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1. 29. 15:15

 

 

 


애코머 푸에블로 등 앨버커키 인근 도시들이 표시된 지도

 

 


스카이 시티 이정표

 

 


스카이 시티 가는 길

 

 


스카이 시티 입구의 돌기둥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

 

 


스카이 시티 문장(紋章)

 

 


컬츄럴 센터에서 스카이 시티로 출발하는 셔틀 버스들

 

 

 


밑에서 올려다 본 메사의 주택들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 인디언

 

 

내 나이 또래의 한국인으로서 푸에블로(Pueblo)’란 이름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참 오만했던 북한이 간첩들을 활발하게 남파하여 우리나라를 흔들다가 급기야 청와대 폭파와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김신조 등 무장공비들을 내려 보낸 것이 1968117. 그 바로 일주일 후인 1968123일엔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 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되었다. 필자 나이 당시 11. 간첩들이 내 고향 동네의 훌륭한 청장년 두 명을 밤에 죽이고 내뺀 사건으로 몸서리치고 있던 차, 김신조와 푸에블로 호 사건은 북괴에 대한 불신과 증오의 대못을 내 마음에 박고 말았다. 푸에블로란 명칭의 원조를 미국에 와서 만난 것이다.

 

그간 틈 날 때마다 인디언들을 찾아 다녔으나, 시간부족역부족을 느낄 뿐이었다. 미국 전역에 564, 오클라호마에만 39개 종족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데, 나 혼자 어느 세월에 그들을 다 만난단 말인가. ‘문명화된 5개 종족[The 5 Civilized Tribes/체로키(Cherokee), 치카샤(Chickasaw), 촉토(Choctaw), 세미놀(Seminole), 크리크(Creek)]’을 포함 10개 정도의 인디언 종족들을 만나면서 힘과 의지의 소진(消盡)을 절감하게 되었고, 바깥으로 눈을 돌리던 중 뉴멕시코에 푸에블로 인디언이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사실 오클라호마에서 만나는 인디언들은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을 의심할 정도로 미국화[Americanization]되었다는 것이 그간 내린 내 판단이다. 내 느낌으로 이 점은 이른바 문명화되었다는 5개 종족 뿐 아니라 여타 종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영어를 사용하고 미국인들의 생활양식으로 살며 미국 정치체제 속의 일원으로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실현을 추구하는 인디언들에게서 그들만의 종족적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인디언들을 만난다면서 박물관이나 찾아다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좌절을 느낀 것은 그런 깨달음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물론 박물관은 한 종족이나 민족, 국가의 과거현재미래가 통합되어 숨 쉬고 있는 생명의 공간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긴 하다. 그러나 분명 주변에 인디언들이 살아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왜 나는 한사코 화석화된 것처럼보이는 박물관만 찾아다니는가. 그런 회의가 엄습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미국화 된 인디언들은 외모만 인디언의 모습을 띠고 있을 뿐, 문명사회나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이 누구보다 강하다. 그건 미국사회의 여타 마이너리티들인 유색인들이 그런 욕망을 갖고 노력하는 것과 똑 같다. 재미 한인들에게 미국화 되지 말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견지(堅持)하라는 정신 나간 주문을 할 수 없는 것은 인디언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인디언 문화와 역사의 탐사에 나선 내 행로가 암초를 만난 것은 분명하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필요가 절실할 때 홀연 나타난 것이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인디언들이었다.

 

