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5. 9. 8. 07:32

 

 

 

역사의 고비들을 지나며 많은 차별을 겪어 온 것이 우리 민족이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일본, 서구세계 등이 차별을 자행했거나 하고 있고, 대내적으로는 왜곡된 권력의 지형에 의한 지역과 계층적 차별의 구도가 지속되고 있다. ‘식민 : 피 식민은 식민주의 시대의 도식화된 차별구도였고, 그로 인한 민족적 자존심의 끔찍한 손상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탈 식민의 조류가 거세게 소용돌이치고 있지만, 차별구조는 보다 예리하게 내면화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다. 일본인들에게서, 백인들에게서, 그토록 차별과 멸시를 받고 살아 왔으면서도 일자리를 찾아 온 동남아 사람들과 흑인들을 잔인하게 차별하는 우리 아닌가. 오랜 기간의 학습을 통한 만큼 내면에 들어앉은 차별구조의 똬리를 집어던질 법도 하건만, 우리는 차별구조의 예각화라는 폐습의 대물림을 반복하고 있다.

 

엊그제, 어떤 신문에 서울대생들의 인터넷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의 이야기가 보도되었다. 스누라이프란 15만여 명의 서울대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펴는 인터넷 사이트인데, 최근 다른 대학 학부 출신 서울대 대학원생들을 커뮤니티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주장이 이 사이트의 게시판에 빈번히 올라오고 있는 것이 문제의 핵심인 모양이다.

 

 


대학신문(大學新聞)(2010. 09. 05.) 기사에서

 

9만 평방킬로미터 남짓의 작은 나라에 올망졸망 200개가 넘는 4년제 대학들이 모여 서열화와 차별의 향연을 펼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그 중 서울대 사람들이 떠는 위세는 참으로 가관이다. 이른바 순혈주의로 미화되는 배제의 논리, 그 연원이야말로 지독하게도 식민주의적 차별의식으로부터 나온 것일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학자 하나, 사상가 하나, 정치인 하나, 기업인 하나 키워내지 못하면서, 이른바 최고 학문의 전당임을 자랑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천박성은 극명하게 확인된다. 가까스로 식민주의의 터널을 빠져나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우리의 자화상이 바로 이 대학이고, 휘청대는 한국 지식사회의 민낯 또한 이 대학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이 대학만 나무란다면, 너무 불공평한 일일 것이다.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정권과 교육정책 당국, 아니 무엇보다 이 대학에 대하여 무조건적 신뢰를 보내는 국민 전체의 맹목을 질타해야 함에도 대학만 나무라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망각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맹목이 이 대학을 망치고, 지식사회를 망치며, 궁극적으로 나라까지 망치게 될 거라는 전망이 그리 어렵지 않음에도, 우리는 날만 새면 줄 세우기와 차별의 무익한 수작으로 날밤을 지새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누라이프에 횡행한다는서울대생들의 언동은 새삼 근원을 찾아 뿌리를 뽑을 여유가 없을 정도로 다급한 발등의 불이다.

 

어찌 학생들만 나무랄 일인가.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고, 학생은 선생의 거울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선생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잘 하는가 못하는가를 알려면 자식이나 학생을 보면 안다. 순혈주의란 지금의 학생들이 만들어낸 문화가 아니다. 식민 시대부터 서울대에 온존해 있던 독점적 배타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대학 특히 서울대학의 교수자리는 으레 서울대 출신이 맡아야 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용되어온 그간의 세월이었다. 아무리 학문적으로 특출한 업적들을 갖고 있어도, ‘서울대학도 못 나온 주제에 서울대생들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느냐는 논리가 바탕에 깔려 있는 한, 순혈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 대학 경쟁력으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미국의 대학들에 가보라. 자교 출신들은 아예 그 학교에 서류를 낼 엄두도 못 내도록 되어 있다. 기껏 5% 내외의 자교 출신 교수진을 갖고 있는 것이 세계 유수의 대학들이다. 어느 대학을 나왔든 해당 분야에서 이룩해온 업적이나 앞으로의 가능성이 인재를 뽑는 기준일 뿐, ‘서울대를 나온 사람만 서울대 교수가 될 수 있다는 서울대 식(혹은 한국식)의 배타적 기준은 그들 마음속에 아예 없다. 여기서 생겨나는 대학의 경쟁력은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서울대나 그 언저리 대학들이 형성하는 공고한 카르텔에 지체되는 것은 나라와 민족의 발전이다. 열린 마음으로 모든 이들을 포용하고 경쟁해야 할 새싹들이 배타적 순혈주의로 무장하게 된 것도 이들 폐쇄된 공간에서 대물림해온 못난 카르텔의 논리탓이다.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한 입시제도와 그 제도에 의한 순간적 간택(揀擇)’을 일생 지속되는 배타적 권리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것을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젊은이들의 행동지표로 삼게 해서도 안 된다. 학생들로 하여금 겸허한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좋은 업적을 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는 인물이 되도록 인도하는 것이 그나마 지금의 서울대가 국가와 민족에게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 생각만이 서울대 스스로의 경쟁력을 갖추게 하고, 지식사회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나라를 건전하게 바꾸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스누라이프 게시판 논란은 서울대 혹은 한국 대학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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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5. 4. 6. 07:20

