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2. 13. 03:58

 

 


터키 괴레메 지역의 오픈 에어 뮤지엄(Open Air Museum)

 

 

 

 


터키 괴레메 로즈밸리(Rose Valley)의 한 암벽 동굴집을 찾아
현장에서 만난 베컴, 허이준, 허이훈 형제 등과 차를 마시며[2005년 12월]

 

 

 

 


터키 괴레메의 로즈밸리 지역

 

 

 

 


터키 괴레메 인근 언더그라운드 시티(Underground City)의 거실에서 만난 맷돌 아래 짝

 

 

 

 


터키의 셀르메 지역에서 만난 암벽 동굴들

 

 

 

 


터키 우흘라라 계곡의 암벽동굴 집에서 만난 프레스코화

 

 

 

 

 

 

 

암굴 속에 서린 생존 의지,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Bandelier National Monument]’의 말 없는 외침

 

 

 

 

9년 전 유럽 여행 중 터키 카파도키아의 괴레메 지역에서 만난 암굴 주거지는 지금까지도 큰 충격으로 남아 있다. 화산활동으로 생긴 다양한 모양의 암석과 암봉들에 침식작용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 안에 거주한 흔적들이 그 때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특히 카이마클르의 지하도시와 으흘라라 계곡, 셀르메 계곡 등 네브셰히르 코스에는 바로 어제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듯 온기까지 느껴졌다. 페르시아와 아랍인들의 침입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6세기부터 10세기까지 8층 깊이[높이가 아닌]로 뚫린 카이마클르의 언더그라운드 시티(Underground City)에는 각 층을 연결하는 가파르고 좁은 통로가 설치되어 있었고, 각 세대마다 거실과 침실은 물론 와인을 제조하고 저장하던 시설, 공동 주방 및 식당, 교회 등은 물론 까페도 있었다. 으흘라라와 로즈 계곡 등 지상에 서 있는 암굴 주택들의 벽과 천정에는 기독교 관련 프레스코화들이 그득했다.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 놀라움을 미국에서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산타페의 박물관들을 주마간산 격으로 스킴하고 멋지게 꾸민 이탈리아 식당에서 시장기를 달랜 후 우리는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Bandelier National Monument]’를 향해 쾌속으로 달렸다. 욕심도 과하지! 그곳을 본 다음 우리는 부랴부랴 멀고 먼 귀로에 올라 뉴멕시코를 벗어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산타페에서 반델리어 가는 길은 지금까지의 어떤 길보다도 만만치 않았다. 84[285] 하이웨이를 타고 산타페로부터 한 시간 가까이 사막지대를 달리다가 퍼와이키(Pojoaque) 턴파이크에서 502번으로 갈아탄 다음 더욱 높아진 산록 도로를 통해 몇 십 분을 더 달렸다. 제법 큰 도시의 모습을 갖춘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부터는 가파른 산길이었다. 길은 그런대로 넓었고 노면 상태 또한 괜찮았으나, 왼쪽은 천 길 낭떠러지! 잔뜩 구름 낀 하늘엔 커다란 독수리가 선회하고 있었다.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의 음산한 분위기가 계곡 아래쪽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그 옛날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등짐을 진 어른들과 올망졸망 어린 것들이 길도 없는 이 등성이들을 넘었겠구나! 넘다가 실족하여 저 아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린 삶들도 좀 많았으랴!’ 생각하니, 삶에 대한 집착과 허무 사이의 드넓은 간극에 갑자기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구불구불 산길을 넘어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비지터 센터에 도착했다. 추운 겨울, 비수기라서인지 우리를 포함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긴 코스와 짧은 코스가 있었지만, 시간 때문에 우리는 짧은 코스를 택했다. 사실 짧다 해도 충분히 둘러보려면 1시간 반 정도나 걸리는 코스였다. 비지터 센터를 떠나 본격 트레일에 접어드니 거대한 넓이로 땅 밑을 파낸 두 종류의 유허(遺墟)가 나타났다. 이른바 빅 키바(Big Kiva)’ 즉 푸에블로 인들의 지하 예배장이 아래쪽에 있었고, 그 위쪽에는 음식 저장고로 쓰이던 400개의 방을 가진 2층 구조물 즉 츄웨니[Tyuonyi]가 있었다. 그 주변에는 가옥으로 추정되는 지상 건축물들의 터가 많이 남아 있고, 거기서 올려다보니 주택 혹은 주택의 일부로 사용되던 벌집 모양의 암봉이 거대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었다그곳이 바로 푸에블로 인들의 암벽 주거지[Cliff Dwellings]’였다.