그들을 만나러 앨버커키로 가는 하이웨이의 주변은 키 낮은 식물들과 크고 작은 돌들이 깔린 사막지대였다. 그리고 몇 마일씩 간격을 두고 다양한 이름의 푸에블로 인들이 살고 있는 구역이 우리의 시야를 거쳐 지나갔다.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종류가 이렇게도 많단 말인가. 뉴멕시코에 오기 전만 해도 푸에블로는 단일민족인 줄 알았던 내 무지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장이었다. 오밤중이나 되어서야 앨버커키에 도착, 호텔에 1박을 하면서 다음 날 가기로 한 스카이 시티의 기록들을 점검했다. 그 동안은 매혹적인 이름에 정신이 팔려 그곳이 애코머 푸에블로(Acoma pueblo)’ 인디언들만의 거주구역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그곳에 가면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하나만 갖고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차를 타고 오면서 많은 푸에블로 인디언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스카이 시티에 살고 있다는 애코머 푸에블로도 그들 중 하나일 뿐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 지역에서는 스카이 시티의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나는 것에 초점을 두기로 한 것이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앨버커키에서 서쪽으로 60 마일쯤 떨어진 곳의 스카이 시티, 애코미터(Acomita), 맥카티스(McCartys) 등 세 마을에 살고 있었다. 원래 푸에블로가 점유해온 땅은 500만 에이커에 달하는데, 실제로 현재는 그 면적의 단 10%만 소유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스카이 시티가 바로 올드 애코머(Old Acoma)’의 원래 거주지다. 미국정부의 2010년 통계에 따르면, 5000명 정도의 애코머 인들이 종족적 정체성을 갖춘 사람들로 확인되며, 그들이 이 지역을 800년 이상 계속 점유해온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푸에블로애코머란 말들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앨버커키에 와서 들은 바에 의하면, ‘푸에블로마을[village]’이나 작은 도시[town]’를 가리키는 스페인 말이며, 미국 서남부의 사람들 혹은 그곳의 독특한 건축을 가리키는 뜻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애코머란 말도 스페인어에서 나왔는데, ‘항상 있었던 장소[the place that always was]’ 혹은 화이트 락의 주민들[People of the White Rock]’을 뜻한다고 한다. 뉴멕시코 샌 후안 카운티(San Juan County)의 나바호(Navajo) 인디언 정착지가 바로 화이트 락 캐년(White Rock Canyon)인데, 그렇다면 원래 그곳에 살던 애코마 푸에블로 인들이 나바호 인들을 피해 이곳으로 온 것인지 현재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애코머 푸에블로 사람들은 건축물이나 농사짓는 양식, 혹은 도자기 등에 나타나는 예술성으로 미루어 아나사지(Anasazi), 모골론(Mogollon), 기타 다른 고대 부족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종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메사(mesa)에서 내려다 본 경관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메사의 주택가 골목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모습

 

 


스카이 시티의 주택들

 

 


전통 어도비 양식의 주택들

 

 


메사에서 내려다 본 황야

 

 


스카이 시티의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과 앞 뜰의 공동묘지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의 내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마을 앞 좌판에 팔려고 늘어놓은 도자기들

 

 

아침 일찍 앨버커키의 숙소에서 나온 우리는 복잡한 산길 60마일을 달려 넓게 펼쳐진 분지 속의 스카이 시티에 산다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을 찾았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Sky City Cultural Center)’에 당도하여 긴 시간을 기다리고 난 11시 반에야 가이드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살아온 메사(mesa) 꼭대기가 평평하고 주위가 벼랑인 돌 잔구는 높이가 365피트[111.3m]나 되는데, 길은 잘 나 있었지만, 관광객들이 개인적으로 그곳에 접근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셔틀버스로 이동하여 가이드의 안내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셔틀버스를 타고 센터로부터 돌덩어리들 사이를 10분 정도 달려 올라가니 오랜 옛날부터 있어 온 듯 메사 위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전통 주거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모든 집들이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것은 물론이고, 대체로 33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 양식의 건물들이었는데, 모두 남향이었다. 이 건물들을 보며 이른바 어도비 양식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서까래, 풀 짚, 회반죽 등으로 덮은 지붕을 대들보가 가로질러 밖으로 삐죽삐죽 나오게 한 다음 어도비 벽돌로 벽면을 마무리하는 공법이었다. 1층 집의 지붕은 2층 집의 바닥이 되고, 2층 집의 지붕은 3층 집의 바닥이 되니, 실로 멋진 상호의존적 건축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집들의 사이사이에 조성된 광장에서 각종 전통 행사들이 열렸으리라. 

 

