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5. 6. 26. 15:49

 

 

안수산 선생

 

 

노스리지(Northridge) 선생의 자택에서
선생 모자와 백규 가족

 

 

 


자택에서 책을 중심으로 환담하는
선생과 백규 가족

 

 

 


자택에서 환담하는 선생 모자와 백규 가족

 

 

 

 

, 안수산(Susan Ahn Cuddy) 선생님!

 

 

1991116. 1월이 캘리포니아에 비가 잦은 계절이긴 하지만, 그 날은 약간 햇볕이 들었었지요. 귀국을 며칠 앞 둔 시점에 우리 가족은 미리 약속했던 대로 안수산 선생님 댁을 방문하게 되었지요. 우리가 머물고 있던 UCLA의 대학 아파트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소도시 노스리지(Northridge). 가로수 잎이 참하게 깔린 한적한 동네 한복판의 깔끔하고 나지막한 단층집이었지요. 반색을 하며 맞아주시는 선생님과 외아들 필립(Philip Ahn Cuddy)의 표정이 정겹게 다가오더군요. 미리 연락을 하셨는지, 잠시 후 인근에서 변호사 일을 하고 있는 지성적 마스크의 따님 크리스틴(Christine Ahn Cuddy)도 도착했고요.

 

도산 선생의 유품들을 일일이 보여주시고 설명해 주시는 열정을 통해 도산 선생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질을 짐작할 수 있겠더군요. 가족 단위로 방문하는 경우가 흔치 않아서였을까요? 유독 우리 아이들을 귀여워해주시더군요. 도산 선생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부심, 도산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치던 당시 어른들을 추억하시며 눈시울을 적시곤 하셨지요. 감동이었습니다.

 

1915116일 생. 선생님은 1942년 스물일곱의 나이로 미 해군 해군 최초의 여성 포격술 장교로 1946년까지 복무하셨지요. 전역 후 미 의회 도서관과 연방 국가안전보장국(NSA)에서 비밀정보 암호분석가로 활약하셨고, 1959NSA에서 은퇴할 때까지 워싱턴 D.C.에서 300여명의 학자들에게 동서 냉전관련지식과 정보를 교육하는 일을 맡기도 하셨지요. 은퇴 후엔 노스리지로 돌아와 가족이 운영하던 중국 식당 필립 안의 문게이트(Phil Ahn's Moongate)'1990년까지 도우셨답니다. 우리가 만난 때는 그 일로부터 벗어나서 쉬고 있는 중이셨고요.

 

우리가 찾아간 그 날이 바로 선생님의 84세 생신이시더군요. 전화를 드렸을 때 이 날 만나자고 말씀하신 것도 당신의 생신날이기 때문이었음을 그 자리에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지요. 우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뒤 저녁 무렵이 되자 파티에 함께 가자고 하시면서 우리를 동네의 한 레스토랑으로 인도하셨어요. 이미 그곳엔 많은 친척들과 지인들이 모여 좌정해 있데요. 우리 가족에 대한 소개가 끝나고 우리는 따뜻한 환영의 박수를 받았지요. 특히 선생님의 남동생이신 필립 선생은 파티 내내 우리 아이들을 쓰다듬으며 정을 표시하기도 하셨어요.

 

파티가 끝난 한밤중 재회를 약속하며 헤어졌으나, 몇 년 뒤 재외동포재단 사무원의 실수로 서울에 오신 선생님을 뵙지 못했고, 결국 오늘 선생님의 부음을 접하게 되었네요. 그 분의 외 아드님 필립은 몇 년 전 우리 집을 방문해 식사를 나누며 선생님과의 추억을 되새기도 했으나, 어찌 선생님을 친히 뵌 것만 하리오?

 

천만리나 떨어진 미국 땅에서 조국 사랑을 실천하시다 돌아가신 선생님의 명복을 삼가 빕니다.

 

2015. 6. 26.

 

조규익 절

 

 

 


1999년 84세 생신연에서 게잌을
자르시는 선생님

 

 

 

 


하객들과 함께 한 생신연

 

 

 


생신연에서 선생님의 남동생과 백규 & 경현

 

 

 


선생님의 아드님 필립과 백규

 

 

 


젊은 시절의 선생님과 남자 형제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4. 28. 18:08

 

 


연구실에서, 프레너 교수

 

 


연구실에서, 프레너 교수

 

 


최근에 발간된 그의 책들

 

 

 

 

 

역사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온 프레너 교수

 

 

올해 2월로 접어든 어느 날 오후. 미소가 멋진 중년 신사 한 분이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자신을 역사학과의 프레너 교수라고 소개했지만,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알고 본즉 그는 지난 해 연구년으로 학교를 비운 상태였고, 나는 작년 8월에서야 OSU에 입성했기에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풀브라이트 방문학자라는 내 연구실의 문패에 호기심을 가진 것 같았는데, 말을 나누는 도중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더욱 큰 흥미를 갖는 것이었다. 떠날 날에 임박해서야 만난 점에 대하여 그 또한 애석해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그에게 흥미를 느낀 것은 그의 전공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나름대로 생각해보니, 그의 전공은 크게 보아 에너지사()’, 좁히면 에너지 개발 및 이용사’, 더 좁히면 에너지 개발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 등 사회문제사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그의 전공은 오클라호마주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비록 강제이주를 당한 처지였지만, 주로 인디언들이 차지하고 있는 대평원 오클라호마 주는 어딜 가나 원유와 천연가스가 생산되는 천혜의 땅이었다. 오클라호마 번영의 역사는 석유 등 천연자원 개발과 맥을 같이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문제들을 역사학의 관점에서 다루는 학자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나였다. 그저 한국사/동양사/서양사혹은 고대사/중세사/현대사쯤으로 나누어 연구하고 가르치는 게 전부라고 생각해온 것이 한국의 역사학계나 내 의식 수준의 현주소였던 것이다. 물론 어느 분야든 역사가 있기 마련이고, 역사학으로 수렴되는 모든 부분들이 인문학의 범주일 것은 분명하지만, ‘에너지 개발의 역사가 어엿한 학문 테마로 정립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나였다. 그렇게 프레너 교수[Dr. Brian Frehner]OSU의 한켠에서 만나게 되었다.