 

이 구역의 암벽 주거지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짧은 코스에 있는 것들이고 또 하나는 그 위쪽의 긴 주택[Long House]’들이었다. 우리는 짧은 코스의 것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미 터키에서 정교하게 꾸며진 암굴(巖屈)들을 자세히 본 바 있는 내 입장에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으나, 미국에도 이런 유형의 집들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화산암[volcanic tuff]에 뚫린 동굴들은 그 자체가 좋은 집이나 안락한 방의 역할을 한 공간들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안에 들어가니 대부분의 벽들은 불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까맣게 그을려 있어 누군가 이 안에서 불을 피우고 살았음이 분명했다. 암벽을 둘러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작은 구멍들이 나 있었는데, 이것은 통나무들을 그 구멍에 끼운 다음 암벽에 의지하여 지어낸 푸에블로 전통가옥들의 흔적이었다. 구멍의 숫자로 보아 전성기 때는 매우 많은 세대의 집들이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 가는 교통망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의 위치

 

 

 


반델리어 지역 표지판

 

 

 


반델리어 지역 푸에블로 인들의 합동 예배장 유허

 

 

 


동굴집들이 있던 거대한 암벽

 

 

 


동굴집들이 있던 거대한 암벽

 

 

 


동굴집들이 있던 거대한 암벽

 

 

 


동굴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설치한 사다리

 

 

 


암벽 동굴집들과 벽에 잇대어 집을 지었던 흔적으로 남아 있는 작은 구멍들,
그리고 암벽화[pictograph]

 

 

 


암벽동굴집들과 그 주변에 덧붙여 지은 집의 유허

 

 

 


암벽 동굴집 아래쪽에 있던 주택가의 유허

 

 

 


암벽 동굴집 아래쪽에 있던 주택가와 각종 시설들의 유허

 

 

 


암벽 동굴집 아래쪽에 있던 주택가와 각종 시설들의 유허

 

 

 


암벽 동굴집 내부[벽이 온통 그을려 있음]

 

 

 


암벽 동굴집에서 내다 본 바깥 풍경

 

 

 

 

그렇다면 그들은 이 깊고 척박한 산중에서 무얼 먹고 살았을까. 대략 12세기 중반에서 16세기 중반에 걸쳐 이곳에서 살았던 () 푸에블로[Ancestral Pueblo]’ 인들은 메사(mesa)의 위쪽에 있던 들판에 농작물들을 재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옥수수, , 호박 등은 그들의 주식이었으며, 자생식물들과 우리가 현장에서 발견한 사슴, 토끼, 다람쥐 등의 고기도 영양분을 보충하기에 요긴했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의 집 주변에서 기르던 칠면조로부터는 깃털과 고기를 얻었을 것이며, 개를 이용한 사냥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였다.

 

반델리어에 인간이 깃들기 시작한 세월은 10,000년이 넘는다. 메사와 계곡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야생 조수(鳥獸)들을 따라 다니던 수렵채취 부족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서기 1,150년에야 선 푸에블로인들은 반영구적인 주거지를 짓기 시작했고, 1550년에는 이곳을 떠나 리오 그란데(Rio Grande) 강가로 주거를 옮겼다. 코치티(Cochiti), 산 펠리페(San Felipe), 산 일데폰소(San Ildefonso), 산타 클라라(Santa Clara),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등이 그들의 새로운 주거지역이었다.

 

그 후로 4백여 년 간 이 땅에는 사람들이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심한 가뭄까지 닥쳐오게 되었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들의 구비전승[口碑傳承, oral tradition]에 의하면, 리오 그란데 강을 따라 남쪽과 동쪽에 위치한 코치티 푸에블로와 산 일데폰소 푸에블로가 프리올레 캐년에 집을 짓고 살던 이들의 가장 가깝거나 직접적인 후손들로 보인다고 한다.

