주 카운슬 블렆스(Council Bluffs) 인근에서 남쪽으로 이동했고, 18세기 중반에는 그들의 일부가 드 모인(Des Moines) 강으로 이동해 올라갔다. 당시 남아 있던 사람들은 스스로 미주리의 그랜드 플랫강(Grand and Platte River)가에 정착했고, 연방정부와의 조약에 따라 미주리, 아이오와, 미네소타 등의 땅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게 되었다. 연방정부와 맺은 1936년의 워싱턴 조약에 따라 그들 중 일부에게 네브라스카와 캔자스에 있는 그레이트 네마하 강(Great Nemaha River)을 따라 보호구역을 할당해 주었으나, 나중에 아이오와 족 일부가 오클라호마의 인디언 구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1883815일 날짜로 발령된 대통령령[Executive Order]에 의해 설립된 것이 원래 오클라호마 주 아이오와 보호구역이다. 나중에 아이오와 네이션은 두 부분으로 분할되었는데, 오클라호마의 아이오와족은 남부 아이오와이고, 캔자스와 네브라스카의 아이오와족은 북부 아이오와다.

 

 


오클라호마 주 인디언 분포 지도 가운데 Iowa 족의 구역

 

 

 

족장은 특히 자신의 부족이 강인한 정신력으로 고난과 불공평 등 그들을 억압한 역사의 시련들을 견디어 온 데 대한 자부심을 강하게 피력했으며, 아이오와 족은 현재 490명 이상의 등록 인구를 갖고 있으며, 페인(Payne), 오클라호마(Oklahoma), 링컨(Lincoln), 로건(Logan) 카운티 전역 혹은 부분들을 아우르는 사법 관할구역을 갖고 있다고 했다. 아이오와 족은 지역 행정 기관과 부족 기업들의 회계부서, 부족이 운영하는 경찰과 소방서 등을 포함 다양한 분야에서 160여명이 고용되어 활약할 만큼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명이 끝나고, 족장 뒤편에 있는 문장에 대하여 물었다. 인디언 부족들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들의 실(Seal) 즉 문장(紋章)이 가장 중요한 상징이라는 사실이었다. 각 문장에는 해당 부족들의 현실과 꿈, 그리고 철학이 응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문장은 1978년 밥 머레이(Bob Murray)가 디자인한 것인데, ‘생명의 순환 고리를 의미하는 원은 신성한 독수리의 깃으로 장식된 아이오와 전사의 전투모를 상징한다. 원 안에는 신성한 파이프[담뱃대]가 있는데, 아이오와 족의 각 클랜(clan)은 그 자신들의 신성한 파이프를 클랜 우두머리 집에서 가까운 방어구역 안에 갖고 있으면서 각종 제사나 의식(儀式), 특히 평화와 동맹을 맺는 절차들에 사용했다고 한다. 원 안의 쟁기는 아이오와 족의 농경 전통을 나타내며, 원의 양쪽에 매달려 있는 총채 비슷한 털 자루는 전통적으로 버팔로의 은신을 본뜬 떨림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오와 족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활과 화살을 운반하는데 사용되었다. 원 아래 쪽의 독수리 깃털 네 개는 사방의 바람과 사계절을 나타내는데, 전통적으로 아이오와 족은 독수리를 존경해왔으며, 부족과 신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독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단순치 않은 의미가 바로 이 문장에 숨어 있었다.

 

 

 


아이오와 족의 문장

 


아이오와 족이 존경하는 독수리

 

 

족장의 설명을 듣고 난 다음 방문한 갤러리에는 부족의 삶을 보여주는 물건들과 예술품들이 가득했다. 비록 흩어져 있는 부족원들을 모두 합해 봐야 1000명이 채 되지 않는 소수그룹이지만,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이방 나그네의 눈에는 매우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비쳤다. 그러나 과연 이 작은 공동체가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이오와 족 부족 축제

 


갤러리에 전시된 Eric BigSoldier의 작품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2. 2. 06:06

 

 

 

체로키어 ‘오시요(Osiyo)’와 우리말 ‘(어서) 오세요!’의 정서적 거리

 

 

 

 

1128일 아침 스틸워터를 출발, 털사를 거쳐 오후 3시쯤 체로키 네이션(Cherokee Nation)의 수도 탈레콰(Tahlequah)에 도착했다. 도시로 진입하자 전체적으로 약간 이색적인 기풍이 느껴지는 점만 제외하면 미국의 여느 지역 도시들과 다를 바 없었다. 중국식 표현으로 말하면 미국 판 만족(蠻族) 이라고나 할까. 간판의 영문글자 위에 작은 글씨로 체로키 글자들이 병기되어 있는 것만 다를 뿐 교통체계, 건물 양식,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여타 지역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미국 땅이었다.