 

프레너 교수와의 인터뷰

 

 

그의 학문적 관심을 정확히 짚어내어 나열하면, ‘1860~1945년 미국/미국의 서부/환경/기술/공공분야로 집약될 수 있다. 그는 UCLA에서 학부를, 라스베가스의 네바다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OSU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매력적인 박사학위 논문의 테마가 바로 크리칼러지(Creekology)[석유 탐사학’]에서 지질학(Geology)으로: 1860~1930년까지 남부 대평원에서의 석유 탐사와 보호였다. 캘리포니아에서 출발하여 애리조나를 거쳐 오클라호마에 정착을 본 그의 지적 탐구 여행이야말로 흡사 대평원에서 석유를 탐사하듯 진행되어 온 것이나 아닐까.

 

얼마나 많은 역사학의 테마들이 존재해왔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역사학의 새로운 테마들이 개발될 것인가. ‘역사란 본질적으로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눈과 관점으로 보는데서 성립하며 역사가의 임무는 기록이 아닌 가치의 재평가에 있다는 크로체의 생각을 사건들의 해석이나 역사기술의 대전제로 삼은 E.H. Carr가 자신 있게 내세운 것처럼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다면, 역사학이란 앞으로도 지식사회의 마를 수 없는 오아시스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프레너 교수는 흡사 살아있는 현장에서 꿈틀거리는 노다지를 잡은 사람처럼 보였다. 버팔로 떼가 밀고 지나가는 대초원의 한복판에서 석유채굴기가 끄덕거리며 기름을 퍼 올리는 오클라호마의 풍경을 보면서도 그에 관한 역사적 상상력을 펼치지 않을 역사학도나 인문학도는 없으리라. 그런 점에서 프레너 교수는 자부심 강한 행운아였다.

 

그는 최근 들어 <<석유의 발견: 1859-1920 석유 지질학의 본질>>, <<인디언과 에너지: 미국 남서부의 개발과 기회>>, <<라스 베가스에서 쥬스 짜기: 미국 소도시의 성장에 대한 소견들>> 등 주목할 만한 저서들과 많은 논문들을 발표함으로써 학계의 주목을 받아온, 탁월한 학자였다. 그런 업적들을 바탕으로 여러 건의 학술상과 연구비 수혜를 받았으며, 많은 학생들이 그를 따라 면학의 열기를 분출하고 있었다.

 

프레너 교수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이제 우리도 화석처럼 굳어진 대학의 전공체계를 유연화시켜 시의적절하고 지역 친화적인 분야들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체제로 바꿀 필요가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20세기 중반에 구축한 패러다임을 21세기 한복판으로까지 지속시키려는 배짱을 갖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학자들은 입만 열면 전공영역의 정체성[identity]’을 강조하지만, 그건 강한 울타리에 대한 집착이나 미련에 불과하다는 점을 프레너 교수를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다. 바야흐로 다원화되고 있는 우리네 삶을 어떻게 학문체계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를 고민할 때가 된 것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8. 03:45

 

 

 

 

 

 


앨버커키를 떠나 산타페로 가는 도중

 

 

 

 


산타페 입구 세리요스 힐스에서 만난 작은 오름들

 

 

 

 


세리요스 힐스에서 바라본 산타페 전경

 

 

 

 


세리요스 힐스를 지나 산타페로 들어가는 길

 

 

 

 


1882년의 산타페 시가지 그림

 

 

 

 

 

 

 

 

 

환상과 낭만, 그리고 역사의 공간 산타페에 빠지다! [산타페-1]

 



 

 

큰 도시 앨버커키에서 산타페에 이르는 하이웨이 ‘I-25’ 역시 황량한 야산들을 끝없이 관통하는 길이었다. 뉴멕시코에 진입한 이래 키 작은 사막식물들과 작고 큰 화산 석들이 검게 그을린 채 다닥다닥 깔려 있는 야산들을 곧게 뚫고 나아가는 한 줄기 길이 대견하여 나 스스로 명명해본 것이 바로 용감한 길이었다. 그 길을 종횡무진 뚫고 돌아다니는 자그마한 자동차와 거기에 실린 내 실존적 자아가 사실은 용감한 존재들이었는데, 엉뚱하게도 나는 왜 그 길에만 자꾸 내 감정을 투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프로이트가 말한 일종의 '심리적 전이(psychological transference)'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례일까. 미국에 온 이후 특히 에 집착하는 나의 내면이 나 스스로도 흥미롭게 생각될 때가 많아졌다. 길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있는 한갓된 공간일 뿐인데, 그 길이 마치 살아서 내 비위를 맞춰주기도 하고 심술을 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건 왜일까. 아마도 나의 내면에 일어나는 감정적 에너지를 쏟아 붓기에 가장 좋은 대상이나 공간이 바로 미국 남부 지역의 길들이었으리라.

 

산타페까지 60.3 마일의 그리 길지 않은 길이었으나, 기억하기 힘들 만큼 많은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집거지가 차창으로 스쳐 지나갔다.* 지아 푸에블로(Zia Pueblo), 산타애나 푸에블로(Santa Ana Pueblo), 산 펠리페 푸에블로(San Felipe Pueblo), 산토 도밍고 푸에블로(Santo Domingo Pueblo) 등 푸에블로 인들은 거주하는 지역마다 구분되는 인종적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푸에블로 인들을 변별할 때는 거주 지역의 이름을 관치(冠置)하는 것이 통례인 듯 했다.

