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0. 3. 6. 15:52

캄보디아의 아이들과 코리안 드림(Korean dream)

 

지난 겨울 캄보디아를 다녀왔다. 겨울임에도 그곳엔 뜨거운 태양이 내려 쪼이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아이들이 따라붙어 더 더웠다. 어떤 아이들은 ‘원 딸라!’를 외치며 우리의 표정을 살피곤 했지만, 상당수의 아이들은 능숙한 한국어로 ‘언니, 오빠’를 불러대며 조잡한 물건들을 사달라고 애걸했다. 심지어 어떤 녀석들은 버스에서 내려서기 무섭게 눈을 맞춘 채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아저씨 멋있어. 이 물건 싸요. 사주세요!” 하고 따라붙다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달아나 버리면 그 뒤에 대고 “할아버지, 뚱뚱하고 미워!”라고 한 마디씩 갈겨대기도 하는 얌체들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푼돈이나마 건네주고 싶었지만, 달려들 기회만 노리는 아이들이 주변에 그득했고,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을 돕는 일은 아닌 듯싶어 슬그머니 물러서기 일쑤였다.

똔레삽 호숫가에서 가이드가 그들 중 세 명의 아이들을 관광버스 안으로 불러 들였다. 이제 겨우 대여섯 살 쯤 되는 아이들이었다. 한국노래를 부를 줄 아느냐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녀석들은 7,80년대의 대중가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이드가 제지하고 나서야 아쉬운 표정으로 노래를 그쳤다. 그런 다음 그들은 통로를 오가며 한국 관광객들에게 물건들을 신나게 팔았다. 참으로 귀여우면서도, 마음 한 편으론 짠한 생각이 들게 하는 아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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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아이들이 처음에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무작정 구걸에 나섰다고 한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 한국인 선교사들이었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한국어와 한국노래를 가르쳐서 한국 관광객들에게 물건을 팔도록 하는 것이 구걸하는 것보다 훨씬 떳떳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리라. 어쨌거나 캄보디아의 어린애들이 제비처럼 입을 벌려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한국노래를 부르는 광경은 놀랍고도 반가웠다. 비록 몇 문장의 말과 몇 곡의 노래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그들에게서 조만간 캄보디아에 펼쳐질 한류(韓流)의 미래와 가능성을 발견했다면 지나친 속단일까.

그런데 언뜻 나는 이들의 얼굴에서 옛날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지역의 한 곳에 미군부대가 있었다. 가끔 큰 체구의 미군들을 볼 수 있었고, 그들을 졸랑졸랑 따라다니며 껌이며 초콜렛을 탐하던 아이들이 바로 우리였다. 미군들이 껌이나 초콜렛을 던져주면 그들을 뒤따르던 우리는 한 덩어리로 뭉쳐 아귀다툼을 벌이곤 했다. 땟국물이 졸졸 흐르는 옷가지는 넝마처럼 찢어지고, 시커먼 때가 덕지덕지 오른 손등과 얼굴에는 그 싸움 통에 생긴 멍자욱들이 훈장처럼 퍼렇게 새겨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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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6⋅25를 전후하여 미군들을 따라다니며 ‘기브 미 초콜렛’을 외치던 우리 앞 세대들의 비참함이야 더 말하여 무엇하랴. 캄보디아 아이들의 얼굴에서 우리의 모습을 읽어낸 것이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으리라.

사실 캄보디아 어린이들의 얼굴에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을 오버랩 시키면서도 무언가 어긋나는 점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우리가 어디로 이동해 가든 그곳에는 벌거벗다시피 한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갓 젖 떨어진 아이들을 제외하곤 모두가 학령기의 아이들이라는 점이 놀라왔다.

이 아이들이 학교에는 안 가고 대체 왜 이곳에 나와 구걸이나 하고 있는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서너 살이나 되었음직한 아이까지 우리가 지나가는 신전의 문지방에 앉아 관광객들의 눈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동정심을 간구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 신전을 샅샅이 훑고 나오기까지 두어 시간을 녀석은 그렇게 앉아 있었는데, 그 뒤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을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내내 눈에 밟히기도 했다.

