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10. 9. 12:47

 

오클라호마의 숨어 있던 별 ‘Guthrie City’

 

 

 

오클라호마 시티로부터 35번 하이웨이를 타고 20~30분을 달리자 길가에 ‘Oklahoma Territorial Museum[오클라호마 지역 박물관]’이란 입간판이 서 있었다. ‘territorial’이란 이름에 관심이 갔다. 특수한 분야를 표방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박물관이란 시간과 지역을 초월하는 공간인지라, ‘territorial’을 강조한 그 이름이 내 시선을 끌었던 것이다.


Oklahoma Territorial Museum 전경


오클라호마 주 인디언 분포도

 

105일 토요일. 맘먹고 기억 속에 각인된 그곳엘 갔다. 거쓰리(Guthrie) 인터체인지로 진입하니 겉보기에 한적한 시골이었다. 다운타운이라 할 만 한 거리의 주차 공간들은 텅텅 비어 있었으나 도시 곳곳에 서려 있는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 이곳이 바로 오클라호마의 첫 주도[州都, Capital]였다. 인근의 오클라호마 시티에 주도의 지위를 넘겨 준 뒤 와신상담(臥薪嘗膽)해 온 듯하지만, 한 번 지나간 역사의 물결을 되돌리기란 불가능함을 그들인들 모를 리 없을 터. 힘들여 보존하고 있는 영화의 옛 자취들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주 간선도로를 따라 100년 넘는 건물들이 즐비하고, 거리에는 승객들을 가득 실은 당시 모양의 버스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옛날 모습의 트롤리 버스
 

잠시 걷다 보니 하얀 천막들이 우리의 길을 막았다. ‘Guthrie Escape’란 명칭의 가을 축제였다. ‘거쓰리로의 탈출쯤으로 번역될 수 있을까. 큰 도로 위에 설치된 각각의 천막들에는 각종 미술품, 음식, 와인, 의상, 도자기, 공예품 등이 그득그득 전시되어 있고, 천막 거리를 벗어난 곳의 가설무대에서는 그룹 싱어들과 악사들이 각국의 민속음악들을 공연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100년이 훨씬 넘는 건물들이 우뚝우뚝 서서 축제의 현장을 굽어보고 있고, 사람들은 그 사이를 냇물처럼 흐르고 있는 시간의 여울에서 물고기가 되어 유영하고 있는 곳이었다. 시간이 각인된 그 자리에서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리게 하는 것이 축제의 힘임을 비로소 느껴본 우리였다.


축제 공연장 앞에서 만난 가수들


거리의 오래된 악기점


축제장 도자기 부스에서 만난 아마추어 도예가


축제장 장식물 부스에서


거쓰리 축제 포스터


축제장 공연무대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부터 두 개의 네거리를 지나자 박물관이 서 있었다. 건물은 그럴 듯 했으나, 관람객은 우리 둘 뿐이었고, 들어가 보니 빈약한 컬렉션 또한 우리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주로 개척시대 이 지역의 생활사 자료들이거나 복원된 것들이 대부분으로, 1, 2층에 나누어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미 오클라호마 시티의 카우보이 박물관과 털사 시의 길크리스 박물관을 본 우리의 안목을 만족시키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박물관과 함께 하고 있는 카네기 도서관은 오클라호마 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것으로 당시 소장하고 있던 책들과 열람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이 도시의 역사적 연원과 문화적 깊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박물관 소장품(집안 모습)


페인카운티의 창설자 페인 기념 페넌트


박물관 소장 가구들


박물관에 전시된 옛날 버스


인디언 체이옌족 추장 울프


카네기 도서관의 모습

박물관에서 나와 중앙의 대로를 타고 끝까지 가자 큰 건물의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사원(Scottish Rite of Freemasonry)'이 서 있었다. 기독교와 계통을 달리 하는 광신도들의 비밀 결사로서 이미 200~300 년 전부터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백인사회를 중심으로 퍼져 나간 민간조직이 바로 이것이다. 루스벨트, 처칠 등 세계의 지도급 인사들이 많이 소속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십자군 전쟁 때의 성당 기사단에서 연원되었을 만큼 역사가 길다.