교수채용 비리유감

 

 

 

 

 미국의 대학에 잠시 체류하고 있으면서, 교수 채용의 과정을 그 대학의 교수로부터 직접 듣게 되었다. 채용 심사가 완료되기까지 대략 5개월 정도 걸리는데, 서류심사와 전화 인터뷰를 통과한 응모자들 가운데 채용 예정인원 몇 배수의 인원을 직접 불러다가 며칠 동안 벌이는 여러 차례의 대면 인터뷰, 발표회 등 그 심사절차가 자못 복잡하고 번거로운 점이 놀라웠다.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심지어 호텔 투숙 과정 및 식사시간에도 예리한 평가의 눈이 따라다닌다니, 교수 한 사람을 뽑기 위해 미국의 대학들이 투자하는 돈, 시간, 정력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심상하게 던지는 말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모두 체크한다는 것이었다. 개별 면담을 통해 응모자의 전공수준이나 향후 연구계획 등 응모자의 수월성을 평가한 뒤 교수들은 회의를 갖고 각자의 판단에 대하여 치열한 토론을 벌인다고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한 사람의 교수를 뽑는 과정이 끝나는 것이었다.

 

 교수 한 명을 채용하기 위해 학과의 교수들과 스탭들이 총동원되고, 학교 당국도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이 미국의 대학들이었다. 우리나라 대학들은 신입생을 뽑기 위해 학교와 교수들이 홍역을 치르는데, 미국의 대학들은 교수를 뽑기 위해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좋은 교수들이 좋은 대학을 만들어 놓으면, 돈 들여 선전을 하지 않아도 학생들이야 제 발로 찾아오는 게 아닌가. 미국의 대학들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지니는 것도 이런 점에서 당연했다. 공정하고 엄정한 심사를 통해 채용된 교수들의 수월성이 미국 대학들의 경쟁력을 뒷받침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나라 대학들이 눈앞에 떠오르면서 부끄러움과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

 

 지난 정권 시절 저지른 이웃 J대학의 비리들이 최근 드러나기 시작했다. 자세한 건 관심도 없고 복잡한 사안이라 잘 모르지만, 그들이 받고 있는 교수 채용 상의 비리 의혹은 참으로 흥미롭고도 뻔했다. 보도에 의하면, 그 대학은 국악분야의 교수를 한 명 채용키로 하고 20142학기에 초빙 공고를 낸 모양이었다. 그런데, '가야금 전공자, 음악이론 전공자, 영어 수업 가능자' 등의 조건이 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만한 사람이 국내엔 단 한 사람만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사람을 뽑으려는 꼼수였던 것이다. 거추장스럽게 새삼 검찰 수사까지 필요한 일이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당시 앙앙불락(怏怏不樂)하던 몇몇 국악 전공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입을 모아 그 대학과 함께 지금 혐의를 받고 있는 모 인사를 성토하면서도, 드러내놓고 반발하지 못한 점을 지금서야 깨닫게 되었다. 국악계 인사로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권력을 잡아 본 게 아마 유사 이래 처음일 것이라는 그들의 자조 섞인 한탄을 당시에는 귓전으로 들어 넘긴 나였다. 그래, 불쌍한 교수 예비군들이 어찌 총장 출신의 청와대 수석에게 덤벼 들 수 있었으랴?