 

고개를 넘으니 멀리 산타페 산맥이 보이고, 그 앞쪽 넓은 분지에 한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을 만큼 넓게 퍼진 도회(都會)가 아름답게 형성되어 있었다. 잠시 언덕을 내려가자 길옆에 비지터 센터가 있고, 안으로 들어가니 젊은 여성 안내원이 호쾌한 웃음으로 맞아 주었다.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세리요스 힐스(Serrillos Hills)의 초입이자, 길 건너 산 속 산토도밍고 푸에블로의 인접지였다. 자료를 받은 다음 밖으로 나오니 앞 쪽에 제주도의 큰 오름을 연상케 하는 화산봉들이 여인네 젖가슴처럼 봉긋 솟아 있고, 산타페 진입을 위해 I-25에서 285로 갈아타는 턴파이크(Turnpike)가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산타페 카운티에 들어선 우리는 곧바로 산타페 시내 외곽의 신시가지를 거쳐 목표지점인 구시가지로 방향을 잡게 되었다. 거대한 가마솥의 한 가운데로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가듯 산타페 산맥 앞에 자리 잡은 산타페 시티는 거대한 분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지터 센터에서 20분이나 달렸을까. 드디어 어도비 건물들 일색인, 조용하고 아름다운 산타페 알트 슈타트(Alt Stadt)쌩얼이 우리의 가슴에 살포시 안겨들었다.

 

 

 


넓게 퍼져 있는 산타페 신시가지의 주택들

 

 

 


산타페의 '프란시스코 대성당'과 구시가지 중심부

 

 

 


주지사 궁(Palace of the Governors) 앞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는 주민들과 물건을 사는 관광객들

 

 

 


산타페 구시가 중심부의 야경

 

 

 

***

 

거룩한 믿음[Holy Faith]’을 뜻하는 스페인어 ‘Santa Fe’. 식민시대의 생생한 산물이 바로 이 도시다. 뉴멕시코 주도인 산타페는 주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자 산타페 카운티의 청사 소재지이며, 무엇보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캐피털 시티다. 2012년 기준으로 69,204명의 인구를 보유한 이곳은 카운티 전역을 포함하는 표준 통계지역[Metropolitan Statistical Area]’의 으뜸 도시이기도 하다.

 

산타페의 완전한 명칭이 ‘La Villa Real de la Santa Fé de San Francisco de Asís’ 아씨시 프란시스코 성인의 로열 타운[The Royal Town of the Holy Faith of St. Francis of Assisi]’임을 알고 나서야 구시가의 높은 곳에 우뚝 서서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는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바실리카 대성당[Cathedral Basilica of St. Francis of Assisi]’의 존재의미가 이해되었다. 대성당 뿐 아니라 시 청사 앞을 비롯한 시내의 곳곳에서 프란체스코 성인의 동상과 사진들을 보았는데, 그가 바로 산타페의 수호성인이었다. 그 점을 이해하고 나서야 왜 대성당이 내려다보이는 앞쪽에 중앙 광장과 주지사 집무실 및 공관을 포함한 공공기관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왜 그로부터 상가들과 각종 편의시설들이 방사상(放射狀)으로 펼쳐져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즉 '프란체스코 성인-대성당-아름다운 산타페'의 상관구조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산타페 광장의 모습

 

 

 

 


산타페 시청 정원과 프란체스코 성인 동상

 

 

 

 


"Hometown Hero" 2011. 7. 12.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레인저 상

 

 

 

 


산타페 시내에서 만난 멋진 화랑 입구

 

 

 

 


또 다른 화랑 입구

 

 

 

 


길 건너편에서 발견한 인디언 기념품 가게

 

 

 


길거리 상가에서 만난 독특한 디자인의 의자

 

 

 

 


길가 주택의 뜰에서 만난 인상적인 디자인의 두상

 

 

 

 

 

뉴멕시코 진입 후 며칠이 지나면서 고도(高度)의 변화에 무덤덤해지긴 했지만, 놀랍게도 뉴멕시코 주 전반의 평균 해발 고도는 1,000m에 가까웠고, 이 가운데 해발 2,134 m인 산타페는 미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주도였다. 가끔씩 귀가 멍멍해지는 느낌을 받은 것도 특히 고도에 민감한 내 신체 구조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다. 산타페의 면적은 96.9인데, 그 가운데 96.7가 땅이고 나머지 0.2는 저수지나 강, 호수 등 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추운 겨울, 따뜻한 여름이 이곳 날씨의 공식이라서인지 햇볕이 내리쪼임에도 구 시가지를 돌아보는 동안 우리는 달달 떨어야 했다. 한겨울인 12월의 평균온도 0.9, 한여름인 7월의 평균온도는 21.2이며,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6~8개월 동안 눈이 내린다고 하며, 6~8월까지는 심한 비가 내린다고 한다.

 

1848년 멕시코와 미국이 전쟁을 끝내고 체결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atado de Guadalupe Hidalgo/Treaty of Guadalupe Hidalgo)’은 뉴멕시코의 역사적정치적 향배를 결정한 분수령이었다. 멕시코에서 독립한 텍사스 공화국이 미국에 합병된 이듬해인 1846년에 일어난 것이 멕시코-미국의 전쟁이다. 전쟁에서 패한 멕시코의 평화협정 요청에 미국이 서명한 조약이 바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인데, 이 조약으로 멕시코는 현재 텍사스 주, 콜로라도 주, 애리조나 주, 뉴멕시코 주, 와이오밍 주의 일부, 캘리포니아 주, 네바다 주, 유타 주 등을 미국에 넘겨야 했다.