십자군 전쟁 뒤 스코틀랜드로 도피하여 석공으로 변신한 기사들은 비밀 결사를 만들어 유지하며 수백 년을 지탱했고, 그로부터 약 400년이 지난 1717, 흩어져 있던 지부들이 규합하여 프리메이슨의 공식명칭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프리메이슨의 사원을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잠겨 있는 사원의 주위를 뱅뱅 돌면서 비밀스런 내부를 보고자 했으나 문은 굳게 잠겨 나그네의 출입을 완강히 막는 것이었다.

프리메이슨을 떠나 클리블랜드가에 위치한 레스토랑 ‘EAT’를 찾았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이 집의 돼지 갈비 바비큐와 맥주 한 잔은 나그네의 출출한 배를 채우기에 충분했고, 모여드는 사람들의 친절한 표정과 응대가 이 지역의 분위기를 말해주고도 남았다.


늦은 점심을 때운 옛날 레스토랑 EAT


레스토랑 EAT 캐시어의 상큼한 미소


레스토랑 벽에 붙어 있는 옛날 상표

 

식사 후 커피 마실 만한 집을 찾다가 들른 곳이 바로 빅토리안 티룸(Victorian Tea Room). 레스토랑이 주업인 그 집에서 차 한 잔만 마시기가 미안해 쭈뼛거리는 우리를 호화롭게 세팅된 자리에 앉힌 다음 여주인 셰릴(Cheryl)은 맛있는 티와 커피를 내왔다. 차를 마시면서 여주인과 우리는 이 도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시를 세운 인물 거쓰리의 이야기, 거쓰리 시의 역사와 문화, 조상들과 자신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 등을 자분자분 얘기해준 그녀는 우리가 미국에 도착한 이후 대학 밖에서 만난 첫 지성인이었다.


빅토리아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빅토리아 다방의 주인 Cheryl씨와 함께

 

그 뿐 아니었다. 한참 만에 일어나 나가면서 찻값을 지불하려 하자 그녀는 돈을 받지 않으려 했다. 미국이 어딘가? 음식 값을 내고도 팁까지 얹어 줘야 하는 나라다. 그런데 우리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난 그녀가 찻값을 받지 않겠다니! 오클라호마의 경건함과 친절함에 이미 감동받은 바 있는 우리는 거쓰리에 와서도 대접받는 기분을 가질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천국 미국에서 공짜 커피를 마시고, 미국 친구까지 만들게 되었으니, 이만 하면 몇 배 남는 장사를 한 셈이었다. 즐거운 기분으로 거쓰리의 추억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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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훈식

    교수님을 담은 사진사 분의 마음이 훈훈하여 피사체에 투영된것 같습니다.^^그곳 분들도 겸손하군요. 공수자세를 보니까요.

    2013.11.07 22:34 [ ADDR : EDIT/ DEL : REPLY ]
  2. 백규

    미국인들이 생각보다 예의바른 게 사실입디다. 물론 계산이 분명하고,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는 점은 미국인 모두에게 공통된 생활습성이겠지만. 드물게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매우 진지하고 배우려 하고, 남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 여기서 만난 셰릴은 그런 케이스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아요. 사람을 만나고 기분 좋기가 쉽지 않은데, 이 경우는 100%였어요.

    2013.11.14 01:08 [ ADDR : EDIT/ DEL : REPLY ]

글 - 칼럼/단상2013. 10. 2. 06:14

  

 

근황 2

 

미국음식 사귀기

 

 

김형,

 

우리는 몇 년 전 자동차를 몰고 유럽의 20여 개 국을 답사한 적이 있소. 당시에 매일 올리던 홈페이지의 글이나, 나중에 출판한 책[<<, 유럽>>]에서 호기롭게 음식에 관한 한 코스모폴리탄임을 내 스스로 자부하곤 했지만, 사실 가장 큰 문제의 하나가 음식이었소. 유럽은 그래도 미국보다 훨씬 다양하고 섬세하여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인의 미각을 달랠 만한 여건이 풍부하게 마련되어 있습디다. 물론 우리 동포들이 밀집해 사는 뉴욕이나 서부 도시들을 감안하면, ‘음식의 평균적인 친 한국 성향은 이론상으로 미국이 유럽을 앞설 것이오. 물론 그 보다 훨씬 전인 15년 전 1년 남짓 지낸 LA에서는 전혀 음식 문제가 없었소. 차를 몰고 몇 분만 나가면 한국마켓들이 많았고, ‘한국보다 더 한국적인한국음식점들 또한 수두룩했기 때문이오. 서울에서도 찾아가 먹어 본 적이 없던 소공동 순두부를 거기서 처음으로 맛보았으니, 더 할 말이 있을까요?

