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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2.17 대통령의 콤플렉스
  2. 2008.07.01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글 - 칼럼/단상2016. 12. 17. 13:51

대통령의 콤플렉스

 

 

 

최근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사람들은 그를 비판하고 질타하느라 여념이 없다. 단군 이래 우리가 이렇게 하나로 단결된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면, 우스갯말로 못난 대통령이지만 국민들의 단결을 위해 큰 공을 세웠다고 말할만도 하다. 의정 단상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선량(選良)들 가운데 몇이나 돌을 던질 만한자격을 갖추고 있을 것이며, 촛불을 들고 나선 나 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 가운데 몇이나 국민으로서의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을까. 어차피 물러날 대통령이긴 하지만, 이쯤 우리는 그를 거울로 삼는 게 옳다그를 거울로 삼기 위해서라도 우리 스스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질 필요는 있다.

 

비선(秘線)의 인물이나 조직이 국정을 농단케 한 일에 대해서는 입이 천 개라도 변명할 수 없다. 그와 함께 불통, 여염집 여인에 의한 연설문 수정(혹은 대필), 머리 손질과 피부미용에 대한 집착 등은 대통령의 큰 문제로 지적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들을 관통하는 핵심은 콤플렉스. 인간의 현실적 행동 및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이나 감정의 복합체가 콤플렉스다. 콤플렉스는 열등의식을 비롯한 내면의 응어리 혹은 억압된 감정으로 구체화 되며, 이런 무의식은 대부분 개인차가 있지만, 간혹 집단적인 모습을 띠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콤플렉스는 무엇일까. 미안한 이야기지만, ‘공주로 자란 대통령이 타고난 책벌레는 아닌 듯 하고, 순발력 있는 두뇌의 소유자는 더더욱 아닌 듯하다. 성장기 내내 생존경쟁의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까닭일까. 앎에 대한 욕망과 투지에서 평균치 이하이고, 그러다 보니 모든 분야의 지적 수준이 평균 이하임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인사에 실패했다고 비판을 받긴 하지만, 대통령 주변의 인물들이 대체로 우수한 인재들인 것은 사실이다. 그들로부터 대면보고를 받으면서 자자구구(字字句句) 사전이나 인터넷을 들춰볼 수도 없고, 초등학생처럼 사사건건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존감을 손상받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모든 보고사항을 문서로 받아보고자 했을 것이다. 혼자 꼼꼼히 읽어가면서 자유롭게 사전이나 인터넷의 도움을 받고자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충분치 못한 지적 용량을 부하직원들 앞에서 노출시키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으리라. 대면보고를 수용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고, 그 점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불통이란 비판이 따라붙게 된 것이다. 대통령 자신의 자존심만 지킬 수 있다면, 불통에 대한 비판 쯤 감수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와 관련되는, 대통령의 특징이 바로 눌변(訥辯)이다. 공자는 欲訥於言 而敏於行(말에 있어서는 어눌하게 하고 실행에 있어서는 민첩하게 하고자 한다)’이라 했다. 공자의 언급대로 심사숙고 끝에 내놓는 말을 어눌하다고 한다면, 그 어눌함이 생각 없이 내뱉는 達辯(달변)’보다 훨씬 낫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대통령  뺨칠 만한 눌변이다. 사실 세상엔 말 잘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그 말 잘 하는 사람들에게 도무지 믿음이 가질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말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대부분 첫판에 , 사기꾼이다!’라는 느낌이 전기처럼 전해져온다. 내가 목격한 사기꾼들 치고 말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나의 눌변이 결코 부끄럽지 않고, 대통령의 눌변을 그리 큰 흠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2012년 대통령 선거 토론 때 야당 후보로 출마한 어떤 젊은 여자와 마주 앉은 모습을 TV로 지켜본 적이 있다. 그 젊은 여자는 참으로 말을 잘했다. 그러나 그 역시 내겐 입만 살아있는선동가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차라리 어눌한 대통령이 나았다. 그런데, 대통령은 자신의 어눌함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TV에 나와서 사자후를 토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모두 달변가들이다. 그러나 입으로 하는 말과 속셈이 대부분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잘 놀리는 혀가 그리 중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자신의 어눌함을 매우 부끄럽게 여기는 것 같다. 차라리 자신이 말로 뱉어낼 콘텐츠의 부족을 부끄러워해야 하는데, ‘말솜씨 없음만 부끄러워한다. 그게 바로 해결할 수 없는 그의 어리석음이다.