 

그 때 미국 땅으로 바뀐 뉴멕시코 땅을 밟으면서 나는 미국과 판이한 멕시코의 향기, 멕시코를 지배한 스페인의 향기가 섞인 묘한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 미국 남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침례교 위주의 개신교 교회들 대신 웅장한 규모의 가톨릭 성당이 구시가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은 대부분 유럽의 도시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또한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전통음식이라는 것도 대부분 멕시코 음식 그 자체이거나 멕시코 풍미를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옛날 인디언들의 식습관이라야 자연 재료의 상태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것들일 것이니, 유럽풍, 멕시코 풍을 만나면서 그 정체성을 맥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 지역의 어딜 가도 인디언 음식이라고 내오는 것들이 대부분 멕시코 음식 일색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족들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애코머(Acoma Pueblo), 코치티(Cochiti Pueblo), 이즐레타(Isleta Pueblo), 히메즈(Jemez Pueblo), 케와(Kewa Pueblo)[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Pueblo)의 이전 이름], 라구나(Laguna Pueblo), 남베(Nambe Pueblo), 오케 오윙에(Ohkay Owingeh Pueblo), 피쿠리우스(Picuris Pueblo), 퍼와이키(Pojoaque Pueblo), 샌디아(Sandia Pueblo), 산 펠리페(San Felipe Pueblo), 산 일데폰소(San Ildefonso Pueblo), 산타애나(Santa Ana Pueblo), 산타 클라라(Santa Clara Pueblo), 타오(Taos Pueblo), 터수키(Tesuque Pueblo Santa Fe), 지아(Zia Pueblo), 주니(Zuni Pueblo) 20 개에 가깝다.

 

 

 

 


산타페 시가지의 야경

 

 

 


호텔 로레토(Loretto)의 환상적인 모습

 

 

 


호텔 라폰다(La Fonda) 외관의 전통미

 

 

 


미국-멕시코 간의 전쟁,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협정문,
그로 인해 변한 양국의 국경 등을 보여주는 자료들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멕시코의 패배를 풍자한 그림[털 뽑힌 독수리]

 

 

 

 


산타페 '순교자들의 십자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14. 12:05

 

 

 


코만치의 수도 로턴을 중심으로 이어진 각 도시들

 

 


1848년의 미국 지도

 

 


코만치 네이션의 깃발

 

 


코만치 민족대학[Comanche Nation College]의 상징 

 

 


티피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코만치 가족 3대

 

 


대평원의 티피

 

 


티피를 재현해 놓은 모습

 

 


옛날 코만치족 티피의 모습

 

 


멀리서 들려오는 신호음을 듣고 있는 인디언 전사들

 

 


불 붙인 풀을 화살에 붙여 쏘아 버팔로들을 언덕 위로 몰고 있는 인디언들

 

 


가재도구를 끌고 말을 탄 채 이동하는 인디언 가족

 

 

카이오와(Kiowa), 아파치(Apache), 코만치(Comanche), 그리고 대평원[Great Plains]의 서사시(4)

 

 

무서운 코만치에서 상식의 미국인으로!(1)

 

 

포트실을 떠나 5분쯤 달렸을까. 코만치의 수도 로턴(Lawton)에 진입했다. 서부영화에서 접한 코만치 전사들의 무시무시함이 기억에 남아서였을까, 운전대를 잡고서도 무의식적으로 시내 좌우를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어느 골목으로부터 말을 타고 예의 그 화살을 겨누며 쫓아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가지는 잘 정비되어 있었고, 깨끗하며 조용했다. 여느 도시들 못지않게 주택들엔 윤기가 흘렀다. 펄펄 살아 날뛰던 코만치의 정기는 이미 죽었는지, 아니면 어느 구석에 잠복해 있는지, 고요하기만 했다.

 

그들이 처음으로 외부인들에게 발견되었을 때, 그들은 수렵과 채취를 업으로 삼고 기마술 같은 특유의 말 문화[horse culture]’를 보유한 부족이었다. 그들의 인구는 18세기 후반이 되자 이미 45,000 명 이상으로 늘어 있었다. 그들은 이곳 남부 대평원을 지배하던 부족으로서 가끔 다른 부족과의 전쟁에서 포로들을 잡아다가 스페인 사람들이나 멕시코 정착민들에게 노예로 팔아먹기도 하던 무서운사람들이었다. 그 뿐 아니다. 수천 명의 스페인 사람들, 멕시코 사람들, 심지어 미국 정착민들까지도 포로로 잡아다가 국경지역에 묶어 두고 백인인 그들과의 강제결혼을 통해 혼혈의 후손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그들이 바로 그 유명한 메스티조(Mestizo) 혼혈인들이다. 코만치가 그 메스티조의 확장과 전개에 큰 공헌을 한 셈이고, 그것은 결국 인종의 개량이라는 긍정적 결과를 낳게 된 셈이었다. 이처럼 40년 이상 미국과의 전쟁을 계속하면서 그들을 질겁하게 만든 아파치보다도 오히려 무서운 것이 코만치였다.

 

현재 코만치 네이션에 등록된 인구는 15,000여 명이고, 그 중 7,700여 명이 로턴포트실과 그 주변지역 등 오클라호마 주 남서부 지역에, 나머지는 전국에 각각 흩어져 살고 있다 한다. 그러나 매년 6월 중순, 오클라호마 주 월터스(Walters) 시티에서 열리는 홈커밍 파우와우(Homecoming Powwow)’ 행사에는 대부분의 코만치 인들이 모인다고 한다. ‘파우와우는 병의 회복이나 사냥의 성공 등을 비는 집단의식이다.

 

코만치 네이션의 본부는 로턴에 있는데, 카도(Caddo)코만치(Comanche)카튼(Cotton)그래디(Grady)제퍼슨(Jefferson)카이오와(Kiowa)스티븐스(Stephens)틸만(Tillman) 카운티 등이 그들의 사법권이 미치는 지역이다. 8분의 1 즉 대략 13% 정도의 코만치 피를 갖고 있으면 부족원의 자격이 있다고 하니, 증조부모 가운데 한 사람만 코만치 인이면 네이션에 등록할 수 있는 것이다. 코만치족은 대평원의 인디언 부족으로서 그들이 차지한 영역은 뉴멕시코 동부, 콜로라도 남동부, 캔자스 남서부, 오클라호마 서부, 텍사스 북서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국 정부가 인정한 코만치 네이션의 본부는 현재 로턴에 있다.