 

비지터 센터에는 박물관과 함께 이들의 생활사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관이 있었다. 거기서 확인하게 된 흥미로운 사실들 중의 하나는 이들이 구비전승을 통해 조상들과 연결했고, 그에 의존하여 삶의 지혜를 얻거나 적응해 나왔다는 점이다. 푸에블로의 구비전승은 자신들의 믿음, 이야기, 노래, , 생활 속의 기술 등 모든 것을 포괄한, ‘옛날과 현재의 대화E.H. 카아의 말대로 역사였다. 따라서 구비전승은 선대 푸에블로의 생존에 기본적인 텍스트였고, 오늘날에도 푸에블로로 하여금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 하는 필수적인 지식의 창고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푸에블로의 이야기들에는 그들의 활동이 묘사되어 있기도 하고 교훈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여, 대대로 그것을 가르쳐 왔음은 물론 그 안에 들어 있는 생생한 정보들을 공유하기도 했다. 대부분 구비로 전승되어 왔지만, 개중에는 그림, 암각화, 혹은 춤으로 묘사되기도 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들의 주거지 주변에서 목격한 암각화도 그 사례들 가운데 하나였다.

 

1,700년대 중반 스페인 정부가 불하해준 땅을 소유한 스페인 정착자들은 프리욜레 캐년(Frijoles Canyon)에 자신들의 주거지를 만들었고, 1880년 코치티 푸에블로의 호세 몬토야(Jose Montoya)는 고고학자 반델리어[Adolph F. A. Bandelier, 1840. 8. 6.~1914. 3. 18.]를 프리욜레 캐년으로 데리고 가 조상들이 살던 고향땅을 보여주었다. 그 때부터 반델리어는 이 지역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델리어는 스위스 베른 출신의 미국 고고학자인데그의 이름을 따서 이 유적지의 명칭으로 삼았을 정도로 그는 이 지역에 관한 전문가였다. 그는 젊은 시절 미국으로 이주하여 노동을 하며 힘들게 살았다. 당시 대단한 인류학자 모건(Lewis Henry Morgan)의 지도 아래 그는 미국 남서부, 멕시코, 남아메리카 등지의 미국 원주민들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멕시코의 소노라(Sonora),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지에서 연구를 시작하여, 이 지역 연구를 선도하는 권위자가 되었고, 쿠싱(F. H. Cushing) 및 그의 후계자들과 함께 선사 문화 분야의 선도적인 학자가 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을 딴 곳이 바로 이 구역이었다.

 

1916반델리어 국립 유적지법령이 만들어지고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 서명했으며, 1925년에는 에벌린 프라이(Evelyn Frey)와 그의 남편 죠지(George)가 이곳에 도착하여 1907년 애벗 판사(Judge Abbot)가 건립해온 ‘10 엘더스 랜취(the Ranch of the 10 Elders)’를 이어받게 되었고, 1934년과 1941년 사이에 민간 자원 보존단[Civilian Conservation Corps]’의 노동자들이 프리욜레 캐년에 만들어진 캠프에서 작업을 하는 등 최근까지의 노력으로 지금의 유적지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암벽 주거지를 거쳐 내려오는 길은 지난여름 이 일대를 휩쓸었던 것으로 보이는 홍수의 현장이었고, 근년에 일어나 아름드리 소나무들을 태워버린 무서운 자연 화재의 현장이기도 했다. 무수한 나이테들을 몸에 새기고 벌렁 누워있거나 아직 청청하게 버티는 소나무들은 그 옛날 이곳에서 살아간 푸에블로 인들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이 계곡에서 먹고 자고 사랑하며 생존의 나날을 버텨내던 푸에블로 인들은 벌써 오래 전에 이 계곡을 떠났다. 그러나 리오 그란데 강줄기를 따라 새로운 터전들을 일군 그들은 변함없이 옛날이야기들 속에 숨어 있는 조상들의 지혜를 이어가며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는 프리욜레 계곡의 거센 냇물 소리를 기억하며...

 

 

 


당시 이곳 주민들이 잡아먹고 살았을 다람쥐

 

 

 


당시 이곳 주민들이 잡아먹고 살았을 사슴들[Mule Deer]

 

 

 


당시 이곳 주민들이 따 먹고 살았던 잣나무 열매[piňon nuts].
지방과 단백질의 공급원이었음.