 


체로키 네이션의 깃발


체로키 네이션의 문장(紋章)


stop 사인 위쪽의 글자는 같은 뜻의 체로키 글자

 

미국 백인들의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거나 말거나 이곳에서는 체로키인들 나름의 생활을 볼 수 있길 바랐으나, 그건 내 순진한 소망이었을 뿐. 호텔과 월마트, 주유소 및 맥도날드 몇 군데만 열려 있을 뿐 모든 곳이 꽁꽁 닫혀 있었다. 일단은 실망이었다.


 


체로키 네이션 안에서 유일하다는 체로키 고유 음식점. 명절날 점심에 잠깐 열었다가
닫은 모양이다.

 

***

 

인디언으로 보이는 호텔 프런트 아가씨들의 설명을 듣고 체로키 네이션 본부와 헤리티지 센터 및 뮤지엄을 찾아갔으나, 사람 없는 곳에 청설모들과 사슴들만 분주하게 그들의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체로키 네이션의 베테란 센터


체로키 네이션의 정부 청사


체로키 헤리티지 센터 입구


헤리티지 입구에서 만난 사슴(노루?)들

 

하릴없이 돌아오면서 월마트에 들렀다. 다른 곳과 달리 그곳엔 사람들이 미어질 정도로 모여들고 있었다. 상품 매대(賣臺)마다 금줄이 둘러져 사람들의 손을 막고 있었고, 그 앞과 옆으로 카트를 밀고 있는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다. 점원들은 그들의 주위를 오가며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모습. 이제 6시만 되면 일제히 달려들어 자신들이 점찍어둔 물건들을 카트에 실을 태세들이었다. 이른바 몇 시간 앞당겨진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였다.

 


이 날 월마트(Walmart)는 블랙프라이데이 때문에 붐볐다.

 

미국 전역에서 Thanksgiving Day가 끝나자마자 모든 상점들은 엄청난 할인 가격으로 재고물량을 소진시키는 행사들을 갖곤 하는데, 여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마 가전제품 등 고가의 물품들이 그 주된 대상일 텐데, 비디오 코너나 어린이 용품 코너에도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모든 품목이 다 해당되는 듯 했다. 인디언 문화를 보고자 여러 시간을 소비하며 찾아왔으나, 정작 인디언들은 보지 못한 채 멀미나게 목격해온 미국의 물질문화, 소비문화만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하릴없이 하룻밤을 호텔 방에서 묵고 다음 날 찾은 뮤지엄은 다행히 열려 있었다. 직원들은 모두 체로키 사람들이었고, 명절 연휴라서인지 관람객은 한 두 가족에 불과했다. 뮤지엄에서는 체로키 사회의 주요 인물들을 찍은 사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눈물의 여정(旅程)[Trail of Tears]’으로 불리는 강제 이동의 역사적 사건을 사진으로, 그림으로, 기록으로, 모형으로 세밀히 보여주고 있었다. 백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체로키 인들의 수난과 고통의 역사가 자그마한 집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관객들로 하여금 정복당한 민족의 운명을 생생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컬렉션을 설명해주던 큐레이터에게 한국과 체로키 문화의 동질성에 관한 내 의견을 말하며, 일례로 그들의 인사말인 ‘Osiyo[welcome의 뜻]’가 우리말의 오세요/어서 오세요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자[물론 이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며, 다만 나의 희망적인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그녀는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인사말보다 백인 지배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체로키 인들의 디아스포라와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이 박물관의 핵심 테마인 눈물의 여정에 기막히게 오버랩 되어 있었고, 정작 나는 그것을 설명하고 싶었으나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 사진 전시회의 포스터


'눈물의 여정' 설명판 


국립 체로키 뮤지엄


Andrew Hartley Payne의 달리는 모습. 그는 1928년 열린 '미 대륙횡단 도보 경연대회'
[1928년 3월 4일 LA를 출발하여 같은 해 5월 26일 뉴욕에 골인]의 우승자로서
체로키 인디언의 후예다.


체로키 레스토랑의 출입문에 쓰여진 'Osiyo'


체로키 네이션에서는 어딜 가나 'Osiyo'가 보인다.

 

건물 밖에도 그들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었다. 정착 당시의 일반 가정들과 학교, 교회, 상점, 대장간, 마굿간, 닭장까지, ‘눈물의 여정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의 기증으로 그곳에 재현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체로키의 관습을 몸으로 보여주는 체로키 남성 가이드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젊은 가이드는 체로키 의식(儀式)’에서 불리던 노래와 춤을 보여주며 그 의미를 설명했다. 전통적으로 체로키 인들은 유일신을 숭배해 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 그들은 일찍부터 기독교를 수용한 것으로 보였다. 그와 함께 그는 작은 돌들을 집어넣은 소형 거북이 껍질들을 여러 개 묶어 만든 그들만의 타악기를 보여 주었다. 발에 전대처럼 차고 처륵처륵소리를 내며 많은 사람들이 군무(群舞)를 추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지금도 봄철이면 많은 거북이들이 땅 위로 출몰한다고 했다.