2층이나 3층집을 오르내릴 땐 반드시 나무 사다리를 사용했다. 만약 위에서 사다리를 치워버리면 그 집에 올라갈 수 없으니, 그것은 일종의 외적에 대한 자위(自衛) 수단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기 전에는 평지에서 메사를 오르내리던 통로라 해야 기껏 돌 표면을 파서 만든 가파른 계단뿐이었을 것이니, 그곳만 막으면 외적들이 메사 위의 주택가로 올라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집들 앞에는 그들의 전통 빵을 굽는 흙 화덕이 만들어져 있고, 개중에는 최근에 빵을 구은 듯 그을음이 밖으로까지 번져 나온 경우도 보였다. 서남쪽 벼랑 위엔 엄청난 크기와 규모의 어도비 건축물 성 이스테반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이 있고, 그 앞마당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사진은 성당의 겉면만 찍을 수 있었고, 그나마 공동묘지 근처에서는 카메라를 조작조차 못하게 막는 것으로 보아, 성당 내부나 공동묘지가 그들에겐 성역(聖域)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종교나 신앙에 관한 궁금증은 전형적인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인 가이드의 설명으로 대부분 해소되었다. 그는 애코머 인들의 전통 신앙은 인간의 삶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강조한다는 것, 태양은 창조주 신을 대리하는데, 공동체를 둘러 싼 산들과 그 위에 떠 있는 태양 그리고 그 아래의 땅이 균형을 이루어 애코머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 전통 종교 의례는 충분한 강우를 비는 데 중심이 있었으므로 날씨에 많이 좌우된다는 것, 그런 제의에서 카치나(kachina) 댄서들이 춤을 춘다는 것, 푸에블로 거주지에는 종교 의례를 행하는 방 즉 카이바(kiva)들이 있다는 것, 각 푸에블로의 지도자는 공동체 종교의 지도자이거나 추장의 지위를 갖고 있는데, 추장은 태양을 관찰하여 종교의례의 스케줄을 짜는 지침으로 사용한다는 것, 많은 애코머 인들이 가톨릭 신도들이며 그들의 행사에 가톨릭 정신과 전통 종교가 혼합된 모습이 보인다는 것, 아직도 많은 제의들이 살아 있는데, 9월에는 그들의 수호신인 스테판 성인(Saint Stephen)을 기리는 축제가 있다는 것, 그날에는 메사가 대중들에게 개방되어 2천명 이상의 순례객들이 축제에 참여한다는 것등을 열심히 설명했다.

 

성당에 이르기 전 중앙 광장에는 세 개의 흰 색 통나무들을 엮고 위쪽에 가로막대를 댄 사다리 모양의 제구(祭具)’ 두 개가 가옥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는데, 가이드에게 용도를 물으니 일종의 기우제의(祈雨祭儀)’에 쓰이는 물건들이라고 했다. 즉 세 개의 통나무는 빗줄기, 위쪽에 댄 가로막대는 비구름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늘 물이 모자라 고통을 받던 그들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제구였다. 말하자면 가톨릭과 전통 제의가 공존하던 신앙의 형태를 현장에서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가족 형태는 어떨까. 모계사회인 애코머 인들에게는 대략 20개의 클랜(Clan)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19개의 클랜들이 살아 있으며, 각각의 클랜에 따른 상징동물들이 있었다. 클랜의 상속에 대하여 물으니 서로 다른 클랜 출신의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경우 모계사회인 만큼 아이의 클랜은 어머니의 것을 따른다고 했다. 이들의 결혼은 모노가미(monogamy) 즉 일부일처제로서 이혼은 매우 드물며, 사람이 죽은 경우 4일 낮밤을 새운 뒤 매장한다고 했다.

가이드를 따라 이동하는 곳곳에 애코머 여인들이 좌판을 벌이고 앉아 있었다. 주로 그들이 직접 구은 도자기와 비드(bead) 및 수예 등 전통 수공예품들이었다. 아이들도 자신들이 만든 아기자기한 도자기들을 갖고 나와 파는 것을 보며, 공예기법이 부모로부터 자녀들에게 전수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요는 하지 않았으나, 이들 좌판에 연결되도록 가이드의 이동경로는 교묘하게 짜여 있었다. 카지노 등의 독점 사업으로 쉽게 돈을 버는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술을 바탕으로 자립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가 매우 바람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애코머 인들에게서 미국화(Americanization)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물론 현재 메사의 전통가옥에 사는 주민들은 극히 일부분이고 도시로 나가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가이드가 보여준 것처럼 그들 역시 미국인인 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들의 정체성만큼은 어떻게든 붙잡고 있으려는 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멕시코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미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지역은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였다. 그들의 지배를 받아 가톨릭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전통 신앙을 버리지 않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었다. 인근 부족들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메사의 고지대에 거주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어도비라는 건축양식을 통해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생활미학을 구현하고 뉴멕시코의 지역 미학으로 승화시킨 점은 무엇보다 먼저 강조되어야 할 그들의 공로였다. 그들은 아름다운 도자기와 각종 수공예품들을 직접 생산하여 지금도 외부인들에게 팔고 있었다. 또한 아직도 5천에 가까운 애코머 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이 지역 혹은 그 인근에 살고 있으며, 외부와의 통로를 열어놓은 채 자신들의 미래를 가꾸고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비록 이 사회 마이너리티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삶의 의지와 미래지향적 성향을 확인하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기우제의에 사용하던 도구[세 개의 기둥은 빗줄기를 가로막대는 구름을 상징함]

 

 


이 도시의 전형적인 어도비 양식 주택

 

 


메사에서 내려다 본 아래쪽 경관

 

 


메사의 주택가 좌판에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진열하고 있다.