 

 그러나 그게 어찌 이 대학 이 분야만의 일일까? 모든 대학들이 학연/혈연/지연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내 사람 심기[뽑기]의 카르텔과 그저 고만고만한 사람들만 고르는 안이함에 매몰되어 있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자기비하일까? 자기 대학 출신으로 70~80%, 심지어 90% 이상의 교수를 뽑아놓고도 희희낙락하는 게 대한민국의 대학사회다. 모교 출신 비율을 법으로 제한하려 하자 학과가 다르면 된다고 강변하며 같은 대학 다른 학과 출신의 학자를 교수로 뽑는, 그런 꼼수를 부리기도 한다. 그렇게 해놓고도 학문적 수월성을 강요하는 게 우리나라의 수준이다.

 

 교수를 뽑으면서 아예 자기 대학 출신은 서류도 내지 못하게 규정해 놓은 미국의 대학들을 본다면, 목하(目下) 진행되고 있는 대학 붕괴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이른바 나라를 경영한다는 자들이 거대한 카르텔의 중심이 되어 자행했다는 짓을 보며, 북한의 핵무기를 걱정을 하는 국민들이 우스울 뿐이다. 그야말로 이미 뿌리가 다 썩어 바람만 불어도 넘어질 고사목이 저 산 너머에서 날아올 악동(惡童)의 돌멩이를 걱정하는경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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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 7. 8. 11:28

'박근혜는 바보여~!'

 

 

 

맹자가 양혜왕을 뵙자 왕은 못 가에 서서 홍안[鴻鴈: 큰 고니와 기러기]과 미록[麋鹿; 고라니와 사슴]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어진 자도 역시 이런 것을 즐거워할까요?” 맹자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어진 자가 된 이후라야 이런 것을 좋아하지요. 어질지 못한 자는 비록 이런 것이 있다 해도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시에 '처음으로 영유[靈囿: 백성들이 문왕을 위해 지은 영대 밑의 동산]를 지으실 때에 이를 헤아려 경영하시니 서민이 몰려와 이를 꾸미어 하루가 못 되어 완성하였네. 급히 서둘지 말라 일렀건만 서민들은 아들이 달려오듯 찾아 왔다네. 왕이 영유에 나와 있으면 사슴은 번쩍번쩍 빛나고 백조는 하얗게 빛났다네. 왕이 이번엔 영소[靈沼: 백성들이 문왕을 위해 만든 연못]로 구경 나오자 물고기 가득히 뛰어 놀았네'라 하였습니다. 문왕이 백성의 힘으로 영대와 영소를 지었건만 백성들은 오히려 기뻐하고 즐겁게 여겼던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백성과 함께 즐겼기 때문에 능히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문왕이 백성들의 힘을 빌어 영대영소를 지었건만,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겁게 여긴 것은 문왕이 그것을 백성들과 함께 즐겼기때문이었다. ‘백성들과 함께 즐겼다는 것이 바로 소통의 본질이다. 문왕은 백성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백성들의 마음을 넘겨짚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끊임없는 대화를 통하거나 관념상의 자리바꿈을 통해서 그들의 생각을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왕은 내가 만약 백성이라면 임금에 대하여 어떤 바람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가상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늘 던졌음에 틀림없다. 거기서 나온 결론이 바로 백성과 함께 즐기자!’는 것이었고, 그게 바로 요즘 말로 소통이란 것이다.

 

 

50대인 나는 이 땅의 우리 세대가 갖는 시대적 징표들을 형틀처럼 짊어지고 사는 존재다.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로 대표되는 계몽가를 주문처럼 되뇌면서 꿈을 키웠다. ‘농경시대-산업화 시대-정보화 시대를 거쳐 지금 고도 정보화 사회의 말석에까지 이르렀으니, 다른 나라들에서 수 세기에 걸쳐 이룩한 발전의 과정을 단 몇십년만에 압축적으로 경험해온 셈이다. 그 과정에서 만난 박정희라는 인물은 가난과 무지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 선각자였고, ‘북괴는 민족 공동체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사탄들의 집단이었다. 그런 의식에 바탕을 둔 박근혜의 등장을 보며 질곡의 땅에서 자라난 50대 이상 세대들이 환호성을 내지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해방 이후 정권을 잡아온 남자들을 생각해 본다. 오고가는 술잔 속에 얼렁뚱땅 이루어지는 끼리끼리의 담합, 얕은 수로 당장의 이익을 챙기려는 밀실의 야합등등, ‘구린 남자들의 카르텔이 국가 권력의 이면구조였다. ‘정치(政治)라는 좋은 말이 이 땅에서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남자들의 야망을 합리화 시키는 미명으로 전락되고 만 것이다. 이 땅의 50대가 그런 남성들 사이에서 혜성같이 등장한박근혜에게 호감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여성인 박근혜는 적어도 그간 권력을 갖고 얼렁뚱땅 장난질을 쳐온 남성들과는 다를 것이라는 믿음이 무엇보다 컸다. ‘아버지 박정희가 갖고 있던 꿈에 '화룡점정'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그 무엇보다 크고 중요했다단순히 50대에 이르러 남성 호르몬이 현격하게 줄었다는 생리적인 이유 때문에 여성인 박근혜에게 공감을 갖게 된 건 아니란 말이다.