코만치가 뚜렷한 부족으로 떠오른 것은 1,700년 직전 즉 그들이 쇼쇼니(Shoshone) 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을 때였다. 당시 쇼쇼니 부족은 와이오밍 주 플랫 강(Platte River) 상류를 따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코만치족은 말[]을 얻음으로써 큰 변화의 계기를 맞이했다. 1680년 푸에블로(Pueblo) 족이 반란을 일으킨 후 푸에블로 인디언들로부터 말을 얻게 되었고, 쇼쇼니로부터 분리해 나온 이후 말을 이용함으로써 더 좋은 사냥터를 찾을 수 있는 기동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역사상 교통수단의 발달이 혁명이라 할 정도로 산업을 발전시킨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코만치 문화의 등장과 말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사실 그들이 쇼쇼니와 결별하고 남쪽으로 이동한 목적도 새로운 바이슨 떼를 찾아내기 위한 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스페인 식민지의 정착자들로부터 새로운 말들을 구하기 위한 데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상당수의 서부영화들에 묘사된 것처럼 코만치 인디언들의 마술(馬術)은 신기(神技)에 가깝다는 평들이 있어왔다. 다시 말하면 코만치족은 말을 그들의 문화에 도입했을 뿐 아니라 다른 부족들에게 소개한 대평원의 첫 부족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남부 대평원으로 이동하면서 아칸사 강으로부터 텍사스 중부로까지 영역을 넓혔고, 1,700년에는 뉴멕시코와 텍사스 주 상단 즉 오늘날의 오클라호마 주 팬핸들(Panhandle)에까지 이를 정도였다. 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결국 1777년 싸움의 상대였던 리판 아파치(Lipan Apache)는 리오 그란데(Rio Grande) 강까지, 메스칼레로 아파치(Mescalero Apache)는 코아휠라(Coahuila)까지 각각 퇴각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코만치는 들소인 바이슨의 증식을 통해 식량이나 옷을 확보하게 되었고, 쇼쇼니 이주자들이 유입되었으며, 라이벌 그룹들로부터 포로로 잡아온 여인들과 아이들을 자신의 주민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인구가 급격하게 불어났다. 그러나 코만치는 단일민족으로 응집하지 못하고, 십여 개의 자치그룹으로 분할되었는데, 그들은 그것들을 밴드(band)’라 불렀다. 이 밴드들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좀처럼 서로 싸우지 않았다.

 

그들은 19세기 중반쯤 프랑스와 미국의 무역업자나 정착자들에게 말을 공급했고, 나중에는 캘리포니아 골드러쉬에 참여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로드를 따라 자기네 영역을 통과하는 이주자들에게도 말을 공급하게 되었으니, 코만치족이야말로 말을 이용하여 전쟁에도 이기고 부도 이룬 셈이었다. 그 뿐 아니다. 그 때까지 야만적인 성향을 버리지 못하고, 말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공급이 달리자 다른 부족들과 정착자들의 말을 훔치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서운 말 도둑이란 악명을 얻게 되었고, 나중에는 가축까지 훔치게 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이나 미국인 정착자들에게서 가축을 자꾸 훔치다가 전쟁이 터지는 수도 있었다.<다음에 계속>

 

 

 


버팔로를 몰아 함께 사냥하는 인디언들

 


풀을 뜯고 있는 대평원의 버팔로

 

 


혼자서 말을 타고 버팔로를 사냥하고 있는 인디언

 

 


가축떼를 몰고 이동시키는 일의 어려움

 

 


가축떼를 몰고 이동하던 통로들

 

 


밀 씨앗을 보관하던 옹기

 

 


밀의 무게를 재던 저울

 

 


대평원 인디언들의 말 문화

 

 


1930년대 캐나다의 평원과 미국의 곡창지대에 큰 피해를 준 먼지 폭풍. 1930년대 내내 심각한
가뭄과 바람에 의해 심한 고통을 겪었음.

 


Dust Bowl의 다른 모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8. 17:26

 

 

 

 


영화 <아파치 요새>의 포스터

 

 


영화 <론 레인저>의 포스터

 

 

 
<아파치 요새>에서 좌측이 헨리 폰다(Henry Fonda), 우측이 죤 웨인(John Wayne)

 

 


<아파치 요새>의 한 장면

 

 

 
영화<론 레인저>의 한 장면. 왼쪽이 쟈니 뎁(Johnny Depp), 오른쪽이 아미 해머(Armie Hammer)

 

 


<론 레인저>의 한 장면

 

 

 

 

 

서부지역 인디언들과 대평원[The Great Plains]

 

 

 

 