 


정착 초기에 살던 집


집 앞에 서 있던 음식 저장고


새 희망 교회[New Hope Church]


가정집에서 부인이 사용하던 직물 기계. 우리의 베틀과 비슷한 원리를 갖고 있다.


농가


농가의 내부


집 바깥에 걸어둔 등


학교 건물


교실. 영어 알파벳과 체로키 문자가 함께 적힌 칠판이 보인다.


야외 마굿간에서 만난 '명상에 잠긴 말'

 


가이드 나탄의 노래를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 클릭하세요.

 


마른 거북에 돌들을 넣어 만든 악기를 들고 의식의 실제를 보여주는
젊은 가이드 나탄(Mr. Nathan Wolfe)


젊은 가이드의 또 다른 포즈

 

다른 두 명의 중년 가이드들은 각각 전통 사냥법과 활 전문가였다. 한 사람은 대나무에 침(針)을 넣고 입으로 불어 토끼 등 작은 동물들을 잡는 시범을 보여 주었고, 다른 한 사람은 돌을 갈아 살촉을 만들고, 강하고 큰 활에 그 화살을 메겨 적에게 쏘거나 사냥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두 사람의 설명을 통해 총으로 무장한 백인 침입자들의 출현에 속절없이 당하고 만 당시 체로키 인들의 비참한 상황과 역사의 아이러니가 눈앞에 떠올랐다.

 


대롱에 넣은 침을 입으로 불어 작은 동물을 잡는 시범을 보여주는 가이드


돌 화살촉 만드는 시범을 보여주는 가이드

 

헤리티지 뮤지엄을 떠난 우리는 탈레콰 다운타운으로 진출했다. 조용하고 널찍한 도로 양 옆으로 건물들이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 1자형 간선도로가 끝나는 곳, 도시의 핵심이자 다운타운을 내려다보는 위치 양지바른 곳에 북동부 주립대학[Northeastern State University]이 자리잡고 있었다. 2000명 규모의 작은 대학이지만, 아주 아름다운 캠퍼스였다. 학교 중앙에 세쿠오야(Sequoyah)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대학은 이곳 체로키 네이션의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듯 했다.

 


탈레콰 다운타운


북동부 주립대학[Northeastern State University]의 멋진 캠퍼스

 

체로키어를 읽고 쓸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세쿠오야는 문화의 기록과 전승을 가능케 한 민족의 영웅이었다. 원래 그는 은 세공장이었는데, 1821년 독자적인 체로키어 음절표를 만들어냄으로써 체로키 사람들의 지적 활동에 큰 혁명을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글자 없던 사람들에게 효율적인 쓰기 체계를 만들어 준 일보다 더 큰 공이 어디에 있을까. 그가 이 음절표를 만들어 내자마자 그것은 체로키 네이션에서 급속히 번지게 되었고, 1825년에는 네이션에서 공식 채택됨으로써 체로키 사람들의 문자 해독률은 주변의 백인 정착자들을 뛰어넘게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체로키인들에게 세쿠오야는 우리민족에게 세종대왕과 같은 존재인 셈이었다. 이곳 체로키 네이션 어딜 가나 세쿠오야의 사진이나 동상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대학 캠퍼스에 세워진 세쿠오야의 동상

 

NSU에서 나온 우리는 체로키 국립 대법원 박물관[The Cherokee National Supreme Court Museum]’체로키 국립 감옥 박물관[Cherokee National Prison Museum]’ 등에 들렀다. 탈레콰 타운 광장의 남동쪽에 위치한 대법원 박물관은 1844년 피어스(James S. Pierce)가 세웠으며, 체로키 네이션의 대법원 청사로 쓰이던 건물이다. 또한 체로키 네이션의 공식 간행물이자 오클라호마 주 최초의 신문인 체로키 애드버킷’[Cherokee Advocate, 1844년부터 1906년까지 간행]의 첫 인쇄 행사가 열린 곳도 바로 이 건물이다.

 


상공회의소 겸 관광안내소


탈레콰 시청


국립 체로키 대법원 뮤지엄 표지판


국립 체로키 감옥 박물관


1880년대 사용되던 수갑을 본떠 다시 만든 것


죄명에 따른 당시의 판결. 살인범은 교수형에 처했다. 계획살인에 단 3~5년형을 부과해놓고도
'중형'이라 너스레를 떠는 우리나라의 법관들은 반드시 배워야 할 법 정신이다.