 

대통령이 눌변과 함께 부끄러워하는 것이 바로 렬한 글 솜씨인 것 같다. 연설문 담당관에게 연설문을 받고서도 다시 최순실의 수정을 받은 이유는 뭘까. 최순실의 어투나 문장이 편했을 것이다. 잘 나고 뛰어난 사람들이 현학적으로 작성한 글보다는 통일은 대박식의 단문이 수준에 맞아 훨씬 맘이 편했을 것이다. 누구나 한 번 두 번 글 도움을 받다 보면, 스스로 글 쓰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글은 습관이다. 한 번 최순실에게 맡겨 본 대통령으로서는 어느 순간부터 대필자 혹은 검토자를 다른 누구로도 바꿀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내 맘을 콕 짚어낼 수 있을까?’라는 찬탄을 보내며, 대부분의 연설문을 그녀에게 맡기는 동안, 대통령 자신의 글 솜씨는 점점 퇴보하고 말았으리라. 아니, 단 한 줄의 글도 제 손으로 써내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말이 어눌하고 글이 졸렬하니, 내로라하는 참모들을 대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말이 어눌하고 글이 졸렬하면, 책이라도 열심히 읽고 짧은 글이라도 열심히 써야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고자 하는 대통령으로서는 단 한 번도 국민들 앞에서 어눌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으며, 참모들 앞에서 단 한 점의 무식한 모습도 보여줄 수 없었다.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것이 대통령 권위의 전부라 생각하여 아예 취임 첫날부터 대면보고를 받지 못했던 것일까. 처음부터 그런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어쩌면 오늘과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다음이 머리 손질과 피부미용이다. 대통령만큼 나이에 맞지 않는 외모와 고운 피부를 갖고 있는 여성도 드물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그는 늘 자신의 얼굴과 피부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역시 여성인지라 아름다움에 관한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일 것이다.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여인들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 덕에 우리나라의 화장품 산업이 이토록 발전했겠지만, 대통령까지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각종 주사까지 맞아가며 피부나 머리 관리를 해야 했는지, 생각할수록 한심하다. 화장품 광고마다 화이트닝(whitening)’을 강조하고, 각종 주사제를 선전하며 어린애 같은 피부를 내거는 광고에 한국 여성들이 거금을 아까워하지 않는 건 일견 당연하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나랏돈으로 각종 주사제까지 사들이고, 마구잡이로 비선의 의사들을 불러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런 와중에 불거진 사건이 세월호 7시간이다. 남자고 여자고 간에 60 넘어 귀한 것은 내면의 덕이 내뿜는 광채다. 쓸데없이 이것저것 덕지덕지 바르고, 주사바늘로 밀어 넣어 팽팽해진들 그게 얼마나 지속되겠는가. 대부분 돈과 시간의 낭비요,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우스워지는 일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런 부질없는 일로 국민의 기대와 공적 임무를 저버리는 것은 왜일까.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콤플렉스 탓이다. 그리고 그 콤플렉스는 그간의 삶이 정상적이지 못했거나 불건전했음을 드러내는 증거일 뿐이다.

 

처음부터 대통령에게 이런 콤플렉스가 없었다면, 비선을 가까이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비선이 없었다면, 국정농단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콤플렉스는 물론 죄가 아니다. 자신의 의지나 의도와 무관하게 생겨난 내면의 암 덩이일 뿐이다. 형사법으로 다스릴 죄이기 이전에, 용한 의사들이 달려들어 정확히 진단을 내린 다음 뿌리를 뽑아야 할 병일뿐이다. 지금 우리는 불쌍한 환자 하나를 거리로 내쫓은 뒤 괜한 마음고생으로 뒤척이고 있는지 모른다대통령은 다중(多重) 콤플렉스 환자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겐 추상같은 법의 단죄와 함께 치료의 손길을 건네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7. 1.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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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얼마 전, 아끼는 후배 하나가 연구실로 찾아왔다. 40을 넘긴 나이. 공부를 할 만큼 했고, 연구력도 인정받고 있는 그였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그는 매우 지친 낯빛이었다. ‘이제 밀려드는 삶의 피곤함을 어쩔 수 없노라’고, 처음으로 그에게서 진한 푸념을 들었다. 지방에 있는 한 명문 공대의 ‘글쓰기’ 계약교수 채용에서 ‘물먹고 돌아온’ 패장의 행색이었으나, 비굴하진 않았다. 내 앞에서 그는 막 사라지려는 자존심의 끝자락이나마 부여잡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의 낙담한 표정과 절망적인 언사들이 화살이 되어 내 심장을 콕콕 찔러댔다. 아, 이 모진 바늘방석이여!


