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7. 10. 12:13

교육부 장관 후보 청문회를 보며

 

 

 

몇 년 전의 일이다. 가까이에 있던 지인들 중의 하나가 연구비 부정 집행으로 검찰에 불려간 일이 있었다. 학생들에게 돌아가야 할 돈의 상당부분을 자신이 편취(騙取)’한 혐의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새파랗게 젊은 검사에게 그건 자신이 주도한 일은 아니며, 그간 학계에서 관행적으로 해오던 일이라는 요지로 강변을 했다 한다. 평소 그에게 별 호감을 갖고 있지도 않았지만, 당시 그가 했다는 그 말을 듣고 나서 그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마저 접고 말았다. 자신의 범죄행위를 학계의 관행으로 눙치려고 한 그의 그 말만으로 판단하자면, 그는 인간도 아니었다. 

 

                                 청문회에서 진땀을 닦고 있는 교육부 장관 후보[사진은 중앙일보에서 가져 옴]

                    

 

요즘 또 다시 내 속을 긁는 인간이 하나 등장했다. 언론 매체들을 매일 매 시간 새로운 뉴스로 도배하고 있는 인물. 바로 교육부 장관 후보로 내정된 김명수 교수다. 처음에 그 이름을 접하곤 하도 듣보잡이라서, ‘박 대통령이 모처럼 의외의 인물을 하나 찾아냈구나!’ 하고 은근히 기대를 했었다. 나와 분야가 다르니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무조건 폄하할 일은 아니고, 무엇보다 똑똑한 인물로 차고 넘치는 대한민국에서 상아탑에 틀어박혀 조용히 학문을 연구해온 참 학자이려니!’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보 지명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그에 관한 온갖 추잡하고 저급한 소식들로 매스컴은 도배되기 시작했다. 논문 표절[*후보자의 사례는 '표절'과 '탈취'가 뒤섞인 경우다], 칼럼 대필, 사교육 업체 주식 투자 등등. 학자로서는 가장 추악하면서도 빠져나갈 수 없는 범죄행위들의 한복판에 그는 서 있었다. 급기야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런 범죄의 과정들을 언론에 낱낱이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도 얼굴을 들고 청문회 자리에까지 나온 그는 참으로 후안무치했다. 더욱 고약한 건 청문회장에서 자신의 비행을 변호하기 위해 관행이란 말을 꺼내들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그런 행위들이 그 시대의 관행이었으니, 잘못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의 그 말 한 마디에 나는 조금 전에 먹은 음식을 토하고 말았다. 앞에 말한 연구비 부정 집행 교수가 사용한 관행이란 말을 김 교수 역시 청문회장에서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만 것이다.

 

 

관행이라? 학생들에게 돌아가야 할 연구비를 편취한 행위가 관행이라? ‘제자의 논문에 자신의 이름을 제1저자로 얹고, 그 논문으로 연구비를 받아 챙기고, 한국연구재단의 실적목록에는 아예 자신의 단독논문으로 올리고, 그런 논문들로 승진을 하고, 일간신문에 기고하던 칼럼을 학생들에게 대필시킨그런 행위들이 관행이라?

 

 