당시 감옥의 주방


당시 감옥의 모습

 

체로키 애드버킷은 문화민족 체로키 인들의 자부심을 드러낸 간행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 1844926일 창간호에 실린 우리의 권리, 우리나라, 우리 민족이란 그들의 모토야말로 오늘날 우리도 수시로 외치는 구호가 아닌가? 당시 이 신문은 체로키 인들에게 미국과 미국인들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체로키어와 영어로 매주 발행되었다. 이 신문은 당시 미국 내의 유일한 민족 신문이었으며, 이 신문의 발간이 시작되자마자 다른 부족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1850년엔 촉토 인텔리젠서(Choctaw Intelligencer)’, 1854년엔 치카사 인텔리젠서(Chickasaw Intelligencer)’가 각각 발간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하여 잘못 된 고정관념을 갖고 있던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도 누구 못지않은 지능과 식견을 갖고 있음을 그들의 박물관들에서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Cherokee Advocate> Vol. 30, No. 3.[1906년 3월 3일자]

 

***

 

체로키 네이션을 방문한 것은 아직도 광활한 미국 땅에 온존하고 있는 식민주의의 잔재와 그 근원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지금은 다수자들의 통치논리에 순응하며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듯하지만, 민족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눈물의 여정(旅程)[Trail of Tears]’을 그들이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자신들의 말을 표기하기 위한 글자체계를 만들었고, 신문까지 발행했으며, 합리적인 사법 시스템까지 운영했던 그들의 지능과 문화를 과연 지배자로서의 백인들은 제대로 인식해온 것일까. 물론 과거의 역사를, 복수를 위한 근거자료 만으로 활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완전히 잊어버릴 경우, 삶의 바탕인 정체성마저 잃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깨닫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주 아름답고 생생하게 유지하고 있는 박물관들에 그 증거물들은 시퍼렇게 눈을 뜬 채 살아 있었다.

 


체로키 헤리티지 센터 빌리지에서 가이드와 함께 한 백규


빌리지 가옥 앞에서 Melani


북동부 주립대학교 교정에서 만난 오세이지족 인디언 소년 Joshua군과 함께.
부자간으로 보이지요?^^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22. 12:58

 

 

미국에서 풀브라이터(Fulbrighter)’로 지내기

 

 

 

#1 세관 검사나 입국심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시카고 오헤어 공항[O'Hare International Airport]. DS-2019 서류와 비자를 내밀자 그 여성 심사관은 , 풀브라이트, G-1, 팬태스틱!’하며 서류를 대충 훑어 보고 기본적인 사항만 확인한 뒤 선선히 통과시켰다.

 

#2 스틸워터(Stillwater)에 도착하여, OSU의 역사학과 사무실을 찾은 때는 섭씨 40도가 넘는 한여름 대낮이었다. 학과 비서 수잔(Susan Oliver)이 연구실로 나를 안내했다. 연구실 문 옆에 ‘Dr. Cho, Kyu-Ick/Visiting Fulbright Scholar’라고 선명하게 쓰인 명패와 깨끗하게 청소된 연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며칠 뒤에는 풀브라이트 방문학자라고 명시한 학과의 명함도 찍어 주었다. 정중하게 환영받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풀브라이트의 수혜자로서 이 학과를 연구기관으로 선택한 것은 내가 처음이란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지금껏 나는 그들이 내게 베풀어주는 호의에 감사하고 있었는데풀브라이터가 그들을 선택한 것이 어쩌면 그들에게도 영예일 수 있다는 점을 비로소 느껴 알게 되었다.

 


연구실 명패


한국에서 연구기관 신청의 메일을 보내자 마자 환영의 답신을 보내 준 대닐로위츠 학장

 

#3 미국에 도착하고 나서 셋업이 진행되는 과정에 소셜 시큐리티 넘버[Social Security Number]가 필요했다. 한국에서 주민등록이 되어 있어야 보험계약이나 은행계좌 개설을 할 수 있듯이, 이곳에선 그게 필요했다. 15년 전 LA에서의 기억으로 미루어 보면, ‘소셜 시큐리티 사무소는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곳이었다. 당시 내 앞의 어떤 사람은 사무원의 질문에 대답을 잘못하여 퇴짜를 맞는 경우도 보았다. 그런 기억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으나,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를 맞이한 나이 든 여성 사무원은 참으로 고상하고 친절했다. 시스템을 검색하더니 아내의 번호는 남아 있으나, 내 기록은 아예 없다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풀브라이트로부터 받은 편의 요청공문과 미 국무성이 보증한 비자[U.S. Department of State (Fulbright Scholars Bearer Is Subject To Section 212(E)]를 보여주자, 놀란 표정으로 여기서 풀브라이트 학자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하며 간단한 인적 사항만 확인한 후 일을 처리해 주었다.