하이틴 시절부터 이 나이까지 영화를 그리 많이 접하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그 가운데 기억나는 것들은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서부영화들이다.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는, 비슷비슷한 내용들이었으나, 관통하는 서사구조는 단 하나 선악의 대결이었고 주제는 미국 판 권선징악이었다. 선을 대표하는 백인들은 늘 당당하고 정의로우며 멋있었던 반면, 악을 대표하던 인디언들은 늘 무지(無知)무명(無明)무뢰(無賴)의 저급한 무리들이었다. 미국 인디언들에 대한 세계인의 편견과 무지는 이처럼 대부분 서부영화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넓고 아름다운 땅에서 평화롭게 살던 그들을, 어느 날 웬놈들이 밖에서 뛰어 들어와 채찍을 휘두르며 한 구석으로 몰아넣고, 그들의 땅을 차지해 버린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천추만대 원한에 사무칠 일인데, 전 세계의 코흘리개들도 다 보는 영화에 가해자인 백인들은 정의의 사도로, 피해자인 자신들은 몹쓸 불한당(不汗黨)으로 그려냈으니, 그 통탄스러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내 기억으로는 20055월에서야 미국의 상원은 인디언 6천만 학살에 대한 사과를 추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의 죄가 어찌 사람 죽인 일뿐일까. 당시로서는 몹쓸 땅에 그들을 짐승처럼 몰아넣은 점까지 계산하면, 그 죄가 하늘에 닿고도 남을 백인들이었다. 나찌 독일이 죽인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왜인들이 전쟁터로 광산으로 징발하거나 허물을 뒤집어 씌워 죽인 우리 민족의 숫자도 엄청나지만, 당시 총인구 5천만~1억을 헤아리던 인디언들 가운데 살해된 비율이 80~90%라니, 아무리 컴퓨터가 발달했다 한들 미국 백인들의 끔찍한 죄악을 어떻게 계산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그런 사건으로부터 무려 2백년이나 지나서야 이제 사과나 해볼까?’하고 궁시렁 거리며 나섰고,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더 흐른 2010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사과하기에 이르렀으니, 만시지탄(晩時之歎)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워싱턴 D.C. 의회 묘지에서, 체로키촉토무스코기포니시스턴와페톤오야테 등 5개 부족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캔자스 출신의 공화당 상원 샘 브라운백 의원이 사과결의문을 낭독함으로써 의회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그 전 해 11월에도 오바마 대통령은 564개 부족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디언들에 대한 그동안의 횡포와 잘못된 정책에 대하여 사과하고 그들로 하여금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과거에도 정부로부터 무수한 약속을 받았으나 그 약속이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인디언들로서는 이번에도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미국 정부가 인디언들에게 진작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고, 사과를 늦게 한 데 대하여 문제 삼으려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억울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인디언들을 눈곱만큼이라도 배려했다면,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그들의 이미지라도 진실에 가깝게 만들거나 긍정적으로 묘사했어야 하건만, 서부영화 같은 매체들에서 보듯이 그들의 모습은 스테레오 타입이라 할 정도로 왜곡되어 온 게 사실이다. 그 점이 제삼자인 내가 보기에도 지나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미국에는 현재 나바호(Navajo), 체로키, (Sioux) 등 규모가 큰 종족들을 포함, 564개 종족에 3백만 이상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다. 그 가운데 비교적 소수부족으로서 서부영화들에 단골로 등장한 종족이 아파치(Apache)와 코만치(Comanche).

 

대부분의 독자 여러분은 <아파치 요새(Fort Apache)>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을 것이다. 1948년 죤 포드(John Ford) 감독이 만들었고, 죤 웨인(John Wayne) 및 헨리 폰다(Henry Fonda) 등 명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인데, 인디언에 대하여 비교적 따스한 관점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서부영화들과 구별된다고 한다. 감독은 주인공인 요크 중령[죤 웨인]을 통해 아메리카 인디언 특히 아파치 족에 대한 인간적 관점을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종래 사납고 공격적이며 대화가 통하지 않는아파치를 동정적포용적 관점에서 바라 본 사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 전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인디언을 바라보는 시선이 비교적 긍정적인데,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 영화를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또 하나. 미국으로 떠나오기 직전인 작년 7월 하순 경, 한국에서는 론 레인저(The Lone Ranger)’란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쟈니 뎁(Johnny Depp)이 열연한 주인공 톤토(Tonto)는 바로 코만치 인디언이었고, 영화의 배경은 캘리포니아유타콜로라도 애리조나뉴멕시코 등이었는데, 이 가운데 콜로라도와 뉴멕시코는 그레이트 플레인즈에 포함되는 공간이었다. 악령을 몰아내는 능력을 지닌 톤토는 죽기 직전의 외로운 레인저존 레이드(John Reid)를 살려냄으로써 결국 그들은 환상의 콤비를 이루게 된다. 거칠 것 없는 드넓은 황야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현란한 액션들은 코만치 인디언인 톤토와 백인 레인저 존 사이에 교감되는 우정의 깊이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백인들과 인디언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코만치 추장 빅베어(Big Bear)의 말[‘우리 시대는 사라졌네. 백인들은 그걸 발전이라 부르는 모양이네만.’]이 추가되면서 그간 스테레오 타입으로 고착된 백인과 인디언의 이미지 혹은 양자관계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반성이나 의식 또한 새롭게 제기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리라.

 

***

 

인디언을 찾아다니기 몇 달 만에 대평원의 주인공 아파치와 코만치, 그리고 카이오와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대평원의 주인들이었다. 오클라호마 동북쪽에 '대초원[Tall Grass Prairie]'이 있다면, 서남쪽에는 '대평원[The Great Plains]'이 있다. 그렇다면 대평원은 어떤 공간인가. 알버타(Alberta), 새스캐치원(Saskatchewan), 매니토바(Manitoba) 등 캐나다 남부를 포함, 몬태나(Montana)노쓰 다코타(North Dakota)사우쓰 다코타(South Dakota)와이오밍(Wyoming)네브라스카(Nebraska)콜로라도(Colorado)캔자스(Kansas)뉴멕시코(New Mexico)오클라호마(Oklahoma)텍사스(Texas) , 로키산맥(Rocky Mountains)과 미시시피강(Mississippi) 사이의 미국 땅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남북 간 길이는 3,200 km, 동서의 폭은 800 km, 면적은 1,300,000 이니, 남한 면적[99,538 ]13배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이다. 오클라호마의 경우 대평원은 주 전체 면적의 60%나 차지할 만큼 거대하다. 그 안에 카이오와, 아파치, 코만치 등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다음에 계속>

 

 


워싱턴 D.C.의 미 의회 묘지 

 


캐나다에서 미국 남부까지 걸치는 대평원(The Great Plains)

 

 


대평원의 한 부분

 

 


대평원 한 가운데를 달리는 하이웨이

 

 


대평원의 바이슨 무리

 

 


