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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5.15 아, 윤창중!
  2. 2012.05.12 요것들을 어찌 할꼬?
글 - 칼럼/단상2013. 5. 15. 01:21

, 윤창중!

 

                                                                                                                                                             백규

 

세상의 불의에 불끈거리며 서툰 언설(言說)들이나마 농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언사들이 부질없음을 깨닫게 된 이후로 얼마간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특정인을 정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겨도 뜻하지 않게 누군가가 유탄에 희생되는 모습을 보면서,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것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행복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내 스스로는 그것을 힘들게 얻은 지혜로 생각해왔다. 그런데, 지금 그간 얻은 알량한 지혜를 도로아미타불로 돌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 이 땅의 평범한 한국인들, 그 가운데 나를 포함한 50대 후반의 남자들을 대신하여 장작불 위로 던져진 한 마리의 미련하고 가련한 희생양을 조상(弔喪)하지 않는다면, 목울대까지 차오르는 부끄러움을 어떻게 삭여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불자(佛子)는 아니로되, ‘탐진치(貪瞋癡)’의 삼독(三毒)에 빠져 허우적대는 저 인간의 표정에 비쳐 보이는 내 어리석음의 진면목을 어찌 남의 일인 듯 뻔뻔하게 구경만 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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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이목이 쏠려 있는 미국의 중심부에서 윤창중이 일을 저지르고 도망쳐 온 이래, 나라 전체가 벌집 쑤신 형국이다. 멀끔한 제제다사(濟濟多士)들은 대중매체들이 깔아놓은 멍석에 둘러 앉아 고담준론으로 성토하고, 인터넷에서는 코흘리개 아이들부터 백발노인에 이르기까지 몰려들어 몽둥이찜을 안기고 있다. 그의 등짝에 모진 매질을 하면서 흡사 우리는 그와 다른 범주의 인간들임을 주문(呪文)처럼 되 뇌이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미련하고 눈치 없이 굴다가 천하의 이목에 걸려 버린 그의 어리석음을 탓하면서 우리 스스로는 요행히 그런 덫에 걸리지 않은 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에게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일갈하신 예수의 꾸지람을 새삼 이 자리에서 들먹일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윤창중이 무슨 달나라에서 온 외계인도 아닐 것이며, DNA나 대뇌에 특이한 돌연변이를 경험한 존재도 아닐 것이다. 그냥 우리 이웃의 평범한 인총(人叢)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자고나면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이 밥 먹듯 일어나는 이 나라의 허전하고 찌질한 50가 그 본색을 감추지 못한 결과일 따름이다. 지폐 몇 장 든 지갑을 흔들며, 생활비나 벌어보겠다고 나선 젊은 여인들을 희롱하는 우리네 룸살롱의 추태를 세계무대에 유감없이 보여준 이벤트에 불과하며, 나를 포함한 무수한 장삼이사(張三李四)들 가운데 참으로 자제력 없고 유치한 하등 인물하나가 남의 동네에 가서 술의 힘을 빌려 자신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폭거(暴擧)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다만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 나가도 샌다는 평범한 이치를 고지식하게 실천한 그의 무모함이 놀라울 뿐이고, 그런 평범함을 교묘하게 감추고 국가경영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그의 교활함이 가소로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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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의 법리나 그의 행위가 초래한 현실적 문제들은 귀가 아프게 들었으니, 새삼 거기에 부실한 내 말까지 보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 죄를 저지르고 도망쳐 왔으면서도, 변명과 자기합리화로 모면해 보려는 궁한 모습이 무엇보다 안타깝다. 