 


친절한 직원을 만난 스틸워터의 소셜 시큐리티 사무소

 

#4 거쓰리 시티(Guthrie City)답사하다가 박식하고 교양이 풍부한 찻집 주인을 만났다. 이야기가 무르익어 가는 도중 서로의 연락 정보가 필요하여 학교 명함을 건넸다. 명함을 펼쳐 보더니 풀브라이트 학자시군요!’하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대화를 끝내고 나가며 커피 값을 계산하려 하자 극구 사양했다. 우리는 팁이라 우기며 간신히 5불을 놓고 나왔다.

 


Guthrie City의 찻집에서 만난 지성적인 주인 셰릴(Cheryl)

 

#5 털사(Tulsa)에서 열린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 학자 발전 세미나[2013 Fulbright Visiting Scholar Enrichment Seminar]’가 끝나던 날, 주최 측에서 스틸워터까지 나를 태워 줄 자원봉사자를 주선해 주었다. 그는 OSU 털사 캠퍼스 행정부서의 고위직 인사였고, 털사에 살고 있었다. 나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미국인으로부터 라이드 서비스를 받기가 부담스러웠지만, 그는 자기의 즐거움이라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한 시간이 훨씬 넘는 거리를 운전해 왔다가 다시 돌아가셔야 하니 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자, 그는 풀브라이트 학자에게 이런 봉사를 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부연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편했고, 그 역시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털사에서 나를 태우고 스틸워터까지 왔다가 돌아간 Dr. Ron Bussert

 

#6 텍사스 주의 달라스(Dallas)시에 갔을 때였다. 끝없이 펼쳐진 광야를 달려 겨우 도착한 달라스는 오클라호마와 달랐다. 미국에서 다른 주로 넘어가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다른 도로 넘어가는 것쯤으로 착각한 우리였다. 오클라호마 주만 해도 면적이 우리나라의 두 배였다. 그러니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것과 오클라호마 주에서 텍사스 주로 넘어가는 것이 같을 리 없었다. 가보니 시내의 교통체계도 오클라호마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의 것이었다. 간신히 주차해놓은 다음, 아무래도 불안하여 막 떠나려는 어떤 중년 부부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차에서 내려 주차방법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네 차도 한국 차라며, 얼마 전 부산에 다녀왔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의 차종은 기아 소울이었다. 하도 반가워 함께 사진을 찍었다. 찍고 나서 그의 이름과 주소 혹은 이메일을 물어보기 위해 내 명함을 건넸더니, 보고는 풀브라이트 학자라며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 그[Mr. Carl Smith]에게 사진을 보냈고, 그는 내게 정중한 답신을 보냈다. 그 답신 메일 가운데 우리는 당신을 만나게 되어 기뻤고, 더더욱 풀브라이트 학자를 만나서 감격했습니다![We were delighted to meet you and thrilled to have met a Fulbright scholar!]”라는 문장이 있었다. ‘thrilled’란 말 속에는 전율을 느끼다, 기쁘다, 감격하다등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그가 어떤 기분으로 이 말을 썼는지 분명치는 않으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매우 긍정적인 뜻으로 쓴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달라스의 한 주차장에서 만난 칼[Mr. Carl Smith] 선생 부부

 

***

 

1945년 아칸사(Arkansas) 주의 새내기 상원의원이던 풀브라이트(J. William Fulbright)가 입안하고 다음 해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이 사인함으로써 법안으로 성립된 것이 바로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쟁의 잉여 자산들에 주목한 풀브라이트 의원은 그것들을 팔아 교육, 문화, 과학 분야 학생이나 학자들의 교류를 통해 국제 친선을 증진시키는 자금으로 활용하자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고, 1년 뒤 트루먼 대통령이 여기에 사인하여 확정을 본 것이 바로 이 법이다.

 

풀브라이트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인정받고 있는 국제 교류 프로그램으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사실 미국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매년 미국 의회의 세출 승인을 받아 미 정부가 예산을 출연하고, 미국 이외의 국가들도 이에 상응하는 돈을 부담함으로써 문화 및 교육 교류를 위한 국제적인 협력 프로그램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한국 내 Fulbright Commission한미교육위원단의 경우 한국과 미국 정부의 예산 출연으로 운영되며, 이 기구가 장학생 선발 및 프로그램 운영에 관한 모든 정책을 결정한다. 여기서 선발된 한국인 수혜자들은 미국에서 강의나 연구, 대학원 학위과정 이수, 중등교사 영어 연수 등에 참여하며, 미국인 수혜자들은 한국에서 강의 혹은 연구를 하거나, 중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기도 한다.

