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3.17 '죽은 어른의 사회'
  2. 2007.04.22 육안(肉眼)을 넘어 심안(心眼)으로
글 - 칼럼/단상2009. 3. 17. 10:17

‘죽은 어른의 사회’

 

조규익(국문과 교수)

 

얼마 전 한 노인을 만났다. 사회적 지위도 누릴 만큼 누렸고 돈도 많은 분이었다. 그런데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불평이 많았다. 후배들이 자신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노여워했다. 본인은 나이도 학식도 지위도 누구 못지않은데, 주변의 젊은이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들이 자신을 ‘어른’으로 대우해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노인은 나이가 많다는 것이 판단의 정당성까지 담보한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듯 했다. 나는 그 분이 자신의 젊은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다. 대체로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자격 없는 어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점은 학부 신입생부터 정년을 앞 둔 교수까지 10대에서 60대까지 모여 있는 대학이나 세대 구성이 더 다양한 사회 모두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노인이라 여기는 노인은 없다지만, 젊은이들의 눈에는 ‘에누리 없는 노인들’만 주변에 그득하다. 그 중에는 간혹 공동체 운영의 헤게모니를 한사코 놓지 않으려는, 추한 모습을 보여주는 분들도 있다. 그러니 젊은이들의 눈엔 ‘제대로 된 어른’보다 ‘탐욕과 편견에 찌든 노인들’만 보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나아가도 모자랄 판에 사회가 자꾸만 뒷걸음질 치는 것은 그런 노인들이 공동체의 선도역을 자임하기 때문이다. 말하기보다 들어주기, 현실적인 일에 초연하기, 후배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지갑 열기 등등 자신을 덜거나 버리는 일에 나서야 비로소 노인 아닌 ‘어른’이 될 수 있다. 어른으로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후배들을 원망하며 그들과 엉겨서 이해다툼이나 벌인다면, 언제까지나 ‘어른’ 아닌 ‘노인’으로 남을 뿐이다.

최근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 신앙인이든 아니든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그 분이 진정으로 무욕(無慾)의 삶을 살아온 ‘어른’이었다는 점이다. 상당수의 노인들은 이 땅에 명예와 부의 지저분한 껍질만 남기고 떠난다. 아니, 명예와 부의 근처에도 못 가본 채 그것들에 집착한 욕망의 검불들만 날리고 떠나버린다. 소년, 청년, 장년으로 살다가 ‘어른’이 되어보지 못한 채 ‘노인’으로 씁쓸히 세상을 하직하는 게 필부필부들의 삶이다. 노인들은 노인들대로 청년들은 청년들대로 어른으로 죽을지 노인으로 죽을지 선택해야 할 시점이다. 슬프게도 지금 우리는 ‘죽은 어른의 사회’에 살고 있다.(2009. 3. 16.)

*이 글은 <숭대시보> No. 990, 2009년 3월 16일자에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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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22. 13:54
육안(肉眼)을 넘어 심안(心眼)으로


조규익(숭실대 교수)

서화담선생이 길을 가다가 집을 잃어버린 채 길가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화담선생에게 "저는 나이 다섯에 눈이 멀어 지금 20년이나 되었는데요. 오늘 아침에는 밖으로 나왔는데 갑자기 천지만물이 환히 보이기에 기뻐 어쩔 줄 몰랐지요.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길은 여러 갈래이고 대문들이 서로 비슷비슷하여 제 집을 분별할 수가 없군요." 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도로 눈을 감으시오. 그러면 곧 당신의 집이 있을 것이오."하고 집 찾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그 맹인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숙한 걸음걸이로 곧장 자기 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 한다.


조선조 영조 때 연암 박지원선생이 인간의 본분을 그르치는 망상의 위험을 깨우치기 위해 끌어온 서화담의 일화가 바로 이 이야기다. 외부에 드러나는 색깔과 형상에 정신이 혼란스러워지고 슬픔과 기쁨에 마음이 쓰여서 망상이 되기 때문에 차라리 맹인으로 돌아가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숙한 걸음걸이로 걷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본분을 지키는 도리임을 깨우치기 위한 비유의 목적으로 연암선생은 이 일화를 인용했겠으나, 어쩜 화담선생의 일화에 나오는 스토리는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번에 불현듯 하게 되었다.