 


카우보이 박물관 식당에서

 


무어 시에서 점심 차 들른 베트남 국수집

 

사실 이곳으로 오면서 이번에는 완벽하게 미국식으로 살아보자고 큰 소리를 쳤던 나요. 출국할 때 기본적인 양념이나 밑반찬 등을 다 빼놓고 온 것도 미국식으로 살아보자는 호기와 함께 미국엔 어딜 가나 한국인들이 터를 잡고 마켓이나 식당을 열고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소. 무엇보다 이젠 먹는 것으로부터 초탈할 나이도 되지 않았는가라는, 우리 자신에 대한 착각이 대책 없는호기의 근원이었소. 나이 들면서 먹는 양은 줄었지만, 식성은 더 근본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소.

 

미각은 지문보다 더 정확하다는 말은 나이 든 뒤 찾는 음식을 보면 대부분 그의 어릴 적 삶이나 지역까지 정확하게 맞출 수 있기 때문일 것이오. 서해안 촌놈인 나는 어릴 적부터 젓갈이나 뻘게, 소금에 절인 물고기 등을 자주 먹으며 자랐소. 그래서일까요? 나이가 들수록 밥숟가락을 들 때마다 눈길은 짭짤한 젓갈이나 비린내 나는 생선을 향하곤 하는 것이오. 그런 반찬에서 고향의 내음이 풍기기 때문이지요. 젊어서 먼 길 떠났던 나그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 고향으로부터 풍겨오는 음식 내음때문 아니겠소?

 

혹시 오나라 출신 장한(張翰)이 낙양에서 벼슬하다가 고향의 진미인 순채국과 농어회를 잊지 못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는 순갱노회(蓴羹鱸膾)’의 고사를 알고 계시오? 물론 당시 제나라 왕의 무도함을 보며 위기를 느낀 그였으므로 그가 벼슬을 버린 것이 순전히 음식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만약 그에게 고향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없었어도 그리 빨리 벼슬을 버릴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참으로 미국의 음식에는 매력이 없소. 며칠 전 만난 미국 여학생도 미국 음식은 모두 ‘unhealthy food’라고 한 마디로 매도합디다. 학교 안에 식당들이 많고, 대부분의 식당들이 학생들로 붐비지만, 나로선 딱히 먹고 싶은 것이 없소. 대부분 달고 기름기 많고, 어떤 것은 짜기도 하고, 비벼 놓거나 섞어 먹는 어떤 것들은 흡사 사료같은 모습을 띠기도 하오. 혹자는 그대가 싸구려 음식만 먹으니 그렇지. 멋진 레스토랑에 가서 제대로 된 미국 음식 좀 먹어봐!’라고 타박하기도 하오. 그러나 값이 싸고 비싼 차이, 음식의 가짓수나 코스가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구조야 비싸다고 달라질 수가 있겠소? 설탕과 소금, 밀가루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미국 음식=unhealthy food’라는 공식은 아마 바뀔 수 없을 거라고 보오.

                                                                                                                                                 
                                          어느날 학교 식당에서의 점심상


                                               

                                          최근의 아침 메뉴

 

그래서 우리도 나름대로 궁여지책을 고안했소. 마트에 들러 수십 종류의 빵 가운데 밀가루와 약간의 식염 외에 전혀 가미(加味)가 되지 않은 한 종을, 과일 코너에서 아보카도(avocado)란 열대과일과 이 지역의 사과를, 유제품 코너에서 치즈 한 두 종을, 야채 코너에서 양상추를, 음료 코너에서 건더기[이곳 사람들은 이것을 pulp라 합디다]가 들어 있는 (원액) 오렌지 주스를 각각 고르니, 대충 미국식 아침식사로서는 분에 넘치는 조합이었소. 빵을 살짝 구어 버터 대신 아보카도의 과육(果肉)을 바른 다음, 치즈와 양상치를 얹고 오렌지 주스를 곁들이면 아침은 해결이지요. 그렇게 먹고 점심은 초원의 굶주린 사자처럼 미국 음식의 정글 속에서 어슬렁거리기 일쑤라오. 그러다가 저녁은 완벽한 캠핑족 스타일의 한식으로 (이들의 표현대로 한다면) ‘빅디너(big dinner)’를 먹게 되는 것이오 

 


어느 날의 빅디너(?)