 

***

 

내 느낌으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한국인들과 달리 미국인들은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을 학생이나 연구자가 누리는 최고의 영예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색도 모른 채 연구비 주는 것만 고마워하다가 미국에 와서야 풀브라이트에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내게 주어진 영예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면서 지내야겠다고 새삼 결심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남들의 인식을 통해 풀브라이트의 진면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으니, 그동안은 풀브라이트 수혜라는 영예가 내겐 일종의 개 발의 편자였던 셈이다. 아는 자만이 혜택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곰곰 생각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0. 2. 06:14

  

 

근황 2

 

미국음식 사귀기

 

 

김형,

 

우리는 몇 년 전 자동차를 몰고 유럽의 20여 개 국을 답사한 적이 있소. 당시에 매일 올리던 홈페이지의 글이나, 나중에 출판한 책[<<, 유럽>>]에서 호기롭게 음식에 관한 한 코스모폴리탄임을 내 스스로 자부하곤 했지만, 사실 가장 큰 문제의 하나가 음식이었소. 유럽은 그래도 미국보다 훨씬 다양하고 섬세하여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인의 미각을 달랠 만한 여건이 풍부하게 마련되어 있습디다. 물론 우리 동포들이 밀집해 사는 뉴욕이나 서부 도시들을 감안하면, ‘음식의 평균적인 친 한국 성향은 이론상으로 미국이 유럽을 앞설 것이오. 물론 그 보다 훨씬 전인 15년 전 1년 남짓 지낸 LA에서는 전혀 음식 문제가 없었소. 차를 몰고 몇 분만 나가면 한국마켓들이 많았고, ‘한국보다 더 한국적인한국음식점들 또한 수두룩했기 때문이오. 서울에서도 찾아가 먹어 본 적이 없던 소공동 순두부를 거기서 처음으로 맛보았으니, 더 할 말이 있을까요?

 


카우보이 박물관 식당에서

 


무어 시에서 점심 차 들른 베트남 국수집

 

사실 이곳으로 오면서 이번에는 완벽하게 미국식으로 살아보자고 큰 소리를 쳤던 나요. 출국할 때 기본적인 양념이나 밑반찬 등을 다 빼놓고 온 것도 미국식으로 살아보자는 호기와 함께 미국엔 어딜 가나 한국인들이 터를 잡고 마켓이나 식당을 열고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소. 무엇보다 이젠 먹는 것으로부터 초탈할 나이도 되지 않았는가라는, 우리 자신에 대한 착각이 대책 없는호기의 근원이었소. 나이 들면서 먹는 양은 줄었지만, 식성은 더 근본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소.

 

미각은 지문보다 더 정확하다는 말은 나이 든 뒤 찾는 음식을 보면 대부분 그의 어릴 적 삶이나 지역까지 정확하게 맞출 수 있기 때문일 것이오. 서해안 촌놈인 나는 어릴 적부터 젓갈이나 뻘게, 소금에 절인 물고기 등을 자주 먹으며 자랐소. 그래서일까요? 나이가 들수록 밥숟가락을 들 때마다 눈길은 짭짤한 젓갈이나 비린내 나는 생선을 향하곤 하는 것이오. 그런 반찬에서 고향의 내음이 풍기기 때문이지요. 젊어서 먼 길 떠났던 나그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 고향으로부터 풍겨오는 음식 내음때문 아니겠소?

 

혹시 오나라 출신 장한(張翰)이 낙양에서 벼슬하다가 고향의 진미인 순채국과 농어회를 잊지 못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는 순갱노회(蓴羹鱸膾)’의 고사를 알고 계시오? 물론 당시 제나라 왕의 무도함을 보며 위기를 느낀 그였으므로 그가 벼슬을 버린 것이 순전히 음식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만약 그에게 고향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없었어도 그리 빨리 벼슬을 버릴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참으로 미국의 음식에는 매력이 없소. 며칠 전 만난 미국 여학생도 미국 음식은 모두 ‘unhealthy food’라고 한 마디로 매도합디다. 학교 안에 식당들이 많고, 대부분의 식당들이 학생들로 붐비지만, 나로선 딱히 먹고 싶은 것이 없소. 대부분 달고 기름기 많고, 어떤 것은 짜기도 하고, 비벼 놓거나 섞어 먹는 어떤 것들은 흡사 사료같은 모습을 띠기도 하오. 혹자는 그대가 싸구려 음식만 먹으니 그렇지. 멋진 레스토랑에 가서 제대로 된 미국 음식 좀 먹어봐!’라고 타박하기도 하오. 그러나 값이 싸고 비싼 차이, 음식의 가짓수나 코스가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구조야 비싸다고 달라질 수가 있겠소? 설탕과 소금, 밀가루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미국 음식=unhealthy food’라는 공식은 아마 바뀔 수 없을 거라고 보오.