우리는 왜 '보이는 것들'에만 집착할까? 우리가 만나야 하고, 소유해야 하는 것들 가운데 보이는 것은 과연 몇 %나 되는가?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제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형상과 '제 귀에 들려오는' 달콤한 말들에만 집착한다. 젊음은 덧없는 시간에 밀려 머지않아 주름이 지고 소멸의 나락에 떨어지련만, 우리 모두는 흡사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리라 착각하고 산다. 달콤한 말이 바람결에 흘러가버리면 배신과 회한의 암종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을.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움켜잡아야 할' 구원의 노끈으로 착각한다. 세상의 모든 반목과 대립, 욕망과 집착이 바로 '육체의 눈'을 통해 '보이는 것'으로부터 연유된다는 사실을 단 한 순간만이라도 깨닫는다면, 우리네 삶이 이토록 각박하고 힘겹진 않으리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세계보다 '심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물이나 세계가 훨씬 넓고 가치 있다는 점을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네 삶터가 이토록 삭막하진 않으리라.

그러나 나와 대부분의 내 이웃들은 '육안'만을 지닌 채 그렇게 살아왔고,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앞으로도 '육안 만으로 그렇게들' 살아갈 것이다. '육안'으로 확인한 사실만 모든 것의 표준으로 착각하면서 세상의 이익을 송두리째 삼키기 위해 '혈안(血眼)'들이 되어 날뛸 것이다. '혈안'은 '분노와 흥분으로 핏발이 선 눈'이다. 인간의 욕망과 배신, 갈등으로 점철된 '육체의 눈'이다. 그 검붉게 충혈된 '육안', '혈안'을 가지고 우리가 '심안 만을 가진 우리의 이웃들'을 만났던 것이다. 우리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그래서 가끔 이야기 속에서나 볼 수 있었고 더욱더 띄엄띄엄 아득한 뉴스 속에서나 보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세상은 '육안만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네들 위주로 꾸려나가는 공간이다. 이 세상의 주인이라 착각하는, '육안 뿐인' 우리들은 자신들이 진짜 '시각 장애인'인 줄을 모른다. 앞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에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더냐고. 안타까운 일이다. '육안 만을 지닌 우리'가 '심안 만을 지닌' 우리네 이웃들을 도와준답시고 '육안 만을 지닌' 사람들이 가급적 적게 오고 가리라 생각되는(그들에게 방해를 덜 주겠다는 배려인가?) 문경 새재를 함께 넘었다. 그리고 풋풋한 솔바람 속에서 그들의 밝고 건강한 의지를 배우게 되었다. 아, 나야말로 그동안 영락없는 '시각 장애인'이었던 것이다! 함께 팔짱을 끼고 새재를 넘은 서른다섯의 최양도, 쉰셋의 김씨 아저씨도 모두 내 선생님들일 뿐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내 안에서 부글거리곤 하는 불평과 불만, 좌절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를 익힌다던 최양, 의료정책이나 세상의 부조리 등을 당당하게 성토하던 침구사 김씨, 아들 딸들을 모두 훌륭하게 키워내고 손자들의 재롱 속에서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는 주부 김씨 등등. 그들은 '육안 뿐인' 우리보다 더 깊고 넓은 세계, 더 높고 많은 것들을 보고 있었다. 서화담이 만난 그 맹인은 '육안'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걸어갈 길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육안'은 우리 자신의 내면과 본질을 그르치는 욕망과 탐욕의 창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심안'은 우리의 내면을 진리가 숨 쉬는 평화로운 초원으로 인도하는 길잡이일 가능성이 더 많다. '육안 없는 자들이 무얼 볼 수 있으랴?'라는 편견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터를 이루고 있는 또 다른 면을 '백안(白眼)시' 해왔다. 그 일면을 바라보지 못하는 한 '육안 만의 우리'는 영원한 불구자들일 수밖에 없다. 무섭고 안타까운 일이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이들의 벗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는 가족들의 표정에서 '육안'과 다른 '심안'이 비로소 열리고 있음을 나는 보았다.

**제가 상당히 오래 전에 써서 어딘가에 발표한 글인데, 누가 자신의 까페(cafe.daum.net/cateurl)에 옮겨 놓았군요. 그 분께 감사하며 제 블로그의 손님들을 위해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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