 


장영배 교수 부녀와 함께 한 어떤 레스토랑의 점심

 

지난 달 하순인가요? 일요일에 길크리스 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해 인근 도시 털사(Tulsa)에 갔었소. 박물관 관람이 주목적이었지만, 아내나 나는 내심 그곳에 있다는 한국음식점에 더 무거운 방점을 찍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소. 나름대로 정성을 들인 그 식당의 김치찌개를 먹으며, 한 달 여 시달린 솟증을 풀어낸 셈이오. 돌아올 때 식당과 이웃한 한국마트에서 삼겹살 몇 근을 끊어 차에 실으니, 어렵던 시절 설 쇠기 위해 동네 돼지 잡던 현장에서 다리 한 짝 사들고 의기양양하게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던 가난한 가장의 호기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짐작됩디다.

 


털사에서 만난 한국음식점-한국가든 

 


한국가든에서 먹은 김치찌개백반 

 


한국가든 주인장의 두 따님 및 손자와 함께 

 


한국가든 옆의 한국 마켓

 

그러나, 언제까지 한국음식만 찾아다닐 수 있겠소?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지겹게 그 음식 속에서 일생을 지내야 할 것을! 귀국 후 여기서 보낸 시간을 회상할 때 이곳의 음식경험만큼 오래 갈 추억 거리가 어디 있겠소? 김 형이나 나나 이제 젊은 시절의 아름답던 추억이나 반추하며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가야 할 군번들이 아니겠소? 세계 제일의 국가라 자부하는 미국, 그 미국을 움직이는 국민들, 그들이 먹는 음식. 어쩜 내 주관의 속박만 벗어날 수 있다면, 그들의 음식이 갖는 의미나 장점이 우리 음식의 그것보다 나을 수도 있지 않겠소? 그래서 이젠 적극 그들의 음식과 친해지기로 했소. 좋은 것, 입맛에 맞는 것, 익숙한 것만 찾으려면, 고생스럽게 이역만리 미국 땅엔 무엇 하러 왔겠소? 그냥 내 나라에서 두 다리 쭉 펴고 편하게 소고기나 사 묵으며살 일이지. 그래서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내 미각을 길들이기로 했소.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이만 하리다. 잘 계시오.

 

2013. 10. 1.

 

스틸워터에서 백규

 


캠퍼스 외곽쪽의 약간 특이한 반 주문식 학생식당에서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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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덕회

    굶주리면서 살았던 시절이 있어 먹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을 줄 알겠지만, 제일 어려운 것이 먹는 문제 아닐까? 그래도 대단하네 그려,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네. 그래도 건강 생각해서 저염식에 채식 많이 하게나, 그 못된 가공육은 가능한 덜 먹어야 하는데.....

    2013.10.05 21:54 [ ADDR : EDIT/ DEL : REPLY ]
  2. 먹는 문제에 대해서는 얼마간 도통한 줄 알았는데, 막상 망망대해 속에 들어가니 그렇지 못함을 알게 되었지. 아무거나 먹고 지낼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치긴 하지만, 막상 닥치면 그렇지 못한 게 음식 문제라네. 글쎄 이 친구들이 'big dinner'라고 떠벌이는 것도 내겐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고, 또 내가 '산해진미'라고 자랑하는 것도 그들에겐 별거 아닐것이니. 세상사람들이 함께 모여 먹고 산다는 것이 사실은 영원한 꿈 아닐까 몰라?