내심 생각해 보니 분명 부모가 시킨 일이었다. 부모가 시키지 않았다면 어린 아이가 그렇게 하고 있을 턱이 없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혹은 학교에 가 있어야 할 아이들이 관광지에 퍼질러 앉아 ‘원 딸라’를 구걸하는 모습이야말로 ‘킬링필드’에 못지않은 참상으로 내게 다가왔다. 잔인하고 어리석었던 킬링필드의 참상은 겨우 30여 년 전의 일. 그러니 그것은 아직도 완결되지 않은 역사였다. 어리석은 역사의 극복을 위해 시급한 일이 아이들의 교육일 텐데, 그 싹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어린 시절 비록 미군을 상대로 ‘기브 미 초콜렛’을 외쳤을망정 학교에는 가야 한다는 것이 모든 부모들의 신조였다. 가난할수록 배워야 한다는 믿음으로 남루(襤褸)의 시간과 공간을 헤쳐 나왔기에 우리에겐 미래가 있었고, 그 열매를 지금 따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적어도 관광지에서 만나는 캄보디아의 얼굴엔 그런 게 없었다. 신기하게만 보이는 똔레삽 수상촌 아이들도 능숙한 솜씨로 달리는 배 위에 올라와 관광객들에게 물건들을 팔거나 발가벗은 채 흙탕물에서 헤엄치며 깔깔거릴 뿐, 주변에 책 읽는 모습도 학교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켜 미래를 기약하기보다는 우선 외화 몇 푼이 소중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의 가능성은 보였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열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시엠립 국제공항 면세점의 두 여성은 아예 한국어 교재를 펴놓은 채 영업을 하고 있었다. 밑줄이 새까맣게 그어진 책장을 자랑스레 넘겨 보이며 한국어를 잘 해보겠노라는 야무진 꿈을 떠듬떠듬 말해 주었다. 비록 학교에는 가지 않아도 그곳의 어린 아이들도 한국어를 배우며 ‘코리안 드림’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다. 코리안 드림을 가득 안고 노력하는 그들에게 우리가 약속해줄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일까.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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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1. 11. 22:05

아, 캄보디아, 그곳에 신들은 없었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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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사진 1 : 사원 문 위의 장식으로 중앙에 꼬끼리 아이라바타를 타고 있는 인드라
                 사진 2 : 중앙성소 3개의 탑 중 두 개만 보인다.
                 사진 3 , 4, 5, 8, 9 : 중앙성소 3개의 탑
                 사진 6 : 불쌍한 캄보디아 여자아이
                 사진 7 : 중앙 사원의 춤 추는 시바
                 사진 10 : 중앙사원 탑들의 입구로 연결되는 계단에 앉아 있는 원숭이, 사자, 가루다, 약사의 머리를 가진 전설 속의 괴물들
                 사진 11 : 시바신의 남근상이 박혀있던 자리

니체는 말했다. ‘신은 죽었다!’고. 신이 죽었다면 지금 이 세계엔 신이 없다는 말일 것이고, 그렇다면 니체는 무신론자였다는 말인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조부와 부친이 루터교 목사였던 그의 가계를 살펴보아도, 종교와 신앙에 대한 회의를 갖기 전 그의 행적을 살펴보아도 그를 무신론자로 볼만한 근거는 없다. 그렇다면 그는 왜 ‘신이 죽었다’고 했을까. 어쩌면 그는 신을 제멋대로 만들어 세우고 신의 가면 뒤에 숨어 인간들을 제멋대로 주무르려던 ‘또 다른 인간들’ 혹은 성직자들에 대한 항변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나 아닐까?

캄보디아에 들어가서야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외침을 내 깊은 인식 속에서 끄집어냈고, 도처에 널려있는 신전의 잔해들로부터 ‘신이 죽었다’는 니체 선언의 캄보디아식 버전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왜 캄보디아에 왔는가. 캄보디아에 와서 찾으려던 것은 무엇이고, 확인한 것은 무엇인가.