인터넷 속의 무진장한 지식과 혜안으로 무장한 5천만이 밤낮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것이 지금의 우리나라이거늘, 어디로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공손추(公孫丑)가 맹자에게 지언(知言)’ ‘(남의) 말을 알아차리는 것의 뜻을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치우친 말[피사(詖辭)]에 대해서는 그 가려진 바를 알아내고, 방탕한 말[음사(淫辭)]에 대해서는 함정이 되는 바를 알아내며, 사악한 말[사사(邪辭)]에 대해서는 괴리된 바를 알아내며, 숨기는 말[둔사(遁辭)]에 대해서는 그 궁한 바를 알아내는 것이 바로 지언(知言)’이라 했다. 윤창중은 미국에서 도망쳐 온 뒤 전 국민을 상대로 둔사를 농하며 궁지를 벗어나고자 했으나, 그런 둔사를 농할수록 자꾸만 궁지로 빠져드는 초라하고 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 국민이 지언(知言)의 지혜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을 그는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 아무리 필부라 해도 지금이 살기를 도모할 때가 아님을 모를 수는 없다. 자신을 죽여도 모자랄 판에 궁한 둔사를 농하며 살기를 바라는 그의 모습이 가증스럽고 부끄러울 뿐이다. 그를 보며, 비단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던 평원의 필부들로부터 기만 당해 온 지난 세월이 억울하게 생각되는 건 과연 나 혼자 뿐일까. 위압적인 권한을 행사하며 우리들에게 군림하던 그 옛날의 고관대작들은 과연 윤창중보다 나은 존재들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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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비판되어야 할 것은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무사려(無思慮)함이다.  다시 맹자의 말을 들어보자.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내가 어찌 그가 재주가 모자란 지를 미리 알아 그런 자를 등용시키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맹자가 답했다. “나라의 임금으로서 어진 이를 등용함에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해야 합니다. 장차 낮은 이로 하여금 높은 자리를 뛰어넘게 하거나 관계가 먼 자를 가까운 친척보다 앞세워야 할 경우가 있을 것이니,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때 좌우가 모두 ‘(그가) 어집니다라고 평해도 그대로 해서는 안 되며, 여러 대부들이 모두 ‘(그가) 어집니다해도 아직 안 됩니다. 나라 사람 모두가 어집니다라고 한 연후에 이를 관찰하여 그 어짊을 드러나 보이게 한 뒤에야 그를 등용하는 것입니다. 또 좌우가 모두 안 됩니다라고 해도 듣지 말고, 여러 대부가 모두 안 됩니다라고 해도 듣지 말며, 나라 사람 모두가 안 됩니다하고 나서야 이를 살펴 불가함이 드러난 뒤에야 그를 버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좌우가 모두 죽일만합니다라고 해도 듣지 말고, 여러 대부들이 모두 죽일만합니다라고 해도 듣지 말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일만합니다라고 한 다음에야 이를 살펴보고, 가히 죽일만함이 드러난 뒤에야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 사람이 죽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다음에라야 가히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대화다. 기원전 4세기의 맹자가 어떻게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일을 예견하고 이런 말을 주고받았단 말인가. 윤창중에게 무거운 직을 부여하던 당시 주변의 사람들이나 대부들은 이구동성으로 안 된다고 했으며, 대부분의 국민들도 납득하지 못했으나, 대통령은 임명을 강행했다. 그런데, 그가 죽을죄를 진 지금과연 대통령은 아니 되옵니다라고 외치던 당시 국민들의 뜻을 얼마나 깨닫고 있을까.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5. 12. 21:01