    2013.10.06 12:4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3. 임민주

    교수님! 저도 음식이 안맞아서 고생했었는데요. 교수님 그래도 잘 챙겨 드세요. 살 빠지신 거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인마켓에서 음식 사와서 맨날 만들어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

    2013.10.30 19:34 [ ADDR : EDIT/ DEL : REPLY ]

글 - 칼럼/단상2013. 9. 21. 11:41

 

 


가까이에서 잡은 Arcadia Round Barn

 


라운드 반 복원자 로비슨 부부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은 헌정 표지판


라운드 반 입구의 길에 깔아놓은 기념벽돌들



라운드 반 1층의 내부


1층에서 목격한 스케치(설계도?)


1층에서 발견한 스케치(설계도?)


2층에서 올려단 본 천정(모두 목재로 이루어졌음)


2층에서 올려다 본 천정


좀 멀리서 잡은 라운드 반

 

 

길가의 경이로운 옛 건축물

 

Arcadia Round Barn

 

 

2013915일 일요일 오후. 카우보이 박물관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들른 Arcadia Round Barn[아카디아의 둥근 곳집]. 카우보이 박물관을 지도에서 확인하던 차에 그로부터 가까운 곳에 이런 이름의 유적이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알게 되었다. 35번 하이웨이에서 66번으로 갈아타고 Arcadia 마을로 들어서자 과연 저 멀리에 둥근 돔이 보이는 것 아닌가. 참으로 기이한 모양이었다. 모양으로 미루어 어쩜 천문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액셀을 눌러 밟았다. 가까이 가본 즉 천문대는 아니었고, 안을 넓게 만든 그냥 옛날 건축물이었다. 목재만으로 흡사 오늘날의 천문대처럼 둥근 건축물을 만들었다니, 경이로운 일이었다. 안에는 세계 각지의 각종 골동품들이 진열되어 있고, 늙은 판매원 하나가 앉아 있을 뿐, 특이한 모습은 없었다. 2층에 올라가 천정을 바라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도대체 어쩌자고 딱딱한 목재를 엿가락 다루듯 구부려 이런 건축물을 만들었단 말인가.

 

***

 

이 건축물은 1898년 오도[William H. Odor]가 디자인하고 세웠는데, 그는 이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제재소를 세우고 가시 열매를 맺는 이 지역 토종의 상수리나무를 켜서 목재로 만들었다고 한다. 목재들을 켜자마자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동안 굽어지도록 특별히 고안한 형틀에 묶어놓아 모양을 잡았다.

 

사람들은 모두 말렸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겼다. 아마도 그는 토네이도가 올 때 가축을 피신시키거나 건초를 저장하는 장소로 쓰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이 회동하는 장소로도 쓰이게 될 것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했던 것 같다. 1903년 윌리엄과 그의 부인 미라 오도는 그들의 땅 일부를 내 놓았고, 벤자민과 사라 뉴커크도 땅을 내 놓아 보탰으며, 인근의 미주리와 캔자스 텍사스주 등을 부추겨 이곳을 지나는 철로를 부설하게 하기도 했다. 그 덕에 이 지역은 주변의 도시들에 면화, 농산물, 가축 등을 공급하는 농업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1920년대 후반에 66번 도로가 Round Barn의 바로 옆을 지나게 됨으로써 결국 이 건축물은 66번 도로 상의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주인이 바뀌고, 여러 번 수정을 가하면서 애당초의 완벽한 구조는 손상을 입게 되었으며, 그 원인으로 라운드 반은 아카디아 마을과 함께 몰락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몇 십년 후인 1988년에 지름 60피트의 지붕이 무너졌고, 평가된 보수 비용만 165,000달러가 넘었다.

 

현직에서 은퇴한 건물 거래업자인 루터 로비슨과 ‘The Over the Hill Gang’이란 이름의 은퇴자 그룹이 돈과 시간, 기술을 도네이션하여 복원에 매달렸다. 그 뿐 아니라 많은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하거나 기념 벽돌들을 판매하기도 하고, 길 옆에 자선함을 놓아두는 한편 많은 사람들로부터 설비 혹은 노동을 도네이션 받음으로써 결국 이 거대한 건축물은 복원된 것이다.