 

***

 

2009년 한 해가 저물어 가는 막바지.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저녁에 출발한 비행기가 시엠립에 도착한 것은 캄보디아 시각으로 9시가 넘어서였다. 차창 밖에서 밀려드는 더운 공기는 이곳이 열대임을 알려주는 일종의 신호였다. 밤이든 낮이든 절대로 혼자서 나다니지 말라는 현지 가이드의 엄포가 불쾌감을 돋우었고, 그에 따라 내 마음 속에 그려진 캄보디아의 이미지는 칙칙하게 바뀌어만 갔다.

다음 날 호텔 식당에서 쌀국수와 열대과일들로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가 버스로 이동한 곳은 사흘 동안 사용할 입장권을 사는 곳이었다. 워낙 넓은 사원지대라서 인물사진을 박아서 발급해주는 출입증을 목에 걸어야 했다. 사원들 입구마다 삼엄하게 진을 치고 있는 현지 경찰들이 일일이 출입증과 얼굴을 대조하는 것이었다.

출입증을 목에 걸고 첫 번째 간 곳이 반띠아이 스레이Banteay Srei. 매표소로부터 40분이나 달린 끝에 도달한 외곽지역의 사원이었다. 10세기 중반 자야바르만 5세의 스승인 야즈나바라하(바라문 승려)가 건설한 사원으로서 조각 기법이 정교하고 아름다워 크메르 예술의 정수로 불리는 곳으로, 프랑스의 세기적인 작가 앙드레 말로 부부가 도굴하려다가 실패로 끝날 만큼 아름다운 사원이다.

사원의 출입구는 동쪽과 서쪽에 있고, 세 겹의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곽의 벽을 둘러싼 해자는 95m×110m의 크기로 중간 벽과 경계를 이룬다. 중간 벽은 38m×12m 크기로 6개의 좁고 길쭉한 방들이 있다. 안쪽의 벽은 24m×24m의 정사각형으로 시바가 춤추는 장면이 부조되어 있다.

남북으로 나란히 세 개의 탑으로 구성된 중앙사원에서 중앙탑과 남쪽 탑은 시바에게, 북쪽 탑은 비쉬누에게 각각 헌정되었다고 한다. 사원 내부의 벽면에는 여신과 남신들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라마야나의 서사가 부조되어 있는 남쪽 도서관의 동쪽 박공에는 라바나가 시바를 만나려다 거절 당한 후 카일라사 산을 흔드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는 등 도처에 신화의 내용들이 펼쳐져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풍요를 상징하던 링가 즉 남근상이 있던 자리. 지금은 뽑히고 없지만, 그곳에 서 있던 남근의 윗부분은 시바, 중간부분은 비쉬누, 밑 부분은 브라만을 의미한다고 했다.

휑하니 남아 있는 구멍이 바로 이곳이 바로 파괴의 신 시바에게 헌정된, 여인의 사원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계속>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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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같은 생각을 했군요. 그래서인지 앙코르왓트를 보고 다음과 같은 시가 나왔습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왓트는


    김성련


    캄보디아 씨엠랩에 있는 앙코르왓트는
    위대한 왕의 영광의 도성이다.
    밀림속 도성이 너무 크고 정교해서 놀라움이다.
    갑자기 부릅뜬 눈과 마주치는 무서움이다.
    곳곳에서 달려드는 일곱머리 뱀과 만나는 두려움이다.
    나무 뿌리가 사원을 뒤덮은 기이함이다.
    가는 곳마다 압살라 손가락 꼬는 유혹이다.
    온통 힌두와 불교가 만나는 종교스러움이고
    그 신화가 조각으로 벽을 채우는 예술스러움이다.




    그리고 앙코르왓트는
    위대했던 왕의 영광의 뒤안길이다.
    천년의 사연이 입을 다물어 버린 온통 검은 침묵이다.
    현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진공의 단절이다.
    손발 잃은 상이군인의 아리랑 연주와
    맨발의 어린애가 일달라를 외치는 안쓰러움이다.
    옛 영광이 오히려 부끄러운
    현존재의 가벼움이다.

    2010.02.05 11:02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