국가가 발주하는 모든 프로젝트의 경우 반드시 연구원들에게 돌아갈 인건비의 액수가 예산으로 정해져 있고, 연구비 집행 기관에서는 연구 책임자인 교수를 경유하지 않고 그들에게 직접 지급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연구 책임자가 연구원들이 지급받는 돈의 일부를 자신에게 보내도록 강요한다면, 어렵지 않게 그 돈을 편취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칼을 들고 행인들의 돈을 빼앗는 것만큼이나 극악한 범죄행위다. 자신이 책임자로 되어 있는 프로젝트에서 가난한 젊은 학자들이 일시적으로라도 생활비를 지급받게 되는 사실에 마음 편해 하고 안도하는 것이 대부분 교수들의 상정(常情)이다. 주변의 젊은 학자나 학자 지망생들이 생활고에 부대끼지 않고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자신이 만들어 주었다면,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논문 한 편을 써보면 안다. 글 쓰는 노동이야말로 등잔 속의 기름이 바작바작 말라가듯얼마나 삶의 진액을 소모하는 일인가를, 직접 써본 사람만 알 수 있다그런 논문을 빼앗는다는 것은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범죄다.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제자의 논문을 자신의 것으로 빼앗았다니, 말문이 막힐 일 아닌가. 교직에 종사해온 그 긴 세월 동안 단독저서 한 권 내지 못했다는 사람이니, 단독 논문인들 제대로 낸 적이 있을까. 학문과는 거리가 먼 국회의원들이 표절의 의미에 대해서 물었으나 제대로 답변조차 못했다니, 다시 무슨 말을 덧붙이랴! 그런 사람을 교육부 장관으로 간택하고 국회에 통과시켜 줄 것을 요청한 대통령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이제 다시 찾을 일 없을 것처럼, 우물에 똥을  퍼붓고 간못된 인간들이다관행이란 편리한 말로 자신들이 몸담았던 대한민국의 지식사회를 잠재적 범죄 집단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다.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궁하다 해도 대다수 선량한 이웃들의 얼굴에 똥물을 끼얹어서는 안 된다. 물론 어느 공동체에도 범죄자는 있다. 그렇다 해도 그런 범죄행위를 관행 운운의 궤변으로 일반화시켜서는 안 된다. 똑똑하지만 가난한 제자들이나 주변의 배고픈 학자 지망생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길 바라는 대부분의 교수들에게, 지금도 연구실에 틀어박혀 한 편의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 기력을 소진하고 있는 학자들에게 그 이상 더한 모욕이 어디에 있을까?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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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8. 5. 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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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주의, 그 걸러지지 않는 역사의 노폐물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얼마 전 모 대학 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 한 토막. 2005년 베이징에서 우리나라 국회의원 두 명이 탈북자 인권문제로 기자회견을 하려다 중국공안 당국으로부터 폭행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함께 있던 우리나라 외교관들도 폭행을 당한 건 물론이다. 정당한 이유 없이 주재국 공권력에 의해 다른 나라 외교관이 폭행을 당한, 상식 이하의 사건이었다. 예상대로 당시 우리 정부는 묵묵부답,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 피해자인 우리의 인사들을 질책하는 분위기였다. 분개한 어떤 인사가 그 사건을 들어 모 일간지에 칼럼을 썼고, 감명 받은 그 교수는 그 글을 당시 대학원에 재학하던 외국 학생들의 한국어 시험 지문으로 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끼어있던 중국 학생들이 그 내용에 반발하여 시험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듣게 된 그 교수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중국의 저의를 분석한 다음, 잘못 된 처사에 말 한 마디 못 건네고 있는 우리 정부의 처사를 꾸짖은 글이었다. 당사자인 중국의 국민이라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거나 반성의 빛이라도 보이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학문을 배우러 이 나라를 찾아온 젊은이라면 더더욱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기는커녕 그들은 사무실로 찾아와 기세등등하게 항의를 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안하무인의 불량배로 만들었을까. 요즘 하기 좋은 말로 그들이 ‘자유분방한 인터넷 만능시대의 총아(寵兒)’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중국에 법제화 되어 있다던 ‘독생자녀제(獨生子女制 ; 1가구 1자녀 원칙) 출신의 이른바 ‘소황제(小皇帝)들’이라서 그렇게 된 것일까. 아니다. 바로 그들의 피에 흐르고 있는 ‘중화주의’의 DNA 때문이다.


 역사에도 대사작용(代謝作用)이 있는 법. 새로운 시대사조나 발전적 비전을 받아들여 과거의 노폐물을 걸러내는 작용은 역사에도 필수적이다. 대사작용이 멈춰버린 한-중 외교사의  흐름 속에서 중화주의라는 노폐물을 걸러내지 못한 중국인들은 21세기의 시대정신을 왜곡하며 ‘자민족 우월주의’의 망상에 빠져 있다. 그러니 시험지를 들고 대학원 사무실로 항의 차 몰려온 아이들이나 이번 성화 봉송에서 집단으로 행패를 부린 그들의 행동양식은 한 틀인 셈이다. 그것은 부모나 조상들로부터 대물림 받거나 교육된 의식이거나 행동양식일 뿐이니, 말하자면 '역사의 조건화(conditioning)'라고나 할까. 자극과 자극 또는 자극과 반응 간의 연합을 통해 특정 행동이 유발되거나 학습되어지는 과정이 ‘조건화’다. 한 번도 우리나라와 선린(善隣)의 관계 설정에 나서본 적이 없는 가해자로서의 중국은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의식’을 대대로 학습해 물려주고 있으니, 그게 바로 ‘역사의 조건화’다.

 자기 절제를 통해 착한 이웃 혹은 세계시민으로 살아가는 방법과 태도를 교육하는 것이 현대 국가의 금도(襟度)다. 그런데 이번 일로 그들은 양식 있는 교육을 받지 못한 국민임을 만천하에 드러낸 셈이다. 그간 한-중 관계사는 외교적 상식에 비추어 유쾌하지 못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다. 지정학적인 면에서 우리는 중국 내부의 정치적 변동에 늘 영향을 받아야 했고,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중국이 한동안 우리에게 세계를 향한 창문 노릇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왕조가 새로 들어설 때마다 그들은 ‘강-약’과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늘 확인하고자 했고, 우리는 언제나  ‘화(和)/전(戰)’의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했다. 땅이 넓어 물산이 풍부하고, 세계와 인접해 있어 각종 문물이 다양하니 대륙의 변방인 우리로서는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조 내내 사신들을 줄기차게 파견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저들과의 전쟁을 미연에 막아야 했고, 우리에게 부족한 물건이나 문화를 도입해야 했으며, 중국의 상징적인 힘을 국내 정치에 활용해야 했다. 우리가 저들의 속국이나 식민지라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비록 외교적 생존술이었다 해도, 그것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그릇된 인식을 갖게 한 단초였음이 분명하다. 현실적 이익은 차치하고라도 우리의 사신 파견이 굴욕적인 일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명나라 때의 사신행차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는데, 하물며 우리가 오랑캐라고 질타해온 청나라 때 사신행차들의 굴욕이야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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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천 이덕형의 사행을 기록한 죽천행록>