 아무리 어려워도 궁티를 내보이지 않는 게 전통적인 선비들의 법도였고, 그것은 이 땅에 인문정신의 바탕으로 굳어져 내려왔다. 몇몇 존경하는 국문학계의 대선배들은 세상의 잇속으로부터 초연할 줄 알았고, 그런 정신은 지금도 국문학의 바탕에 얼마간 남아있다. 그러나 세상은 많이 변했고, 우리들의 생각도 크게 달라졌다. 선배들은 꺼낼 엄두마저 내지 못하던 푸념을 나 스스로 늘어놓을 수 있게 된 것도 시대가 변한 덕분일까.


 산업화로 치닫던 70년대를 거쳐, 지속적 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고 신기술 개발과 제품의 고급화를 추구하던 80년대. ‘아랫도리가 찢어지게 가난하여’ 어렵사리 학부와 대학원에서 국문학 공부를 마친 필자는 ‘좋았던 시절’의 막차에 가까스로 뛰어오를 수 있었다. 5공과 6공이 번갈아 정권을 장악한 엄혹하던 시절이었다. 88서울 올림픽이 열렸고, 정보화의 물결은 도도하게 이 땅을 적시며 흘렀다. 경제의 팽창은 해외여행으로 사람들을 들뜨게 했고, 프로 스포츠와 컬러텔레비전의 도입, 성욕 표현의 무한한 자유는 사람들의 손에서 책을 앗아갔다. 미처 전통학문의 굴레를 빠져 나오지 못한 국문학이 유례없는 도전에 부닥치게 된 것이다.


 짧은 기간 우리가 경험한 것은 바로 ‘격변’이었다. 그 물결에 대응하는 국문학자들의 모습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필자 자신이 ‘제대로 공부하는’ 주류의 대열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나손 김동욱, 연민 이가원 등 한 시대를 이끌던 큰 학자들의 어깨 너머로나마 그 분들의 마지막 숨결을 느낀 건 행운이었다. 비록 그 숨결 속에 움트고 있던 새 시대의 기운을 읽어내지는 못하고 말았지만.


 국문학이 지리멸렬해질수록 그 분들의 통합적 사고나 거시적 안목만큼은 꼭 붙들었어야 했는데, 자잘하고 고만고만한 후학들이 힘들여 잡은 건 ‘썩은 동아줄’에 불과했다. ‘학제 간의 연구’나 ‘통섭’을 논하며 그것들이 흡사 하늘에서 떨어진 보배라도 되는 양 대견해하는 모습들을 보며, 좋은 전통을 제대로 잇지 못한 우리의 현실에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는 나날이다.


 사회가 정보화를 담론하고 ‘디지털’만이 살 길이라고 고창(高唱)할수록, 국문학이 그들에게 양질의 원료를 공급하고 떡 부스러기 정도나 얻어먹는데 만족하는 현실은 엄청난 수치다. 한갓 ‘제국주의자들’의 원료 공급기지로나 전락하고 말았으니, 이걸 일컬어 ‘국문학의 식민지화’라 할 수 있을까. 국문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디지털 기술자들이 국문학자들로부터 제공받은 콘텐츠로 만들어낸 제품을 다시 사다가 후학들에게 먹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다. 급기야 ‘국문학과’의 간판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다는 몇몇 대학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오죽하면 이름까지 바꾸었을까만, 내실까지 바뀌지 않을 경우 간판만 보고 찾아온 어린 학생들이 실망할 건 불을 보듯 뻔하다. 그 다음엔 또 무엇으로 바꿀 것인가.


 고리타분하다 꾸중하겠지만, 공자가 말씀한 ‘정명(正名)’은 이 경우에도 합당하다. ‘이름과 실질의 일치’가 정명인데, ‘국문학’의 어디가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우리 민족의 문학’이 국문학이다. 그 말 속에 우리가 배워야 할 내용과 지켜야 할 책무가 포괄되어 있으니, 국문학은 그저 ‘국문학’일 뿐이다. 몇 해 농사를 지어먹곤 또 다른 산판으로 이동하여 불을 놓는 화전민처럼 쉽게 이름이나 바꾼다고 풍요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변화에 대응하는 ‘철학’이고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끈질긴 탐색이다. 실력 있는 국문학자들에게 밥이 보장되지 않는 문제적 현실. 그 근저에는 상황 판단의 성급함과 가벼움, 그리고 철학의 상실이라는 우리 모두의 병통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교수신문> 2008년 6월 30일자의 '학이사' 칼럼에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