                                                                                                                                                 
                                          어느날 학교 식당에서의 점심상


                                               

                                          최근의 아침 메뉴

 

그래서 우리도 나름대로 궁여지책을 고안했소. 마트에 들러 수십 종류의 빵 가운데 밀가루와 약간의 식염 외에 전혀 가미(加味)가 되지 않은 한 종을, 과일 코너에서 아보카도(avocado)란 열대과일과 이 지역의 사과를, 유제품 코너에서 치즈 한 두 종을, 야채 코너에서 양상추를, 음료 코너에서 건더기[이곳 사람들은 이것을 pulp라 합디다]가 들어 있는 (원액) 오렌지 주스를 각각 고르니, 대충 미국식 아침식사로서는 분에 넘치는 조합이었소. 빵을 살짝 구어 버터 대신 아보카도의 과육(果肉)을 바른 다음, 치즈와 양상치를 얹고 오렌지 주스를 곁들이면 아침은 해결이지요. 그렇게 먹고 점심은 초원의 굶주린 사자처럼 미국 음식의 정글 속에서 어슬렁거리기 일쑤라오. 그러다가 저녁은 완벽한 캠핑족 스타일의 한식으로 (이들의 표현대로 한다면) ‘빅디너(big dinner)’를 먹게 되는 것이오 

 


어느 날의 빅디너(?)

 


장영배 교수 부녀와 함께 한 어떤 레스토랑의 점심

 

지난 달 하순인가요? 일요일에 길크리스 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해 인근 도시 털사(Tulsa)에 갔었소. 박물관 관람이 주목적이었지만, 아내나 나는 내심 그곳에 있다는 한국음식점에 더 무거운 방점을 찍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소. 나름대로 정성을 들인 그 식당의 김치찌개를 먹으며, 한 달 여 시달린 솟증을 풀어낸 셈이오. 돌아올 때 식당과 이웃한 한국마트에서 삼겹살 몇 근을 끊어 차에 실으니, 어렵던 시절 설 쇠기 위해 동네 돼지 잡던 현장에서 다리 한 짝 사들고 의기양양하게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던 가난한 가장의 호기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짐작됩디다.

 


털사에서 만난 한국음식점-한국가든 

 


한국가든에서 먹은 김치찌개백반 

 


한국가든 주인장의 두 따님 및 손자와 함께 

 


한국가든 옆의 한국 마켓

 

그러나, 언제까지 한국음식만 찾아다닐 수 있겠소?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지겹게 그 음식 속에서 일생을 지내야 할 것을! 귀국 후 여기서 보낸 시간을 회상할 때 이곳의 음식경험만큼 오래 갈 추억 거리가 어디 있겠소? 김 형이나 나나 이제 젊은 시절의 아름답던 추억이나 반추하며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가야 할 군번들이 아니겠소? 세계 제일의 국가라 자부하는 미국, 그 미국을 움직이는 국민들, 그들이 먹는 음식. 어쩜 내 주관의 속박만 벗어날 수 있다면, 그들의 음식이 갖는 의미나 장점이 우리 음식의 그것보다 나을 수도 있지 않겠소? 그래서 이젠 적극 그들의 음식과 친해지기로 했소. 좋은 것, 입맛에 맞는 것, 익숙한 것만 찾으려면, 고생스럽게 이역만리 미국 땅엔 무엇 하러 왔겠소? 그냥 내 나라에서 두 다리 쭉 펴고 편하게 소고기나 사 묵으며살 일이지. 그래서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내 미각을 길들이기로 했소.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이만 하리다. 잘 계시오.

 

2013. 10. 1.

 

스틸워터에서 백규

 


캠퍼스 외곽쪽의 약간 특이한 반 주문식 학생식당에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27. 13:57

    

 길크리스(Gilcrease)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Beaver effigy pipe, Woodland period


<Breaking Through the Line> Charles Schreyvoge 작


<Ceremony, Spirit Ascending>, Woody Crumbo작


<Creek Chiefs>, Acee Blue Eagle 작


<George Washington>, Rembrandt Peale 작


<Indian Council(Sioux)>, 1847 George Catlin 작


Mask, Chumash 족


Moccasins Cheyenne 족, 19th century


<Mourning Her Brave>, 1883년 George De Forest 작


<Overleaf-Ranchos Church with Indians>, Ernest L. Blumenschein 작


<Siouxs족의 Playing Ball>, Charles Deas 작


<Syacust Ukah>, 1762년 Sir Joshua Reynolds 작


<Taos Deer Hunter>, Bert G Phillips 작


<The Wild Turkey>, John James Audubon 작


<Thomas Gilcrease>, Charles Banks Wilson 작


<Warriors on Horses>, Acee Blue Eagle 작


길크리스 뮤지엄 앞에서

 

 

       예술로서의 역사, 역사로서의 예술

 

 