 

                                <위에서 내려다 본 백양사 전경>

 

요것들을 어찌 할꼬?


                                                                                                            백규

며칠 전 밤늦게 TV로 뉴스를 시청하다가 간이 떨어질 만큼 충격적인 광경을 접하게 되었다. 장성 백양사 인근의 한 특급 호텔 스위트룸. 반팔 속옷 차림의 승려들이 빙 둘러앉아 도박판을 벌이는 모습이었다. 언론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겸 조계사 주지와 부주지를 비롯 이른바 도가 높다고 일컬어지는 승려들 8명이 그들이었다. 때는 4월 23일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술과 담배를 곁들인 억대의 포커 도박판이었다. 24일은 백양사에서 고불총림 방장 수산당 지종 대종사의 49재가 봉행되기로 예정된 날. 앵커의 설명과 화면은 즉시 나의 상상력을 가동시켰다. 당시 그 승려들은 절 근처 특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옷가지들을 벗어던진 채 담배를 꼬나물고 술[보아하니 양주로 짐작되었다!]을 병째로 들이키며, 억대의 판돈을 걸고 도박판을 벌이고 있었다. 하도 궁금하여 인터넷으로 백양사 근처의 호텔들을 검색해 본즉 2인 1실 기준 스위트룸 1박이 20만원 정도. 모처럼 객고(客苦)(?)을 풀기에 딱이었을 그런 좋은 곳에서, 더구나 돈이 넘쳐나는 그들이 방을 함께 쓰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각자 방을 얻은 다음 어느 한 방에 몰려 가 놀았을 가능성이 크다. 술상도 결코 쓸쓸하지는 않았을 게다. 온갖 산해진미가 그득하지 않았겠는가. 혹 술 따르는 여인들까지 곁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심심하면 한 번씩 전국의 승려들이 조계사에 몰려들어 각목 들고 패싸움을 벌이던 일을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가. 겉옷을 벗어던진 채 담배를 피워 물고 술을 병째로 들이키며 포커 판을 돌릴 정도라면, 그 자리에서 오고 간 말들은 어땠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고상한 법문(法門)이나 경구(經句), 혹은 선문답(禪問答)들이라도 돌리고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 몇 번 어깨 너머로 구경한 적이 있는 속한(俗漢)들의 고스톱 판을 떠올려 보았다. 대개 고스톱 판에서는 패가 잘 못 들어왔을 때 내뱉는 단발성 ‘쌍욕’들이 대부분이고, 어떤 경우는 지저분한 음담패설에 허접한 농담들이 대부분이다. 투전판이란 고상한 말들이 오고 갈 자리는 결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참으로 난감한 일 아닌가. 함께 이 모습을 시청했을 아이들이나, 부처님 모시듯 ‘스님’들을 모시는 전국의 불쌍한 신도 할머니들에게 이 장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가끔 여행을 하다가 새참 시간에 맞춰 시골 마을에 들어가면 쫓아와 합장하며 들밥을 권하는 할머니들이 있다. 내가 삭발을 하고 다니니 그 분들은 나를 피곤한 탁발승으로 오인하곤 하신다. 합장을 하면서 ‘어느 절에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셨느냐?’고 정중하게 예를 표하시는 것이 신심 깊은 우리네 시골 할머니들이다. 그런 할머니들에게 승려들의 이런 수행 장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나마 그 화면에 말소리가 나오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당시 오고 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온갖 지저분한 음담패설들까지 방송되었더라면, 찬란한 한국 조계종의 역사는 그 순간에 멈춰버렸을 것이다!!!

흔히 종교를 믿지 성직자를 믿는 게 아니라고들 말한다. 성직자도 사람인 이상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음을 전제하는 말이다. 그렇다. 이 승려들 뿐 아니라, 심심치 않게 보도되는 외국 신부들의 성추문들, 간혹 교회를 사유재산처럼 자식들에게 물려주려고 온갖 꼼수를 부리거나 여신도들을 성폭행하는 목사들... 성직자도 인간인 이상 어느 순간 세속의 유혹에 빠져 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성직자를 보지 말고 종교의 참뜻을 바라보며 신앙심을 가지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인가. 목자 없는 새끼염소들이나 선생 없는 어린아이들을 생각할 수 없듯, 성직자 없는 신앙인들을 생각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승려들이 불교 입문을 원하는 사람들이나 신도들을 만나면 으레 삼독심(三毒心)을 버리라 한다. 삼독심 즉 ‘탐진치[貪瞋癡]’란 ‘탐욕[貪]/분노[瞋]/어리석음[癡]’ 등인데, 인간을 죄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원인적 요소들이다. 그러나 삼독심을 버리는 게 그리 쉽겠는가. 자신들은 삼독심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세속인들을 상대로 ‘삼독심을 버리라!’고 일갈(一喝)한들 그게 무슨 감동을 줄 것인가. 차라리 그 많은 불경들 가운데 좋은 경구라도 골라 들려주어 듣는 사람 스스로 발심(發心)하도록 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자신은 원수들을 죽도록 미워하면서 신도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외친들 무슨 소용 있나? 자신은 재물에 끔찍한 애착심을 보이면서 ‘재물의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천당 가기 어렵다!’고 외칠 수 있나? 차라리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시편 119장 105절] 혼자서 열심히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실천하라는 가르침을 주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승려들의 참담한 행태를 목격하고나서 밀려드는 허무감을 주체할 수 없는 나날이다.  
                                                          

                                                                                                 <2012. 5. 11.>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