 

***

 

짧은 역사의 미국이지만, 이런 건축물에 숨은 정신은 각별했다. 자연 재해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고, 치밀하게 실행하는 모습은 오늘날의 미국을 이룬 중요한 자산일 것이다. 더구나 지금을 살고 있는 후손들이 옛 것을 아무런 생각 없이 부수지 않고 유지하려는 노력 끝에 되살린 이 건축물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우리의 삶 속에서 부단히 이어진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는 국민적 지혜의 증거물이었다. 길 가다가 뜻하지 않게 얻은 소득이었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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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정

    광주리 같이 생긴 천정이네요 ㅋㅋ

    2013.09.23 07:33 [ ADDR : EDIT/ DEL : REPLY ]
  2. 엄마

    아주 멋지더라고, 이층에서 천정을 쳐다보곤 입이 떡 벌어지더구나.
    큰 광주리를 엎어 놓은거 같아.
    그런 건물을 만들 생각을 한 주인이 진짜 특이 하지 않니?
    역시 기발한 사람들이 있어!!!

    2013.09.23 10:53 [ ADDR : EDIT/ DEL : REPLY ]

글 - 칼럼/단상2013. 9. 21. 02:08

 

 


카우보이 박물관 입구


카우보이 박물관 마당


카우보이 박물관 로비에 있는, James E. Fraser(1876~1953)의 조각작품 <The End of Trail>


인디언들의 생활 자수공예


인디언 아이들이 갖고 놀던 인형들(아이들의 의상을 엿볼 수 있음)


인디언 아기들을 담아갖고 다니던 휴대용 도구


인디언의 생활공예(식물 줄기로 짠 바구니)


인디언들의 생활공예
   

카우보이들의 마구들


서부영화에 카우보이로 출연한 배우


레이건과 스탠윅이 출연한 서부영화 '몬태나의 캐틀 퀸' 포스터


서부영화에 출연했던 배우와 카우보이 소품들


서부영화에 단골로 출연했던 죤 웨인


카우보이 모자들


카우보이 의상들


카우보이 부츠들


서부시대의 마차


블랙 카우보이


서부시대 카우걸의 모습


서부시대 카우보이들의 침실



성장(盛裝)한 카우보이


카우보이의 의상들


카우보이의 마구 및 의상


카우보이의 재산인 소나 말의 등에 찍던 낙인


낙인의 도구와 글자의 뜻



로데오 경기 모습 
               
서부 개척시대 초등학교 교실
            
    Hollis Randal Williford의 Bronz <The Snake Priest, 1980>


                 
Tucker Smith의 유화 <The Return of  Summer, 1990>

      
Martin Grelle의 유화 <Teller of Tales, 2002>

 

     

           서부 개척시대 미국의 소리

-The National Cowboy & Western Heritage Museum을 보고-

 

 

몇 년 전 이스라엘을 여행하면서, 성서에 광야로 등장하는 사막지대의 한 곳에서 키부츠들을 만났고, 그것들을 통해 그 나라의 저력을 느낀 적이 있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광야에 있다!’는 모토로 몸소 그곳에 들어가 사막을 옥토로 일구다가 생을 마친 초대 총리 벤구리온은 한 사람의 훌륭한 지도자가 한 나라의 흥망을 결정짓는 요인임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였다.

 

15년 전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국 서부의 유서 깊은 도시들과 사람의 손때 묻지 않은 자연을 둘러보면서 미국의 미래가 함축된 역사의 힘을 느낀 적이 있다. 휘황찬란한 동부보다 거칠지만 힘찬 투쟁과 개척의 역사를 안고 있는 서부가 훨씬 발전적인 그들의 미래를 추동하는 기반이었다. 그러나 그 힘과 역사적 의미를 마음으로만 느낄 뿐, 손으로 만져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

 

지금 우리는 미국의 중남부에 해당하는 오클라호마 주에 와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중남부이지만, 대서양을 건너온 유럽의 백인들이 서부로! 서부로!’를 외치며 말을 타고 서쪽으로 몰려가던 당시에는 넓게 보아 이 지역 또한 서부의 일부 혹은 서부로 넘어가기 위한 징검다리쯤으로 보였으리라.

 

미국이 세계 최고 부자의 지위에 오르는 계기가 된 골드러쉬(Gold Rush). 각지의 인디언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며 금을 찾아 서부로 몰려가던 장관(壯觀), 데쓰밸리(Death Valley) 등에 남아 있는 당시 금광의 유허(遺墟)들을 보며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서부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역사적 시공(時空)이 바로 ‘The National Cowboy & Western Heritage Museum[국립 카우보이 및 서부지역 유산 박물관: 이하 카우보이 박물관으로 약칭]’이었다.