 박근혜가 들고 나온 신뢰와 원칙이란 우리 세대의 소망적 사고를 결집시킨 슬로건이었다. 취임 초기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간 지지율도 나를 포함한 50대 이상 세대의 굳건한 믿음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걸 믿었다. 적어도 박근혜라면, ‘신뢰와 원칙의 정치를 우리 정치에 착근(着根)시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지혜였다. 꽉 막힌 고집이 아니라 누구도 승복할만한 방법론을 개발해내는 것이 바로 지혜였다. 내 생각이 비록 100% ‘진리여서 그 실현에 대한 100%의 자신감을 갖고 있다 해도, 갈래갈래 흩어진 민심의 밭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섬세한 방법론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 내 생각의 옳음에 대한 확신보다 그 확신에 대한 설득과 지지가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이 있었어야 했다.

 문왕도 처음에는 내 궁전에 멋진 정원과 연못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제왕의 궁전을 제대로 갖추는 것이 왕국의 체면으로 보아 좋을 것이고, 무엇보다 제왕 자신이 원하는 바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왕은 아주 섬세한 방법을 동원했다. 그 일만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즉위 당시부터 백성들과 함께 하는 면모를 보여준 그였다. 그 과정을 통해 백성들은 임금의 표정만 보아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백성들이 스스로 나서서 문왕의 정원과 연못을 만들고 기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바로 그게 문왕이 보여 준 치자의 지혜였다.

 

 

소통이 그렇게 힘 드는 일인가. ‘즐거운 마음으로탁자 위에 차 한 잔 마련해놓고 정치의 파트너들을 불러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게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까. 손가락 몇 번 움직여 여당이나 야당 의원들에게 전화라도 걸어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일이 그렇게 터부로 여길 만한 일일까. 사방에 우글거리는 기자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거나 자신의 시책을 설명하는 일이 그렇게도 번거로우며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는 일일까. 어찌하여 세상의 평판이나 의견을 들어보지도 아니한 채  하나같이 문제투성이의 인간들만 찾아서 국가 대사를 맡기려 한단 말인가. ‘동네 반장이나 이장을 맡기에도 버거운 인물인지, 한 나라의 정승을 맡을만한 인물인지몇 마디 이야기만 나누어 봐도 알 일인데, 무슨 이유로 한사코 그런 문제적 인간들만 찾아 내 놓아서 정적들의 비웃음을 자초한단 말인가. 

 

 

물론 항간의 소문이나 사람들의 평판이 매번 맞는 것은 아니고, 줏대 없이 그에 따르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러나 세평(世評)을 무시함으로써 당하게 되는 어려움은 더 크기 마련이니, 양자를 적절히 배합하는 게 바로 지혜다. 그걸 잘 하면 좋은 정치가가 되는 것이고, 못 하면 줏대 없는 허수아비대책 없는 독불장군이 되는 것이다. 좋은 정승 감들을 찾아내고도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해 버리고 마는 지도자를 누가 따를 것이며, 세상에 좋은 정승 감들이 있음에도 그들이 혹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까봐 발탁조차 하지 못하는 소심함과 속 좁은 욕망의 소유자를 누가 지도자로 섬길 것인가.