 

 

 


당시 이곳 주민들에게 비타민과 무기질을 공급했을 선인장 열매들

 

 

 


당시 이곳 주민들이 동굴집 주변에 남긴 암각화[pictograph]

 

 

 


스페인 이주자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암시하는 암벽 위의 십자가

 

 

 


열매를 갈아 식량을 확보하던 당시 여인들의 삶[비지터 센터 박물관 그림]

 

 

 


당시 이곳 주민들이 사용하던 바구니와 갈돌, 그리고 화살촉[비지터 센터 박물관]

 

 

 


당시 이곳 주민들이 사용하던 도자기와 각종 생활 도구들[비지터 센터 박물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12. 9. 11:50
*알립니다. 저는 올해(2007) 초에 '조규익 임미숙의 유럽 자동차 여행기 <<아, 유럽!>>(푸른사상)을 출간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 그 원고에 해당하는 기행문을 차례로 싣고자 합니다. 말하자면 여행기간의 역순(逆順)으로 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제1신 : 삶은 우리에게 축복인가 고통인가-
                            폼페이의 비극을 보며


우린 2006년도 첫날을 아드리아 해에서 맞이했다. 바리 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이탈리아 남부를 횡단하여 폼페이에 입성했다. 동에서 서로 달리는 길. 중간쯤부터 거센 바람이 구름을 몰고 다니더니 오락가락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폴리를 지나 살레르노에 이르자 빗발은 굵어졌고, 폼페이에 들어오자 흙탕물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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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바리 항에서 폼페이로 가는 도중 만난 아름다운 자연


도시는 썰렁했다. 1월 1일 휴일에 비까지 내리니 도심은 공동(空洞) 상태. 길 물어볼 사람조차 없었다. 빗발 속에 간신히 호텔 하나를 잡은 뒤 도시를 대충 살폈다. 티레니아 해로 연결되는 살레르노 만을 접한 폼페이. 중심에 옛 도시의 폐허가 있고, 그 바깥으로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몇 안 되는 관광객들이 매표소 주변에서 서성대는 모습을 보았으나, 폼페이 폐허와의 만남을 다음날로 미루었다. 그 만남을 좀더 의미 깊도록 만들고픈 우리의 희망 때문이었다. 폼페이의 음울한 분위기를 살리려는 듯 줄기차게 비는 내리고, 나그네의 수심을 도와 밤은 더욱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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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시가지 일부


본의는 아니었으나 우연찮게 근래 우리는 폐허만을 찾아다녔다. 터키의 에페소, 그리이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에인션트 코린트, 그리고 이탈리아의 폼페이까지. 터키, 그리이스, 이탈리아는 바다로 접한 나라들.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서로 물고 물리는 길항(拮抗) 관계였던 이 나라들이었다.
아시아와 유럽의 중간지대인 터키, 완전 서유럽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유럽도 아닌 그리이스와 이탈리아다. 에게해, 아드리아해, 지중해 등 서로 물길처럼 연결되는 바다를 공통의 무대로 하는 나라들이다.
일찍부터 꽃 피운 인류문명을 세계로 전파시키며 주름잡던 주역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항만들을 기반으로 도시문명을 이룩했으나, 전쟁을 비롯한 인재(人災)와 지진이나 화산폭발 등의 천재(天災)로 멸망을 면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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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폐허의 한 부분


영속하고자 한 그들의 욕망이 허무로 귀결된 현실을 보며, 명백한 신의 섭리를 깨닫기도 했다. 섭리의 현실화이든 단순한 허무이든, 폐허로 남은 ‘옛날의 영화’는 범부(凡夫)들의 마음에 참담함만 안겨 주었다. 역사의 이성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폐허의 돌조각에서 느끼는 온기가 예사롭지 않은 나날이다.
물론 시간은 매 순간 절대 동일할 수 없고, 최소한 ‘동질적’일 수도 없다. 그러나 언제든 새로운 코린트, 새로운 에페소, 새로운 폼페이가 생겨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크게 보아 반복되는 것이 인간의 역사라고 믿는 우리로선 그 두려움을 떨칠 수 없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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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폐허 유물 저장고에 있는 시신의 부조