 

 


컬츄럴 센터의 식당

 

 


식당에서 주문한 푸에블로 전통음식[멕시코 풍 음식이었음]

 

 


애코머 스카이 시티 가는 길 표지판

 

 


애코머 스카이 시티 건너편 언덕에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6. 02:45

 

 


촉토 내셔널 히스토리 뮤지엄에서 63번과 270번 하이웨이를 번갈아 타며 두 시간 이상을 달려 세미놀 족의 본거지인 위워카에 도착했다.

 

 


세미놀 네이션 뮤지엄(Seminole Nation Museum)

 

 


오클라호마 주에 강제이주된 39개 인디언 종족의 고향들[세미놀 족의 고향은 플로리다였음]

 

 


세미놀 네이션 뮤지엄 문 앞에서 만난 세미놀 족 전사의 두상

 

 

 

 

놀라운 세미놀(Seminole) 인디언들(1)

 

 

 

 

세미놀 족을 만난 것은 참으로 우연이고 행운이었다. 브라이언 군의 졸업 축하 파티에 참석했을 때, 그의 미국인 친구 한 사람에게 고향을 물었더니 세미뇰이라 했다. ‘이란 발음에 혹시 스패니쉬 계통인가 하고 물었더니, ‘인디언 부족 이름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그날 밤으로 그것이 인디언 부족 이름이자 그 부족의 네이션이 있는 도시의 카운티 이름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스펠 ‘Seminole’세미뇰로 들은 것은 내 귀의 착각이었던 듯, 다른 미국인들에게 다시 물으니 모두 세미놀이라고 했다. 세미놀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치카샤와 촉토를 거쳐 드디어 그 실체를 육안으로 보게 되었다. 세미놀이 그동안 돌아 본 체로키치카샤촉토 등과, 앞으로 돌아 볼 크리크(Creek)와 함께 개화된 다섯 종족[Five Civilized Tribes]’을 이룬다고 하니, 적잖은 호기심이 발동된 것도 사실이었다.

 

'촉토 내셔널 히스토리컬 뮤지엄(Choctaw National Historical Museum)'을 나선 우리는 키아미치 산간을 꿰뚫는 63, 270번 하이웨이를 번갈아 타고 점심을 훌쩍 넘긴 무렵에서야 세미놀 카운티의 위워카(Wewoka) 시티에 도착했다. 뭔가 잔뜩 쏟아질 것만 같은 우중충한 날씨에 퇴락한 시가지의 모습이 겹치니 분위기가 음산했다. 다운타운엔 빈 상가들이 즐비했고, 페인트가 벗겨져 초라해 보이는 집들도 부지기수였다. 다른 지역의 상당수 중소도시들에서 이미 목격한 것처럼 이 도시도 기름기가 빠져 있었다. 아마도 원유의 고갈로 지역경기가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기가 좋은 대도시로 사람들이 빠져나가 텅 빈 집들은 사람의 온기를 쏘이지 못한 채 삭아들고 있었다. 살아있는 레스토랑 한 군데를 간신히 찾아내 시장기를 지우고, ‘세미놀 네이션 뮤지엄(Seminole Nation Museum)’에 갔다. 아담하고 아름다운 건물. 세미놀 사람들의 미학이 느껴지는 건축이었다.