-털사(Tulsa)의 길크리스(Gilcrease)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921일 토요일. 아낌없이 쏟아 붓는 햇살이 평원을 달구기 시작할 무렵, 언제부턴가 가보고 싶었던 털사로 길을 떠났다. 대략 한 시간 반 거리라곤 하지만 자동차 몇 대 다니지 않는 드넓은 길임을 감안하면 실제 거리는 우리 생각과 많이 다르리라. 과연 맑은 공기와 화사한 햇살, 끝없이 펼쳐진 평원 위의 짙은 활엽수들이 우리를 매료시켰다. 시내에서는 조심조심하던 미국인들도 가속페달을 눌러 밟는 듯 412번 하이웨이에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이 지역에서도 유명한 박물관이 유독 많은 문화도시 털사.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첫 방문처는 인디언 관련 미술품이 가장 많이 소장되어 있다는 길크리스 박물관(Gilcrease Museum)이었다. 인디언 미술품에 대한 호기심 뿐 아니라 일생 모은 콜렉션으로 만든 박물관에 깃들었을 한 인물의 정신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호수 같은 아칸사(Arkansas) 강가의 샌드스프링스(Sandsprings)를 지나고 털사 카운티 경계를 들어서서 잠시 달리다가 한적한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서 길크리스 뮤지엄 로드로 접어들었다. 그로부터 눈 깜짝하는 사이 좌측 언덕배기에 숨듯이 앉아 있는 뮤지엄을 만났다. 주소는 ‘1400 North Gilcrease Museum Road’. 털사대학에 속한 박물관이 바로 그곳이다.

 

널찍한 규모도 규모려니와 컬렉션의 양과 질에 놀라 자빠질 뻔 했다. 12,000점의 미술품, 300,000점의 민족지적(民族誌的)고고학적 유물들, 100,000점의 희귀 서적과 육필 원고 등을 포함,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소장품들이 빽빽했다. 누가 미국을 문화의 불모국이라 했던가. 유럽의 건축이나 박물관들에서 느끼는 고색창연함은 아니로되, 이곳만의 잘 보존된 예술과 문화재야말로 쉽게 측량하기 어려운 미국의 힘과 깊이를 잘 보여주는 증거가 아닌가.

 

이 박물관은 미국의 예술과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미국 정신의 산실이었다. ‘미술작품으로 승화된 민족의 서사(敍事, epic)’ 바로 그것이었다. 그 정신의 구현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이 박물관을 세운 토마스 길크리스(Thomas Gilcrease)라는 인물.

 

그는 1890년 루이지애나에서 농부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프랑스 계,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계 등으로부터 이어진 그의 부계(父系)와 달리 어머니 엘리자벳은 무스코기(Muscogee)와 크리크(Creek) 등 원주민의 피를 25%쯤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길크리스로서는 자연히 인디언에 대한 관심이나 애착심을 타고 난 셈이었다. 게다가 그가 태어난 몇 개월 후 그의 가족은 인디언 구역의 크리크족 거주지로 이사했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물려받은 13%의 크리크족 피 덕분에 엄청난 땅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털사 남쪽 20마일의 160에이커에 달하는 땅도 있었다. 1908년 인디언인 오세이지(Osage) 족 출신의 벨레(Belle Harlow)와 결혼해서 두 아이를 둔 그는 1912년부터 미술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잠시 후 지금의 길크리스 박물관의 중심이 되는 주택을 사들였고, 1922년에는 길크리스 석유회사를 세웠으며, 1941년 곳간과 차고를 예술품 수장고로 리모델링함으로써 길크리스 뮤지엄의 뿌리가 되었다고 한다.

 

1947년 뉴욕의 수집가 질레트(Gillette Cole) 박사로부터 엄청난 컬렉션을 통째로 사들이고 미술가이자 건축가인 알렉산더 호그(Alexander Hogue)를 고용하여 뮤지엄을 설계하여 그의 소장품들을 전시하게 했으며, 1949년에 미국의 역사와 예술에 관한 토마스 길크리스 연구소를 세우게 되었다. 그 후 여러 단계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 1958년 길크리스 재단은 뮤지엄의 건물과 땅을 털사시티에 기증함으로써 길크리스 뮤지엄은 본격적인 출발을 보게 된 것이다.

 

***

 

뻐근한 다리를 끌다시피 뮤지엄을 돌아보고 나오면서 그가 1949년에 붙였다는 미국의 역사와 예술에 관한 토마스 길크리스 연구소란 이름이야말로 이 뮤지엄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일별한 많은 작품들은 대부분 실제 삶을 그려낸 극사실주의 미학의 소산들이었기다. 지난주에 들른 오클라호마시티의 카우보이 박물관에서는 인디언들과 카우보이들의 발밑에서 튀어나온 삶의 파편들을 감상했으나, 지금 이곳 털사의 길크리스 뮤지엄에서는 예술가들의 해석을 거친 삶의 모습들을 확인하게 되었다.

 

, 해는 짧고 힘은 달리는데 촘촘하게도 짜여 있는 이 역사와 예술의 숲을 어찌 헤쳐 나갈까? 무정한 길크리스 뮤지엄은 이국의 나그네들에게 한없이 너그럽기도 하고, 한없이 무정하기도 하구나!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