폼페이의 폐허 속에 쭈그리고 앉은 채 미이라처럼 형상화 된 어느 남자의 입에서, 누운 채 죽어버린 일가족의 입에서 우리는 분명 그런 내용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폐허를 대하면서 우리는 ‘살아있음’에 환희해야 하는가, 아니면 역사의 반복 가능성에 몸서리를 쳐야 하는가.
<계속>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2. 00:49
 

내 등짝에 죽비를 내려친 유럽

-그곳에 가서야 나는 내 키가 작음을 알았네-


                                                                                                                         조규익

5개월간 유럽을 돌면서 ‘내 키가 작음’을 깨달았다. 우리가 세계의 중심에 서 있지 않음도 비로소 알았다. 늘 ‘나’와 ‘우리’, 그 존재의 절대성에 매몰되어 객관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던 우리였다. 유럽인들은 우리를 잘 몰랐고, 우리가 그들에게 그리 중요한 존재도 아니었다. 그간 우리는 ‘나’와 ‘우리’에게 지나치게 갇혀 있었다. 그러니 객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볼 기회란 없었다. 지금도 우리네 학교들은 ‘5천년의 찬란한 역사’를 강조하기에 여념이 없다. 외국사람 몇이 김치 맛을 칭찬이라도 할라치면, 우리의 언론들은 ‘한국의 먹거리가 세계 식탁의 한 구석을 당당히 차지했다’는 식으로 과장보도하기 일쑤다. 자긍심 아닌 헛된 자만에 빠져버린 영혼을 구제할 길은 없다.

 <터키 에페소의 원형극장>
대학 강단에서의 20년 세월. 그동안 젊은 친구들에게 나는 무엇을 가르쳐 왔는가. 그들이 정신적으로 ‘홀로서기’를 할 만한 언턱거리 하나라도 제공했단 말인가. 5척이 갓 넘는 단구(短軀)로 내 키가 작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이 인식의 무사려(無思慮)한 원시성. ‘5천년 역사를 그 누가 넘볼 수 있겠는가’라는 오만한 무지 속에 안주해온 그간의 세월은 일종 ‘어릿광대의 한 세월’ 쯤이나 아니었을까.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기원전 수백 년의 유물·유적들을 만져보며, 그것들의 온기를 느껴보며, 상상과 신화의 탈을 벗지 못한 우리 역사의 실체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긴 세월 쌓여 내린 정신사의 적층(積層)을 목격하며, 맹목으로 살아온 그간의 세월을 새삼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있어 ‘줏대 없는 언설(言說)’이라 꾸짖어도 좋다. 그러나 허구한 날 협소한 자아에 갇혀 세상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만은 벗어나 보자. 이것이 귀중한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유럽을 다녀온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다.

강단에 서서 이미 한 세월을 보냈고, 앞으로도 한 세월을 더 보내야 하는 내 입장이다. 그래서 ‘인식 상의 전환적 계기’가 절실했다. 할 수만 있다면, 우주선이라도 타고 달나라를 가든 화성을 가든 우리의 지구를 ‘객관적 위치’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우리가 그간 자라면서 배워온 서구세계. 경우에 따라서는 편향적 세계인식의 근원이자 주범이라 할 유럽. 내 인식의 큰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유럽의 정신적 질량을 현지에서 느껴보리라는 야심이 우리의 내면엔 그득 차 있었다.

우리가 주로 찾아다닌 곳은 크고 작은 도시들의 알트슈타트altstadt. 옛날이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공간들이었다. 그곳엔 그들이 가꾸어온 어제와 오늘, 그리고 이룩하고자 하는 미래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그들은 알트슈타트의 껍질을 잘 유지하면서 그 속에 들어있는 알맹이들을 하나하나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바로 그 지혜와 통찰이었다.