 

연방정부에 의해 인정된, 미국 전역의 세미놀 족 집거지는 세 군데로 알려져 있다. 오클라호마 주의 세미놀 네이션, 플로리다의 세미놀 트라이브, 플로리다의 미코수키(Miccosukee) 트라이브가 그것들이다. 물론 세미놀 족의 원 고향은 플로리다이며, 2차 세미놀 전쟁 이후 8백명의 흑인 세미놀 인들을 따라 플로리다에서 인디언 거주구역으로 강제 이주되어 온 3천명 세미놀 인들의 후예들이 호클라호마 주에 살고 있다. 따라서 오클라호마의 세미놀 네이션은 세 군데 집거지들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우리가 찾아온 이곳 위워카 시티가 바로 오클라호마 세미놀 네이션의 본부가 있는 곳인데, 현재 등록 인원 18,800명 가운데 대략 13,500여명이 오클라호마 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세미놀 카운티에는 대략 5,3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1936년 인디언 재건법이 공표되면서 세미놀 족은 그들의 정부를 되살려 내기 시작했으며, 부족의 사법 관할지역 또한 그들의 다양한 자산들이 포함되어 있는 세미놀 카운티를 카버하게 되었다고 한다. 플로리다에 남아있던 수백 명의 세미놀 인들도 3차 세미놀 전쟁을 겪으면서도 미국 정부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드디어 평화를 찾게 되었으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후예들이 연방정부로부터 인정을 받는 두 개의 세미놀 트라이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들 조직된 세미놀 인들과 조직되지 않은 부족원들이 함께 1823년 미국 정부가 강제로 뺏어간 24백만 에이커의 땅에 대하여 1976년 기준으로 16백만 달러 가치의 정착지를 받아냄으로써 분쟁은 완결된 셈이다. 따라서 현재 세미놀 족이 오클라호마 한 군데와 플로리다 두 군데 등 세 지역으로 나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미놀 큐레이터의 설명에 따르면, 세미놀 인들의 말은 무스코기 어[Muskogean Language]에 속하는데, 전통적으로 서로 통하지 않는 두 말, 즉 미카수키(Mikasuki)와 크리크(Creek)어를 동시에 사용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크리크가 정치사회적 측면의 지배언어였으므로, 미카수기 어를 쓰는 사람들도 크리크 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다. 조사 결과 2000년대 초까지 부족원의 25% 정도가 크리크와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나머지는 영어만 쓰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현재 오클라호마에 있는 네이션의 대부분 세미놀 인들은 영어를 제1언어로 쓰고 있으나, 부족 차원에서 전통적인 크리크 어를 살려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한다.

 

다른 인디언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도 사회구조로서 가장 기본적인 가족 바로 위에 클랜(Clan)이란 단위가 있었다. 아주 오랜 옛날에 어떤 동물이나 초자연적 정령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고난을 견뎌 낸 것은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혈통으로 연결되는 사람들이 특정 동물의 정령들과 연관을 맺게 된 것이다. 치카샤 네이션에서도 촉토 네이션에서도 누구나 특정 클랜에 속해 있고, 너구리악어 등 어떤 동물이 자기 클랜의 상징동물인지 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점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불문(不文)의 제도 아래, 세미놀의 성인들은 자기네 부모가 속한 클랜들 밖에서 결혼상대를 찾아야 할 의무를 갖고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동성동본 혼인금지와 같은 차원의 제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근친혼을 금함으로써 종족을 건강하고 우수하게 유지하려는 지혜의 발로라고 할 수 있었다.

 

***

 

문을 열고 뮤지엄에 들어가니 실제 모습대로 전시된 세미놀 족의 전통 생활양식이 눈을 끌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주방과 거실이 함께 붙어 있었는데, 설명을 위해 그 옆에 붙여놓은 클레이(Clay MacCauley)의 말이 흥미로웠다.

 

세미놀의 가정에 들어가면 누구나 사람들이 모이는 중심에 모닥불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곳은 요리가 준비되는 장소이고, 가족과 그들의 친구들이 사교를 나누는 장소이며,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이야기되는 장소다.”

 

지금까지 만나본 모든 인디언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세미놀 족도 가족 간의 유대나 사랑을 중시한다는 점과 모계사회라 할 정도로 여성의 발언권이나 힘이 절대적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모닥불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수프와 그 주위에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 다 된 음식을 각자에게 덜어주는 주부 등 익히 보는 가족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이 뮤지엄의 첫 공간에 제시되어 있었다. 아마도 세미놀 인들은 끈끈한 가족공동체의 전통을 외부 손님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그 뿐 아니었다. 전통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활사 자료들과 예술품 들이 적절하게 분류, 전시되고 있었다.

 


 

각 부족의 구역이 할당된 시기와 점유지의 성격

 


조정이 끝난 1907년까지 각 부족의 점유지 현황

 

 


세미놀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초기 네이션 깃발

 

 


오클라호마 주 내 39개 인디언 부족의 분포 지역 리스트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