 

 

만족의구불안실망절망으로 초심의 급격한 변화를 체험하고 있는 이 땅의 50대들은 만사 제쳐두고 투표장에 달려가 한 표를 행사한 집단이다. 그래서 이들 마음의 변화는 현실 정치의 잘 되고 못됨을 평가하는 바로미터인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만한 기준은 경험이다. 이 땅의 50대들은 공허한 이론이나 편견을 바탕으로 하는 이념의 투사들이 아니라, 맵짠 인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판의 건전한 대안을 모색해온 집단이다. 많은 시행착오들을 거치며 가까스로 찾아낸 대안이 바로 현 대통령이다. 힘들여 찾아냈다고 자부하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 대안에 대하여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였다는 판정을 내리는 순간, 그 대안 또한 역사의 쓰레기통에 쳐 박힐 수 있음을 왜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오늘 만난 동향 친구의 박근혜는 바보여~!’라는 평가를 이 땅의 장삼이사들은 절실하게 공감하고 있는데, 정작 대통령이나 그 주변의 인사들만 모른다면, 이 문제야말로 조만간 민족사의 비극이나 수치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정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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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10. 25. 10:57
 

 교수들을 ‘구름 위의 신선’이나 ‘도덕군자’ 쯤으로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요즘 들어 교수가 관련된 파렴치 범죄들이 노출되면서 교수들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은 바뀌고 있지만, 그동안 그들에게 주어왔던 기본점수까지는 깎으려 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의 가상한 정서다. 전통시대에 형성된 스승관(觀)이 우리 사회에 온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정신적 거래행위’를 시장에서 사고파는 ‘물질적 거래행위’와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범주에 올려놓고 전자를 신성시하는 행태는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어렵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요즘의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를 상행위(商行爲)와 일치시킴으로써 교육과 관련된 세태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다지 일반화된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상당수의 대학교수들이 국회의원 혹은 정부의 고위직으로 발탁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형성된 보통사람들의 교수관(觀)이야말로 교수직에 대한 일종의 ‘우스꽝스런 외경심(畏敬心)(?)’이라고나 할까.

 그 뿐 아니다. 교수로 임용되는 일의 지난(至難)함 아니 극난(極難)함이 교수직에 대한 환상이나 편견을 고조시키는 데 분명한 일조를 했다. 보라! 넘쳐나는 교수임용 대기자들, 예비 학자들,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한 채 구체제 속에서 양산되고 있는 대학원생들... 교수직을 아예 뽑지 않거나 뽑더라도 비정년직으로 대충 땜질하고 있는, 교수시장의 급격한 변모양상을 보면, 이런 문제는 갈수록 심화될 것이다. ‘교수직 진입의 어려움’은 ‘교수직에 대한 선망’을 더욱 촉진시킬 것이며, 교수직에 대한 선망은 다시 교수직에 대한 진입 욕구를 증진시킬 것이다. 이런 현실은 유능한 대기자들의 교수직 진입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는 일종의 ‘악순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교수직 혹은 교수들의 본질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은 더욱 왜곡되어 갈 것이다.

 교수도 사람이다. 아니 생활인이다. 뿔을 마주 대고 싸우는 벼랑 위의 산양(山羊)들처럼 공동체 안에서 작은 이해관계로 첨예하게 다투고, 한줌의 이익 때문에 상대방을 음해하기도 한다. 정론을 펴기보다는 하잘 것 없는 입방아로 공동체를 분열시키거나 국가와 사회에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말하자면 대학 바깥의 사람들보다 저급한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반인들은 상아탑의 교수들을 ‘맹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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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고려대 정 아무개 교수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언론보도들은 공통적으로 그가 ‘왕따’ 때문에 자살했다고 한다. 그리고 ‘왕따’의 원인을 지방대학 출신이라는 데서 찾고 있다. 대한민국의 중심인 서울에 있고, 현직 대통령을 배출한 대표적인 메이저 대학들 가운데 하나가 고려대학이다. 한국 대학들의 저급한 관행으로 미루어 고려대학 교수진이라면 대부분 고려대학 출신 이상들만 모여 있을 것이니, 지방대학인 공주대학 출신의 정교수가 흡사 ‘붕어 떼 틈새의 피라미’ 정도로 여겨졌을까? 피라미 정도가 붕어 급인 자신들 사이에서 노니는 ‘꼬락서니’가 눈에 거슬렸을까? 그들은 왜 ‘가련한’ 그를 왕따시킨 걸까?