 

오클라호마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35번 하이웨이와 63번 시내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 기가 막히도록 절묘한 위치의 박물관이었다. 일요일 아침 일찍 스틸워터를 출발,오클라호마 시티의 반즈앤노블 서점에 들러 주변 지역의 지도와 인디언 관련 참고서적들을 산 다음, 아름다운 숲을 끼고 달리는 63번 도로를 따라가자 산뜻한 외관의 카우보이 박물관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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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 벤 구리온이란 영웅이 있어 집단농장 키부츠를 통해 광야를 생명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듯, 광활한 서부를 품고 있는 미국엔 무수한 개척자들, 원주민들과 투쟁하며 서부를 활개치고 다니던 카우보이들, 그리고 그들을 알아 준 선각자 레이놀즈(Chester A. Reynolds)가 있어 미국 정신의 모델하우스인 카우보이 박물관이 태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카우보이 박물관은 드넓은 황야 오클라호마의 한복판에 찍은 화룡점정(畵龍點睛) 마침표인 셈이다.

 

카우보이, 보드빌(vaudeville) 연기자, 익살꾼(humorist), 사회평론가이자 영화배우였던 윌 로저스(Will Rogers)의 기념관[오클라호마 클레어모어(Claremore)시 소재]을 보고 자극을 받은 레이놀즈는 카우보이 명예의 전당을 세우고자 했다. “나는 항상 자신을 카우보이, 카우보이 작가, 카우보이 익살꾼, 카우보이 배우 등으로 자처한 한 인물을 위해 세운 기념관을 보았는데, 윌 로저스 기념관의 내외장이 나를 깊이 감동시켰다. 그 때 하나의 생각이 번개처럼 내 마음에 떠올랐다. 서부를 건설하는 데 큰 공헌을 한 다른 많은 카우보이들, 소몰이꾼들, 목축업자들은 어떤가? 왜 이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한 명예의 전당은 만들지 않는가?”라는 그의 주장은 얼마나 신선한가? 특정인을 기념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오늘의 서부를 만든 주역은 황야의 먼지와 함께 사라진 수많은 무명의 카우보이들과 개척자들이었음을 그는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물관의 건립을 위한 장정(長征)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일이 성사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들을 겪었지만, 연방정부와 의회 및 각 주정부들까지 적극 나서는 등 거국적인 협조 아래 100만 달러 이상의 거금을 모았고, 각 지역의 경합을 거쳐 현 위치에 멋진 건축물을 세움으로써 19656, 드디어 개관을 보게 된 것이다. 물론 이 거사의 장본인 레이놀즈는 개관을 보지 못한 채 1958년에 사망했지만, 그의 호소로 결국 힘을 합치게 된 미국은 개척시대의 꿈과 시련을 역사의 그릇에 오롯이 담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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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컬렉션이었다. 카우보이와 목축, 인디언의 삶에 관한 모든 것들은 물론 수많은 서부영화들의 명장면이나 배우들이 생생하게 우리의 눈앞에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총을 빼고 달려들 듯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죤 웨인도 모두 이곳에선 훌륭한 컬렉션의 한 소품일 뿐이었다. 각종 마구들, 무수한 총기들, 마차들, 인디언의 의상들과 생활용품들, 인디언 화가의 그림들, 재현해 놓은 그 시절의 거리 등 모두 그간 이 땅에서 전개되어 온 역사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물들이었다.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그 증거물들을 통해 개척자들과 인디언들이 벌이던 싸움의 현장도, 카우보이들의 힘든 삶도, 로데오 경기의 실감도 모두 미국 정신을 이루어 낸 역사의 바탕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지금 미국의 주류는 개척 시대에 원주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했고, 지금까지 강제이주나 보호구역 지정 등 원주민 정책에 대한 비판도 많았지만, 어쨌든 카우보이 박물관 안에서만큼은 그 모든 것들이 미국정신으로 용해수렴되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갈등과 반목을 하나로 버무려 나갈 수 있게 하는 미국의 에너지가 이곳 국립 카우보이 및 서부지역 유산 박물관에서 바야흐로 맛있게양성(釀成)되어가고 있었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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