대평원의 한 부분

 

 


카이오와, 아파치, 코만치의 집단 거주지를 찾아.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2. 30. 14:37

 

 

 

교육으로 일어선 촉토 족의 어제와 내일(1)

 

 

 

치카샤 땅인 티쇼밍고를 거쳐 촉토 땅인 듀랭(Durant)에 들어섰다. 이곳 사람들은 듀랭이 오클라호마 시티나 털사 이외의 지역들 가운데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며,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도시들 가운데 하나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도심으로부터 겨우 10마일 이내에 미국 최대 인공호수들 중의 하나인 텍소마 호수(Lake Texom)가 있어 매년 8백만~1천만의 관광객이 몰리며, 해마다 메모리얼 데이에 이어 열리는 목련 축제에도 대규모의 관광객들이 밀려들 만큼 매력적인 도시라고 했다. 무엇보다 우리가 찾는 촉토 네이션의 본부[headquarter]가 있었으며, 규모 또한 촉토 네이션 안에서는 맥컬레스터[McAlester]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특이한 점은 주 의회에 의해 오클라호마 목련의 수도로 지정되었다는 점인데, 목련 축제 역시 그런 공식적인 인정에 의해 열리는 행사였다. 이곳에 있는 남동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Southeastern Oklahoma State University]’의 캠퍼스는 천 개의 목련꽃 캠퍼스[The Campus of a Thousand Magnolias]’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이 도시는 오클라호마 주 안에서 목련꽃의 본고장인 셈이었다.

 


듀랭의 다운타운

 


듀랭 시가지에서 만난 의자. '듀랭'이란 글자를 아래쪽 햇살무늬와 어울리게 디자인한 점이 돋보임.

 

그러나 도시의 첫인상은 그리 밝거나 윤택하지 못했다. 한켠에 괴물처럼 서 있는 엄청난 규모의 회색 공장[정확한 것은 아니나 시멘트 공장 같은 느낌을 주었음]은 도시를 우중충하게 만들었으며, 다운타운의 상당수 비어있는 건물들도 기름기가 빠져 부분적으로 폐허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중소도시들의 경기가 나빠지자 사람들이 대도시로 이사 간 뒤 남겨진 집들을 처리하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관리되지 않는 빈 집은 도시 전체의 활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어떤 건물은 전통음식점으로 탈바꿈 되어 생명을 이어가는, 다행스런 모습도 보였으나, 전체 분위기를 추스르지는 못했다. 비교적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신시가지의 호텔에 잠자리를 정하고, 그 인근에서 저녁 한 끼를 해결한 우리는 이 도시에 큰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아침 일찍 인근의 포트 와쉬타(Fort Washita)삼강 계곡 박물관[The Three Valley Museum]’을 본 다음 다시 1박을 하게 될 아이다벨(Idabel)로 달려가기로 한 것이다.

 

사실 치카샤와 마찬기자로 촉토도 넓은 땅이었다. 원래의 면적을 반분하여 치카샤에게 넘겨 주고 남은 땅이었고, 평원뿐인 오클라호마 주에서 보기 드물게 산악[그렇다고 아주 높거나 험준하지 않은] 지역이 많다는 점 또한 특이했다. 대표적으로 Fort WashitaFort Towson 등의 군사기지들이 있을 만큼 고지대였고,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산악을 따라 수많은 호수들, 계곡들을 기반으로 하는 주립공원들이 집중된 곳이 바로 촉토 네이션이었다. 촉토는 이런 지형을 가진 11개의 카운티[휴즈(Hughes)/코울(Coal)/아토카(Atoka)/브라이언(Bryan)/피츠버그(Pittsburg)/하스켈(Haskel)/래티머(Latimer)/푸쉬마타하(Pushmataha)/촉토(Chocktaw)/르 플로어(Le Flore)/맥커튼(McCurtain)]에 총 인구 256,598, 29,594 km, 치카샤에 비해 인구는 적으나 면적은 약간 큰 규모였다.

 


최신 지도에 표시한 촉토 네이션 관내 카운티들

 


촉토 네이션 내 각 카운티 분할도

 


촉토 네이션의 강, 호수. 도시 등이 표시된 지도

 


촉토 네이션의 관내 카운티 표시 지도

 


1800년 당시 촉토 족 영역

 

***

 

그렇다면 촉토 족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치카샤 지역에서 만난 어떤 지식인은 촉토 족이 원래는 자신들과 동조동근(同祖同根)이었다가 나중에 갈라졌다고 했으나, 나는 아직 문헌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그들은 무스코기 어족[Muskogean Linguistic Family]의 일원이고, 유럽에서 건너 온 백인들과 접촉하기 전까지 천년 이상을 미시시피 강에서 번성하던 마운드 빌딩[mound-building, 무덤이나 흙 둔덕을 남긴 선사시대 북미 인디언 제 부족의 건축양식]’옥수수 주식 기반[maized-based]’ 사회에 뿌리를 둔 부족이었다. 그들 역시 치카샤와 마찬가지로 에르난도(Hernando de Soto)가 이끄는 스페인 탐험대와 피나는 싸움을 벌이기도 했으나, 그로부터 2세기 뒤에는 유럽의 무역상들을 받아들여 거래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워싱턴 대통령이 인디언 부족들을 통합하여 유럽계 미국인 문화에 적응시키고자 했고, 많은 촉토인 들도 이미 백인들과 결혼하기 시작했으며, 기독교를 신봉하거나 백인들의 관습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촉토는 체로키, 치카샤, 크리크, 세미놀 등과 함께 문명화된 다섯 종족[Five Civilized Tribes]’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당시 촉토족의 오두막집

 


1830년대 이전 촉토족의 움집

 