 <프랑스 루아르강 가의 쉬농소 성>
빽빽한 돌집들 사이엔 햇볕 한 줄기 들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 ‘남아있는 역사’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도처에 널려있는 큰 규모의 박물관과 유적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자부심의 근거였다. 크고 작은 각종 공동체의 중심에는 늘 교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가틀릭이든 개신교이든 굳이 가릴 필요 없었다. 그런 성소(聖所)들을 중심으로 공동체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모든 예술이나 사상, 심지어 형이하학적 물질문명까지 종교나 신앙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토록 거대한 유럽문명, 아니 세계 문명권들이 근원적으로 신앙 공동체로부터 출발한 것은 아니었을까 착각할 정도였다.

            <로마의 콜로세움>
유럽의 제대로 된 나라들은 ‘관광 진흥’을 자신들의 국가적 어젠더agenda로 채택,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말로만 떠드는 관광이 아니라,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을 세우고 실천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책들은 예외 없이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무’를 철학적 바탕으로 삼고 있었다. ‘역사와 문화의 산업 자원화’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대전제로 한다. 또 그것은 자신들의 역사가 근본적으로 인류 공통의 자산이라는 인식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인류는 크게 보아 ‘하나의 역사’만을 공유해 왔을 뿐, 서로 다른 독자적 문화를 내세우며 아집과 독선으로 치달아야 할 이유가 없음을, 거대한 유럽 문화의 현장은 말해주고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아집과 편견은 있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세계질서의 파행이나 질곡 역시 그런 독선과 아집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은 분명하다. 로마제국이 거대하게 전개되고, 그것이 지금 지배적인 서양문명의 근간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타 문명이나 타 지역의 정신적 소산을 충실히 수용한 덕분이었다. 독선과 아집, 배타와 갈등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고대문명의 폐허들. 주로 로마문명의 흔적이었다. 그러나 그 폐허는 말 그대로 멸망의 흔적이 아니었다. 탈피에 성공한 매미는 애벌레의 껍질을 남기지만, 그 껍질은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 탄생의 증거물이다. 계속되는 허물벗기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보인 유럽문명. 바로 그 근저에 로마문명이 있었다. 그들은 ‘역사청산’ 혹은 ‘역사 바로 세우기’의 미명 아래 엄연히 존재하는 역사적 증거물들을 때려 부수지 않았다. 그 덕에 역사의 자취들은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일제의 문화유산이 부끄러운가. 일제에 부역한 조상들의 행적이 부끄러운가. 그렇다면 그 자취나 흔적을 때려 부수기보다는 잘 보존하라. 그것도 소중한 역사다. 그 흔적들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파행의 반복을 피해가는 것. 그것이 ‘역사 바로 세우기’의 본질이어야 한다. 서울 한 복판에 선 일제의 건물유적이 부끄럽다고 쇠톱으로 싹둑 잘라 버리는 문화적 야만성. 과거의 독재자가 밉다고 그가 쓴 현판들을 모조리 철거하고 수백 년 전의 임금 글씨로 바꾸려는, 그런 행위보다 더 한 ‘역사 파괴’는 없다.

▲터키 카파도키아 괴레메 시가지 전경


우리가 유럽 역사의 현장에서 읽어낸 이면적 코드는 ‘지배와 굴종’이었다. 그리고 그런 코드가 구체화된 물증들은 도처에 남아 있었다. 물론 어느 시기 지금 우리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레반 식 만행’이 저질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역사의 증거물들을 잘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었다. 물건만 없앤다고 역사가 사라지거나 바뀌는 것은 아니다. 총독부 건물보다 더 좋은 관광자원과 교육 자료가 어디에 있는가. 박정희 글씨의 현판보다 더 생생한 역사적 증거물들이 어디에 있는가. 반복되는 것이 역사라지만, 역사의 파행을 막는 방법으로 잘못된 역사의 증거물을 보여주는 일 외에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객관적 근거를 바탕으로 남들에 의해 인정받는 만큼이 진정한 내 모습일 수 있다. 이 점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나는 내 키가 이렇게 작은 줄을 몰랐다.’ 이것은 깨닫기 이전에 갖고 있던 내 인식의 본질적 한계였다. 그래서 인식의 전환을 경험한 일이야말로 유럽과 유럽문명이 우리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프로젝트는 이 지점에서 새롭게 시작된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던져 줄 삶의 지표 또한 이 점으로부터 모색될 것이다. 그래서 유럽은 지금까지 만난 어떤 선생님보다 훨씬 위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던져 준 셈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