 


 인조 2년(1624) 기울어져 가던 명나라에 파견한 주청사행(奏請使行)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서인들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에 성공했으나 명나라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능양군을 인조로 옹립하여 반정에 성공한 서인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을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명나라의 승인이라는 명분이 절실했다. 명나라로부터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받아오는 일이 무엇보다 다급하고 중요한 그들의 사명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주청사행은 국내정치용이었던 것이다. 정사 이덕형(李德泂)이 명나라의 관료들로부터 당한 농락과 시달림은 역사상 강대국인 중국이 약소국 조선에게 가해온 행패의 축소판이다. 예컨대 위대중이란 자는 주청사행을 괴롭힌 대표적 인물이었다. 조선이 후금의 누르하치와 같은 오랑캐 류라는 점, 인조반정은 명분이 전혀 없는 죄악임에도 ‘천자’의 조서를 받아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하는 것은 중국 조정에 대한 기망이라는 점, 누르하치에게 먹힌 요동만 회복하면 저절로 조선의 잘못된 일이 바로잡힐 수 있으므로 그 때까지 책봉의 조서를 내리지 말아야 한다는 점 등을 주장하며 주청사행의 사명 수행을 극력 저지했다. 툭하면 시랑 정도의 관료들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고, 출근하는 그들을 만나고자 추운 겨울날 새벽 길가에서 떨며 기다린 것은 물론 각로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내침을 당하자 섬돌을 붙들고 울며 사정하는 노구(老軀)의 정사는 우리 민족의 일그러진 자화상일 수밖에 없다. 가까스로 고명과 면복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정사를 상대로 마지막까지 농락하는 중국의 관료들이야말로 중화주의의 늪에 빠져 약소국을 능멸하는 불량배들의 전형이었다. 중국과 조선, 두 왕조의 외교를 담당한 것은 주로 우리 쪽에서 파견하던 사행단이었다. 연경까지 대개 비슷한 코스로 두 달 가량 걸리는, 왕복 6천리의 지겨운 길이었다. 500여명의 일행이 도보로 오가던 길. 교통편과 숙박시설이 변변할 리 없었다. 한둔하기 일쑤이던 아랫사람들보단 나았겠으나, 정사·부사·서장관 등 윗사람들이라고 크게 편안할 것도 없었다. 목욕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으며, 제때 옷 갈아입는 일 또한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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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행노정 답사 중 만난 하북성 노룡현의 고려포 역참에서>

 


 동지(冬至)·정조(正朝)·성절(聖節)·천추(千秋) 등 정례 사행단만 가는 게 아니었다. 왕비나 세자의 책봉에도, 왕의 죽음에도, 왕위를 물려주거나 선왕을 추숭할 때도 사신들을 보냈으며, 사은(謝恩)·주청(奏請)·진하(進賀)·진위(陳慰)·진향(進香) 등 임시 사행단은 수시로 파견되었다. 그런 역사가 조선조 내내 이어진 것이다. 중국인들의 뇌리에 박힌 것은 반복되어온 사행 파견의 불평등한 외교관계였다. 그렇게 역사가 왜곡되는 과정에서 청 말 황준헌(黃遵憲)이란 자의 ‘조선책략(朝鮮策略)’같은 글도 나타나게 되었다. “오늘날 조선은 중국 섬기기를 마땅히 예전보다 더욱 힘써서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조선과 우리는 한 집안 같음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그의 언설이야말로 올림픽 성화 봉송에서 난동을 부린 중국 청년들의 ‘한국관(韓國觀)’을 정확히 적시한 내용이다. 멀쩡한 남의 나라 외교관이나 국회의원, 언론사의 특파원을 폭행하고도 정당한 법 집행이라 강변한 중국. 자국의 배가 서해상에서 골든로즈호를 침몰시키고 도주한 사건에 대하여 ‘피해 선박이 구난장비를 갖추지 않아 인명피해가 났다’고 억지 논리를 편 중국. 그것도 모자라 이제 그들은 남의 나라에 몰려와 자신들의 국기를 휘두르며 폭력까지 행사하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은 스포츠 경기장을 제외한 그들의 영토 안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여 우리의 국기를 흔들거나 애국가를 부르도록 내버려 둔 적이 없다. 그런 그들이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수백 명의 유학생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국기를 들고 수도 서울의 한복판을 누비게 만들었으니, 그 배짱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중국을 떠나 너희가 살 수 있느냐’고 큰 소리 치는 철없는 중국의 젊은이를 보며, 그들의 만용과 만행을 가능케 한, 비뚤어진 중화주의가 세계평화의 재앙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다시 묻건대, 이런 비극을 초래한 장본인은 우리인가 아니면 그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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