 사실 한 집단에서 왕따를 당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대다수 구성원들과 다른 행동양태를 갖는 경우,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평균보다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그것들이다. 양자 모두 사회적 병리현상들로서 ‘치유 불가능한 부정적 집단행동’이라는 점에서 사회의 저급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현상들이다. 실제 대부분의 경우 능력이 모자라서 왕따를 당하는 것은 아니다. 외부로부터 이입(移入)된 구성원의 능력이나 자질이 자신들의 평균보다 낮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 당황스런 다수는 공격성을 보이게 된다. 까닭 없이 특정인을 배척하는 행태, 그것이 바로 ‘왕따’다.

 나는 정교수의 능력이나 인간관계를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한국 교수시장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는 ‘카르텔’을 고려해볼 때, 그가 지방대학 출신으로서 고려대학 같은 메이저 대학에 입성했다는 그 사실은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일이다. 그가 능력을 갖추지 않았다면, 무슨 수로 그런 암초들을 피해 ‘교수임용’이라는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었으랴. 아마도 간신히[혹은 너끈히] 접안(接岸)에 성공한 그를 보며, 선배교수들이나 동료들은 ‘어라, 저 놈 봐라!’라고 경악했을 것이다. 그의 능력이나 장점을 인정하기보다는 자신들과 다른 학부 졸업장을 쥐고 있는 그가 자신들과 같은 반열에 오른 것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노비문서’인 학부 졸업장의 원천적인 핸디캡을 시원스레 극복해낸 그에게 박수를 치는 대신, 도리어 새로운 양태의 공격을 가하게 되었으리라.
교수들이 뜻만 합친다면 동료교수 하나쯤 ‘왕따’시키는 일이야 무슨 대수이겠는가. 교수가 관여해야 할 온갖 일들이 ‘왕따 작전의 현장’일 것이니, 그 속에서 갓 40의 여린 그가 감내해야 할 부담은 오죽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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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지식사회를 대표하는 것이 대학이고 교수집단이다. 그러나 ‘실력을 제외한’ 온갖 기준들을 지뢰처럼 묻어놓고 차별을 자행하는 ‘무자비한 집단’이기도 하다. 서울과 지방, 서울과 수도권, 본교와 분교 등은 1차적 차별 기준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들이라고 모두 ‘서울대학’은 아니다. 그 속에도 1류, 2류, 3류가 있다. 서울의 1류라고 모두 같은 것도 아니다. 초일류와 범일류가 있고, 준일류도 있다. 2류와 3류도 같은 방식으로 세분되는 것은 물론이다. 최상의 대학 내에서도 음으로 양으로 차별을 자행하는 기준들이 엄존한다. 이런 차별구조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마음의 흐름은 단 두 갈래다. 가당찮은 우월감과 비참한 열등의식이 그것들이다. 일류대학 구성원들이라 하여 모두 같은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도 묘한 차별이 자행되고, 그에 따르는 ‘상대적 열등감’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우월감과 열등의식을 갖게 하는 상황은 언제든 있을 수 있지만, 지식사회의 그것처럼 국가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도 없다. 우월감도 열등감도 ‘실력에 의한 자부심’과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현재 한국의 지식사회는 나라의 발전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집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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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미국에서의 일이다. 세칭 일류대학 출신의 유학생을 한 사람 만난 적이 있다. 학교에 갔다가 자신보다 먼저 유학 온 어떤 사람을 반갑게 만났더니, 대뜸 “어중이떠중이대학 출신들이 모두 유학이란 걸 오는구나!”라고 말하더란다. 자신이 나온 대학보다 세상에서 말하는 서열이 한 단계 높은 대학을 나왔다고 생각한 그가 자존심이 상했던 듯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었을 거라고 씁쓸하게 웃는 것이었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서 뿔나고,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는 법이다. ‘글로벌 시대’를 고창(高唱)하며 지구촌 곳곳에 나가서도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누가 감히 우리를 넘보랴?’와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못난이들이 바로 우리 지식사회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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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순간,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난 고려대학의 정교수가 아쉬운 것이다. 까짓것 못난이들이 왕따를 시키거나 말거나 굳세게 버티며 ‘노력과 실력’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보여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잘한 참새들의 입방아를 넌지시 웃어주며 학문의 대로(大路)를 뚜벅뚜벅 걸어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2010. 10. 22.

      타쉬켄트의 호텔방에서  
      백규, 통곡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씀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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