다른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을 겪었다. 촉토는 1786호우프웰의 조약[Treaty of Hopewell]’을 시작으로 남북전쟁 이전 이미 미국정부와 9개의 조약을 맺은바 있었다. 물론 모두 미국과 촉토족 사이의 경계를 확정하거나 평화적인 관계를 수립하자는 것이 그 조약들의 공통된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후 미국 정부는 촉토와의 경계선을 재조정하거나 심지어 촉토로 하여금 수백만 에이커의 땅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결국 1830년 미국 정부는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온 촉토 땅을 빼앗고, 미시시피 강 서쪽 인디언 구역에 그들을 몰아넣고 말았다. 그곳으로 옮기는 과정이 바로 눈물의 여정이었고, 그 여정 중에 2,500여명이 죽었다. 그런 쓰라림을 겪은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심성은 모질지 않았다. 새로운 땅에서 필사적인 노력으로 생업을 일으켰고, 자신들의 새로운 헌법과 자치제도를 만들었다. 학교와 교회들을 세웠고, 감자 흉년으로 기근이 들었을 때에는 돈을 거두어 고통을 함께 하기도 했다.

 


촉토족이 겪었던 '눈물의 여정' 그림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미국정부를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혼이나 교육을 통해 미국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1차 세계대전에는 많은 부족의 젊은이들이 참전하여 큰 전공을 세웠으며, 한국전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참전하여 이들 중 전사한 사람도 16명이나 된다는 것이었다.[‘미국통신 41’ 참조] 특히 1차 세계대전에는 촉토어가 연합군의 암호로 채택됨으로써 암호 해독병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활약했으며, 그 중 다섯 명은 대통령의 훈장까지 받게 되었다고 한다.['미국통신 41' 참조]

 


1차대전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운 촉토 족 암호해독병 기념 메달

 

***

 

우리는 아침 일찍 포트 와쉬타(Fort Washita)를 찾아 이곳에서 같은 국민들이 편을 갈라 싸운 전쟁의 참화와 비극을 확인하기로 했다. 다운타운에서 진지까지 30분 정도 걸리는 길은 호수와 숲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경관의 연속이었다. 전적지 문을 들어서자 사방에 밑동만 남은 채 당시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었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안내원이 남군과 북군으로 갈려 싸우던 당시의 상황을 특유의 남부 사투리로 실감나게 설명했다.

 


포트 와쉬타 정문

 


포트 와쉬타 전시 및 행정실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나서

 

설명을 들은 후 우리는 전쟁의 폐허를 직접 만져 보기로 했다. 참호들, 중대 막사, 포대, 주방 등이 곳곳에 널려 있었고, 전몰자들을 묻은 공동묘지가 한켠에 있었다. 그리고 골드 러쉬(Gold Rush)’ 당시 캘리포니아 행 열차가 이곳에서 출발했음을 알려주는 객차 한 량도 전시되어 있었다. 드넓은 황야에서 돈을 캐러몰려다니던 당시 백인들의 충혈된 눈동자가 폐허들 곳곳에 박혀 있는 듯 했다. 전쟁 당시 이곳 인디언들은 남부 연합군에 소속되어 있었고, 그들 가운데서 장군까지 배출되었다. 돈이 많고 대오(隊伍)가 정렬되어 있던 북군과 달리 옷도 장비도 시원치 않고 무엇보다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을 남군의 초라한 모습이 벽면 가득 그려져 있었다. 이 진지에도 인디언의 흔적은 그렇게 남아 있었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복장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복장

 


유적지에서 나온 연장들

 


남북전쟁에서 전사한 용사 Darrel Lamar의 묘

 


남북전쟁에 참여한 벨크납(W.M. Belknap) 장군의 묘와 기념비

 


골드러쉬 당시 캘리포니아로 떠나던 열차의 한 부분.

 


전쟁 당시 사용하던 우물

 


남북전쟁 때 남부연합군의 더글러스(Douglas Hancock Cooper)장군이 기거하던 집

 


남북전쟁 때 남군의 중대 막사


 

우리는 듀랭의 다운타운으로 귀환하여 앤틱 풍의 식당에서 이곳 전통음식으로 시장기를 지운 뒤 삼강계곡 박물관[Three Valley Museum]’을 찾았다. 삼강(三江)이란 ‘Blue River, Red River, Washita River’ 등인데, 1976년 개관한 이 박물관의 이름은 듀랭에 관한 맥 크리어리(McCreary)의 책 “Queen of Three Valleys”에서 따왔다고 한다. 듀랭 역사학회에 의해 운영되는 이 박물관의 핵심 컬렉션은 생활사 자료들이었다. 1873년에 시작된 브라이언 카운티와 듀랭을 대표하는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이 학회의 목표로서, 이곳에 소장전시된 모든 컬렉션들은 시민이나 관광객들, 연구자들이 모두 즐기고 참고할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 안내원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안내원의 설명에 비해 실제 컬렉션들은 우리가 이미 보아 온 지역의 어느 박물관에 비하더라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낫다고 할 만한 것들이 없었다. 그런 실망감 속에 박물관을 떠나 촉토 네이션 본부와 다운타운을 둘러 본 다음 듀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계속>

 


듀랭의 다운타운에서 만난 이 도시의 전통음식점[Main Street Barbecue]

 


Main Street Barbecue에서 주문을 받고 있는 종업원 Hailey양. 매우 친절하고 상냥하고 명랑했음.

 


듀랭 다운타운의 '삼강계곡 박물관'[Three Valley Museum]

 


박물관에 전시된 농기구

 


박물관에 통째로 기증, 전시되고 있는 'J.R.Jarrell & Co.'사무실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옛날 우체통

 


박물관에 전시중인 옛날 솜틀기계

 


듀랭에 있는 촉토 네이션 본부

 


듀랭에 있는 Bryan County 청사

 


전 세계의 전장에서 죽은 이 지역 군인들의 명단을 새겨 놓은 비석

 


전몰용사들을 추모하는 사업을 하고 있는 브라이언 카운티 재향군인회

 


포트 와쉬타 전시실에서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